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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법률상식] 교회재판과 세상재판의 상반된 우선기준
    -세상재판의 교회정관우선은 교회재판의 헌법우선에 상충된 모순-법원도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교회정관보다 교회헌법 우선해야 초대교회 시에는 교회 내부 사건으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교회 내부사건으로 세상 법정이 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교회 내부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비록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세상 직업이 법조인들로 구성된 기독교화해중재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그 현실을 입증하고 있어 교회로서는 심히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은 교회 내부의 사건으로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전6: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부의 사건을 세상 법정에까지 끌고 가야만 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교회가 불법 재판을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세상 법원이 교회재판에서 교회헌법을 우선하는 것과는 달리 단체 자치 규정인 교회정관을 우선하는 상충된 모순 때문이다. 1. 총회재판국의 불법재판 현실 상세한 내역은 생략하고 교회재판의 최종심인 총회재판국의 불법재판 결과 세상법정의 판단을 받은 최근의 사건들을 열거하면 제97회 총회재판국의 광주중앙교회 사건과 목동제자교회 사건과 제98회 총회재판국의 광명 동산교회 사건으로 세상법정에서 수십 건의 재판을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제100회 총회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그 중에 광명 동산교회의 사건은 24번이나 세상법정의 판단을 받았고 지금도 세상법정의 재판이 진행 중에 있으니 예사롭지 않는 일이다. 2. 교회재판과 세상 재판의 상충된 법적용의 우선기준 정교분리의 원칙에 의하여 세상법정에서는 교회 내부의 재판 사건이나 교리에 관한 사건은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행이라 하겠으나 행정 절차상의 문제는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하면서 교회 재판 결과가 뒤집히는 경우 등에 대하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관련하여 교회재판의 법률 우선기준으로 “교회 정관은 노회 규칙을 우선하지 못하고 노회 규칙은 총회 규칙을 우선하지 못하고 총회 규칙은 교회 헌법을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위법우선의 원칙에 반하여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의 상위법인 교회헌법보다 최하위법인 교회 정관을 우선하여 판결하므로 교회 헌법을 우선하는 교회재판에서 패소한 자들이 교회 재판에 불복하고 교회 헌법보다 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서 법원이 교회 재판의 판결을 번복하는 판결로 인하여 발생한 갈등의 악순환을 치유할 길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려되는 현실로 분당 W교회가 교회 헌법에 위임목사의 시무기간에 대하여 “담임한 교회를 만70세까지 시무한다”(정치 제4장 제4조 1항)는 규정에 반하여 “위임목사는 6년마다 1차씩 공동의회에서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계속 시무한다”는 교회 정관을 만들어 이미 2회나 공동의회를 하여 계속 시무를 하고 있는 일이다. 만일 이와 같은 교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면 한국 교회의 위임목사의 만70세까지의 시무에 관한 교회 헌법 규정은 휴지조각이 되고 각 교회마다 지각변동이 발생할 것은 예고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서울 S교회의 정관은 교회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의 “장로 과반수와 목사1인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는 규정에 반하여 비록 단서 조항이기는 하나 “일반 결의는 치리장로 2분의1 이상의 출석과 출석 회원 3분의2 이상의 찬성, 당회장과 치리장로 3분의2 이상의 출석과 출석회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결의한다”는 교회 정관에 스스로 부딪쳐서 당회가 특정 안건을 결의하여 시행할 수 없게 된 부끄러운 현실이다. 3. 결론 교회재판과 세상재판에 관련하여 교회재판은 교회 헌법 우선의 원칙을 적용함에 반하여 세상 재판에서는 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판결로 인하여 발생하는 교회 재판과 세상 재판의 갈등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에 대하여는 정교분리의 원칙과 국가에서도 헌법재판소가 최상위 법정임을 감안하여 법원에서도 교회 재판에서와 같이 교회 정관보다 교회의 상위법인 교회 헌법을 우선으로 적용하여 일원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또한 각 지교회는 교회법을 우선하여 잘 지켜야 함은 물론 교회헌법에 상충되는 교회 정관의 제정을 자제하고 이미 교회헌법과 상충된 교회의 정관을 해 교회와 전국 교회의 평안을 위하여 수정하고 삭제해야 한다. 그리고 전국 교회가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교회 내부 사건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가서 세상의 판단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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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소강석 칼럼] 꽃은 길 위에 피지 않는다
