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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칼럼] 믿음으로 살리라 3 - 영적진리
    ‘믿음으로 살리라’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속사람, 영(靈)이다. 진짜 사람은 속사람, 영이라는 것이다. 육체는 진짜 속사람의 덮개일 뿐이다. 지구의 내부는 중심에 핵, 맨틀, 지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피부의 구조도 표피, 진피, 피하지방층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모든 생명체는 내부를 보호하는 덮개가 있는 것이다. 이 덮개 없이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육체는 육체의 생명인 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영이 떠났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 자체는 생명이 아니라 생명을 수용하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그릇이 그릇자체로 있는 것은 밑동 잘려진 나무가 잠시는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지만 조금 있으면 말라 죽는 것과 같다. 이처럼 사람의 영도 생명이 없으면 잠깐은 기쁘고 자유롭고 활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이 없기에 죽게 되는 것이다. 내 영이라는 그릇에 생명이 있어야 살아있는 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살리라’의 ‘산다’라는 말이다. ‘산다’라는 말은 내 영이 하나님과 결합되어 기쁘고, 자유롭고, 빛나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말한다. 내 영이 죽었다는 것은 생명이 없음으로 두렵고 화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서로 싸우면서 기쁨과 자유와 빛을 잃어가는 것을 말한다. 내 영이 살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진리로는 가능하지 않고 반드시 생명을 담은 영적진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이 무엇인가? 생명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생명 즉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에고라는 자기사랑을 선택했다. 자기사랑은 자기사상, 자기소유, 자기지배, 자기쾌락, 자기숭배를 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간다. ‘산다’는 것, 거듭난다는 것, 의롭게 된다는 것은 자기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영적진리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생명을 담은 영적진리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죽음의 권세 즉 지옥의 권세와 싸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지옥의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지옥을 결박하셨다. 그리고 인간이면서 신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으로 사람과 주님이 결합할 수 있는 길을 만드셨다. 예수께서 신이면서 인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영적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함으로 주님사랑이 내 영에 들어오시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생명이신 하나님의 사랑이기에 이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으로 살리라’의 핵심인 것이다. 영적진리인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의 단계를 거치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사랑이다. 주님사랑으로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영원한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어떤 조건에도 할 수 있는 일이며 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며칠 전 고3딸이 수능시험을 보았다. 3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기에 하나님께 높은 점수를 받아 좋은 대학에 갈 것을 위해 기도했고 정말 그렇게 될 것을 믿었다. 그런데 예상 밖에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아서 마음이 상했다. 이런 마음으로 가족 예배 중에 말씀을 묵상하는데 우리의 목적이 높은 점수, 좋은 대학, 사람들의 부러운 평가, 자랑스러운 자신 등이 목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목적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영원한 목적은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인 나도 주님을 사랑하고 딸에게 섭섭해 하지 않고 고생한 딸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딸도 주님을 사랑하고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은 자신을 향해 수고했다고 다독이며 점수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영원한 목적을 찾은 순간에 두려움과 서운함이 사라지고 기쁨과 사랑이 생겨나는 것을 경험했다. 믿음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주님이 진리의 근원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따라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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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은혜의 말씀] 더불어 & 오로지 (행1장 12~14절)
