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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겨루어 이긴 자 (창세기 32:24~28)
    저는 성경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얄미운 사람이 야곱인데 시간이 흘러갈수록 야곱과 제가 너무나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잔꾀를 부리고, 남을 속이고, 자기가 고백한 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인물은 태생적인 한계가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시작하는 말씀이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32:24) 인생외톨이로 평생 고독한 싸움을 싸웠던 사람이 야곱이었고, 기질 상으로 남에게 지고는 못살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야망의 사나이가 야곱입니다. 일평생을 그렇게 늘 외롭고, 목이마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야곱이라고 봅니다. 저는 야곱의 기질 중에 가장 독특한 것이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님하고 다투고, 태어날 때부터 형님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오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하는데 포기하지 않고 질수 없는 씨름을 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샅바를 잡고 놓지 않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는 이유가, 오늘 내 삶의 스타일을 보고 요즘 만나는 사람들을 볼 때 너무 약하다는 겁니다. 맷집이 없고 끈기가 없고 전투력이 없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울고, 너무 쉽게 상처받고, 너무 쉽게 포기하고 도무지 내공이 없습니다. 사탄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온갖 간교와, 속임수와, 사탕발림으로 덤비는데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무장해제 되어있습니다. 샅바도 잡기 전에 기권하고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여러분 야곱이 좋다 나쁘다 하기 전에 갖고 있는 강점이 지기 싫어하는 욕심입니다.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이 있는데 그것을 야곱이 가지고 있고 지기 싫어하는 이것이라고 봅니다. 이걸 갈증과 긍정과 열정이라고 봅니다. 갈증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목마름에 본능적으로 찾아다닙니다. 오늘 성도들이 살아갈 때에 야곱이 가지고 있는 기질,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이 기질 이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져주시는 하나님께서 30절에『그러므로 야곱이 그곳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드디어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난 뒤에 독대, 직고, 대면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봄눈 녹듯이 녹습니다. 만사가 해결이 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고『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32:31) 해가 돋았다는 사실, 드디어 불안에 쫓기면서 속고 속이는 삶을 살았던 야곱의 인생에 서광이 비춰지고 이제는 인생이 전혀 새로워집니다. 흑암의 권세, 어둠은 사라지고 햇살이 떠오를 때 야곱이 절뚝거리면서 걸어가는데 그의 몸은 절었지만 그의 인생은 방황 없이 똑바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꺾어진 경험, 영적인 씨름을 한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맷집이 나오고 내공이 형성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긴 자에게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십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 살리고 윈윈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긴 자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를 주셔서 세마포 흰옷을 입히시고 세마포 흰옷 입은 자만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입장이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기둥같이 쓰임 받고,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환란은 벗어나고, 사망을 이기는 자가 됩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새벽 비를 주시고, 주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하십니다. 할렐루야!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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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2015-04-02
  • [성경인물탐구] 애굽의 총리가 요셉(5)
    요셉은 술 관원장의 추천으로 바로 앞에 나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써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풍년 뒤에 따라올 흉년을 대비함으로써 기근으로부터 애굽과 주변 나라 백성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석하는 자가 없으므로 번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꿈의 내용은 바로가 하수가에 섰는데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그 뒤에 흉악하고 파리한 소가 살진 일곱 소를 먹었습니다. 바로가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은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세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켰습니다. 바로는 그 꿈의 정확한 의미는 몰랐지만 뭔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로가 꿈의 해석자를 찾고 있을 때 술 맡은 관원 장은 2년 전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의 꿈을 해석하여 석방과 복직을 예언했던 요셉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바로에게 요셉에 대해 고하였습니다. 요셉은 바로 앞에 불려 나갔고 바로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해석은 칠 년 동안 큰 풍년이 든 후에 이어서 칠년 동안 큰 흉년이 들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속히 행하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앞일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를 세워 풍년이 들 동안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에 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면 흉년으로 인한 멸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의 해몽을 들은 바로 왕은 요셉과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말하면서 애굽의 모든 백성을 치리하라고 명하였습니다. 