    어린 시절 동네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길을 내고 청소만 한 것이 아니라, 길가에 코스모스 꽃씨를 뿌렸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볼 수 있었다. 가을이면 맑고 높은 하늘 아래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처럼 우리의 마음과 삶이 눈부신 황금빛 축복으로 가득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꽃은 길 위에 피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코스모스 씨를 길 위에 뿌린다 할지라도 길에서는 자랄 수도 없고 꽃이 필 수도 없다. 반면 길가에는 누가 씨를 뿌리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심겨져서 꽃을 피운다. 황무한 들판이나 버려진 땅이라도 거기에 꽃씨가 뿌려지고 가을꽃을 피우는 모습을 볼 때는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 알 수 없다. 그렇다. 꽃이 피는 땅은 아스팔트나 신작로 같은 도로가 아니다. 버려진 땅과 황무지요, 폐허에서 핀다. 거기에서 백합, 장미, 데이지도 피고 수많은 들꽃들이 피지 않는가? 우리의 삶도 잘 닦여지고 이미 포장된 길에서는 꽃을 피우고 싶어도 피울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도로이고 길일 뿐이다. 이미 도로화된 삶, 포장되어 있는 삶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인생일 뿐이다. 거기에는 절대로 아름다운 향기 나는 꽃을 피울 수가 없다. 정말 그 사람은 인생의 화려함, 향기로운 인생의 맛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실패와 좌절의 광야를 걸어가고 있을 때 꽃을 피울 수 있다. 나의 인생도 버려진 폐허의 삶이었다. 유교적 가풍이 강한 불신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 집에서 모진 매를 맞고 쫓겨났다. 그때부터 나는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폐허를 걷는 것만 같았다. 광야의 밤은 힘들고 외로웠으며 폐허의 오후는 거칠고 목말랐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낙심하지 않았다. 왜냐면 꽃은 길 위에서 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로 씨를 뿌리고 또 뿌렸다. 젊음의 야성과 패기를 다 바쳐서 사명의 길을 걷고 걸었다. 그리고 결국 나의 인생의 폐허 위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한창 인생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만약에 나의 인생이 이미 잘 닦여진 길과 같은 인생이거나,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화원과 같은 인생이었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 정도의 성취와 꿈에 만족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폐허의 인생이었다. 꽃 한 송이 피지 않은 버려진 흙 무더기였다. 그래서 지금은 더 높은 꿈과 이상을 가진 눈부신 인생이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고, 폐허 같은 인생이라고 비탄할 그때가 꽃을 피울 수 있는 시점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그때가 다시 한 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오히려 그 꽃을 만발하게 할 기회인 것이다. 실패하였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패배와 좌절을 넘어서 다시 한 번 일어서서 희망의 꽃을 피워야 한다. 소망을 볼 수 없는 곳에서 소망을 바라보고,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없는 곳에서 희망의 꽃을 피워야 한다. 그것이 칠흑 같은 밤을 지나서 밝아오는 새벽 여명의 찬란함이고, 절망을 넘어선 진정한 소망이 아니겠는가? 한국교회도 목회 생태계가 깨져 버리고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폐허를 일구면 된다. 황무지도 개간하면 된다. 눈물로 꽃씨를 뿌리면 된다. 그럴 때 목회 생태계는 얼마든지 다시 복원될 수 있다. 이젠 우리의 삶이 황무지일수록 꽃씨를 뿌려야 한다. 아무리 우리의 삶이 폐허가 되어도 꽃씨를 뿌릴 때이다. 폐허 위에서 피어나는 그 꽃, 황혼 빛에 물드는 꽃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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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성서연구] 겸허함에 담긴 은총, 샬롬!(시편 131편 1-3편)
    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을 역임한 고 김영삼 대통령께서 서거하셔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국가장 후 그 분의 공과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는 것을 언론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경우 과에 의해 가려져 있던 공이 많이 부각되고 있는 듯합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고 합니다. 후세의 평가를 고려한다면 누구나 공로를 많이 남기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통치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많은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고대 사회일수록 거대한 건축물은 통치자의 업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2대 왕인 다윗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특히 그 이전에 없던 것을 신축한다면 더욱 높게 평가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하고자 했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요,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왕의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지어 봉헌하고자 하는 뜻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했을 때, 나단 선지자는 매우 칭찬하면서 다윗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나단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나라를 이어받아 주변 열강의 억압에서 벗어나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전쟁을 함으로써 그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연고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건축의 기회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의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성전을 짓지 못하게 되었지만 결코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 섭섭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기꺼이 그 뜻을 받아들였고, 솔로몬이 성전을 잘 지을 수 있도록 설계, 건축 자재 준비, 성전 건축 이후 성전을 운영하는 모든 내용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건축의 명예는 아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런 그의 수용적 태도는 하나님의 결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기보다는 그의 평소의 신앙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시편 131편은 다윗의 신앙 인격이 잘 반영된 시입니다. 