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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페미니즘과 역차별
    최근 ‘이슬람 제국(IS)’에 가담한다면서 터키에서 실종되어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고교생 김모군(18)은 인터넷 트위터에 ‘페미니스트가 싫어서 IS가 좋다, 이제는 남자가 차별 받는 시대’라는 취지의 글을 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 시대의 차별과 평등에 관해 얼마만큼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2011년 77명의 무고한 인명을 앗아간 노르웨이총기난사사건의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당시 32세) 역시 페미니즘을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feminism)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하는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고 실질적인 양성 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운동이나 성향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거꾸로 남성들이 차별을 받는다면 이를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역차별을 주장하려면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동일한 사회적 영역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과되는 소수자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이 존재해야 합니다. 여성고용할당제와 같은 경우가 되겠습니다. 둘째는 이러한 구체적인 우대정책으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자입니다. 여성 우선이라는 원칙 때문에 점수가 월등하게 높음에도 불구하고 탈락한 남성지원자가 이에 해당합니다. 터키에서 실종된 김군이나 노르웨이사건의 범인은 아무래도 이러한 원래적 의미의 역차별 사례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역차별 문제가 거론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소수자를 위한 적극적 우대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이제 페미니즘과 그로 인한 역차별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단계에 와 있을까요? 최근 어린이집 학대 사건이 국민들의 공분(公憤)을 사자 그 여파가 보육시스템 전반까지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핵심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은 직업활동을 위해서든 자아실현을 위해서든 여전히 막중한 육아 부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최근 젊은이들의 결혼 기피, 출산 기피 현상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사태들은 개인사를 넘어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부메랑 효과를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출산과 육아의 문제를 개인에게 그것도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부담을 강요하는 현실 아래서 고도의 경제성장과 분배정의는 신기루 같은 구호에 불과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의 사례에서 너무도 생생하게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면 법적으로 여성에게 선거권이 보편적으로 인정된 것도 20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그 이전까지 수천 년 동안 인류사에서 여성의 지위라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본래 남성과 여성을 차별 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합니다(창 1:27). 뿐만 아니라 일찍이 욥은 세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었고(욥 42:15), 가나안 땅을 배분할 때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상속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도 했습니다(민 27:1-11). 정치지도자로서도(삿 4장 드보라), 예언자로서도(왕하 22장 훌다 여선지자) 맡은 바 소임을 다한 훌륭한 성경 속 여성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여성을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갈 돕는 배필이요 선한 동역자로 인정합니다. 우리는 지금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현상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3포(연애, 결혼, 출산 포기)니 5포(3포에 취업, 주택 포기)니 하는 현상 말입니다. 기존의 페미니즘과 역차별 이론으로 포섭되지 않는 이 새로운 현상 앞에 기존의 패러다임과 시스템은 무력합니다. 21세기 교회에 주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예언자적 선지자적 소명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1930년대 이미 저출산의 해법을 제시해 스웨덴을 살린 그리스도인 경제학자 뮈르달(Myrdal) 부부와 같은 선각자들이 한국 교회를 통해서도 나타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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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성서연구]시작보다 중요한 것(마태복음 20장 16절)
