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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칼럼]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다
    어느덧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래학자’라는 별명이 붙은 최윤식 박사가 신간을 냈습니다. 2년 전 발표했던 첫 번째 책에 이어 『2020~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2』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에서 최 박사는 향후 10년이 한국교회의 사활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간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자료와 증거를 수반한 실증적 논리이기 때문에 그의 말은 더 무섭습니다. 구체적이면서도 무섭다고 말하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대략 이런 내용에 근거합니다. “2013년 기준으로 은행들이 교회에 대출 해 준 금액은 총 4조 5천억 원에 달한다. 매년 한국교회가 부담해야 할 이자는 2,250~5,000억 원, 매달 드려지는 헌금 중 187~416억 원이 이자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규모의 이자를 꼬박꼬박 내려면 매주 1,000~2,000원 씩 주일 헌금을 드리는 500~800만 명의 교인들이 필요하다. 원금을 갚으려면 매주 지금보다 2~3배 더 헌금해야 한다. 이는 현 목회자와 장로들이 은퇴한 후에도 교인들은 교회에 남아 20~30년을 계속 헌금해서 갚아야 하는 수치다.” 그에 따르면 2005년 기준 한국의 기독교인 수는 이단을 포함해 870만 명 정도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정상적인 헌금과 재정 운영상으로는 이자만 겨우 낼 수 있을 뿐이며, 은행에서 빌린 원금은 거의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진단입니다. 후발 베이비 붐 세대의 전격적인 은퇴가 시작되는 2028년부터는 상황이 더 악화될 전망입니다. 재정능력이 현격히 줄어드는 이들을 대신해서 밑으로부터 후세대가 치고 올라와야 하는데, 청소년부와 청년부가 위축이 아니라 소멸되기 일보 직전인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몽상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10여 년 후 한국교회가 빈번하게 맞닥뜨리게 될 단어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파산(破産, bankruptcy)’입니다.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라서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논리로 따졌을 때 예상되는 이러한 파국을 막기 위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최 박사는 최근 CTS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마지막 골든타임은 앞으로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이며, 앞으로의 2~3년이 미래 방향을 바꾸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바로 시행해야 할 단기적 응급 처방과, 장기적으로 붙들고 가야할 성경적 근본 해법을 모두 알고 성경의 요셉처럼 지혜롭게 적용해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한국교회가 미래세대를 살리기 위해 역량을 총집결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주일학교 교사요 미래세대 사역자였습니다. 보기 드물게 주일학교와 미래학을 섭렵한 그가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내놓는 이 대안은 거의 유일무이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교회를 떠나는 청년세대들의 발걸음부터 붙잡는 일이 시급합니다. 이들이야말로 10여 년 뒤의 은퇴자들을 대신해서 교회의 중추를 감당할 잠재적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심각합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속도나 숫자가 아니라, 기성세대들이 도무지 그 사태의 본질과 중요성과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청년들이 교회를 향해 냉담을 넘어서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고, 여기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없으며, 그에 따른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취할 수 없다면, 청년들을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할 방법이란 전무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그 해법을 가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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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서임중 칼럼] 부서지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어렸을 때 둘째 형과 함께 시냇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모래밭에 앉아서 집을 짓고 즐기던 생각이 난다. 형은 형 방식대로, 나는 내 방식대로 모래집을 지어 가다가 형이 실수하여 내가 잘 지어 놓은 집을 발로 뭉개버렸고 나는 앙앙거리면서 울었었다. 미안해하는 형이 “내가 다시 지어줄게.”라고 하면서 나를 달래 보지만 막무가내로 울어대는 나에게 형이 화가 나서 외친 말이 있었다. “부서졌으면 새로 지으면 될 것 아니냐. 새로 짓는 집은 더 좋게 지을 수 있는 거야” 그러면서 형은 울고 있는 나를 그냥 두고 형이 지은 모래집을 발로 휘휘 뭉개 버리고 먼저 일어서 가 버렸다. 뒤따라가면서 “형아! 내가 잘못했어.”라고 어리광을 부리는 내 머리를 툭 치면서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하면서 씩 웃어 주던 형의 얼굴과 그때 하신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인생을 설계한다. 그리고 그 설계대로 자기 인생의 집을 만들어간다. 그러다가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며 만들어 가던 집이 부서질 때를 경험한다. 이때 무너지는 사람이 있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 종종 언론에 보도되는 연예인 자살사건을 보면서 자괴감에 마음이 닫히는 내용을 접하게 된다. 유명 연예인의 자살 이후 장례식 장면이 보도되는 것을 보면 영정 앞에 ‘성도’, ‘집사’ 아무개라는 위패를 볼 수 있다. 자살은 죄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은 결코 자살로 마감될 수 없다. 소위 죽을 각오로 살려고 마음먹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는 이치를 앞세우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수 없다. 