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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그 시대, 그 땅의, 그 사람 (시31편 13~15절)
    시편 31편은 다윗왕의 가장 어려운 시대에 기록한 내용인데 이스라엘 최고인물이 다윗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 다윗을 롤 모델로 하고 미국의 링컨 대통령, 한국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리더십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경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가장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다윗이고, 다윗의 일생 중에 가장 어두운 시절 깊은 골짜기와 같은 시절에 기록한 내용이 시편 31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가운데 13절에 「무리들이 비방 하고, 죽이려 덤비고, 사방팔방에서 두려움으로 다윗을 에워싸고 감쌀 때」 다윗이 하는 고백은 「그러하여도 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주께 의지하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15절에 「나의 앞날이 내 시대가 주님 손에 있기 때문에 주님 나를 건져주시고 주님 나를 들어 쓰시고 주님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다윗의 시편 내용입니다. 31편의 배경을 사무엘상 20편에 가서보면 다윗의 일생 중에 최악의 시대, 가장 힘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서 계속 피난을 다닌 지가 십년입니다. 십년동안 떠돌이 생활, 왕따를 당하고 피난 생활을 하는데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니 사울 왕과 같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을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 와중에 쫓고 쫓기고, 도와주고 하는 가운데 다윗이 시편을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 전후좌우에서 덤비니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동서남북 전후좌우가 막히고 에워싸도 하늘문은 열린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내 성적표나 반응을 보고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실패할 수 없는 사랑, 변질이 안 되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으로 다윗을 건져주신다는 게 16절 말씀입니다. 그 시대, 그 지경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응답하는가? 선택하는가? 의지하는가? 가 그 사람의 미래를 결판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에 반드시 심판이 있는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한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시편 90편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고, 팔십이고 강건해 보았자 팔십이지만 그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 신속히 날아간다. 너의 생명이 무엇이냐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이사야 41장10절에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내 시대가 주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월을 아끼기만 하면 안 됩니다. 세월을 내가 얼마나 채워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를 분별하고, 때를 열어가고, 때를 채워가야 됩니다. 영적으로 그 시대를 분별하고 때를 열어가야 됩니다. ‘내 미래가 내 시대가 주님 손에 있사오니’ 저는 이 고백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이 더 험악한 세월, 더 까칠한 세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마음이 엉클어져서 이 패역한 세대가운데 지치고 상해서 마음의 트라우마가 많겠지만 오늘 성경을 보면 다윗은 전혀 트라우마 얘기가 없습니다. ‘나는 상처가 많습니다. 트라우마가 있다’는 말을 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송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 쓰임 받은, 이 시대의 향기로운, 이 시대의 독특한 칼라로, 독특한 멜로디로 여러분만의 고백을, 여러분 나름으로 쓰임 받는, 여러분만의 연주를 여러분만의 노래를 성군다윗처럼 하시고, 이스라엘의 노래잘하는 사람, 영향력 있고 멋지게 쓰임 받은 다윗처럼, 이 시대 고통을 감당하고 이 시대, 내 시대가 주님 손에 있는 줄로 믿고, 의지하고, 주님 손에 꽉 붙들려서 오늘 하루도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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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 [교회회계] 교회 재무제표의 분석과 활용
    201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초대형 복음주의 교회인 ‘수정교회’의 파산을 통해 우리 교계는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교회 도산건수가 줄지 않고, 심지어 과도한 부채를 상환하지 못해 이단단체등에 자산을 매각하는 사례가 계속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본 칼럼의 목적은 교회의 재무제표 분석과 활용방법을 찾아보는 데에 있다. 즉 지금까지 제1-6회 칼럼을 통해 작성된 운용성과표와 재무상태표를 이용, 교회 재산관리에 필요한 분석과 활용방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구체적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무제표 결산자료에 나타난 수치의 의미를 파악하고, 연도별 비교를 통해 추세분석을 한다. 즉 사전에 편성한 예산과 비교해 달성된 수익의 정도를 파악하고, 비용과 자산구입, 부채상환등을 위해 소요된 지출이 목적에 맞추어 적절하게 집행되었는가를 분석한다. 또 연도별 비교를 통해 교회의 재무구조가 건전하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화폐액으로 표시된 재무제표의 자료를 백분율(%)로 수정하여 공통형 재무제표를 작성하고, 각 항목간의 구성비율을 검토한다. 