    2015년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시작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시작이 반”이라고 말해왔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잘 시작하는 게 중요합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 모 프로농구 구단 감독의 푸념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푸념이란 “우리 팀은 늘 시작이 엉망이에요.”란 것이었습니다. 늘 1쿼터에서 죽을 쑤어 점수 차가 10점 이상 벌어지다보니, 그 후에 추월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시작을 잘 하면 이런 문제는 없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시작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생의 끝이 언제나 시작할 때의 모습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에 묘미를 느끼기도 합니다. 시작을 잘 하는 사람은 끄트머리에 가서도 잘 하길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할 때 뛰어난 사람은 반드시 끄트머리도 뛰어나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면 시작을 잘 하는, 혹은 잘 할 수 있는 소수의 엘리트들에게는 다행이겠지만, 시작을 잘 못한 그 외의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 보다 더 비극적인 결정론은 없을 것입니다. 시작을 잘 못했다고 해서, 결론까지도 비극적이라면 굳이 그런 게임을 끝까지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감칠맛은 시작을 잘 못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다음에 잘 해서 마지막에 가서는 역전이 가능하다는 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종종 결혼 주례를 부탁하러 온 젊은이들 중에 최상의 조건에서 시작하는 이들을 봅니다. 이미 멋진 아파트도 장만했고, 직장도 훌륭합니다. 필요한 것이 없이 다 갖추고 출발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최상의 등산복과 장비로 꾸민 등산객과 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월세를 내는 원룸에서 초라하게 출발하는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마치 등산화 하나 변변히 신지 못한 등산객과 같습니다. 그러나 등산에서 중요한 문제는 폐활량과 근육의 힘입니다. 제아무리 장비를 잘 갖추었다 하더라도 능선에도 오르기 전에 헐떡거리고 근육이 뭉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낡은 운동화를 신었더라도 정상에 서서 함성을 지를 수 있다면 그 모습이 더 멋지지 않을까요? 잊지 마십시오. 시작이 반이지만, 시작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직 반이 남았고, 그 반에 의하여 멋진 시작이 초라하게 바뀌기도 하고, 초라한 시작이 멋진 역전승을 가져오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해 보이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시작이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가정 형편이나 주위 환경 때문에 최상의 여건에서 시작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제 때 진학을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라톤을 시작할 때 뒤에서 시작했어도 골인할 때 선두에서 들어오면 그만입니다. 멋지게 출발한 사람은 아직 반이 남았음을 기억하면서 절대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반대로 작게, 초라하게 시작한 사람은 낙심하지 말고 아직 반이나 남았음을 기억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종종 예전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전혀 존재감이 없이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앞에서 모든 일을 주도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친구들 중에 지금 멋진 일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 반대도 많습니다. 현재 많은 가지를 치고 많은 잎을 매달고 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폭풍우 속에서도 뽑히지 않을 수 있는 깊은 뿌리와 가을의 결실입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마지막에 웃는 이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2015년 말에 우리 모두 풍성한 열매를 거두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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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목회자 칼럼]공유하고 싶은 영성-컴패션
