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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칼럼] 사람 속의 사람
    창세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실제 사람의 생명이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의 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며 사람의 몸은 그 혼을 담는 그릇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혼이 떠나면 그 몸은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 사람은 혼이 사람이며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이시며 사람의 몸은 생명을 담는 그릇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자신의 혼을 소중히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혼과 사람의 몸을 배분할 수 없는 것처럼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사람에게는 사람의 혼을 담는 그릇인 몸이 있다. 사람의 몸은 선한 일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심장과 폐와 온갖 내장과 여러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모든 신체기관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두가 협력하여 몸이 살도록 존재한다. 그리고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식도 잘게 부서져서 기꺼이 모든 영양분을 내어주며 희생하고 있다. 몸이 그러한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사랑과 선을 목적으로 삼아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몸이 되어야 혼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만약 몸으로 악한 일을 한다면 이미 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기에 죽은 몸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사람의 혼이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혼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야 한다. 그릇이 깨끗하지 않으면 그 안에 생명을 담을 수 없는 것같이, 내 혼이 깨끗하지 않으면 사람의 몸도 선한 일을 할 수 없을뿐더러 그 생명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며 선이며, 기쁨이며 자유이며 진리이며 빛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본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것, 미워하는 것, 화내는 것, 욕심 부리는 것, 원망하는 것, 비난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분당을 짓는 것, 지배욕을 불태우는 것 등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러운 그릇에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의 회개나 M.P.M 훈련에서 만나게 되는 ‘그 누구도 아닌 나’는 생명이 아니라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생명을 담는 그릇임을 안 이후에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아래로 어두움을 향해 내려갈 수도 있고 사랑과 선을 행함으로 위로 하늘을 향해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강의와 설교를 들으면 가슴에 자유와 행복이 생기면서 바르게 살고 싶어진다. 종교와 교육과 도덕과 상담 등을 통해서 마음이 맑아지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내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그릇에 생명을 담기 위해서는 깨끗하게 하는 작업을 해야 하며 깨끗하지 않으면 생명을 담을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사람의 혼은 생명을 수용하는 그릇인데 그릇이 아무리 깨끗하고 뛰어나도 그릇일 뿐이다. 그릇이 생명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무엇이 생명인가! 나인가? 조상인가? 찬란한 해와 은은한 달빛, 광활하고 장엄한 자연인가? 아니면 자연에서 발견하는 진리인가? 이 모든 것들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에서 나온 피조물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명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이시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도 있고, 사람의 혼도 있을지라도 생명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은 선한 일에 사용되도록 해야 하며,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기쁨과 빛과 진리로 채워지도록 해야 하며, 사람이며 신이신 주님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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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교회회계] 복식부기시스템에 기초한 교회 부채의 관리와 공시