즉 수익합계100을 기준으로 십일조등 각 헌금과 기타수익의 구성비율을 파악하고, 지출의 경우도 예배비, 사례비, 선교비, 건축비, 구제비등 각 항목 비율을 분석해 교회 고유의 목적에 합당한 균형있는 지출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자산도 전체금액에 비교해 토지, 성전, 사택, 차량운반구, 기타자산등의 구성비를 파악해, 불필요한 자산의 구입을 줄이고 효율적 관리가 이루어지게 한다. 셋째, 재무제표의 항목을 분자/분모에 적용해 유동성, 성장성, 수익성, 효율성 등을 파악할 수 있는지표를 산출하고, 재무비율분석을 통한 의사결정을 한다. 유동성은 교회의 현금창출능력과 부채상환능력을 보기 위한 것으로 유동비율의 경우 [유동자산/유동부채]의 식으로 산출한다. 즉 1년 이내에 상환해야 할 유동부채에 비해 이를 갚을 수 있는 유동자산의 크기를 산출, 상환능력을 평가한다. 또한 부채비율은 [부채합계/순자산합계]로 계산, 재무구조의 건전성을 살펴보기 위한 것으로 건축등을 위해 대출을 할 경우 부채수준을 결정하는 중요요소가 된다. 이자보상비율은 통상 [영업이익/이자비용]으로 계산하나, 교회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 영업이익의 구분이 어려우므로 [경상수익/이자비용]으로 산출한다. 경상수익은 총수익에서 특별헌금등 경상적으로 얻기 어려운 수익을 차감한 금액이다. 계산결과는 자산대비 부채가 7:3을 넘지 않도록 요구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기업회계가 5배이상의 이자보상비율을 바람직한 것으로 봄을 고려할 때, 필자는 경상수익 대비 이자비용은 5%, 원리금 균등상환은 10%을 넘지 않도록 추천을 하고 싶다. 즉 성도 1000명의 교회가 건축시 조달할 부채는 10억원, 연간 원리금 상환액 1억원, 이자비용 5000만원의 수준에서 결정할 것을 권면하고 싶다. 성장성은 교회의 총수익과 총자산, 순자산이 전년도에 비교해 어느 정도 변화하였는가를 나타내는 것으로 [당기말총수익-전기말총수익/전기말총수익×100]의 식으로 표시한다. 교회는 예배와 복음전도를 위한 성도의 신앙공동체이다. 또한 그 사명을 위해 노력할 때 부흥성장이 수반될 수 있으므로, 교회지도자는 성장에 대비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여야 한다. 수익성은 총자산 또는 매출액대비 순이익률을 보기 위한 것으로 [순이익/총자산]으로 산출하나, 교회는 이익 개념이 없으므로 유보가치를 적용하였다. 유보가치는 수익-비용=이월금액에 당해연도 조성한 기금과 신규 자산구입액을 합한 것이다. 즉 총자산 또는 순자산 대비 교회 미래 재산가치를 증가시킬 요인이 어느 정도 발생하였는가를 보기 위한 것이다. 효율성은 교회자산이 어느 정도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가를 파악, 추가 시설등이 필요한 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으로 총자산회전률의 경우 [총수익/총자산]으로 산출한다. 또한 기업회계에서는 없으나, 필자가 교회의 특성을 반영해 제시한 방법으로 성도수와 총자산과의 관계, 성도수와 총수익과 관계를 고려해 의사결정을 하는 것도 유익해 보인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상에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즉 부채의 상환은 물론 그 어떤 도산도 없이 부르심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이를 위해서는 교회 지도자가 끊임없이 재무구조를 검토하고 관리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음 호는 교회의 회계감사에 대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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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 [시사칼럼] 아일란 쿠르디
    작년에 터키선교여행을 갔을 때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시리아 사람들이 길거리 골목에서 “우리는 시리아 난민입니다. 도와주세요.(We are Syrian refugee. Please help us.)”라고 적힌 작은 팻말을 들고 구걸하는 장면을 곳곳에서 보았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의하면 수년 째 이어지는 내전으로 1,000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이 중 400만 명 이상이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더 이상 이들을 받아줄 나라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지난 2일 터키 보드룸(Bodrum) 해안에서 터키 민영통신 사진기자 닐류페르 데미르(Nilufer Demir, 29세 여성)가 찍은 사진 한 장이 지구촌 사람들을 경악과 슬픔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파란책 청바지와 붉은색 남방을 입고 모래사장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숨진 채로 발견된 3살짜리 아기 아일란 쿠르디(Aylan Kurdi) 때문입니다. 5살 형과 함께 아빠를 따라 월경(越境)하는 배를 탔다가 보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숨진 꼬마 난민입니다. 100m 떨어진 곳에서 형 갈립(Galib)과 엄마도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인근 국가들은 물론 이슬람 대국인 터키조차 이들을 외면했기에 작은 배에 의지하여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피난처를 찾아 출아시아(exodus from Asia)한 길이었습니다. 외신은 이 사진에 “파도에 쓸려간 인류애(Humanity washed ashore)”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사진을 찍은 데미르의 생각도 같았습니다. “아일란이 핏기 없는 얼굴을 모래에 댄 채 엎드려 있었다. 충격을 받고 슬펐지만 이 비극을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비극이 오늘부터 바뀌기를 바란다.” 아일란의 죽음을 애도하는 세계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한 부호는 사재를 털어 그리스의 섬 하나를 사서 난민들을 수용하겠다는 호기로운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시리아계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이들 난민에 대해 공공연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하던 영국의 캐머런 총리는 여론에 밀려 시리아 난민 15,000명을 받아들일 뜻을 비췄습니다. 