    좋은 목회자, 좋은 설교, 좋은 예배, 좋은 성도들, 좋은 주일학교, 좋은 교회분위기... 마치 과일가게에서 ‘좋은 사과’를 고르듯이 ‘좋은 교회’,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분들이 상상외로 많다. 물론 교회가 그런 분들의 비위와 욕구를 맞추다보며 자칫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다. 그러나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방황하는 성도들, 그런 분들의 교회에 대한 불만의 요소를 무시해선 안된다. 만일에 교회가 그런 성도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면 아예 ‘가나안’성도, 즉 교회에 “안나가”, 그런 성도로 만들 위험성이 많다. 교회는 얼마나 일을 많이 하느냐 이전에 그 무언가 성도 간에 따뜻함, 포근함, 만족, 기쁨, 그래서 그런 가운데 맡겨진 사역을 감당해 나갈 때에 보람과 가치를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지도자간에, 성도간에 친밀감이 부족하고, 부정적인 현상들이 자주 발생하는 교회라면 마지못해 교회를 다니거나 아니면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 아무튼 이런 저런 교회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교회중심에 들어오기를 꺼려하고 교회변두리에서 방황하는 성도들이 늘어가는 추세이다. 교회생활에서 우리들이 맡겨진 일들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 일의 성취이전에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그분의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일해 나가는가? 막6장의 ‘5병2어’ 사건에서 그 예수님의 마음을 만난다.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저들이 얼마나 천국복음에 굶주렸으면, 진리에 목말랐으면, 알고 싶은 진리가 많았으면, 영적 문제이든 육적인 문제이든 해결 받고 싶은 문제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렇게 온종일 나를 따라 다닐까? 쉴 새 없이 몰려오는 것일까?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헤매며 방황하는 불쌍한 양 무리 같도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온종일 주님 따라 다니면서 말씀을 들으며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시는 놀라운 모습을 지켜 보면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해가 서산으로 져 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여기 저기서, “아, 저녁이네! 허기지네! 배가 고프다!”. 바로 그런 상황가운데서 그 유명한 5병2어의 사건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날은 어둡고, 날씨는 추워오는데 이 굶주린 많은 무리들을 어찌 할 것인가? 그 안타까운 문제 앞에서... 문제 앞에서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른 가를 발견한다. 예수님의 마음은 목자의 마음이다. 상대의 형편과 어려운 처지를 나의 형편과 나의 처지처럼 여기면서 도와주려는 마음이다. “예수께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때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영어성경에서는 ‘Compassi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상대방의 어려움을 보았을 때 그저 ‘안됐다. 불쌍하다, 안타깝다’ 생각으로만 끝나는 마음이 아닌 그들의 처지와 고통에 함께 동참해 돕고자 하는 강한 충동내지는 열정을 뜻한다. ‘불타 오르는 동정심, 도와주고 싶은 열정’.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는 NGO자선단체 가운데 ‘컴패션’ 이름을 가진 단체도 생긴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님의 생애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사” 그 컴패션으로 가득차 있다. 어려운 형편을 보고 그냥 지나치시는 주님이 아니라, 행동이 동반되는 모습을 보이셨다. 직접 팔을 걷어붙이시고 열심히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설교하시고, 영과 육이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고, 막6장에서는 5병2어로 굶주린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그러나 주님의 컴패션의 절정은? 바로 십자가위에서 나타나셨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신 것이다. 교회 일을 감당해 나갈 때에...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 공유하고 싶은 영성은 바로 상대의 형편과 동일시하고자 애쓰는 목자의 마음, 컴패션 마음이다. 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모쪼록 하늘나라 공동체인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 장로와 장로, 교회지도자와 성도 간에, 성도와 성도 간에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무장 받아 교회를 훈훈한 분위기로 만들어 나가면서 풍요함에도 이기적이고 각박한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여 나가는 그리스도인, 교회로 끊임없이 거듭, 거듭,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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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서임중 칼럼]교인을 내쫓는 목사와 장로
    교회 지도자의 공통된 마음은 교회가 부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디 지도자만 그렇겠는가? 모든 교인들의 마음이 그렇다. 그런데 마음은 그런데 실제는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는 주역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교회 생활을 한다. 우연한 기회에 식당에서 옆 식탁의 세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을 경험했다. 주고받는 이야기가 속닥거리는 것이 아니라 옆 식탁 손님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이기도 했지만, 그 대화 내용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목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민망하고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야, 너 그 ○○ 잘 알지? 그게 장로야? 그 ○○ 보기 싫어 나 그 교회 안 나간다. 목사란 양반도 똑같아. 