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2(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4)
    2. 험담과 모함사람을 낙담하게 하고 절망시키는 아주 나쁜 것으로 〈험담과 모함〉이 있다.〈험담〉이란 남의 약점이나 아픈 부분을 들추어 내어서 이야기로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악한 취미이다. 남을 나쁘게 말하는 것도 험담에 속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사실(fact)대로 말하기보다 사실과는 다르게, 사실보다는 더 나쁘게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는다.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의 행동을 보라. 하나님을 나쁘게 말하고 있다. 하와에게 하나님을 악평(惡評)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보다 사탄의 험담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사탄의 험담에 귀를 기울이고 즐기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기억하지 않고 사탄의 험담에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마침내 사탄과 한 통속이 되어 하나님을 배신한다. 이것이 인간의 첫 타락이고 〈원죄 原罪〉 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하와에게 하나님을 험담하여 재미를 본 사탄은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험담을 하고 험담을 즐기라!〉고 부추긴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그들의 험담하는 성품을 이어 받은 우리들은 별 생각 없이 쉽게 다른 사람을 험담한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라고 부른다. 쉽게 남을 험담하다보면 습관이 되기 쉽다. 이것은 아주 나쁜 습관이다. 이 습관이 심해지면 남을 험담하는 것을 즐기게 까지 된다. 험담하기를 즐기는 정도까지 되면 그 사람의 심령은 황폐화된다.그런 사람에게서는 ‘인격 Personality’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그럼 〈모함〉이란 무엇인가? 모함이란 없는 사실, 불분명한 것을 ‘사실인양, 직접 본 것처럼 퍼뜨리는 것’을 뜻한다. 악의적(惡意的)으로 악평(惡評)하는 것을 뜻한다.그러므로 험담보다 더 사악한 짓이 〈모함〉이다. 그러므로 〈모함〉은 상대방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고 그 인생을 망치게 하는 짓이다. 심지어 상대방이 충격을 받아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다. 이런 모함이 특히 우리나라에서 심하다. 그런데 아무런 근거나 증거도 없이 남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악평하는 모함 때문에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생명을 짓 밟을 뿐 아니라 한 가정까지 파멸시키는 참담한 짓을 〈만물의 영장〉으로 일컬어지는 인간으로서 어찌 감히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전혀 근거 없이 모함을 당하여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타격을 받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교회가 나서야 한다. 우리가 나서야 한다. 복음으로 저희들을 살려내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5-14
  • [교회법률상식] 총회 노회 분립 위원회의 반역(1)
    -노회역사성 인정 않고 전통노회 해산하는 노회 분립 언어도단-노회역사는 전통 노회가 이어가고 분립노회는 1회로 시작해야 제99회 총회가 한서노회(위원장 이성택 목사), 평양노회(위원장 이종희 목사), 안주노회(위원장 최희용 목사), 황해노회(위원장 남태섭 목사), 서대구노회(위원장 전주남 목사), 서수원노회(위원장 박덕기 목사) 등 6개 노회의 노회 분립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그 중 평양노회 분립위원회와 안주노회 분립위원회의 분립내용을 보면 노회분립 위원회가 총회헌법에 도전하는 반역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기독신문 제1994호(2015.1.14.) p.2에 “평양노회 분립위원회 명칭 결정”이라는 머리기사의 내용으로 “평양 A노회(김선규 목사 측)를 가칭 평양제일노회, 평양 B노회(고영기 목사 측)를 가칭 평양노회로 결정하고 특정노회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양 노회의 역사성과 회기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 소속을 결정하지 못한 교회는 1월31일까지 소속을 청원하도록 하고 그 후에는 위원회에서 실사하여 소속을 결정하기로 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동 p.5에는 “안주노회 15일 분립예배 드려”라는 머리기사의 내용으로 “안주노회가 15일 분립예배를 드리고 가칭 신안주노회와 동안주노회로 분립한다. ··· 신안주노회를 15일 오후 1시 성현교회(라계동 목사)에서, 동안주노회 분립예배를 오후 3시 성인교회(이현국 목사)에서 드리기로 했다.”고 보도하였다. 이에 관련하여 노회분립의 원칙을 정리함으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2014. 교회 법률상식 pp. 410-416 참조). 1. 분립위원회의 직무한계 총회가 보낸 노회분리위원회의 직무한계는 헌법의 규정에 따라 노회가 합법적인 노회의 결의로 총회에 노회분립허락 청원서를 제출하면 총회가 허락하고 위임한 대로 전통노회에 관하여는 그 어떤 일도 간섭해서는 안 되고 분립할 노회만 조직하는 사회자의 직무일 뿐이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 노회의 분립청원서 내용에 기록된 분립할 노회의 지역, 노회의 명칭, 교회 수, 목사 및 교역자 수, 장로 수, 교인 수 등을 명시한 대로 제1회 ○○노회를 조직 해 주는 것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분립위원회는 전통노회에 관하여는 아무 것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 오직 전통노회가 스스로 임시노회를 회집하여 노회 분립으로 인하여 결원된 노회 임원을 보선하고 노회분립 후의 후속조치를 위하여 요구되는 노회규칙수정과 시찰회 및 상비부 등의 조직을 보완 조정하면 그만이다. 2. 