독일에 도착한 난민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몰렸는가 하면 지난 7월 독일 방송에 출연해 메르켈 총리에게 직접 망명을 호소했다가 거절당해 울음을 터뜨렸던 팔레스타인 난민 소녀 림(14세)도 최근 거주허가증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일린의 주검이 발견되고 며칠 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럽의 모든 가톨릭 교구에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문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뉴질랜드까지 시리아 난민 200명 수용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리아 난민 수가 급증하면서 한국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입었습니다. 2015년 1월까지 650여 명의 시리아 난민이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했고, 이 중 500여 명이 인도적 체류 비자를 받았습니다. 이번 아일란 사건으로 시리아 난민들의 망명 신청은 더욱 급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이 사태는 단순히 인도주의적 차원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엘 헌팅턴의 말처럼 한국도 바야흐로 문명의 충돌 지점이 되었습니다. 시리아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의 한국 진출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다는 뜻입니다. 왜 독일이나 영국이 중동 지방의 난민들에 대해 그 동안 난색을 표해 왔겠습니까? 무슬림의 확장 속도는 무섭습니다. 난민으로 받아들인 무슬림들이 개종할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종교를 명분으로 어찌 아일란 같은 아이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신중하고 지혜로운 처사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일을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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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 [소강석 칼럼] 산을 오르며, 영혼을 씻으며
    산에 오면 속세를 떠나서 때 묻은 마음이 정결하게 되고 세탁이 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야산이 아니라 깊은 산에 은둔하며 사는 스님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나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종교적 성향으로는 승려가 되었을지 모른다. 물론 나는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을 벗 삼아 살고 싶은 여린 순정이 있다. 아침에 계곡에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고 일어나고 겨울이 되어 눈 덮인 산사의 절경을 바라보면 산 그 자체가 천국처럼 느껴진다. 사람들 틈 속에서 살다보면 문득 공허할 때가 있다. 그때 산을 찾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다보면 번뇌가 쌓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산에만 가면 잠이 절로 온다. 설악산 오색그린야드나 지리산 화엄사 입구에 있는 한화 콘도 같은 곳에서 청명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면 그 날 밤, 아무 잡념도 없이 그냥 툭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너무 바쁘다 보니까 산에 자주 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산을 찾으면 모든 스트레스와 시름을 다 잊어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산은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에덴의 모형이고 그림자이며 원형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면 나의 내면에서는 꼭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처럼 일치가 된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산을 자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가 산에 가면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산에 와서’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죄송합니다 / 너무도 오랜만에 와서 / 마음이 때 묻다 보니 / 몸도 함께 때에 묻혀 / 이리도 오랜만에 왔습니다 / 부끄럽습니다 / 쉴 새 없이 전화하고 / 사람 만나느라 /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삶들이 / 경건한 당신의 품 / 출애굽기의 세계에 와보니 / 수줍기만 한 마음 / 견딜 수 없네요 /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처음에 느꼈던 사랑 / 그 초심을 회복하여 /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산을 자주 찾지 못하고 멀어지면, 나도 때 묻어가는 것은 아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바쁘고 일이 많을수록 산을 자주 찾으려고 한다. 한 때 미국의 40대 남자들이 번듯한 직장을 버리고 산과 사막을 찾아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물질만능시대를 살아가면서 때 묻지 않은 영성과 자연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대부분 군중 속에서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야성의 질주를 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산에 와서 스스로 고독의 숲을 거닐어본다. 때로는 중세 사막의 수도사처럼 나만의 광야에 칩거해 본다. 나는 목회하면서 소원이 있다면 한 달이라도 깊은 산 계곡에 천막을 치고 자연인으로 살고 싶다. 아무도 없이 혼자 밥 해 먹고 빨래하고 시 쓰고 책 보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자연인으로 완전히 빠져버리면 안 되고 다시 활력을 충전 받아 생활 현장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말이다. 아, 오늘도 나는 영혼의 원형인 산을 오른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원초적 에덴의 신비 속을 걷는다. 