    오늘 성경말씀 사도행전은 흔히 성령행전이라 합니다. 성령님께서 사도행전을 만들어 가십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베드로도 아니고, 사도바울도 아니고, 성령님이신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온통 제자들·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앞쪽에는 제자들 이야기가 나오고, 15절 16절부터는 가롯 유다 이야기입니다. 가롯 유다는 열심당원이고, 재정을 맡았을 만큼 중직자요, 집안이 좋고, 혈통이 좋고, 모든 부분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의 뒤에는 가롯 유다가 엉뚱한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16절부터 보면 예수님을 체포해서 스승을 팔아먹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나중에는 그 직무를 타인이 취합니다. 25절에 보면 「유다는 이 직분을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나님이 부탁하신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탁하신 미션이 사람마다 있는데 그 직무를, 그 자리를 박차고 자기 길로 가서 패가망신한 사람이 가롯 유다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가든지 의의 병기가 되어야 되지 악의 도구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12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감람원 이곳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곳입니다. 기적의 현장, 영광의 자리, 기도의 동산이 감람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미리 이곳에서 엎드려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신 곳입니다. 성도의 삶에 모든 진검 승부는 현장에서, 결승전에서 표가 나는 게 아니고 기도의 자리에서, 기도의 동산에서 결판이 난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너는 어떻게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가 없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해라’ 하신 곳이 이곳이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바쁠수록 기도해라. 힘들수록 찬송을 불러라. 어려울수록 감사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들어 부하게 쓰시고 미련한 자를 들어서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지 인물 좋다고, 돈 많다고, 똑똑하다고 쓰임 받는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원심력과 구심력, 한 사람에 대한 집중, 또 온 열방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스케일과 디테일을 같이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성령이 임하셔서 초대교회가 탄생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오실 그때까지 촛대를, 면류관을, 축복권을, 장자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일복이 많은 것이 복이 많은 것입니다. 쓰임 받을 동안은 그냥 그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부담스러운 자리 그걸 부담스러워 하면 안 됩니다. 그걸 하는 동안에는 죽을 틈도, 망할 틈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명이라도 낙오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명이라도 생명책에 이름이 없으면 안 됩니다. 마지막 한명까지도 어린양 혼인잔치에 초청받아야 됩니다.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기도의 자리, 주님이 부탁하신 그것을 사명으로 감당하십시오. 힘들 때가 좋은 것입니다. 밤에 잠을 못자고 힘들고 부담스러울 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부탁하신 일은 건강도 물질도 미래도 하나님이 다 보장해 주십니다. 그 자리에서 빠지면 안 됩니다. 그 마지막 숫자에 들어가야 되지 마지막에 이름이 빠져 버리고 그 숫자에 제외 되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이 마지막 어린양 혼인잔치에 쑥 들어가셔서 주님 알아보시고 ‘내 사랑하는 딸아 네가 그동안 고생했다.’ 그 이름을 보시고 통과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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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교회법률상식] 협동장로가 신학교 법인이사장 될 수 있는가
    [질의] K교단의 신학대학교 이사회가 협동장로를 법인이사장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교단의 일부 인사들 중에 협동장로는 총회 선거조례 제3장 제6조 1항 단서 조항에 “모든 후보자의 임직일은 본 교단에서 시무일 기준으로 한다.”는 규정에 의하여 협동장로는 법인 이사장이 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법리적인 답변을 바랍니다. (부산 G장로) [답] 질의 자가 교단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장로교회의 통상적 법리에 따라 답한다. 1. 협동장로의 위치 최초의 헌법인 1922년도 판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5장(치리장로) 3(장로의 자격)에 “장로는 행위가 선량하고 신앙의 진실하고 지혜와 분별력이 있으며 언행이 성결함으로 온 교회의 모범이 될 자라야 가합하니라(젼벧5:3)”라고 규정하였고, 1930년도 판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5장(치리장로) 제3조(장로의 자격)에는 “27세 이상 남자 중 입교인으로 무흠히 5년을 경과하고 상당한 식견과 통솔의 기능이 있으며 딤전3:1-7에 해당한 자로 할 것이니라”라고 규정하여 장로로 임직하면 사망 시까지 모두 시무장로 이외의 다른 칭호가 없었고 장로교도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1930년 이후 수십 년을 지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라는 교단의 개수가 이미 100개가 넘은 것이 옛날이 되었고, 대부분의 교단들이 만70세 시무정년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시행한 이후 교회 직원의 칭호가 34가지나 되고(교회 법률상식 pp.377-381 참조) 그 중에 장로의 칭호 역시 시무장로, 무임장로, 휴무장로, 은퇴장로, 협동장로, 원로장로 등 6가지나 된다. 그 중에 협동장로는 K교단과 H교단에서 신설하여 시행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 원리상 시행할 수 없는 칭호이다. 그 이유인즉 교인을 치리할 수 있는 치리권은 ① 교인의 투표로 위임을 받아야 하고 ② 교인들이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함으로 비로소 치리권이 발생하게 되는데 협동장로는 교인이 투표도 하지 아니하고 치리에 복종하겠다는 서약도 하지 아니한 상태에 있는 무임장로를 당회의 결의로만 협동장로가 되게 하여 당회의 언권회원으로 간접적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것은 장로회정치의 대원리 상 합당치 않다. 