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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칼럼] 믿음으로 살리라(2) - 과정
    믿음으로 산다는 말에는 믿을 만한 진리가 있어야 하며 진리를 알아보고 믿기까지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먼저, 믿음은 무조건 생기지 않는다. 믿을 만해야 믿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사기일 수 있으며 맞더라도 내 자유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때도 상대방이 믿을 만한 말과 믿을 만한 행동과 믿을만한 실력과 믿을 만한 인격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가능하다. 이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부족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까지 가기 위해서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믿기만 하면 그 즉시 다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말을 알아듣는 어린 아이에게 “너 믿기만 하면 금세 힘 있고 부유하고 똑똑한 어른이 된다. 믿을래?” 그러면 이 아이는 손해될 것이 없기에 “예, 믿겠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믿음이 금세 어린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 수 있는가? 감나무 씨앗이 믿는다고 금세 큰 나무가 되어 감이 주렁주렁 열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무엇인가에 열매가 생기려면 씨를 뿌리고 어려움을 겪어내며 땀과 노력을 기울이며 세월을 보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법칙이다. 이 하나님의 법칙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수많은 단계가 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고 지배력을 갖기 위해 세상의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에고의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어려운 사건과 힘든 환경 속에서 상처를 받아 거짓된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죄책감을 느끼고 두려워하며 절망하게 된다. 그리고 좀 더 힘이 있으면 화를 내며 원망하고 비난하며 증오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마음의 상처를 청소하고 치료하는 상담이라는 세계를 들어간다. 이 심리적 치유의 단계는 감정적 노폐물을 제거해서 밝고 맑은 본래의 감정을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미워했던 수많은 마음의 존재와 화해하도록 만들어준다. 이 과정을 거치면 다시 에고가 없어지는 '본래 나‘를 만나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랑이며, 내가 기쁨이며, 내가 자유인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나로 살면서 돈을 벌고, 건물을 사고,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사회에 기여를 하며 자신의 삶을 살게 되게 된다. 여기까지 최선의 삶을 살고 난 다음에 결국에는 절망감을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육체에 관계된 것이기에 아무리 부유해져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 후의 삶. 내 영혼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영적 진리를 찾기 시작하는데 까지 오게 된다. 여기부터는 사람의 의지로 갈 수 없는 길이다.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를 믿어야 하는가? 또 그 영적진리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 진리를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내 영혼을 살리는 영적진리는 영적인 눈이 떠지고 하나님께서 안에서부터 빛을 비추셔야 가능한 것이다. 영적진리를 알아보는 눈은 삶에서 진리를 선택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태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두려워하고 비난하고 소유욕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어찌 영적인 진리를 알아보겠는가? 삶에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다. 선을 선택할 것인가? 악을 선택할 것인가? 성공을 추구하는 당신의 눈에 늘 실패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는가? 괜찮게 보이는가? 미련하게 보이는가? 지배욕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신이 무시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고마운 말로 받아들이는가? 화가 나는가? 거짓말 한 마디만 하면 1억 원이 생긴다면 당신은 거짓을 택할 것인가? 1억을 택할 것인가? 선택하는 상황에서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지배욕과 거짓을 옹호하는 쪽을 선택하면 결코 영적진리를 알아볼 수도, 받아들일 수도,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을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보이지 않은 수많은 과정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선을 행하며 오랫동안 이 과정을 반복할 때 더 명확한 진리를 알아보고 점점 더 믿음으로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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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성경인물탐구] 초대교회의 지도자 베드로(4)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내 양을 치라'는 분부를 받고 초대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수제자로서 사도들과 함께 초대교회의 선교 사역을 주도하였으며 베드로 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다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절기 때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갑자기 부는 강하고 급한 바람과 