분립위원회의 월권 그런데 안주노회분립위원회와 평양노회분립위원회는 분립할 노회뿐만 아니라 전통노회까지 간섭하면서 “양 노회의 역사성과 회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양 노회에 분립예배를 시차를 두고 드린다고 하면서 월권을 넘어서 전통노회를 해산하는 반역을 행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노회분립위원회가 노회명칭을 가칭으로 정해주고 각 지교회의 소속할 노회를 청원하면 위원회가 실사하여 소속노회를 정해준다고 하니 노회분립의 행정이 거꾸로 돌라가는 것 같아 보여 심히 염려스럽다. 실제의 상황을 살펴보자. 15일에 안주노회의 분립을 하면서 가칭 신안주노회는 오후 1시 성현교회(라계동 목사)에서 분립예배를 드리고, 가칭 동안주노회는 오후 3시 성인교회(이현국 목사)에서 분립예배를 드린다고 했는데 양노회의 가칭은 언제 누가 어떻게 떼어줄 것이며 안주노회의 역사는 어디서 보전할 것이며, 분립위원회가 무슨 권한으로 지교회에 소속노회를 청원하라고 지시를 하며 무슨 자격으로 소속노회를 정해준다는 말인가? 노회분립위원회가 지교회에 소속노회를 청원하라하고 위원회가 소속을 결정해준다고 함은 어불성설이다. 혹 무지역노회의 분립청원서에 누락된 지교회가 있을 경우에는 그 누락된 교회들은 모두 전통노회에 소속하는 것이 지역노회와는 달리 무지역노회에 관련한 법리적 특성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법률상식
    2015-05-14
  • [성공칼럼] 사랑의 길, 에고의 길
    사랑으로 가는 길과 에고 즉, 정욕으로 가는 길은 겉은 비슷해 보이지만 속은 정반대의 길이다. 사랑은 선으로 가는 길이며, 정욕은 거짓과 악으로 가는 길이다.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이 목적이지만 정욕은 상대방을 이용하여 내가 잘 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랑은 내가 수고하고 내가 희생하지만 정욕은 상대방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상대방이 내 생각대로 따르지 않아도 서운해 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욕은 상대방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나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분노한다. 선한 사람의 생명은 사랑이며, 악한 사람의 생명은 정욕인 것이다. 자신의 시작이 사랑으로 시작하는지, 정욕으로 시작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내 중심에 사랑이 있는지 정욕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자신의 입장부터 먼저 생각하는가? 상대방의 마음부터 살피는가? 내 입장부터 살피면 정욕, 상대방의 입장부터 살피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종교를 갖고 있으면서 진리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가?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이면 사랑,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면 정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상숭배는 의존이며 이용이며 정욕적인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여 정직하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은 사랑이 되는 것이다. 부모나 선생이나 의사나 종교지도자나 그의 목적이 상대방에게 있는가? 자신에게 있는가? 그 목적이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져 있으면 사랑이 아니라 정욕이 되는 것이다. 모든 망가짐의 시작은 상대방을 위한다는 사랑을 가장한 에고 즉 정욕에서 시작된다. 교회나 부부나 국가나 기업이나 모든 시작은 사랑으로 시작한다. 사랑은 그 근본 마음이 주고 싶은 마음이기에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위할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더 좋은 것을 줄까하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와 능력이 나와서 더 행복해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진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했다.’ ‘내가 대단하다’ 등의 자만심과 ‘내가 이만큼 했으니 나는 대우받아야 하며,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는 자기 옳음이 생기면서 사랑은 사라지고 이기심과 소유욕과 지배욕이 들어서게 된다. 이리하여 서로 간에 믿음이 깨지면서 갈등과 싸움이 생겨서 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잘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고 망가뜨리는 것은 에고인 것이다. 마귀의 목표는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사람의 생명이기에 사람에게서 사랑을 없애기만 하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마귀는 사랑 없이 모든 것을 다하기를 바란다. 사랑이 없는 종교지도자, 교육자는 가장 극악한 악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을 다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사랑 없는 종교 지도자는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 상대방도 사랑을 버린 삶을 살도록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어찌하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표에 온 마음을 쏟도록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들어 결국 욕심 때문에 양심을 버리게 한다. 또 마음속에 두려워하고 분노하게하고 질투가 나게 하여 사랑을 없애는 것이다. 혹시나 사람들이 진리를 알았을 때는 서로 자신의 진리가 맞다고 주장하게 하여 갈등과 싸움을 만들어 사랑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 땅의 삶은 내가 사랑하며 살 것인가? 정욕으로 살 것인가의 영적 시험장이며, 영적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환경과 사건 속에서 사랑으로 가는 것이 진리로 살아가는 길이다. 이 길이 모두가 사는 길이며, 내 목표, 내 생각을 주장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길은 정욕의 길이며, 모두가 죽는 길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5-14
