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2-27(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가정칼럼] 세상을 투명하게 살아라
    큰아들이 고등학교 일학년 때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저녁 식사를 위해 한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들이 식당 입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며 제 엄마는 먼저 들어가라는 눈치였다. “아빠,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그래 여기서 이야기할래? 무슨 얘긴데?” 아들의 얼굴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아빠! 저를 용서하실 수 있겠어요?” “무엇이든 용서 못할 게 없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대범하게 대답했지만 무슨 사고를 쳤나 내심 걱정스러웠다. “아빠! 저, 음란 사이트에 세 번 들어가 봤어요.” 아들의 고백은 청소년기 남자아이들이 한 번쯤 빠져드는 고민이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심각하게 고백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성적 호기심이 큰 청소년 시절에 흔히 있는 문제이므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죄책감을 덜어줄까 생각하는데, 적당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아들의 고백을 들으며 내 속으로는 뜨끔했다. 아들은 세 번 봤다고 했지만 나는 그 이상 보았을 것이다. 그런 고백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아빠는 너보다 더 많이 봤지만 이야기하지 못했구나. 우리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자. 앞으로 안 보면 될 거 아냐.” 이렇게 말했다면 아들이 나를 멋지고 화끈한 아빠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내가 솔직하지 못했기에 아쉬움이 남아 있다. 나는 내 자존심과 체면을 차리느라 훈계조로 한마디 내뱉고 말았다. “이제 그것으로 끝내라.” 아들은 용기를 내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내가 원치 않는 답이 튀어나왔다. 평소에 무엇이든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해놓고 정작 나는 아들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에는 일탈의 즐거움을 맛보느라 하지 말라는 짓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 몰래 친구들과 술집에도 가보고, 친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집단폭력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용기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창피함을 무릎 쓰고 솔직하게 고백한 아들을 보면서 나는 세상살이에 대해 한 수 배운 느낌이었다. 뿌듯하면서도 한편 으로는 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가부장적 권위에 의해 부모 자식 간의 기강이 유지되던 시대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지도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스승으로 여기며 따라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도 배울 것이 많다. 그날 나는 아들에게서‘용기도 힘’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용기는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진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는 법이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당연히‘거짓말하지 말라’는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의 거짓말이 더 많고 심각하다. 거짓말이 많은 사회일수록 거짓말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강도가 높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은 감화가 자식에게는 두고두고 교육적 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위압적 가르침보다‘우리 모두 투명하게 살자’고 말한다. 시간에 투명하고, 장소에 투명하고, 생각에 투명하자는 것이다. 가족에게 자신이 언제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려서 시간과 장소에 투명한 것은 물론이고,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게 함으로써 생각에 투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생각에 투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스스로 투명하기 위한 노력은 결국 인격함양이라는 자기계발의 단계인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2-25
  • [은혜의 말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장 13~17절)
    하나님 앞에서 반듯한 사람, 하나님과 통하고 가깝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그리고 신앙생활을 즐거워하는 사람을 의롭다고 합니다. 복음이 무엇일까요?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16절에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다. 다이나마이트, 헬라어로는 두나미스, 능력. 복음의 능력.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시기 때문에 만남과 만짐과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쳐서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는 순간 의인의 반열로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과 함께 의인의 반열에 딱 서기 때문에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사람 때문에 요동치지 않고 주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따라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의 반열에 서면 어떻게 될까요? 