바로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지혜를 주셔서 꿈의 해석을 알게 하셨음을 고백하며 요셉을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바로는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가 타는 버금 수레에 태우고 모든 백성으로 절하게 하였습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 와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까지 하던 요셉이 애굽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아비 집에 거할 때에 꿈을 통해 요셉을 높이실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이 오랜 세월을 거쳐 요셉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음을 믿었기에 억울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소망과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요셉의 고난과 인내의 세월이 결국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랜 고난의 시간을 통하여 요셉의 인격과 신앙을 연단시키시고 때가 이르자 요셉을 높이 드셔서 이방 나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은 애굽 백성과 함께 주변 여러 나라 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요셉은 복의 근원으로서 주변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나누어 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의인 한 사람을 통하여 여러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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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가정칼럼] 집 문 앞에 있어야 할 쓰레기 통
    퇴계 이황은 부부 갈등을 겪는 제자에게 ‘부부간에 도리를 지키는 것은 힘들지만 이것이 가정 행복의 근본이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이황은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선조 임금의 부름을 받음은 물론 학문으로도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평소 이황의 인품을 믿었던 스승이 자신의 딸을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 딸은 어릴 때 사화를 겪은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이황은 스승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 어린아이처럼 철없는 아내의 행동을 감싸 주며 평생 남편의 도리를 다하며 살았다. 평소 부부가 서로 이해하며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아는 이황은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제자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제자에게 편지를 써 주며 말했다. “편지를 여기서도 말고 집에 들어가서도 말고, 집에 도착하면 사립문 앞에서 읽게.” 제자는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스승의 명이라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스승의 말대로 집 사립문 앞에 도착해서 스승이 써 준 편지를 뜯었다. 그 내용은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읽으라고 한 이유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립문은 가정과 세상의 경계 지점이네. 가정은 세상의 가치가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네. 집 밖에서 있었던 울분과 괴로움은 집안으로 들이지 말고 사립문 앞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들어가야 하네. 이것이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읽으라고 한 이유이네. ……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네.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또한 가장 조심해야 하는 사이이므로 늘 손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아내에게 예를 다하게. 그럼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평생 이해하며 살 수 있을 것이네.” 한 순간의 분노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한다. 세계최고의 여자골퍼 캐리 웹이 자신의 어이없는 플레이에 화가 난 나머지 골프채로 모래를 내리쳤다가 2벌 타를 먹고 우승을 놓친 일이 있었다. 결국 1타차로 준우승, 우승 상금까지 놓치고 말았다. 그 흥분의 대가는 무려 5천4백만 원이나 되었다. 과연 나는 내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을까? 마음을 다스리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다. 가정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바이러스와 같아서 순식간에 가족들을 전염시켜 고통스럽게 만들고야 만다. 집에 들어서기 전에 그 쓰레기통에 사회에서의 절망, 한숨, 욕망을 모두 뱉어 버리고 집안으로 들어갈 때 가정은 행복해 진다.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 일하러 가기 위한 준비는 철저히 하는데 가정의 행복이 시작되는 퇴근 시간을 준비하는 데는 무신경하다. 가족이 행복하지 않고서는 절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가족에게 불행 바이러스 대신 행복 바이러스를 심으려면 퇴근하여 대문을 열기 전 속세의 모든 걱정과 분노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밝고 환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 보면 어떨까?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분이 있었다. 영업부 세일즈맨으로 시작해 사장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세일즈맨으로 입사해서 사장이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성공의 비밀은 가정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소리를 하던 전형적인 남편이었지만 어느 순간 가정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고, 그래야 일도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한 가지를 지켰는데, 일을 마치고 들어서는 집 앞에서 크게 한숨을 쉬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 마지막 고객을 만나러 왔다.” 어떻습니까? “나는 오늘 마지막 고객을 만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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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시사칼럼]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다
