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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인물탐구] 약한 인간 베드로(3)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였지만 급한 성격과 인간적인 연약성 때문에 실수를 여러 번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때 무력으로 대항하려 하였고,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약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의 은혜로 훌륭한 복음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룟 유다에게 팔려 잡히실 때에 예수를 잡으러 온 군인들은 병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스승을 위하여 칼을 뽑는 베드로의 모습은 충성스런 제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 오히려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주의 뜻에 어긋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사람들의 손에 잡혀 가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자기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에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의 베드로의 반응과 일맥 상통합니다. 베드로는 그때에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라고 말하였다가 예수께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마음과 행위는 예수께 대한 충성과 같이 보였지만, 이는 예수께서 책망하신 대로 그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 데서 나온 실책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결국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사건에서 잘 보여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잡히실 것과 그때에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라고 다짐했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는 차라리 예수와 함께 죽는 일이 있을지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짐이 헛된 것이었음이 그 날 밤에 증명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습니다. 예수가 체포된 상태에서 정죄 받아 형벌을 받게 되면 예수를 좇던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언하신 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를 시인하지 못하고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을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명을 아깝게 여길 때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아니하는 자는 자신을 좇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육신의 생명은 빼앗되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을 함께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교훈하셨습니다. 이로써 그 동안 장담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의 충성심은 허구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를 부인했을 때 닭이 곧 울었습니다. 닭 우는 소리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는 말씀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가 심히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또한 그 통곡은 회개의 통곡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졌던 자만심이 완전히 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자신의 인간적인 의지가 얼마나 약하고 헛된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베드로에게는 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의 자리에 나아가기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길에서 성도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만심입니다. 자만심은 실족하게 하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성도에게 자만심을 불어 넣음으로써 자멸하게 만들려고 시도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함으로써 신앙의 길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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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성공칼럼] 모독하지 않기