베드로전서 3장 12절에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창세기 5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살았기에 온 세상이 물심판을 당할 때 노아 한 가정만 살아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합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에서는 의인 한 명이 없어서 예루살렘이 무너집니다. 출애굽 할 때 가나안을 정탐하러 간 12지파 대표 12명 중 10명은 암담한 현실만 바라보았기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간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 때문에 속상해 하지만 하나님은 의인을 향해서 집중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25절에 의인의 자손은 버림을 당하거나 빌어먹는 법이 없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했지 않습니까? 시편 12편에 의인의 성장이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와 같이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한다. 믿음의 사람은 세월이 흘러가면 거목이 되고 그로 인해 역사와 문화가 만들어 집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악인이 잘되고 승리하는 것이 맞습니까 했을 때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 말씀 하십니다. 환난과 고통의 때에도 의인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눈에는 안 보이고 손에는 안 잡혀도 오직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 시대는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손에 잡히는 것이 중요하지만 신앙인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사람 때문에 상처 받거나 흔들리지 말고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때문에 흥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저 말로만 외치는 믿음이 아니고 기도와 찬송 중에 믿음이 담대해 지도록 믿음이 굳세어 지도록 믿음 찬 삶을 가지고 오직 믿음으로 감당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6-02-25
  • [성공칼럼] 내적인 교회
    하늘에는 천국이 있고 이 땅에는 교회가 있다. 교회는 이 땅의 생명이며 천국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오늘날 교회가 위기라는 것은 참 무서운 말이다. 이 땅의 교회란 주님을 시인하여 주님사랑이 근원과 목적과 생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인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 셋 중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며 생명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주님을 시인하고 사랑하는 것이 없거나 혹은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말씀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면 또는 말씀을 사랑한다면서 거짓말하고 쾌락을 추구하고 악을 행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겉과 속이 있다. 겉은 그릇이고 속이 진짜인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겉에 속하고 진리대로 사는 것이 생명이다. 그리고 회개는 깨닫고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그릇에 해당되고 실제로 깨달은 대로 사는 것이 생명인 것이다. 또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생명이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건물은 천국의 통로가 되지 못하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노후 되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보여주는 속 모습이 진짜 교회인 것이다. 사람들의 속 모습은 어떤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사람을 사랑하는가? 진리대로 살고 있는가? 자신의 내면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과 사람에게도 사랑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가? 이것이 진짜 교회의 내면인 것이다. 한국교회가 왜 위기일까? 그 원인을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말씀을 너무 많이 듣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말씀을 들으면 행동으로 옮겨야하는데 말씀을 듣는데만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어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매일 새벽예배 때 말씀을 듣고, 수요일, 주일 아침과 오후 또 방송 혹은 주중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더 많게는 매일 큐티를 하면서 말씀을 듣고 행동하려고 하면 또 듣게 되고, 공부할 때마다 깨닫고 새로 행동할 것들이 생겨나서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은 멀리하게 되는 구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동하지 않거나 말씀을 공부하는 것에 몰입하거나 심지어는 말씀을 수단삼아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목표를 이루려하면 결국에는 말씀을 잃어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의 뱃살이 많이 나왔다고 하자. T.V나 인터넷 혹은 책에서 뱃살을 쉽게 빼는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하자. 뱃살이란 꾸준히 노력하지 않고는 빠지지 않기에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게 된다. 