    “우리 교회의 차입금과 상환 후 현재잔액은 얼마입니까?, 수입지출보고서 어디에도 표시가 없습니다.” 교회 제직회 때마다 자주 나오는 질문중 하나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금융감독원의 조사에 의하면, 2012년 우리나라 교회 부채는 약10조원(은행?상호금융회사 대출액)에 이른다. 즉 많은 교회가 고유의 사업목적과 성전건축 등을 위해 대출을 실시, 적지 않은 채무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채란 교회가 갚아야 할 채무이다. 또한 교회의 재산가치를 나타내는 순자산은 자산에서 부채를 차감한 금액으로 표시된다. 따라서 교회가 사업계획에 따라 예산을 세우고 효과적으로 집행해 가기 위해서는 자산과 부채, 순자산에 대한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하 본 칼럼(제6회)은 재무상태표의 대변항목인 부채와 순자산의 표시 방법을 복식부기시스템에 기초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첫째, 부채는 교회가 갚아야 할 채무로서, 상환기간이 1년미만은 유동부채, 1년이상은 비유동부채로 표시한다. 또한 현금수입을 수반하는 것(차입금,선수금,선수수익)은 ①[현금 xx/차입금 xx], 수반하지 않는 것(미지급금,미지급비용,매입채무)은 ②[건물 xx/미지급금 xx]로 표시한다. 둘째, 퇴직급여충당금과 같이 미래 지급의무 가능성이 높은 항목은 부채성충당금으로 분류, 최초 설정시 ③[퇴직급여 xx/현금 xx]으로 처리하고, 동 금액을 교회가 관리(예금)할 경우 [퇴직급여기금 xx/퇴직급여충당부채 xx]로 처리한다. 셋째, 부채는 이자비용의 지급을 수반하는 것(차입금,장기부채)과 수반하지 않는 것(미지급금, 퇴직급여충당부채,단기부채)을 구분하여 관리한다. 즉 이자비용의 부담이 교회재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별도 구분하여, 이자율(단리/복리,변동금리/고정금리)과 시간개념(현재가치/미래가치)을 고려해 의사결정을 하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한다. 넷째, 순자산은 자산에서 부채를 차감한 것으로 기본금, 교회 사업목적에 필요한 각종적립금, 자산의 재평가등과 관련한 기타포괄손익누계액, 차기이월잉여금의 순으로 표시한다. 또 최초 기본금 조성시는 ④[현금 xx/기본금 xx]으로 표시한다. 다섯째, 순자산 중 각종적립금은 교회가 선교(건축,장학)등의 기금을 조성하는 경우 표시하며, 최초 설정시는 ⑤[선교비 xx/현금 xx]으로 하고, 이를 교회가 예금?관리할 경우 [선교기금 xx/선교적립금누계액 xx]로 한다. 그리고 공정가치를 적용해 건물등을 재평가한 경우에는 ⑥[건물 xx/기타포괄손익누계액 xx]으로 처리한다. 또한 이러한 누계액은 퇴직급여충당부채 처리와 유사하나, 미래 지급의무를 지닌 부채 항목이 아니므로 순자산으로 표시한다. 여섯째, 순자산은 기업의 자본과 유사한 개념으로, 기본금과 적립금등에 포함되지 않은 금액은 차기이월잉여금에 표시한다. 단 교회자체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특정 주주지분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므로 비영리법인에 준하는 회계처리를 하며, 주주지분 개념이 없으므로 배당을 하지 않는다. 또 마지막으로, 재무상태표의 부채와 순자산 합계는 자산합계와 일치하도록 작성한다. 재무상태표는 교회의 자산과 부채, 순자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재무상태표 공시가 이루어질 경우 재정 투명성이 높아짐은 물론, 모두에서 언급한 제직회 질문내용이 자동으로 해결되는 효과가 기대된다. 다음 회는 교회의 재무제표분석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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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6)
    탈진에서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치유를 받는 것이다.사람들은 〈치유, 회복〉을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소금 먹은 사람이 물을 찾고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고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인생길에서 뜻하지 아니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지치고 쓰러져가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도움의 손길들을 준비하시고 또 때를 따라 보내어 주신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고 의술과 약 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다양한 자연 환경일 수도 있다.실제로 사람(가족, 친구, 지인, 교우 ...)을 통하여 큰 도움을 받아 예상과 기대 이상으로 큰 효과를 거두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깨끗한 물과 좋은 음식을 통하여 원기를 회복하면서 탈진에서 벗어나는 미담들도 있다.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아름다운 자연속으로 들어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꾸준히 산책과 등산을 함으로써 건강이 회복돼 떠나 왔던 자신의 위치나 직무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사례들도 있다. 좋은 의사를 만나고 자신에게 잘 맞는 약을 만나서 꾸준히 치료를 받는 중에 회복되는 경우들도 분명히 있다.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선물로 보내주신 〈성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성하고 새롭게 깨달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이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있는 점이다.욥은 욥기 23:12에서 “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라고 고백 하였다. 욥은 하루의 일정한 (세 끼) 식사보다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더 귀히 여겼다. 욥은 평소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 하였다. 욥은 동방의 이름 있는 부자였다. 그가 거느린 일군들 숫자가 엄청났다. 자식들도 10남매였다. 요즘 말로 바꾸면 욥은 대 기업의 총수였다. 매일의 일과가 얼마나 빡빡하였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매일의 말씀 묵상〉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욥이 극심하고 중대한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었던 힘은 〈말씀 묵상〉에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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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시사칼럼] 개혁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6일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취임 후 네 번째입니다(2013.3.4/2014.1.6/2014.5.19). 