따라서 협동장로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교단들은 조속히 헌법을 환원 개정하여 협동장로를 폐지해야 한다. 2. 협동장로의 피선거권에 대하여 대표적인 3개 장로교단의 헌법 규정을 보면 T교단은 협동장로 제도를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K교단과 H교단에서 시행하고 있는바 K교단 헌법 정치 제6장(장로) 제71조(협동장로)에 “교회를 잘 봉사할 수 있는 무임장로가 있는 경우, 당회의 결의로 협동장로를 세울 수 있다. 협동장로는 당회와 제직회에서 발언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하였고, H교단 헌법 정치 제5장(치리장로) 제7조(협동장로)에 “무임장로 중에서 당회 결의로 협동장로로 선임하고 당회의 언권회원이 된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K교단의 총회 선거 조례에 “모든 후보자는 … 시무일을 기준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여 시무장로이어야 후보자가 될 수 있음을 법이 정하고 있는데 협동장로는 무임장로에게 당회결의로 언권만 부여한 장로로서 마치 목사로서 시무 지가 없는 무임목사가 노회에서 언권회원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는 것처럼 협동장로 역시 시무장로가 아니니 선거투표로 선정하는 신학교의 법인이사장의 피선거권이 없으므로 법인 이사장이 될 수 없다. 3. 결론 장로교회의 모든 선거제도에 있어서 현행 헌법은 시무하는 정회원에게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무임, 은퇴, 협동 장로들에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제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K교단의 신학대학교 이사회의 법인이사장을 선정하는 선거에서 협동장로를 선정한 것에 관하여 사학법에서는 인정할지 모르지만 교회법에서는 법리적으로 피선거권이 없는 자를 선택하였으므로 당연 무효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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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가정칼럼] 내 인생을 바꾼 한 마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 소년은 금방 잠에 골아 떨어졌다. 얼마를 잤을까? 온몸을 물어뜯는 빈대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몇날 며칠 잠을 설친 소년은 빈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빈대는 헤엄을 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책상을 구했다. 책상의 네 다리 밑에 사발(접시)을 고이고는 물을 부었다. 책상위에 이부자리를 폈다. 기막힌 수중(?)위의 침대였다. 빈대를 따돌린 소년은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또 다시 빈대의 공격 앞에 서야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책상 다리를 살핀다. 기어오르는 빈대가 없다. 저 깊은 호수를 무슨 재주로 헤엄을 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몸에 붙어 있던 빈대? 소년은 머리를 굴리며 얼른 잠이 들지를 못했다.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던 소년은 눈이 휘둥그레져 벌떡 일어난다. 뜻밖에도 책상 다리를 기어오르지 못한 빈대들이 벽을 타고 천정에서 낙하할 준비를 하고 있지 뭔가? 소년은 무릎을 친다. “빈대도 머리를 써서 사는데.....” 소년은 그 작은 깨달음 하나로 대기업을 일군다. 그가 왕회장이라 불렸던 현대의 고 정주영회장이다. 그의 평상시 가장 큰 욕은 ‘빈대보다 못한 놈’이었다. 내 어머니는 어디서 주어 들었는지 밑도 끝도 없이 내게 지천을 퍼부었다. “대체 머리는 뒀다 어디 쓰냐?” 밥상머리에서도 등굣길에도 그 말이 꼬리를 달고 다녔다. 어느새 귀에 딱지가 되어 내려앉았다. 일만 꼬이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내게 다가와 속삭인다. “머리 뒀다 어디 쓰냐?” 추운 겨울밤이었다. 한 소년이 장거리 여행을 위해 짐 보따리를 챙겨놓고 잠이 들었다가 큰 전쟁(?)을 치러야 했다. 야간 공습경보가 울리더니 낮은 비행물체가 공격을 해오는 것이었다. 미사일까지 쏘면서 말이다. 모기(蚊)와의 전쟁이었다. 피를 보고야 전쟁은 끝났다.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나 홀로 ‘생각’에 잠겼다. 성경은 뭐라고 했나?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달게 주시는도다.” 그런데 또 다른 번역본은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랑하는 자들이 잠들어 있는 순간에도 보호해 주시고...”(시편 127편 2절) 어떤 번역본이 맞던지 간에 잠은 좀 자게 해 줄 일 아닌가? 잠 못 이루는 밤, 소년은 뒤척이며 생각에 잠겼다. ‘인간만큼 잔인한 존재가 또 어디 있던가? 남의 잘못에 대해 어김없이 소리친다. 회초리도 든다. 심지어 따귀까지 때린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고함지르고 자신에게 회초리 드는 사람 보았는가? 신은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그 날 밤 모기를 보내 잘못에 대해 침을 몇 방 놓으시고 그제야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고 뺨을 후려갈겨 정신 차리게 하시는구나.’ 생각한다. 그 소년은 다름 아닌 필자다. 이래서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고 한다. 모기조차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 혹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은 없나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의 거울이 된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나아가는 영성의 오솔길이 된다. 이래서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 짜증내고 나면 짜증스런 생각만 따른다. 불평하기 시작하면 불평만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가 이번에는 아들에게 말한다. “모기를 하찮게 여기지 마라. 모기(蚊)에 벌레를 의미하는 ‘?’에다 글월의 ‘文’이 덧붙여진 이유가 뭔지 아니? 모기도 글을 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모기보다 못한 사람이 많다.” 어머니의 끝없는 잔소리에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안다. 다만 시대가 달라져 그 말이 업그레이드 된 것일 뿐. 나는 안다. 내 아들이 손자 손녀에게 지껄이고 있을 말을. “대체 머리는 뒀다 어디 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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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시사칼럼] 극단주의와의 전쟁