함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며 성령이 무리에게 강림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는데, 제자들의 방언에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기 자신들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증거 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자들을 조롱하며 말하기를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그러한 현상을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베드로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종말적 사건, 즉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속의 성취 결과로 이루어졌음도 밝혔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며,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하나님이 구약 선지자들로 예언하신 메시야였으며,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심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해석은 성령 충만을 받음으로써 깨달은 진리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과 지혜로 충만함을 입음으로써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획과 경륜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임한 후에 제자들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한 가지는 예수께서 행하시던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의 능력으로 행할 수 없는 기사와 이적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은 베드로의 영적 능력을 의지하여 치유 받으려고 몰려왔습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에게 온 자들은 모두가 치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이 사도들의 주된 임무는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병 고침의 능력은 복음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즉 영적인 치유와 구원을 육체의 구원과 치유로 나타내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행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베드로는 그와 같이 큰 역사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의 능력을 의지하여 육신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 사역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됨으로써 사단의 세력이 약화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됨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은사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자를 치유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구하여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음으로써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할 뿐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아야 함을 아시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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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은혜의 말씀] 사사시대의 구원역사 (삿3:12~17)
    사사기를 통하여서 그 시대의 어떤 닮은꼴을 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시대의 아들이고, 그 시대가 사람을 낳고 사람이 시대를 열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대와 역사, 인물을 통해서 배워야 됩니다. 역사는 반복 되는데 오늘 성경에 나타나는 이 사사시대가 대한민국 교회와 흡사합니다. 사사시대는 아주 혼란한 시대입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구원의 감격을 망각한 시대, 신앙의 첫사랑이 식은 시대여서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그때그때 14명의 사사가 나타나면서 그저 한 사사는 몇 년짜리, 한 사사는 6년짜리, 한 사사는 20년짜리 등 때에 따라 선지자 사사를 세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가는 아주 혼란한 시대였고, 믿음대로 이름대로 직분대로 살지 못하던 시대가 이 사사시대입니다. 여러분 세월이 흘러가면 왜 사람의 가슴에 애정이 식어가고 열정이 약해질까요? 그것이 사사시대의 제일 고민이었습니다. 사사시대의 혼란함과 어려운 상황을 보면서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사사시대의 가장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씀이 이런 말씀입니다. “또, 또, 또,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 범죄하고 멀리 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지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 가정에도 자녀들이 태어나고 다음 세대가 나타나는데 다음세대에 신앙의 전승이 잘 안되면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신앙을 가지는 엉뚱한 세대가 태어나서 신앙이 천대까지 이어지는 축복의 계승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은 무엇이고 저주는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환란은 벗어나게 하옵시고 고통의 때는 감해 주옵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그것이 축복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야성을 유지하고 들판에서 광야에서 빈들에서 하나님 음성을 듣고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처럼 해야 합니다. 