    어느덧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래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최윤식 박사가 신간을 냈습니다. 2년 전 발표했던 첫 번째 책에 이어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2』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에서 최 박사는 향후 10년이 한국교회의 사활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자료와 증거를 수반한 실증적 논리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더 무섭습니다. 구체적이면서도 무섭다고 말하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대략 이런 내용에 근거합니다. “2013년 기준으로 은행들이 교회에 대출 해 준 금액은 총 4조 5천억 원에 달한다. 매년 한국교회가 부담해야 할 이자는 2,250~5,000억 원, 매달 드려지는 헌금 중 187~416억 원이 이자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규모의 이자를 꼬박꼬박 내려면 매주 1,000~2,000원 씩 주일 헌금을 드리는 500~800만 명의 교인들이 필요하다. 원금을 갚으려면 매주 지금보다 2~3배 더 헌금해야 한다. 이는 현 목회자와 장로들이 은퇴한 후에도 교인들은 교회에 남아 20~30년을 계속 헌금해서 갚아야 하는 수치다.” 그에 따르면 2005년 기준 한국의 기독교인 수는 이단을 포함해 870만 명 정도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정상적인 헌금과 재정 운영상으로는 이자만 겨우 낼 수 있을 뿐이며, 은행에서 빌린 원금은 거의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입니다. 후발 베이비 붐 세대의 전격적인 은퇴가 시작되는 2028년부터는 상황이 더 악화될 전망입니다. 재정능력이 현격히 줄어드는 이들을 대신해서 밑으로부터 후세대가 치고 올라와야 하는데, 청소년부와 청년부가 위축이 아니라 소멸되기 일보 직전인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몽상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10여 년 후 한국교회가 빈번하게 맞닥뜨리게 될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파산(破産, bankruptcy)’입니다.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라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논리로 따졌을 때 예상되는 이러한 파국을 막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최 박사는 최근 CTS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마지막 골든타임은 앞으로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이며, 앞으로의 2~3년이 미래 방향을 바꾸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바로 시행해야 할 단기적 응급 처방과, 장기적으로 붙들고 가야할 성경적 근본 해법을 모두 알고 성경의 요셉처럼 지혜롭게 적용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한국교회가 미래세대를 살리기 위해 역량을 총집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주일학교 교사요 미래세대 사역자였습니다. 보기 드물게 주일학교와 미래학을 섭렵한 그가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내놓는 이 대안은 거의 유일무이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교회를 떠나는 청년세대들의 발걸음부터 붙잡는 일이 시급합니다. 이들이야말로 10여 년 뒤의 은퇴자들을 대신해서 교회의 중추를 감당할 잠재적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심각합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속도나 숫자가 아니라, 기성세대들이 도무지 그 사태의 본질과 중요성과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청년들이 교회를 향해 냉담을 넘어서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여기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으며, 그에 따른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청년들을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할 방법이란 전무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그 해법을 가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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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서임중 칼럼] 부서지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어렸을 때 둘째 형과 함께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모래밭에 앉아서 집을 짓고 즐기던 생각이 난다. 형은 형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모래집을 지어 가다가 형이 실수하여 내가 잘 지어 놓은 집을 발로 뭉개버렸고 나는 앙앙거리면서 울었었다. 미안해하는 형이 “내가 다시 지어줄게.”라고 하면서 나를 달래 보지만 막무가내로 울어대는 나에게 형이 화가 나서 외친 말이 있었다. “부서졌으면 새로 지으면 될 것 아니냐. 새로 짓는 집은 더 좋게 지을 수 있는 거야” 그러면서 형은 울고 있는 나를 그냥 두고 형이 지은 모래집을 발로 휘휘 뭉개 버리고 먼저 일어서 가 버렸다. 뒤따라가면서 “형아! 내가 잘못했어.”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내 머리를 툭 치면서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하면서 씩 웃어 주던 형의 얼굴과 그때 하신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설계한다. 그리고 그 설계대로 자기 인생의 집을 만들어간다. 그러다가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며 만들어 가던 집이 부서질 때를 경험한다. 이때 무너지는 사람이 있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 종종 언론에 보도되는 연예인 자살사건을 보면서 자괴감에 마음이 닫히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유명 연예인의 자살 이후 장례식 장면이 보도되는 것을 보면 영정 앞에 ‘성도’, ‘집사’ 아무개라는 위패를 볼 수 있다. 자살은 죄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은 결코 자살로 마감될 수 없다. 소위 죽을 각오로 살려고 마음먹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는 이치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수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헛된 신앙의 옷을 입고 살았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모리스 프랭크(Morris Frank)는 미국 권투계 유망주였다. 그런 그가 시합에서 눈을 심하게 다쳐서 실명(失明)하게 되었다. 의사 두 명이 모두 그에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선언을 했다. 