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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의 말씀] 염려, 나라, 족함(마태복음6:31~34)
    본문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재물관, 물질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이 땅에 쌓아두지 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마라. 공중의 새를 보라. 들판의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모든 부귀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한데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믿음이 작은자들아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한다. 한날의 괴로움도 그날로 족하다.’(6장19~34말씀) 오늘 말씀 제목을 ‘염려, 나라, 족함’이라고 한 이유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한 것은 필수종목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공동묘지나 조용하지, 어느 집이든 근심 없고, 어떤 몸에 병균이 없고, 어떤 사업장에 고민거리가 없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불안한 것은 필수불가결한 당연한 현상이지만은 그러나 그렇다고 불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 불안거리, 염려거리가 바뀌는 겁니다. 매일 내 돈, 내 문제, 내 가정, 내 자식을 걱정하던 사람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천국을 대망하면서 시온의 대로를 걸어가게 되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갈 때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뼈가 녹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세계가 엉망진창이 되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는 신앙이 천박해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볼 때 우리는 신앙생활을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가지치기를 해야 되며 시선을 처리를 다시 해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에 거짓된 것, 헛된 것, 부질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헛되고 허무한데 굴복해선 안 됩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 말씀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라고 하시며 세월을 아끼고 술 취하지 말고 세상에 중독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5장17~18말씀) 모든 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선순위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우선순위를 찾아서 먼저 구할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고린도후서12장 9절 말씀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병든 것도 감사, 아픈 것도 감사, 이 모든 강력한 감사가 삶의 환경이나 내면의 세계를 바꿔 놓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권자는 이렇게 달라야 합니다. 핵심가치를 붙들고 영적통찰력으로 우선순위를 하나님 중심, 교회중심, 성경중심으로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행해 나가는 나그네 인생이고 본향은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 시민권자로서 멤버십카드가 있는 사람입니다. 성도여러분 염려하지 마십시오. 소인배 같은 그런 신앙을 걷어치우시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기도하며 신앙을 다시금 업그레이드 시키십시오. 그래서 주님 마음에 쏙 들고 주님 눈에 확 띄는, 정곡을 찌르고 심금을 울리는 기도가 다이어트 되는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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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30
  • [가정칼럼]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마라
    영국황실의 찰스 왕세자. 그의 아버지 필립 공(公)은 아내와 아들의 그늘에 가려 존재조차 희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들 찰스에 대한 영향력만큼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아들의 일생을 자신의 무릎 위에서 철저히 조종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찰스에 대한 첫 번째 교육 목표는 엄격한 장교 출신인 자신처럼 강인하게 만드는 것이었지만 그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났다. 94년 피플지(誌)는 필립 공을 빈정거리기 잘하는 엄격한 규율가라고 묘사한 일이 있다. 지적(知的)이었지만 예민하고 다른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례하게 들리는 농담을 툭툭 던지는 안 좋은 기교도 지녔다고 한다. 1957년 만 아홉 살이던 찰스는 고든스턴 공립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스파르타식을 고집한 군 출신 아버지는 귀족학교 이튼스쿨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섬세하고 수줍음 잘 타는 소년이었다. 필립은 학교생활에 어려워하는 아들 찰스를 겁쟁이라고 불렀고 마흔 여덟이 될 때까지 찰스의 아이디어에 경멸을 쏟아 부었다. 이런 조롱이 찰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찰스는 아버지를 항상 영웅으로 숭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높은 기대대로 사는 것에 늘 바동거려야만 했던 것이다. 