내가 도시 한 복판에 살아가면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아주 모던하게 살아가면서도, 첫사랑을 회복하고, 풀뿌리 근성, 야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헝그리 정신을 간직하고, 도전의식·위기의식·비전을, 개척과 개척정신, 도전정신, 모험정신, 창의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나가야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사사시대와 같이 방분하게 급속도로 마음이 약해져 갑니다. 상처를 받고 시험이 드는 데는 아주 예민한데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하나님 앞에 끈기 있게 엎드려서 나가는 부분은 자꾸 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와 한국교회가 비슷하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대가 혼란 할수록, 이 시대가 어려울수록 성도들은 더 주님의 품을 파고들어야 됩니다. 이 사사 저 사사가 나타나지만 내 삶을 온전히 주장하시고 다스리시고 나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어두운 시대에 영적인 야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감격을, 구원의 감격을, 첫사랑의 감동을 유지하면서, 주님 앞에서 예쁘게 아름답게 향기롭게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시고 이 시대에 쓰임 받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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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교회회계] 소규모&개척교회의 재정과 회계 : 단식부기의 응용
    20년전, 박사과정 재학 중 도쿄의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다. 담임목사님께서 불쑥 회계에 관한 질문을 해 오셨다. 당황한 기색으로 재무상태를 설명했지만,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목사님은 매주 당장 들어오는 헌금수입과 지출을 어떻게 관리하고, 회계장부에 표시할 것인가가 궁금했는데, 엉뚱하게 재무상태에서 답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본 칼럼(제1-8회)은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구체적인 적용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안)'에 따라 적어도 1년 예산규모가 10억원이상의 교회는 복식부기에 따른 운영성과표와 재무상태표를 작성하도록 하고, 그에 필요한 매뉴얼을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을 보면, 모든 교회에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를 적용하는 것이 아직 시기상조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개척교회는 물론, 상당수의 소규모교회가 복식부기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 이를 이해할 만한 회계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 제9회 칼럼은 복식부기의 적용은 계속해서 확대해 가되, 개척교회와 예산규모 2억원 미만의 소규모교회에게는 현실을 감안하여 예외적으로 단식부기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회계처리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즉 소규모교회에게는 단식부기에 의한 운영성과표(자금수지계산서)의 작성을 인정하되, 다음과 같이 별도로 자산과 부채의 변화를 표시한 재산목록을 작성하고 교회 내부적으로 감사를 실시할 것을 추천한다. 첫째, 단식부기에 기초한 운영성과표는 차변과 대변 분개의 구분없이, 현금의 수입과 지출을 흐름을 집계하여 표시한다. 즉 [전기이월+수입=지출+차기이월]의 형식으로 발생주의가 아닌 현금주의 관점에서 작성한다. 특히 전년도에 세운 예산과 결산을 비교해, 교회 재정이 계획에 맞추어 적정하게 운영 집행되었는지를 검토한다. 둘째, 교회 개척초기에 투하된 자산과 부채 금액을 재산목록에 작성하고, 또 매년말 결산시점에 전년대비 자산과 부채의 증감을 표시하여, 교회의 재산가치가 어떻게 변동되었는가를 나타내도록 한다. 즉 [자산=부채+순자산]의 형식으로 재산목록을 작성해, 효율적인 재정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리고 교회의 사정과 형편에 맞추어 감사인을 선임해 내부적으로 감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고, 회계감사를 실시한다. 단식부기의 장점은 적용이 간단하다는 점에 있다. 회계교육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적용이 가능한 특징이 있다. 또 최근에는 다양한 전산회계 교회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어, 비용이 발생하기는 하나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아직 대부분의 전산 교회회계 프로그램이 단식부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입과 지출을 집계한 결산은 가능하나, 복식부기에서 제시한 자산부채의 관리, 공정가치 도입 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여전히 갖고 있다. 복식부기의 적용이 어려운 소규모교회에게는 단식부기 사용이 인정되어야 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식부기의 지속적인 확대는 필요하다. 또 이를 위해서는 차변/대변 복식부기의 구조와 회계처리절차를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회계교육이 요청되며, 또 교단과 노회, 성시화 단체등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다음호는 교회회계와 관련한 내부통제제도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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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시사칼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19세기 말 인도에서 라마누잔(Sriniv?sa Ramanujan, 1887~1920)이라 이름 붙여진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가난했지만 총명했던 소년은 15세 우연히 친구가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의 기초 결과 개요(A Synopsis of Elementary Results in Pure and Applied Mathematics)』라는 책 안에 있는 6천 개 가까운 정리를 독학으로 증명해 내었습니다. 이 노트 때문에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나중에는 마드라스 우체국 회계과에 근무하면서 수학 연구를 계속했다고 합니다. 