이것을 반복하다보면 뱃살 빼는 방법을 누가 말하면 “그 방법 나도 알아” “말은 쉽지 실제로는 어려워”하면서 그 방법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기게 된다. 이렇게 육체에 대한 진리를 무시해서 진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사장이 비서나 직원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을 했다하자. 그런데 명을 들을 때마다 “예”하고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심한 벌을 받든지 쫓겨나게 된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는 죽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일 수 없어 은혜를 베푸시고 유예기간을 두신다. 성경은 마지막 날 심판이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 심판이란 내가 진리를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진리대로 살았는가에 대한 저울을 달아보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다.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살지 않으면 진리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 그러다가 싸움을 하기도 한다. 내 진리가 옳다고 서로 주장하다가 서로 원수가 되게 되어 사랑과 선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위기의 한국 교회와 교회 속에 있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2-25
  • [교회법률상식] 총회 임원회 노회에 목사 시벌지시 어불성설(2)
    (지난 번에 이어)[답] 2. 총회 임원회가 제시한 죄상에 대하여 ㆍ노회 허락 없는 기관목사 사칭에 대하여 기관목사 시무를 위한 노회 허락에 관하여 사설 언론사를 운영하는 자는 노회 허락이 필요치 않다. 기관목사라 함은 총회 사무 행정, 기독신문사 등의 총회 기관 사무를 의미하고 기관목사로 노회의 허락을 받은 목사는 노회의 정회원권이 부여된다.(교회정치 제4장 제4조 7항) 그러므로 S목사에 대하여 허락 없는 기관목사 사칭 운운하는 것은 기소할 수 있는 죄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노회의 허락을 받은 기관목사가 지교회의 위임목사는 겸직할 수 없으나 미조직교회의 임시목사는 겸직 시무할 수 있도록 교회 헌법은 규정하고 있다(정치 제15장 제12조 2항). 그러므로 S목사는 위임목사가 아닌 임시목사요 기관목사도 아닌 사설 언론사를 운영하면서 미조직교회를 시무하는 목사이므로 법적인 하자가 없고 오히려 합법적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현행 대한민국의 국법이요, 교회헌법이다. ㆍ담임목사 직무 해태에 대하여 담임목사란 조직교회의 위임목사를 의미하는데(정치 제9장 제3조, 동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가 아니고 미조직 교회를 시무하는 임시목사(시무목사는 제96회 총회장이 헌법 개정안을 공포하지 아니하고 총회를 파회했으므로 그 헌법 개정안은 폐기되었다. 그런데 그 폐기된 개정안을 2년이나 지나 제98회 총회장이 “추안 공포”라 하며 권원 없는 자의 공포였느니 법적 효력이 없어 여전히 임시목사이다. 만일 시무목사로의 개정을 인정한다면 그 개정된 헌법은 위임목사와 부목사를 노회의 언권회원이 되게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에 대하여 담임목사 직무 해태 운운하는 것은 담임 목사가 무엇인지 위임 목사가 무엇인지 임시 목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에서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S목사는 임시목사로서 총회 산하의 지교회를 시무하면서 사설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는 목사이므로 “담임목사(위임목사) 직무 해태”라는 죄상은 삼척동자도 생각할 수 없는 억지에 다름이 않는다. ㆍ총회와 산하 교회의 연합과 화합 저해하는 분열 행위에 대하여 필자는 S목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총회와 교회의 화합과 화해를 저해하는 분열행위를 한 일이 있느냐?”고 문의한바 “기독신문에 당사자가 직접 ‘호기심에서 카지노에 가본일이 있다.’고 시인 하였고 총회 임원으로서 카지노에 출입한 것과 총회 지도부 인사들이 습관적으로 카지노에 출입한 행위는 잘못이라는 것, 특히 그 중에 어떤 인사는 100회 이상이나 출입했다는 것과 고액의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확인되어 검찰에 송치되었다는 내용을 기사화한 것뿐이고 총회와 교회의 연합과 화해를 저해하거나 분열한 일은 없다.”는 답을 들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총회 임원회가 S목사의 죄상 운운하기보다는 언론에 공개된 사건에 임원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임원회 자체로라도 총회를 개혁하는 차원에서 언론에 공개된 기사 내용을 분석 정리하여 수습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합동 교단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상 3개 항의 죄상들은 한 가지도 범죄 요건이 성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죄증설명서가 없는 기소장으로는 노회도 총회도 절대로 재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결론 본건은 모모 언론사에서 수시로 총회 지도급 인사들의 공금 유용이나 횡령 등의 기사는 물론 금번 총회 임원을 비롯하여 총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필리핀 카지노에 출입한 사실을 기사화하면서 특히 카지노에 100회 이상이나 출입했다는 등의 사실까지 기사화하자 범죄 당사자들이 총회 임원회를 충동하고 압력을 넣어 언론사를 운영하면서 미조직교회를 시무하는 S목사에 대하여 보복적으로 책벌을 시도하려는 불의를 행한 것 같아 보인다. 바라기는 총회 임원회와 S목사와 서울강남노회는 지혜를 모아서 법과 원칙을 따라 풀어야 할 것은 풀고 개혁해야 할 것은 개혁하여 멀지 않은 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하는 칭찬을 받는 청지기들이 다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불법자들에 대한 심판 주 예수님의 경고 메시지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코람 데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코람 데오! 코람 데오!!