    모독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지위와 권위를 악하게 사용하여 그 본질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으로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나 진리로 진리를 모독하는 경우가 있다. 진리로 진리를 모독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진리를 알고 있는 지도자가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진리를 듣고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 말에 감동받아 시간과 물질과 모든 것을 드린다. 그런데 그 지도자가 성적으로 타락하고 헌금을 사리사욕에 사용하고 온갖 추악한 일을 한 것이 드러났다 하자. 그러면 그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들은 실망하고 화가 나서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게 된다면 이 때 그 지도자는 진리를 모독한 것이 되며 진리의 본질인 사랑이나 선을 모독한 것이 되는 것이다. 모독하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선생님이 자신의 제자를 성추행하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절대적인 권위와 힘을 갖고 있다. 학생은 배움을 위해서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른다. 이런 자신의 제자에게 성욕을 품고 성추행을 하면 이 아이는 평생 큰 상처를 입어 모멸감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선생님’ ‘학교’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릴 것이며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거부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나중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선생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마음에 높은 벽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런 선생은 선생님을 모독한 것이다. 거룩하고 선한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그 직함대로 살지 않으면 그 직함을 모독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종교단체나 비영리 단체가 건립될 때 수많은 사람들의 기부금으로 건물이 지어지고 운영이 된다. 그 단체를 위해 기부한 사람들은 그 단체가 선한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의 물질을 내어 놓는 것이다. 그 단체가 악한 일이나 사리사욕을 취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을 내어놓겠는가? 그러므로 그 단체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지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잘 행하라고 지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영리 단체가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한 뜻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들의 마음에 ‘내가 기부한 후회 된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면 그 단체는 사랑을, 그 분들의 헌신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단체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선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는 그 어떤 곳보다 가장 진실하며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리와 사랑을 말하는 교회가 도리어 거짓과 악을 행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세상은 거짓말을 하고 악을 저질러서 지탄을 받을지언정 하나님을 모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모독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권력을 갖고 온갖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진리를 선포하면서 온갖 악을 저질렀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모독한 죄로 몰아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권위를 갖고 있으며 누구나 바리새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목사이면서 목사로서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가? 혹은 내가 부모이면서 부모의 옳은 삶을 살고 있는가? 또는 내가 선생이면서 선생으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본질 즉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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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은혜의 말씀] 남은 사람들 (왕상19장14~18절)
    오늘 성경말씀에 보면 「나만 남았거늘」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기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가지고 남은 사람, 끝까지 남은 것이 무엇인가! 남은 사람들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역보다 중요한건 사람이고 일이나 행사보다 중요한건 행복입니다. 우리가 일에 치우치고 일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멋진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 축복인 것입니다.