다윗은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그는 큰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왕들이 큰일을 해서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과 상반되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그의 겸손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모름지기 위대한 일은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임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나라를 부강하게 한 모든 것 역시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깨닫고 있었기에 성전 건축 또한 하나님의 결정에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런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자 그의 영혼은 고요하고 평온하였습니다. 마치 젖 뗀 아기가 엄마 품에 있음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실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업적을 남기려고 애를 씁니다. 큰일을 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러다보니 그들의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늘 분주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를 얻지 못합니다. 이런 이들은 무엇인가를 이룬다고 해도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차지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제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아버지께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소서. 전 단지 아버지의 종일뿐입니다. 제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오니 아버지의 평강이 제 마음을 가득히 채우게 하옵소서.> 피곤한 싸구려 업적주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평안 가운데 거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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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장례식 유감(有感)
    4개 종교의식 진행은 당치 않아 고인의 종교에 따라 한가지만 해야 지난 11월 26일 고 김영삼 전 대통령 장례식이 국회의사당 광장에서 국가장으로 거행되었다. 필자는 식순 중 종교의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서 유심히 지켜보기로 했다. 고인이 기독교 장로이고 유족이 모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으레히 기독교의식으로 진행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켜보니 종교의식을 기독교의식만 아니라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 4개 종교 인사들이 차례로 나가서 의식을 진행하지 않는가. 불교 승려들은 목탁을 치면서 불경을 낭송하고 천주교 신부들은 무엇을 흔들면서 의식을 진행하는데 참 어이가 없었다. 고인이 기독교인이면 기독교 의식만 진행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종교의식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종교의식은 고인의 종교에 따라 기독교인이면 기독교 의식으로, 불교신도라면 불교 의식으로 진행하면 되지 않는가. 무슨 이유로 고인과는 상관이 없는 여러 종교의 의식을 진행한단 말인가.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봤다. 국가장을 치룰 때에는 고인의 종교와는 상관없이 4개 종교의식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면 앞으로는 기독교인은 임종을 앞두고 “나의 장례식에서는 기독교의식만 진행하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기고 유족은 유언을 근거로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면 기독교의식으로만 진행하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기독교인의 장례식에 기독교의식 외에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의 종교의식을 진행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천부당 만부당’이라는 말은 이럴 때에 쓰는 말이 아닌가 한다. 한가지 더 필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목사의 기도이다. 지난 날의 경우를 보면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돌아가신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장례식 때에 K목사는 “하나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에게 은혜를 베푸사 하나님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고 천주교 신부는 “하나님 주의 종 전 노무현 대통령에게 은혜를 베푸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했다. 