찰스는 생일잔치에도 나타나지 않는 아버지의 정신적 학대에 어린 시절 내내 복종해야 했다. 필립은 마음으로도 찰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버킹검 궁전에 있는 필립의 방에는 아들 찰스 대신 딸 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편애 속에 자랐다. 아들과 전화로 대화를 나누기보다 하인을 통해 전갈을 보내는 등 권위적인 방식으로 일관했다. 찰스는 천성적으로 마초맨(남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압력과 경멸을 받을 때 찰스는 친구들에게 “내 갈 길을 가고 싶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어머니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엘리자베스2세는 자식을 돌볼 시간이 없는 여왕이었고 금욕주의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키스를 하거나 꼭 껴안기보다는 의무를 강조했다. 어린 시절 찰스는 하루 동안 30분 정도밖에 어머니를 볼 수 없었고 유모의 손에 의해 길러져야 했다. 찰스는 전기에서 사랑스런 포옹과 키스를 갈망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 여왕은 그렇지 못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심리학자, 아동학자, 교육학자들이 자녀양육에 관한 책을 썼다. 그 양은 지구를 덮고도 남을 분량이다. 하지만 그 책을 요약하면 딱 한 문장이다.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엡6:4) 성경이 말하는 ‘노엽게’의 의미는 ‘아이들을 괴롭게 말라. 화나게 하지 말라. 흥분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이 노여움이 사회악이 되고 범죄가 된다. 역기능 자녀가 출생하는 환경이 된다. 때문에 바른 부모교육은 이 작고 작은 노여움을 정복하는데서 부터 시작된다. 가장 큰 자녀의 분노는 부부 불화 “어릴 때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싸웠다. 이유도 없이 서로는 서로의 감정들을 고함으로 표현했다. 등교할 때마다 골목길을 나올 때 이웃 어른들께 인사를 하며 나는 수치심으로 얼굴도 들지 못한 채 항상 도망치듯 빠져 나와야만 했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모습들은 이렇게 움츠려 들었고 지금도 어른들 앞에서라면 마치 죄인처럼 떳떳하지 못한 나의 모습이다.” -한 젊은이의 일기 중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많은 일들 중에 가장 큰 노여움은 부부불화다. 자녀들은 부모가 싸우는 것을 볼 때, 이내 안정감을 잃는다. 삶의 의욕이 꺾인다.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심지어 자살충동도 느낀다. 때문에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학습 환경은 부모환경이라 부른다. 부모의 불화는 원초적인 심리 감정이라 불리는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불안감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는 순간, 이글거리는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마음에 불을 지른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반대로 부부의 화목한 모습은 자녀의 삶에 에너지가 된다. 매사에 자신감을 심는다. 의욕을 갖게 한다. 꿈에 부푼다. 긍정의 에너지는 나야말로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자존감으로 연결된다. 자녀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아빠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 아이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다.”자녀들에게 그 선물을 줄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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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30
  • [시사칼럼] 네팔 지진
    뇌종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우연히 네팔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향 9개를 발견합니다. 2년 전 tvN에서 방영되었던 ‘나인(nine)’이라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 때 배경으로 등장했던 마을이 포카라(Pokara)였습니다. 마을 뒤편으로 등장하는 ‘인간이 오르는 것을 신이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산’이라 불리는 ‘마차푸차레(Machapuchre)’의 압도적인 위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그 지역 일대를 지난 4월 25일, 진도 7.7의 강진이 덮쳤습니다. 최초에 보도되었던 수십 명의 사상자 수는 현재 사망 5,057명, 부상 10,915명으로 불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히말라야 산맥 자락에 웅크리고들 있는 오지(奧地)가 많기 때문에 전체적인 피해는 가늠할 길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시장조사기관인 IHS는 이번 지진으로 인한 복구비용이 50억 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인구 3,000만 명에 1인당 GDP 700달러의 나라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중한 재해(災害)입니다. 이미 긴급구조단을 현지에 파견한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국제사회의 돕는 손길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이번 네팔 지진도 천재(天災)에 인재(人災)가 겹쳤다고들 합니다. 지진 발생 불과 1주일 전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전세계 지질학자를 비롯한 과학자 50명이 모여 1934년에 이 나라를 강타했던 지진이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덮칠 가능성을 경고했다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이번 지진을 정확하게 예측했다는 기사도 떴습니다. 