산을 오르며, 영혼을 씻으며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 속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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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 [성서연구] 우리의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시편 18편 1절)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리는 이유는 최근에 이 땅의 평화가 큰 위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목함 지뢰 도발에 이어 지난 20일에는 경기도 연천 지역에서 고사총과 직사포를 발사함으로써 엄청난 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전면전 위기로 치닫던 남북간의 군사 대결이 고위급 접촉을 통해 극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번 위기 국면을 바라보면서 우리 국민들이 느낀 여러 가지 중의 하나는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번에 여러 가지로 우리를 위협했습니다. 포 부대를 비무장지대 안으로 전진 배치하는가 하면, 상륙용 공기부양정이 대대적으로 출동했습니다. 또한 잠수함정의 7할에 가까운 전력이 동시에 작전에 들어갔고, 우리는 잠수함의 위치를 알지 못해 불안해했습니다. 북한이 과시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수를 알 수 없는 특수부대가 있고, 화학무기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무기는 핵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미 북한이 핵을 보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를 통해 북한은 자신들의 힘을 나름대로 과시했다고 하겠습니다. 고위급 접촉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것은 다행이지만, 그 뒷맛이 떨떠름한 이유는 그들이 보유한 힘이 그대로 남아 앞으로도 언제든지 우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협 앞에서 가지는 결심은 힘을 길러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군사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번에도 미국은 참 고맙게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언제까지나 미국을 의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자체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자주 국방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의 단결력입니다. 이번에 북한이 문제 삼은 것은 우리의 대북방송입니다. 야간에는 개성까지도 들리는 대북방송에 대해 북한은 신경질적 반응을 보여 왔습니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체제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정보가 차단된 북한 사회에 바깥세상 소식이 알려질 때 체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아무리 대한민국에 사회구조적인 갈등과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우리 체제는 북한보다 천 배, 만 배, 월등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에는 마음껏 하나님을 믿고 찬송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북한보다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승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 될 줄 믿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힘을 길러야 할 것을 역설한 대표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안창호 선생님은 일제의 억압 아래서 신음하면서 일본을 비난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보다 소리 없이 힘을 키우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그 분은 단결의 힘, 도덕의 힘, 지식의 힘, 금전의 힘, 인격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을 통해 힘을 키우자고 역설하셨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힘은 어느 정도입니까?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별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런 우리에게 다윗은 좋은 모델이 됩니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약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없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힘>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힘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믿음의 힘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으로 힘을 기르면서, 한편으로 연약한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양한 힘을 길러 수치스러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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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세기적 전도자 이승만
