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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 칼럼] 총회신학원 초대 원장 임기를 마치며
    어느덧 임기 연임을 마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의 목회 은퇴도 몇 년을 남겨둔 가운데 있다. 내년 3월에 초대 총신원 원장직을 마치면서 어제와 오늘을 생각하며 소감을 나눈다. 어려서부터 통합, 합동에 속한 교회에서 자랐다. 영국에서 국제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0년 가까운 해외생활을 마감하고 한국행을 준비하는 가운데 한국 최초의 여자 목사인 최덕지 선생의 전기인, <이 한 목숨 주를 위해>(저자:최종규 목사)를 읽으면서 재건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에도 이런 위대한 의인이 있었다니! 이런 분이 사랑한 재건교회라면 일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비록 지금은 미미할지라도 뿌리가 좋고 그루터기가 남아 있을텐데...”(사6:13, 사42:8, 왕상19:18) 영국에 살던 우리 가족은 1989년 7월에 마산재건교회로 부름 받았다. 그러나 재건교회에서의 목회는 녹록치 않았다. 교단 안팎으로 헤쳐 나가야할 장애물들이 많았다. 타 교단과는 지역 목회자들과의 꾸준한 사귐, 연합사역, 방송설교, NGO사역 등으로 재건교회 이미지를 바르게 인식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교단 안에서는 재건교회 출신이 아니라는 뿌리 때문에 오랜 세월 논란이 많았다. 그로 인한 곤고함, 외로움,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많았다. 그런 나와 우리 가족에게 마산재건교회는 큰 위로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총회와 관련된 직책은 2001년 총회 서기로 선출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본류가 아닌 자가... 드디어 총회에 구린내가 나는구나”, 그런 비난의 소리에 나는 불과 4개월 만에 그 직책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 나에게 2007년에 믿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제89회 총회에서 뜻밖에 총회장으로 뽑힌 것이다. 지난 19년 가까이 재건교회 목사로 일하면서도 늘 국외자(outsider)와 같았던 나!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그때 받은 위로와 기쁨은 매우 컸다. ‘아, 드디어 나를 재건교회 목사로 인정해 주시는구나.’ 2010년에 또 한 차례 그런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다. 종래의 총회신학교를 총회신학원으로 승격시키면서 이사회와 총회는 재건교회 정통성, 믿음, 인격, 실력면에서 그저 그런 나에게 총회신학원 초대원장이란 직책을 맡겨 주었을 때이다. 이때에는 사양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목회자 양성은 교단 발전에 절대적인데 최선을 다해 보자는 마음이 나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때 그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언젠가 교단의 지역 연합부흥사경회의 강사로 초빙 받았는데 사회를 맡은 김00 목사의 강사 소개는 이러했다. “오늘 말씀을 선포하실 양영전 목사님은 재건교회 목사 가운데서 진짜 재건교회 목사이십니다.” 4년 재임 기간 중에 잊지 못할 감사의 제목들이 많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며 관계된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에 감사를 드린다. 첫째, 총회신학원 부지마련과 건물신축이다. 둘째, 학교를 위해 수고한 이사회와 교수진 셋째, 전국재건교회와 마산재건교회를 생각하면 감사할 뿐이다. 부족이 많은 목사였으나 나름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재건교회, 총회신학원을 위해 나를 사용해 주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여러 직책을 맡고, 또 임기가 끝나 그 직책을 내려놓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어느 기관의 대표였지만, 늘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는 숨은 일꾼들, 무엇보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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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교회법률상식]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에 대한 소고(1)
    -헌법개정위원회의 개정안은 헌법으로서의 품위가 없어-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 내용은 장로교 헌법일 수 없어 누군가인지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를 보내왔기에 위원회의 개정안을 읽고 소감을 피력하고자 한다. 합동 총회가 헌법개정위원회를 조직하여 계속 3년이나 위탁하였으나 개정 초안이 미흡하여 총회가 2회 연속 채택하지 못하였는데 제100회 총회에 제출할 개정 초안 역시도 헌법으로서의 권위와 품위가 없어 보이고 탈 장로교 헌법 초안이 되어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 교리 편에 대하여 국문법상 문제가 되는 것은 1. 신도게요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1에 “… 어떤 남자라도 동시에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는 것이나 어느 여자라도 동시에 한 명 이상의 남편을 두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다”에서 “한 명 이상의”를 “한 명을 초과하여” 혹은 “두 명 이상의”로 교정해야 하고(그대로 두면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 성경 대요리문답 제139문의 답에 “한 아내나 한 남편 이상을 두는 것”에서도 역시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므로 용어를 교정해야 한다. 