그런데 대비는커녕 이처럼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다니 믿을 수 없다는 논조입니다. “지진을 그냥 천재(天災)라고 말하고 하늘 탓만 할 수는 없다. 미 캘리포니아에서라면 주민 100만 명에 10~30명이 숨질 때 같은 지진으로 네팔에선 1,000명이 숨진다. 파키스탄, 인도, 이란, 중국이라면 10,000명이 숨지게 된다. 지진피해가 인재(人災)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미국 지질조사국 한 과학자의 논평입니다. T. S. 엘리어트의 말처럼 4월은 잔인한 달인가 봅니다(April is the cruellest month). 지난 28일에는 세월호 선장 등 승무원 15명에 대한 항소심 공판이 열렸습니다. 어른들의 말을 믿고 질서정연하게 대기하던 어린 학생 등 304명이 끔찍한 고통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재판장의 말에 유족뿐만 아니라 방청객 모두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지만 1년이 지났어도 세월호는 인양되지 않고 여전히 차가운 바다 밑에 수장(水葬)되어 있습니다. 네팔 지진 사태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재난입니다. 그렇다면 작년 이맘 때 진도 앞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어떻습니까? 인구 5,000만 명에 1인당 GDP 28,738달러를 자랑하는 OECD 가입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이 사고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네팔은 힌두교도가 전체 인구의 80%를 넘습니다. 힌두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에는 33,333개의 신들이 나오는데, 오늘날 힌두교의 신들 숫자는 3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klaiein meta klaionton)”고 말씀합니다(롬 12:15). 주한네팔인협회에 의하면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네팔인의 수는 약 29,000명이며 이들 중 대부분이 근로자들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고향 소식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네팔로 돌아가는 분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천재지변에 어쩌면 인재까지 겹쳐진 재난 속에서 슬퍼하는 네팔 사람들을 위해 함께 울고 또한 기도하는 일은 그저 아름다운 미담이나 휴머니즘(humanism)의 발로(發露)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주어진 책임이고 의무입니다. 하물며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자녀를 마음으로 부둥켜안고 처절하게 눈물 흘리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들 가족들의 슬픔에다가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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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30
  • [서임중 칼럼]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
    사람은 오관을 통하여 일상생활을 한다. 오관(五官)이란 시각(視覺), 청각(聽覺), 미각(味覺), 후각(嗅覺), 촉각(觸覺)을 말한다. 어느 것 하나 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 시각(視覺)은 더욱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국교회 지도자 가운데 한 분이신 실로암안과병원장 김선태 목사님은 시각 장애인으로서 세계적인 인물로 선정된 분이시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사람들보다 모든 면면에 뛰어난 대한민국이 낳은 거목(巨木)이시다. 그분은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보다 한 가지 더 볼 수 있는 은총을 늘 감사하는 분이시다. 그것이 무엇인가? 상대방과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마음이 보인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상대방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다른 곳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대화를 하면서 마음 중심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 그 말이 진심과 건성이라는 것, 그 이상의 모든 것을 다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야기다. 목사님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은혜를 감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이는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다. 하나님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의 진정한 사랑의 관계 또한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약점이 된 것이 보이는 눈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저기 불편스러운 일들이 주님의 교회 안을 어지럽히게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보이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진정 신령한 은혜의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니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생활이 일상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어 교회가 행복하고 평안했다. 사람은 두 종류의 눈을 갖고 있다. 