그것은 한 마디로 헛된 신앙의 옷을 입고 살았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모리스 프랭크(Morris Frank)는 미국 권투계 유망주였다. 그런 그가 시합에서 눈을 심하게 다쳐서 실명(失明)하게 되었다. 의사 두 명이 모두 그에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선언을 했다. 프랭크의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랭크에게 있어서 인생의 최후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처지의 맹인들을 위하여 “the seeing eye” (보는 눈)이란 별명을 가진 안내견(案內犬)을 훈련시켜 맹인들의 길잡이 친구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프랭크는 눈을 잃었지만 거기서 자기의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눈을 열어 보다 나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창출한 것이었다. “신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옛 히브리 격언이 있다. 흙이 부서져서 곡식을 낸다. 곡식이 부서져 빵이 된다. 빵이 부서져 우리 몸의 에너지가 된다. 포도가 부서지고 장미 꽃잎이 부서져서 극상 포도주와 샤넬넘버 5 같은 최고의 향수도 만들어진다. 사람도 원숙한 인격을 갖추려면 충분히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함을 깨닫게 해 준다. 예수님은 날마다 부서지는 생활을 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모진 말을 들으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슬픈 현장의 중앙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살과 뼈를 부서뜨리면서 날마다 부서지는 날들을 사시면서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되었다. 주님의 부요함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서 해방되었고(고후8:9), 주님의 육체가 부서지면서 많은 병든 자들이 건강함을 입었고(벧전2:24), 그의 축복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저주에서 해방되었고(갈3:13), 그의 생명이 부서지면서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막10:45, 갈2:20) 이와 같은 진리를 알게 된 바울이 자기를 부서뜨리면서 이방 선교의 장을 열었다. 인류 역사에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자기를 부서뜨리면서 만들어 낸 결과가 모든 이들의 평화와 축복이었다. 부활이 무엇인가?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부활신앙이 무엇인가? 절망에서 희망이다. 부활신앙인의 삶이 무엇인가?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소중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 부서질 때 우리는 절망할 것이 아니라 부서지면 또 다른 좋은 것을 지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열어야 한다. 새로 짓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내 편견과 아집, 교만이 부서지고 모두의 삶이 아름다움으로 연주될 때 그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 이기주의가 부서지고 이타주의가 꽃피워지는 것이 부활신앙인의 삶이다. 은퇴 후 요즈음의 나의 삶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하나, 둘씩 부서지고 있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서지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부서진다고 끝이 아니다. “부서졌으면 새로 지으면 될 것 아니냐. 새로 짓는 집은 더 좋게 지을 수 있는 거야.” 어김없이 맞게 되는 2015년의 부활절에 어릴 때 형의 말이 새삼 주님의 말씀으로 들려옴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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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성서연구] 안식 후 첫 날(마태복음 28장 1-10절)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알려진 것은 안식 후 첫날 새벽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되었고, 그 후엔 제자들이 무덤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고, 나중에는 오백 여명의 사람들에게 일시에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복음은 이 부활 사건 위에 기초하여 선포되었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은 안식 후 첫날 이루어진 것일까요? 여기엔 귀중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날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이란 모세를 통해 시내산에서 말씀된 십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일을 중지하고 쉬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몸과 마음이 모두 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안식 후 첫 날 전해진 것은 그 전 날의 안식이 거짓 안식임을 밝히고, 비로소 진정한 안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안식일라 여기던 그 날은 어떤 날이었습니까? 우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 빌라도 총독 등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었기에, 그저 모든 유대인들이 쉬기 때문에 총독도 업무를 쉬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 날 내내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로 마음이 괴로웠을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도 이 날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날 내내 십자가 처형 사건이 몰고 올 후폭풍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고, 또 예수님께서 평소에 예고하신 대로 부활하실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은 군인들을 무덤에 보내 지키게 했고, 하루 종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찌 참된 안식이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이들에게도 참된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제자들은 사랑하던 선생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메시아로 고백하고 믿었던 분을 배신한 죄책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모인 곳의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형 이후에 예루살렘의 분위기가 어떻게 될까 염려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서지도 않았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아닌 일반 주민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 모두도 안식일이 되었을 때 하던 일을 중단하고 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참 안식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의 집에서는 아이가 아파 고통 받았을 것이고, 어떤 집에서는 가족이 죽었을 것이며, 어떤 집에서는 분노로 가족 간에 갈등을 빚었을 것입니다. 