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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바나바를 일찍 등장시키시는 이유(사도행전 4장 36-37절)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내용 외에도 성경의 편제, 길이, 구성, 전개방식 등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기에, 우리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읽어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섬세한 의도가 잘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사도행전을 어떤 순서로 전개하고자 하시는지 그 개략적 의도를 미리 밝히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통해 성령께서 일하신 것을 기록한 책인데, 그 핵심은 복음의 확장입니다. 그런데 1장 8절은 그 복음의 지리적 확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예루살렘에서, 그 다음엔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에까지 복음이 확장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도행전은 철저히 이 순서에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이렇듯 치밀하게 사도행전을 전개하신 하나님께서는 4장 끄트머리인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라는 한 인물을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무대에 머문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그의 이름, 고향, 출신, 그리고 그가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다는 것만 언급한 채, 바나바를 다시 무대 뒤로 들여보내셨습니다. 그 후 바나바는 5장, 6장, 7장, 8장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9장 27절에 가서야 비로소 바나바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5-8장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을 바나바라면, 9장에 와서 그의 이름, 고향, 출신, 밭을 판 이야기 등을 언급해도 충분할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그를 4장 끝에서 미리 무대 위에 불러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땅 끝 선교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땅 끝 선교를 위해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처음 한 일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을 성도들에게 소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 사울과 함께 안디옥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 안디옥교회가 이방 땅으로 가는 최초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그 선교사란 다름 아닌 바나바 본인과 사울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도운 것도,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한 것도, 그 안디옥교회가 이들을 파송한 것도, 파송 받은 사람들이 바나바와 사울이었던 것도 모두 하나님의 땅 끝 선교의 치밀한 섭리였습니다. 1장에서 12장까지 읽으면서 독자들은 <언제 땅 끝 선교가 이루어질 것인가>하는 의문점을 가질 법도 합니다.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4장 끝에서 바나바를 등장시킴으로써 <난 이미 땅 끝 선교의 주역이 될 사람을 준비했다. 여기 그가 있으니 보라! 난 지금도 내 계획에 따라 일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1장 8절에서 언급하신 복음의 지리적 확장의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모든 일을 추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섬세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시고 그 계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순종하는 믿음으로 따라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십니다. 교회들이 위축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일을 계속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근거는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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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서임중 칼럼]왜 네 탓인가?
    요즈음 여의도 1번지 이야기를 듣노라면 속이 뒤집혀 먹던 것도 내뱉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뿐이고 도대체 소위 선량(選良)이라는 분들의 사고력(思考力)이 그것밖에 안 되며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국태민안을 기대하기란 물 건너갔다는 생각에 마음이 천근만근이 된다. 2004년으로 기억한다. 한나라당이 만든 연극 ‘환생경제’에서 비록 연극일지라도 특정 인물을 극화하여 구사된 언어는 듣기 민망하기 그지없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저것이 선량(選良)들의 수준인가?” 싶어 TV 채널을 돌렸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야당 대표선거가 끝나자 말자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곧바로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모든 것이 그들의 탓인 양 연관된 대통령부터 사과해야 한다는 엇박자 언행이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고, 최고위원으로 선임되자 말자 독설부터 쏟아낸 정모 의원의 말을 듣는 국민들의 마음이 불편스럽기 그지없다. 물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야 박수를 칠지 모르지만 같은 당 소속의원들조차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 참 잘못되어 간다.”고 탄식을 하는 소리를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된다. 어디 그것이 야당 지도자들만 그런가? 