그런 ○○ 비위나 맞추고 있으니 그게 목사야? 교회가 결국 그 모양이 되는 거 아냐?” “야 임마, 목소리 낮추어라. 그래도 너도 그 교회 교인인데 그러면 되니?” “나 그 교회 안 나간다니까.” “그래도 인마 너도 예수쟁이잖아.” 웬만한 포항시민이면 나를 알아 볼듯한데 그분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지, 아니면 알기에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마치 내가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것처럼 그냥 앉아 듣기 힘든 대화를 들으면서 밥 한 그릇 먹는 것이 그리도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 대화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기에 식사를 대접하는 집사님의 얼굴도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한 표정이었고 차 한잔 마실 겨를도 없이 훌훌 털고 식당을 나왔었다. “교인을 내쫓는 교회, 그리고 목사와 장로” 식당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음이 허허벌판에 선 느낌이었다. 오래전 메가스터디 엠베스트 김성오 대표의 저서 <육일약국 갑시다>를 읽었다. 마산에서 전국 최소 약국, 최소평수인 4.5평의 약국을 <육일약국>이라는 간판을 달고 3년 동안 약국 이름 알리기 위해 택시만 타고 “육일 약국 갑시다.”를 외쳐 마산의 랜드마크로 만들어 내었고, 1조 원 매출 기업의 CEO가 된 감동스토리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지금은 서울 대방교회 장로로 전국을 다니면서 말씀 사역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장로님이다. 우리교회는 일찍이 6월이면 한 주일 택시타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전 교인이 그 주일은 택시를 타고 교회로 오는 운동인데 교회 알리기, 택시기사와의 관계 맺기를 통한 간접 전도인만들기 등 다양성을 갖고 있다. 김성오 장로님이 3년여 동안 택시 타고 “육일약국 갑시다.”를 외쳐 마산의 랜드마크를 만들어 낸 것은 우리교회 택시타기주일 운동과 너무나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 더욱 마음에 닿았다. 포항중앙교회의 택시타기주일 운동은 20여 년이 되어간다. 우리교회 택시타기 주일 운동은 기업경영, 교회부흥, 개인 성공의 신화의 물줄기가 되어 전국 온 세계에 잘 알려지고 있다. 김성오 장로님의 성공비결은 아주 간단했다. 약국 경영을 할 때 “우리 가게에 온 손님이 만족할까? 다음에 또 올까? 다음에 올 때는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올까?”라는 평범한 자문(自問)을 하면서 그는 오는 손님에 대한 마음자세가 다시 오게 하였고 그것은 최고의 경영철학을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업경영을 하든 식당을 경영하든 작은 가게를 경영하든 성공철학의 공통점이 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천사처럼 여기는 마음이다. 김성오 장로님처럼 자신이 서울대학교 약대를 졸업한 약사라는 것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통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고백을 했다. 즉 손님이 만족할까? 또 올까? 또 올 때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올까? 이것은 성공 경영철학의 교과서라고 할 것이다.교회 성장도 똑같다. 사람들을 오게 하는 교회가 있고 사람들을 내쫓는 교회가 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 힘든 사람, 외롭고 지친 사람이든 교회에 올 때 그들을 품어 안고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고 위로할 수 있는 교회는 오는 사람을 만족하게 하고 다시 오게 하고, 다시 올 때는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오게 한다. 그것이 부흥하는 교회, 가고 싶은 교회, 머물고 싶은 교회다. 목사가 싫어서 장로가 싫어서 교회를 떠난다는 식당에서 넋두리처럼 쏟아낸 그 사람의 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교회 부흥을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걸핏하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비판하는 지도자를 보는 평신도들은 오늘도 말없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우리교회는, 그리고 나는 어떤가? 교회 부흥을 외치면서 교인을 내어 쫓는 그 험악한 대화의 주인공은 아닌가?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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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함께 생각해 봅시다]사울과 사울
    사울과 사울을 보고 교훈을 받아 처음보다 마지막이 더 아름다워야성경인물 중에 동명이인(同名異人)이 한둘이 아니다. 사울도 그 중 하나이다. 구약에 사울이 있고 신약에도 사울이 있다. 사울과 사울은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같은 점은 이름뿐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두 사람을 대조해보면 흥미롭기도 하면서 교훈이 나온다. 먼저, 두 사람의 신분을 보면 구약의 사울은 이스라엘의 최초의 임금이고 신약의 사울은 사도 중 마지막 사도이다. 또 두 사람의 육체적인 면을 보면 구약의 사울은 키가 크고 준수했다. 신약의 사울은 왜소했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또 두 사람의 처음을 대조해 보면 구약의 사울은 아주 겸손했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데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는다. 결국 찾았는데 숨어 있었다. 극구 사양하는 그를 데려다가 겨우 왕으로 세웠다. 신약의 사울은 어떠했던가. 그는 아주 교만했다. 거기다가 잔혹했다. 