    11월 13일 금요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 동시다발적인 연쇄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프티 캉보주 식당(Petit Cambodge restaurant), 카리용 바(Le Carillon barr), 바타클랑 극장(Bataclan concert hall), 벨레키프 바(Belle equipe barr), 스타드 드 프랑스(Starde de France) 경기장 인근, 공화국 광장(place de la Republique) 등 파리 중심지 일대에서 금요일 밤에 벌어진 총격과 폭발 등으로 현재까지 150여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대참사였습니다. 프랑스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IS(이슬람 국가 연합)는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발표했지만, 아직도 정확한 범행 동기와 주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파리 테러 하루 전날인 12일,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도 2건의 자폭테러가 일어나 최소 43명이 죽었고, 같은 날 13일에는 이라크에서 테러범이 장례식장을 공격해 최소 2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지난 해 매달 평균 90명의 민간인들이 폭탄 테러로 숨졌다는 통계도 있습니다(Iraq Body Count). 내전 중인 시리아 또한 2011년 이후 민간인만 무려 25만 명이 테러나 각종 공격으로 희생되었습니다. 나이지리아는 과격 이슬람 무장단체 보코하람(Boko Haram)의 무차별 납치와 테러로 인해 지금까지 약 15,000명이 사망하고 150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습니다. 호주에 본부를 둔 영국 경제평화연구소(IEP)는 작년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발생한 9,814건의 테러와 그로 인한 사망자 수 17,958명 중 80% 이상이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5개국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세계 테러리즘 지수(Global Terrorism Index)’에서 밝혔습니다. 올해 초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terror) 잡지사 테러 사건을 경험했던 프랑스는 이번 파리 테러가 발생한 직후 곧바로 이슬람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습니다. 유명 해커 집단인 어나니머스(anonymous)까지 나서서 IS에 대해 대대적인 사이버 공격을 감행할 것을 선포할 정도로 국제사회도 공명(共鳴)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워싱턴에서는 정부간 ‘폭력적 극단주의 대응 고위급 각료회의’가 개최된 바 있고, 혹자들은 앞으로 인류가 치러야 할 진정한 전쟁은 바로 이 극단주의와의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적 극단주의가 어떠한 비극적 폐해를 초래하는지 역사를 통해 이미 충분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극단주의는 자기 의(righteousness)에서 시작해서 폐쇄성과 배타성을 거쳐 푸코(M. Foucault)의 말처럼 집단적 광기로 발작(發作)합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은 민족이나 이념에 기초한 극단주의에 폭력적 광기가 더해진 결과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에리히 프롬(E. Fromn) 같은 사람이 집단적 나르시시즘(narcissism)이야말로 이성을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독약이라고 말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1980년대 우리 사회는 ‘범죄와의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사회 또한 ‘극단주의와의 전쟁’을 한번쯤은 치러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극단주의는 나만 옳다는 진리 논쟁으로 출발해서 결국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배척하고 나아가 공격하는 폭력성을 조장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심지어 교계와 교회까지도 의견의 다름(different)과 틀림(wrong)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서구 사회도 오랜 세월에 걸쳐 비슷한 진통과 산고를 겪어 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깊은 뿌리가 되는 경구, 즉 ‘본질은 일치를, 비본질은 관용을,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necessariis unitas, unnecessariis libertas, omnes caritas)’의 정신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적 극단주의의 함정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중용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시대 극단주의자들의 손에 들려 있는 억압적 수단과 폭력적 도구들이 하루 속히 제거되고 나아가 그들 속에 부드러운 마음과 새 영이 새롭게 자리잡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겔 11:19;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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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서임중 칼럼] 쓴물을 달게 하라