하나는 육신의 눈이고 하나는 영의 눈이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는 세상의 것을 보고 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세계를 본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올바르게 보는 것(正觀), 조용하게 보는 것(靜觀), 대강 보는 것(槪觀), 꿰뚫어 보는 것(洞觀), 전체를 훑어보는 것(通觀), 크게 보는 것(大觀),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直觀), 외모를 보는 것(外觀), 멀리 내다보는 것을 달관(達觀)이라 한다. 그뿐 아니다. 주관(主觀), 객관(客觀), 참관(參觀), 비관(悲觀), 낙관(樂觀), 방관(傍觀) 등, 이와 같은 숙어를 말하자면 끝이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만큼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무엇을 보면서 살아가는가? 무엇을 보기 위해 교회에 왔는가? 무엇을 보면서 오늘 예배를 드리는가? 무엇을 보아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인가? 무엇을 보면서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가?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롯과 함께 생활하기에는 너무 많은 가족과 재산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분가(分家)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주었고 롯은 보기에 좋은 요단지역 소알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선택했다. 결과는 보이는 곳은 멸망이었고 보이지 않았던 곳은 축복이었다. 중요한 것은 롯의 눈에는 요단 지역, 소알까지 물이 넉넉한 것만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은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인도함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즉 역사의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역사의 들러리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 성장에도 부흥의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교회 부흥의 들러리가 있다. 가문에도 가문의 번영에 주인공이 있는가 하면 가문의 번영에 들러리가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이다. 똑같은 상황에서 사울왕과 다윗이 본 골리앗은 달랐다. 육신의 눈으로 본 사울왕은 골리앗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결론 내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본 소년 다윗은 골리앗은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허수아비와 같이 보였고 그렇기에 그를 향해 물맷돌 다섯 개와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다. 12명의 정탐꾼의 사건도 같은 의미를 시사한다. 육신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았던 가룟유다, 고라, 발람, 웃시야, 아합, 가인, 데마 같은 사람들의 결과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승자 같았으나 실패와 영원한 저주의 대명사들이었다.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늘 사용하는 이야기가 있다. 노란넥타이를 메고 강단에서 이 칼라 어떻습니까? 물으면 “믿음색깔 황금색이네요.” 라고 대부분 대답하지만,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하고많은 칼라 가운데 왜 하필 똥색입니까?”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색깔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말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어떠냐를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믿음의 눈으로 감사의 눈으로 가능성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부정적, 비판적, 절망적으로 보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와트는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것을 보고 증기 기관차를 발명했다. 프랭클린은 번개 치는 것을 보고 전기를 발명했다. 로댕은 화강암을 보고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했다. 월트 디즈니는 쥐를 보고 미키 마우스를 창안했다. 청교도들은 바다의 풍랑을 보고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지금도 우리에게 하신다. “네가 보는 것을 내가 네게 주리라.(창13: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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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30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입장 차이
    나와 남의 입장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 말하면 실례가 될 수 있어 사람은 누구에게나 입장이라는 게 있다. 따라서 무슨 일에 관하여든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기 쉽다. 그러다보면 나의 입장과 남의 입장은 차이가 난다. 