    일편단심 기독교 국가 만들기 위해 부전공으로 신학을 공부하기도 해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한 건국대통령이자 최초의 기독교 통치자이다. 그는 청년 시절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을 졸업한 다음 과격한 체제개혁운동에 참여했다가 실패하여 경무청 감방에 구치되었을 때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조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을 염두에 두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수감생활 중 죄수와 옥리들에게 열성적으로 전도했다. 그 결과 그는 감금 기간에 40여 명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괄목할 만한 전도의 성과를 올렸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나중에 대통령)로 추대된 그는 자기의 소망은 조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하와이를 망명지로 삼고 그 곳에서 역시 약 5,000명의 한인교포를 상대로 기독교 전도와 교육사업을 벌였다. ‘태평양잡지’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이를 통해 한인교포들에게 애국심과 기독교 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한인기독학원’이라는 기독교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포들을 가르치고 또 ‘한인기독교회’라는 교회를 창립하여 그 교회 선교부장으로서 사실상 목회자 역할까지 담당했다. 말하자면 그는 하와이에 거주하는 교포들을 애국적인 기독교인으로 만드는데 초점을 둔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해방 후 1945년 10월 16일 33년만에 귀국한 이승만은 정동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48년 5월 10일 총선 때에 서울 동대문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때 그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오늘 대한민국 국회가 열리게 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윤영 의원님(목사) 기도를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일동이 기도한 후 회무를 진행했다. 곧 의장으로 당선된 후 한번 더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했다.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다. 8월 15일 정부수립식에서는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결심하며 맹세합니다”라고 취임사를 낭독했다. 그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기독교 교세 신장에 도움이 되는 각종 특혜조치를 취했었다. 예를 들면 그는 기독교를 장려하기 위해 성탄절을 국경일로 정하고 군대에 군종제도와 형무소에 형목제도를 도입하였다.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을 세기적 전도자라고 칭하고 싶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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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 [서임중 칼럼] 마지막 남은 한 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다. 인생이란 그 어떤 사람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만사형통의 삶이란 없는 법이다. 며칠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에게는 길거리에 버려진 빵 한 조각도 소중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암 환자에게는 어떤 환경이든, 어떤 상황이든 살아있는 사람이 더 없는 축복임을 뼛속까지 느낀다. 그토록 많은 재산을 다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형제간에 재산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 거부의 뉴스를 보는 역전 앞 걸인에게는 길손님이 건네주는 컵라면 하나가 더 없는 행복이다. 남달리 축복받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집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데 반해 부잣집의 개집만도 못하여 쓰러질 것 같은 판잣집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들려나오는 웃음소리는 왜 사느냐에 대한 질문에 정확한 답을 준다. 그런데 이 모든 인간사의 확실한 것 하나는 나름대로 모든 인간은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줄 하나쯤은 붙잡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권력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돈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쾌락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학문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그 줄이 예술이기도 하다. 그렇게 인간은 그 줄을 놓으면 죽는 줄 알고 그 줄을 붙잡고 살아간다. 위대한 바이올린 연주가 ‘파가니니’의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준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줄 하나가 툭 끊어지고 말았다. 청중들은 깜짝 놀라 숨을 몰아쉬었으나 파가니니는 나머지 3줄로만 조용히 연주를 계속 했다. 그런데 갑자기 줄 하나가 또 툭 끊어졌다. 그래도 파가니니는 거침없이 연주를 계속했다. 신들린 듯 연주를 하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줄이 또 하나 툭 하고 끊어졌을 때 청중들은 두려운 마음마저 가지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파가니니는 멈칫하더니 그의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높이 들고 “한 줄과 파가니니” 하고 말한 후 한 줄로 연주를 계속 했다. 그의 위대성은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났다.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들은 일어서서 박수를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보냈다고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듯 우리가 믿고 있던 인생의 여러 줄들이 하나하나 툭툭 소리를 내면서 끊어져 버리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절망하며 좌절하기도 한다. 더 이상 세상에 의지할 데 없다고, 믿을 데 없다고,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삶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도, 정몽헌 회장도, 최진실 탤런트도 내로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삶을 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줄이 다 끊어진다 할지라도 오히려 더욱 강하게 붙어있는 줄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줄 하나만 있으면 어떤 경우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다. 