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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연해주를 울린 아리아
    최근에 연해주를 방문하였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는 해가 아니던가.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발원지요 최초로 임시정부가 세워진 곳이다.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여 맨 먼저 최재형 선생이 처형당한 곳을 찾았다. 최재형, 그는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배고픈 환경을 극복하고 연해주의 드림을 꿈꾸며 포시에트 항구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배고프고 허기져서 항구에서 쓰러졌다. 바로 그 쓰러진 꼬마를 러시아의 한 선장 부부가 발견하고 양아들로 삼는다. 그런데 최재형은 천재였다. 러시아 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잘하는지 자라서 러시아 군의 통역관이 된다. 그는 천재일 뿐만 아니라 민족애와 조국애가 가슴을 사무치게 하였다. 그래서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들에게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면 자기가 러시아 군에 팔아주겠다고 고무시켰으며 약속대로 군납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이익금의 대부분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해 주었다. 특별히 안중근 의사의 모든 독립활동을 지원해 주고 무기를 사서 독립군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있는 한인들을 결집해서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일본이 독립군들이 어떻게 넉넉하게 활동을 하는가, 의아해서 조사를 해 보니까 뒤에 최재형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가 최재형을 새벽에 잡아다가 우수리스크에 있는 소베스가야 언덕으로 끌고 가서 처참하게 처형을 하였다. 나는 먼저 최재형이 처형당한 언덕을 찾아갔다. 바로 그 옆에는 우수리스키 감옥이 있었다. 그 감옥에는 한 독립군이 잡혀서 갇혔다고 한다. 그 언덕은 건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념비 하나도 없었다. 아직도 흰 눈이 쌓인 언덕이었다. 기억을 하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만 알고 있지 아무런 글자 하나 새겨지지 않았다. 나는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서 기념비를 세워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그 언덕에 서서 생각해 봤다. “과연 대한민국 사람들 가운데 누가 얼마나 최재형선생을 알고 있는가. 더구나 독립운동을 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을 누가 알겠는가. 최재형선생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피로 얼룩진 고난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고난과 수치의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만이 강하고 미래가 보장되는데 과연 우리는 지난 날 민족의 수치와 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박물관 동판에는“망각은 포로상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구원의 비밀이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는가. 안내를 하는 선교사에게 그가 처형당할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날 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혼자 상상해 보았다. 일본 헌병이 최재형 선생을 얼마나 짐승처럼 두들겨패고 어쩌면 개머리판으로 온 몸과 머리까지 내리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총살을 시켰을 것이다. 그때 최재형선생의 생각과 내뱉었던 말을 상상해 보았다. 특별히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니 나는 목사로서 이런 상상을 해 보았다. “하나님, 노비로 태어났던 몸이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마흔까지 일하다가 이렇게 죽게 된 것도 영광일 뿐입니다. 그리고 조선인이여, 광복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수치와 비극을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해야 광복의 영광을 길이길이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볼 때 마치 최재형 선생의 음성이 광복의 아리아처럼 소베스가야 언덕을 메아리치는 듯 했다. 연해주를 메아리친 아리아가 한반도를 울리게 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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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성서연구] 뜰 안과 뜰 밖(요 18:15-27)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후해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느냐>를 두고 논할 때 사람에 따라 차이가 많아 보입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안나스, 로마 총독인 빌라도, 백성의 장로들과 기타 지도급 인사들은 가장 책임이 많아 보입니다. 가룟 유다도 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죄가 무겁다고 생각됩니다. 이들 중에서도 빌라도는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했노라고 발뺌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군중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군중심리에 흥분되어 별 생각 없이 소리 질렀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에는 십자가 사건에 구경꾼이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은 소리를 지른 일도 없고 단지 구경만 했을 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어떨까요? 