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도 있고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엘리야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엘리야야 말로 가장 인간적이고 너무나 우리하고 비슷한, 너무도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엘리야의 사람 사는 것을 보면 동병상련, 이심전심, 소통과 공감 등 우리 내면의 어떤 모습과 닮은꼴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열왕기상 19장 14절에 보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엘리야가 가지고 있는 쓰임 받는 사람의 조건을 볼 때 될성부른 나무의 그 떡잎, 이기는 사람의 습관, 엘리야의 가슴속에 있었던 하나님, 이것이 그 사람을 들어 쓰실 수밖에 없는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모습이었고 ‘열심’이 크다고 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이 험한 세상에서 지치고 상하고 별꼴이 반쪽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슴에 지치지 않는 힘, 결코 포기되지 않는 핵심적인 에너지를 열심이 특심이라 합니다. 열정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마지막 남은 것이 후회만 남고, 아쉬움만 남고, 부끄러움만 남으면 안 됩니다. 가슴에 불덩어리가 남아있어야 됩니다. 엘리야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지만 가슴에 열정이, 열심이, 특별하여 하나님이 그 사람을 끝까지 붙들고 가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엘리야란 사람은 최악에서 최상으로, 스펙을 넘어서 스토리를 만들어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엘리야 콤플렉스란 말을 합니다. 그 콤플렉스가 엘리야를 기도하게 만들고, 문제를 문제로 만들지 않고 기도의 자리로 그를 이끌어가고, 엘리야의 일생을 거침없이 끌고 가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 하나님 사람, 창조적인 소수가 될 리가 없습니다. 엘리야는 약점이 많았지만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었고, 수많은 변명과 핑계, 원망거리가 충분히 있지만 시대의 대안이 되고, 대체 불가능하고 비교 불가능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엘리야는 기도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것이 야고보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를 다시 보면 야고보서는 기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 자체가 별명이 낙타무릎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이었지만 낙타무릎이 되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불꽃을 태워 올리면서 더욱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신앙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고 마음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내가 너를 남겨놓았다. 너야말로 내손에 남아있는 마지막 건더기다.’하시고 엘리야가 그 시대에 남은 자이듯이, 이 시대에 남아있는 한사람, 여러분 가문에 남아 있는 한사람, 마지막 숨통이 트이는 한사람 되시고, 주님역사에 길이 남아 생명책에 기록이 남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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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교회회계] 교회 회계감사의 방법과 절차
    회계감사(auditing)란 한 조직의 경제활동이 재무제표에 적정하게 표시되고 집행되었는가를 검토하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고 결과를 전달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도 고유 사역과 활동이 적정하게 진행되었는가를 확인하고, 또 장기적 측면에서 교회재산을 효율적으로 운영관리하기 위해서는 감사가 꼭 필요하다. 본 칼럼의 목적은 교회 회계감사에 필요한 방법과 절차를 실무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데에 있다. 또한 다음 가이드라인을 기초로, 각 교회가 상황에 맞추어 감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준비, 실행해 갈 것을 권면한다. 첫째, 감사 예비절차로서, 교회는 매년말 공동의회에서 다음연도 감사(2인이상)를 선임한다. 1명은 당해연도 교회 재정흐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재정 실무자로 하고, 다른 1명은 해당부서와 이해관계가 없는 독립적 위치에 있는 자 중 가능한 한 회계전문가를 세운다. 또한 감사로 선임된 자는 감사계획을 세우고, 회계연도(예:12월1일-11월30일) 마지막 결산주일을 기준으로 교회 재무제표는 물론, 재정지원을 받는 모든 부서(예:교회학교, 찬양대등)의 회계장부를 마감하여 제출하도록 한다. 제출 자료는 회계장부와 통장, 영수증, 기타 감사증거가 될 수 있는 내용으로 한다. 둘째, 본 절차로서, 감사는 결산이 끝난 12월초부터 약2주에 걸쳐 교회 재무제표와 부서 회계자료를 기초로 검토에 들어가 구체적인 감사 작업을 한다. 감사내용은 다음 사항을 중점적으로 체크한다. 1. 장부상의 현금예금과 기말 통장잔액 일치: 회계장부에 표시된 현금예금과 기말 통장잔액의 일치여부를 확인하고, 소속 모든 부서의 입출금 흐름이 회계장부와 맞는지 검토한다. 특히 수입과 지출은 은행에 법인 OTP 또는 실무책임자의 공인인증을 개설해 일원화하여 투명하게 관리하고, 필요에 따라 일반경상비, 선교, 건축, 전도, 장학, 온라인헌금 등의 통장을 만들어 온라인 입출금 원칙으로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확인하는 감사를 한다. 교회학교등 소속부서의 재정지원도 온라인 입출금을 원칙으로 하고, 지출의 경우도 현금카드 사용을 장려한다. 단 외부강사 사례비, 구제 등 주일 현금지출이 필요한 경우는 예외를 인정, 사역이 높은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탄력적으로 운영한다. 2. 재무제표 작성 및 회계장부 표시의 적정성: 재무제표(재무상태표, 운용성과표등)가 교회회계기준에 따라 적정하게 작성되고, 또 소속부서의 회계장부가 위반사항 없이 충분하게 잘 표시되어 있는지를 감사한다. 