고신 총회는 필자가 공개적으로 신문에 지적한 후 “두 사람 이상의 아내나 남편을 동시에 두는 것”이라고 개정하였다. 교리 편은 이상의 두 곳만 교정하면 무난해 보인다. ◎ 그 외의 교회 정치 개정안을 살펴보면 차라리 현행 헌법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더 나아 보인다. 헌법 개정안은 단 한곳만 흠결이 있어도 그 개정안은 채택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일일이 지적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이지만 몇 군데 정도 소감을 피력하므로 재고를 촉구한다. 1. 제3장 제1조와 제3조와 제4장 제4조에 “그 시무연한은 만 70세 마지막 날까지로 한다.”는 개정안은 제93회 총회가 “만 1세”는 “365일간”, 즉 “1년 동안”이라고 도표까지 그리면서 설명한 “엉터리 해석”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 가히 초등학생들이 보아도 깔깔대며 웃을 일이다. 만 1세는 두 번째 생일인 첫 돌 전날 하루뿐인 것을 헌법개정위원들 중에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단 말인가? 따라서 만 70세는 71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인 것이 법리이다. 이에 대하여 세인들은 “하버드대학교 박사 출신 최현서 씨가 26세 4개월의 최연소 나이로서 카이스트교수로 임용 되었다.”라고 하여 만 26세는 27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임을 입증하였다(교회법률 상식 pp.220-226 참조). 2. 제3장 제3조에 “교인의 안수 없는 종신직”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법리이다. 헌법 개정위원들은 교회 직원론에 있어서 항존(恒存)직과 종신(終身)직, 그리고 임시직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유감이다. 3. 제4장(목사) 제4조(목사의 칭호)에 11. 무임목사를 “정년 은퇴한 목사이다”라고 해 놓고, 13. 은퇴목사를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다”라고 하였으니 무임목사와 은퇴목사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어리둥절하다. 필자는 백번 읽고 또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다. 4. 제9장(당회) 제1조(당회 조직)와 제2조(당회 성수)와 제3조(당회장 및 대리 당회장)의 각 항은 모순투성이여서 손을 댈 수조차도 없다. ① 어찌 “노회가 파송한 임시목사와 치리장로”로 당회를 조직할 수 있단 말인가?(노회가 파송한 “임시목사”의 칭호는 개정 초안 어디에도 없다. 위원들은 그 조문을 밝혀 보라!) ② 제1조 1항에는 전임목사가 노회 허락 없이도 당연직 당회장인 것처럼 규정해 놓고, 제3조 1항에서는 “노회결의로 전임목사도 시무 중에 당회장이 된다”고 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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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성공칼럼] 자기 내면 살피기
    살다보면 사람들과 갈등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이 갈등으로 그동안 이뤄놓은 삶은 망가지게 된다. 부모와 자녀관계, 부부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지저분하고 거짓말하고 때때로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면 그 사람과 얼마동안 함께하고 싶겠는가? 가족이라서 얼마간 참기는 하지만 마음은 이미 함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기업이나 가정, 교회, 몸, 건물, 조직은 갈등하지 않고 결속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갈등이란 관계 속에 결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서 어느 누구든 걱정하고 분노하고 무시하고 이해하지 않고 속이고 소리치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밝고 따뜻하고 지혜롭고 솔직하고 사랑하고 좋은 것을 주려고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있으면 그 사람과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을 해결하려면 내 속에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은 요인을 갖추면 되는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자신 안에 갈등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통 대화를 하다가 쉽게 약속을 한다. 그러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수시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이유와 핑계를 대는 습관을 갖고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밝은 척, 정직한 척, 사이좋은 척하지만 사람들이 없을 때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습관처럼 갖고 있다면 이 습관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겉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습성을 몸에 갖고 있다면 또 그 외에 말은 옳지만 그 말 속에 서운함과 분노와 부정적 감정을 숨겨져 있다면 내가 갈등의 요소를 이미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갈등은 자기애와 세상의 소유를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애 때문에 거짓말을 옳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기를 높이고 돈과 지배욕을 소유하기 위해서 갈등이 유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끼리 모여서 대화하는 중에 그 집 자녀는 공부도 잘하고 취직도 잘하는데 우리 집 아이는 그렇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한다 하자. 