아홉 명의 제자들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도망했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두 명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 두 명중 한 명은 베드로요, 다른 한 명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요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익명의 한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뜰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잠시 후 베드로도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둘은 뜰 안의 제자였습니다. 그 둘은 일찍 도망한 아홉 명에 비하면 훌륭한 제자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둘은 뜰 안의 제자였습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평소에 <이 사람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주와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큰소리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결심을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뜰 안에까지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둘러싸고 청문회라도 열린다면 베드로는 그래도 제일 나아 보일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뜰 안에까지 갔으니 말입니다. <나는 저 사람들 보다는 낫지....>라고 자부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런 상대적 만족감에 도취되어 살고 있습니다.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 맛에 삽니다. 그리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본문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었습니다만, 다른 복음서는 이 장면을 다루면서 마지막에 닭 울음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베드로의 통곡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사람의 통곡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감만큼이나 큰 자괴감이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즐기던 상대적 우수성이 볼품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데서 오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뜰 밖의 아홉 제자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된 결과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아홉 제자보다 더 간사하고 악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뜰 안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뜰 안과 뜰 밖이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뜰 안에 있었다고 자랑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이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특정인들을 거명하기도 하고, 특정 교회를 들먹거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자신은 무죄임을 은근히 주장하는 것 같아 보기 민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오늘의 어려움에 대해 우리 모두는 공범입니다. 본문의 익명의 한 제자는 누구입니까? 요한이라고 추측을 해 보지만, 그런 추측은 무익합니다. 차라리 익명의 그 한 제자가 우리 자신이라고 고백합시다. 우리 자신도 상대적 만족감에 심취해 왔으며, 교만했으며, 실제로는 조금도 나을 게 없었음을 자인합시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다 죄인일 뿐입니다. 다른 이를 향해 돌을 던지지 말고,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회개하면서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태도야말로 한국교회와 우리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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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함께 생각해 봅시다] 코엑스 사거리에 ‘봉은사역’이라니
    코엑스 사거리에 ‘봉은사역’은 말도 안돼 지금이라도 고쳐 ‘코엑스역’이라고 해야 오는 3월 28일 개통되는 서울지하철 9호선 2단계 구간 929정거장 명칭이 ‘봉은사역’으로 확정되어 논란이 크게 일고 있다. 이유는 서울시가 929정거장에서 매우 가깝고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코엑스 대신 더 먼 곳에 있는 특정 종교시설 이름으로 역명을 정했기 때문이다. 봉은사역이 들어서는 곳은 왕복 12차로 도로가 나 있는 코엑스 사거리다. 코엑스 사거리는 코엑스와 바로 연결되어 있고 봉은사는 120미터 떨어져 있다. 서울시의 역명제정기준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고 해당 지역과 관련성이 뚜렷하고 지역 실정에 부합하는 명칭으로 한다고 돼 있다. 이 기준에 따른다고 하면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은 당연히 ‘코엑스역’이라고 칭해야 한다. 코엑스는 연 평균 5천만 명이 드나들고 국제적 회의와 박람회 등이 연간 3천건 넘게 열리는 주요 시설이 아닌가. 그런데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을 ‘코엑스역’이라고 하지 않고 일개 절간 이름으로 ‘봉은사역’이라고 하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어쩌면 불교신도 중에서도 어떤 이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서울시의 처사이다. 서울시는 봉은사가 강남을 대표하는 전통사찰이고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역명을 ‘봉은사’라고 정했다고 한다. 강남구청은 두차례 설문조사 후 서울시에 ‘봉은사역(코엑스)’, ‘코엑스역(봉은사)’을 추천했지만 서울시는 ‘코엑스’를 괄호안에 넣는 것도 거부하고 ‘봉은사역’이라는 단독명칭으로 확정했다.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국교회 주요 연합기관인 한기총과 한교연이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봉은사 역명을 바꾸지 않으면 범기독교적으로 행정불복종운동을 펼치겠다고 천명했지만 반응이 있겠는가. 지난해 12월 강남구청이 주민센터를 통해 수렴한 주민들의 역명칭 선호도 조사 결과는 ‘코엑스역’이 1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주민들의 여론도 묵살하고 ‘봉은사역’이라고 확정한 서울시가 기독교가 반대한다고 ‘봉은사역’을 ‘코엑스역’이라고 개정하겠는가. 박원순 서울시장은 알려진대로 불교학생회 출신이고 여러 불교단체의 자문위원이었고 뿐만아니라 여러 모임에서 발전방안을 제시하였고, 여러 불교상을 받았으며 한국 불교계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14인 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었고 봉은사 미래위원장을 맡아 4년간 역임했다. 그러니 어찌 ‘코엑스역’으로 되겠는가. 그러나 단호히 말하거니와 코엑스 사거리에 들어서는 역은 마땅히 ‘코엑스역’으로 개정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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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목회자 칼럼]“en Christus”
