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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칼럼] 목적과 돈
    ‘모든 범죄의 중심에 돈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돈이 있으면 행복하고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말들을 한다. 이 내용에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람들은 통장에 돈의 숫자가 적어지면 나이는 들어가는데 자녀들 교육시키고 결혼도 시켜야 하는데 이 돈으로는 턱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통장의 숫자가 늘면 어느새 마음은 행복해지고 자신감도 생긴다. 그리고 교회에서 행사를 하거나 부모의 역할이나 선을 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돈이며, 돈이 없다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돈은 이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돈 때문에 선한 길로 갈수 있고, 돈 때문에 악한 길로도 갈 수도 있다. 돈을 취할 수도 없고 돈을 버릴 수도 없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돈과 관련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목적을 살펴보아야 한다. 돈이 목적인가? 하나님이 목적인가? 여기서 ‘돈’은 돈, 권력, 성적, 지식, 소유 등의 모든 재물을 말하며,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와 선 등의 본성을 귀중히 여기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돈이 목적일 때는 돈이 있으면 나는 높아지고 힘도 생기고 행복하다. 그러나 재물이 없으면 나는 하찮으며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불행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사람은 돈을 추구하는 삶이 삶의 전부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목적이라는 말은 돈, 권력, 지식, 소유 등의 모든 재물을 사용하여 사랑을 보여주며 선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돈이 목적이 되는 것과 사랑이 목적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반대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목적이 되면 돈을 벌기 위해 돈 걱정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내가 나를 믿어주고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바라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갖고 원하면서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원함이 이루어질 것을 100% 믿으면서 방법을 찾아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그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이렇게 쉬지 않고 노력하여 결국에는 목표를 이루어낸다. 그리하여 자신의 목적인 돈과 권력과 명예와 소유 등의 재물을 이루어낸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 하면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모든 것을 재투자 한다. 돈과 권력은 많아지고 결국에는 혼자 모든 것을 차지하는 상황을 만든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돈으로 사람을 지배하고 돈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된다. 결국 돈을 목적으로 하는 그 길은 악한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이 사랑과 선이 되면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본성과 선을 행하는 것에 목표를 두게 된다. 여기에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돈과 권력과 지식과 건물과 소유를 향한 목표가 있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악과 거짓을 행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잃지 않으며, 사람을 이용하여 사람을 잃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즉 돈이 없을 때는 돈 걱정하지 않고 지금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면서 내가 나를 믿어주고, 상대방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바라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갖고 원하면서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을 100% 믿으면서 방법을 찾아서 공부하고 연구하여 그 모든 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리고 돈이 생기면 돈에 집착하지 않고 쉬지 않고 노력하여 결국에는 돈과 권력과 명예와 소유 등의 재물을 이루어낸다. 지금까지는 돈이 목적일 때와 같다. 그러나 사랑이 목적이기에 이루어낸 돈과 권력과 지식과 소유 등을 본성과 사람을 살리는데 재투자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과 선은 더 많아지며 사람들과 함께 더 기뻐하고 더 자유로워지고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목적이 마지막의 내 삶을 결정한다. 돈을 얻기 위해 거짓과 악을 행하여 본성과 사람을 잃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돈과 지식과 권력 등은 사랑과 선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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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9