광복 70주년 및 임기반환점을 앞두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담화문은 자못 비장하고 절박했습니다. “지금 세계 경제는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급격히 재편되면서 각국의 생존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3~4년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분수령이 될 것입니다.” 통절한 상황분석입니다. “절실하다”는 말이 두 차례, “절체절명” 1회, “간곡하게 요청/부탁합니다”란 말은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면서 제시한 것이 바로 공공·노동·교육·금융 4대 ‘개혁’입니다. 매우 시의적절할 뿐만 아니라, 담화문에서 대통령이 제시한 몇 가지 원칙은 아래와 같이 한국교회에도 의미심장한 울림(echo)입니다. 첫째, 개혁의 절박성(切迫性)입니다.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우리나라가 세계경제의 주역으로 다시 한 번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제 전반에 대한 대수술이 불가피합니다”(담화문, 이하 생략). 한국 교계에도 너무나 적실(適實)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질적인 적폐(積弊)에는 근본적인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인식과 의지를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자 하는 개혁의 길은 국민 여러분에게 힘든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후손들을 위해서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공감합니다. 비록 아픔이 있어도 환부를 도려내고 치료해야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둘째, 개혁의 연대성(連帶性)입니다. “(개혁은) 국민 여러분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적극적인 동참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는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으로 힘을 모아 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 혁신과 개혁의 동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럴진대 하물며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하는(엡 2:21~22) 교회공동체는 어떻겠습니까? “대승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조금씩 양보와 타협의 정신을 발휘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교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만 교회다’라는 식의 개(個)교회주의(individualism)는 그만 벗어던져야 합니다. 한국교회 전체의 생존과 부흥을 위해 교단과 계파를 초월해서 서로 관용하고 양보하여 종교개혁의 정신, 우리가 나온 샘의 근원으로 다시 함께 돌아가야(ad fontes) 할 때입니다. 셋째, 개혁의 혁신성(革新性)입니다. “낡은 시스템과 관행··· 보신주의에 안주”하지 말고, “혁신과 아이디어”로 “우리 안에 내재된 창조적 기질과 역량을 재발견하고, 국민 개개인이 창의력을 발현 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개혁의 성패를 좌우한다 했습니다. 사실 “창조적”이라는 말보다 더 성경적인 용어가 어디 있습니까? 개혁은 때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를 수반합니다. 노아 홍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 멸망 사건은 또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도 혹 본질과 무관한 낡은 관행과 전통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개혁’이란 기존의 전부를 다 뜯어 고치자는 것이 아니라, 썩어버리고 일탈한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고치겠노라는 고백이요 결단임을 분명하게 마음에 새기고(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회(悔)하고 개(改)하는 교회들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개혁은 이제 더 이상 어떤 한 사람이나 집단의 주장이나 의견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고 가야 할 당위요 과제라는 사실을 이번 대통령 담화로부터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원래 세상은 스스로 개혁하기 힘듭니다(사 53:6). 교회개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또 있습니다. 교회개혁은 교회 자체를 정화할 뿐 아니라 부패하고 오염된 세상을 순화시키는 영적 정수기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이 절실합니다(절박성), 우리 함께 기도하고 힘을 합쳐(연대성), 곪은 부위를 잘라내고 새살 돋게 하는(혁신성) 교회와 세상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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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소강석 칼럼] 지성을 넘어 영성으로