스데반의 죽음을 보고 통쾌하다고 했고,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러 이를 갈며 달려갔던 사람이다. 이만큼 두 사람은 대조적이었다.다음, 두 사람의 훗날을 대조해 보면 구약의 사울은 갈수록 타락했다. 그토록 겸손했던 자가 거만해졌다. 제사장 외에는 관장할 수 없는 제사를 자기가 집례했다. 또 아말렉을 무찌른 후 하나님의 명을 어겼고 하나님 앞에는 변명했다. 그뿐아니라 승리의 표적으로 전승기념비까지 세웠다. 사울의 교만은 극에 달했다. 그뿐인가. 무죄한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반해 신약의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개명하고 날로 새로워지고 갈수록 겸손했다. 사울 때에 가졌던 성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새사람이 되었다. 다음, 말년에 가서 두 사람이 남긴 말을 보면 구약의 사울은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랬다. 그런데 신약의 사울(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주님 앞에 가서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순서뿐이다” 이같은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최후를 보면 구약의 사울은 길보아산에서 자살했다. 그런데 신약의 사울(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성밖에서 장렬히 순교했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이 뭔가. 우리의 생애는 처음보다 마지막이 더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설령 처음은 신약의 사울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면 얼마나 좋겠는가.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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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가정칼럼]급매물-남편 팝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급매물 광고 하나. "사정 상 급매합니다. 1991년 12월 14일 예식장에서 구입했습니다.구청에 정품 등록은 했지만 명의 양도해 드리겠습니다.아끼던 물건인데 유지비도 많이 들고 성격장애가 와 급매합니다.상태를 설명하자면 구입당시 A급인 줄 착각해서 구입했습니다.마음이 바다 같은 줄 알았는데 잔소리가 심하고 사용 시 만족감이 떨어집니다.음식물 소비는 동급의 두 배입니다.사용 설명서는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읽어봐도 도움이 안 됩니다.A/S 안 되고 변심에 의한 반품은 절대 안 됩니다. ㅎㅎ사은품으로 변덕심한 시어머니와 까칠한 시누이도 포함됩니다.울 신랑은 원래는 괜찮았는데 사용자 부주의라며 억울하다네요.글고 울 친구는 내거 팔 때 자기 신랑 1+1로 같이 내놓겠답니다." 대체 결혼은 무엇일까요? 결혼에 대한 정의는 끝없습니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곧 결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중국 속담에 “결혼은 포위된 요새이다. 밖에 있는 자들은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고, 안에 있는 자들은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혼자들은 결혼했다는 그 멍청함에 대한 벌로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 며 결혼을 조롱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이렇게 까지 말합니다. “나는 결혼한 여왕이 되느니 차라리 결혼하지 않은 거지가 더 좋다. 결혼반지는 나에게 멍에와 마찬가지이니까.”그 뿐이 아닙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결혼식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들으면 나는 항상 군인들이 전쟁터로 나갈 때 연주되는 음악이 생각난다”고 하면서 결혼을 전쟁터와 연상시킵니다.예부터 금슬 좋은 부부를 일러 ‘삼각배필’이라 했습니다. 서로 허리를 부여잡고 호흡을 맞추어 뛰어야 하는, 누구도 먼저 갈 수 없고, 혼자 갈 수 없는... 호흡을 맞춰 함께 걸어야 하는 그 특별한 소풍날의 경기 말입니다.나이 50줄이 되어 결혼한 함민복 시인은 삼각배필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냅니다 긴 상이 있다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좁은 문이 나타나면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걸음을 옮겨야 한다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다 온 것 같다고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한 발또 한 발 삼각배필의 의미를 아는 그 날, 급매물 광고도 사라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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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7
  • [교회법률상식]총회는 재판국 보고를 변경, 갱심케 할 수 없다