그때 필자는 TV로 그 광경을 보면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혀를 찼던 것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고인이 기독신자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고인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헌법 예배기준을 보면 장례식에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을 밝혀 놓았다. 거기 보면 절대로 삼가야할 것은 돌아가신 고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고인에 대해 소망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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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목회자칼럼]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몇 년 전 교회를 중심으로 상영했던 <창의 끝>은 짐 엘리엇(Jim Elliot, 휘튼대학수석졸업)선교사의 순교사건을 담은 영화이다. 1956년 1월 8일 주일아침에 남미 에콰도로 아마존 정글지역에 사는 아우카 부족을 선교하러 갔다가 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짐 엘리엇 선교사와 동료 4명의 순교사건은 당시 전 미국인들을 슬픔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일기에 이런 글이 있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것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 사건 이후 선교사들의 젊은 아내들은 슬픔을 멈추고 간호학 등을 공부하고 남편들이 희생된 곳을 찾아가 산파사역, 치료사역, 새로운 농사법을 가르쳐 주면서 그 부족들을 섬겼다. 2년 가까이 사역하면서 아우카 부족의 언어를 배운 후 본국으로 나오려 할 때에, “부인들, 당신들은 뭐가 모자라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합니까?” 추장의 물음에,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벳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몇 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백인 선교사의 아내들입니다. 우리 남편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하나님을 당신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왔지만 당신들이 그들을 죽였으므로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남편들이 해주고자 하는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지난 2년 동안 당신들의 말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그 순교사건에 버금가는 사건이 5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발생했다. 기독교 자선단체인 “IAM”(국제지원단)소속 의료진 10명이 카불에서 260km 떨어진 마을의 초청으로 의료봉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탈레반에 의해 숲속으로 끌려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우리는 의료봉사단이요!” 부르짖음에도 탈레반은 의료팀을 한 줄로 세우고 한명씩 총을 쏴 살해했다. 그때의 선량한 의료진들의 공포감, 두려움은 어떠했을까? 미국인 6명, 영국인 1명, 독일인 1명, 그리고 2명의 아프가니스탄 통역인이 죽임을 당했다. 신문보도 중에 사역팀 리더인 미국인 안과의사 톰 리틀(Tom Little, 62세)은 30여 년 동안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 해왔고, 영국인 외과의사 캐런 우(36세)는 결혼을 2주 앞둔 자매여서 우리의 슬픔을 더했다. 사건이 보도된 날,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톰 리틀의 부인인 리비 여사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의 뒤를 이어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 일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파송교회인 뉴욕의 로우던 빌 컴뮤니티교회의 스탠 키 목사는 사건발생 첫 주일 설교에서 이런 말씀으로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 “많은 사람이 복음에 대해서 말하지만 복음과 함께 사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톰과 그의 가족은 분명 복음과 함께 살았습니다.” 위험천만한 A국 나라로 다시금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외교부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는 박00 선교사, 과거 그분께 받은 선교편지를 보았다. 그의 편지에서... 꾸짖는 투로 나무라는 외교부 직원의 말, “의사선생님, 왜 꼭 그렇게 위험한 A국으로 들어가려고 합니까?” 편지에 적힌 자신을 향한, 우리를 향한 박 선교사의 고백은 이러했다. “글쎄요, 내 자신을 잘 모를 때도 많지만 지금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 나의 마음은 그 분께서 주신 마음이고, 이 마음은 A국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이 있는 그 땅을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 아, 어떻게 그런 사랑이 가능할까? 그런 헌신이 가능할까? 그런 순교가 가능할까? 박00 선교사의 고백에서 대답을 찾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마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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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성공칼럼] 믿음으로 살리라 3 - 영적진리