필요한 경우, 매주 집계된 수입지출 주간보고서를 포함해 월별, 분기별, 반기별 보고서 등의 회계장부도 검토한다. 복식부기원리 적용시는 현금중심의 수입지출 표시 외에도 차변과 대변 분개의 분류, 발생주의 개념에 기초한 기말 수정분개, 자산부채의 공정가치 평가가 적정하게 이루어졌는지 추가적으로 검토한다. 3. 재정집행 및 지출의 적정성 : 교회재정의 지출이 고유의 사업목적에 따라 적정하게 집행되었는지를 감사한다. 특히 결산내용이 전년도말에 수립한 예산과 비교하여, 적정한 절차와 의사결정을 통해 집행되었는지 검토한다. 즉 매주 작성되는 지출결의서등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 또 가능한 한 교회재정이 그 사명과 사역효과는 극대화하되, 불필요한 지출이나 낭비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감사를 한다. 4. 영수증 및 감사증거 자료의 검토: 회계장부에 표시된 수입지출 내용과 영수증과의 관련을 검토한다. 영수증은 지출결의서에 첨부된 것과 부서 재정신청서를 확인하고, 부서의 경우 별도 영수증 모음집을 만들어 관리해 갈 수 있도록 한다. 셋째, 감사결과에 대한 의견표시의 단계로, 감사의견은 적정의견, 한정의견, 부적정의견, 의견거절 4개로 분류되며, 감사내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그 중 1개를 선택하여 표시한다. 적정의견은 재무제표 및 회계장부가 교회회계기준에 맞추어 적정하게 표시, 집행되었음은 인정하는 것이다. 한정의견은 일부 사항의 회계처리에 문제가 발견된 경우 표시하며, 그 왜곡사항의 영향이 중대하거나 정당한 이유없이 이루어진 진 경우는 부적정의견을 표명한다. 이 경우, 감사인 반드시 그 제한사항이나 부적정 이유를 특기사항으로 표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의견거절은 감사증거의 수집과 의견표명이 불가능하도록 감사범위에 제한이 있거나 독립성에 의문이 초래될 경우 표명한다. “공인회계사는 자본시장을 지키는 파수꾼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그만큼 현대 경제사회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는 회계장부의 작성과 감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사는 교회의 발전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청지기로서의 역할을 한단계 더 성숙하게 수행해 가기 위한 체계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최근 거세게 일고 있는 외부감사 논의를 넘어, 교회가 먼저 긍정적으로 감사결과를 받아들여 개선을 위해 노력해 갈 때 세상으로 부터는 물론, 우리 주님께 더욱 칭찬받는 교회로 세워져 갈 수 있을 것이다. 다음 호는 소규모 교회의 회계와 현금흐름표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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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
    이승만은 평생 나라위해 살았고 자기 위해 축재한 건 한푼도 없어 올해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국 땅에서 서거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대통령이 4.19혁명으로 인해 하야한 후 하와이로 간 것은 망명이 아니었다. 2~3주 쉬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짐이라고는 트렁크 2개와 타자기와 약품을 넣은 가방이 전부였다. 그는 한국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정부가 그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귀국길이 막히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는 매일 한국 방향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마지막 운명하는 날에도 그는 요양원 202호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한국방향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승만은 바다를 가리키며 “저 서쪽에 우리 한국이 있는데...”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토록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이승만은 이국 땅에서 마지막 날을 맞았다. 그는 1965년 7월 10일 01시 35분(한국시각 오후 7시 35분)에 운명했다. 이승만은 생의 대부분을 일편단심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해방 후에는 UN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25 남침을 당했을 때에는 그의 탁월한 외교의 위력으로 미군만 아니라 UN군까지 참전시켜 나라를 지켜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때 하마터면 전 국토가 공산화 될 뻔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는 반 이승만 세력이 이승만의 공적은 인정하지 않고 그의 과오만 지적하면서 그를 폄하해 왔다. 공과 과는 누구에게나 있는데 말이다. 이젠 지금부터라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대통령이다. 그가 없었다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가 근간인 대한민국 건국이 가능했겠는가. 그의 애국심, 열정, 헌신, 공적 등에 비하면 그의 과오는 용서받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평생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살았고 자기를 위해 축재한 것은 한푼도 없었다. 하와이에서 5년간도 교포들이 조금씩 모아 주는 돈으로 겨우 연명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나라밖에 모르는 애국자 중 애국자였다. 거기다가 신앙도 독실했다. 그가 남긴 유언도 다른 말이 아니고 성경 갈라디아 5:1의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굳게 서서 다시는 노예의 멍에를 메지말라” 이 성구는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옆에 세운 이승만 동상에도 새겨져 있다. 그의 유언을 보면 그가 평생 자유민주주의 건국을 갈망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생각해 볼수록 그는 훌륭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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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07