    "총회재판국 판결은 취소, 변경, 하회로 갱심케 하는 것뿐이고, 총회는 재판국 보고를 채용, 환부, 특별 재판국 설치뿐이야." [질의] 총회가 재판국 보고를 검사하여 변경하거나, 노회 재판을 파기하고 노회로 갱심케 할 수 있는지요? 그리고 환부는 노회와 총회 재판국 중 어디로 환부하는 것인지, 법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합동 총회 사무담당 목사) [답] 총회 재판국의 판결과 총회 재판국의 판결에 대한 총회 보고와 관련하여 총회가 변경할 수 있는지, 총회가 노회로 갱심하도록 하달할 수 있는지, 환부 시에 노회로 하는지 총회 재판국으로 하는지 등에 대하여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관한 전화 문의가 적지 않으므로 질의자의 교단 소속에 따라 합동 총회의 헌법으로 답한다. 1. 총회 재판국의 판결 범위 총회 재판국은 교회 재판의 최종심으로서 사실심으로 재판하는 것이 아니요, 증거조를 폐하고(권징 제94조2항) 하회 서기가 상회 서기에게 교부한 서류만을 가지고(권징 제96조) 하회가 재판절차에 따라 재판했는지, 법적용은 적합한지, 벌의 정도는 합당한지 등의 적부를 심의하여 판결하는 법률심이다. 그러므로 총회 재판국은 상소인이나 피상소인이나 증인 등을 소환하여 심문·조서해서는 안 되고 하회 서기가 보내온 하회 재판에 관계된 모든 서류를 심사하여 권징 제99조 제2항 (4)에 규정한 대로 하회 판결을 ① 취소하든지, ② 하회 판결을 변경하든지, ③ 하회로 하여금 갱심케 하든지 3가지 중에 하나로 판결하여 그 판결문을 원.피고와 총회 원 서기에게 교부함으로 총회에 보고 시까지 쌍방을 구속(현상 동결)하는 것(권징 제138조, 제139조)으로 재판을 종결한다. 이때 총회 재판국은 하회서기가 상소 건에 관한 관계 서류를 교부하지 아니했으면 재판을 할 수가 없다. 종종 총회 재판국이 하회 서기가 서류를 올려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소인이 제출한 상소장으로 재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재판은 당연 무효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인즉 권징 제101조에 “상소가 제기되면 하회는 그 사건에 관한 기록 전부와 일체 서류를 상회에 올려 보낼 것이니 만일 올려 보내지 아니하면 상회는 하회를 책하고 이를 올려 보낼 때까지 하회의 결정을 정지하게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회가 재판 관계 서류를 올려 보내지 않거나 올려 보낼 수가 없을 경우에는 하회의 판결이 계속하여 정지 상태가 되므로 하회판결은 무효(정지) 확정과 같다는 말이다. 이는 하회의 서기가 상소인이 제출하는 상소 통지서의 접수를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이기도 하다. 상소 통지서를 거부할 경우 상소장과 상소 이유 설명서가 없으므로 상회에 제출할 서류 중 상소장과 상소 이유 설명서가 없지 않는가? 상소인이 제출한 상소장과 상소 이유 설명서는 상소 건의 성립을 위한 구비 서류일 뿐이지, 총회 재판국이 재판할 재판자료가 아니요 총회 재판국의 재판 자료는 오직 하회에서 올려 보낸 하회의 재판 관계 서류뿐이기 때문이다. 2. 재판국의 판결에 대한 총회의 처리 범위 총회는 총회 재판국의 판결에 대하여 법대로 접수된 상소 건이나 소원 건을 총회가 재판국에 위탁한 사건이라면(권징 제134조 2항의 규정에 의하여 총회가 위탁하지 않은 사건은 어떤 이유로도 재판국은 재판할 수 없고, 총회는 그 판결 보고를 받아도 안 된다.) 권징 제141조에 규정한 대로 총회 재판국의 판결을 검사하여 ① 채용하거나, ② 환부하거나 ③ 특별 재판국을 설치하여 그 사건을 다시 판결하여 보고하게 한다. 여기에서 총회가 환부 처리하는 것은 노회로 환부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 재판국으로 환부하여 다시 재판하여 보고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총회 재판국이 총회의 결의를 이행하지 아니하고 전과 같이 재판할 우려가 다분할 경우에는 특별 재판국을 설치한다. 3. 결론 총회는 질의 자가 질의한 내용과 같이 총회 재판국의 판결을 변경하거나 노회로 갱심토록 처리할 수는 없다. 변경하거나 노회로 갱심케 하는 것은 오직 총회 재판국에서 판결할 때에만 할 수 있는 사안이다. 오직 총회는 재판국의 판결을 ① 채용하거나 ② 총회 재판국으로 환부하거나 ③ 특별 재판국을 설치하는 것뿐이다. 다만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현행헌법 대로는 총회가 위탁하지 아니한 상소 건이나 소원 건을 총회결의나 총회규칙 등을 빙자하여 총회 파회 후에 헌의부가 보낸 것을 받아 재판하여 보고할 경우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총회로서는 처음 접하는 사건이므로 권징 제134조 2항의 규정에 의하여 기각 처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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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7
  • [성공칼럼]세 번째 회개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하나를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하나를 찾으면 벗들과 이웃을 불러 잔치가 벌어진다는 이야기다. 사람에게는 잃어버리지 말아야하는 하나가 있다. 이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잃어버린 형상’ ‘본래의 나’라는 사실이다. 이 하나를 찾으면 모든 것은 다 해결된다. 거듭나는 것도, 하나님 나라도, 아버지로부터 능력을 얻는 것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나’를 찾아야 하며, 이 ‘나’를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회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란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나’를 찾는 것이며, 삶 속에서 ‘나’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삶 속에서 본래의 내가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내 주변에 먼지가 쌓여 있을 수 있다. 나는 며칠 전에 새벽에 내가 갖고 있는 장애가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 가운데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다. “어머니, 아버지 내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소아마미에 걸린 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입니다. 이 일로 두 분께 슬픔과 절망을 안겨드려서 죄송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기로 인해 웃음이 터져 나오고 행복해하셔야 하는데 저의 장애로 두 분께 눈물을 흘리게 했으며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긴 세월동안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두 동생들에게, 아내와 세 자녀에게도 내가 장애이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을 미안해했다. 