  • [은혜의 말씀] 약할 때 강한 은혜 (고린도후서 12장 9절~10절)
    신앙의 세계에는 역설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강한 것이 좋고, 큰 것이 좋고, 센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오늘 성경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약한 것을 자랑한다. 약할수록 나는 강해진다. 내가 약할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내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보혜사 성령님, 내가 약할 때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성경에 표현되기를 연한 순과 같고, 예수님은 자라날 때 무슨 아름다운 모양이나 풍채가 없다 하십니다. 가녀린 잎과 같이 연한 순과같이 자라나 세상 죄를 지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 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심으로 연약과 부족함을 친히 혼자 담당하셨습니다. 본문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족 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대서 온전하여 진다. 그러므로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하는 것은 내 여러 약한 것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안에 머물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그 시대 최고의 스펙과 학벌을 자랑하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사도바울이 본문에 와서 「내 그런 것 들은 다 배설물처럼 여기고 십자가만 자랑한다. 약한 것만 자랑한다.」 합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우리가 긴 세월을 살다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일이 많습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 같지만 살아남는 자가 강합니다. 강한 이빨은 부러지기 쉽지만 부드러운 혀는 절대 안 부러집니다. 우리가 일부러 약할 것은 없지만 약한 것이, 없는 것이, 약점이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고 숨길 것도 아니고, 창피 할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펙을 자랑하고 자기 학벌을 학위를 자랑할수록 부질없는 것입니다. 돈을 천억을 만졌다고, 나라의 높은 고관대작을 차지했다고 누가 존경 할까요? 아무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내가 자랑하고 애지중지 하는 게 무엇일까요? 내가 부끄러워하고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약한 그때가 강함이라」고 합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내 몸에 아픔이 있기 때문에 건강에 신경을 더 쓰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럴 때 생사화복, 흥망성쇠,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주관자 되시는 주님께서 찾는 자에게 상주시고 두드린 자에게 열어주십니다. 약할 때 강한 은혜세계를 자랑하고, 세상의 부러울 것이 없고, 황제 앞에 서든지 어디 가든지 도도하고 당당하게, 거침없이 살아간 바울처럼 약점이 많고 부끄러움 많고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사건보다 해석이 중요한, 성경적인 프리즘을 가지고 살아가야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 찬송하는 사람, 성경을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재해석 되어야합니다. 더 이상 자랑하던 것을 내려놓으시고 부끄러워하던 것을 반대로 해석하십시오. ‘하나님 내게 복 주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 사도바울이 삼세판 기도해도 낫지 않은 그 지병 때문에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 병을 오히려 감사하는 겁니다. 내 은혜가 오히려 내게 족하다. 내가 아프니까 겸손해지는 겁니다. 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문제를 문제 삼지 않고 문제를 기도제목 삼아버리면, 쓴물이 단물이 되고 애물단지가 보물단지가 되고 근심거리가 간증거리가 되는 걸 기억하여 약점마저도 자랑하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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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9
  • [가정칼럼] 새 봄의 결혼식은
    “이 두 젊은이의 결혼에 동의할 수 없는 분은 지금 당장 저 이층 창문 바깥으로 뛰어 내리십시오.” 주례자의 이 한마디는 하객들에게 폭소를 자아냈습니다. 자신의 이런 경험 때문인지 ‘좋은 주례사는 일가(一家)를 이룰 신혼부부와 하객들에게 경건함과 아울러 폭소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더 좋겠다.’는 게 문 태인 시인의 생각입니다. 그런 그가 최근 참석했던 결혼식에서의 멋진 주례사를 이렇게 리포트 합니다. “신랑의 대학교 은사인 주례는 지도교수라는 인연을 맺은 만큼 평생 신랑에 대해 애프터서비스를 해드리겠노라고 했다. ‘신랑에게 하자가 발생하면 밤 12시에라도 당장 나에게 전화를 하세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런 말씀들이 이어졌다. ‘사랑은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큰소리를 지르지 마세요. 경어체로 햇살처럼 말하세요. 미주알고주알 따따부따 하지 말고 문을 닫고 나와서 숨을 크게 내쉬세요. 한순간이라도 울지 마세요. 휴일 오후에 ‘뭘 드시겠어요?’라고 아내가 물을 때 ‘아무거나’라며 우유부단하고도 퉁명스럽게 말하지 마세요. 단둘이 있을 때는 보는 사람 없으니 유치하게 노세요.’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가 기대하던 ‘더 멋진, 유머를 폭죽처럼 터뜨리는 주례사’란 기실 신랑 신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의 가치가 떨어질 만큼 떨어진 세상을 향한 하늘의 목소리여야 합니다. 