  • [은혜의 말씀]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 (민수기 6장 24절~26절)
    제사장을 통한 축복의 말씀이 민수기 6장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하면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말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고 하시며 이스라엘 제사장들에게 축복권을 행사하고 선포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축복권이 어디로 향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식물은 햇볕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를 잘 해줘도 하나님께서 햇볕을 위로부터 주시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햇빛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은 얼굴을 비추시고 얼굴을 향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보고 또 보고 시선 집중하셔서 그렇게 주시고자 합니다. 성경인물 야곱은 인간적이고 야비하여 속고 속이는 험난한 세월을 산 사람이지만 그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난 뒤 완전히 바뀌어 이긴 자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시고 얼굴을 비추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식물은 위로부터 주신 은혜의 햇볕을 받으려고 사력을 다해서 나아가듯 우리도 좋은 것을 주시려고 얼굴을 비추시고, 얼굴을 향하시고 눈을 떼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이 항상 머무는 사랑받는 자, 사랑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이나 요셉은 일평생 하나님의 눈길,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찾으시는 눈길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구하는 그 마음의 길이 같이 마주칠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 축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주님 보실 때 ‘참 곱다. 마음 씀씀이가 참 예쁘다’라는 주님 눈에 가득 찬 존재로 그 하나님 마음을 알아서, 하나님의 그 눈길, 그 시선이 머물게 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축복권을 23절 말씀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라고 하시며 제사장들에게 축복권을 행사하고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하나님의 그 은혜를 제사장은 전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막는 자가 되지 말고 은혜의 전달자가 되라는 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족에게나 사람들에게 쓴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축복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을 대할 때나 가족들을 대할 때 잔소리하고 지적하고 충고하면 그 관계는 깨어집니다. 사랑으로 대해야 하며 인간적인 냄새를 없애고 예수만 드러내려고 애쓰면 주님은 그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들어 쓰십니다. 신명기11장 11절 말씀에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늘 얼굴을 향하시고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머무는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눈 밖에 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좋은 곳입니다. 얼굴을 비추시고 얼굴을 향하셔서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삶속에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5-05-14
  • [성경인물탐구] 요셉 가족의 애굽 이주(6)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으로서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애굽에 양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이 고향에 있는 모든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 고센 땅에 거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흉년으로 인해 기근이 들자 베냐민을 제외한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내어 양식을 사오도록 지시합니다. 요셉의 지혜로운 정책으로 양식을 예비해 둔 애굽에는 주변의 다른 나라 백성들도 양식을 사기 위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요셉은 처음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했습니다. 결국에 요셉은 형제들 앞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제들에게 입을 맞추고 울었습니다. 