그러면 자신의 아이에게 화가 나고 이웃에게는 불쾌한 마음이 들 수 있다. 이럴 때 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 감정은 이웃이나 자녀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속에 있었던 것이다. 즉 사랑보다는 자기사랑, 사람보다는 자기 욕망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기 사랑을 옹호하는 거짓말을 옳다고 여기는 태도가 상황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갈등은 자기사랑 보다 상대방을 목적으로 여기는 사랑과 선한 행동을 하고 진리 안에 있을 때 해결된다. 옳음 주장은 옳음이 아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갈등하거나 싸우면 이 옳음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과 상대방과의 좋은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니 옳지 않는 것이 된다. 옳음이란 머릿속으로 ‘옳다. 그르다’의 옳음이 아니라 사랑과 선한 모습을 갖고 오는 것이 진짜 옳은 것이다. 성경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지식적으로 의로움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서로 간에 신뢰가 생기고, 사랑이 생겨서 영원한 결합이 일어날 때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옳음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으며 상대방이 옳다고 하거나 내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더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며 진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면서 또는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사랑과 선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 안에 있는 갈등 요소 즉 나는 말과 행동이 같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인지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면이 솔직하고 밝은 사람인지 또 나는 수단이고 상대방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또 나는 돈이나 내 이익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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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은혜의 말씀] 감정풀기 (창32장 6~12절)
    야곱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 중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님과 싸움을 하고 태어날 때도 형님 발을 붙잡고 태어났습니다. 평생을 속고 속이는 너무도 인간적인 욕심꾸러기,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야망에 불타는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평생 인간적인 방법을 쓰고, 속이고 도망가고 피난 가던 야곱이 하나님 얼굴 뵈올 때 까지 그 씨름의 과정을 거쳐 얍복강에서 브니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나니까 영원한 야곱 인생의 숙제와 같은 형님의 문제가 해결 되고 형님을 만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인간적인·조작적인·인위적인·인보적인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기왕국을 구축하고, 끊임없이 속고 속이며 인간바벨탑을 쌓아보지만 다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야곱이 엄청난 거부가 되어서 고향땅으로 돌아오지만 가슴속에 해결하지 못한 수십 년 된 숙제가 있습니다. 형님 에서가 군사 사백 명을 앞세우고서 작살내려고 기다리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요? 창세기 32장 20절에 보면 「내 앞에 보내는 선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혹시나 형이 나를 받아 주리라」 야곱은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가 오면 인간적으로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야곱의 감정풀기 입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의 감정풀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인간적인 것은 더 헝클어지고 복잡하게 할 따름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인간적인 수단으로 선물공세를 해서 형님과의 관계를 해결하려 하고, 꼬인 실타래와 같은 감정을 풀어가려 했습니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부질없습니다. 인간 바벨탑을 쌓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그런 모습은 큰 부자가 되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37편에 보면 「행악자로 인해서 불평하지마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 하지마라. 속히 베임을 당하리라. 