때문에 주례사는 참석한 하객들에게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반추하는 회초리(回初理-돌아올 회(回)·처음 초(初)·다스릴 리(理)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拿琛返-붙잡을 나(拿). 보배 침(琛), 새롭게 할(返)으로 꼭 붙잡아야 할 보배)이 되어야 합니다. 결혼식의 꽃이라 불리는 주례사와 더불어 결혼의 서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적으로 던져지는 ‘신랑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신부를 사랑하기로 결심합니까?’ ‘신부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 때나... 변치 않고 신랑을 사랑하기로 결심합니까?’에 대해 기어드는 목소리로 ‘예’라고 답하는 대신 자신만의 서약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서툴지만 자신이 쓴 결혼축시로 서약을 대신할 수 있고, 악기 연주나 노래로 신랑 신부에게 자신의 다짐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명문장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난, 당신이 두 번 세 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도 처음 듣는 것처럼 친절을 다해 짜증 부리지 않고 설명해 주겠습니다. 난, 현관문에 쓰레기통을 마련해 놓고 짜증과 분노와 피곤은 다 집어던지고 환한 햇살처럼 맑은 얼굴로 퇴근하겠습니다. 당신의 나와 다른 습관을 존중하며 당신을 바꾸려고 덤벼들기보다 나를 바꾸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는 말 한마디가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는 말보다 더 진솔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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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9
  • [시사칼럼] 미술품 경매
    지난 12일 미국 크리스티 미술 경매장에서 사상 최고가의 작품이 나왔습니다. 스페인 출신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가 그린 ‘알제의 여인들(Les Femme d’Alger)’이 1억 7,936만 5천 달러(약 1965억)에 익명의 구매자에 팔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카소와 비슷한 시기 활약하면서 약간은 알력을 겪기도 했던 스위스 출신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남자(L’Homme au Doigt)’ 또한 근소한 차이로 사상 세 번째인 동시에 조각으로는 최고가의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미술품은 어떤 작품일까요? 현재까지 국내 미술품 경매에서 가장 비싼 값으로 거래된 작품은 박수근의 ‘빨래터’로 45억 2,000만 원(2007년 5월), 이중섭의 ‘황소’가 35억 6,000만 원(2010년 6월), 김환기의 ‘꽃과 항아리’가 30억 5,000만 원(2007년 5월) 순으로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사실 이들을 포함해서 국내 랭킹 10위까지 다 합쳐도 이번 피카소 작품의 20%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일반인들이 느끼기에는 상당한 액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저금리 현상에 부동산 경기마저 얼어붙자 예술품 수집에 눈을 돌리는 소위 ‘아트테크(art-tech)’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결과라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이러한 추세를 파악해서 현재 거래액 1,000억 이하인 미술품 시장을 2018년까지 6,300억 규모로 키우겠다는 ‘미술 진흥 중장기 계획’을 작년에 내놓은 바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미술품 시장의 과열 조짐에 대해 의문표를 제기합니다. 첫째, 국내에서도 미술품 거래와 관련된 양도소득세 문제가 불거진 적이 있었습니다만, 국제 미술품 시장을 양분하는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의 경우에도 최근 고가의 미술품 거래가 일종의 조세 회피의 수단으로 오용(誤用)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의 시각 때문입니다. 둘째, 천문학적으로 뛰어오른 가격이 일종의 빈부격차를 표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영국 경제학자 프레드 허시(Fred Hirsch)는 1970년대 영국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원천적으로 극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위치재(positional goods)’라고 정의했는데, 작금의 ‘미술품’은 그가 말한 위치재의 전형이라 해도 뭐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그런 상품같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에서 미술품 시장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아마도 (사)한국화랑협회 주최로 지난 2002년부터 시작한 한국국제아트페어(KIAF)가 아닐까 합니다. 2007년 5월 8일 서울 코엑스 태평양홀에서 전세계 18개국 208개 화랑이 참가해 미술품 5,000여점을 전시·판매하는 제6회 KIAF가 열렸습니다. 백남준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된 행사장에 청년들과 교사들을 인솔해 견학간 적이 있습니다. 교사 한 분이 개구쟁이 아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는데, 돌아다니다가 그만 진열해 놓은 항아리 조각을 떨어뜨려 깬 적이 있습니다. 행사진행요원들이 뛰어오고, 뜻밖의 상황에 많은 사람들도 걱정 어린 눈빛으로 모였습니다. 