그 날은 이름은 안식일이어서 모든 일을 그치고 쉬고 있었지만, 참된 안식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짓 안식이 끝난 다음 날 새벽 온 세상에 진정한 안식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진정한 안식은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죽음이 예수님의 부활로 극복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죽음은 사람을 위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책감에 몸부림치던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그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거짓된 안식에 속고 있는 사람들에게 참된 안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진정한 안식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거짓 안식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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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그는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 예수의 부활은 필연적인 사건이기에 그는 부활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어 - 우리는 어떤 사건을 두고 말할 때에 세가지 면에서 생각한다. 첫째는 불연성이다. 그런 사건이 일어날리가 있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은 개연성이다. 그런 것 같기는 하나 확실하진 않다는 것이다. 셋째는 필연성이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필연적인 사건이다. 그는 부활하실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는 왜 부활하셔야 했는가. 첫째 이유는 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 하셔야 했다. 그는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몇번이고 “내가 죽임을 당할 것이나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놓고서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하자 그는 사기한이 되고 말지 않는가. 그는 그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 두번째 이유는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그가 사역하실 때에 가장 심각한 논쟁의 초점은 그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했던 점이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롬 1:3) 세번째 이유는 그에게 속한 성도의 부활을 성립시키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고전 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부활하셨고 그에게 속한 성도들도 따라서 부활하게 된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고전 15:22~23) 네번째 이유는 진리는 결국에 가서 이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부활하셔야 했다. 만의 하나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진리가 비진리에게 패한 것이 되고 빛이 어두움에 삼킨 것이 되고 생명이 사망에게 정복당한 것이 되고 말지 않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마침내 이기고 만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필연적으로 부활하셔야 했다. 다섯번째 이유는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으므로 당연히 부활하여 영광을 얻으셔야 했다. (눅 24:25~26) 바울은 말하기를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고 했다. (빌 2:6~10) 그는 어느 면으로 보든지 당연히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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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2
  • [목회자 칼럼] 탈진과 회복(12)
    사람들은 과거를 묻기 좋아한다. 과거의 실수를 따지기 좋아한다. 어떤 사람의 과거를 알게 되면 그것을 무슨 큰 비밀이라도 손에 넣은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소문내기를 좋아하는 참으로 나쁜 본성이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엄격하고 하나님보다 더 의로운 자들이다.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한채 정죄하고 비난하고 상처를 가한다. 즉 그 사람을 두 번 세 번 계속 죽이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행위인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겠으나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는 정말 이런 위험한 습관은 진지하게 반성하면서 철저히 고쳐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하셨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용서하지 않고 거듭 정죄하고 비난하므로 말미암아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탈진한 사람,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의 회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무기>들이 있다. 입에 담기조차 무섭고 끔찍한 말 가운데 <살상무기 殺傷武器>라는 말이 있다. 핵무기, 독가스, 세균戰이라는 단어는 정말 미련하고 야만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타락한 인류사회>에는 이런 치명적인 무기들이 여러 나라들에 무수히 준비되어있다. “사람을 살리라. 