  • [목회자 칼럼] 총회신학원 초대 원장 임기를 마치며
    어느덧 임기 연임을 마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의 목회 은퇴도 몇 년을 남겨둔 가운데 있다. 내년 3월에 초대 총신원 원장직을 마치면서 어제와 오늘을 생각하며 소감을 나눈다. 어려서부터 통합, 합동에 속한 교회에서 자랐다. 영국에서 국제장로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0년 가까운 해외생활을 마감하고 한국행을 준비하는 가운데 한국 최초의 여자 목사인 최덕지 선생의 전기인, <이 한 목숨 주를 위해>(저자:최종규 목사)를 읽으면서 재건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에도 이런 위대한 의인이 있었다니! 이런 분이 사랑한 재건교회라면 일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비록 지금은 미미할지라도 뿌리가 좋고 그루터기가 남아 있을텐데...”(사6:13, 사42:8, 왕상19:18) 영국에 살던 우리 가족은 1989년 7월에 마산재건교회로 부름 받았다. 그러나 재건교회에서의 목회는 녹록치 않았다. 교단 안팎으로 헤쳐 나가야할 장애물들이 많았다. 타 교단과는 지역 목회자들과의 꾸준한 사귐, 연합사역, 방송설교, NGO사역 등으로 재건교회 이미지를 바르게 인식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교단 안에서는 재건교회 출신이 아니라는 뿌리 때문에 오랜 세월 논란이 많았다. 그로 인한 곤고함, 외로움,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많았다. 그런 나와 우리 가족에게 마산재건교회는 큰 위로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총회와 관련된 직책은 2001년 총회 서기로 선출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본류가 아닌 자가... 드디어 총회에 구린내가 나는구나”, 그런 비난의 소리에 나는 불과 4개월 만에 그 직책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그런 나에게 2007년에 믿지 못할 사건이 발생했다. 제89회 총회에서 뜻밖에 총회장으로 뽑힌 것이다. 지난 19년 가까이 재건교회 목사로 일하면서도 늘 국외자(outsider)와 같았던 나!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으나 그때 받은 위로와 기쁨은 매우 컸다. ‘아, 드디어 나를 재건교회 목사로 인정해 주시는구나.’ 2010년에 또 한 차례 그런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다. 종래의 총회신학교를 총회신학원으로 승격시키면서 이사회와 총회는 재건교회 정통성, 믿음, 인격, 실력면에서 그저 그런 나에게 총회신학원 초대원장이란 직책을 맡겨 주었을 때이다. 이때에는 사양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목회자 양성은 교단 발전에 절대적인데 최선을 다해 보자는 마음이 나를 지배했다. 그리고 그때 그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언젠가 교단의 지역 연합부흥사경회의 강사로 초빙 받았는데 사회를 맡은 김00 목사의 강사 소개는 이러했다. “오늘 말씀을 선포하실 양영전 목사님은 재건교회 목사 가운데서 진짜 재건교회 목사이십니다.” 4년 재임 기간 중에 잊지 못할 감사의 제목들이 많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며 관계된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에 감사를 드린다. 첫째, 총회신학원 부지마련과 건물신축이다. 둘째, 학교를 위해 수고한 이사회와 교수진 셋째, 전국재건교회와 마산재건교회를 생각하면 감사할 뿐이다. 부족이 많은 목사였으나 나름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재건교회, 총회신학원을 위해 나를 사용해 주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여러 직책을 맡고, 또 임기가 끝나 그 직책을 내려놓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어느 기관의 대표였지만, 늘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는 숨은 일꾼들, 무엇보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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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2015-09-24
  • [교회법률상식]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에 대한 소고(1)
    -헌법개정위원회의 개정안은 헌법으로서의 품위가 없어-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 내용은 장로교 헌법일 수 없어 누군가인지 헌법 개정안 공청회 자료를 보내왔기에 위원회의 개정안을 읽고 소감을 피력하고자 한다. 합동 총회가 헌법개정위원회를 조직하여 계속 3년이나 위탁하였으나 개정 초안이 미흡하여 총회가 2회 연속 채택하지 못하였는데 제100회 총회에 제출할 개정 초안 역시도 헌법으로서의 권위와 품위가 없어 보이고 탈 장로교 헌법 초안이 되어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 교리 편에 대하여 국문법상 문제가 되는 것은 1. 신도게요 제24장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1에 “… 어떤 남자라도 동시에 한 명 이상의 아내를 두는 것이나 어느 여자라도 동시에 한 명 이상의 남편을 두는 것은 합법적이 아니다”에서 “한 명 이상의”를 “한 명을 초과하여” 혹은 “두 명 이상의”로 교정해야 하고(그대로 두면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 성경 대요리문답 제139문의 답에 “한 아내나 한 남편 이상을 두는 것”에서도 역시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므로 용어를 교정해야 한다. 