대경실색해서 가격을 물어보았더니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 2,000만 원 정도 간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행사 본부에 가서 보상이라든지 법적 책임의 분담 문제에 대해 상의하고, 인솔자로서 일단 명함을 건네고 당시 사역하던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만, 그 날부터 잠도 못 자고 전화만 오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기도는 또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사역을 시작하고 그렇게 절실하게 기도를 많이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직도 깨진 작품을 보상하라는 전화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는 『컬처 메이킹(Culture Making)』(IVP, 2009)에서 ‘문화창조자 예수’를 거론하면서 이제는 인간이 오히려 문화에 의해 거꾸로 변화되는 시대라고 탄식한 바 있습니다. 이번 최고가 경매를 보면서 저만 느낀 소회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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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9
  • [서임중 칼럼] 마음의 창
    나이가 칠순을 향하여 나아가다 보니 시력이 근시안에 원시안까지 겹쳐지면서 불편스럽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을 생각하고 신앙을 생각하는 깊이가 더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나이가 젊을 때는 멀리 볼 줄 모르고 사고력도 얕고 사물을 보는 것도 극히 피상적으로 보게 되는데 나이가 들면서 인생도 멀리 보게 되고 생각하는 것도 깊어지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 그러고 보면 인생만사 좋은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지도 모른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그래서 ‘괴테’는 “눈은 감각의 여왕”이라 했고 ‘플라톤’은 “눈은 인간의 태양”이라고 갈파했다. 사물의 도리를 바라보는 눈을 활안(活眼) 이라 하고,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눈을 혜안(慧眼)이라 하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눈을 구안(具眼)이라 하고, 밝게 빛나는 눈을 형안(炯眼)이라 한다. 눈이 있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보이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눈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은 자가 있었는가 하면 눈으로 말미암아 실패한 자들이 있다. 아담과 하와는 보암직하게 보인 눈 때문에 죄를 지었고, 삼손은 들릴라의 외적 아름다움을 보는 눈 때문에 결국 두 눈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뽑히는 고통을 당했다. 나귀가 보았던 하나님의 사자를 선지자 발람은 보지 못한 것은 물질을 먼저 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이다. 예수를 정치적인 왕으로 보았던 가룟 유다는 인류의 구원자를 하찮은 은 30에 팔게 되었으며, 화해와 베풂의 원리를 실천했던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하고 난 이후에 바라본 황량한 사막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기에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력이 좋지 않으면 안경을 사용한다. 목사는 책을 자주 보게 되어서 그런지 일반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근시안에 원시안까지 겹쳐서 불편을 겪게 되는데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다초점이라는 참 좋은 안경을 맞추어 주신 분이 계셔서 더 없는 고마움을 갖게 한다. 목사를 사랑하고 위하시는 마음! 그분의 눈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단순하게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경을 맞추어 주신 것을 뛰어넘어 목사의 다양한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아름답게 느껴진 것이다. 안경을 사용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도 안경이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푸른 색깔의 안경을 쓰면 모든 사물이 푸르게 보이고, 붉은 빛깔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면 모든 것이 붉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안경도 어떤 색깔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다. 마음에 사랑의 색깔을 하고 보면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감사의 색깔을 하고 보면 모든 것이 고마울 뿐이다. 불평과 불만의 색깔을 하고 인생을 보면 모든 것이 불만투성이일 뿐이고, 매사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마음으로는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들의 면면이 전부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말을 즐기는 사람은 상대방의 모든 말이 거짓으로 들리고, 사기를 치는 사람은 상대방의 모든 언행이 사기로 느껴지고, 매사에 부정부패에 길든 삶을 사는 사람은 공의와 진실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의 범사까지도 부정과 부패한 것으로 느껴지고 보이는 것이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농담주고받기 이야기는 그래서 교훈이 된다. 친구 관계를 상기하면서 농담주고받기를 하게 된 상황에 이성계가 먼저 무학대사를 보고 “대사의 얼굴은 돼지같이 생겼다.”고 하면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향하여 “임금의 얼굴은 개같이 생겼다.”