여당 지도자들의 작금의 언행 보도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하나같이 내 잘못은 없고 네 잘못뿐이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언제부터인가 진정한 의회민주주의가 죽어버린 슬픔이 나 혼자만의 아픔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슬프고 아픈 것은 왜 우리는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목이 쇠도록 외치던 지도자들로 인하여 우리들은 고통받아야 하는가이다. 어느 기자가 보도한 대로 “코미디도 이렇지는 않다”는 말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경제가 곤두박질을 치고, 학원이 막판 장터가 되고, 사회가 시궁창 냄새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내 탓이오”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슬프기만 하다.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보면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가르침이 있다. 자신을 죽여서라도 인(仁)을 이룬다는 뜻인데 “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仁’을 저버리지 않으며 자신을 죽여서라도 ‘仁’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고 했다. 이 가르침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공(公)을 위해 사(私)를 희생하는 것은 최고의 삶의 가치로 알았고 이를 수행하는 것이 지고한 군자의 길임을 가르쳤다.언론에 오르내린 수많은 잘난 분들, 조금만 힘이 있어도 그 힘을 못 써먹어 안달하는 소인배, 좁쌀만 한 명예와 권력을 가졌거나 관계되면 별별 희한한 짓을 당연한 듯 행사하는 졸부들이 지도자로 있는 한 공리(公利)는 요원한 것이라 생각한다.그건 정치권의 이야기라 접고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가? 가톨릭의 신뢰 회복 운동의 하나인 “내 탓이오” 캠페인은 199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불신과 갈등이 만연된 원인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됨을 자각하고 자기반성 운동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다. 그래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붙인 것을 시작으로 하여 전 가톨릭 신자는 승용차에 “내 탓이오”스티커를 부착하여 사회 정화 및 자기반성 운동으로 솔선수범 해오고 있다. 많은 개신교인들은 “익수스”(ιχθυσ) 물고기 모양의 스티커를 승용차에 붙이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표하면서 모든 사회생활에 본보기가 되기를 다짐하는 것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그런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이 신호위반을 하기도 하고 교통질서를 무시한 운전을 하는 일을 종종 볼 수 있다는 것이다.언젠가 교회 뒷골목에서 접촉 사고가 발생한 사건을 본 일이 있었는데 사고 차량을 세워두고 양측 운전자가 욕설을 하면서 상대방 잘못을 강조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차량에 모두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 하나는 “내 탓이오”와 하나는 “익수스”물고기 스티커였다. 왠지 나 자신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르고 수치스러운 자괴지심에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세월이 그래서인가? 요즘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내 탓이오”가 없고 하나같이 너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요 너는 돼지”라는 논리로 예수님이 그렇게 경계했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니 걱정스럽기만 하다. 전국을 다니면서 말씀 사역을 하면서 가슴이 먹먹하고 고뇌스러운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오늘 교회의 가장 힘든 부분은 “네 탓”을 노래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교인들 마음이 황량한 사막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난국이 나의 잘못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으로 엎드림의 삶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네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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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함께 생각해 봅시다]흐뭇한 얘기 (2)
    선행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해야 하고 은혜 입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잊지 말아야1880년에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젊은 의학도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책을 갖고 이집 저집 방문하면서 팔고 있었다. 하루는 책은 팔리지 않고 허기는 지고 목이 갈해서 한 집에 들어가니 소녀가 “우리집에는 어머니뿐이고 돈이 없어 책을 살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의학도가 “책은 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냉수 한 컵만 줄 수 있겠습니까?” 소녀가 물 대신 시원한 우유 한 컵을 줬다. 의학도가 목이 얼마나 갈했던지 우유 한 컵을 단숨에 마시고 “한 컵 더 청해도 되겠는지요?” 그랬다. 소녀가 기꺼이 시원한 우유 한 컵을 더 줬다. 의학도가 두 컵을 마신 후 물이 아니고 우유이기 때문에 값을 지불하려고 하니 소녀가 손사래를 치면서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손님에게는 항상 친절히 대하기만 하고 절대로 대가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로부터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의학도가 큰 병원 외과과장이 되었다. 하루는 회진하면서 한 병실에 들어가서 한 환자를 보니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래 전에 무더운 여름에 물대신 시원한 우유를 주던 그 고마운 소녀가 아닌가. 의사는 그를 알았는데 환자는 의사가 그때 그 의학도인 것을 알지 못했다. 그 환자는 매우 위중했다. 의사의 지시로 환자를 당장 특별실로 옮기고 24시간 계속 특별간호를 받게 하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도록 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환자가 며칠 후 기적적으로 건강이 회복되었다. 하루는 담당의사가 “이젠 내일 퇴원해도 됩니다” 이 환자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지만 기쁨보다 치료비 걱정이 더 컸다. ‘내가 평생을 두고 조금씩 갚아 가겠다고 하면 믿어 주실까?’ 