    이어령 교수와 식사를 하며 장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후부터 여러번 만남을 가졌고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요,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문사답게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언변을 소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건은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신선한 도전과 희망을 주었다. 그가 하나님을 영접하기까지는 딸 민아씨의 영향력이 컸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방검사로 활동하던 민아씨가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유치원에 다니던 어린 손자가 자폐아로 판명이 난 것이다. 갑자기 몰아닥친 고난의 세월. 그러나 민아씨는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나긴 투병기를 거쳐 완치에 이르고 눈물로 신앙을 간증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성 체험과 딸의 기적적인 고침에 이어령 선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딸에게 해줄 수 없었던 것을 선물해주신 하나님을 이성을 넘어 영성의 차원에서 만난 것이다. 일부 지성인과 언론들이 한국 교회를 비판하고 조소거리로 삼고 있는 이때 그의 개신교 귀의는 한국 교회의 기쁨이요, 큰 의미가 아닐 수 없다. 그분은 자신의 회심의 동기를 하늘의 위대한 절대자 창조주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성만을 의지하면 3차원 세계 이상을 올라갈 수 없다. 박사학위 수십 개를 가지고 있어도 4차원, 혹은 그 이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의 영역을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철학적인 하나님이든지, 이성으로 이해한 하나님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성을 넘어 영성으로, 적어도 4차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방검사로 활동하던 딸 민아씨가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투병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자폐아로 판명이 났던 어린 외손자마저 잃고 말았다. 그의 인생에 갑자기 고난의 폭풍이 몰아쳤다. 이어령 교수는 딸의 고난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투병 중에도 오히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민아씨를 보며 “나의 딸이 저토록 사랑하는 하나님, 내가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을 때 딸을 위로하여 주었던 하나님, 딸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믿어야 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는 실제로 이성을 넘어 영성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세례를 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딸 민아씨는 투병기간을 거쳐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나는 장례예배를 참석하여 눈물로 기도 하였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며 이어령 교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딸이 만났던 하나님, 그리고 자신이 만났던 하나님에 대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딸의 죽음을 하나님 앞에서 이성으로 판단치 않고 영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성의 노예가 돼 하나님을 모르고 교회를 이성의 잣대로만 재려고 한다. 또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성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니 신비로운 영성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자기 지식, 재주, 능력,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4차원, 혹은 그 이상의 세계를 사는 사람은 창조적인 기적을 경험한다. 물론 우리의 세계는 영성뿐 아니라 이성의 부분도 있다. 그것마저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을 넘어 광활한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리라. 이성을 넘어 영성의 세계로, 지성을 넘어 영성의 언덕에 올라서야 하리라.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신비로운 세계가 눈부신 빛으로 그대를 안아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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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성서연구] 수련의 계절(디모데전서 4장 7-8절)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습니다. 모처럼 얻은 시간을 이용하여, 또 폭염을 피할 마음으로 사람들마다 사방으로 떠나는 때입니다. 골짜기마다, 바닷가마다 정겨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공항도 북새통입니다. 올 여름 휴가는 국내에서 보내자는 외침이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바야흐로 휴가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때가 휴가철이 아닌 수련의 계절입니다. 여름성경학교와 수련회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수련회를 마친 교회도 있고, 한창 진행 중인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여름을 통해 단기선교를 떠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휴가를 보낸 사람과 수련을 한 사람들이 맞이할 그 후의 시간은 다를 것입니다. 