    “en Christus”는 바울 신학의 핵심중의 하나이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이다. 그 신학은 주님에게서 비롯된다. 주님은 사복음서 여러 곳에서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이렇게 나타내셨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리고 제자들의 열매 맺는 삶과 기도 응답의 비결은 그런 관계에서 나옴을 강조하셨다. 요15:5, 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 “en Christus”가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해 핵심적인 기독교리로 신학화 되었다. 그가 여러 교회에 보내는 모든 서신서에서 “en Christus”는 수도 없이 나온다. 3년 전 성경 66권중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매일 새벽마다 묵상 중이었다. 난해하다는 책인데, 당시 묵상 중에는 왜 그리 흥미롭고, 재미있고, 은혜로운 말씀으로 읽혀지는지, 많은 은혜를 받은 적 있다. 나의 성경책, 요한계시록 빈 여백에는 이런 저런 나의 묵상의 글들로 가득 채워져 나갔다. 특히 어느 한날 새벽 묵상에서 계14:13의 말씀이 전날 하루 동안에 일어난 사건들과 오버랩 되면서 큰 은혜가 되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전날 오전 8시 30분, 특별한 장례예배를 인도했다. 주일 단칸방에서 심장마비사, 그 다음날 그 집을 방문한 보호인에 의해 발견, 119로 마산의료원으로 후송, 일가친척이 없음으로 빈소 없이 시신안치소에 보관, 그리고 어제 발인예배 후 화장터로 이동한 장례였다. 고인의 가난한 삶, 고독한 삶, 유별난 성격을 알기에 나의 가슴은 저려왔다. 그 자리에 참석한 10여명의 성도들의 마음도 동일했을 것이다. 故 최봉애 집사(86세), 세상적으로 보면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말년에 교회에 나와 주님과 교회와 벗 하면서 지내시다가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주안에서 임종을 맞으신 것이다. 눅16장에서 주님이 들려주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생각난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자의 인생은 부러운 인생, 거지 나사로의 인생은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주 밖에서 죽은 부자는 불쌍한 인생, 주 안에서 죽은 나사로는 행복한 인생이었다. 한가지 놀랍고 감동적인 일은 몇 주 전에 고인께서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셨는지 2004년부터 시작한 “성전건축매월구좌헌금”(2004년~2011년)봉투 8개를 가져 오셨다. 봉투마다 한번의 빈 공란 없이 12개월 수납도장으로 가득 찍혀있었다. 너무도 귀한 유품이었다. 오후에는 김선엽 집사의 전도로 몇 개월 전에 등록한 이순옥 성도의 시어머니(90세)가 위독하여 집중실에 입원해 있는 요양병원으로 심방을 갔다. 감사하게도 믿는 분이시고, 아직은 소통이 가능한 상태라 다시한번 신앙을 확인 할 때에 “아멘”이라고 화답함을 보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에 해당되는 분이여서 이순옥 집사와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 저녁에는 이경숙(김충기)집사의 고성에 사시는 부친(82세)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고성병원에서 진주 경상대병원으로 응급치료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늦은 시간에 이 집사와 통화의 시간을 가졌다. 전화에서 슬피 울며 들려오는 첫 마디는, “목사님, 지금 아버지가 위독하신데 동생들은 다 전도했는데 여태껏 아버지를 전도하지 못했어요. 그것이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살아 생전에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며 중요한 것인가를 아는 성도의 가장 큰 슬픔의 이유다. 다음날 아침 전화통화에서 지난 밤 사이에 별세하여 마산 영락장례식장에 안치되고 남동생 부부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장례를 주관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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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교회법률상식]합동총회 유령 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에 없는 위원회는 활동 못해-종결된 사건에 “화해수습처리위원회”는 어불성설 제98회 총회가 황해노회 동산교회 건으로 최성용 씨가 상소한 상소 건에 대하여 “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2013)” p.85에 “특별재판국을 설치하기로 가결하다.”라고 결의하고 다시 재판하여 보고하도록 위탁하였다(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pp.229-230 참조). 특별재판국은 총회가 다시 재판하여 보고하라고 맡긴 최성용 씨의 상소 건을 판결하고, 제99회 총회에 보고하니 총회는 “주문(최성용 씨와 최정환 씨가 황해노회 원심재판국을 상대로 상소한 상소 건은 기각한다.)대로 받기로 가결하다(제99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 p.63).”로 채용하여 종결하였다. 그런데 제99회 총회 중에 박창복 목사 외 117명이 “황해노회 소속 동산교회 건 특별재판국 불법 설치 및 결의에 대한 조사처리위원회 설치의 건”이라는 긴급동의 안을 서기에게 교부한 후 서기와 일부 총대들이 “긴급동의 안!”이라고 세 번이나 회장에게 제안하였으나 회장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받아들이지 아니하였고 결국 총회가 파회됨으로 긴급동의 안은 자동 폐기되어버렸다. 