그 때문에 말을 할 때에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의 입장에서 말하다보면 상대방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예를 들면서 나의 입장과 남의 입장의 차이를 열거해 보고자 한다. △남이 차를 천천히 몰면 너무 소심하다 하고, 내가 천천히 가는 것은 안전운전을 위해서라고 한다. △며느리는 남편한테 꼭 잡혀 살아야 보기 좋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보기 좋다고 한다. △남의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버릇없이 키운 탓이라 하고, 자기 자식이 어른에게 대드는 것은 자기 주장이 뚜렷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위가 처가에 자주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고, 아들이 처가에 자주 가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남이 음식값을 각자 내자고 제안하면 이기적인 사고방식이라 하고, 내가 각자 내자고 하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한다. △남의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공처가라 하고, 자기 남편이 설거지를 하면 애처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약속을 어긴 경우에는 사람이 어쩌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이렇게 말하고, 남이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한다. △내가 지각을 한 경우엔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 그리 되었다 하고, 남이 지각하면 정신 자세가 틀려 먹었다고 한다. △남이 학교에 자주 가는 것은 치맛바람이라 하고, 내가 학교에 자주 가는 것은 높은 교육열이라고 한다. △며느리가 부부싸움을 하면 여자가 참아야 한다 하고, 딸이 부부싸움을 하면 아무리 남편이라도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고 한다. △며느리가 친정부모에게 용돈 주는 것은 남편 몰래 돈을 빼돌려 주는 것이라 하고, 딸이 친정부모에게 주는 용돈은 길러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딸이 애인이 많으면 행실이 가벼워서 그렇다 하고, 내 딸이 애인이 많으면 인기가 있어 그렇다고 한다. △며느리에게는 시집왔으니 우리집 풍속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딸에게는 시집을 가도 줏대가 있어야 한다며 타이른다. △남이 내 아이를 꾸짓는 것은 이성을 잃은 히스테리라 하고, 내가 남의 아이를 꾸짖는 것은 어른된 도리로 타이르는 것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내 입장과 남의 입장은 차이가 있다. 그 때문에 말을 조심해야지 자칫 내 입장에서 말하다간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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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30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 (13)
    <나비처럼 날아서 벌 같이 쏘아버리는> 특유의 전법(戰法)외에 무하마드 알리 선수가 사용하는 또 하나의 전법은 상대선수를 <조롱하기 taunting> 였다. 속사포같이 팔을 쭉쭉 내뻗는 (straight) 횟수만큼이나 알리는 쉴 새 없이 상대 선수를 향하여 무차별 조롱을 퍼붓는다. 그래서 <떠벌이 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4년에 <20세기의 복싱대결>이라 일컬어진 대격전이 알리와 조지 포먼 사이에 펼쳐졌다. 조지 포먼의 주먹은 무쇠 주먹이고 그의 힘은 황소의 힘이었다. 복싱 전문가들마다 조지 포먼이 압도적인 펀치(주먹)의 힘으로 알리를 KO시킬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시합이 시작되면서 알리는 스트레이트 주먹과 떠벌이 조롱의 말을 함께 포먼에게 쉬지 않고 퍼부었다. 포먼은 그 강력한 주먹으로 한 방에 알리를 KO시킬 욕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번번이 그 주먹은 빗나가고 만다. 왜 그럴까? 알 리가 쉴 새 없이 떠벌리는 <조롱의 말>에 화가 머리 끝 까지 오른 포먼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결국 포먼은 알리에게 비참하게 패하고 말았다. 포먼은 알리의 주먹에 쓰러졌다기 보다 알리의 <쉴 새 없이 쏘아대는 조롱의 말 taunting>에 기분이 상하고 감정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져서 결국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은 <치명적인 무기>다. 치명적인 ‘살상무기’다. 이유 없이 무차별 조롱을 받으면 그 상처와 후유증은 의외로 심각하다. 성경에도 <조롱하는 사건>이 기록돼 있다. 느헤미야 4:1~3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의 수산궁으로 부터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나서는 느헤미야를 향하여 <조롱의 말>을 퍼붓는다. 성경 본문에는 이렇게 기록돼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이유 없이 아주 나쁜 마음으로 나를 향해 조롱을 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을 하는 것이 좋을까? 느헤미야는 사악한 자들의 <조롱의 말>에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담대하게 처신하고 있다. ◎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 그들의 조롱은 결국 그들의 머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었다. ◎ 그들의 조롱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용감히 맞서 싸우라고 다짐하였다. ◎ 낮에는 성벽을 쌓고 밤에는 파수하리라고 다짐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누가 이유 없이 우리를 조롱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흔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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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교회법률상식] 헌법개정위원회에 바란다(2)