휴가를 즐긴 사람들 중에는 휴가로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열정으로 일상에 복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소홀했던 가족들 사이에 모처럼 깊은 대화와 사랑이 오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역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휴가 기간에 미뤄 놓았던 일들이 새로운 압박을 가할 것이고, 휴가 때 가족 간에 언쟁이라도 했다면 감정을 푸는 데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혹은 과다지출을 했다면 메워 넣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남들이 놀고 쉬는 시간에 자기 수련에 열정을 쏟은 사람은 그 시간이 끝날 무렵 가슴이 뿌듯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 모자랐던 영적, 정신적, 육체적 부분을 보충함으로써 그 후에 더 힘차게 살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질 것입니다. 이 여름을 수련의 계절로 살았으면 합니다. 구한말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땀을 흘리면서 정구를 하는데, 이 모습을 본 고종임금이 묻기를 “왜 아랫것들에게 시키지 않고 힘들게 직접 하는고?”라고 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우리는 수련을 몰랐습니다. 편안하게 앉아 있는 게 최고라 여겼습니다. 그 결과 국가의 문물이 뒤져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주인의식을 갖는다면 몸과 정신과 영혼을 힘을 다해 수련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분이 블로그에 <주인과 머슴의 차이>에 대해 올린 글을 보았습니다. <주인은 스스로 일하고 머슴은 누가 봐야 일한다. 주인은 미래를 보고, 머슴은 오늘 하루를 본다. 주인은 힘든 일을 즐겁게 하고, 머슴은 즐거운 일도 힘들게 한다. 주인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참고, 머슴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피한다. 주인은 소신 있게 일을 하고, 머슴은 남의 눈치만 본다. 주인은 스스로 움직이고, 머슴은 주인에 의해 움직인다. 주인은 자신이 책임을 지고 ,머슴은 주인이 책임을 진다. 주인은 알고 행동을 하고, 머슴은 모르고 행동한다. 주인은 일 할 시간을 따지고, 머슴은 쉬는 시간을 따진다. 주인은 되는 방법을 찾고, 머슴은 안 되는 핑계를 찾는다.>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4장 7-8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일에 스스로를 훈련시키십시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주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경건은 이 세상에서의 생명뿐 아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생명도 약속해 줍니다.> (쉬운성경)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의 훈련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대면하고, 기도를 통해 주님의 뜻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뜻에 따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초달해야 하겠습니다. 단정하고 품위 있는 그리스도인, 말이 아닌 사단을 굴복시킬 능력을 가진 실력파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 여름 우리 모두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을 수련하는 데 힘쓰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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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함께 생각해 봅시다] 부끄러운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것 생각하면 흐뭇하고 부끄러운 것 생각하면 얼굴 붉어져 우리 한국은 자랑스러운 것이 많기도 하고 다양하다. 근간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선정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작곡가들로 구성된 선정대회에서 82%라는 높은 지지율로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자랑스러워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러나 한편 부끄러운 점을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한이 없다. 어쩌면 부끄러운 것도 세계 1위가 그리 많은지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진다. 부끄러운 것 중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째 자살율이 세계 1위이다. 한해 12,000명, 하루 3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청소년 자살율도 세계 1위이다. 어떤 이는 한국을 자살공화국이라고 비꼰다. 또 교통사고율이 세계 1위이고 따라서 교통사고 사망율도 세계 1위이다. 암 사망율이 세계 1위이고 40대 남자 사망율도 세계 1위이다. 흡연율이 세계 1위이고 술, 담배 소비량도 세계 1위이다. 휴대폰을 자주 바꾸는 것까지 세계 1위라고 한다. 부끄러운 것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많은 것 같다. 첫째 낙태율이 세계 1위이다. 낙태 시술이 연간 210만건 이상이라니 신생아의 80%를 육박하는 태아가 희생되는 셈이다. 다음, 제왕절개도 세계 1위이고 저출산율도 세계 1위이고 원정출산도 세계 1위이다. 이혼율도 세계 1위이고 미혼모의 출산율도 세계 1위라고 한다. 성형수술도 세계 1위이고 성형수술 받는 사람이 증가하는 속도까지 세계 1위라고 한다. 화장하는 시간과 빈도까지도 단연 세계 1위이고 미용실이 많은 것도 세계 1위라고 한다. 또 사치품 소비율이 세계 1위이고 공주병 환자 수도 세계 1위라고 한다.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남자 등쳐먹는 꽃뱀이 많기로도 세계 1위라고 한다. 어디 할 것이 없어 이런 것까지 1위를 하는지 한심스럽다. 끝으로 매우 부끄러운 것 한가지는 한국의 청렴도 순위가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지수에 따르면 국가별 청렴도 순위가 한국은 OECD 34개국 중 27위로서 하위권에 속한다. 7년째 별 변동이 없이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어째서 이같은 결과가 나타나는가. 고도성장 속에서 투명성과 윤리문제를 소홀히 여긴 결과가 아니겠는가. 여간 부정이 있더라도 성장하기만 하면 된다는 성장우선주의가 빚은 부끄러운 결과가 아닌가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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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13