라고 받아야 하는데 대사는 “임금의 얼굴을 보니 부처님같이 생겼다.”라고 하여 이성계가 화를 내면서 친구 관계로 허심탄회하게 마음 주고받고자 하는데 이러느냐고 하자 무학대사가 “아무리 개 같다고 하려 해도 바라보니 부처님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개같이 생겼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받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부처면 모든 사람이 부처로 보이고 느껴진다는 이치다. 내 마음이 맑으면 보이는 것 또한 맑게 보이는 것이다. 내가 그러므로 남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동일시의 오류다. 그래서 도둑의 눈에는 사람들이 도둑으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든 것이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한다. 남을 내 생각으로 재단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합리성이다. 그 근간이 마음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하신 말씀이 진리이다. 사랑과 감사가 있는 마음은 천국이지만 미움과 원망과 저주가 있는 마음은 이미 지옥이다. “먼 곳만 보는 사람은 가까운 곳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가까운 곳만 보는 사람은 먼 곳에 있는 적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경영리더십의 교훈이 생각난다. “곤충의 눈으로 발밑을 보고, 새의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라.”는 교훈도 있다. 그것은 동시에 나무와 숲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기업경영이나 정치현장에서도 가까운 곳만 보고 있어서는 트렌드의 변화나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고, 반대로 먼 곳만 보고 있어서는 내부의 균열을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교훈한다. 교회생활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좋은 이치를 새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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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9
  • [성서연구] 무리를 작별하신 후(마가복음 6:45~52)
    <The New Technology of Achievement>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소위 <쪼개진 인생, 쪼개진 시간>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쪼개진 시간이란 하루라는 시간이 서로 다른 성격의 두 종류의 시간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근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일에 매달려 삽니다. 성취의 기쁨을 크게 느끼는 것도 이런 시간입니다. 그런데 오후 5시 이후 근무가 끝나면 딴 사람이 된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하던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립니다. 이럴 때 그의 하루는 쪼개진 시간이 됩니다. 하루라는 시간만 쪼개지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애 전체가 쪼개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쪼개지는 문제는 그 안에 일관성, 통일성의 부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관성과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쪼개지는 것입니다. 근무 시간에 일할 때와 동일한 일관된 태도로 근무 후의 시간을 맞이한다면 그 사람의 생애는 놀랍게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관성의 부재로 인해 쪼개지는 결과가 나타나는 몇 가지 경우를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 홀로 있을 때에 일관성을 가지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할 때는 아주 점잖고 고상한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빈 사무실에 혼자 있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헨리 나웬은 <홀로 있을 때 그대 누구인가>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또 일이 많을 때와 일이 없을 때에 일관성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일이 많을 때는 정말 인생을 알차게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일이 없을 때는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28장의 말씀처럼 <성읍에 있으나, 들에 있으나, 들어가나, 나가나> 복을 받는 것이 중요하듯이, 성읍이든 들판이든, 들어갈 때든 나올 때든 일관된 삶의 모습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함께 계실 때>,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셨습니다. 피곤하셔서 제자들과 휴식을 취하려고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무리들이 거기까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무리들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고,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리와 작별하신 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본문 46절을 보면 예수님은 무리와 작별하셔서 혼자 계실 때,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할 일이 없어졌을 때, 우리처럼 빈둥거리신 게 아니라,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무리와 함께 할 때나 무리와 작별한 후에나 예수님은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진 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삶의 일관성을 가지기 위해서 지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원리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때나 홀로 있을 때, 여전히 우리는 <나>로서의 존엄성을 잃으면 안됩니다. 