프랭크의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랭크에게 있어서 인생의 최후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맹인들을 위하여 “the seeing eye” (보는 눈)이란 별명을 가진 안내견(案內犬)을 훈련시켜 맹인들의 길잡이 친구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프랭크는 눈을 잃었지만 거기서 자기의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눈을 열어 보다 나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창출한 것이었다. “신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옛 히브리 격언이 있다. 흙이 부서져서 곡식을 낸다. 곡식이 부서져 빵이 된다. 빵이 부서져 우리 몸의 에너지가 된다. 포도가 부서지고 장미 꽃잎이 부서져서 극상 포도주와 샤넬넘버 5 같은 최고의 향수도 만들어진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을 갖추려면 충분히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함을 깨닫게 해 준다. 예수님은 날마다 부서지는 생활을 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모진 말을 들으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슬픈 현장의 중앙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살과 뼈를 부서뜨리면서 날마다 부서지는 날들을 사시면서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었다. 주님의 부요함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해방되었고(고후8:9), 주님의 육체가 부서지면서 많은 병든 자들이 건강함을 입었고(벧전2:24), 그의 축복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저주에서 해방되었고(갈3:13), 그의 생명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막10:45, 갈2:20) 이와 같은 진리를 알게 된 바울이 자기를 부서뜨리면서 이방 선교의 장을 열었다.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자기를 부서뜨리면서 만들어 낸 결과가 모든 이들의 평화와 축복이었다. 부활이 무엇인가?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부활신앙이 무엇인가? 절망에서 희망이다. 부활신앙인의 삶이 무엇인가?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소중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부서질 때 우리는 절망할 것이 아니라 부서지면 또 다른 좋은 것을 지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열어야 한다. 새로 짓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내 편견과 아집, 교만이 부서지고 모두의 삶이 아름다움으로 연주될 때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 이기주의가 부서지고 이타주의가 꽃피워지는 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 은퇴 후 요즈음의 나의 삶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하나, 둘씩 부서지고 있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서지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부서진다고 끝이 아니다. “부서졌으면 새로 지으면 될 것 아니냐. 새로 짓는 집은 더 좋게 지을 수 있는 거야.” 어김없이 맞게 되는 2015년의 부활절에 어릴 때 형의 말이 새삼 주님의 말씀으로 들려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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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성서연구] 안식 후 첫 날(마태복음 28장 1-10절)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안식 후 첫날 새벽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되었고, 그 후엔 제자들이 무덤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고, 나중에는 오백 여명의 사람들에게 일시에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은 이 부활 사건 위에 기초하여 선포되었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은 안식 후 첫날 이루어진 것일까요? 여기엔 귀중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날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이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말씀된 십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일을 중지하고 쉬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몸과 마음이 모두 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안식 후 첫 날 전해진 것은 그 전 날의 안식이 거짓 안식임을 밝히고, 비로소 진정한 안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안식일라 여기던 그 날은 어떤 날이었습니까? 우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빌라도 총독 등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었기에, 그저 모든 유대인들이 쉬기 때문에 총독도 업무를 쉬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 날 내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로 마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도 이 날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날 내내 십자가 처형 사건이 몰고 올 후폭풍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고, 또 예수님께서 평소에 예고하신 대로 부활하실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군인들을 무덤에 보내 지키게 했고, 하루 종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참된 안식이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이들에게도 참된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제자들은 사랑하던 선생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메시아로 고백하고 믿었던 분을 배신한 죄책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모인 곳의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후에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 염려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서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아닌 일반 주민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 모두도 안식일이 되었을 때 하던 일을 중단하고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참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의 집에서는 아이가 아파 고통 받았을 것이고, 어떤 집에서는 가족이 죽었을 것이며, 어떤 집에서는 분노로 가족 간에 갈등을 빚었을 것입니다. 