  • [교회법률상식] 위험천만한 합동총회기구혁신위원회의 발상(2)
    2. 위원회 심사의 원칙 위원회는 본회가 위탁한 사안을 심의하여 본회에 보고하면 본회가 그 보고를 받아 채택·결의하거나 위원회의 심의 내용이 미흡하면 본회가 정정해서 채택하든지 직접 다시 심의하여 처결하는 제도로서 신속·정확하면서도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사무 처리를 위하여 치리회의 본회가 전문 분야에 따라 여러 부서를 조직하여 위원회로 하여금 예비 심의하여 본회에 보고하게 하는 기구이다.이와 같은 위원회의 권한은 최종 결의 기관이 아니라 본회의 처결 이전의 예비적이고 준비적인 심의 기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위원회는 예비 심의한 모든 사안에 대하여 본회에 보고하여 본회의 처결을 기다릴 뿐이니 위원회가 다룰 수 있는 안건들은 하회로부터 직접 받아서 심의하는 기구가 아니요, 본회가 안건을 받아서 본회가 위원회에 위탁하는 것만 심의하는 정도이다. 따라서 총회 정치부도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의한 총회의 일개 하부 구성체에 불과하니 하회인 노회로부터 안건을 직접 받아 처리할 수는 없고 총회가 접수하여 정치부에 위탁한 안건에 대하여 예비적이며 준비적인 심의를 거처 총회에 보고함으로서 총회가 처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 예비적인 심의기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회기구혁신위원회의 구상은 노회가 총회에 올려 보낸 정치부에 관련된 서류들을 총회의 위탁도 받지 아니하고 정치부가 직접 받아서 직접 처결하게 하는 상설 처리 기구로 만들겠다고 하니 언어도단이다. 이는 총회의 상비부로서 위원회에 불과한 정치부를 총회위에 옥상옥의 다른 총회와 같은 정치부가 되게 하겠다는 천부당만부당한 불법으로 비성경적이요, 위헌적인 발상으로 민주적인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고(정치 총론 5항 위반) 소수 집단의 독재정치를 하겠다는 망상에 불과하다. 3. 총회와 특별위원회 특별위운회는 총회가 어떤 사안을 처리함에 있어서 총회 기간에 처리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할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연구와 일정한 시일이 요구되는 경우에만 한하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총회가 그 사안을 위임하고 연구 심의한 후 본회에 보고하게 하여 그 보고를 받아 본회가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한 비상설기구이다. 그런데 합동총회기구혁신위원회는 비상설위원회인 특별위원회를 상설위원회로서 상설 활동을 하게 한다고 하니 이것 또한 정치부와 쌍벽을 이루는 총회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총회를 두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이는 혁신위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모든 지교회와 치리회의 최고회인 총회(정치 제12장 제1조)와 관련하여 과연 상비부나 특별위원회, 또는 상설위원회나 비상설위원회가 각각 무엇인지, 상비부 활동이나 위원회의 상설 활동이 어떤 것인지도 생각해 보지 아니하고 탁상공론을 늘어놓는 것 같아 보인다. 총회기구혁신위가 “한국교회 교류협력위원회, 세계교회 교류협력위원회, 통일준비위원회와 같은 상설위원회는 상비부 산하가 아니라 상설위원회로서 활동하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특별 위원회를 상설위원회로 하여 상설활동을 하게 하겠다고 하니 이는 현행헌법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개정하기 전에는 절대로 시행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헌법을 개정하여 그와 같이 시행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결코 장로회 정치는 아니다. 하기야 총회 상비부인 상설 재판국이 헌법을 개정하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권징 제134조 2항) 상설 재판을 재판비용 4백만 원을 받으면서까지 버젓이 하고 있으니 더 이상 거론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4. 결론 제99회 총회가 총회기구혁신위원회를 설치하여 총회기구혁신안을 맡긴 것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어졌고, 혁신위가 정치부를 상설위원회로 하여 상설 활동을 하게 하는 구상이나 몇몇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상설위원회로 하여 상설 활동을 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야말로 탈 장로회 정치를 해보자는 망상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인 제100회 총회는 총회 재판국이 권징 제142조에 총회 재판국의 “재판비용은 총회가 지불한다.”라고 규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판비용 운운하면서 상설 재판을 하는 것과 총회기구혁신위원회가 구상한 정치부와 특별위원회를 상설화 하여 상설 활동을 하게 하려하는 망상을 백지화하고 장로회 정치를 사수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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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3