한 순간에 심판이 오는데 너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위탁하고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경영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리라」 평생의 욕심, 평생의 스타일, 평생 인간적인 모습을 내려놓고 그가 얍복강에서 큰 변화를 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내 교만은 꺾으시고, 내 욕심은 내려놓게 만들고 내 인간적인 야망은 반드시 손을 보십니다. 그런데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망을 품고, 계산해서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욕심스럽고 교만한 사람을 거침없이 꺾으시고, 기도하는 사람과 눈물로 엎드리는 사람에겐 늘 하나님이 져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복잡한 시대에 성도들의 삶이 천차만별입니다.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직장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그러면서도 수박겉핥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건성건성·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수박 겉을 핥지 말고 수박을 팍삭 깨뜨려서 통째로 드십시오. 언제까지 그렇게 야곱스럽게 살아갈 것입니까? 주님 앞에 항복하면 행복하고, 주님 앞에 회개하면 회복이 됩니다. 그 야곱이 험악한 세월 속에서 성형이 되고, 조율이 되고, 튜닝 되면서 마침내 ‘이스라엘’이 되어 집안을 회복하고 마지막에 아버지를 잘 모시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욕심과 야망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 거짓이 없는·속고 속이는 전쟁이 없는 하나님나라 천국을 만들어 가시고, 우리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이 중심에 우뚝 서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 하나님 앞에서 이긴 자의 삶을 살아드리기를 우리 주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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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가정칼럼] 내 인생의 밑줄이셨던 선생님
    The Survey Q 3R 선생님은 그렇게 다가오셨다. 무슨 암호냐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까까머리 소년은 이 기호부터 배웠었다. S는 Survey(관측)다. Q는 Question(질문)이다. 그리고 3R이란 Reading(읽기)과 Recite(Recall, Recording-암기, 기록) 그리고 Review(되풀이, 반복, 복습, 재음미)를 말한다. 독서법이었다. 난 지금까지 이 독서법을 놓쳐본 일이 없다. 그 독서법이 재미있어 읽고 또 읽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책이란 만인의 대학”이라고 했다. 나는 한 해도 아닌 두 해를 월반(?) 했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활자는 이해력, 상상력, 집중력, 어휘력, 기억력 등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깨우쳐 준 스승이었다. 잘 고른 한 권의 책은 스스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는 좋은 길잡이였다. 한 번 붙잡은 책은 여지없이 밑줄이 그어졌다. 밑줄이 그어질수록 나의 세계는 확장되어 갔다. 선생님은 입시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책 읽기를 강조했다. 선생님의 그 원려(遠慮)를 깨우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글씨를 잘 쓰려면 “오천 권의 문자가 가슴에 있어야 한다.”는 말로 책읽기를 장려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유배지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라면서 폐족으로서 책읽기를 통해 집안을 일으키라고 당부했다. 책을 붙잡고 누비지 않은 세상이 없었다. 밟지 않은 땅이 없었다. ‘밑줄 인생’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밑줄이란 중요한 것에 대한 표시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에 다짐이다.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때로는 자신을 향한 마음의 박수가 되기도 한다. 밑줄을 많이 그으면 그을수록 인생은 빛난다. 밑줄은 끝내 자신의 인생의 훈장이 된다. 밑줄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내 인생의 부호(符號)였다. 선생님은 때로 의문표였고 쉼표였고 느낌표였으며 Apostrophe(')가 되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질문하는 법을 배웠고 감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익혔다. 불가능(Impossible)을 가능(I'm possible)으로 만드는 열쇠가 지혜임도 알았다. 그리고 어느 날 학창시절에는 물 건너 먼 산 쳐다보듯 바라다보던 모교의 스피릿(교훈)이 선생님의 철학이고 삶이었음을 안다. 여느 학교의 교훈과 달리 스스로의 고백 문으로 작성된 ‘나는’으로 시작되어 ‘되련다.’는 고백으로 끝나는 교훈이 지금은 나의 삶의 교훈과 철학이 되어 있다.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이 되련다.” 나는 지금껏 내가 밑줄을 긋고 또 밑줄을 그은 문장들 중에 이보다 더한 명문장을 찾아본 일이 없다. 아니 선생님이 바로 내 인생의 밑줄이었다. 덤으로 얻게 된 물음표와 쉼표 그리고 감탄사와 어퍼스트로피 조차도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선생님의 편린(片鱗)들이었음을 안다. 이제는 안다. 