    (지난호에 이어) 3. 시벌과 해벌은 권징재판이 아닌 교회 예배 의식 만일 예배모범의 시벌과 해벌을 권징조례에 옮겨서 시행한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양상은 마치 상의는 양복정장을 하고 하의는 한복 바지를 입고 신발은 운동화를 신은 사람과 같이 꼴불견 중에 꼴불견인 헌법이 될 것 같아 심히 안타깝고 우려스럽다. 그 이유로 해벌은 재판회나 재판국에서 해벌하는 것이 아니고 행정치리회에서 목사는 노회가, 일반 신도는 당회가 결의하여 예배모범에 규정한 의식으로 행정치리회 회장이 회원에게 해벌·공포하는 것이요, 시벌은 재판회(국)에서 판결하여 원·피고에게 선고한 후 회원들에게는 행정치리회장이 정치 제7장 교회 예배 의식 10항에 의하여 예배모범 의식으로 공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을 헌법 조문에서 검토해 보자. 현행 권징조례 제31조에 “치리회가 시벌하거나 해벌하는 때는 장로회 예배모범 제16, 17장의 규정한 바에 의하여 처리함이 옳다”라는 규정에서 여기의 치리회는 권징치리회가 아니고, 행정치리회인 노회와 당회를 의미한다. 그런데 개정위원회는 개정안 제33조(시벌 및 해벌)에서 엉뚱하게 행정치리회인 이 “치리회”를 “재판회(국)”로 개정 초안했으니 또한 기가 막힐 일이다. 해벌할 때에 과거에 재판한 그 재판국은 이미 해산되고 없어졌는데 무슨 방법으로 재소집해서 해벌하란 말인가? 아니면 새로운 재판국을 설치하여 해벌하란 말인가? 말이 도무지 안 된다. 오직 행정치리회가 결의하고 행정치리회장이 예배모범의 의식으로 공포하는 것이다. 당회재판으로 생각해 보자. 재판회는 심리·판결하여 원고와 피고에게 재판회장이 선고하는 것이므로 권징조례에 속하고, 그 판결을 교회에 알리는 공포는 당회장이 예배시간에 교회에 공포하는 것이므로 시벌과 해벌은 권징조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속하는 것이므로 예배모범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법과 세상법이 다르고 교회재판과 세상재판이 다른 점이라는 말이다. 4. 헌법 전면 개정의 의미와 범위 원래 헌법 개정의 절차는 어떤 개인의 청원이나 제의에 의해서 개정안이 총회에 제안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치리회의 헌의(정치 제8장 제1조, 동 제10장 제6조 2항, 6항, 동 제12장 제4조)에 의하여 총회의 결의(정치 제12장 제4조)와 노회의 수의 과정을 통하여(정치 제23장 제1조, 제2조) 총회가 공포 시행하는 것이다. 즉 총회 현장에서 헌법 개정이 긴급하게 요구되는 조문이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총대 개인의 제의나 어떤 집단적 개체(장로회, 교역자회 등) 또는 총회 상비부나 위원회, 임원회 등의 제안으로는 헌법 개정안을 총회에 상정할 수 없다. 오직 “당회가 헌법 개정안을 노회에 헌의(혹 노회 회원들의 긴급 동의안으로 제의)하고 노회가 그 개정안을 받아 결의하여 총회에 헌의(혹 총회 총대들의 긴급 동의안으로 제의)하면 총회가 받아 결의하여 노회 수의 후 공포 시행하는 절차에 의해서만 헌법을 개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특이하게 2012년 제97회 총회에서 “헌법 전면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계속 활동해 오다가 제99회 총회에서 명칭을 “헌법 개정위원회”로 변경은 하였지만 그 기능과 역활은 존속시키면서 그 위원회에 헌법 전면 개정안을 제안하도록 위탁하였다. 그러므로 헌법 전면 개정의 의미(범위)는 모모 교단이 장로교회 헌법의 원조인 웨스트민스터 헌법의 틀과 판을 허물고 세상 법과 같이 삼권분립의 형식으로 개정하여 교회 헌법의 고유한 특성을 훼손한 헌법 개정과 같은 전면 개정이 아니고 현행 헌법의 장과 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법이 정한 헌법 개정 절차 중에 총회에 헌의하기 이전의 하회 치리회가 헌의해야 하는 절차를 생략하고 총회가 그 절차를 헌법 전면 개정위원회에 위탁한 특별한 비상조치로 보아야지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5. 결론 바라기는 헌법개정위원회는 “성경으로부터 이탈한 중세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의 기치(旗幟)”를 잊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헌법 제정이야말로 종교 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개혁의 목표인 것처럼 웨스트민스터 헌법에서 빗나간 현행 헌법을 웨스트민스터 헌법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헌법 개정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개정위원회는 기이 초안한 개정안은 접어두고 이제껏 헌법을 개정할 때마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번역하여 출판한 1922년도 판 헌법에서 빗나가게 개정하므로 인하여 시행할 수 없는 부분(정치 제13장 제4조 등)과 시대적 문화적 변천으로 인하여 그 의미가 바뀌어 시행할 수없는 용어(권징조례 제136조 등) 등의 부문만 찾아내서 개정안을 초안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웨스트민스터 헌법으로 되돌려 놓는 헌법 개정으로 세계 만국 장로교회들이 공히 시행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헌법과 버금가는 헌법 개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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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성공칼럼] 악의 근원
    악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 밝은 생각에서 밝은 감정이 나오고 어두운 생각에서 어두운 감정이 나오듯 거짓과 악은 서로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생각과 행동이 짝을 이루어야 하듯이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가 서로 짝을 이루어야 한다. 악은 사랑이 없는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진리란 가슴에 분노와 미움과 적개심을 품고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족이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뒤에 있던 차가 새치기를 해서 사고가 날 뻔했을 때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하면서 상대방 운전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그리고 서로 논쟁할 때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것 등이 사랑과 존중을 잃어버린 자기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차가 새치기를 하는구나. 굉장히 다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겠지... 