  • [성공칼럼] 기도-비밀스런 사랑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위기의 순간에 기도를 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신 혹은 보이지 않는 신에게 기도를 한다. 우상에도 내적 우상과 외적 우상이 있다. 외적 우상은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절하면서 자신의 원함을 들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수천수만의 신들에게 자신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비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은 가족 화목, 건강, 직장, 승진, 시험 합격, 사업 등등 육체와 세상에 대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천지신명에게 빌든, 돌과 나무에게 빌든, 조상에게 빌든, 물 떠놓고 빌든 대상만 다르지 속 모습은 자기사랑이며 세상 사랑이며 신을 이용하는 것이다. 반면에 내적 우상은 겉으로는 종교적인 모양과 사랑과 선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외적 우상숭배자와 똑같은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이런 우상 숭배적 기도는 거래이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신을 이용하는 것이다. 기도는 삶이며 생명의 호흡이며 가슴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가 삶이 되고 생명의 호흡이 되고 은밀한 사랑이 되려면 기도의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 나의 육체적인 것을 원하는 기도가 은밀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위해서 하는 기도이어야 한다. 사랑이란 나는 수단이 되고 상대방이 목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줄까? 그 필요를 위해 기도하다보면 내게 있는 것을 주게 되고 또 없으면 도울 방법과 지혜가 생기게 된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 속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일어나게 되면서 은밀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좀 더 깊은 은밀한 기도는 받아들이는 기도이다. 삶이란 현재를 받아들여서 넘어가든지, 현재와 거부하며 충돌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삶을 잘 잘 살고 싶어 하면서 삶을 피하고 거부하고 충돌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삶은 받아들여서 넘어가야 한다. 12년 전 날개영성하우스를 건축하다가 부도가 나서 공사가 중단되고 콘크리트 벽체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순간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때처럼 두려움과 원망 속에서 주님께 도와 달라고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애원을 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이런 기도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나도 이 막막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런 태도를 갖고 한참을 기도하는데 가슴에 기쁨이 생기고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평안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어떻게 건축을 마무리할까하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이리저리 동분서주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교인 중에 한 분과 연결이 되어 건축 후에 융자를 해서 건축비를 주기로 하고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삶이란 어떤 일이든지 받아들여 넘어가면 삶은 사랑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이다. 좀 더 깊어지는 은밀한 기도는 관상기도이다. 이 기도는 보고 듣는 기도이다. 보는 것을 통해서는 눈이 밝아지고 깨달음이 일어나는 자기성찰과 관계된 것이며, 듣는다는 것은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행동과 관계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를 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온갖 잡다한 생각과 함께 자기 욕심과 관계된 두려움과 원망과 화 등의 어두운 생각 등이 떠오를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모두 내가 사랑과 선을 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짓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생각들이 잠잠해지면 이제부터는 어떻게 무엇으로 사랑하고 어떤 말과 행동으로 선을 행할지 묻고 듣는 시간이 찾아온다. 이때부터가 은밀한 사랑의 기도인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생명이며 사상과 진리는 생명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냥 비어있는 그릇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번 여름에도 아내를 도와 여름수련회로 찾아오는 수천 명 분의 설걷이를 하게 되었다. 지난 주 설걷이를 하면서 나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이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내 가슴에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과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같았다. 주님은 생명이시며 사랑과 선의 원천이시며 주님은 사랑과 선 안에 거하시며 예수께서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하신 천국도 사랑과 선 안에 있는 것이다. 매순간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사랑을 하고, 어떻게 선을 행할 것인가를 찾아 행동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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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3