그리고 수 십 년이 지난 일이지만 대학 졸업 후 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나를 거절한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도 용서를 빌었다. “내가 건강했다면 즐거워하며 기꺼이 나를 선택하는 기쁨을 누렸을 텐데 나로 인해 거절하는 불편함을 겪게 한 것 미안합니다. 그 덕분에 독립이라는 것을 알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이다. 이랬더니 내 속에서 감사 함과 감격의 눈물이 흘렀고 마음이 자유로워지면서 새로운 평화가 찾아왔다. 이렇게 또 한 번의 새로운 회개를 했다. 회개는 세 단계를 거처야 온전한 나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장애를 예로 든다면 첫 단계는 장애라는 상처로 인해 생긴 두려움, 억울함, 적개심과 미움을 씻어내야 한다. 마음을 이해받으면서 상담을 하며 울고, 소리 지르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장애로 인해 생기는 모든 불편함과 어려움을 이겨내어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는 단계이다. 여기까지는 아직 자기중심적 단계이다. 마지막 단계는 장애와 장애로 인해 생기는 거절과 모든 어려움을 전적으로 내 책임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럴 때 어두움이 사라지며 죄가 없어지며 모든 상황과 사람을 품에 안는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살면서 여러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두려워하고 원망한다. 그리고 관계 속에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 모든 생각과 행동들이 다른 사람, 환경 탓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이며, 내 책임으로 끌어안을 때 ‘본래의 나’가 회복되며 그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본래의 나를 아는 것은 목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섬기는 마음은 마음에 생기는 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의 회개를 할 때 어떤 환경이나 어떤 사람을 만나든 평화로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능력을 경험하는 기대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생긴 먼지를 닦아내는 회개를 할 때 본래의 나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 사랑과 자유의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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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7
  • [은혜의 말씀]믿음의 표어의 실제 (로마서 10장 10절)
    우리가 어떤 회사의 표어나 구호를 보면, 압축되고 상징화된 구호나 카피를 보면 감동이 오래 갑니다. 유태인들이 강한 이유는 탈무드, 토라, 율법을 어릴 때부터 늘 귀로 듣고 이마에 새기고 옷소매에 달고, 항상 배우고 익히고 바라보아서 유태인들이 그렇게 강한 민족이 되었고, 중국 사람들이 강한 이유는 조상들의 교훈을 한자 4자에 담은 고사 성어, 압축하여 담아낸 사자성어가 많다는 것이다. 선교단체들이 강력한 원인은 그 표어가 원색적이고 강렬합니다. CCC 김준곤 목사님은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굉장히 구호자체가 선명하고, 원색적이고 강렬합니다. CCC는 이때가 되면 해마다 연말연시에 원단 금식수련회를 합니다. 젊은 청년들이 금식하며 수일 기도회를 합니다. SFC는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삶의 중심을 잡고 동계수련회를 하며 1주일 동안 합숙하여 수련회할 때 많은 학생들이 뜻을 정하고 꿈을 꾸고 나아갑니다. YBF 지성사회의 복음화, 대학사회 속에 캠퍼스와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자 해서 지성사회의 복음화를 외칩니다. JOY 선교단체는 Jesus first, Others second, You last(third) 예수님을 첫째로 모시고 이웃을 둘째로 섬기고 너 자신을 마지막으로 두면 참 기쁨이 온다. UBF는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라 해서 대학생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세계로, 열방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몇 백 개의 나라로 흩어져서 세계 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선교단체들이 갖고 있는 구호 한마디가 굉장히 강렬하고 압축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 ‘써니텐 하나님’ 흔들어서 복을 주십니다. 역전의 하나님, 반전의 하나님, 재활용의 하나님, 이순신 신앙입니다. 이순신 신앙이 뭘까요? 「‘아사 교회 생’ 내가 죽으면 교회가 산다. ‘아생 교회 사’ 내 자존심을 살리고 내 고집을 살리면 교회가 죽는 다」는 이순신 신앙입니다. 한 사람이 마음의 갈등을 극복하고 신앙을 업그레이드 할 때는 구호가, 표어가, 말씀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능력만큼 일하는 게 아니고 목표만큼 일을 합니다. 목표가 있어야 명중을 합니다. 기도제목이 있어야 응답을 받습니다. 소원이 있어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기쁨을 샘솟듯 하게하라. 은사를 불일 듯 하게하라. 청춘을 독수리 날개 침 같이 하라」 이런 표현들은 표현자체가 샘솟듯, 불일 듯, 날개 치듯, 굉장한 역동적인 성령님의 역사, 하나님의 강권적인 파워풀한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축복입니다. 거룩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을 늘 기억해야합니다. 어려울 때 마다 악하게 어둡게 우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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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7