쓰러져가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이거늘 이와는 정반대로 치닫는 인생을 보면 우리 인생이 <타락한 원 조상 아담>의 후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세상의 살상무기 못지않게 사람을 죽이는 또 다른 치명적인 무기(A Deadly Weapon)들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다. 바로 우리의 입 속에 가지고 있다. 1. 조롱하기 전설적인 권투선수 무하마든 알리(본명 캐시어스 클레이)는 상대 선수를 기어이 이기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전술들을 사용하였다. 그 중 하나가 <나비같이 날아서 벌 같이 쏜다> 였다. 실제로 알리 선수는 링 안에서 쉬지 않고 뛰어다닌다. 그의 발걸음은 헤비급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경량급 선수처럼 가볍고 산뜻하기 그지없었다. 링 안에서 이쪽으로, 저쪽으로 방향을 연신 바꾸어 가면서 움직이고 뛰니까 상대방 선수는 도무지 알리를 잡을 수 없다. 주먹을 휘둘러 보았자 계속 헛손질일 뿐이다. 그리고 하도 알리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다니니까 상대선수는 눈이 피곤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점점 신경질이 나면서 마음이 흐트러진다. 알리를 쫓아다니다가 마침내 스스로 힘이 빠져버린다. 제 풀에 지쳐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혼란에 빠지고 싸울 의욕을 잃어갈 때 알리 선수의 그 빠르고 폭발적인 주먹이 거침없이 날아 들어온다. 그 결과 대부분의 선수들은 몸과 마음이 혼란스러워져있는 상태에서 한 방을 맞으니 맥없이 주저앉아 버린다. 무하마드 알리는 숱한 승리를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버리는> 이 전법(戰法)으로써 수많은 도전자들을 때려눕혔다. 그러나 무하마드 알리가 거둔 무수한 승리의 전법 중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그 전법이야 말로 <치명적인 무기 A Deadly Weapon>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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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교회법률상식]교회 정관, 총회헌법과 상충되면 효력 없어
    -당회장과 장로 2분의 1의 출석으로는 당회 개회도 할 수 없어 -장로 3인 이상인 당회는 장로 과반수이상 출석해야 개회 성수 교계의 언론에 보도된 신문 기사를 읽는 중에 모 교회의 정관 제9조(당회의 의사 및 의결 정족수)에 “당회의 결의는 당회장과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과 출석회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 상위법우선의 원칙에 반한 헌법과 상충된 규정 모 교회 정관 중에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은 상위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장로 과반 수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과 상충된다. 그러므로 모 교회 정관 제9조는 “규칙은 헌법을 우선하지 못하고, 치리회의 결의는 규칙을 우선하지 못하고, 노회 결의는 총회 결의를 우선하지 못하고, 당회 결의는 노회 결의를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규정이요, 만일 시행했을 경우에는 결의무효 소송의 법적 시비가 다분한 규정이다.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면 모 교회의 정관 제9조에 “당회장과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은 교회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규정한 “당회에 …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와 당회장(필자 주: 목사 1인은 당회장을 의미함)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는 내용과 정면으로 상충되기 때문에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규정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장로가 과반수가 출석하였을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장로 2분의 1이 출석하여 결의한 모든 안건은 헌법에 규정한 과반수의 출석이 아닌 2분의 1이 출석하여 개회하였기 때문에 개회 성수에 미달된 회원의 출석으로 개회하여 안건을 처리한 것은 불법 결의라는 말이다. 2. 실정법상 법정 시비가 다분한 규정 이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는 실정법상으로 교회에서는 교회 헌법을 상위법으로 인정하지만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 헌법보다 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것이 판례에 의한 현실이기 때문에 교회 내부에 혼란이 야기될 것은 기정사실이다. 즉 본 규정에 의한 법정 소송이 야기되었을 경우 교회 재판에서는 장로 2분의 1의 출석으로 당회를 개회하여 안건을 처리한 사건은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규정한 “장로 과반수의 출석”에 반하는 장로 2분의1이 출석하여 불법 당회를 하였으므로 무효로 처리 된다. 그런데 이에 불복하고 당회가 교회 정관에 의한 합법을 주장하면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면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 정관을 우선하여 당회의 결의를 정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허다하여 교회에 혼란과 막대한 손실을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3. 결론 본건에 관하여 모 교회는 교회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을 “장로 과반수의 출석”또는 “장로 과반 수 이상의 출석”으로 조속히 개정해야 하고 차제에 정관 전체를 검토하여 교회 헌법과 상충되는 조항은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개정하거나 폐기하고 헌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바람직하다하겠다. 만일에 모 교회가 이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는 노회가 지도하여 교회로 하여금 이미 알려진 교회 정관이 헌법과 상충되는 부분은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개정하도록 선도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각 교회들과 노회와 총회 역시 헌법과 상충되는 모든 정관이나 규칙은 반드시 개정해야 하고 헌법과 상충되는 결의를 해서도 안 된다. 교계의 언론에 보도된 신문 기사를 읽는 중에 모 교회의 정관 제9조(당회의 의사 및 의결 정족수)에 “당회의 결의는 당회장과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과 출석회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 상위법우선의 원칙에 반한 헌법과 상충된 규정 모 교회 정관 중에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은 상위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장로 과반 수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과 상충된다. 