캐임브리지 대학의 촉망 받는 교수 하디(Godfrey Harold Hardy, 1877~1947)는 그를 초청해 같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놀라운 수학적 결과물들을 내놓았고 라마누잔은 영국 왕립학회 회원이 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하지만 일평생 수학 외에는 아무 것도 몰랐던 라마누잔은 향수병과 결핵병으로 32세의 나이에 요절합니다. 라마누잔이 죽은 지 2년 후인 1922년, 서울에서 또 한 명의 수학 천재가 태어났습니다. 성장하여 경성제대 물리학과를 들어가 수석으로 졸업한 25세의 청년 이임학(1922~2005)은 공교롭게도 하디(G. H. Hardy)가 사망한 해인 1947년 남대문시장에서 우연히 미군이 버리고 간 미국 수학학회지 한 권을 발견합니다. 책 속에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막스 초른(Max August Zorn, 1906~1993)의 논문이 실려 있었는데, 거기에 초른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토로한 부분을 풀어서 보내자 미국 학회가 발칵 뒤집어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런 인연으로 결국 미주(美州)로 건너간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딴 리군이론(Lee Group Theory)을 정립하는 등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인’으로, 그리고 10월 말 언론이 그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할 때까지 라마누잔 스토리에 맞먹는 그의 기화(奇話)는 오랜 세월 초야에 묻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임학이 ‘리군이론’을 완성하기 직전인 1966년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장차 수학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릴 그리고리 페렐만(Grigori Y. Perelman)이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발군의 수학적 재능을 보여 스탠포드나 프린스턴 등 유수의 대학들이 교수로 청했으나 모두 거절하고 고향의 수학연구소(Steklove Institute of Mathematics)에 남아 연구하던 그는 2002년 11월 36세의 나이에 한 인터넷 저널에 논문을 하나 올림으로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넷에 등장한 그 논문은 오랫동안 수학 7대 난제 중 하나로 불린 푸앵카레 추측(Poincare conjecture)을 증명해 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보여준 페렐만의 행적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현상금 100만 달러를 거절했을 뿐 아니라 유럽학회상으로부터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상을 거부하고 학술원 추대마저 거절하며 철저히 은둔자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는 지금도 고향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노모(老母)의 연금으로 생활하며 우주의 충돌이론 연구에 여념이 없다고 합니다. 21세기에 수학이 주식이나 통계 심지어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쓰이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 뒤안길에는 이처럼 그저 수학이 좋아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학을 연구한 많은 천재들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도 이럴진대 교회는 어떻겠습니까? 성경 속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과 교회를 위해 섬기고 헌신하고 희생한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썼습니다(히 11:38). 이들이 흘린 땀과 피 위에 교회는 서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은 세속적 명성과 영광뿐 아니라 교회에서마저 이름을 내려 하고 영예를 추구하는 성향을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어느덧 결실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 많은 것을 가졌으나 주 이외에는 배설물로 여겼던(빌 3:8) 사도의 고요한 외침이 이 가을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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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소강석 칼럼] 산이 허락한 자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언제부턴가 천왕봉을 한 번 정복하고 싶었다. 그런데 최근에 천왕봉을 등정할 기회가 있었다. 해발 1653m인 장터목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천왕봉 1915m를 향해 가서 일출을 보는 코스였다. 천왕봉은 남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었기 때문에 너무 기대가 되고 설렜다. 마침내 천왕봉 등정이 시작되었다. 가을 지리산은 참 아름다웠다.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지리산은 가을 풍경을 물씬물씬 자아내며 만추의 정경을 그려주고 있었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가을숲 나무들의 모습이 나의 남은 여생을 연상하게 해 주었다. 그래서 잠시 이런 시상에 잠기기도 했다. “초봄부터 그리도 사랑을 속삭이더니 / 가을엔 벌써 늙었다고 수줍음을 타네요 참 아름답게도 늙었어요 / 나는 그래도 늙어가는 그대들이 좋아 / 그대들과 함께 늙고 싶어 / 나는 지리산에 살어리랏다.” 마침내 장터목에 도착 했다. 1653m 고지를 4시간 동안 오른 것이다. 거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천왕봉을 오른다고 생각하니 저녁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몸은 피곤하고 노곤하지만 천왕봉을 정복한다는 게 꿈 같았다. 그렇게 잠을 설치는 중에 산악인 엄홍길님의 말이 생각났다. “산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오르는 것이 아니고 산이 허락해야만 오를 수 있다.”그 분의 말에 의하면 천왕봉이라는 정상이 내게 허락해야 나도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찌 산이 내게 허락을 하겠는가? 