파가니니처럼 한 줄로 연주를 끝내고 기립박수를 받는 것처럼 그 줄 하나로 인생을 연주하고 삶을 마무리할 때 천군천사가 기립박수를 쳐 주는 것이다. 내 나이 20세 때 폐결핵 3기의 중환자로 사형선고를 받아 나의 인생이라는 줄 하나가 끊어진 것으로 절망했었다. 궁핍 가운데 지쳐 3개월 간 걸식의 생활을 할 때도 나는 또 하나의 나의 인생 줄이 끊어짐을 체험하면서 살 소망마저 잃기도 했었다. 그 뿐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배움의 장에서 희망차게 공부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에 혼자 독학을 하는 고통가운데서 나는 또 하나의 인생 줄이 끊어지는 슬픔과 저림과 아픔으로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그렇게 인생을 살면서 내가 붙들고 있던 줄들이 끊어져 나갈 때 나의 인생이란 이제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목사가 되어 35년을 한결같이 목양하고 은퇴를 하고 난 지금 내 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 둘 멀어지고 낯선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토록 절절했던 사랑의 인간관계의 줄들이 하나하나 끊어져가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괴감에 유구무언으로 스스로를 아파하며 일어설 기력조차 없음을 느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 줄이 다 끊어졌을 때 나에게 남아있는 한 줄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고, 그 한 줄의 위력은 그때서야 더 큰 소망과 생명으로 체험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 한 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줄이다. 나의 힘은 건강도, 돈도, 학벌도, 명예도, 사람도 아니라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세상 줄이 끊어져 나갈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능력으로 나에게 한 줄의 위력을 체험하게 하신다. 바로 그 한 줄, 예수 그리스도의 줄이 나로 하여금 건강과 학벌과 부요와 재물과 세상 모든 것을 다 갖고도 남을 축복의 삶을 경험하게 한다. 그렇다. 아무리 가난하고 병약하다 할지라도, 외롭고 삶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마지막 한 줄이 남아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끊어진 세상 줄 보다 더 힘 있고, 가치 있고, 위력 있는 줄이다. P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할 때 내 품에 안겨 목회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흐느낀 K 목사님, 그리고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도 치료되지 않아 삶을 포기하고 싶었는데 부흥사경회 참석하여 안수 기도를 받고 일어설 줄 모르고 울던 J권사님, 그리고 결혼을 약속하고 행복하게 가정을 설계하던 중 헤어짐의 아픔으로 삶을 포기하려다가 말씀을 듣고 웃음을 찾은 Y 청년. 나는 그들에게 파가니니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 또한 지난 날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하나하나 삶의 줄이 끊어지는 아픔과 절박함을 경험하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한 줄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깨우쳐 주었을 때 그들은 환한 미소로 목사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우리 인생에 마지막 남은 한 줄, 예수 그리스도! 그 줄은 세상 모든 줄보다 강하고 위대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생명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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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성서연구] 인생 최후의 보배(히브리서 8장 1절)
    인생은 덧셈에서 시작하여 뺄셈으로 끝나는 수학 계산과 같습니다. 갓난아기일 때는 0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날마다 덧셈이 이루어집니다. 물건이 더해지고, 지식이 더해지고, 사람이 더해집니다. 30,40대가 되어 급속히 늘던 인생의 자산들은 50대쯤에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다가 50후반부가 되면 서서히 뺄셈이 진행되어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집니다.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알던 지식도 사라지고, 몸이 약해지면서 만남도 줄어들고, 알던 이들이 한 명씩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덧셈은 대개 기쁨을 가져오지만, 뺄셈은 매우 큰 아픔을 가져옵니다. 80세가 넘어가면 남은 게 별로 없게 됩니다. 요양병원에 가보면 어르신들에게 남은 것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됩니다. 약간의 음료수, 화장지, 기저귀, 최소한의 몇 가지 물품뿐입니다. 찾아오는 사람도 점점 줄어듭니다. 이러다 보니 인생의 마지막까지 무엇을 끝까지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릅니다. 며칠 전 한 요양병원에 계신 올해 91세의 어르신을 찾아뵈었습니다. 한 동안 뵙지 못했기에 그 동안 많이 악화되신 것은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만면에 화색이 가득했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매일 똑같지요!”라고 하시면서 일상을 설명하셨습니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셔서 한 시간 기도부터 드리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엔 병실 옥상에 있는 정원에 가셔서 찬송가를 스무 곡 남짓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그 찬송가들의 가사가 다 기억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운동을 하시는데, 팔굽혀펴기를 15회 정도 하시고, 산책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외엔 찾아오는 가족들을 만나시는 일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그 분의 일상이었습니다. 