    살아가노라면 물은 필요하고 갈증은 심화되어 마시기는 마셔야 하는데 마실 물이 없다는 것, 더 나아가 물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그 물은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라면 그 상황은 한 마디로 절망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3일 길을 걸어도 물이 없어 목말라 하다가 마라의 쓴 물을 발견하고 마시지 못한 상황에 백성들의 불만이 터지고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을 쏟아낸 출애굽기 15장의 내용이다. 그렇다. 이 상황이 어찌 물 문제만 그렇겠는가? 작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그런 것을 느낀다. 정치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백성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정당이 없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은 해야 하는데 가고 싶은 교회가 없다는 것, 그것은 물을 발견하고도 마실 수 없어 불평 불만을 쏟아낸 히브리 민족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행 중 사흘 길을 걸어도 물이 없게 되자 백성들은 갈증으로 고통 하게 되었고, 메마르고 척박한 광야에서 물을 찾아 사흘 길을 헤매다가 천신만고 끝에 찾은 물이 불행하게도 써서 도저히 마실 수 없는 물이었다. 백성들의 불만과 불평은 모세를 향하여 폭발했다. 우리는 여기서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 여정과 같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미래의 희망보다는 현재의 욕구 충족이 더 시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멘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가장 저급한 식욕이나 성욕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가 꺾어진다면 이것은 동물과 별다를 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워도 미래를 지향한 삶이었다. 그러나 멘슬로우의 욕구 충족 5단계중 가장 저급한 단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던 사람들은 역사를 어둡게 하고 공동체를 힘들게 한 인물들로서 하나 같이 미래를 보는 눈이 닫혀있었고 철저하게 현실에 안주하고 눈앞의 손익계산에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항상 문제 앞에서는 누구 때문에 라고 원망 불평을 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는 쓴 물이 많다. 실패의 쓴 물이 있다. 질병의 쓴 물, 가난의 쓴 물, 미움의 쓴 물, 죄악의 쓴 물, 근심의 쓴 물, 절망의 쓴 물이 있다. 목이 말라 타지만 쓴 물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갈증에 죽을 지경이지만 눈앞에 있는 물이 쓴 물이니 어떻게 살 수 있나? 답은 한 가지 뿐이다. 쓴 물을 달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출애굽기 15장의 교훈이다. 마라의 쓴 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수 있는 단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방법과 능력은 참으로 기이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 가운데서 기도하는 모세에게 한 나뭇가지를 잘라서 그 쓴 물에 던지라고 하셨고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놀랍게도 그 쓴 물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오히려 달아졌다. 쓴 물과 같은 인생을 단물처럼 바꾸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는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히브리 민족이 물을 마시고 싶은데 발견된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 수 없었던 것처럼 인생여정도 그렇다. 성공하고 싶은데 실패하고 말았다. 건강하고 싶은데 병이 들고, 부유하고 싶은데 가난하게 되었고, 사랑하고 싶은데 미움으로 가득하다. 기뻐하고 싶은데 근심으로 가득하고, 행복하고 싶은데 불행하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 불평하고 있을 것인가? 대답은 하나뿐이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나뭇가지를 그 쓴 물에 던지는 것이다. 그 나뭇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인간 생활의 생명의 갈증을 해갈해 주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꾼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뿐임을 깨우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그렇다. 아무리 쓴물 같은 환경이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쓴 물이 달게 되는 것이다. 죄악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구원의 단물이 된다. 근심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기쁨의 단물이 된다. 불평의 쓴물도 미움의 쓴물도 예수 사랑으로 감사와 사랑의 단물이 된다. 가인은 아벨을 미워했다. 그런데 가인은 망했고 아벨은 의로운 사람으로 남았다. 에서는 야곱을 미워했다. 그런데 에서는 축복권에서 멀어졌고 야곱은 족장의 반열에 들어갔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다. 그런데 형들은 복을 누리지 못했고 요셉은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다. 그런데 사울은 망했고 다윗은 성군이 되었고 그의 족보에서 예수가 탄생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미워했다. 그런데 그들은 망했고 예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르다는 마리아를 질투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는 책망하고 마리아를 칭찬했다. 아합은 엘리야를 미워했다. 그런데 아합은 망했고 엘리야는 위대한 선지자로 남았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미워하는 사람은 미움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누구나 지니고 있는 미움이라는 쓴 물을 예수 사랑으로 바꾸어 놓으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단물처럼 감사의 생활이 될 것이다. 