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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께 생각해 봅시다]꺼진 불도 다시 보자
    동성애차별금지법이 합법화되면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자리로 전락해‘꺼진 불도 다시 보자’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불조심 표어이다. 근간 우리나라에는 불조심 외에 또 한가지 꺼진 불도 다시 봐야하는 것이 있다. 그게 뭔가. 동성애차별금지법을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다.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150명의 시민위원과 37명의 전문위원을 앞세워 서울시민인권헌장을 제정하여 동성애를 합법화하려 했으나 기독교와 시민단체 등의 저항에 부딪혀 추진을 포기하였다. 표결에 부친 결과는 60:16 이었으나 합의도출이 아니라는 이유로 추진을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박원순 서울시장의 결의가 비상하기 때문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2014년 10월 12일자 인터넷판 보도에 의하면 “대만이 아시아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첫번째 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박원순 시장은 “한국이 첫번째 나라가 되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동성결혼 합법화를 이만큼 갈망하고 있고 의지가 확고하다.반대여론에 밀려 제정하려던 서울시민인권헌장 추진을 폐기한다고 했지만 동성애자들이 서울시청에 몰려와 점거 농성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사과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상태라고 하니 어찌 안심할 수 있겠는가. 진짜 꺼진 불도 다시 봐야할 형편이다.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시도할 것이 불보듯 뻔하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동성애차별금지법안이 국회의원들의 발의로 국회에 계류 중이고 TV방송도 동성애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으로 동성애를 미화,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라. 짐승도 교미할 때에 수컷과 암컷만이 하며 순리를 거스리지 않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동성끼리 성적관계를 갖는 동성애를 인권을 앞세워 합법화하려고 하니 이게 정신나간 짓이지 뭔가. 만의 하나 동성결혼이 합법화된다고 하자. 순결해야 할 성문화는 파괴되고 남녀간의 구분도 없어지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도 파괴되고 인간이 짐승보다도 못한 자리로 전락되고 만다. 한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그들이 장애인들을, 다문화가정을, 외국인을 차별하지 말라며 그들에게도 인권이 있다 하면서 동성애자들을 싸잡아 그들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자칫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인권을 앞세우고 하는 여러 좋은 내용들은 98%의 빵과 같다. 쥐가 98%의 빵을 먹고 죽는 것이 아니라 빵 속에 있는 2%에 불과한 쥐약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할 것 아닌가.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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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7
  • [시사칼럼]2015 센서스(census)
    2015년은 10년마다 국가(통계청)가 주관하여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Population and Housing Census)’가 열리는 해입니다. 특히 우리가 이번 센서스(census)에 주목하는 이유는 지난 번 2005년 조사에서 나타난 종교 관련 통계의 충격적인 결과 때문입니다. 당시 총 인구 4,455만 명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은 2,497만 명(53.1%)으로, 불교도가 1,072만 명(22.8%), 개신교인 861만 명(18.3%), 천주교인이 514만 명(10.9%)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첫 번째 센서스였던 1995년에 비해 불교는 40만 명(3.9%) 증가, 천주교는 295만 명 증가(74%)한 데 반해 개신교만 14만 명 감소(-1.6%)한 결과였습니다. 물론 통계방법 상의 오류를 지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천주교)’ 항목이 먼저 나오고 ‘기독교(개신교)’ 항목이 한참 뒤에 있어서 일부 개신교인이 앞의 항목에 가표를 해버렸을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입니다. 비슷한 시기 한국갤럽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조사(2004)에 의하면 종교를 가진 사람(전체 인구의 53.5%) 중 불교 24.4%, 개신교가 21.4%인데 비해 천주교는 6.7%에 불과했다는 근거를 함께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번 2015 센서스를 특히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2005 천주교 부흥’은 사실인가 신기루인가? 작년에 한국 사회를 강타한 교황 신드롬은 천주교의 약진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개신교의 쇠락은 어느 정도 사실인가? 2014년 4월 실시한 개혁신학회의 보고에 따르면 이단 및 사이비 기독교인이 100만 명을 상회한다는데, 이들을 제외한 순수 개신교인은 과연 얼마인가? 그런데 최근 정부 발표에 따르면 2015 센서스는 종전과 같이 전수조사 원칙이 아니라, 행정자료 중심의 등록센서스를 위주로 하되 10% 표본만 현장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라 합니다. 맞벌이 가정 증가 및 사생활 보호,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2005년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습니다. 현장조사가 확실히 응답률이 더 좋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주민등록표 등 행정자료에 기재된 답변의 신빙성이 더 높지 않느냐는 견해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한국 교회를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권면이자 기회가 아닌가 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센서스 포로(Census Captivity)’나 진배없었습니다. 숫자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또 그렇게 이번 센서스를 저마다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기다려 왔을 뿐, 정작 뼈를 깎는 자성(自醒)과 개혁(改革)의 몸부림은 없었습니다. 이번 통계방식의 변화는, 교회의 본질이 통계에 있지 않으며 더 이상 수치(數値)를 우상으로 삼지 말고, 진정한 성찰과 회개에 이르라고 하는 주님의 마지막 경고입니다. 오늘날 센서스 개념을 확립한 이들은 로마인이었습니다. 로마는 공화정일 때부터 조세와 징발을 목적으로 주기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특히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통치하던 시절(주전 27-주후 14) 제국 전역에 걸쳐 시행했던 ‘켄수스(census)’는 성경에도 나와 있을 정도로 유명합니다(눅 2:1; 행 5:37). 