그 분은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남기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욕망 따위는 다 버리셨습니다. 그 분의 마음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기도하는 마음, 가족에 대한 사랑, 그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몇 가지 노력들이었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추한 것이 없었습니다. 인생의 뺄셈이 성공적이었습니다. 종종 추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움켜쥔 이들과 대조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끄트머리에도 놓지 않고 붙잡고자 하시는 보화는 무엇입니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8장 1절은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빼버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최후까지 남긴다고 할 때,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있어야 할 분은 이러한 대제사장,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애 마지막에 우리에게 계셔야 할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다른 것을 다 빼더라도 절대 예수님을 빼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인생 촤후의 보배로 삼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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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시사칼럼] EBE 그리고 케플러-452b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훈택 교수가 신약 수업 시간에 외계생명체가 있는지 성경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일이 있었습니다. 선뜻 대답하는 이가 없는 가운데 교수님의 답변은 만일 외계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도 선교 대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손 들까 망설였는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구나 하고 내심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미확인비행물체’라는 뜻의 ‘유에프오’(UFO, Unidentified Flying Object)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대 미국입니다. 미 공군 조사단장인 에드워드 J. 러펠트(Edward J. Ruppelt)가 그 효시(嚆矢)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47년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웰(Roswell)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추락했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특히 그 속에 타고 있었다는 외계의 생명체에 쏠렸습니다. 1982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이티’(E.T., Extra Terrestrial)가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외계의 지적생명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10년 후인 1993년 미국 폭스 TV는 야심찬 기획물 ‘엑스 파일’(X-files)을 내보냅니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과학지식에 의해 쭈글쭈글하고 못생겼던 E.T.는 외계의 생물학적 존재 ‘EBE’(Extraterrestrial Biological Entity)로 명명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낯선 방문자들에 대한 관심은 그들이 과연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아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천체가 지구 외에 또 존재할까 하는 궁금증으로 발전합니다. 이번에도 영화가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2012년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와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2014년 ‘인터스텔라(Inter-stella)’가 그러합니다. 전자는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Where are they from)를, 후자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가?’(Where are we going to?)라는 문제를 다뤘습니다. 이론적인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2011년 2월 19일 미국항공우주국(NASA) 케플러 우주망원경 프로젝트 책임자인 윌리엄 보루키(William Borucki) 박사는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회의에서 은하계에 500억 개의 행성이 존재하며, 이 중 최소 5억 개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골디록스 존(Goldilocks Zone)’에 해당한다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2015년 7월 23일 역시 같은 연구팀은 지구로부터 1,400광년 떨어진 항성 ‘케플러-452’와 그 주변을 공전하는 ‘케플러-452b’를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항성(恒星) 케플러-452는 태양과 비슷한 온도에 10% 더 길고 20% 더 밝으며, 행성(行星) 케플러-452b는 지구보다 1.6배 길지만 공전주기는 368일로 거의 같고 무엇보다도 지구-태양 간 거리와 비슷하게 공전하고 있다 합니다. 