그 날은 이름은 안식일이어서 모든 일을 그치고 쉬고 있었지만, 참된 안식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 안식이 끝난 다음 날 새벽 온 세상에 진정한 안식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진정한 안식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죽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극복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죽음은 사람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책감에 몸부림치던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그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거짓된 안식에 속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진정한 안식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거짓 안식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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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는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 예수의 부활은 필연적인 사건이기에 그는 부활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어 - 우리는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할 때에 세가지 면에서 생각한다. 첫째는 불연성이다. 그런 사건이 일어날리가 있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은 개연성이다. 그런 것 같기는 하나 확실하진 않다는 것이다. 셋째는 필연성이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필연적인 사건이다. 그는 부활하실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는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첫째 이유는 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 하셔야 했다. 그는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몇번이고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놓고서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는 사기한이 되고 말지 않는가. 그는 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 두번째 이유는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그가 사역하실 때에 가장 심각한 논쟁의 초점은 그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던 점이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롬 1:3) 세번째 이유는 그에게 속한 성도의 부활을 성립시키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고전 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부활하셨고 그에게 속한 성도들도 따라서 부활하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고전 15:22~23) 네번째 이유는 진리는 결국에 가서 이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만의 하나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진리가 비진리에게 패한 것이 되고 빛이 어두움에 삼킨 것이 되고 생명이 사망에게 정복당한 것이 되고 말지 않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마침내 이기고 만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 다섯번째 이유는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으므로 당연히 부활하여 영광을 얻으셔야 했다. (눅 24:25~26) 바울은 말하기를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다. (빌 2:6~10) 그는 어느 면으로 보든지 당연히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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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12)
    사람들은 과거를 묻기 좋아한다. 과거의 실수를 따지기 좋아한다. 어떤 사람의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을 무슨 큰 비밀이라도 손에 넣은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소문내기를 좋아하는 참으로 나쁜 본성이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엄격하고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자들이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한채 정죄하고 비난하고 상처를 가한다. 즉 그 사람을 두 번 세 번 계속 죽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인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겠으나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는 정말 이런 위험한 습관은 진지하게 반성하면서 철저히 고쳐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용서하지 않고 거듭 정죄하고 비난하므로 말미암아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탈진한 사람,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의 회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무기>들이 있다. 입에 담기조차 무섭고 끔찍한 말 가운데 <살상무기 殺傷武器>라는 말이 있다. 핵무기, 독가스, 세균戰이라는 단어는 정말 미련하고 야만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타락한 인류사회>에는 이런 치명적인 무기들이 여러 나라들에 무수히 준비되어있다. “사람을 살리라. 쓰러져가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이거늘 이와는 정반대로 치닫는 인생을 보면 우리 인생이 <타락한 원 조상 아담>의 후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살상무기 못지않게 사람을 죽이는 또 다른 치명적인 무기(A Deadly Weapon)들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 바로 우리의 입 속에 가지고 있다. 1. 조롱하기 전설적인 권투선수 무하마든 알리(본명 캐시어스 클레이)는 상대 선수를 기어이 이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전술들을 사용하였다. 그 중 하나가 <나비같이 날아서 벌 같이 쏜다> 였다. 실제로 알리 선수는 링 안에서 쉬지 않고 뛰어다닌다. 그의 발걸음은 헤비급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경량급 선수처럼 가볍고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링 안에서 이쪽으로, 저쪽으로 방향을 연신 바꾸어 가면서 움직이고 뛰니까 상대방 선수는 도무지 알리를 잡을 수 없다. 주먹을 휘둘러 보았자 계속 헛손질일 뿐이다. 그리고 하도 알리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다니니까 상대선수는 눈이 피곤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점점 신경질이 나면서 마음이 흐트러진다. 알리를 쫓아다니다가 마침내 스스로 힘이 빠져버린다. 제 풀에 지쳐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혼란에 빠지고 싸울 의욕을 잃어갈 때 알리 선수의 그 빠르고 폭발적인 주먹이 거침없이 날아 들어온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선수들은 몸과 마음이 혼란스러워져있는 상태에서 한 방을 맞으니 맥없이 주저앉아 버린다. 무하마드 알리는 숱한 승리를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버리는> 이 전법(戰法)으로써 수많은 도전자들을 때려눕혔다. 그러나 무하마드 알리가 거둔 무수한 승리의 전법 중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그 전법이야 말로 <치명적인 무기 A Deadly Weapon>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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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교회법률상식]교회 정관, 총회헌법과 상충되면 효력 없어