고신 총회는 필자가 공개적으로 신문에 지적한 후 “두 사람 이상의 아내나 남편을 동시에 두는 것”이라고 개정하였다. 교리 편은 이상의 두 곳만 교정하면 무난해 보인다. ◎ 그 외의 교회 정치 개정안을 살펴보면 차라리 현행 헌법을 그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더 나아 보인다. 헌법 개정안은 단 한곳만 흠결이 있어도 그 개정안은 채택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일일이 지적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이지만 몇 군데 정도 소감을 피력하므로 재고를 촉구한다. 1. 제3장 제1조와 제3조와 제4장 제4조에 “그 시무연한은 만 70세 마지막 날까지로 한다.”는 개정안은 제93회 총회가 “만 1세”는 “365일간”, 즉 “1년 동안”이라고 도표까지 그리면서 설명한 “엉터리 해석”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 가히 초등학생들이 보아도 깔깔대며 웃을 일이다. 만 1세는 두 번째 생일인 첫 돌 전날 하루뿐인 것을 헌법개정위원들 중에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단 말인가? 따라서 만 70세는 71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인 것이 법리이다. 이에 대하여 세인들은 “하버드대학교 박사 출신 최현서 씨가 26세 4개월의 최연소 나이로서 카이스트교수로 임용 되었다.”라고 하여 만 26세는 27번째 생일 전날 하루뿐임을 입증하였다(교회법률 상식 pp.220-226 참조). 2. 제3장 제3조에 “교인의 안수 없는 종신직”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법리이다. 헌법 개정위원들은 교회 직원론에 있어서 항존(恒存)직과 종신(終身)직, 그리고 임시직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유감이다. 3. 제4장(목사) 제4조(목사의 칭호)에 11. 무임목사를 “정년 은퇴한 목사이다”라고 해 놓고, 13. 은퇴목사를 “연로하여 시무를 사면한 목사이다”라고 하였으니 무임목사와 은퇴목사를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어리둥절하다. 필자는 백번 읽고 또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다. 4. 제9장(당회) 제1조(당회 조직)와 제2조(당회 성수)와 제3조(당회장 및 대리 당회장)의 각 항은 모순투성이여서 손을 댈 수조차도 없다. ① 어찌 “노회가 파송한 임시목사와 치리장로”로 당회를 조직할 수 있단 말인가?(노회가 파송한 “임시목사”의 칭호는 개정 초안 어디에도 없다. 위원들은 그 조문을 밝혀 보라!) ② 제1조 1항에는 전임목사가 노회 허락 없이도 당연직 당회장인 것처럼 규정해 놓고, 제3조 1항에서는 “노회결의로 전임목사도 시무 중에 당회장이 된다”고 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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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성공칼럼] 자기 내면 살피기
    살다보면 사람들과 갈등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이 갈등으로 그동안 이뤄놓은 삶은 망가지게 된다. 부모와 자녀관계, 부부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지저분하고 거짓말하고 때때로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면 그 사람과 얼마동안 함께하고 싶겠는가? 가족이라서 얼마간 참기는 하지만 마음은 이미 함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기업이나 가정, 교회, 몸, 건물, 조직은 갈등하지 않고 결속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갈등이란 관계 속에 결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서 어느 누구든 걱정하고 분노하고 무시하고 이해하지 않고 속이고 소리치면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밝고 따뜻하고 지혜롭고 솔직하고 사랑하고 좋은 것을 주려고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있으면 그 사람과는 오랫동안 함께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을 해결하려면 내 속에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은 요인을 갖추면 되는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미 자신 안에 갈등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보통 대화를 하다가 쉽게 약속을 한다. 그러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수시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이유와 핑계를 대는 습관을 갖고 있다면 혹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밝은 척, 정직한 척, 사이좋은 척하지만 사람들이 없을 때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습관처럼 갖고 있다면 이 습관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겉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습성을 몸에 갖고 있다면 또 그 외에 말은 옳지만 그 말 속에 서운함과 분노와 부정적 감정을 숨겨져 있다면 내가 갈등의 요소를 이미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갈등은 자기애와 세상의 소유를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애 때문에 거짓말을 옳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기를 높이고 돈과 지배욕을 소유하기 위해서 갈등이 유발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끼리 모여서 대화하는 중에 그 집 자녀는 공부도 잘하고 취직도 잘하는데 우리 집 아이는 그렇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한다 하자. 