    • 오피니언
    • 칼럼
    2016-02-25
  • [서임중 칼럼]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마다 새해가 되면 교회표어를 제정하고 1년 동안 기도하면서 그 제정된 표어 실천에 최선의 경주를 한다. 전국 교회를 순회하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 가운데 가장 많이 보는 표어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읽으면서 가슴이 찡한 표어임에 틀림없다. 왜 이런 표어가 오늘의 교회 주제가 되었는가? ‘표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주의, 주장, 강령(綱領) 등을 간결하게 나타낸 짧은 어구, 즉 슬로건’이다. 이런 표어를 제정하는 오늘의 교회 근간은,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초대 신앙회복을 위한 부흥운동의 일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직설하자면 오늘의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매주일 전국교회 초청을 받아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대부분의 교회 실상은, 구별된 거룩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일반 사회단체와 다를 바 없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라 슬픔을 넘어 아픔이 크다. 표면적으로는 행복하고 평안한 교회다. 그러나 며칠 함께 해 보면 실상은 갈등과 아픔과 분쟁과 분열현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표어가 단순히 표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초대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사도행전 2:42-47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 찡한 내용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그 모진 고난을 당하고 피범벅이 되어 골고다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그리고 탄생된 것이 교회다. 이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 사도행전적 교회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첫째,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지 불분명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는 주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수확물 없는 벌판 같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교회현상은 교제가 아니라 분쟁을 하고, 나눔이 아니라 할퀴며, 기도가 아니라 개인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셋째는 영적으로 죄인 된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있다. 그것을 경외라고 한다. 경외(敬畏)란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인들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 되어간다. 그러니 기사와 표적이 사라지고 울리는 꽹과리와 구리소리가 높아간다. 넷째는 믿음 있는 사람들은 ‘더불어의 삶’이어야 한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보편적 삶이 실천되어야 한다. 사회단체도 그럴진대 하물며 거룩한 공동체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너무도 개인주의다. ‘네가 없어야 내가 있다’는 사탄의 논리가 자리매김을 해 가고 있다. 다섯째는 공생(共生)의 아름다움이 연주되어야 한다. 그리할 때 진정한 구제와 선교가 실천되고, 그 결과는 아름다움으로 진정한 복음의 은총을 공감하고 공유하게 된다. 진정한 공생(共生)은 복음의 삶에서 가능하다. 복음의 삶이란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의 실현이다. 오늘의 교회는 과연 이런 아름다움이 연주되고 있는가? 여섯째는 예배가 살아있어야 한다.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배가 무당이 굿 놀음하는 것 같이 세속화 되고 있다. 표현이 과격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타락하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성전에서의 모임이 약화되고 예배가 개인의 소욕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 가는 것이다. 일곱째는 가정생활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집에서도 떡을 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런 가정예배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지 오래다. 그러니 이제는 기독교 가정도 붕괴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여덟째는 식음(食飮)의 구별이 되어야 한다. 구약의 제도를 굳이 오늘에 지키라고 하진 않겠지만 주초 금지 문제가 이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짐이 되는 현상이 아프다. 먹고 마심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의 욕구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의 몰락 이유 중 또 하나다. 아홉째는 감사와 기쁨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다. 만약 유행가는 잘도 외우면서 찬송가는 제대로 외워 부르는 곡이 없다면, 그런 그리스도인은 잠언 6:2절을 되새겨야 한다. 열 번째는 지역사회에서 칭송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당연한 귀결이다. 오늘의 교회는 지역사회의 칭송을 받는가, 지탄을 받고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스스로 눈을 감고 묵상해 보라. 