선생님을 대신해서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밑줄이 되고 부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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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시사칼럼] 독서의 계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무엇일까요? 가을입니다. 한 설문조사 결과 연령 불문하고 응답자의 44.2%가 선호하는 계절로 가을을 꼽았다고 합니다(2014.10. 한국갤럽조사연구소). 그래서인지 가을 하면 유독 아련히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많습니다. 국화, 코스모스, 단풍, 낙엽, 황금들판, 보름달, 추석, 가족, 천고마비(天高馬肥),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든다는 가을 전어(錢魚), 그리고 독서의 계절, 그렇습니다. 누군가 ‘가을은?’이라고 물으면 자기도 모르게 ‘독서의 계절’이라고 답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을 시간도 여유도 많이 부족한 계절이 가을이라는 사실이 함정입니다. 직장인들은 연말 인사고과에 반영될 실적 올릴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분주하고, 주부들은 추석 명절 준비하느라 정신없고, 수험생은 수능시험 때문에 독서란 말 자체가 언감생심(焉敢生心)입니다. 하지만 독서는 환경이 아니라 습관이 더 중요합니다. 찰스 두히그(Charles Duhigg)는 『습관의 힘』에서 바이러스성 뇌염을 앓고 기억을 잃어버린 ‘E. P.’라는 환자를 통해 이루어진 ‘기억은 사라져도 습관은 남는다’는 발견을 소개합니다. 이를 독서에 적용한다면, 계절이나 환경과 관계없이 어떻게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느냐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이 쓴 『독서의 역사』 첫 페이지는 위대한 독서가들 사진이나 그림을 18장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시각장애인이었던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66)가 누군가 책 읽어주는 소리를 경청하는 사진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독서를 습관적 행동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선한 동기와 열망과 공감대로 기능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책읽기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De imitatione Christi)』를 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이 책을 손에 쥘 때는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려 할 때처럼 행동하라. 그리고 그대들이 책 읽기를 끝낼 때면 책장을 덮고 하나님의 입을 통해 나온 그 모든 단어들에 감사를 표하라. 그 이유는 그대들이 하나님의 영역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해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발언입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도 아마도 비슷한 취지로 1966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Wir brauchen doch-die Bibel und die Zeitung.” 직역하자면 “우리는 성경과 신문 양자를 다 필요로 한다”가 되겠지만 이보다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경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명언입니다. 어디 신문뿐이겠습니까? 책도 읽어야 하고, 때로는 바닷물에 손을 담그고 대자연도 읽어내야 하고, 때로는 남들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사람들도 읽어야 하는 것이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특별히 부여된 사명과 책임이라는 생각입니다. 197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소웨토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백인 정권의 강압적인 교육정책에 반발한 소웨토(Soweto) 지역 흑인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로 600명이 죽고 수천 명이 도피했던 사건입니다. 이어진 암울한 80년대를 거쳐 1994년 마침내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는 흑백연합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현대사를 통해 종교적 죄의식과 역사적 부담감으로 고민하던 작가들이 나타났습니다. 접근하는 방식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지만 이러한 작가군 중에서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가 1991년, J. M. 쿳시(Coetzee)가 200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을이 오면 올해에는 한국에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까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성인 1인당 평균 독서량 9.2권(월 0.76권), 기독교인 중 1년에 신앙서적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의 비율이 60%가 넘는 나라입니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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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서임중 칼럼] 목회(凩會)가 아닌 목회(牧會)를 기도한다.