그러므로 모 교회 정관 제9조는 “규칙은 헌법을 우선하지 못하고, 치리회의 결의는 규칙을 우선하지 못하고, 노회 결의는 총회 결의를 우선하지 못하고, 당회 결의는 노회 결의를 우선하지 못한다.”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규정이요, 만일 시행했을 경우에는 결의무효 소송의 법적 시비가 다분한 규정이다.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면 모 교회의 정관 제9조에 “당회장과 치리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이라는 규정은 교회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규정한 “당회에 … 장로 3인 이상이 있으면 장로 과반수와 당회장(필자 주: 목사 1인은 당회장을 의미함)이 출석하여야 성수가 된다.”는 내용과 정면으로 상충되기 때문에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의하여 시행할 수 없는 규정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장로가 과반수가 출석하였을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장로 2분의 1이 출석하여 결의한 모든 안건은 헌법에 규정한 과반수의 출석이 아닌 2분의 1이 출석하여 개회하였기 때문에 개회 성수에 미달된 회원의 출석으로 개회하여 안건을 처리한 것은 불법 결의라는 말이다. 2. 실정법상 법정 시비가 다분한 규정 이에 관한 현실적인 문제는 실정법상으로 교회에서는 교회 헌법을 상위법으로 인정하지만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 헌법보다 교회 정관을 우선하는 것이 판례에 의한 현실이기 때문에 교회 내부에 혼란이 야기될 것은 기정사실이다. 즉 본 규정에 의한 법정 소송이 야기되었을 경우 교회 재판에서는 장로 2분의 1의 출석으로 당회를 개회하여 안건을 처리한 사건은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헌법 정치 제9장 제2조(당회의 성수)에 규정한 “장로 과반수의 출석”에 반하는 장로 2분의1이 출석하여 불법 당회를 하였으므로 무효로 처리 된다. 그런데 이에 불복하고 당회가 교회 정관에 의한 합법을 주장하면서 세상 법정에 소송을 제기하면 세상 법정에서는 교회 정관을 우선하여 당회의 결의를 정당한 것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현실적으로 허다하여 교회에 혼란과 막대한 손실을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3. 결론 본건에 관하여 모 교회는 교회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장로 2분의 1 이상의 출석”을 “장로 과반수의 출석”또는 “장로 과반 수 이상의 출석”으로 조속히 개정해야 하고 차제에 정관 전체를 검토하여 교회 헌법과 상충되는 조항은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개정하거나 폐기하고 헌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바람직하다하겠다. 만일에 모 교회가 이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는 노회가 지도하여 교회로 하여금 이미 알려진 교회 정관이 헌법과 상충되는 부분은 헌법과 상충되지 않도록 개정하도록 선도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각 교회들과 노회와 총회 역시 헌법과 상충되는 모든 정관이나 규칙은 반드시 개정해야 하고 헌법과 상충되는 결의를 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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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성공칼럼] 두 개의 돌판
    하나님과 사람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람이 생명을 얻으며,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며, 모든 관계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갈라지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제물이 갈라지고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지고 반석이 갈라지고 성막이 갈라지는 것이 나온다. 그 갈라진 그 사이에 하나님이 지나가시고, 하나님이 지나가시면 모두가 사는 일이 생기고, 자유와 기쁨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두 돌판 위에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한 돌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 다른 한 돌판은 생활 속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계명은 반드시 두 돌판이 모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하나 됨은 깨지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내용 중에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 것이며 자신을 위하여 우상이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과 진리가 둘 일 수는 없다. 생명의 근원과 진리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이 하나를 잃으면 그 즉시 죽음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상이나 자연에게 복을 빌면서 섬긴다고 하자. 조상을 섬기는 것, 자연을 섬기는 것, 심지어는 사람이 만든 돌이나 사람이 만든 그림에게 절하는 것 등은 생명의 근원을 버리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상이나 해와 달, 별은 존재자체가 감사한 일이지만 숭배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다. 피조물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해서 그 생명이 피조물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것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리면 당장은 괜찮아 보일지라도 조금 있으면 죽음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돌판의 내용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생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게 된다. 사랑하면서 악을 행한다면 이것은 사랑한다는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 것이다. 