대부분 지탄의 원인을 나에게 두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너 때문에’로 돌리는 현상이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이다. 마귀는 항상 ‘누구 때문에’를 강조한다. 그러나 성령님은 항상 ‘무엇 때문에’를 강조하신다. ‘무엇 때문에’에 초점을 두면 ‘모든 영광은 주님께로 돌아가고 모든 잘못은 나에게로’ 맞추게 된다.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변명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때리면 맞고, 걸면 넘어지며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실 말씀이 없었을까? 그렇게 자신을 모해하고 아프게 하는 무리들을 대항하실 능력이 없었을까? 아니다! 결단코! 주님은 사랑보다 위대한 힘은 없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다. 그것이 교회의 참 모습이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실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찢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회복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너부터가 아니라 나부터’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16-02-25
  • [성서연구] 믿음의 두 가지 능력(신명기 3장 23-29절)
    불교는 믿음보다는 수행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자력종교들은 면벽참선을 하든지 와선을 하든지 나름대로의 수고를 통해서 진리에 이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이시며 아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음 속에는 신뢰, 의지, 위탁, 순종 등이 모두 망라됩니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그 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위대한 능력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임하는 능력을 마가복음 9장 2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또 누가복음 17장 6절은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대부분의 교인들은 믿음을 <현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눈앞의 답답한 현실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믿음은 그러한 힘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마가복음 9장 23절의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믿으면 아들 속에 임한 귀신이 쫓겨나고 건강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고, 실제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구절에 익숙합니다. 믿으면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어나고, 믿으면 바다 가운데도 길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이와는 색다른 또 다른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상을 받아들이는 힘>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바라보기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는 그토록 오랫동안 사모하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상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본문 23-25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모세의 반응입니다. 모세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그 일로 다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대로 순종하였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믿음으로 현실을 바꾼 이들의 간증을 들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 간증은 듣는 이들에게 기쁨과 부러움을 함께 줍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주어진 형편을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런 예라고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감옥 밖에서도 자유인이었고, 감옥 안에서도 자유인이었습니다. 감옥의 담장이 그를 가둘 수 없었습니다. 어디서나 찬송하고 기도했으며, 복음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빈궁에 처할 줄도 알았고, 풍부함에 처할 줄도 알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현상을 바꾸는 능력>과 <현상을 받아들이는 능력>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길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6-02-25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찌 이런 나라가 …