또한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애굽의 종으로 판사실로 인하여 마음에 근심할 것을 염려하여 형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에 보내신 자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고백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 앞에 엎드려 절할 때 어린 시절 꿈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가 성취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제까지의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루신 일임을 알았습니다. 요셉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을 때에 형들에 대한 섭섭함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신앙은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달을 때 가능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 버린 형들을 진정으로 감격과 환희 속에 맞아들였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살아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요셉이 있는 애굽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에 야곱과 더불어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 집안의 수는 야곱의 자부들을 제외하고 육십육 명이었습니다. 여기에 요셉과 두 아들을 합하여 애굽에 거하게 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의 수는 70명이었습니다. 야곱과 요셉은 고센에서 상봉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만나 보는 것이 너무 기뻐서 이제 죽어도 더 이상 여한이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요셉은 형들과 아비의 권속들에게 일러 바로에게 목축업을 한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애굽 사람이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을 매우 천하게 여겨 고센 땅에 별도로 거하게 하고 그들과 통혼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백성이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애굽 사람들과는 별개의 신앙과 문화를 유지해 나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만일 애굽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되면 이스라엘 민족 존재 자체가 사라질 우려가 많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바로 앞에 가서 자신들의 직업이 선조 때부터 목자임을 고하며 자신들을 고센 땅에 기거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바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어 요셉에게 명하여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주어 요셉의 아비와 그 형제들로 거하게 하였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오랜 흉년 기간에도 애굽에서 풍족함을 누리며 번성하여 사대 만에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5-14
  • [교회회계] 운영성과표의 작성과 자금수지계산서 전환
    교회회계 칼럼 3회째, 오늘은 운영성과표의 작성에 대해 설명한다. 예산규모 10억원이상 교회의 경우 복식부기를 적용하고, 운영성과표를 재무제표로 작성하도록 하는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이 2013년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의해 발표되었다. 운영성과표는 기업의 손익계산서와 같은 것으로, 교회에서는 자금수지계산서(또는 예산대수지계산서)를 작성해 왔다. 그러나 이는 현금의 수입과 지출을 단순히 집계해 놓은 것으로 자산ㆍ부채의 표시는 물론, 복식부기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발생주의 회계처리를 하지 못하는 결함을 갖고 있다. 따라서 본 칼럼은 자금수지계산서를 운영성과표로 전환할 경우, 필요한 복식부기 적용방법을 실무적 관점에서 다음 3단계로 나누어 제안하고 있다. 첫째, 기존의 자금수지계산서를 그대로 살려 현금 흐름을 중심으로 수익ㆍ비용을 표시하되, 경상지출과 경상수입으로 표시한다. 즉 현금 지출ㆍ수입의 발생 원인과 경제적 효과가 당해 연도에 귀속되면 경상지출과 경상수입으로 분류한다. 경상지출과 경상수입을 별도 표시하는 이유는 그 결과가 차기이후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적 수입ㆍ지출과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현금의 수입?지출 중, 차기이후에 영향을 미치는 항목은 자본지출과 자본수입으로 표시한다. 즉 건물, 토지, 비품 등의 구입은 동일한 현금지출이라 하더라도 취득 후 장기간 사용하며, 지속적 관리가 필요하므로 발생 후 당해연도에 효과가 소멸하는 경상지출(사례비등)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 차입금은 일반 헌금수입과 달리, 차기이후 상환을 요하는 부채이므로 자본수입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이들은 결국 교회가 장기간 보유하는 자산ㆍ부채 항목이므로 재무상태표의 작성으로 연결, 관련 재산이 효율적으로 관리될 수 있도록 한다. 셋째, 현금의 유출입과 관계없이, 발생주의 개념에 따라 기말시점에서 추가적으로 수정분개를 하여 수익?비용을 인식한다. 수정분개는 ①발생, ②이연, ③평가항목 3개로 분류된다. ①발생항목은 현금의 유출입 여부와 관계없이 거래가 발생된 경우 비용xx/미지급비용xx, 미수수익xx/수익xx을 추가 표시한다. ②이연항목은 미리 지급하거나 수취한 현금액 중 차기이후에 속하는 비용과 수익은 선급비용xx/비용xx, 수익xx/선수수익xx 하여 제거한다. ③평가항목의 경우, 대여금등 회수가 어려운 채권은 대손상각비xx/대손충당금xx, 토지를 제외한 유형자산은 감가상각비xx/감가상각누계액xx, 장부가액보다 회수가능액이 현저히 하락한 경우 손상차손xx/손상차손누계액xx 등을 표시하고, 기타 필요시 공정가치에 의한 재평가손익 등을 표시한다. 마지막으로, 운영성과표에 표시되는 최종잔액 또는 순자산의 증가(50)는 총수익(800)에서 총비용(750)을 차감하여 산출하고(수익이 비용보다 작으면 순자산의 감소), 마감단계에서 재무상태표의 순자산 항목에 반영하도록 한다. 교회는 기업과 달리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므로 배당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교회가 고유목적사업이 아닌 기타 사업을 병행할 경우, 과세문제가 발생하며, 사업별로 구분된 표시가 필요하다. 1880년대에 우리나라에 기독교 복음이 처음 전래된 이후, 한국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이러한 성장과 더불어 교회의 재산가치도 크게 증가, 더 이상 현금주의 자금수지계산서 중심의 회계에 머무를 수 없는 시대에 와 있음이 분명하다. 다음호는 재무상태표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회계&성경적 회계윤리