이런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계산서를 받아보고 이 환자가 눈물이 핑 돌았다. “치료비는 이미 우유 두잔으로 청산되었습니다. 하워드 켈리” 이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흐뭇한 얘기인가. 허기진 고학생에게 기꺼이 물대신 우유를 대접한 소녀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그녀가 위중한 것을 보고 우유 두컵 대접 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주고 치료비를 자기가 담당한 하워드 켈리의 마음 역시 얼마나 아름답고 갸륵한가. 우리가 여기에서 받아야할 교훈이 뭐겠는가. 우리는 선한 일을 할 때에 대가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고 은혜를 입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갚을 기회가 오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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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목회자 칼럼]탈진과 회복 (11)
    시편 119편 7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고난을 좋아할 필요가 없다. 고난을 초청할 필요는 더욱 없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를 피해가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고난을 완전히 피해가는 인생을 본적이 있는가? 그런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고난을 감수한다. 그 사연들을 들어보면 한결같이 마음이 아프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알아두어야 한다. 고난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그리고 나아가서 성경적으로 알아두면 의미 있게 고난을 감당해 나갈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이 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연단(훈련)’이라고 말한다. 연단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사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 장성한 분량의 사람, 강한 사람,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연단 없이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은혜의 교리, 은혜 사상〉에 익숙해 있다. 그러다보니 훈련, 연단, 고난 같은 것에는 익숙하지 않는 약점을 갖고 있다. 세상을 보라. 인생의 보람이나 성공, 목표 달성을 위하여 쏟아 붓는 노력이나 훈련을 생각해 보라!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훈련 과정〉을 밟는다. 한때 인터넷 상으로 세계적인 무용수 강수진의 발, 세계 최고의 방상 체조 선수 김연아의 발, 축구선수 박지성과 박주영의 발이 공개 된 적이 있다.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발은 아름다운 모양새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글어지고 굳어지고 마모가 돼버렸다. 특히 두 여성의 경우 아름다운 여성의 발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우지 않을 만큼 험하고 후천적으로 못 생겨버린(?) 발 모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발 모양에서 오히려 엄숙한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세계도 〈고난, 연단〉이 있어야 마땅하기 않겠는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봄과 가을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실로 환상적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인다. 그러나 일년내내 봄과 가을만 있어서는 안 된다. 뜨겁고 무더운 여름이 있어야 곡식과 과일과 나무와 풀들이 자란다. 무럭 무럭 자란다. 심지어 사람도 자란다. 학생 시절에 여름방학을 끝내고 9월에 개학을 하면 청소년들이 엄청나게 자랐음을 보게 된다. 몰라볼 정도로 커버린다. 그리고 가을이 있으므로 곡식과 과일이 탐스럽게 익는다. 가을의 황금 들판을 생각해 보라. 가을이 있으므로 말(馬)도 살이 찐다. 그러므로 〈고난〉 두려워하지 말자. 고난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가지자. 고난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공부하자. 「고난 없이는 영광(보람)이 없다」(No Cross, No Crown)는 말은 진리다. (롬 8:18) 우리 예수님께서도 십자가(十字架) 고난을 겪으시고 나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기피 한다. 회피 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고난’하면 아예 외면을 한다. 신앙의 세계는 마냥 행복하고 평탄하고 편안하리라고 기대한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히브리서를 묵상해 보라. 믿음의 사람들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을 기꺼이 각오하면서 살았다.오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 대하여 새로운 공부와 이해가 꼭 필요하다. 무조건 고난을 싫어하거나 기피하지 말아야 한다.바울사도는 젊은 청년 제자 디모데에게 이 사실을 정확하게 일깨워준다. (디모데후서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난이 포함된 훈련을 받을 때 우리는 강한 사람, 강한 그리스도인, 강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2: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한마디로 성경은 우리에게 〈온상의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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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소강석 칼럼]꿈은 불멸이다