그러나 총회임원회는 “잔무는 임원회에 맡기고 파회하기로”하였음을 빙자하여 이미 폐기된 긴급동의안도 잔무라고 하면서 2014.11.25일에 대전중앙교회당에서 임원회를 개최하여 여러 건의 긴급동의 안을 다루는 중에 동산교회 관련 긴급동의 안에 대하여 “박창복 목사 외 117명이 긴급 동의한 황해노회 소속 동산교회 건 특별재판국 불법 설치 및 결의에 대한 조사처리위원회 설치의 건은 이미 본 총회가 특별재판국의 판결을 채용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황해노회 동산교회 화해조정위원으로 부총회장 2인과 회계를 선임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결의대로 2015.12.8일에 모임을 갖고 위원장 박무용 목사, 서기 이호영 장로, 회계 서병호 장로로 조직하고 임원회에서는 “화해 조정위원회”라 명명하여 결의하였는데 위원회는 무엇이 부족했는지 “화해수습처리위원회”라는 명칭으로 둔갑하여 출석 요구서까지 발송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본 사건은 최종심인 총회가 특별재판국의 판결을 만장일치로 채용하였고, 사회법에 소송을 제기한 24건도 모두 승소하여 종결되었으니 더 이상 수습, 처리 등이 필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화해조정위원회”니 “화해수습처리위원회”니 하는 잠꼬대 같은 일을 꾸미려하는지 알 수가 없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총회임원회가 잔무를 처리하면 반드시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에 기록하는 것이 법인데 제99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2014)에는 “긴급동의안 처리”에 대한 결의 항목도 없고, 요람에 광명 동산교회 관련 “화해조정위원회”이든 “화해수습처리위원회”이든 간에 아무런 위원회도 없다. 그런데 “화해수습처리위원회”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이와 같은 행태를 두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또한 그 귀추가 어떻게 될지 자못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필자의 사견으로는 총회 결의 내용에도 없고 총회 조직에 대한 요람에도 없는데 활동은 하고 있으니 “유령 위원회의 활동”이라고 함이 적절해 보인다. 그럼 이에 관련한 최근의 역대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을 비교하여 살펴보자. 제97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2012) p.80의 “19. 조사처리”부터 p.83의 “23. 기타 가-라”까지는 정치부가 보고하지 못하고 남겨둔 채 “잔무는 임원회에 맡기기로 결의”하고 파회되었으므로 위의 정치부 보고서 PP.80-83에 기록되어 있는 잔무에 속한 그 안건을 임원회가 처리한 후에 제97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에 빠짐없이 기록하였고 p.89에는 “긴급동의안 처리” 항목을 기록하였으며 제98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2013) p.86에도 역시 “긴급동의안 처리” 항목이 기록되어 있다. 결론으로 제99회 총회 회의 결의 및 요람에 회의 결의 내용에 긴급동의안 항목이 기록되지 않았고 요람에도 역시 소위 3인의 “화해수습처리위원회”라는 조직도 없으며 교회법으로나 사회법으로도 완벽하게 종결된 사건이므로 수습할 일도 없고 처리할 사안도 없으며 수습이나 처리에 응해 줄 상대도 없으니 시간과 재정만 낭비하지 말고 유령 위원회의 활동을 중단하고 해산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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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성공칼럼] 나(Ego) 전쟁
    보스니아에 모스타르라는 다리가 있다. 이 지역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한 쪽은 이슬람, 한 쪽은 가톨릭이 함께 산다. 그런데 1993년에 이웃끼리 전쟁이 벌어져서 이 다리가 로켓포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아직도 가정집의 담에는 수 백, 수천의 총알이 박혔던 흔적이 남아있다. 함께 웃고, 함께 음식을 나누던 이웃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 30만 명이 죽은 것이다. 이런 전쟁이 왜 벌어졌을까? 누구 때문인가? 바로 나 즉 에고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곳에서 살았다면 나의 종교는 가톨릭 아니면 이슬람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도 나의 옳음을 주장하면서 나와 종교가 상대방을 향해서 총구를 겨누었을 것이다. 민족과 종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말이다. 모스타르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은 내 속에서, 우리 가정에서,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모든 전쟁은 나(Ego)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갈등과 전쟁은 나(Ego)를 없게 할 때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갈등과 서운함과 싸움 속에 에고가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의 갈등도 나(Ego) 때문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음으로 나(Ego)가 태어난다. 나는 아버지다. 나는 남편이다. 나는 누구다. 내가 했다. 내가 만들었다. 내가 옳다. 나만 옳다. 상대방이 나(Ego)를 인정하지 않으면 나는 화가 나고 서운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죽일 것이다. 등등의 나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 나(Ego) 때문에 나와 함께 있는 가족은 참아야 했으며 고통당해야 했다. 그들이 참지 않았으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이런 나 때문에 오랜 세월 참아준 아이들과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30년 된 친구들끼리 13일 동안 옛날 유고슬라비아 지역이었던 발칸지역으로 선교여행을 하고 왔다. 여행 중에 내 생각을 표현했는데 친구 한명이 내 생각을 공감하지도 않고 무시했다. 나는 불쑥 화가 났다. 나는 나를 무시한 친구가 밉고 꼴도 보기 싫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옳다. 내가 최고다, 나를 알아 달라...’ 이런 생각이 내 속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잡지 않으면 여행이고 뭐고 끝이 날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나(Ego) 때문에 본성을 잃고 있으며 상대방을 미워하며 제외시키고 있었다. 이런 에고 전쟁이 커져서 모스타르의 전쟁, 부부간의 전쟁, 종교전쟁, 세계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에고)는 허상이다. 