내 마음의 쓴물을 예수 십자가 사랑으로 달게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 축복받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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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성서연구] 가나안 보다 중요한 것, 말씀(여호수아 8장 30-35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은 꿈에 그리던 낙원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약속하신 이래로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지상 낙원에서 살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 우리에게도 비슷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교회가 예배당을 이전하여 아름답게 건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들은 새 예배당으로 옮겨가는 것을 가리켜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약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광야나 가나안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두 귀하였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본질은 <거기가 광야인가 가나안인가>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이것이 본질이며, 하나님이야말로 복의 근원으로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이 행복을 보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순간, 가나안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참된 행복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있음을 명심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분이시며,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 백성들로 하여금 말씀 앞에 서게 하셨던 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에발산에 제단을 쌓게 하셨고, 그 돌들에 하나님의 율법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을 모아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의 말씀을, 에발산에서는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게 하셨고, 백성들은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그들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하고 가나안 사방으로 뻗어 나갈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서둘러 남은 땅을 정복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멈추어 말씀 앞에 서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가나안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에서 살아갈 원리를 깨닫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이 하드웨어라면 말씀은 가나안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깔리지 않은 컴퓨터가 깡통과 다를 바 없듯이, 말씀 없는 가나안은 결코 행복의 동산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을 점령하느라 흥분하고 있을 때, 가나안을 얻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을 때, 말씀 앞에 겸손하게 서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백 삼십 년 만에 애굽을 벗어나 흥분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을 시내산에서 말씀 앞에 서게 하셨던 것과 같은 이치였습니다. 말씀이 없다면 애굽을 벗어나 자유를 얻어도 그 자유 때문에 망할 것이고, 아무리 가나안을 얻어도 가나안의 풍요속에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삶에 도취되어 말씀을 잊었고, 우상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되자 가나안은 그들에게 행복의 땅이기는 커녕,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차례로 멸망함으로써 멸망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잘 되고 있습니까? 지금 성공하고 있는 중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잠시 멈추어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말씀을 배제한 채 달려가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선남선녀가 만나 이루어진 가정도, 잘 꾸미고 개업한 사업장도, 웅장한 새 교회당을 소유란 교회도 말씀 위에 세워서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양한 인간적 수단에는 귀를 기울이면서도 정작 말씀을 붙잡는 데는 게으른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말씀, 그 안에 모든 지혜와 복과 생명과 승리가 있음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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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어찌 이런 일들이
    신앙생활에 관련된 얘기 중에 이해가 안되는 것이 의외로 많아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얽힌 이런저런 얘기가 많은 중 진짜 상식을 벗어나 이해가 안되는 일들이 가끔 있다. 어찌 그런 일이 있는지 생각할수록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실례를 몇가지 든다. 필자가 한번은 여전도회 헌신예배에 참석했다. 예배 인도는 여전도회 회장(집사)이 맡아 진행했다. 성경을 봉독할 시간인데 회장이 설교본문의 첫 절을 읽고 마지막 절을 읽고 두절만 읽고 “이제 강사목사님이 나오셔서 설교 해주시겠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강사가 강단에 서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설교본문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하고 다시 봉독한 후에 설교를 시작했다.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예배시간마다 봐온 일일텐데 어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그 회장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지 안색도 변하지 않고 교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을 봤다. 