    ‘믿음으로 살리라’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속사람, 영(靈)이다. 진짜 사람은 속사람, 영이라는 것이다. 육체는 진짜 속사람의 덮개일 뿐이다. 지구의 내부는 중심에 핵, 맨틀, 지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피부의 구조도 표피, 진피, 피하지방층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모든 생명체는 내부를 보호하는 덮개가 있는 것이다. 이 덮개 없이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육체는 육체의 생명인 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영이 떠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 자체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수용하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그릇이 그릇자체로 있는 것은 밑동 잘려진 나무가 잠시는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지만 조금 있으면 말라 죽는 것과 같다. 이처럼 사람의 영도 생명이 없으면 잠깐은 기쁘고 자유롭고 활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이 없기에 죽게 되는 것이다. 내 영이라는 그릇에 생명이 있어야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리라’의 ‘산다’라는 말이다. ‘산다’라는 말은 내 영이 하나님과 결합되어 기쁘고, 자유롭고, 빛나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말한다. 내 영이 죽었다는 것은 생명이 없음으로 두렵고 화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서로 싸우면서 기쁨과 자유와 빛을 잃어가는 것을 말한다. 내 영이 살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진리로는 가능하지 않고 반드시 생명을 담은 영적진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생명 즉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에고라는 자기사랑을 선택했다. 자기사랑은 자기사상, 자기소유, 자기지배, 자기쾌락, 자기숭배를 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간다. ‘산다’는 것, 거듭난다는 것, 의롭게 된다는 것은 자기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영적진리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생명을 담은 영적진리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죽음의 권세 즉 지옥의 권세와 싸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지옥의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지옥을 결박하셨다. 그리고 인간이면서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과 주님이 결합할 수 있는 길을 만드셨다. 예수께서 신이면서 인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영적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함으로 주님사랑이 내 영에 들어오시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생명이신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이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으로 살리라’의 핵심인 것이다. 영적진리인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의 단계를 거치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랑이다. 주님사랑으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영원한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도 할 수 있는 일이며 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며칠 전 고3딸이 수능시험을 보았다.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기에 하나님께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갈 것을 위해 기도했고 정말 그렇게 될 것을 믿었다. 그런데 예상 밖에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서 마음이 상했다. 이런 마음으로 가족 예배 중에 말씀을 묵상하는데 우리의 목적이 높은 점수, 좋은 대학, 사람들의 부러운 평가, 자랑스러운 자신 등이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목적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영원한 목적은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인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딸에게 섭섭해 하지 않고 고생한 딸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딸도 주님을 사랑하고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은 자신을 향해 수고했다고 다독이며 점수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영원한 목적을 찾은 순간에 두려움과 서운함이 사라지고 기쁨과 사랑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했다. 믿음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주님이 진리의 근원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따라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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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은혜의 말씀] 더불어 & 오로지 (행1장 12~14절)
    오늘 성경말씀 사도행전은 흔히 성령행전이라 합니다. 성령님께서 사도행전을 만들어 가십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베드로도 아니고, 사도바울도 아니고, 성령님이신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온통 제자들·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앞쪽에는 제자들 이야기가 나오고, 15절 16절부터는 가롯 유다 이야기입니다. 