모든 종교는 종교보다 종교성을 드러내야 한다. 종교의 본질은 사랑이며 기쁨이며 빛이며 생명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 속에서 사랑이 나오고 빛이 나와야 종교성이 있는 것이며, 누구든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 최고를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종교성을 갖고 있으면 상대방의 종교가 다르거나 나라와 민족이 다르더라도 본질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종교 때문에 갈등하고 미워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종교는 있지만 종교성은 잃어버린 종교 에고에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Ego)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커진다. 나(Ego)라는 것은 세상의 것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나(Ego)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반대가 된다. 모든 생명과 힘과 능력과 부의 근원은 나(Ego)가 아니며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Ego)가 근원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Ego)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도 반대가 된다. 나(Ego)를 사랑하는 것은 내 생각, 내 이익, 내 권력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나(Ego)가 악의 근원이며, 그 악 속에 악마가 있는 것이다. 내(Ego)가 없을 때 나는 주를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내(Ego)가 없기로 결정한다. 내(Ego)가 없으면 내 속에서 그 어떤 갈등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 속에 전쟁이 없으면 그 어떤 전쟁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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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은혜의 말씀]이제 가라(출애굽기3:9~12)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사람을 쓰실 때는 반드시 메시지, 명령(order),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말씀은 모세에게 ‘이제는 가라’는 명령(order)을 주십니다. 이제 가라는 말씀이 모세에게는 80년 만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모세를 모세답게 만드는데 80년이 걸린 것입니다. 이제는 때가 찼으니 애굽 땅으로 가 바로에게서 내 백성을 데리고 나와 가나안땅으로 가라는 액션(action.행동)을 명한 것입니다.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전환점이 ‘이제는 가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감독하시면서 명령(order)이 떨어졌고 행동(action)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 한 사람에게 계속 집중하시며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보게 됩니다. 시대마다 쓰실 때 닮은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창세기12장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시며 가야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떠나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디메오를 부르실 때에도 마가복음10장에서 자기를 지탱해온 유일한 재산목록1호인 겉옷을 벗어버리고 난 후에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그 들판(현장)에서 지극정성으로 양을 돌보았고 들판에서 다져진 전투적 근성이 전쟁터에서 승군 다윗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세도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칠 때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명령(order)을 주시고 그 사람의 소박한 일터에서 큰 사역을 부탁하시고 지도자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주실 때 보험도 같이 들어 주십니다. 모세에게 이제가라는 명령을 주신 후에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있으리라’(출3:12)고 하십니다. 모세가 죽고 난 후, 여호수아를 부르실 때도 같았습니다. 여호수아에게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1:9)고 하십니다. 소명이 사명이고, 사명이 수명이며, 부르심과 부담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할 것’이라는 보증을 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주와 함께 하는 것이 내 보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라’말씀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도전이 있습니다. 그 시절 최강의 민족이 포진해 있는 가나안땅에 가라고 하십니다. 현실의 한복판으로 쑥 들어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6:1)고 하시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마5:13)고 하십니다. 이제는 가십시오. 행동(action)으로 옮길 때입니다. 부딪히십시오. 이것이 오늘말씀의 핵심입니다. 모세가 보디가드나 군인이나 무기가 있어서 나간 것이 아닙니다. 마법의 지팡이도 아닙니다. 그저 막대기 하나 들고 나갔습니다.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최고 리더십의 시작은 하나님의 명령(order)에 순종한 것에서 부터였습니다.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 붙들고 어둠을 떨쳐버리고 일어나서 빛을 발하여 보석처럼 영롱하게 현실의 한복판으로 나가 당당한 하나님 사람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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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성경인물탐구]감옥 속에서 꿈을 해석한 요셉(4)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갇힌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는데, 이는 요셉이 바로의 총리대신이 될 준비 단계였습니다. 