둘째로 <사명>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나 사명의 일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사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로, <기도>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축사의 기도를 올리셨고, 홀로 계실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비난받게 된 이면에는 표리부동한 모습, 이중 인격적 삶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믿을 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다시 존경을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무리와 작별한 후>에 더욱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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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9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위대한 스승
    어머니는 가장 먼저 만나는 스승이고 자식에게 영향을 가장 크게 끼치고 있어 윈스턴 처칠이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했을 때에 영국의 한 신문이 그에 대한 특집기사를 다뤘다. 그 신문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처칠을 가르친 교사들을 모두 조사하여 ‘위대한 스승’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그때 처칠은 짤막한 글로 편지를 보냈다. “귀 신문사에서는 나의 가장 위대한 스승 한 분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나의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도 어머니날 특집프로에 출연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나의 어머니 넬리 레이건입니다.” 이런 얘기도 있다. 한 소년이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오랫동안 방황했다. 깊은 산 속에도 들어가보고 황량한 들판에도 나가 보았다. 그러나 위대한 스승은 만나지 못하고 그만 지쳐 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소년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방황하고 있느냐?” 소년이 대답했다. “위대한 스승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 보라. 한 사람이 신발도 신지 않은채 뛰어나올 것이다. 그 분이 바로 네가 찾고 있는 위대한 스승이다” 소년은 위대한 스승을 빨리 만나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다. 문을 두드리니 한 여인이 신발도 신지 않은채 뛰어 나와 소년을 맞았다. 그 이는 소년의 어머니였다. 알고보면 가장 위대한 스승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나는 스승이고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며 자라난다. 역사적인 인물을 보라. 훌륭한 사람의 배후에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지식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간을 만드는 스승이다.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의 예를 든다. 한번은 아이가 한 가지에 대해 스무번이나 물었다. 그러나 수산나는 꾸짖지 않고 가르쳐 주었다. 그것을 본 남편이 “여보, 한 가지를 가지고 스무번이나 되풀이 한단 말이요?” 하니 수산나는 “알기까지 가르쳐야지 어떡합니까?”하며 또 가르쳐 주더란 것이다. 또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보라. 어거스틴이 17세에 집을 나가 방종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이단 마니교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랬던 그가 서른살이 되던 해에 회심하고 고백하기를 “내가 회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와 그의 끈질긴 기다림 때문이었습니다” 그랬다. 어찌 어머니를 위대한 스승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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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9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4)