    2015-05-14
  • [시사칼럼] 서울대 컨닝
    지난 달 서울대학교에서 치러진 중간고사 중 일부에서 부정행위가 적발되었습니다. 치기(稚氣)어린 해프닝으로 끝날 뻔 했던 이 사건은 해당 학교가 대한민국 지성의 정점이라는 서울대요(문화일보), 해당 과목이 윤리 강좌며, 해당 학과가 철학과여서 충격을 주었고, 그 파장이 지금까지도 만만치 않습니다. ‘서울대생들이 뭐가 아쉬워서?’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조금은 시대 현실과 동떨어져 살고 계십니다. 한국교육개발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취업률 평균은 56.2%입니다. 그런데 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서울대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61%로 전체 대학 순위 50위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을 알아야 서울대 재학생 절반이 A학점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국 대학에 만연한 학점 인플레의 무풍지대는 없었습니다. 지난해 전국 176개 4년제 대학 재학생 중 69.8%가 평균 B학점 이상의 학점을 받았다고 합니다(한국대학신문). 요즘 청년들은 취직을 위해서 좋은 학점뿐만 아니라 각종 자격증, 수상 경력, 심지어는 다양한 봉사 활동 경험까지 요구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이 학점 인플레와 컨닝 사태를 조장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 때문에 이번 컨닝 사태를 합리화하거나 동정할 수는 없습니다. ‘컨닝’이라는 말은 ‘교활한’이라는 형용사로 한국에서만 시험 중 부정행위를 뜻하는 말로 쓰는데, 원래 영어로는 ‘cheating’이라고 합니다. ‘취팅(cheating)’은 부정직한 사술(詐術)로써 남을 속이는 ‘사기(詐欺), 협잡(挾雜), 불륜(不倫)’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행위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바로 시험 컨닝입니다. 컨닝은 스스로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이며, 공정한 시험의 관리 감독이라는 고유의 업무를 침해하는 범죄 행위입니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부정행위에 가담한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공공연하게 학벌지상주의, 결과만능주의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도 근원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의 조류(潮流)가 바뀌지 않는 이상, 조금이라도 더 좋은 학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학점, 조금이라도 더 좋은 스펙을 얻고자 하는 학생들의 몸부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부림 가운데에는 이 정도 부정과 불법과 불의쯤은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바람직하지 않는 의지가 한두 가지 게재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문제는 그 누구도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담론(談論)을 가르치지도 제시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다원주의 철학이기 때문에, 거기 함몰된 이 세상은 진리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끊임없이 무엇이 옳은가, 즉 공의(미쉬파트)와 정의(체다카)를 말씀합니다. 그것도 추상적인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인 적시(摘示)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해롭게 하지 말라’(신 10장),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신 16장), ‘저울추를 속이지 말고 되나 말로 속이지 말라’(신 25장)와 같은 구절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아무리 부와 권력과 명예를 누려도 그것이 사회적 약자들을 압제하고 수탈하여 얻은 결과라면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롭지 못합니다. 부정직하고 부당한 수단, 방법을 통해 무언가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절대 떳떳하지 못한 독수독과(毒樹毒果)에 불과합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전도(顚倒)된 이 세상 앞에 교회가 외쳐야 할 말씀이 여기 있습니다. 미래를 책임질 이 시대의 후학(後學)들에게 교회가 가르쳐야 할 말씀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05-14
  • [소강석 칼럼] 사모곡(思母曲)