그러면 자신의 아이에게 화가 나고 이웃에게는 불쾌한 마음이 들 수 있다. 이럴 때 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 감정은 이웃이나 자녀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속에 있었던 것이다. 즉 사랑보다는 자기사랑, 사람보다는 자기 욕망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기 사랑을 옹호하는 거짓말을 옳다고 여기는 태도가 상황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갈등은 자기사랑 보다 상대방을 목적으로 여기는 사랑과 선한 행동을 하고 진리 안에 있을 때 해결된다. 옳음 주장은 옳음이 아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갈등하거나 싸우면 이 옳음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과 상대방과의 좋은 관계를 잃어버리게 되니 옳지 않는 것이 된다. 옳음이란 머릿속으로 ‘옳다. 그르다’의 옳음이 아니라 사랑과 선한 모습을 갖고 오는 것이 진짜 옳은 것이다. 성경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지식적으로 의로움을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서로 간에 신뢰가 생기고, 사랑이 생겨서 영원한 결합이 일어날 때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옳음은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렸으며 상대방이 옳다고 하거나 내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더 이해하는 것이 사랑이며 진리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면서 또는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 사랑과 선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내 안에 있는 갈등 요소 즉 나는 말과 행동이 같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인지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면이 솔직하고 밝은 사람인지 또 나는 수단이고 상대방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또 나는 돈이나 내 이익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자신의 내면을 잘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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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은혜의 말씀] 감정풀기 (창32장 6~12절)
    야곱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 중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님과 싸움을 하고 태어날 때도 형님 발을 붙잡고 태어났습니다. 평생을 속고 속이는 너무도 인간적인 욕심꾸러기,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야망에 불타는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 야곱입니다. 평생 인간적인 방법을 쓰고, 속이고 도망가고 피난 가던 야곱이 하나님 얼굴 뵈올 때 까지 그 씨름의 과정을 거쳐 얍복강에서 브니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나니까 영원한 야곱 인생의 숙제와 같은 형님의 문제가 해결 되고 형님을 만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인간적인·조작적인·인위적인·인보적인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자기왕국을 구축하고, 끊임없이 속고 속이며 인간바벨탑을 쌓아보지만 다 부질없다는 것입니다. 사상누각에 불과합니다. 야곱이 엄청난 거부가 되어서 고향땅으로 돌아오지만 가슴속에 해결하지 못한 수십 년 된 숙제가 있습니다. 형님 에서가 군사 사백 명을 앞세우고서 작살내려고 기다리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까요? 창세기 32장 20절에 보면 「내 앞에 보내는 선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혹시나 형이 나를 받아 주리라」 야곱은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가 오면 인간적으로 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야곱의 감정풀기 입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의 감정풀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인간적인 것은 더 헝클어지고 복잡하게 할 따름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인간적인 수단으로 선물공세를 해서 형님과의 관계를 해결하려 하고, 꼬인 실타래와 같은 감정을 풀어가려 했습니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부질없습니다. 인간 바벨탑을 쌓고 빛 좋은 개살구 같은 그런 모습은 큰 부자가 되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37편에 보면 「행악자로 인해서 불평하지마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 하지마라. 속히 베임을 당하리라. 한 순간에 심판이 오는데 너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위탁하고 주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경영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리라」 평생의 욕심, 평생의 스타일, 평생 인간적인 모습을 내려놓고 그가 얍복강에서 큰 변화를 받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내 교만은 꺾으시고, 내 욕심은 내려놓게 만들고 내 인간적인 야망은 반드시 손을 보십니다. 