    목회(牧會)를 시작하면서, 나 같이 죽을 죄인이 하나님이 맡기시는 주님의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고 치는 성역(聖役)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어야 하는 당위성을 마음에 담고 목회를 시작했다. 이론이야 쉽지만 그것이 삶에 적용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가는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다. 그 시간을 지혜롭게 넘기지 못하고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목회(牧會)는 목회(凩會)가 된다. 牧會를 푸른 초장이라면, 凩會는 찬바람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을 뜻한다. 이와 같은 경우는 지상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픔이고 고뇌다. 그래서 십자가의 보혈로 세워진 주님의 교회가 사람들의 사욕(私慾)에 의하여 허허벌판이 되기도 하고 거룩한 그 나라의 사람들, 곧 성도(聖都)의 성도(聖徒)라 하면서 시정잡배(市井雜輩)만도 못한 언행과 관계로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지경이 되면 소위 세상에서는 상식이라도 통하지만, 상식도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귀신도 웃는다는 말이 통용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못된 망아지는 두들겨 패야 길이 든다.’는 말이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 통용되어 정상적인 상식이 통하는 이해관계는 기대할 수 없고 조폭출신의 말은 먹혀든다는 말이 우리 귀에 들려지는 것이다. 이보다 더 기막히고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오직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믿음이 없으면 의리라도 있어야지 의리로 똘똘 뭉쳐진 조폭만도 못한 예수쟁이가 되어서 되겠는가?’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지는 교회실상이 주님의 아픔이 된다. 교회를 들여다보면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가난의 옷을 입고 살면서 늘 부요한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구제와 봉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 오랜 지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 만나면 그냥 훈훈한 웃음을 나누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서 목회(牧會)의 행복과 감동을 느끼고 경험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갖고 살면서 홀로 벌판에 선 듯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의 언어는 수천 만 마디 쏟아내면서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 언제보아도 얼굴은 편하지 않고 그러기에 입술에 불평과 원망을 달고 다니는 사람들, 자기 자신이 가장 교회를 사랑하는 듯 분별도 분수도 모르고 언행하면서 정작 갈라디아서 5:22~23절의 성령의 열매는 찾아 볼 수 없고 오히려 그 반대적인 언행으로 분열과 분쟁을 일으키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벌판 같은 목회(凩會)의 현장에 서 있는 고뇌를 느끼고 경험한다. 중요한 것은 牧會이든, 凩會이든 그 현장을 윤택하게도 하고, 허허벌판처럼 만드는 것도 목회자의 몫이다. 그러기에 凩會현장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목사는 종종 말씀의 검을 들어야 하고 징계의 채찍도 들어야 한다. 그래서 목회 행정면에서 권징(勸懲)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牧會)를 위하여 목회자는 원망을 듣고 아픔을 당하기도 하지만, 凩會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아픔과 고뇌도 마음 안에서 삭여 내어야 하는 힘든 시간들이 있다. 牧會현장에 수없이 다가왔다가 멀어져 가는 사람들! 그리고 멀어졌다가 다가오는 사람들! 그럴 때마다 벳새다 언덕의 예수님에게 수 천 명의 군중이 다가왔다가 그 수 천 명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 대며 멀어져 갔던 것을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도 예수님에게 향유를 깨뜨렸던 마리아가 있는가 하면, 예수를 은 30에 팔아넘긴 유다도 있고, 바울에게는 자신의 목이라도 내 놓을 수 있는 사랑을 실천했던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는가 하면, 항상 바울에게 해를 입혔던 구리 장색 알렉산더도 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사랑을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는 것, 또 그 마음으로 너의 유익을 위해 행동하는 나의 삶을 오늘에 실천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나눔이다. 이 사랑과 나눔은 낮은 마음을 가진 자들의 몫이며, 그곳이 牧會현장이다. 목회현장에서 은퇴를 한 후 1년 52주일 쉼 없이 전국 방방곡곡 크고 작은 교회의 초청을 받고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는 뜰 밖의 목회를 하면서 종종 교회가 목회(牧會)가 아니라 목회(凩會)현장이 되어가는 것을 볼 때,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로 집회를 인도할 때가 있다. 