    비가 오면 물이 새고 쥐들이 우글거렸던 지하실 23평. 나는 그곳에서 교인 한 명 없이 교회를 개척했다. 꿈은 있었으나 현실은 참담했다. 그래서 사람이 너무나 그리웠다. 오죽하면 토요일 저녁이 되면 빈 의자를 붙잡고 기도하겠는가. “주님, 이 빈 의자에 내일 사람을 앉혀 주세요. 지나가는 거지가 되었든, 넝마주의가 되었든 사람을 앉혀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럴 때면 난 이런 감동을 내가 믿는 주님으로부터 느꼈다.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내가 너에게 맡 겨준 양을 목숨처럼 사랑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나는 다시 화답하였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양을 제 생명을 다해 사랑하겠습니다.” 그 때부터 나의 목회 비전은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였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로 큰 부흥을 이루었다. 최근에 월간중앙에서 한국 종교지도자 인터뷰를 하면서 나에게 ‘영혼 사랑의 승부사’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었다. 난, 꿈이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힘들고 경제가 어렵다고 너무나 쉽게 꿈을 포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꿈은 불멸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 꿈은 길 위에서 잠들지 않는다. 고난의 비바람이 불어올수록 더 강해진다. 바람 보다 먼저 쓰러지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들판의 풀처럼 꿈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반드시 다시 일어나 꽃을 피운다. 나 또한 여전히 꿈을 꾼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수만 명의 성도가 모이는 신도시 대형교회 목회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꿈에 목마르다. 이루고 싶은 꿈에 배가 고프다. 왜냐하면 나의 꿈의 목적은 사람들의 숫자나 교회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영혼 사랑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성도들을 모으고 얼마나 큰 건물을 짓느냐에 꿈의 목적이 있다면 나는 어느 정도 꿈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 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눈보라가 치는 겨울날, 예수를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나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개인적인 성공이나 명예, 세상적인 부귀영화에 꿈의 목적을 둔 적이 없다. 오직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영혼을 사랑하는 목사로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영혼 사랑의 목마른 꿈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그 꿈은 시내산 떨기나무 사이로 타오르던 불꽃같은 불멸의 꿈이다. 암울한 현실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불멸의 꿈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다시 꿈을 꾸면 검푸른 새벽하늘, 추위에 몸을 떨며 끝끝내 빛을 발하고 있는 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난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를 보면 희망이 생기고, 꿈이 생겨나는 꿈과 희망의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은 불멸의 인생이 된다. 왜냐하면 꿈은 불멸이기 때문에, 그의 삶은 끝나도 그가 남기고 간 꿈의 기억과 영향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더 위대한 꿈의 꽃을 피울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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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가정칼럼]사랑하지 않을 때 외롭다
    정호승 시인은 인간의 외로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다. 인간만큼 고독한 존재는 없다. 그것이 인간의 기본 명제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혼자 외롭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도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인간이 외롭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결혼은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정시인은 외로움을 이해하는데서 우리의 삶이 시작된다면서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라고 역설합니다. 즉 혼자 있어도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 차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를 좀 더 살펴봅니다. 그렇다. 인간은 사랑하지 않을 때 외롭다. 아무도 진정으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 때 나 또한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때 외로움에 몸을 떨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장 많이 상처를 받듯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장 많은 외로움을 느낀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 이면서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답은 하나입니다. 사랑해 사는 일입니다. 장밋빛 인생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세기의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1915-1963)의 삶을 조명한 영화입니다. 노래와 사랑만이 삶의 이유이자 전부였던 그녀는 죽기 전 인터뷰에서 사랑은 경이롭고 신비하고 비극적인 것이라 말했습니다. 덧붙여 자신에게 노래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며 동시에 사랑 없는 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사랑이 노래였고 노래가 사랑이었던 주인공은 정작 수많은 스캔들의 주인공이었지만 그의 사랑은 오직 하나, 마르셀 세르당이었습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오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연인을 위해 부르는 마지막 노래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는 이런 가사를 담고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남겨진 새날을 위해 오늘 다시 뜨는 태양을 위해, 내겐 후회 없으리... 우리도 후회 없는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그녀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여성들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사랑.” “그럼 젊은 여성들에게는요?” “사랑.” “그럼 어린이들에 게는요?” “사랑” 하나님은 우리의 결혼생활을 통해 그런 사랑을 완성시키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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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교회법률상식]헌법을 짓밟고 장로회 정치를 포기한 합동총회(2)