한 곳에서는 목사가 장로 가정에 심방을 갔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목사가 “성경은 요한계시록 14장 1절~5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그랬다. 장로 부인(권사)이 성경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모두 기다리고 있는데 장로 부인이 말하기를 “이상하네, 내 성경에는 어째서 요한계시록이 없지” 그랬다. 그 권사는 요한계시록을 구약에서 찾으려고 했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 아닌가. 장로 부인이 요한계시록이 구약에 있는지 신약에 있는지 그것도 몰랐으니 말이 되는가. 이건 뜬소문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얘기다. 또 한곳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권사가 목사로부터 공예배 기도인도 부탁을 받았다. 기도문 없이 인도할 자신이 없어 기도문을 작성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 말은 누구나 마지막에 으례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다. 기도를 인도하는 시간에 떨리면서 기록한대로 기도문을 다 읽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이 말은 하지 않고 기도를 마쳤다. 회중의 공기가 이상했다. 그때 목사가 재빨리 그 권사 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하고 회중이 “아멘” 했다. 어느 한 고교 교사가 처음으로 기도를 인도하면서 하고자 하는 말을 다 했는데도 한사람도 아멘을 하지 않았다. 짧아서 그런가하여 다시 되풀이 했는데도 아멘을 하지 않는다. 기도를 포기하고 “왜 다른 이의 기도엔 아멘을 하고 내 기도엔 아멘을 해 주지 않느냐” 그랬다. 그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화를 낼 것이 아니라 바로 배워야 하지 않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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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목회자칼럼] 우리가 극복해야 할 다섯가지 적(敵) (1)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에게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이요 둘째는 남과의 싸움이요 셋째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선물로 주신 아름답고 소중한 자연을 「싸움이나 정복의 대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썩 좋은 발상은 아니다. 물론 더위, 추위, 가뭄, 홍수 등을 극복해내는 일이 여간 만만치 않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플라톤이 인생을 <자기와의 싸움>으로 이애하고 있는 것은 옳은 지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아라!」고 하였다. 우리는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고 신앙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온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3~5). 과연 그 누구도 자신을 변명할 수 없도록 우리의 정곡을 찔러 주시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런 솔직한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해주실 수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해주면 말은 맞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으며 다 같이 불완전하면서 남을 향해 충고하고 책망하기란 여간해서는 용기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가급적이면 선생이 되지 말라!」 고 충고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1~2).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가지고서 서로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가지고 논(論)하면 그나마도 우리는 승복을 하고 겸손히 그 교훈을 따르고자 하는 일말의 선한 양심이 있음을 알고 있다. 오늘은 먼저 내 안에 숨어 있는 <다섯가지 적>을 드러내고자 한다. 1. 욕망이라는 적이다. 우리는 생래적으로, 출생하면서 ‘본능적 욕망’을 가진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에덴동산에서 우리 조상 아담이 <욕망의 포로>가 돼버렸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포로가 돼버렸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 또한 <욕망의 포로>가 돼버렸다. 이것을 <욕망의 전차>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전차는 방향도 모른 채 좌충우돌 하면서 세상을 소란케 하면서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이지만 날마다 아니 순간순간마다 <욕망이라고 하는 무서운 유혹>에 직면하면서 살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로마서 7장 18절이 주는 말씀을 들어보자.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대부분의 욕망은 우리를 <심각한 파멸>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욕망은 무서운 것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힘든 환경 때문에 고통당하기도 하지만 <자기 내면의 죄와 욕망> 때문에 혼돈에 빠지고 크게 고통 한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로 시험(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불의하고 타락하고 위험한 이 욕망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소원을 가져야 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본능으로서의 욕망’도 있으나 동시에 ‘거룩한 소원’도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거룩한 소원 쪽으로 우리의 열망을 불러일으키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소원을 도와주신다(빌2:13). 우리의 성향이 사악한 쪽으로 쉽게 경사되지만 ‘거룩한 소원’쪽으로 열망하면 그 쪽으로 우리의 성향(性)이 발전한다. 