그래도 주님의 은혜로 집회가 마무리 될 때는 감동과 행복, 기쁨과 감사로 얼룩진 얼굴로 목회(凩會)현장이 목회(牧會)현장으로 바뀌어 지는 은총을 경험하면서 이 땅의 교회가 목회(牧會)현장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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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성서연구]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애굽기 4장 2절,17절)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들 중 한 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구출하여 가나안을 향해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웅도 처음부터 위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실패로 인해 깊이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십 세가 되었을 때 노예로 고생하는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 사람을 죽였는데, 동족들이 그를 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배척했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그 후로부터 사십 년 동안 그는 세상에서 완전히 잊힌 인물이 되었고, 그저 양을 먹이는 목자로서 살아갈 따름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용기도, 의욕도, 열정도, 비전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이런 모세가 딴 사람이 되는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양을 먹이던 모세는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깊은 절망 때문에 자신은 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의 생각과 말은 모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이유를 여러 가지로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세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돌려 놓으셨습니다. 출애굽기 4장 2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을 묻지 않으시고, <있는 것>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물으셨습니다. 당시 모세는 손에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만을 생각하며 낙심하는 사람들에게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 보십시오. 집안의 가구들, 신발, 옷가지, 냉장고의 음식들, 소지품들부터 시작해서 옆에 있는 가족들, 우리를 걱정해주는 사람들, 건강, 재능, 기회......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고 낙심한 사람들도 아직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입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리 우리가 연약해도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이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게 하셨고, 모세가 던졌을 때 뱀이 되었습니다. 그 후 뱀의 꼬리를 잡게 하셨고, 모세가 잡았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지팡이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마른 막대기였으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깜짝 놀랄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이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마른 막대기와 같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위대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을 지팡이로 이적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4장 17절에서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지팡이 밖에 없어도 겁낼 것이 없고, 우리가 지팡이처럼 마른 막대기와 같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면 충분합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이 반쯤 담긴 컵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방식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물이 반 밖에 없다>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물이 반이나 있다>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강하고 담대한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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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삼고 이승만은 건국대통령으로 인정해야 사람마다 태어난 생일이 있다. 그와 같이 나라도 태어난 건국절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부끄럽게도 건국절이 없다. 실은 건국일이 있지만 공인된 건국일이 없다. 아마도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뿐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건국’이라는 말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지금 청소년의 90%와 일반 국민의 65%가 건국일이 언제인지 모른다. ‘건국’이라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한 원인은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려는 반 이승만 세력이 ‘건국’이라는 말이 일상에서 사라지도록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가 보고 놀라는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건국절도 없고 건국기념관도 없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탄신 140주년과 서거 50주년을 맞아 탄신을 기념하고 서거를 추모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우리나라 건국대통령을 외국에서도 그토록 추앙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건국대통령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건국’이라는 말조차 사용하기 싫어하는 세력이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20대 청년기에는 암울했던 구한말의 사회개혁과 민중계몽가였고, 30~60대까지는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을 거점으로 평생토록 독립투사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초대 대통령이었다. 70대에는 혼란한 해방정국과 공산, 사회주의가 풍미하던 세계적 시대상황을 극복하고 드디어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이다. 