그것은 어디까지나 엄홍길님의 문학적인 표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겸허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높은 산은 자기의 힘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허락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산은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시를 쓸 때 산은 하나님의 품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이미지화할 때가 많이 있다.“죄송합니다 / 너무도 오랜만에 와서 / 마음이 때 묻다 보니 / 몸도 함께 때에 묻혀 / 이리도 오랜만에 왔습니다 / 부끄럽습니다 / 쉴 새 없이 전화하고 / 사람 만나느라 /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삶들이 / 경건한 당신의 품 / 출애굽의 세계에 와보니 / 수줍기만 한 마음 / 견딜 수 없네요 /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처음에 느꼈던 사랑 / 그 초심을 회복하여 /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이렇게 볼 때 산이 허락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단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천왕봉을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마침내 새벽에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마침내 천왕봉에 발자국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출을 알리는 여명의 빛이 한동안 비취더니 마침내 붉은 태양이 둥근 쟁반의 모습으로 저 동쪽에서 떠올랐다. 차마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신기해서 계속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간순간 눈을 감으며 새에덴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새에덴 성도들의 가슴에도 의의 태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아침에 희망차게 떠오르게 하옵소서. 어두운 가슴일수록 더 솟구치는 의지와 희망으로 떠오르게 하옵소서.” 나의 가슴은 호렙산 부흥회가 연속되었다. 사진을 찍고 산청 쪽으로 내려오는데 내려오는 길은 정말 힘들었다. 급경사인 돌길인데다가 젊었을 때 눈구덩이에서 너무 오래 무릎을 꿇었던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무릎 꿇을 때 고통스러웠던 십자인대와 그 속 힘줄에 통증이 왔던 것이다. 그럴수록 더 깊이 깨달아졌던 것은 산이 허락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로 천왕봉이란 정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 아니, 내 인생의 어떠한 고지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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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15-11-05
  • [성서연구] 사흘길의 의미(출애굽기 15장 22-27절)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감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흘길을 걸었지만 물을 얻지 못했고, 마라에서 물을 얻었으나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홍해에서는 넘치는 물로 인해 위기를 만났던 그들이 이번에는 물이 없어 위기를 만났으니,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어려운 사태가 발생할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 후엔 책임 추궁을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없는 상황에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모세 탓일까요? 여기서 매우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탓!>이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물 없는 수르 광야로 들어간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면 <하나님의 탓!>이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도 자신의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탓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족하고 판단이 모자란 분이실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수가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수르 광야에 물이 없는 줄을 모르셔서 그리로 인도하신 게 아닙니다. 그들을 수르 광야로 가게 하신 이유는 그들을 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훈련이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라의 쓴 물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한 나무를 집어넣음으로써 단물로 바뀌었습니다. 물이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단물로 바꾸는 데 사용된 나무도 마라의 쓴물 곁에 있었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 해결책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엘림으로 이끄셨는데, 그 곳에는 물 샘이 열 두 개나 있었고, 종려나무가 일흔 그루나 있어 마음껏 지친 몸을 쉬게 하셨습니다. 엘림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이벤트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처음에는 물 없는 광야로 가는 것처럼 힘들게 여겨집니다. 그 때는 인도를 받는 게 아니라 <방황>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따르면 반드시 쓴물이 단물로 바뀌고, 엘림에 도달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관건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훈련하고자 그들을 수르 광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25절 중간부터 당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말씀의 인도대로 순종하면 질병이 내리지 않고, 하나님의 치료가 함께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지금 물 없이 사흘길을 걷는 어려운 처지에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말씀대로 가십시오. 