문제는 현재 과학기술 수준으로 이 별까지 가는데 2,580만 년이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들보다 훨씬 더 멀리 있는 별들을 너무나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특히 욥기와 아모스가 거론하는(욥 9:9, 38:31; 암 5:8) 묘성(昴星)과 삼성(三星)이 그러합니다. 겨울철 남쪽 하늘 황소자리에서 관측되는 7개의 별을 일찍부터 ‘묘성’으로, 역시 겨울철 별자리인 오리온자리에서 볼 수 있는 세쌍둥이 같은 별을 ‘삼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묘성은 실은 수천 개의 별들이 뭉쳐 있는 성단(星團)이요, 삼성은 실은 서로 일직선상에 없는 전혀 무관한 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욥 38:31)라고 표현합니다. 현대과학을 앞서가는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알면 알수록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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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 [은혜의 말씀] 절반의 감사 (합3:16~19)
    절반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유태인들이 강한 이유는 절기를 잘 지켜서 그렇다고 봅니다. 절기라고 하는 것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서 음식을 먹고 한 밥상에 둘러앉아 부모님,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그때에 가정교육이 이루어지고 만남과 나눔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설날을 맞이해서 가족들이 다 모이고 떡국을 먹고 세배를 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명절, 절기를 지키면서 문화가 만들어지고 가정의 대화가 풍성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절기를 중심으로 역사가 흘러갑니다. 유태인들의 절기는 특별히 ‘맥추절이다’ ‘유월절이다’ 할 때 그 절기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곡식을 추수해서 감사하는 의미가 있고, 두 번째는 역사적인 사건을, 위기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도우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최고의 감사가 있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에 대한 예표를, 미리 앞서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상징하는 것이 절기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 하박국서를 통해서 이 맥추절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서는 주제가 간단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것들이 득세하고, 왜 세상의 불법이 판을 치고 정의로운 사람, 공의로운 사람은 늘 고난을 당하느냐?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고 대적들이 흥왕하는 것을 이렇게 허락하실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당할 때 이유 없는 환란 때문에 왜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나쁜 사람들은 잘 되느냐? 그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께 질문하고 도전 하는 것이 하박국서입니다. 이 하박국 선지자에게 결론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이 본문입니다. 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에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그런 환난의 때, 위기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게 아니고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합3:17) 없으며, 못하며가 다섯 번이 나옵니다. 나무에 열매는 없고, 외양간에 소는 없고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18절에 가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절「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오늘 절대감사, 선불감사, 평생감사, 무조건감사, 감사할 일이 있어서 감사하는 사람은 조건적인 사람이고 그리 아니해도 일단감사, 평생 감사하는 사람은 인생이 happy day로 흘러갈 것입니다. 조건 따지고 상황 따져서 하는 사람은 늘 일희일비하고, 마음의 조울증을 겪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의 원천이고 내 최고의 백그라운드, 내 최고의 후원처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같은 시험을 지나고 죽을 것만 같은 순간들을 헤쳐 나가면서 비로소 노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비로소 입술이 열리는 것입니다. 고민거리가, 기도제목이, 근심거리가, 간증거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맥추절을 지나면서 오히려 절반의 타작도 안 되는, 건더기가 없는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 할 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와도 감당을 하고, 감수하기 때문에 그 삶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님 밑에 있는 자녀들은 행복한 것이고, 이 시대의 고난을 돌파하고 pass of 해서 절반의 감사일지라도 오히려 그때야 말로 내게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나오는 때입니다. 느낌을 아니까, 고통의 맛을 아니까, 쓴맛을 겪어본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맥추절에 일 년의 절반을 지나면서, 성도들의 마인드가, 성도들의 스피릿이, 성도들의 스타일이 새로워져서, 불평과 원망과 짜증의 삶을 청산하고, 환난과 빚지고,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것들을 통과한 후 승승장구해서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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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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