사고 나지 않았으니 감사하지”하면서 마음에 사랑과 여유를 회복한 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야 선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자유, 생명, 기쁨 등의 본성과 원천이며, 진리는 그 원천에서 나오는 말이며 사상이며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리는 사랑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기에 내 생각,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물질, 지식, 능력은 선과 자유, 사랑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속에 사랑이 없으면 내 옳음과 내 모든 소유는 악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할 내 생각에 두려움이 있고, 서운함, 적개심, 내 욕망이 있으면 삶은 망가지게 되며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패망의 근원은 모든 것의 근원인 사랑을 버린데 있는 것이다. 책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 속의 왕들을 보면 처음에는 백성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왕이 된다. 여기에서 지혜가 나오고 능력이 생겨 나라가 부유하고 평화롭게 된다. 그러나 왕이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사랑을 버리게 되면 왕이라는 자리에 연연하여 지배욕으로 불타오른다. 그러면 서서히 악이 보이면서 폭군으로 변하며 패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말하든지, 어떤 일을 하든지, 내 속에 사랑과 선함 있는지 살피는 것이 악을 막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진리가 함께 있어야 하는 짝이듯이 더 나아가 사랑 속에는 진리, 옳은 생각,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진리가 없는 사랑은 겉보기에는 밝고 선해 보이지만 그 속에 악한 마음 즉 거짓이 있기에 겉이 화려한 무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음속에 옳지 않은 욕심을 가지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온갖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진리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악의 근원은 거짓과 어둡게 만드는 생각을 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거짓을 진짜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을 살다보면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잘 될 때, 안 될 때, 좋은 평가를 들을 때, 비난을 들을 때 등등의 상반된 일들이 생기게 된다. 이 때 크게 두 가지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하나는 사랑과 선을 만드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거짓과 악을 만드는 생각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은 상반된 것으로 하나는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거짓이다. 이 때 나는 어떤 생각을 선택할 것인가? 예를 들어 내 성적이 원하는 대학에 갈 성적이 되지 않는다. 혹은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실직을 했다. 혹은 갑자기 이혼을 했다면 ‘나는 해도 안 돼, 나 같은 것은 살 필요가 없어. 이젠 끝이야’ 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서 사랑과 힘을 잃으며 내 삶이 엉망이 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다시 시도해 보자, 결국 나는 잘 될 거야.’라고 생각해서 힘과 사랑이 생겨서 내 삶이 살아나도록 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악의 근원은 내가 사랑이 생기지 않는 거짓을 따르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서 사랑을 더하여 악의 근원을 없애고, 사랑과 진리가 항상 함께 같은 양이 되도록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일이 있든지 내 안에 사랑과 진리가 균형을 이루어서, 사랑과 진리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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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은혜의 말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여호수아 1 : 7~9 )
    오늘 본문말씀은 여호수아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예수님과 이름이 같은 ‘예수스’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한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리더십을 지닌 리더였는지 살펴보려합니다. 첫째, 여호수아는 위기의 지도자였습니다. 1장 1절 말씀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를 부르십니다. 사람은 어려울 때에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항상 최악의 순간 최고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여호수아가 독보적인 지도자가 아니고 돕는 베필이라는 겁니다. 1장 1절에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하여 여호수아를 소개할 때 단독적인 스팩이 없습니다. 모세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스스로 잘난 사람이 아니고 융합적이고 어디가든지 섬기는 섬김의 리더십을 지닌 조력자였습니다. 남들을 흥하게 하고 남들이 잘되게 하는 리더십이 여호수아의 리더십입니다. 셋째, 여호수아는 예비되고 겸비되고 준비되고 검증된 지도자라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나이 80이 될 때까지 수십 년을 모세를 도왔던 사람입니다. 준비가 된 사람이 쓰임 받습니다. 전문가들에게 고개 숙이는 이유는 그 한 분야에 오랫동안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40년 동안 모세를 따라다니면서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연습과 오랜 단련과 학습을 통해 준비된 지도자가 되어야합니다. 