    2. 험담과 모함사람을 낙담하게 하고 절망시키는 아주 나쁜 것으로 〈험담과 모함〉이 있다.〈험담〉이란 남의 약점이나 아픈 부분을 들추어 내어서 이야기로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악한 취미이다. 남을 나쁘게 말하는 것도 험담에 속한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사실(fact)대로 말하기보다 사실과는 다르게, 사실보다는 더 나쁘게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받는다.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의 행동을 보라. 하나님을 나쁘게 말하고 있다. 하와에게 하나님을 악평(惡評)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보다 사탄의 험담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사탄의 험담에 귀를 기울이고 즐기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기억하지 않고 사탄의 험담에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마침내 사탄과 한 통속이 되어 하나님을 배신한다. 이것이 인간의 첫 타락이고 〈원죄 原罪〉 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하와에게 하나님을 험담하여 재미를 본 사탄은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험담을 하고 험담을 즐기라!〉고 부추긴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그들의 험담하는 성품을 이어 받은 우리들은 별 생각 없이 쉽게 다른 사람을 험담한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라고 부른다. 쉽게 남을 험담하다보면 습관이 되기 쉽다. 이것은 아주 나쁜 습관이다. 이 습관이 심해지면 남을 험담하는 것을 즐기게 까지 된다. 험담하기를 즐기는 정도까지 되면 그 사람의 심령은 황폐화된다.그런 사람에게서는 ‘인격 Personality’이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그럼 〈모함〉이란 무엇인가? 모함이란 없는 사실, 불분명한 것을 ‘사실인양, 직접 본 것처럼 퍼뜨리는 것’을 뜻한다. 악의적(惡意的)으로 악평(惡評)하는 것을 뜻한다.그러므로 험담보다 더 사악한 짓이 〈모함〉이다. 그러므로 〈모함〉은 상대방의 인격을 무참히 짓밟고 그 인생을 망치게 하는 짓이다. 심지어 상대방이 충격을 받아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다. 이런 모함이 특히 우리나라에서 심하다. 그런데 아무런 근거나 증거도 없이 남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악평하는 모함 때문에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생명을 짓 밟을 뿐 아니라 한 가정까지 파멸시키는 참담한 짓을 〈만물의 영장〉으로 일컬어지는 인간으로서 어찌 감히 할 수 있다는 것일까? 전혀 근거 없이 모함을 당하여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타격을 받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교회가 나서야 한다. 우리가 나서야 한다. 복음으로 저희들을 살려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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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 [교회법률상식] 총회 노회 분립 위원회의 반역(1)
    -노회역사성 인정 않고 전통노회 해산하는 노회 분립 언어도단-노회역사는 전통 노회가 이어가고 분립노회는 1회로 시작해야 제99회 총회가 한서노회(위원장 이성택 목사), 평양노회(위원장 이종희 목사), 안주노회(위원장 최희용 목사), 황해노회(위원장 남태섭 목사), 서대구노회(위원장 전주남 목사), 서수원노회(위원장 박덕기 목사) 등 6개 노회의 노회 분립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그 중 평양노회 분립위원회와 안주노회 분립위원회의 분립내용을 보면 노회분립 위원회가 총회헌법에 도전하는 반역을 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기독신문 제1994호(2015.1.14.) p.2에 “평양노회 분립위원회 명칭 결정”이라는 머리기사의 내용으로 “평양 A노회(김선규 목사 측)를 가칭 평양제일노회, 평양 B노회(고영기 목사 측)를 가칭 평양노회로 결정하고 특정노회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고 양 노회의 역사성과 회기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 소속을 결정하지 못한 교회는 1월31일까지 소속을 청원하도록 하고 그 후에는 위원회에서 실사하여 소속을 결정하기로 했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동 p.5에는 “안주노회 15일 분립예배 드려”라는 머리기사의 내용으로 “안주노회가 15일 분립예배를 드리고 가칭 신안주노회와 동안주노회로 분립한다. ··· 신안주노회를 15일 오후 1시 성현교회(라계동 목사)에서, 동안주노회 분립예배를 오후 3시 성인교회(이현국 목사)에서 드리기로 했다.”고 보도하였다. 이에 관련하여 노회분립의 원칙을 정리함으로 이해를 돕고자 한다(2014. 교회 법률상식 pp. 410-416 참조). 1. 분립위원회의 직무한계 총회가 보낸 노회분리위원회의 직무한계는 헌법의 규정에 따라 노회가 합법적인 노회의 결의로 총회에 노회분립허락 청원서를 제출하면 총회가 허락하고 위임한 대로 전통노회에 관하여는 그 어떤 일도 간섭해서는 안 되고 분립할 노회만 조직하는 사회자의 직무일 뿐이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면 노회의 분립청원서 내용에 기록된 분립할 노회의 지역, 노회의 명칭, 교회 수, 목사 및 교역자 수, 장로 수, 교인 수 등을 명시한 대로 제1회 ○○노회를 조직 해 주는 것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분립위원회는 전통노회에 관하여는 아무 것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 오직 전통노회가 스스로 임시노회를 회집하여 노회 분립으로 인하여 결원된 노회 임원을 보선하고 노회분립 후의 후속조치를 위하여 요구되는 노회규칙수정과 시찰회 및 상비부 등의 조직을 보완 조정하면 그만이다. 2. 분립위원회의 월권 그런데 안주노회분립위원회와 평양노회분립위원회는 분립할 노회뿐만 아니라 전통노회까지 간섭하면서 “양 노회의 역사성과 회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양 노회에 분립예배를 시차를 두고 드린다고 하면서 월권을 넘어서 전통노회를 해산하는 반역을 행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노회분립위원회가 노회명칭을 가칭으로 정해주고 각 지교회의 소속할 노회를 청원하면 위원회가 실사하여 소속노회를 정해준다고 하니 노회분립의 행정이 거꾸로 돌라가는 것 같아 보여 심히 염려스럽다. 실제의 상황을 살펴보자. 15일에 안주노회의 분립을 하면서 가칭 신안주노회는 오후 1시 성현교회(라계동 목사)에서 분립예배를 드리고, 가칭 동안주노회는 오후 3시 성인교회(이현국 목사)에서 분립예배를 드린다고 했는데 양노회의 가칭은 언제 누가 어떻게 떼어줄 것이며 안주노회의 역사는 어디서 보전할 것이며, 분립위원회가 무슨 권한으로 지교회에 소속노회를 청원하라고 지시를 하며 무슨 자격으로 소속노회를 정해준다는 말인가? 노회분립위원회가 지교회에 소속노회를 청원하라하고 위원회가 소속을 결정해준다고 함은 어불성설이다. 혹 무지역노회의 분립청원서에 누락된 지교회가 있을 경우에는 그 누락된 교회들은 모두 전통노회에 소속하는 것이 지역노회와는 달리 무지역노회에 관련한 법리적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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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 [성공칼럼] 사랑의 길, 에고의 길