    영예로운건 하나같이 꼴찌이고 영예롭지 않은건 단연 1등인 나라 세상에 나라가 많다보니 이런 나라도 저런 나라도 있을 수 있지만 북한과 같은 나라가 또 있겠는가. 이미 알려진대로 북한은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 EIU에서 발표한 2014년 전세계 민주화지수를 보면 167개국 중 167위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또 북한은 2015년 헤리티지 재단이 발표한 경제자유화지수를 보면 178개 국가 중 178위로 세계에서 가장 경제적 자유가 없는 나라로 꼽혔다. 그뿐아니라 2015년 프리덤하우스는 각국의 언론자유를 조사했는데 199개국 중 199위로 북한은 ‘최악 중 최악의 언론탄압국’으로 밝혀졌다. 또한 2015년 오픈도어즈가 발표한 세계기독교박해지수를 보면 북한은 2002년부터 13년간 연속 1위를 차지하여 세계최악의 기독교탄압국임이 밝혀졌다. 또 있다. EU에서는 2006년 전 세계민주의 지수를 처음 발표한 이후 2008년, 2010년, 2011년, 2012년, 그리고 2014년 여섯차례 발표했는데 북한은 여섯번 모두 167개국 중 167위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 기관에서는 조사대상국가들을 민주주의 수준에 따라 ‘완전 민주국가’ ‘불완전 민주국가’ ‘민주, 독재 혼합국가’ 그리고 ‘독재국가’ 이렇게 4등급으로 분류하였으며, 북한을 전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로 발표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명예로운 것은 하나같이 모두 꼴찌이고 불명예스러운 것은 단연 1위이다. 한가지 더 밝히고 싶은 것은 종교전문 사이트 어드히런츠닷컴은 2007년 김일성 주체사상을 세계 10대 종교 중 하나로 선정했다는 것이다. 종교의 3요소는 교주, 교리, 교인인데 김일성 주체 사상교의 교주는 김일성과 김정일이고 교리는 김일성 주체사상이고 교인은 북한 주민이라고 발표했다. 북한 정권은 3대 세습 독재체제이며 김일성 일가 신격화, 우상화체제이다. 북한에는 3,200개의 영생탑이 있다. 영생탑에는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쓰여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죽지 않았다. 북한 인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 이렇게 믿는다. 주체사상에 의하면 두가지 생명이 있다. 하나는 생물학적 생명이고 또 하나는 사회정치적 생명인데 이것은 영원하여 김일성 수령을 통해서 인민에게 주어진다고 믿는다. 즉 김일성 수령을 통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부분 때문에 주체사상은 종교로 간주되고 있다. 2011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에도 노동신문은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영생하실 것이다” 그랬다. 이것이 북한의 실상인데도 아직도 종북좌파가 적지 않다고 하니 이해가 안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6-02-25
  • [시사칼럼] 붕어빵 아이들
    지난 1월 25일 누군가 인터넷에 올린 글 하나가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전주의 한 거리에서 간암에 걸린 엄마를 대신해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오빠를 곁에서 보살피면서 붕어빵을 굽고 있는 중학교 여학생 이야기였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을 접한 시민들의 온정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나 SNS에 올린 글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확인 결과 붕어빵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연은 좀 달랐습니다. 간염이나 우울증 증세 등으로 경제 활동이 불가능한 부모를 둔 네 가정의 아이들을 교회가 돌보면서 자활할 수 있도록 붕어빵 포장마차를 지원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아동 학대’를 이유로 당국에 민원을 내는 사람들이 생겼고 결국 단속요원들이 철거 계고장까지 발부했다가 또 다른 시민들의 항의로 일단 철거는 보류되었다고 합니다. 켈로그 경영대학원 석좌교수이자 세계적인 마케팅 대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그의 책 『다른 자본주의(Confronting Capitalism)』(더난, 2015)에서 자본주의가 직면한 14가지 문제를 적시했습니다. 첫 번째부터 순서대로 쓰면, ‘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소득불평등, 파괴의 씨앗’, ‘수렁에 빠진 노동자들’, ‘자동화에 일자리를 빼앗기다’, ‘이익은 기업이 비용은 사회가!’ 등입니다. 서두에 소개한 붕어빵 아이들을 생각해 봅시다. 왜 이 아이들과 그 가정들은 그토록 가난해야 합니까? 확실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답 하나는, 가난이 이 아이들의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구조 자체에 모순이나 결함이 있는 걸까요? 코틀러 교수는 바로 이러한 모색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자본주의는 가능하며’, ‘우리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를 꿈꾼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인용하는 일종의 대안들이 바로 ‘온정적(Compassionate) 자본주의’, ‘포용적(Inclusive) 자본주의’, ‘인도적(Humane) 자본주의’, ‘건강한(Healthy) 자본주의’, 그리고 ‘깨어 있는(Conscious) 자본주의’ 들입니다. 좀 더 다른 시각으로 이 주제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일본 디플레이션의 진실』(2016)의 저자 모타니 고스케(藻谷浩介)도 그들 중 하나입니다. 그는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2015)라는 책에서 오늘날 인류가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를 향하고 있다는 스웨덴 환경운동가 헬라나 호지(Helena Norberg Hodge)의 말을 인용하면서, 울창한 삼림에 널려있는 나무 조각을 이용해 펠릿(pellet)이라는 연료를 개발하거나 친환경 스토브를 만들고, 나아가 CLT(cross laminated timber)라 불리는 고강도 목재를 개량해서 고층 빌딩을 건설하며, 농가의 버려진 집들이나 자가소비하고 남은 작물을 재활용하고 공유하는 일본 산촌(山村)의 현장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이산(里山) 자본주의’라고 부르면서,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때와 같이 자본주의가 그 기능을 상실할 경우 보완해 줄 수 있는 자연친화적이고 공동체동화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가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을 전주의 붕어빵 아이들을 돌봐준 것은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 식의 온정적 자본주의도 아니요, 모타니 고스케(藻谷浩介) 식의 ‘이산(里山) 자본주의’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기업 무를 자를 두며,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교회가 불쌍한 아이들을 품었습니다.