넷째, 여호수아는 능력있는 지도자로 탁월한 분배자였습니다. 이권이 연계되면 예민해집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소통과 나눔의 달인이었습니다. 소통이 안 되면 고통을 겪게 되는데 천차만별의 사람들에게 그 큰 땅을 정확하게 분배하고 나누었으니 소통과 나눔의 달인인 것입니다. 다섯째, 여호수아는 한계를 뛰어넘은 리더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사선을 넘는다는 겁니다. 한계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체력의 한계, 집안의 한계, 성질의 한계, 경제적 한계를 넘어서 강을 건너갔다는 겁니다. 여섯째, 여호수아는 균형의 지도자였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1장 7절 말씀에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균형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것이 아니면 저것을 저것이 아니면 이것을 하다가 시행착오를 겪고 갈팡질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고 균형을 잡으라고 하십니다. 균형이 건강입니다. 오랜 기도와 말씀 속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여호수아를 향해서 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믿음이 역사를 만들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의 수고를 통해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형성됩니다. 균형 잡힌 건강한 리더십을 통해 삶의 균형수를 유지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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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교회회계]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기본원리
    교회회계 두번째 칼럼이다. 오늘은 복식부기 시스템에 기초한 교회회계의 기본원리를 설명한다. 매주 교회에서 작성되는 수입?지출 보고서를 어떻게 복식부기로 전환할까? 기업의 회계순환과정(accounting cycle)은 총6단계로 구분된다. 또한 이러한 절차는 교회회계에서도 Excel 프로그램 등을 사용해 다음과 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회계장부에 표시될 거래를 식별한다. 즉 교회에서 발생한 수입ㆍ지출을 자산, 부채, 자본(순자산), 수익, 비용으로 구분하고, 이들 5개 항목의 증감에 미친 내용을 식별한다. 자산은 교회가 소유하는 경제적 자원으로, 지출결과가 차년도 이후 효익을 미치며 현금, 예금, 토지, 건물, 차량운반구, 비품, 미수금 등이 있다. 부채는 교회가 갚아야 할 채무로 차입금, 미지급금 등이 있다. 자본(순자산)은 자산에서 부채를 차감한 것이다. 수익은 교회 고유목적 및 기타사업을 통해 얻은 대가로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등이 있다. 비용은 지출결과가 당년도에 미치는 것으로 예배비, 교역자사례비, 찬양대육성비, 교회학교육성비, 선교비, 구제비, 제세공과금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식별된 내용은 분개(journal)를 통해 회계장부에 기록한다. 분개는 T자형태 계정을 만들어, 왼쪽을 차변(Debit), 오른쪽을 대변(Credit)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자산?비용의 증가는 차변에, 부채?자본?수익의 증가는 대변에 표시하고, 감소시에는 그 반대로 표시해야 한다. 예로, 십일조 50만원과 교역자 사례비 100만원이 발생하였다면 수입?지출의 원인과 결과를 다음과 같이 차변과 대변 양쪽으로 기록한다. 이것이 복식부기의 기본원리이다. 셋째, 분개장에 표시된 내용을 총계정원장으로 옮겨 적는 전기(posting)를 한다. 전기는 일자별로 표시되는 분개내용을 계정별(현금, 당좌예금, 건물, 차입금, 사례비, 제세공과 등)로 집계하는 절차로써, Excel 프로그램 사용시 “데이터-필터” 기능을 활용해 쉽게 작성할 수 있다. 넷째, 기말시점에 발생주의 기준에 따라 수정분개를 한다. 발생주의는 현금의 수입?지출과 관계없이, 당년도에 실제로 발생한 수익과 비용, 자산과 부채의 변화를 평가하기 위한 것으로 발생, 이연, 평가항목으로 나누어 표시한다. 또 유형자산(건물, 차량운반구 등)에 대해서도 필요시 감가상각을 하고, 손상차손과 같은 회계처리를 한다. 다섯째, 재무상태표, 운영성과표, 현금흐름표와 같은 재무제표를 작성한다. 재무상태표는 자산과 부채, 순자산을 표시하여 교회가 소유하는 경제적 자원과 부채를 나타냄은 물론, 일정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선교ㆍ건축ㆍ장학ㆍ퇴직등의 적립금을 표시하여 효율적 관리를 가능하게 한다. 운영성과표는 수익에서 비용을 차감하는 형식으로 사업운영이익을 표시하고, 또 순자산의 변동내역을 나타냄으로 차년도 교회재정의 예산과 결산을 편성ㆍ집행하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마지막 단계로, 총계정원장에 표시된 각 계정을 마감한다. 이때 수익ㆍ비용은 회계연도가 끝나면 소멸되는 임시항목으로 ‘집합손익’을 통해 0(제로)로 만들고, 자산ㆍ부채ㆍ순자산은 영구계정이므로 ‘차기이월’하는 마감분개를 하여 회계장부를 마감한다. 복식부기 시스템은 현금 수입?지출중심의 단식부기와 비교해 다소 복잡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세기에 파치올리가 처음 복식부기를 만든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마태복음 20:21-22>에 “5달란트 받은 자가 5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 내게 5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5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 하였다.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관리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음호는 자금수지계산서와 운영성과표에 대해 설명을 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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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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