사랑에 어찌 거짓과 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악한 행동 속에는 그 어떤 신의 본성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며 선이기 때문에 선한 말과 선한 행동에서 사랑, 기쁨, 진리가 드러나고 생명력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십계명에서 내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세상의 모든 선을 농축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는 드릴 돈이 없다고 하면서 교회에는 헌금을 하고, 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이것은 제 5계명을 어기는 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기부금을 내거나 교회의 봉사와 모든 예배에 참석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생활 속에서 악을 행하면 아쉽지만 하나님과의 하나됨은 깨지게 되는 것이다. 행복한 결혼에도 사랑과 선, 이 둘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하는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마음속에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둘 사이에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마음에 두면 당연히 결혼은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에 표정이 화가나 있거나 말이 거칠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악이 있으면 이 관계는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의 삶이 다하면 가게 되는 천국과 지옥이란 어떤 곳이며 어떤 사람이 가는 곳일까?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며, 지옥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천국과 지옥은 이미 내 삶속에서, 부부 생활 속에서, 이웃과의 만남 속에서 만들어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고 있는가? 이 두 개의 돌판을 늘 가슴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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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은혜의 말씀] 일상의 영웅 (열왕기상 17:1~7)
    일상의 기적, 일상의 기쁨, 일상의 행복, 일상의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기적과, 축복과, 대박을 좋아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종합비타민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매일 만나를 주시는 그저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시는, 무슨 보약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삼시세끼 밥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신다는 말씀입니다. 위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 엘리야를 인도하시는 방법은 아주 소박하게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엘리야의 도피과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계속 피난을 가는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17:3~4} 하십니다. 날이 가물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먹을 게 없으니 시냇가에 숨기고 거기서 강물을 먹게 하다가 까마귀를 시켜서 음식을 공수해줍니다. 가을 추수를 하고 모두 거두어들이는 게 아니라 남은 자들, 나그네와 들짐승을 위해 남겨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작은 것으로 연명하게 하셨습니다. 8절부터 보면 사르밧 과부 집에서 얹혀서 삽니다. 과부 집에 가서 기름 한 병 남고 밀가루 조금 남은 그 집에 빌붙어 연명을 하고, 그러다가 엘리야가 부름 받았을 때는 무너진 재단을 수축하는 하찮은 일을 하고, 모든 사람이 바알에게 무릎 꿇었을 때 엘리야 혼자였습니다. 중간에 이세벨이라는 악한 여인으로 인해 공황장애가 일어나듯이 큰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물 한 병과 떡 하나를 가지고 엘리야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실망하고 낙심에 빠져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십니다. 엘리야가 마지막 죽었을 때는 하나님이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을 타고 산채로 데려가십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난 뒤에 이 땅에 남는 엘리야의 유산이라고는 겉옷하나가 달랑 남았습니다. 엘리야가 위대한 종으로 쓰임 받았지만 그가 이 땅에 남긴 것은 헌옷가지하나뿐입니다. 겨자씨운동, 큰 숲 운동이라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게 겨자씨인데 설탕알갱이 정도로 작고, 우리나라에는 담배씨앗이 있습니다. 담배씨앗이 겨자씨하고 비슷합니다. 눈에 보일락 말락 아주미세한 씨앗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묘목을 거쳐서 그게 큰 나무가 되고 많이 자라면 3.8㎜까지 자랍니다. 그게 모여졌을 때 숲이 되고 이게 모여 큰 숲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달란트비유의 핵심은 작은 일에 어떻게 대하느냐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많은 일을 맡기시는 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대박을, 큰 것을, 센 것을 원하고 오늘날 성도들이 헛된 욕심이 많아서, 한판뒤집기를 노려 생활은 대충하고 축복은 크게 받기를 원하는 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수퍼맨 같은 위대한 종을 만드시는 게 아니고 생활현장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승리하는 일상의 영웅을 주문하신다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때그때 아침마다 새 힘을 주시고 하루하루 승리하게 하시는 일상의 리더, 일상의 인도자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설은 끝나고 기본으로, 다시 ‘현장으로 나아가자’ 우리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었지만 그 상태로 머물러 계시지를 않습니다. 다시 힘든 세상으로 어려운 일터로 내려가셨듯이 우리는 다시 현장으로 나아가고, 다시 복음으로, 다시 사랑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일상의 기쁨, 일상의 행복, 일상의 영웅, 생활의 달인이 되어야합니다. 일상에 승리하기 위해서 오늘도 은혜 받고, 주일날 예배드리면서 힘을 얻어 하루를 감당하고, 하루가 모여 세월이 되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일상의 승리자, 생활현장에서 승리하는 사소한 것에서 진검 승부가 나타나는 생활의 달인, 일상의 삶 속에서 영웅적인 삶을 살고, 작은 것을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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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교회회계]복식부기 시스템 도입을 통한 교회회계 패러다임의 변화, 가능할까?