  • [은혜의 말씀]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에4:13~17)
    오늘 성경말씀 에스더서는 한 고아가 왕후의 자리에 오르고 왕의 눈에 들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민족을 구원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잡혀가 있는 포로시대가 배경이지만 ‘최악에서 최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 백성들을 영원히 보호하시기 위해 한 사람 에스더를 쓰십니다. 또한 에스더는 부모 없이 자랐지만 기도해서 나라를, 민족을 구합니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도와 신앙입니다. 사람은 스펙이나 상황, 배경,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원망하고 배경과 조건을 탓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에스더 4장 13절 말씀에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이기주의입니다. 한 두 사람만 조심해도 되었을 일이 한 사람의 부주의와 실수로 온 나라가 혼란하고 불안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나면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고 살아도 주 위해 사는 삶의 가치관이 바뀌어 버립니다.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를 자랑 하던 사람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님처럼 산꼭대기에 기도의 굴을 만들어 항상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나의 하나님께서 나의 가는 길을 아시고 내게 복을 주시는 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공동체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괜찮다고 했습니다(로마서 9장 2절 말씀). 대한민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1.5%일 때가 있었습니다. 2%가 부족한 1.5%때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송재 서재필, 백범 김구 그분들이 믿음을 지켰던 때 말입니다. 그때는 ‘예수 믿는 사람=애국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병원 짓고. 고아원 짓고, 신문사 만들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대보다 대한민국에 성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운명공동체입니다. 나라가 잘 되어야 교회가 있고 직장이 있고 백성이 있고 가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축을 옮겨야 됩니다. 이기적인데서 이타적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공동체적으로 자기 의를 주장하는데서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의 제목이 달라져야 됩니다. 조국과 민족을 품고 열방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에스더4장 14절 말씀에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라고 합니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 민족의 구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밤낮 삼일을 금식(에스더4:16)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살아갈 때 순간을 쓰임받기 위해 평생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 한 사람을 통해서 축복의 통로로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필요충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을 찾으시고 준비된 자가 쓰임 받습니다. 주님 부르실 그때에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때를 위해 기도로 준비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부모 없이 자란 에스더도 가문의 영광이 되고 나라의 왕후가 되고 민족의 구원 투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내가 먼저 다른 것은 못 해도 “기도의 시간이라도 메우자! 기도의 분량을 채우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윗이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편 56:8 말씀)라고 기도 했듯이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기도할 때 인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분의 기도의 자리를 뺏기지 마십시오. 그 기도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이때 울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보좌를 움직이셔서 이 나라 역사를 이 땅을 얼마든지 새롭게 하시는 능력의 분이십니다. 한 사람 내가 기도의 자리에서 에스더처럼 기도하여 축복권을 당기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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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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