    노회 탈퇴는 곧 교단탈퇴라는 것이 장로회 총회의 헌법 규정동일 교단노회 탈퇴한 교회, 동일 교단노회로 이적가입 불가 2. 헌법을 짓밟고 불법을 양성하는 총회 “행정사항은 잠재하고”라는 문구는 본 사건에 있어서 헌법 정치 제8장 제2조 2항을 잠재하자는 말이니 곧 “헌법을 잠재하자”는 말이요, 헌법을 잠재하고 회의하며 결의까지 하였으니 “헌법을 짓밟고 장로회 정치를 포기하면서 위헌적 불법결의”를 한 것이다. 즉 총회가 “광주중앙교회가 남광주노회로 간 것은 불법이다.”라고 한 그 불법자인 채규현 씨의 불법행위는 ① 교단의 관할을 배척하고 교단을 탈퇴한 것도 불법이요 ② 교단을 탈퇴한 후 탈퇴한 교단 소속인 남광주노회에 가입한 것도 불법이요 ③ 제명출교의 책벌을 받았으니 교인도 아닌 자가 목사 행세를 하는 것도 불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법리이다. 그런데 총회가 “불법이다.”라고 선언한 것과는 달리 ① 채규현 씨가 교단의 관할을 배척하고 교단을 탈퇴한 불법행위도 묵인하고 ② 전남제일노회가 채규현 씨를 제명출교로 책벌한 것도 인정하려하지 않고 ③ 본 교단을 탈퇴하고 떠난 후 본 교단인 남광주노회에 가입한 것조차도 불법인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면서 이율배반적 중대한 불법행위로 “행정사항은 잠재한다.”는 궤변과 함께 제명출교 되어 교인도 아닌 채규현 씨를 여전히 목사로 여기면서 “남광주노회로 이적하는 것은 허락한다.”고 결의를 하였다. 이와 같은 불법회의와 불법결의야말로 헌법을 유린하고 불법을 양성하는 총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회의 안건의 주제도 파악하지 못하는 총회 본건 총회 결의의 문장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①“광주중앙교회가 남광주노회로 간 것은 불법이다.” ②“전남제일노회가 원인무효 된 채규현 목사를 재판한 것도 불법이다.” ③“그러므로” ④“행정사항은 잠재하고 광주중앙교회를 남광주노회로 이적한 것은 허락한다.” ⑤“양측이 원만히 화해하도록 가결하다.”이다. 누가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왜 화해하라는 말인가? 또한 “남광주노회로 간 것은 불법이다.”라고 선언했으면 불법에 대한 후속 처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후속 처리는커녕 “전남제일노회가 원인무효 된 채규현 목사를 재판한 것도 불법이다.”라는 궤변적인 이유를 만들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붙인 후 “행정사항은 잠재하고 남광주노회로 이적한 것은 허락한다.”고 가결을 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이는 유치원 아이들의 병정놀이 같은 유치한 짓을 하여 도리어 큰 싸움만 붙여 놓았다. 그런 후에 또 느닷없이 “원만히 화해하라”는 결의야 말로 회의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②항에 관하여는 전남제일노회가 목사면직 판결한 채규현 씨에 대하여 법원이 원인무효로 판결한 그 사건을 다시 재판한 것이 아니고 새로운 범죄행위인 “교단을 배척하고 탈퇴하여 노회를 떠나간 죄”를 물어 “제명출교”로 판결한 것인데 총회는 웬 잠꼬대 같은 궤변인지 백번 생각을 해봐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 4. 결론 본 사건의 총회 결의는 성경(마7:22-23)과 헌법(정치 제8장 제2조 2항)을 짓밟고 전국 140여개 노회와 12,000여 교회와 300만 성도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입을 봉한 후에 결의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전국 교회가 과연 총회를 신뢰하겠는가? 근자에 합동총회를 가리켜 “허허벌판 무용지물”이라는 인터넷신문의 댓글을 총회 관계자들은 정녕 읽지 못했는가? 본 사건은 김제중앙교회의 전주지방법원 2005가합4870 사건과 조금도 다르지 아니한 사건이다. 당시 김춘식 씨가 2005.1.16일 공동의회를 개최하여 김제노회를 탈퇴하고 전북기독신문에 탈퇴 사실을 공고하고 김제중앙교회의 건물에서 예배를 계속 드리면서 2006.10.16일 김제중앙교회와 같은 교단인 동평양노회에 가입한 것 등은 본건 채규현 씨의 사건과 아주 흡사한 사건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탈퇴한 김춘식 씨가 김제중앙교회의 부동산의 소유권 등기 이전을 마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퇴하지 아니한 전통 교회의 당회장 김지철 씨가 김춘식 씨를 피고로 하여 “소유권이전등기의 말소등기” 신청을 청구한바 법원은 대법원 판례에 따라(대법원 2006.4.20. 선고 2004다37775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 하라하였음) 교단을 탈퇴한 김춘식 씨를 지지하는 교인이 3분의 2에 이르지 못하여 종전 교회재산에 대한 권리가 상실되었음을 이유로 제1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하였다. 이에 피고 김춘식 씨는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제2심인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고, 피고는 또다시 상고하였으나 제3심인 대법원에서도 기각 판결함으로 종결되었다. 총회는 김제중앙교회 사건을 거울삼아 본건 제99회 총회의 불법결의에 대하여 권징조례 제76조의 규정에 의하여 조속히 헌법대로 시정 결의하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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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성공칼럼]똑바로, 거꾸로
    육체는 시간과 공간속에 살고 있지만 속마음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를 살고 있다. 이 말은 내 속이 죽음 후의 세계까지 이어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모든 삶은 연속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지금의 삶과 죽음 후의 삶이 차원이 다를 수는 있지만 연속성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하늘을 향해 살고 있지만 속은 반대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똑바로, 어떤 사람은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 살아간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머리가 하늘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은 똑바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머리가 땅을 향해있는 사람은 겉으로는 사람이지만 속은 짐승인 것이다. 