  • [시사칼럼]야누스(janus)
    1월은 영어로 제뉴어리(January)입니다. 로마인들이 숭배했던 ‘야누스(janus) 신의 달(januari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야누스는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중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을 야누스 형 인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여전히 세 모녀 살해 사건에서부터 소위 문건파동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야누스적인 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hypocrites)이요 안과 밖이 다르며 회칠한 무덤 같다고 책망하셨던 이들이 어찌 비단 그 옛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만이겠습니까?(마 23:25-27) 하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 크리소스톰의 말처럼 가식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한 가지 얼굴만을 갖고 살아가는 원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야누스는 또한 ‘문(janua)’의 수호신이기도 합니다. 로마에서 이 문은 특히 전쟁과 평화를 상징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로마의 첫 번째 왕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야누스 신전을 짓고 문을 단 후 ‘이 문이 닫혀 있으면 평화, 열려 있으면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합니다. 실제로 로마제국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팍스 로마나(pax romana)에 이르기까지 이 문이 닫혀 있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로 정전협정 62주년을 맞았습니다. 한반도 야누스의 문은 지금도 활짝 열려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최근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한다면 핵실험을 중지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 모오든 껍데기는 가라” 외치던 반세기 전 시인의 음성이 아련하기만 합니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시 46:9)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야누스에는 끝과 시작, 과거와 미래라는 변증법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야누스의 두 얼굴이 닮은 듯해 보이지만 살짝 다른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한국의 1월에 전형적인 삼한사온(三寒四溫)의 야누스적인 날씨가 반복되지만 결국은 봄이 찾아올 수밖에 없는 이치도 같습니다. 겨울이 가지 않으면 봄은 오지 않습니다.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는 법입니다. 종군위안부가 항의 표시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한 수요집회가 올해로 24주년이 되었습니다. 238명의 명단 중에서 이제 55명이 남았습니다. 더욱이 올해는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된 지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친일 잔재의 망령이 일으키는 소란을 목도합니다. 성경은 야누스보다 훨씬 더 철저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롯의 아내는 결국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 19:26). 가룟 유다는 자기 의(義)를 청산하지 못하고 비참한 배역자의 말로를 걸었습니다(마 27:3-10). 신년을 맞아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일신우일신, 환골탈태하는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런가 하면 야누스에 내재된 ‘변화’의 이미지는 오늘날 멀티세대(multi-generation)에 잘 어울리는 측면도 있습니다. 멀티미디어, 멀티태스킹, 멀티홈, 멀티비타민, 멀티개스팅, 유아용 멀티변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멀티 전성시대입니다. 최근에 ‘야누스 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야누스 족이란 낮에는 업무에 열중하다가 스키장으로 퇴근해서 밤에는 다이내믹한 레포츠를 즐기는 신세대 직장인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비자발적인 멀티족들도 존재합니다. 두세 가지 일을 하며 학업을 이어가거나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들 말입니다. 새해 들어 비정규직 4년 연장안이 발표되었습니다. 드라마 미생에 나왔던 비정규직 청년 장그래의 이름을 따서 ‘장그래 방지법’이냐 ‘장그래 양산법’이냐 말들이 많습니다. 두 주장 다 나름대로 일리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더 야누스적입니다. 을미년 정월의 이 혼돈이 이 땅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보다 더 발전적인 변화로 승화되기를 만유를 새롭게 하시는 주 안에서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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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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