    2005년 12월 21일 밤, 남도의 들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밤, 어머니는 나의 곁을 떠나셨다. 그렇게도 수많은 사경을 헤매시더니, 이제는 정녕 지상의 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 영원한 본향이 있는 곳 천국으로 떠나가셨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도 다시 살아나셔서 나의 손목을 붙잡고 “막내야, 미안하다. 다시 살아브렀다.” 눈물지으시던 어머니… 이제는 다시 그 야윈 음성조차 들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셨다. 어린 시절 술에 취한 아버지께서 몽둥이로 뒷마당의 장독 항아리들을 두드려 깰 때면 “아따 잘 한다, 잘해, 다 깨 버려라, 다 깨 버려!” 삿대질을 하시며 맞고함을 치실 정도로 도도하고 굽힐 줄 모르던 자존심을 가지셨던 어머니, 우리 막내아들 절대로 2등은 안 된다며 일등만을 고집스럽게 요구하시던 어머니… 그 욕심 많은 사랑을 지상에 남겨 둔 채 함박눈 펑펑 쏟아지던 밤 끝내 떠나시고 말았다. 어린 시절 마을의 상여가 나갈 때 마다 막내 아들이 공포를 들어 용돈으로 100원을 받고 공포에 달린 삼베조각을 떼어다가 드리면 어머니는 정월 대보름처럼 환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막내가 살림꾼이구나…” 그때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그 따뜻한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워 이 밤, 가슴이 미어지는데, 어머니는 끝내 흰 꽃잎 같은 눈송이들 하얀 수건처럼 머리에 얹고 이별이라 손짓하며 영원한 본향으로 떠나가셨다. 막내아들이 예수 믿는다고 그 모진 회초리로 매질을 하시며 예수 믿으려면 차라리 집을 나가버리라고 온갖 핍박을 하시더니 이제는 그렇게 대적하던 예수님 믿고 하늘의 꽃가마 타고 천국으로 가셨다. 그런데 오늘 이 밤, 예수 믿는다고 회초리로 저를 때리시던 어머니가 너무도 그립다. 차라리 종아리에서 피가 터져 나와도 좋으니 다시 한 번 어머니가 일어나셔서 회초리를 들고 나를 때리실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도 매를 맞다가 홀로 울며 집을 나오던 그 해 겨울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 그때 어머니는 집을 나오던 나를 향해 “썩을 놈아, 이렇게 키워 놓으니까 부모는 안중에도 없냐? 이놈아, 그렇게 하나님이 좋고 예수가 좋으냐? 부모 말을 안 듣는 놈은 자식도 아니니 어서 나가버려 이놈아!” 얼마나 속이 상하고 마음이 찢어졌으면 이런 말을 하셨을까. 원래 어릴 적부터 효자가 되어 부모님을 잘 모시고 싶은 꿈이 있었다. 가난하게 사시던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효자의 꿈 말이다. 그런 순수한 효자의 꿈을 꾸던 나는 어느 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불효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을 하다 보니 결국 부모님께는 불효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 때문에 부모님이 예수 믿고 천국 가시게 되었으니 영적으로 말하자면 효자 중의 효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동안 육신적으로 볼 때는 못 된 불효자였다. 어머니가 마지막 떠나가시는 길, 따뜻하게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한 불효자의 가슴이 저리지 않을까. 5월이 되면 어머니가 더 사무치게 그립니다. 천국에 계실 어머니께서 주님 앞에 더 큰 천국 상급을 받고 크게 칭찬받으시리라 믿으며 불효자는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한 몸 으스러질 때까지 일사각오의 신념으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리라 다짐한다. “어머니, 천국에서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목양일념의 한 길 잘 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세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15-05-14
  • [성서연구] 물꼬를 트는 사람은 누구인가(사무엘상 17장 31-40장)
    다윗은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돋보이는 자리를 점하고 있는 독특한 인물입니다. 복음서의 문을 여는 마태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도 다윗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기의 한 복판에도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고, 나치 치하에서 유태인을 드러내는 표지는 가슴에 붙어 있는 다윗의 별이었습니다. 더구나 메시아를 예언하면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다>고 표현함으로써 메시아를 다윗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어쨌든 다윗은 명실상부한 성경의 중심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떤 인물일까요? 본문에서 다윗은 <꽉 막힌 물꼬를 트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큰 전쟁이 발발했을 때, 다윗이 아버지 이새의 보냄을 받아 형님들의 위문을 갔을 때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큰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블레셋에서는 골리앗이 나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독하면서 싸움을 돋우고 있었지만, 이스라엘 중에는 사울 왕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골리앗과 싸울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숨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답답한 상황이었고, 정말 위기였습니다. 이 때 다윗이 그 어려운 상황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영이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우선 그에게는 큰 용기가 생겼습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 왕에게 <그로 말미암아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사울 왕이 백성들에게 했어야 할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소년 다윗이 왕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관을 쓴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면 용기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실 때도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다락방에 임한 후에도 사도들에게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그들이 더 이상 숨어있지 않고. 