가롯 유다는 열심당원이고, 재정을 맡았을 만큼 중직자요, 집안이 좋고, 혈통이 좋고, 모든 부분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뒤에는 가롯 유다가 엉뚱한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16절부터 보면 예수님을 체포해서 스승을 팔아먹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나중에는 그 직무를 타인이 취합니다. 25절에 보면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나님이 부탁하신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탁하신 미션이 사람마다 있는데 그 직무를, 그 자리를 박차고 자기 길로 가서 패가망신한 사람이 가롯 유다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가든지 의의 병기가 되어야 되지 악의 도구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12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감람원 이곳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곳입니다. 기적의 현장, 영광의 자리, 기도의 동산이 감람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미리 이곳에서 엎드려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신 곳입니다. 성도의 삶에 모든 진검 승부는 현장에서, 결승전에서 표가 나는 게 아니고 기도의 자리에서, 기도의 동산에서 결판이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너는 어떻게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가 없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해라’ 하신 곳이 이곳이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바쁠수록 기도해라. 힘들수록 찬송을 불러라. 어려울수록 감사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들어 부하게 쓰시고 미련한 자를 들어서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지 인물 좋다고, 돈 많다고, 똑똑하다고 쓰임 받는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원심력과 구심력, 한 사람에 대한 집중, 또 온 열방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스케일과 디테일을 같이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이 임하셔서 초대교회가 탄생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오실 그때까지 촛대를, 면류관을, 축복권을, 장자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일복이 많은 것이 복이 많은 것입니다. 쓰임 받을 동안은 그냥 그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부담스러운 자리 그걸 부담스러워 하면 안 됩니다. 그걸 하는 동안에는 죽을 틈도, 망할 틈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명이라도 낙오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명이라도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안 됩니다. 마지막 한명까지도 어린양 혼인잔치에 초청받아야 됩니다.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기도의 자리, 주님이 부탁하신 그것을 사명으로 감당하십시오. 힘들 때가 좋은 것입니다. 밤에 잠을 못자고 힘들고 부담스러울 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부탁하신 일은 건강도 물질도 미래도 하나님이 다 보장해 주십니다. 그 자리에서 빠지면 안 됩니다. 그 마지막 숫자에 들어가야 되지 마지막에 이름이 빠져 버리고 그 숫자에 제외 되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이 마지막 어린양 혼인잔치에 쑥 들어가셔서 주님 알아보시고 ‘내 사랑하는 딸아 네가 그동안 고생했다.’ 그 이름을 보시고 통과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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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교회법률상식] 협동장로가 신학교 법인이사장 될 수 있는가
    [질의] K교단의 신학대학교 이사회가 협동장로를 법인이사장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교단의 일부 인사들 중에 협동장로는 총회 선거조례 제3장 제6조 1항 단서 조항에 “모든 후보자의 임직일은 본 교단에서 시무일 기준으로 한다.”는 규정에 의하여 협동장로는 법인 이사장이 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법리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부산 G장로) [답] 질의 자가 교단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장로교회의 통상적 법리에 따라 답한다. 1. 협동장로의 위치 최초의 헌법인 1922년도 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5장(치리장로) 3(장로의 자격)에 “장로는 행위가 선량하고 신앙의 진실하고 지혜와 분별력이 있으며 언행이 성결함으로 온 교회의 모범이 될 자라야 가합하니라(젼벧5:3)”라고 규정하였고, 1930년도 판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5장(치리장로) 제3조(장로의 자격)에는 “27세 이상 남자 중 입교인으로 무흠히 5년을 경과하고 상당한 식견과 통솔의 기능이 있으며 딤전3:1-7에 해당한 자로 할 것이니라”라고 규정하여 장로로 임직하면 사망 시까지 모두 시무장로 이외의 다른 칭호가 없었고 장로교도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1930년 이후 수십 년을 지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라는 교단의 개수가 이미 100개가 넘은 것이 옛날이 되었고, 대부분의 교단들이 만70세 시무정년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시행한 이후 교회 직원의 칭호가 34가지나 되고(교회 법률상식 pp.377-381 참조) 그 중에 장로의 칭호 역시 시무장로, 무임장로, 휴무장로, 은퇴장로, 협동장로, 원로장로 등 6가지나 된다. 그 중에 협동장로는 K교단과 H교단에서 신설하여 시행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 원리상 시행할 수 없는 칭호이다. 그 이유인즉 교인을 치리할 수 있는 치리권은 ① 교인의 투표로 위임을 받아야 하고 ② 교인들이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함으로 비로소 치리권이 발생하게 되는데 협동장로는 교인이 투표도 하지 아니하고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도 하지 아니한 상태에 있는 무임장로를 당회의 결의로만 협동장로가 되게 하여 당회의 언권회원으로 간접적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것은 장로회정치의 대원리 상 합당치 않다. 