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오히려 세상은 교회의 아동 학대를 말하고 교회의 착취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언제 어디서나 교회는 항상 세상의 피난처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기능을 감당하는 교회의 모습마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교회가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세상이 그만큼 썩어버렸기 때문일까요? 붕어빵 속에 진짜 붕어 없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진짜 그리스도가 없다고들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6-02-03
  • [목회자칼럼] 내 안에 숨어있는 5가지 적(敵)
    ①욕망 ②의심 ③불평 ④교만 ⑤두려움 겸손할 줄 모르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성경은 그것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우상숭배와 불평과 교만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교만을 싫어하실 뿐 아니라 교만하면 내가 망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탄은 인간에게 <교만으로 나아가도록>끝없이 부추긴다. 그리고 인간은 이 부추김에 가장 취약하다. 잠언 16장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8장 12절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교만>은 인간을 패망으로 이끌어간다. 우선 성경 안에서 그 실례(實例)를 찾아보자. 이집트의 바로(왕)를 생각해보자.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자신이 소중한 인간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소중한 인간>이다.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하게 학대한다. 인간으로서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중노동으로 몰고 간다. 이스라엘의 조상 중 한 사람이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재임하면서 애굽을 7년 대흉년으로부터 구해낼 뿐 아니라 애굽 국민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그 아름도운 역사를 전혀 기억하지 아니한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이 『背恩忘德』(배은망덕)이라는 것을 이집트의 왕 바로가 아주 잘 보여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신다. 교만한 마음을 반성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유(自由)를 허용하라고 충고하고 권면한다. 이 충고는 인간 모세의 충고가 아니고 실은 <하나님의 명령>이시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는 번번이 약속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기만한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열 가지 재앙>이 이집트 땅에 차례로 내리게 된다. ‘열 가지 재앙’이라 했으니 바로(왕)가 하나님의 명령(권면/충고)을 열 번이나 무시하고 비웃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약속한 바’를 열 번이나 번복하였다는 뜻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집트 전역에 열 가지 재앙이 차례대로 내리게 된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이던가? 피·개구리·이·파리·악질·독종·우박·메뚜기·흑암 그리고 〈처음 난 것들의 죽음〉 이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인 〈처음 난 것들의 죽음〉 에 대하여 출애굽기 12:29~30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 이었더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는 성경 말씀 그대로 열 가지 재앙을 차례로 거듭 겪으면서 이집트 나라는 초토화 되었다.그러고도 바로(왕)는 겸손 할 줄 모른다. 여전히 교만하다. 그는 이집트군의 정예 군대를 이끌고 출애굽하여 이미 상당한 거리로 벗어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뒤를 추격하였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걸어서 건너갔다. 하나님께서 홍해물의 위, 아래를 막으시면서 강바닥에 길을 내어 주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면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다. 겸손할 줄 모르고 끝까지 교만에 갇혀 있던 바로(왕)와 이집트 정예 군대는 이스라엘의 뒤를 추격하다가 홍해에서 몰살당하였다. 통치자 한 사람의 끝없는 교만 때문에 이집트 전 국민들 집집마다 장남이 죽어 나가고 모든 가축의 초태생(初胎生)이 죽어 나갔다. 집집마다 시신을 치우고 장례를 치루느라고 애굽의 땅과 하늘에는 ‘통곡 소리’가 뒤 덮였다. 교만의 폐단은 이렇게 무섭다. 하나님께서는 ‘교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너무 교양 많고(?) 지체 높은(?) 사람이 될려고 하지 말고 〈원초적이고 순전한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자. 자신이 너무 고상하고 대단하다고 착각하면 점점 교만해질 위험성이 크다. 그리되면 무어보다 ‘은혜’를 못 받는다.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못 받으면 숨이 막혀 살 수가 없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다. 하늘로서 내려오는 은혜(heavenly grace)이다. 주일마다 은혜를 받는 것이다. 예배시간마다 은혜를 받는 것이다. 신자는 은혜를 못 받으면 살 수가 없다. 숨이 막힌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강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참으로 바라신다. 그래서 우리더러 겸손하게 살라고 하신다(미가6:8, 벧전5:5). 때로는 고난을 경험시켜가면서 우리를 겸손케 하신다(시 119:67,71).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6-02-03