결코 다른 길을 모색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의 시험을 받으시는 중입니다. 계속 가면 반드시 엘림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모토대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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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언제인가?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고 국호는 자랑스럽고 당당한 대한민국 최근 역사교과서 문제로 논란이 많다. 잘못된 역사는 다소 진통을 겪을지라도 기필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일에 관해 기술하고자 한다. 극히 당연한 것인데 왜 문제가 되고 논란이 많은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주저없이 단언하거니와 1948년 8월 15일이다. 개개인에게 태어난 생일이 있듯이 나라마다 그 나라가 태어난 건국일이 있다. 필자는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건국일이 없는 나라가 없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우리나라에는 건국일이 없다. 건국일이 엄연히 있는데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가 없고 이 날을 기념하지도 않는다. 왜 그런가. 건국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고 그것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일각에서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한 것이 건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1945년의 광복이 곧 건국이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1919년 삼일운동 때에 독립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건국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단기 원년에 단군이 건국했는데 다 무슨 소리냐,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건국에는 4개 성립요건, 즉 영토가 있어야 하고, 국민이 있어야 하고, 정부의 주권행사가 가능해야 하고, 국제적인 승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상해임시정부는 건국 4개 기본요건 중 한가지도 해당되는 것이 없다. 상해임시정부는 건국의 토대를 마련하는 중대한 조직이었고 대한민국 정부의 정신적인 뿌리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건국은 아니었다. 8.15광복도 건국일수는 없다.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지만 곧이어 미국의 군정하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독립이라고 할수 없고 따라서 건국이라고 볼 수 없었다. 또 어떤 이들은 단군개국설을 주장하지만 단군은 선화적인 인물이지 실존인물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단국개국설로써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할 때에 헌법기초위원회에서 국호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양했다. 어떤 이는 “고려공화국으로 하자” 어떤 이는 “조선공화국으로 하자” 어떤 이는 “한국으로 하자” 그때 이승만은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했다. 표결 결과는 대한민국이 17표, 고려공화국이 7표, 조선공화국이 2표, 한국이 1표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채택되었다. 국회 본회의에서는 찬성 163표, 반대 2표의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확정되었다. 재차 말하거니와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고 국호는 자랑스럽게도 대한민국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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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목회자 칼럼] ‘See you again in Heaven (2)’
    3년 전 교회 홈페이지 목양칼럼에 ‘See you again in Heaven’란 제목으로 글을 쓴바 있다. 오늘 같은 제목으로 다시 글을 올릴 사연이 생겼다. ‘See you again in Heaven (2)’, 故 문승희 집사를 그리워하며.... 며칠 전에 남편 되는 하진 장로께서 집안을 정리하던 중 아내의 귀한 유품을 발견했다. 하늘나라 가기 얼마 전에 남편과 두 딸들에게 쓴 편지인데 용기 부족에서인지 직접 전달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다. 고인의 편지 내용이 남편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나 보다. 마침 어제가 소천 3주년이여서 하 장로는 몇몇 분들에게 그 편지내용을 띄웠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남편들, 아내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에게 울림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편지내용을 나누고 싶다. “나의 남편 하진 집사.... 성질 못된 나 만나서 고생이 많았어요. 철이 들면 사랑하며 살 줄 알았는데 사랑도 하기 전에 병이 들어 버렸네요. 끝까지 나를 지켜줘서 고맙고 나를 용서해 주길 바랍니다. 웃음 잃지 말고 변함없이 따뜻한 아빠가 되어 줄 거라 믿어요. 사랑합니다.” “늘 자랑스런 유빈... 유빈아! 엄마는 너로 인해 많이 행복했단다. 멋진 딸로 자라줘서 고맙고 이 땅의 여성 지도자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치는 사람이 되길 늘 기도해 왔다. 하나님 품 떠나지 말고 건강 잘 지키고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사랑한다. 유빈아, 사랑한다...” “보석 딸 유정... 너무도 소중한 내 딸 유정아, 힘든 시간을 함께 견더줘서 고맙다. 하나님 품 안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너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큰 뜻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앞으로 멋진 삶 살아가길 바란다. 