    -당회장과 장로 2분의 1의 출석으로는 당회 개회도 할 수 없어 -장로 3인 이상인 당회는 장로 과반수이상 출석해야 개회 성수 교계의 언론에 보도된 신문 기사를 읽는 중에 모 교회의 정관 제9조(당회의 의사 및 의결 정족수)에 “당회의 결의는 당회장과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과 출석회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 상위법우선의 원칙에 반한 헌법과 상충된 규정 모 교회 정관 중에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은 상위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장로 과반 수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과 상충된다. 그러므로 모 교회 정관 제9조는 “규칙은 헌법을 우선하지 못하고, 치리회의 결의는 규칙을 우선하지 못하고, 노회 결의는 총회 결의를 우선하지 못하고, 당회 결의는 노회 결의를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규정이요, 만일 시행했을 경우에는 결의무효 소송의 법적 시비가 다분한 규정이다.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면 모 교회의 정관 제9조에 “당회장과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은 교회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규정한 “당회에 …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와 당회장(필자 주: 목사 1인은 당회장을 의미함)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는 내용과 정면으로 상충되기 때문에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규정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장로가 과반수가 출석하였을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장로 2분의 1이 출석하여 결의한 모든 안건은 헌법에 규정한 과반수의 출석이 아닌 2분의 1이 출석하여 개회하였기 때문에 개회 성수에 미달된 회원의 출석으로 개회하여 안건을 처리한 것은 불법 결의라는 말이다. 2. 실정법상 법정 시비가 다분한 규정 이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는 실정법상으로 교회에서는 교회 헌법을 상위법으로 인정하지만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 헌법보다 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것이 판례에 의한 현실이기 때문에 교회 내부에 혼란이 야기될 것은 기정사실이다. 즉 본 규정에 의한 법정 소송이 야기되었을 경우 교회 재판에서는 장로 2분의 1의 출석으로 당회를 개회하여 안건을 처리한 사건은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규정한 “장로 과반수의 출석”에 반하는 장로 2분의1이 출석하여 불법 당회를 하였으므로 무효로 처리 된다. 그런데 이에 불복하고 당회가 교회 정관에 의한 합법을 주장하면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면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 정관을 우선하여 당회의 결의를 정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허다하여 교회에 혼란과 막대한 손실을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3. 결론 본건에 관하여 모 교회는 교회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을 “장로 과반수의 출석”또는 “장로 과반 수 이상의 출석”으로 조속히 개정해야 하고 차제에 정관 전체를 검토하여 교회 헌법과 상충되는 조항은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개정하거나 폐기하고 헌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바람직하다하겠다. 만일에 모 교회가 이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는 노회가 지도하여 교회로 하여금 이미 알려진 교회 정관이 헌법과 상충되는 부분은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개정하도록 선도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각 교회들과 노회와 총회 역시 헌법과 상충되는 모든 정관이나 규칙은 반드시 개정해야 하고 헌법과 상충되는 결의를 해서도 안 된다. 교계의 언론에 보도된 신문 기사를 읽는 중에 모 교회의 정관 제9조(당회의 의사 및 의결 정족수)에 “당회의 결의는 당회장과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과 출석회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 상위법우선의 원칙에 반한 헌법과 상충된 규정 모 교회 정관 중에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은 상위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장로 과반 수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과 상충된다. 그러므로 모 교회 정관 제9조는 “규칙은 헌법을 우선하지 못하고, 치리회의 결의는 규칙을 우선하지 못하고, 노회 결의는 총회 결의를 우선하지 못하고, 당회 결의는 노회 결의를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규정이요, 만일 시행했을 경우에는 결의무효 소송의 법적 시비가 다분한 규정이다.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면 모 교회의 정관 제9조에 “당회장과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은 교회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규정한 “당회에 …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와 당회장(필자 주: 목사 1인은 당회장을 의미함)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는 내용과 정면으로 상충되기 때문에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규정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장로가 과반수가 출석하였을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장로 2분의 1이 출석하여 결의한 모든 안건은 헌법에 규정한 과반수의 출석이 아닌 2분의 1이 출석하여 개회하였기 때문에 개회 성수에 미달된 회원의 출석으로 개회하여 안건을 처리한 것은 불법 결의라는 말이다. 2. 