  • [교회회계] 교회회계 : 결론/마무리
    필자는 5년째 교회에서 회계업무를 맡아 왔다. 또 대학에서 15년 넘게 회계학을 강의하였다. 교회회계는 돈의 흐름을 결산ㆍ보고한다는 점에서 기업회계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이 사용하는 복식부기를 교회에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급격히 증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단식부기는 현금주의 개념에 따라 수입ㆍ지출의 표시와 예산이 잘 집행되어졌는가를 검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자산ㆍ부채의 관리는 물론 교회 재산가치에 미치는 흐름을 장부에 반영하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그동안 12회에 걸쳐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방법과 절차에 대해 설명하여 왔다. 본회는 그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복식부기 교회회계의 원리(accounting cycle)는 다음 6단계로 구분해 적용하라! 교회가 복식부기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①먼저 회계장부에 표시될 거래를 식별하여 기존의 수입ㆍ지출 내용을 자산, 부채, 자본(순자산), 수익, 비용으로 분류 변경한다. ② 식별된 내용은 분개(journal)를 통해 회계장부에 기록한다. T자계정을 만들어 차변(Debit)에는 자산?비용의 증가, 대변(Credit)에는 부채ㆍ자본ㆍ수익의 증가를 표시하고, 감소시에는 그 반대로 표시한다. ③또 날짜별로 표시된 분개내용은 계정별로 집계하여 전기(posting)해 총계정원장을 작성한다. ④그리고 기말시점에 발생주의 기준에 따라 추가적인 수정분개 작업을 한다. 즉 유형자산을 감가상각하는 회계처리 등을 한다. ⑤수정분개후에는 복식부기의 핵심인 재무상태표와 운영성과표를 작성한다. 재무상태표에는 자산과 부채, 순자산을 표시하고, 운영성과표는 수익에서 비용을 차감하는 형식으로 표시한다. ⑥마지막으로 총계정원장에 표시된 각 계정을 마감하고, 다음 회계연도를 준비한다. 2. 자금수지계산서를 운용성과표로 대체해 작성하고, 수익ㆍ비용의 영향을 구분해 표시하라 복식부기 도입시는 수입ㆍ지출을 중심으로 표시하던 기존의 자금수지계산서를 운용성과표로 대체해 작성한다. 즉 수익?비용을 경상항목과 자본항목으로 구분하여 운용성과표를 작성하되, 수입ㆍ지출의 발생 원인과 경제적 효과가 당해연도에 귀속되면 경상지출과 경상수입으로, 차기이후에 영향을 미치면 자본지출과 자본수입으로 각각 구분하여 표시한다. 즉 사례비는 지출효과가 당해에 귀속되므로 경상지출로 하고, 건물구입을 위한 지출은 장기간 영향을 미치므로 자본지출로 한다. 그리고 기말에는 발생주의 개념에 따라 추가적으로 수정분개를 한다. 감가상각비와 손상차손, 공정가치의 적용이 그 예이다. 운영성과표는 수익에서 비용을 차감하여 표시하고, 그 잔액을 재무상태표의 순자산 항목에 반영한다. 3. 경제적 효익이 장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산ㆍ부채로 관리, 재무상태표에 표시하라. 재무상태표는 교회의 자산ㆍ부채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표시한 것으로, 교회재정의 재무적 건정성과 투명성 확보, 효율적 재산관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절차이다. 즉 교회에서 발생한 수입ㆍ지출항목은 운용성과표에 표시하되, 그 발생원인과 경제적 효과가 장기에 영향을 미치는 항목은 반드시 자산과 부채로 구분해 표시하여야 한다. 또한 자산중 퇴직급여기금과 같이 사용이 제한된 예금은 입출금이 자유로운 예금과 구분하여 표시한다. 그리고 순자산은 자산에서 부채를 차감한 잔액으로 교회 설립시 기본금을 포함, 각종적립금과 차기이월잉여금으로 표시할 수 있다. 4. 회계감사와 내부통제제도를 구축하고 재무제표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라. 회계감사(auditing)는 재무제표가 회계기준에 맞추어 적정하게 표시되었는가를 검증하기위한 위한 것으로, 매년말 감사를 선임해 진행한다. 감사내용은 (1)장부상의 현금예금과 통장잔액이 일치하고, (2)재무제표와 회계장부의 표시가 적정한가, (3)재정의 수입지출이 적정히 집행되었는가, (4)영수증과 감사증거 자료를 중점적으로 체크한다. 감사결과는 적정의견, 한정의견, 부적정의견, 의견거절 4개로 분류해 감사의견을 표시한다. 또한 내부통제제도(internal control system)란 회계적 오류나 부정등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절차로서, 두 사람 이상이 상호 견제속에 업무를 분담하고 필요한 매뉴얼에 따라 진행할 때 교회 사역이 더욱 원활하게 움직여 갈수 있다. 작년 12월에 종교인 과세문제와 관련한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 교회회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매우 높아져 있다. 또한 2013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을 발표해 예산규모가 10억원 이상인 교회에게 복식부기를 적용할 것을 제안하였다. 필자는 10억원이 아닌 5억원의 수준으로 낮추어 교회가 가능한 한 복식부기를 모두 적용했으면 한다. 또 그런 의미에서 본 칼럼을 통해 구체적인 복식부기 적용방법을 실무적 관점에서 설명하여 왔다. 물론 규모가 작은 개척교회나 미자립교회에게 복식부기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교회회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한 시대에 와 있음은 분명하다. 교회지도자의 교회회계에 대한 바른 인식과 개혁이 필요하다. 그리고 필자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단 또는 도시 성시화 차원에서 복식부기와 교회회계 발전을 위해 일조해 갈 것을 다짐해 본다. <문의 sblee6@hanmail.net>
    • 오피니언
    • 칼럼
    2016-02-03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