건강 잘 챙기고 생활 습관을 바르게 해라. 늘 행복하게 살길 엄마는 바란다. 사랑한다. 우리 유정... 사랑한다”. 고인은 학구열이 대단해서 30대 중반에 사회복지를 공부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 수료를 목전에 두고 있을 때 뜻밖에 난소암에 걸린 것이다. 그 이후 3년의 투병 끝에 2012년 10월 15일(월) 4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치유를 위해서 본인과 가족과 교회는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해 나왔던가! 그때를 회상할 때에 두 가지가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는, 고인께서 건강했을 때보다 투병가운데서 더 좋은 아내,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딸,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얼굴에 늘 환한 미소이다. 그런 고인에게 담임목사가 붙여준 별명이 있다. “문 집사님은 우리 교회의 오드리 헵번이야”.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천국으로 보내고 난 그 다음날 하진 집사가 나에게 들려준 고백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목사님, 문 집사와의 결혼생활은 21년입니다. 그러나 지난 20일 동안 병실에서 아내와 함께 있으면서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고 싶네요. 그러면 우리의 결혼생활은 41년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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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 [교회법률상식] 굴화리와 천상리는 남울산노회 지역(1)
    - 양 노회의 논리적인 주장으로는 판단기준이 될 수 없어 - 오직 노회분립청원서와 총회의 분립결의 및 촬요로 판단해야 [질의] 2007년에 총회의 울산노회 분립위원회(위원장 최재우 목사)가 울산노회를 분립할 때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로, 남쪽은 남울산노회로 하되 양산시찰은 남울산노회 소속으로 하는 내용의 분립을 합의결의하고 총회에 보고하여 총회가 보고를 받음으로 울산노회 분립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부터 노회분립에 관련한 지역 경계에 대하여 울산노회는 태화강 중심이 아니고 시찰별 중심으로 분립되었다고 주장하고 남울산노회는 시찰별 중심이 아니고 태화강을 경계로 분립되었다고 주장하여 갈등 중에 있습니다. 이에 관련한 참고서류로 ① 울산노회 분립에 관계된 총회 제91회, 92회 보고서 ② 분립전 울산노회가 총회에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 ③ 분립 전의 울산노회 제52, 53, 54회 촬요 ④ 울산노회의 주장 내용 ⑤ 남울산노회의 주장 내용 ⑥ 김호환 목사의 사실증명서 등을 첨부하여 노회분립과 관련하여 태화강 남쪽에 위치한 굴화리와 천상리가 법적으로 어느 노회의 소속 지역인지 법리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울산 H목사) [답] 질의자가 합동측 목사이므로 합동 헌법으로 답한다. 1. 양 노회의 주장에 대하여 울산노회는 태화강을 경계로 분립한 것이 아니라 시찰단위로 경계를 정하여 동부시찰, 북부시찰, 중부시찰은 울산노회로, 남부시찰, 서부시찰, 동해시찰, 양산시찰은 남울산노회로 분립되었다는 주장이고, 남울산노회는 시찰단위로 분립한 것이 아니라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 남쪽은 남울산노회로 분립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상과 같은 양 노회의 주장은 서로 상반된 주장으로서 법리적인 면이라기보다는 논리적인 면이므로 노회분립의 판단에 대한 참고자료일 수는 있으나 법리적인 판단기준이 될 수는 없다. 2. 노회 촬요와 김호환 목사 사실증명에 대하여 분립 전 울산노회의 제52회의 촬요는 “노회를 분립하기로 결의한다.”는 내용과 분립위원회를 조직한 내용뿐이어서 경계에 대한 언급은 없고, 제53회의 촬요는 “노회 분립 기준”을“태화강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누기로 하다.”는 결의와 “노회명”은“울산노회(북쪽), 울산남노회(남쪽)으로” 결의한 내용(촬요 p.50)으로 노회분립의 경계기준에 대하여 태화강을 경계로 한다는 법리적 기준을 결의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제54회 촬요는 노회분립위원회의 구성으로서 “위원장: 서유성 목사, 서기: 장활욱 목사, 강북측 위원: 목사 - 권주식, 김형백, 정연철, 양성태, 장로 - 강희열, 조경택, 김용길, 강남측: 목사- 안종택, 이성택, 배광식, 김신현, 장로- 이정섭, 이상용, 전성은”으로 결의하여(촬요 p.51) 역시 강북측과 강남측의 위원을 언급하여 태화강이 노회분립의 경계임을 확증하고 있다. 또한 김호환 목사의 “사실증명서”의 내용은 “저희(주사랑교회: 현재 독립교단 소속) 교회는 2006년 당시 남울산노회 소속으로 되어 있으나 노회 분립 당시 북쪽 울산노회가 당회가 모자라 부득이하게 울산노회로 소속이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남울산노회 소속 영내에 속했던 교회가 맞습니다. 사실을 증명합니다. 2015.4.30. 주사랑교회 김호환 목사 (010-3588-0817) 印” 으로 역시 “북쪽은 울산노회”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 강을 경계로 하여 노회를 남과 북으로 분립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노회촬요와 사실확인서를 종합해 보면 태화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울산노회, 남쪽은 울산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한 것이 분명해 보이고 특히 태화강 남쪽에 위치한 주사랑교회는 남울산노회 지역임이 분명하나 태화강 북쪽의 울산노회가 21당회가 되지 못하므로 21당회가 되도록 조정하기 위하여 노회경계와는 관계없이 특단의 비상조치로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회촬요와 사실확인서는 지역 경계를 결의한 증거는 확실하나 노회를 분립하기 위한 준비과정에 관한 증빙서류이므로 참고하기에 중요한 서류임은 사실이지만 직접적인 판단의 법리적 표준을 삼는 것보다는 분립 전의 울산노회가 총회에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와 총회가 보낸 분립위원회의 분립보고서와 총회가 보고서를 받아 결의한 총회 회의 결의서를 검토하여 판단함이 법리적으로 옳아 보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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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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