그 곳에서 요셉은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여 줌으로써 옥에서 나갈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전옥은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고 그에게 맡긴 것은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의 결과였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이 종살이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의 범사를 형통케 하신 것처럼 옥살이 하는 요셉에게 은혜를 베푸사 모든 일에 형통케 하셨던 것입니다. 전옥이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는 것은 요셉에 대하여 조그마한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신뢰하였음을 나타냅니다. 옥에 갇힌 자에게 다른 죄수를 맡기는 것은 탈옥이라는 불상사에 대한 위험 부담이 따라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곧 전옥은 자신의 생명을 요셉에게 맡긴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요셉은 그 정도까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신뢰는 인간의 마음으로 갖기 어려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전옥의 마음을 감동시키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어 지켜 보호하시며 그 길을 인도하셔서 형통케 하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 나이다'(시 23:3-4). 요셉이 갇혀 있던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는데, 요셉이 갇혀 있을 때에 바로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시위 대장은 요셉에게 그들을 위하여 수종을 들도록 시켰고 요셉이 그들을 수일 동안 섬겼습니다. 하루는 그들 둘 다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의 뜻을 알 수가 없어 근심에 싸였습니다. 그때에 요셉은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말하면서 자신에게 꿈을 고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먼저 요셉에게 꿈을 말하였고 그 다음에는 술 맡은 관원 장이 꿈을 말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꿈에 대한 해석을 해주었습니다. 사흘 안에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되어 바로 앞에서 술을 따르게 될 것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또 떡 맡은 관원 장에 대한 요셉의 해석은 사흘 안에 바로가 그의 머리를 끊고 그를 나무에 달 것이요, 새들이 그의 고기를 뜯어먹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해석은 삼 일 후에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이 이와 같이 어려운 꿈 해석을 정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지혜와 총명을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 장 그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자신을 옥에서 구해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자신이 아무런 죄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합당치 않은 일이었기에 요셉은 자신의 억울함을 술 맡은 관원 장을 통하여 바로에게 호소하려 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예언대로 술 맡은 관원 장은 삼 일 후에 옥에서 나가 복직되어 바로 앞에서 술 따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리고 바로에게 요셉을 위하여 고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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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가정칼럼]유머에 At & T
    유머에 At&T 이론이 있습니다. A란 appropriate 즉, ‘상황, 분위기에 알맞게’다. T는 timely, ‘시간을 맞추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T는 tasteful, ‘관계, 취향을 고려하여’가 됩니다. 초나라의 재상 손숙오는 자신이 죽으면 아들이 가난하게 살 것을 알았다. 부잣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오지만, 부자가 죽으면 상가가 썰렁한 법이다. 그는 자신의 사후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 우맹을 찾아가라고 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과연 그대로 되었다. 손숙오의 아들은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우맹을 찾아간다. 우맹은 자초지종을 듣고 그에게 자신의 곁에서 멀리 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일 년간 손숙오의 의관을 걸치고 행동과 말투도 흉내 내어, 왕이 우맹을 보고 손숙오와 착각할 정도가 되었다. 손 숙오를 그리워한 왕은 우맹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그때 우맹은 아내와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다시 왕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제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가 재상을 하지 마십시오. 초나라의 재상은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손숙오 같은 분은 초나라의 재상이 되어 충성을 다하고 청렴하게 초나라를 다스려 초나라 왕을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손숙오가 죽자 그의 아들은 송곳조차 세울 만한 땅도 없고 가난하여 땔나무를 져서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손숙오처럼 될 바에야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지어 불렀다. 노래를 다 듣고 난 왕은 손숙오의 아들을 불러 이후 10대가 잘살 만큼의 재산을 내려주었다. 사마천은 이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진실로 말해야 할 시기를 알았다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초나라의 재상 숙오와 우맹의 이야기를 시인 원재훈은 이렇게 분석해 냈습니다. “우맹은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왕에게 한마디를 하기 위해 궁리하고 행동했다. 