실정법상 법정 시비가 다분한 규정 이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는 실정법상으로 교회에서는 교회 헌법을 상위법으로 인정하지만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 헌법보다 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것이 판례에 의한 현실이기 때문에 교회 내부에 혼란이 야기될 것은 기정사실이다. 즉 본 규정에 의한 법정 소송이 야기되었을 경우 교회 재판에서는 장로 2분의 1의 출석으로 당회를 개회하여 안건을 처리한 사건은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규정한 “장로 과반수의 출석”에 반하는 장로 2분의1이 출석하여 불법 당회를 하였으므로 무효로 처리 된다. 그런데 이에 불복하고 당회가 교회 정관에 의한 합법을 주장하면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면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 정관을 우선하여 당회의 결의를 정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허다하여 교회에 혼란과 막대한 손실을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3. 결론 본건에 관하여 모 교회는 교회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을 “장로 과반수의 출석”또는 “장로 과반 수 이상의 출석”으로 조속히 개정해야 하고 차제에 정관 전체를 검토하여 교회 헌법과 상충되는 조항은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개정하거나 폐기하고 헌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바람직하다하겠다. 만일에 모 교회가 이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는 노회가 지도하여 교회로 하여금 이미 알려진 교회 정관이 헌법과 상충되는 부분은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개정하도록 선도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각 교회들과 노회와 총회 역시 헌법과 상충되는 모든 정관이나 규칙은 반드시 개정해야 하고 헌법과 상충되는 결의를 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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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성공칼럼] 두 개의 돌판
    하나님과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람이 생명을 얻으며,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며, 모든 관계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갈라지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제물이 갈라지고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반석이 갈라지고 성막이 갈라지는 것이 나온다. 그 갈라진 그 사이에 하나님이 지나가시고, 하나님이 지나가시면 모두가 사는 일이 생기고, 자유와 기쁨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두 돌판 위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한 돌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한 돌판은 생활 속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계명은 반드시 두 돌판이 모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하나 됨은 깨지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내용 중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이며 자신을 위하여 우상이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과 진리가 둘 일 수는 없다. 생명의 근원과 진리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이 하나를 잃으면 그 즉시 죽음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상이나 자연에게 복을 빌면서 섬긴다고 하자. 조상을 섬기는 것, 자연을 섬기는 것, 심지어는 사람이 만든 돌이나 사람이 만든 그림에게 절하는 것 등은 생명의 근원을 버리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상이나 해와 달, 별은 존재자체가 감사한 일이지만 숭배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다. 피조물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해서 그 생명이 피조물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리면 당장은 괜찮아 보일지라도 조금 있으면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의 내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생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 사랑하면서 악을 행한다면 이것은 사랑한다는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 것이다. 사랑에 어찌 거짓과 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악한 행동 속에는 그 어떤 신의 본성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며 선이기 때문에 선한 말과 선한 행동에서 사랑, 기쁨, 진리가 드러나고 생명력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십계명에서 내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세상의 모든 선을 농축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는 드릴 돈이 없다고 하면서 교회에는 헌금을 하고, 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이것은 제 5계명을 어기는 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기부금을 내거나 교회의 봉사와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생활 속에서 악을 행하면 아쉽지만 하나님과의 하나됨은 깨지게 되는 것이다. 행복한 결혼에도 사랑과 선,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마음속에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둘 사이에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면 당연히 결혼은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 표정이 화가나 있거나 말이 거칠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악이 있으면 이 관계는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의 삶이 다하면 가게 되는 천국과 지옥이란 어떤 곳이며 어떤 사람이 가는 곳일까?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며, 지옥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천국과 지옥은 이미 내 삶속에서, 부부 생활 속에서,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 만들어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고 있는가? 이 두 개의 돌판을 늘 가슴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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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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