    섬기는 교회에서 5년째 회계업무를 맡고 있다. 또 대학에서 10년이 훨씬 넘게 학생들에게 회계학을 가르치고 있다. 회계(會計,accounting)란 무엇일까? 또 이 시대 한국교회에 필요한 회계의 역할은 무엇일까? 돈의 흐름을 파악, 결산?보고를 한다는 점에서는 교회회계든 기업회계든 큰 차이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기업에서 사용하는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를 교회에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3년 11월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안)’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즉 199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회계기준’이 단식?복식부기 구분 없이, 수입?지출의 발생이 차년도에 영향을 미치면 경상수지, 그렇지 않으면 자본수지로 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개정안은 예결산총액이 10억원 이상인 교회를 대상으로 복식부기를 도입, ‘재무상태표, 운영성과표, 현금흐름표’와 같은 재무제표를 작성하도록 권면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본 칼럼은 총12회 연재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단식부기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던 교회회계를 복식부기 시스템으로 전환할 경우, 필요한 여러 문제와 해결방법들을 실무적 관점에 제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단식부기는 현금주의 개념에 따라 수입?지출을 자금수지계산서에 기록하고, 편성된 예산이 잘 집행되어졌는가를 주로 검증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수입?지출의 발생 원인은 물론, 미래 교회 자산?부채 관리에 미치는 내용을 표시하지 못하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그에 비해, 복식부기는 다음과 같은 효과가 있음이 기업회계를 통해 이미 검증되었다. 첫째, 수입?지출 중 차기이후에 미치는 영향이 자산ㆍ부채로 집계되어 교회의 재무상태를 명확히 함은 물론, 연도별 비교를 통해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재산관리와 예산편성을 가능하게 한다. 둘째, 선교, 건축, 장학, 퇴직금 등 특수목적의 기금을 재무상태표에 표시하여 회계 투명성을 높이고, 내부통제제도 효과를 증가시킨다. 셋째, 발생주의 원리에 따른 신용거래, 손상차손, 감가상각, 공정가치 평가 등의 회계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넷째, 자금수지계산서 잔액과 재무상태표 차기이월의 일치를 확인, 회계처리 검증가능성을 높이고 재무제표간의 관련성을 높일 수 있다. 교회회계에 대한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 교회(church)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과 달리 이윤동기도 없고, 개인에 의한 소유나 지분청구권도 없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공동체로서, 그에 사용되는 재산이나 헌금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으로 정의한다면, 교회 지도자와 회계담당자는 이를 맡은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해 효율적으로 재산관리가 이루어지고 또 보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교회마다 필요한 내부통제제도를 확립하고,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가 이루어지도록 협조되어야 할 것이다. 본 칼럼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2013년에 만든 ‘교회회계와 재무처리기준’을 기초로 복식부기 시스템을 설명해 갈 것이다. 또한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Microsoft사의 Excel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운영성과표와 재무상태표를 작성할 수 있는 매뉴얼을 제시할 수 있도록 검토해 갈 예정이다. 위 회계기준은 우리나라 회계 제정기관인 한국회계기준원이 발표한 ‘비영리조직 회계기준’을 수정하여 만든 것으로, 교단을 넘어 앞으로 교회회계의 방향을 제시해 가는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규모에 따른 비용부담도 크게 관계가 없으므로 개척교회로 특별히 열악한 상황에 있지 않는 한, 많은 교회 지도자와 회계담당자가 관심을 갖고 동참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음호는 교회회계 복식부기 시스템의 구체적인 기본원리에 대해 설명을 한다. <문의 sblee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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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시사칼럼] 지도자론 소고(小考)