즉 일 년 동안 손숙오의 흉내를 내어 왕이 자신을 볼 때 손숙오 생각이 나게 만들었다. 사람은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가 죽고 난 후에 얼마나 그를 기억할 것인가? 국정에 바쁜 왕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맹은 일 년을 기다려 왕에게 다가갔다. 이 절묘한 타임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풍자에 뛰어나 우맹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 즉 자신 아내의 입을 빌려 직언을 피하고 풍자를 하였으며, 더불어 시를 지어 불렀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을지 눈에 선하다.”완벽한 <At & T>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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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시사칼럼]신학기를 맞이하며
    신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만남을 생각하며 설레던 신학기는 옛말이 된지 오래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아동을 둔 어느 예비 학부모 얘기인즉슨, 극성스러운 엄마들은 영어, 한자, 피아노, 미술, 수영의 취학 전 5종 세트를 끝내고 입학시킨다는 겁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학생이 겨우 내내 학원에 다니며 중학교 수학 전 과정을 배우느라 씨름하는 모습도 직접 보았습니다. 하기야 기상천외한 ‘선행학습금지법’이 또 어떤 나라에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얼마 전 끝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와 ‘사랑에 대한 모든 것(The theory of everything)’의 관계가 흥미롭습니다. 웜홀(wormhole)과 블랙홀(blackhole)과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스텔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킵 손(Kip Thorne, 75) 명예교수가 과학 자문을 맡았는데, 그는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의 실제 주인공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74) 박사에 버금가는 이론물리학자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각색상을 수상한 시나리오 작가 그레이엄 무어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stay weird, stay different)으로 더 화제가 되었던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이라는 영화는 2차 대전의 숨은 영웅이자 천재적인 괴짜 과학자였던 알란 튜링(Alan Turing, 1912-1954)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운 교육 열기나 또 실제 학생들의 학업 수준을 고려하면 문자 그대로 한 편의 영화 주인공 같은 이런 인물들이 한국에서도 많이 배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근 하버드 이공계 학부를 다니는 학생들이 한국 학교를 방문해서 평범한 고등학생들이 푸는 수준의 수학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쩔쩔 매는 동영상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노벨상쯤은 우습게 아는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는 전혀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여기에 한국 교육의 아이러니와 미스테리가 존재합니다. ‘인구론’이란 신종어가 있습니다. ‘인문계 구직자의 90%가 논다’를 줄인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취업에 그리 유리하지 않은 학과들은 하나 둘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 해 7월 전국 초중고교생 18만 명을 대상으로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실시한 2014 학교진로교육 실태 조사에서는 중고교생 10명 가운데 3명이 장래 희망하는 직업이 없다고 답했으며 그나마 응답한 학생 중 절대 다수가 교사나 공무원을 1순위로 꼽았습니다.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과학고·영재고 진학 현황’을 보면 조사 대상 19개교 졸업생 전체의 17%가 의대로 진학했는데, 결국 이 수치는 최상위층 학생들이 의대를 선택하는 현실을 방증합니다. 교사나 의사는 훌륭한 직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적성이나 비전이 아니라 안정성과 수익성만이 학생과 부모와 사회의 일률적인 잣대가 되어가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어디서부터인가 잘못 되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몇 개의 학원을 전전하며 밤 10시, 11시가 되어서야 귀가해서 또 과제하고 공부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이 드는 현실은 인권유린수준입니다. 마땅히 창의적이어야 할 글쓰기까지 기계처럼 주입하고 제작하는 현실 속에서 창조적 파괴와 혁신적 사고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사회는 교육에 관한 한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판단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도 좋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대다수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취학과 진학을 앞둔 자녀를 둔 그리스도인 부모들이시여, 더 이상 돈과 물질과 세속적 가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지배하도록 좌시하고 동조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창조적 마인드와 꿈을 발견하도록 길을 열어줍시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자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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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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