따라서 협동장로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교단들은 조속히 헌법을 환원 개정하여 협동장로를 폐지해야 한다. 2. 협동장로의 피선거권에 대하여 대표적인 3개 장로교단의 헌법 규정을 보면 T교단은 협동장로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K교단과 H교단에서 시행하고 있는바 K교단 헌법 정치 제6장(장로) 제71조(협동장로)에 “교회를 잘 봉사할 수 있는 무임장로가 있는 경우, 당회의 결의로 협동장로를 세울 수 있다. 협동장로는 당회와 제직회에서 발언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하였고, H교단 헌법 정치 제5장(치리장로) 제7조(협동장로)에 “무임장로 중에서 당회 결의로 협동장로로 선임하고 당회의 언권회원이 된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K교단의 총회 선거 조례에 “모든 후보자는 … 시무일을 기준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여 시무장로이어야 후보자가 될 수 있음을 법이 정하고 있는데 협동장로는 무임장로에게 당회결의로 언권만 부여한 장로로서 마치 목사로서 시무 지가 없는 무임목사가 노회에서 언권회원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는 것처럼 협동장로 역시 시무장로가 아니니 선거투표로 선정하는 신학교의 법인이사장의 피선거권이 없으므로 법인 이사장이 될 수 없다. 3. 결론 장로교회의 모든 선거제도에 있어서 현행 헌법은 시무하는 정회원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무임, 은퇴, 협동 장로들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K교단의 신학대학교 이사회의 법인이사장을 선정하는 선거에서 협동장로를 선정한 것에 관하여 사학법에서는 인정할지 모르지만 교회법에서는 법리적으로 피선거권이 없는 자를 선택하였으므로 당연 무효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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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가정칼럼] 내 인생을 바꾼 한 마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 소년은 금방 잠에 골아 떨어졌다. 얼마를 잤을까? 온몸을 물어뜯는 빈대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몇날 며칠 잠을 설친 소년은 빈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빈대는 헤엄을 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책상을 구했다. 책상의 네 다리 밑에 사발(접시)을 고이고는 물을 부었다. 책상위에 이부자리를 폈다. 기막힌 수중(?)위의 침대였다. 빈대를 따돌린 소년은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또 다시 빈대의 공격 앞에 서야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책상 다리를 살핀다. 기어오르는 빈대가 없다. 저 깊은 호수를 무슨 재주로 헤엄을 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몸에 붙어 있던 빈대? 소년은 머리를 굴리며 얼른 잠이 들지를 못했다.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던 소년은 눈이 휘둥그레져 벌떡 일어난다. 뜻밖에도 책상 다리를 기어오르지 못한 빈대들이 벽을 타고 천정에서 낙하할 준비를 하고 있지 뭔가? 소년은 무릎을 친다. “빈대도 머리를 써서 사는데.....” 소년은 그 작은 깨달음 하나로 대기업을 일군다. 그가 왕회장이라 불렸던 현대의 고 정주영회장이다. 그의 평상시 가장 큰 욕은 ‘빈대보다 못한 놈’이었다. 내 어머니는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지천을 퍼부었다. “대체 머리는 뒀다 어디 쓰냐?” 밥상머리에서도 등굣길에도 그 말이 꼬리를 달고 다녔다. 어느새 귀에 딱지가 되어 내려앉았다. 일만 꼬이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게 다가와 속삭인다. “머리 뒀다 어디 쓰냐?” 추운 겨울밤이었다. 한 소년이 장거리 여행을 위해 짐 보따리를 챙겨놓고 잠이 들었다가 큰 전쟁(?)을 치러야 했다. 야간 공습경보가 울리더니 낮은 비행물체가 공격을 해오는 것이었다. 미사일까지 쏘면서 말이다. 모기(蚊)와의 전쟁이었다. 피를 보고야 전쟁은 끝났다.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나 홀로 ‘생각’에 잠겼다. 성경은 뭐라고 했나?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달게 주시는도다.” 그런데 또 다른 번역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랑하는 자들이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보호해 주시고...”(시편 127편 2절) 어떤 번역본이 맞던지 간에 잠은 좀 자게 해 줄 일 아닌가? 잠 못 이루는 밤, 소년은 뒤척이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만큼 잔인한 존재가 또 어디 있던가? 남의 잘못에 대해 어김없이 소리친다. 회초리도 든다. 심지어 따귀까지 때린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고함지르고 자신에게 회초리 드는 사람 보았는가? 신은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그 날 밤 모기를 보내 잘못에 대해 침을 몇 방 놓으시고 그제야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고 뺨을 후려갈겨 정신 차리게 하시는구나.’ 생각한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필자다. 이래서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고 한다. 모기조차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 혹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은 없나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의 거울이 된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영성의 오솔길이 된다. 이래서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 짜증내고 나면 짜증스런 생각만 따른다. 불평하기 시작하면 불평만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가 이번에는 아들에게 말한다. “모기를 하찮게 여기지 마라. 모기(蚊)에 벌레를 의미하는 ‘?’에다 글월의 ‘文’이 덧붙여진 이유가 뭔지 아니? 모기도 글을 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모기보다 못한 사람이 많다.” 어머니의 끝없는 잔소리에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시대가 달라져 그 말이 업그레이드 된 것일 뿐. 나는 안다. 내 아들이 손자 손녀에게 지껄이고 있을 말을. “대체 머리는 뒀다 어디 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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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시사칼럼] 극단주의와의 전쟁