그러므로 잠언 4장 23절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너희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한다. 그리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 아니한가? 우리는 자주 자주 <절제의 은혜>를 성령님께 간구해야 한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 일컬어 사람의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하지 않는가! 바닷물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해질 뿐이다. 우리가 이 위험한 욕망을 줄이려면 우리의 마음속을 고상하고 신령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것이다. 우리 심령 속에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적인 갈급함이 내재되어있다. 이 갈급함의 빈 자리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채우면 된다. 시편 39편 7절에서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다윗은 노래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읽어보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실 때 우리 영혼은 한없는 평강을 누리면서 만족함을 얻는다(롬14:17, 시4:7, 말3:17)(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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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교회법률상식] 굴화리와 천상리는 남울산노회 지역(2)
    3. 노회분립 청원서에 대하여 노회분립의 원칙은 하회의 고유한 특권자인 노회가 분립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하면 상회의 고유한 특권자인 총회는 그 청원서를 접수하여 분립허락을 결의하고 분립위원을 보내어 노회가 총회에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에 기록된 “① 분립할 노회의 명칭 ② 분립할 노회의 경계 ③ 분립할 노회의 조직교회와 미조직교회의 명부 ④ 분립할 노회 경내의 목사 수 ⑤ 분립할 노회 경내의 장로 수 ⑥ 분립할 노회 경내의 전도사 수 ⑦ 분립할 노회 경내의 교인 수”대로 분립노회를 조직하고 총회의 임원선거 직전에 보고하는 것이 법리이다(교회 법률 상식 pp.410-416, 제25회 총회 회의록 p.71 정치 제22장 제1조 2항 참조). 그런데 울산노회의 노회분립청원서의 첨부서류는 엉뚱하게도 “제52회 울산노회 정기회의록(2)” 뿐이다. 그 회의록에 노회 분립에 관한 내용은 “노회분립위원은 각 시찰회 목사 1인 장로 1인 노회장 15인으로 하다.”라는 결의 내용과 각 시찰의 목사와 장로의 명부 14인을 기록한 것뿐이다. 이와 같은 노회분립청원서는 총회가 접수해도 안 되고 노회분립을 허락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총회는 울산노회의 이런 서류를 접수하여 노회를 분립 처리하였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4. 울산노회 분립위원회의 분립보고서에 대하여 제91회 총회보고서 p.1114에 울산노회 상황보고 주요 결의 사항에 “노회분립하기로 결의하다. ◎ 분립기준 - 태화강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누기로 하다. ◎ 노회명 -울산노회 (북쪽) 울산남노회 (남쪽)”이라는 보고서는 태화강을 경계선으로 한다는 상황을 보고한 것인데 총회가 받음으로 노회분립 경계는 태화강인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제92회 총회보고서 p.819에 “울산노회 분립위원회 보고” 제3차 회의의 결의사항 ①에 “총회분립위원회에 일임하여 문제가 된 태화강 남쪽의 양산시찰은 (가칭)울산남노회 소속으로 함이 지역 노회의 특성상 합일되므로 선포하고 이를 수용하기로 하고 합의 각서하니 (잔류측) 울산노회에서 5명 분립측 (가칭)울산남노회에서 5명이 합의 각서 서명을 하다.”라는 보고에 대하여 제92회 총회 회의결의 및 요람(2007) p.59에 “울산노회 분립위원회 위원장 최재우 씨의 울산노회와 울산남노회의 분립보고(보고서 p.818-820)는 받기로 하다.”라고 총회가 받음으로 종결되었다. 5. 결론 노회분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법리적 기준은 노회가 청원한 노회분립청원서이다. 그런데 울산노회의 분립 건은 노회분립청원서의 표지만 갖추었지 청원서의 내용은 “분립하자”는 결의와 “분립위원 15인의 명단만 기록된 노회 회의록”뿐이므로 사실상 하회의 고유한 특권인 노회분립청원서도 없이 상회인 총회의 허락으로만 노회를 분립한 꼴이 되었으니 불법분립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합법이든 불법이든 노회를 분립한지 8년이나 지난 현실에서 8년 전의 노회 불법분립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필요성은 그 시효가 이미 지나버렸다(권징 제116조).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당면한 노회를 분립할 당시에 분립 경계에 대하여 질의 자가 보내온 서류에 근거하여 법적으로 “시찰별 중심인가? 태화강 중심인가?”의 법리만 정리하면 될 것으로 보인다. 노회분립에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하회의 노회분립청원서가 표지만 갖추어져 있고 분립청원내용이 없으므로 부득불 분립 전의 울산노회의 촬요와 분립위원회의 총회보고서로 판단할 수박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분립 전의 제53회의 울산노회 촬요에 “노회 분립 기준”은“태화강 중심으로 하여 노회 명칭은“울산노회(북쪽), 울산남노회(남쪽)으로” 결의한 내용(촬요 p.50)과 같은 내용으로 제91회 총회보고서 p.1114에 울산노회 상황보고를 촬요대로 보고하여 총회가 수용하였으며, 제92회 총회 시에 울산노회 분립위원회가 보고하기를 “문제가 된 태화강 남쪽의 양산시찰은 (가칭)울산남노회 소속으로 함”등을 보고하니 총회가 유인물대로 받기로 가결하였다. 이상과 같이 울산노회의 결의와 김호환 목사의 “사실증명서”내용과 분립위원회의 총회 보고 내용이 일치하게 태화강을 경계로 북쪽은 울산노회로 남쪽은 울산남노회로 하는 노회경계를 결의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울산노회가 주장한 시찰별 중심으로 노회경계를 결의한 증빙할만한 근거서류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굴화리와 천상리는 법리적으로 남울산노회의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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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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