용기 있는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다른 이의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신이 앞장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어떻습니까? 그는 다윗은 소년이요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라고 말하면서 다윗을 만류하였습니다. 물론 사울 왕의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분석은 정확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상황 판단과 분석으로 전문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도자란 분석과 설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타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물꼬를 트기 위해 골리앗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왕관을 쓴 사울보다 다윗이 실질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러했기에 사람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환호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다윗은 맹수와 맞서 양떼를 구원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생명을 거는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그에게 맡기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는 맹수와 같은 주변 나라에 맞서서 이스라엘을 지킬 선한 목자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물꼬를 터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답답한 대한민국 상황,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 물꼬를 터 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길 소망합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골리앗을 쓰러뜨려 물꼬를 트는 이 시대의 다윗 역할을 감당하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5-05-1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버이 주일 유감(有感)
    어버이 주일, 원래는 어머니 주일 어버이 주일로 바뀐 것은 아쉬워 오늘의 어버이 주일은 처음부터 어버이 주일이 아니고 어머니 주일로 시작되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는 ‘안나’라는 소녀가 자기 어머니 추모예배에 참석한 손님의 가슴마다 카네이션 꽃을 달아 드렸다. 안나양은 해마다 그 날이 돌아오면 추모예배를 드렸고 참석하는 이들의 가슴에 꽃을 달아 드렸다. 그렇게 하던 중 대실업가 와나메이커에게 “한 날을 정하여 모든 어머니의 은덕을 기리는 날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같이 제의했다. 와나메이커가 5월 둘째주일을 그렇게 하는 날로 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어머니의 은덕을 기리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소문이 전국에 두루 퍼졌고 1914년엔 미국 국회에서 이 날을 ‘어머니 날’로 정하고 지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재직 시에 ‘어머니 날’을 정했는데 그 해 5월 둘째주일이 8일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주일과는 상관없이 해마다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지키도록 하였고 교회에서는 날짜와 상관없이 5월 둘째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시초에는 ‘어버이 주일’이 아니고 ‘어머니 주일’이었는데 1973년에 ‘어머니 주일’이 ‘어버이 주일’로 변경되었다. 필자는 ‘어머니 주일’이 ‘어버이 주일’로 변경된 것만 생각하면 못내 아쉽다. 물론 부성애도 갸륵하지만 모성애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숭고한가. 어머니의 사랑은 한없이 숭고하고 희생적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것은 주고 받는 법칙으로 되어 있다. 받기 위해 주고 주고는 받기를 원한다. 친구간의 우정도, 남녀간의 사랑도, 심지어 부부간의 애정도 주고 받는 사랑이다. 받은 것 만큼 줘야하고 준만큼 받아야 한다. 준만큼 받지 못할 때 불만이 생긴다. 애정의 비극은 한 쪽이 준만큼 받지 못하고 받은 것 만큼 주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이러한 주고 받는 사랑의 차원을 훨씬 초월한 사랑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주고 주고 또 주고 아낌없이 준다. 어머니의 사랑은 주기만하는 희생적인 사랑이다. 뿐만아니라 어머니는 강하다. 빅토르위고가 한 말처럼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의 강한 정신력은 모성애에서 표현된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 고생은 고생으로 여기지도 않고 자식을 위한 희생은 희생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자신의 고생과 희생으로 자식만 잘 되면 그 이상 바라지 않는다. 얼마나 강하면 그렇겠는가. 어머니의 은덕은 마땅히 누구나 다 기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5-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