    11월 13일 금요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다발적인 연쇄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프티 캉보주 식당(Petit Cambodge restaurant), 카리용 바(Le Carillon barr), 바타클랑 극장(Bataclan concert hall), 벨레키프 바(Belle equipe barr), 스타드 드 프랑스(Starde de France) 경기장 인근, 공화국 광장(place de la Republique) 등 파리 중심지 일대에서 금요일 밤에 벌어진 총격과 폭발 등으로 현재까지 150여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대참사였습니다. 프랑스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IS(이슬람 국가 연합)는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범행 동기와 주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파리 테러 하루 전날인 12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도 2건의 자폭테러가 일어나 최소 43명이 죽었고, 같은 날 13일에는 이라크에서 테러범이 장례식장을 공격해 최소 2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지난 해 매달 평균 90명의 민간인들이 폭탄 테러로 숨졌다는 통계도 있습니다(Iraq Body Count). 내전 중인 시리아 또한 2011년 이후 민간인만 무려 25만 명이 테러나 각종 공격으로 희생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과격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Boko Haram)의 무차별 납치와 테러로 인해 지금까지 약 15,000명이 사망하고 150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호주에 본부를 둔 영국 경제평화연구소(IEP)는 작년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발생한 9,814건의 테러와 그로 인한 사망자 수 17,958명 중 80% 이상이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5개국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세계 테러리즘 지수(Global Terrorism Index)’에서 밝혔습니다. 올해 초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terror) 잡지사 테러 사건을 경험했던 프랑스는 이번 파리 테러가 발생한 직후 곧바로 이슬람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유명 해커 집단인 어나니머스(anonymous)까지 나서서 IS에 대해 대대적인 사이버 공격을 감행할 것을 선포할 정도로 국제사회도 공명(共鳴)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워싱턴에서는 정부간 ‘폭력적 극단주의 대응 고위급 각료회의’가 개최된 바 있고, 혹자들은 앞으로 인류가 치러야 할 진정한 전쟁은 바로 이 극단주의와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적 극단주의가 어떠한 비극적 폐해를 초래하는지 역사를 통해 이미 충분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극단주의는 자기 의(righteousness)에서 시작해서 폐쇄성과 배타성을 거쳐 푸코(M. Foucault)의 말처럼 집단적 광기로 발작(發作)합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민족이나 이념에 기초한 극단주의에 폭력적 광기가 더해진 결과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에리히 프롬(E. Fromn) 같은 사람이 집단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이야말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독약이라고 말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1980년대 우리 사회는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사회 또한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한번쯤은 치러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극단주의는 나만 옳다는 진리 논쟁으로 출발해서 결국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나아가 공격하는 폭력성을 조장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심지어 교계와 교회까지도 의견의 다름(different)과 틀림(wrong)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서구 사회도 오랜 세월에 걸쳐 비슷한 진통과 산고를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깊은 뿌리가 되는 경구, 즉 ‘본질은 일치를, 비본질은 관용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necessariis unitas, unnecessariis libertas, omnes caritas)’의 정신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적 극단주의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중용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시대 극단주의자들의 손에 들려 있는 억압적 수단과 폭력적 도구들이 하루 속히 제거되고 나아가 그들 속에 부드러운 마음과 새 영이 새롭게 자리잡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겔 11:19;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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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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