사람의 머리가 하늘을 향해 있고 발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속이나 마음, 태도를 하늘에 두고 살아야 사람이며 머리를 땅을 향해 사는 짐승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모습이 이어져서 천국이 만들어지고 지옥도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걱정하고 한숨을 쉬면서 땅이 꺼져라 하고 살아가는 사람,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높아지려고 싸우는 사람, 이 땅에서의 소유와 권력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본성과 사람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겉모습은 하늘을 향해 있다고 해도 속은 땅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하더라도 삶을 받아들여 당당하게 살면서 정직함을 잃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살면서 소유와 지위와 권력을 얻는 사람. 이 모든 것을 얻은 후에도 에고를 드러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선한 일을 위한 수단으로 알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소유와 에고와 지위에 매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과 음식에 대해서도 몸에 유익한 것과 좋은 것을 주려는 마음은 하늘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지만 돈 때문에 사람이 먹으면 해로운 음식을 어쩔 수 없다면서 주는 것은 거꾸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순간 자신의 삶이 하늘을 향해 있는지, 거꾸로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먼저 마음에 두려움이 있고 긴장하면 사람은 생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머리는 금세 땅을 향하고 허리는 굽어지고 눈은 아래를 향하면서 빛을 잃게 된다. 이 때 허리를 펴고 천천히 배로 호흡하면 땅을 향했던 눈과 허리는 정 자세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는 두려움과 긴장과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보게 된다. 그러면 눈은 밝아지고 힘이 생겨나면서 나의 삶은 하늘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며칠 전 차를 쓸 일이 있어서 수련회 때 새벽에 아내를 날개영성하우스에 태워주었다. 집에 도착했는데 아내가 두부를 우리 집 냉장고에 두고 왔다는 것이다. 한 끼에 필요한 재료만 해도 수 십 가지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갖다 주고 웃으면서 수고하라고 말했다. 아침 식사가 다 끝난 후에 아내는 ‘아까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톡을 보내 왔다. 나는 성경 말씀을 이용하여 ‘내가 있어서 다행이지. 두 번이 뭐야, 이 백 번 씩 두 번이라도 할 수 있지^^’라고 답장을 보냈다. 아내는 ‘감동’이라고 답을 했다. 이렇게 어떤 상황을 만나든 자신의 속마음에 늘 밝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나 사건을 대할 때 어떤 일이 있거나 자신이 옳고 정당하더라도 두려움과 음행과 거짓과 폭력과 무시함과 분노와 시기와 원망과 지배욕과 원수 갚으려는 복수심 등 그 어떤 것도 내 속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좋은 것, 선한 것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이며 또 인간이 마음대로 살도록 내어버려두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권리이다. 그리고는 먼 후일 자신이 말하고 행동한대로 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인 것이다. 내가 똑바로 살고 있는지 거꾸로 살고 있는지는 자신만이 확연히 알 것이며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 순간 깨어있어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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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은혜의 말씀]마음 지키기(잠언 4장 23절)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뭐든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예민한지 모릅니다. 사람이 병이 생기는 것도 마음에서부터 병이 시작되고, 행복 하는 것도 마음 판에서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행복이나 성공도 모든 것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 성경말씀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가꾸고 마음을 잘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열어 이심전심 마음이 통하고, 공감대가 형성되고, 소통이 되고, 마음을 서로 나누기 까지가 마음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상처를 받은 마음 닫힌 마음, 마음의 쓴 뿌리나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정상적인 반응을 못하고 역기능적인 반응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닫힌 사람, 마음이 우울한 사람, 마음이 삐딱한 사람, 마음이 어두운 사람하고는 대화가 잘 안 되는 것을 느낍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은 성경에 보면 온유한 자가 이 땅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마음이 말랑말랑한 사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은 어디가든지 잘 어울리지만 마음이 강팍하고 마음이 어두운사람, 마음이 좁은 사람은 아무래도 상대하기가 거북한 것입니다. 마음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예방주사가 있습니다. 하나는 찬송이고 두 번째는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짜증을 내기 보다는 찬송을 부르는 습관이 중요하고, 찬송에는 권능이 있습니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게 찬송입니다. 찬송이 흘러가면서 사람들 마음에 심금을 울리고 사람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찬송과 감사 이 두 가지가 우리 마음의 알통을 키우는 예방주사입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성령 충만을 받기 전에 사도들이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고, 기도하기 전에 가장먼저 하는 일이 사도행전 1장 14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니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님이 임하고, 초대교회가 탄생이 됩니다. 제일먼저 하는 것이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통해야 됩니다. 