    우루과이 남서부에 헤랄드 아코스타(Gerald Acosta) 씨는 정초부터 운이 나빴습니다. 5일 아침에 출근했다가 신분증 기간 만료로 작업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화도 나고 걱정도 되고 게다가 날씨까지 왜 이렇게 찌는지, 할 수 없이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았지만 야속하게도 아무도 차를 태워주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낡은 관용차가 한 대 섰습니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비어 있는 뒷자석에 탄 아코스타 씨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조수석에 유명한 루시아 상원의원이, 그리고 운전석에는 그녀의 남편 호세 무히카(Jose Mujica) 씨가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우루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올 해 2월 말로 임기를 마친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립니다. 독재에 저항하다 14년을 감옥에 갇혀 있기도 했던 그는 대통령 취임 직후 관저(官邸)를 노숙인 쉼터로 내놓고 해안에 있는 대통령 별장도 팔아버렸습니다. 그 날 아코스타 씨를 태워주었던 관용차 역시 20년 째 몰고 있는 자기소유 차량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거주하던 수도 외곽 낡은 주택에서 손수 운전하며 출퇴근했던 이 소박한 대통령은 월급의 2/3 이상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면서, 재임 기간 동안 연평균 성장률 5%, 국민소득 16,000 달러에 국가 부패지수 21위 등 모두 남미 최고를 기록하며 취임 시보다 훨씬 높은 지지율과 국민들의 존경 속에서 퇴임했습니다. 같은 달 중순, 미국의 민간 우주항공업체 스페이스X와 해양대기국(NOAA)은 디스커버 위성을 쏘아 올렸습니다. 여타 위성과 달리 지구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인 160만 km 지점에서 ‘블루 마블(Blue Marble)’이라 불리는 지구 전체의 사진을 찍어 전송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위성에는 ‘고어의 위성(Gore Sat)’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1998년 미국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Al Gore)가 재임 당시 “아름다운 지구 전체의 모습을 담아 24시간 내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면 환경의 소중함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시작했던 프로젝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당시에도 수익성 문제로 인기가 없었고, 이후 부시(G. W. Busch) 정부에서는 예산 낭비라는 이유로 아예 백지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17년 만에 쏘아 올린 이 위성은 인기나 당리당략을 초월한 한 정치인의 혜안(慧眼)이 결국 옳았음을 증거합니다. 같은 시기 대한민국은 총리후보자 검증 문제로 온 사회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지 어언 15년째, 그러나 공직후보자들의 수준은 발전은커녕 퇴보한 것이 아닌가 우려스러울 정도입니다. 도입 초기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중요한 시금석이었던 ‘위장전입’은 정치적 면죄부를 받은 지 오래입니다. 부동산투기나 병역기피는 진부적인 정치적 상투어 정도로 희석되었습니다. 대의(代議)의 주체인 국민들의 의사보다 당론(黨論)이 우선하는 현상도 한결같습니다. 아, 우리는 언제쯤 “삶에는 가격이 없다”며 검소한 삶을 실천하는 지도자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쯤이면 개인적인 영욕(榮辱)이나 당리당략(黨利黨略)이 아니라 국가의 대계(大計)와 민족의 미래(未來)와 자유와 정의와 환경과 같은 지순(至純)한 가치들을 위해 매진하는 지도자를 목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동전 한 닢도(마 17:27) 옷 한 벌도(요 19:23) 소유하지 않은 담백함과, 하나님 나라의 큰 뜻을 위해 희생하는 참지도자의 전형(典型)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사모하며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사회의 지도자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 산다면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바울이 자비량으로 선교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까닭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였지만(행 20:34; 고전 9:12; 살후 3:8), 결국 소박하면서 대의를 위해 사는 그 모습이 아시아와 유럽을 바꾸고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 땅에 사는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 그런 지도자 하나쯤을 기대하는 것은 망상입니까 아니면 소망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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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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