그런데 눈물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망을 품고, 계산해서 하나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욕심스럽고 교만한 사람을 거침없이 꺾으시고, 기도하는 사람과 눈물로 엎드리는 사람에겐 늘 하나님이 져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복잡한 시대에 성도들의 삶이 천차만별입니다.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직장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고 그러면서도 수박겉핥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건성건성·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수박 겉을 핥지 말고 수박을 팍삭 깨뜨려서 통째로 드십시오. 언제까지 그렇게 야곱스럽게 살아갈 것입니까? 주님 앞에 항복하면 행복하고, 주님 앞에 회개하면 회복이 됩니다. 그 야곱이 험악한 세월 속에서 성형이 되고, 조율이 되고, 튜닝 되면서 마침내 ‘이스라엘’이 되어 집안을 회복하고 마지막에 아버지를 잘 모시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은 욕심과 야망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십니다. 그런 거짓이 없는·속고 속이는 전쟁이 없는 하나님나라 천국을 만들어 가시고, 우리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이 중심에 우뚝 서서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 하나님 앞에서 이긴 자의 삶을 살아드리기를 우리 주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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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 [가정칼럼] 내 인생의 밑줄이셨던 선생님
    The Survey Q 3R 선생님은 그렇게 다가오셨다. 무슨 암호냐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까까머리 소년은 이 기호부터 배웠었다. S는 Survey(관측)다. Q는 Question(질문)이다. 그리고 3R이란 Reading(읽기)과 Recite(Recall, Recording-암기, 기록) 그리고 Review(되풀이, 반복, 복습, 재음미)를 말한다. 독서법이었다. 난 지금까지 이 독서법을 놓쳐본 일이 없다. 그 독서법이 재미있어 읽고 또 읽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책이란 만인의 대학”이라고 했다. 나는 한 해도 아닌 두 해를 월반(?) 했고 대학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활자는 이해력, 상상력, 집중력, 어휘력, 기억력 등 종합적인 사고 능력을 깨우쳐 준 스승이었다. 잘 고른 한 권의 책은 스스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는 좋은 길잡이였다. 한 번 붙잡은 책은 여지없이 밑줄이 그어졌다. 밑줄이 그어질수록 나의 세계는 확장되어 갔다. 선생님은 입시공부보다 더 중요하게 책 읽기를 강조했다. 선생님의 그 원려(遠慮)를 깨우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글씨를 잘 쓰려면 “오천 권의 문자가 가슴에 있어야 한다.”는 말로 책읽기를 장려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유배지 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라면서 폐족으로서 책읽기를 통해 집안을 일으키라고 당부했다. 책을 붙잡고 누비지 않은 세상이 없었다. 밟지 않은 땅이 없었다. ‘밑줄 인생’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밑줄이란 중요한 것에 대한 표시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에 다짐이다. 다시 돌아보고자 하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때로는 자신을 향한 마음의 박수가 되기도 한다. 밑줄을 많이 그으면 그을수록 인생은 빛난다. 밑줄은 끝내 자신의 인생의 훈장이 된다. 밑줄만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내 인생의 부호(符號)였다. 선생님은 때로 의문표였고 쉼표였고 느낌표였으며 Apostrophe(')가 되기도 했다. 나는 선생님에게서 질문하는 법을 배웠고 감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익혔다. 불가능(Impossible)을 가능(I'm possible)으로 만드는 열쇠가 지혜임도 알았다. 그리고 어느 날 학창시절에는 물 건너 먼 산 쳐다보듯 바라다보던 모교의 스피릿(교훈)이 선생님의 철학이고 삶이었음을 안다. 여느 학교의 교훈과 달리 스스로의 고백 문으로 작성된 ‘나는’으로 시작되어 ‘되련다.’는 고백으로 끝나는 교훈이 지금은 나의 삶의 교훈과 철학이 되어 있다.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함께 웃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사람이 되련다.” 나는 지금껏 내가 밑줄을 긋고 또 밑줄을 그은 문장들 중에 이보다 더한 명문장을 찾아본 일이 없다. 아니 선생님이 바로 내 인생의 밑줄이었다. 덤으로 얻게 된 물음표와 쉼표 그리고 감탄사와 어퍼스트로피 조차도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 선생님의 편린(片鱗)들이었음을 안다. 이제는 안다. 선생님을 대신해서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밑줄이 되고 부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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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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