신생국 대한민국이 채 정착하기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에 그는 외교역량을 발휘하여 미군과 UN군을 1주일만에 참전시키는 쾌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호국영웅이기도 하다. 6.25전쟁의 휴전이 불가피해지자 이를 빌미로 미국을 회유협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고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수 있도록 한 외교와 정치의 달인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지금이라도 당국은 중구난방의 건국일 논란을 정리하고 대한민국이 탄생된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임을 명쾌하게 결론 내리고 이 날을 국가의 경축일로 제정하여 광복절과 나란히 온 국민이 기념하고 경축해야할 것이다. 또한 한 평생 건국을 위해 고생하고 종내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해야함은 물론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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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목회자 칼럼] 조국, 하나님의 선물 ①
    ‘선물’은 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가치와 무게가 달라진다. 귀하신 분, 높으신 분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면 그 선물은 더욱 귀하고 소중하다. 그러므로 잘 가꾸고 잘 간수해야 한다.「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 대한민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삶의 터전으로 허락해 주신 위대한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민족에게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주셨다. 우리나라 삼천리 반도는 화려한 강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단으로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답기가 그지없다.그리 크고 넓지는 않지만 어느 한 곳 단 한 뼘이라도 허술하거나 쓰지 못할 땅이 없다.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이토록 뚜렷한 나라가 지구상에 별로 없다. 여름이 되면 동해, 서해, 남해 해변에는 아름다운 해수욕장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추운 겨울이 오면 산악 지방에는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려 여기 저기 스키장이 펼쳐진다.하나님이 크게 복을 주셔서 기름진 땅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다. 이 비옥한 땅에서 생산되는 오곡백과는 그 품질과 맛이 참으로 우수하다.나는 우리 선교사님들이 낯선 이국땅에서 선교 사역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오곡백과를 실컷 먹어 보는 것 이라고 털어 놓을 때 정말 감동을 느꼈다. 어떤 선교사님은 우리 땅에서 재배된 배가 먹고 싶어서 너무 힘들어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백화점은 말 할 것도 없고 재래시장과 골목시장 심지어 마을 가게에 까지 수북수북 아름답게 줄지어 쌓여 있는 온갖 과일들을 길을 가면서 바라볼 때 나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그리 크지도 넓지도 않는 우리 강산에서 어쩌면 저렇게 다양하고 잘 생기고 그 맛이 뛰어난 과일들이 많이 생산되는 것일까? 나는 자주 감탄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행복해 한다.동해, 서해, 남해 삼면의 바다에는 풍족한 각종 어족과 해산물이 넘쳐난다.그 품질은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 바다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최상급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땅과 바다를 기름지게 해 주시는 결과이다.한번 더 눈을 들어 바라보자. 농경과 각종 산업, 삼림(수목)에 필수적인 것은 강수량이다.강과 하천에 물이 풍부해야 한다. 물은 그 수요가 절대적이다. 우리 한반도는 작은 땅이다.중국의 50분의 1이요 러시아의 100분의 1이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 땅은 사막이 많고 동토도 많다. 우리나라 전 국토는 단 한 평(坪)도 버릴 것이 없다, 아름답고 비옥하다. 22만 평방킬로미터의 작아 보이는 땅이지만 저 아름다운 강(江)들을 보라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남대천,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동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이 한반도를 굽이굽이 마치 사람의 몸의 핏줄처럼 감싼 채 흐르고 있다.열차를 타거나 승용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이 아름다운 강들과 이름 없는 작은 하천(河川)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흐르고 있는 맑고 풍부한 물을 바라볼 때 나는 늘 행복해지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또 이 땅의 산(山)들은 어찌 그리 잘 생기고 많은지 ! 한반도의 북쪽은 놓아두더라도 설악산, 태백산, 오대산, 두타산, 대성산 향로봉, 북한산, 관악산, 인왕산, 도봉산, 대둔산, 덕유산, 월악산, 무등산, 금오산, 한라산, 지리산, 그리고 우리 주변의 황매산, 가지산, 무척산, 무악산, 금정산, 장산, 황령산, 천성산, 구덕산, 천마산, 승학산, 고갈산 ... 사방이 온통 산뿐이다. 산들은 하나같이 삼림이 빽빽하게 우거져 아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도록 울창하다. 여름 산들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고 건강하다. 바라만 보아도 흐뭇하고 행복해진다.아~ 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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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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