    사랑으로 가는 길과 에고 즉, 정욕으로 가는 길은 겉은 비슷해 보이지만 속은 정반대의 길이다. 사랑은 선으로 가는 길이며, 정욕은 거짓과 악으로 가는 길이다. 사랑은 상대방이 잘 되는 것이 목적이지만 정욕은 상대방을 이용하여 내가 잘 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랑은 내가 수고하고 내가 희생하지만 정욕은 상대방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상대방이 내 생각대로 따르지 않아도 서운해 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욕은 상대방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아서 나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분노한다. 선한 사람의 생명은 사랑이며, 악한 사람의 생명은 정욕인 것이다. 자신의 시작이 사랑으로 시작하는지, 정욕으로 시작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내 중심에 사랑이 있는지 정욕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내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 자신의 입장부터 먼저 생각하는가? 상대방의 마음부터 살피는가? 내 입장부터 살피면 정욕, 상대방의 입장부터 살피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종교를 갖고 있으면서 진리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가? 사랑과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이면 사랑,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면 정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상숭배는 의존이며 이용이며 정욕적인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여 정직하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것은 사랑이 되는 것이다. 부모나 선생이나 의사나 종교지도자나 그의 목적이 상대방에게 있는가? 자신에게 있는가? 그 목적이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져 있으면 사랑이 아니라 정욕이 되는 것이다. 모든 망가짐의 시작은 상대방을 위한다는 사랑을 가장한 에고 즉 정욕에서 시작된다. 교회나 부부나 국가나 기업이나 모든 시작은 사랑으로 시작한다. 사랑은 그 근본 마음이 주고 싶은 마음이기에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위할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더 좋은 것을 줄까하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와 능력이 나와서 더 행복해지고 강해지고 부유해진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했다.’ ‘내가 대단하다’ 등의 자만심과 ‘내가 이만큼 했으니 나는 대우받아야 하며,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는 자기 옳음이 생기면서 사랑은 사라지고 이기심과 소유욕과 지배욕이 들어서게 된다. 이리하여 서로 간에 믿음이 깨지면서 갈등과 싸움이 생겨서 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잘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고 망가뜨리는 것은 에고인 것이다. 마귀의 목표는 사람 속에 있는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사람의 생명이기에 사람에게서 사랑을 없애기만 하면 자신의 목표를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마귀는 사랑 없이 모든 것을 다하기를 바란다. 사랑이 없는 종교지도자, 교육자는 가장 극악한 악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신을 다루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며, 사랑 없는 종교 지도자는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 상대방도 사랑을 버린 삶을 살도록 전염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어찌하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표에 온 마음을 쏟도록 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들어 결국 욕심 때문에 양심을 버리게 한다. 또 마음속에 두려워하고 분노하게하고 질투가 나게 하여 사랑을 없애는 것이다. 혹시나 사람들이 진리를 알았을 때는 서로 자신의 진리가 맞다고 주장하게 하여 갈등과 싸움을 만들어 사랑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 땅의 삶은 내가 사랑하며 살 것인가? 정욕으로 살 것인가의 영적 시험장이며, 영적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환경과 사건 속에서 사랑으로 가는 것이 진리로 살아가는 길이다. 이 길이 모두가 사는 길이며, 내 목표, 내 생각을 주장하면서 서로 갈등하고 싸우는 길은 정욕의 길이며, 모두가 죽는 길인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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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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