마음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10절에 보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합니다. 부부가 마음이 하나로 흘러가야지 두 마음은 안 됩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버려야 될 마음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의심 하지 말라’ 의처증, 의부 증 이게 제일 고약한 병입니다. 사람이 의심이 일어나는 게 아주 고약한 병입니다. ‘두마음을 품지 말라’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한 마음으로 나가라.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마음이 갈라지면 안 됩니다.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버려야 될 마음이 ‘의심, 두마음, 욕심’이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낫는다고 하십니다.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잘 지켜서 승리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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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시사칼럼]발렌타인데이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Valentine day)입니다. 여성이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고백하는 날이었다지만 요즘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여자들이 가까운 남자들에게 초콜릿을 그냥 주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일 년에 팔리는 초콜릿의 1/3 가까운 양이 발렌타인데이를 전후한 2월 한 달 동안 판매된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초콜릿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519년입니다. 멕시코의 아스텍 문명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가 몬테수마의 궁정에서 호코아틀(xocoatl)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코코넛 음료를 맛보고 이를 스페인에 들여옵니다. 이후 약간 쓴 맛을 달게 만들어서 계피와 바닐라로 향을 낸 초콜릿 음료는 뜨겁게 해서 마셨으며, 프랑스에 소개되기 전까지 거의 100년 동안 스페인의 비밀로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귀했던 초콜릿은 19세기까지도 주로 약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809년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위해 스위스의 어린 소년 슈사드(Suchard)는 약재상에 초콜릿을 사러 갔다가 너무 비싼 가격에 깜짝 놀라 스스로 만들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초콜릿 제조법을 배웠고, 그 결과 오늘날 널리 대중화된 밀크 초콜릿의 원조로 불리는 슈사드 회사가 탄생했다고도 합니다. 발렌타인데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3세기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268-270) 황제 때 순교한 발렌티누스(Valentinus) 기원설입니다. 원래 로마 군인은 미혼의 남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복무연한을 마치면 결혼하여 정착하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발렌티누스는 바로 이 군인들의 혼인을 집례하다가 2월 14일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발렌티누스의 순교일이 사랑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의 묘약으로도 알려진 초콜릿이 19세기 들어 서구에서 대중화되면서 초콜릿 발렌타인이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1936년 일본 고베의 한 제과업체가 초콜릿 판촉용으로 발렌타인데이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고, 1960년 모리나가(森永製菓) 제과가 이 날에 초콜릿을 이용한 여성들의 사랑고백캠페인을 벌이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11일 케이서베이(ksurvey)가 남녀 26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80.3%가 발렌타인데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막상 14일이 되면 이들 대부분이 기발한 상술에 넘어가고 맙니다. 하지만 이 날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를 정확하게 안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1910년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려순(旅順)에 설치된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날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직접 만드신 수의 한 벌과 편지를 옥중에 있는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로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그러므로 이 날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큼은, 초콜릿의 날이 아니라 순교의 날이라 불러야 합당합니다. 발렌티누스도 순교했고, 안중근 의사도 순교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순교의 동력은 사랑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사랑의 날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 이들이 사모하고 앙망했던 주님은 초콜릿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선혈(鮮血)과 생명을 사랑하는 죄인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발렌타인데이를 기념하자면, 진정한 발렌타인의 정신을 되찾아 줍시다. 아울러 우리 민족을 대표해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날이 되게 합시다. 나아가 그들이 사랑했던 우리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사무치도록 가슴에 새기는 그런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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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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