하지만 성경은 그 정확한 실시 연대나 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다만 그 일로 인해 한 부부가 어쩌면 시도할 생각조차 못했을 베들레헴 여행을 감행했고, 그 결과 예언대로 한 아들이 나심으로(사 9:6; 7:14) 모든 것이 달라진 사실만을 증언할 뿐입니다. 올 해 있을 센서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시행될지 또 무슨 결과가 나타날지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금번 센서스를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반드시 새로운 변화와 그로 인한 회복의 역사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간 주님께서 여러 경로를 통해 촉구하시고 경고하신 음성을 분별해서 그 명령에 순종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일탈(逸脫)했던 경로에서 벗어나 다시 주의 협로(狹路)를 따라 걷는 성도와 교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런 한 해가 되기를 대망(待望)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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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성공칼럼]종에서 주인으로
    많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의존하며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을, 어떤 사람은 사람을,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어떤 사람은 부적이나 돌과 나무 등을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 속에 두려움이 생길 때나 두려움을 넘어서서 욕심이 생길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의존하는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으며, 약한 상태이며, 이용하려는 마음이 숨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다르다고 하지만 결국은 의존일 경우가 많다. 나는 달라진 것이 없고 대상만 달라졌을 뿐이다. 삶이 어려워지면 여지없이 나는 본래의 당당한 나를 잃게 되면서 의존하게 된다. 나는 순식간에 약한 종이 되어서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 오랜 시간동안 몸부림친다. 걱정하고 울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간구하고 위로받고 안도하고 기뻐하고 또 두려워하고 간구하고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편안해지기는 하나 변화는 없고 두려워하고 기도하고 울고 원망하고 등등 이러기를 오랫동안 반복한다. 이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치 내 삶이 땅 속 깊은 어둠속에서 나오기 위해 벌레와 싸우고 흙과 싸우고 있는 씨앗과 같다. 폐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워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기침 한 번하면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런 기침은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다. 결국은 가래가 나오는데 피가 섞여 나왔다. 사람들은 이 아이를 죄인 보듯 한다. 그래서 아무도 곁에 오는 사람이 없어 외롭기 그지없다. 죽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다. 혈기 왕성했던 아이가 기가 죽어서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하며 몇 달 몇 년을 속으로 외쳤다. 두려움과 답답함 속에 화가 나고 우울하며 하나님께 내 병을 낫게 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말씀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아이는 자신이 의존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살기 시작한다. ‘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구나. 이제 부터는 내가 살 것이다.’ 하며 잘 먹고 활동도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약도 잘 먹고... 그러는 중에 드디어 병에서 회복되게 되었다. 그 후 상담을 배우게 되고, 본래의 나를 알게 되고, 마라톤을 하면서 지금 70대의 활력이 넘치는 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사람이 버린 것은 하나님이란 이름의 자신 속에 있던 의존의 대상 즉 자신의 의존성이었다. 의존성을 버리자 이 아이는 자유로워졌으며 힘이 생겼으며 자유로워지고 독립하게 된 것이다. 삶이란 처음에는 종으로 살다가 주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얼마동안은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하다가 때가 되면 독립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학생도 잠시 선생님이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을 따르다가 때가 되면 자신의 길을 가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영적인 상황에서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다가 때가 되면 의존하는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 변하는 것은 내가 종에서 아들로, 주인으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신에게 의존하지 말고 아들로 살아야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로 산다는 것은 종으로 살지 않고 주인으로, 나로 산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일을 만나든 내 속에 하나님의 본성을 잃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성경이 사실이냐, 아니야는 논쟁이나 사람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한 사건과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나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 것 때문에,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 것 때문에 억울해하고 논쟁하고 비난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어둡게 만든다. 그러나 주인은 성경이 사실인 것과 이야기인 것에, 또 예상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성경 속에 더 많은 진리를 발견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자신의 삶을 잘 만들어간다. 하나님은 삶으로 다가오시기에 매 순간 누군가를 의존하는 종으로 살지 말고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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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목회자 칼럼] “감사드립니다”
    지난 12월 11일(목) 오전 11시에 ‘(사)경남기독교총연합회 제16차 정기총회’가 대표회장 직을 맡게 될 문수석 목사가 시무하는 창원벧엘교회당에서 개최되었다. 지역 교계의 어른들과 경남 18개 시/군 기독교연합회(2천5백여 교회, 3십여만 성도)의 백여 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모든 총회절차가 잘 진행되고 대표회장을 비롯하여 새로운 임원진들이 구성이 되었다.개인적인 능력과 교회와 교단적 형편으로 본다면 벅찬 자리요 직무임에도 지난 1년 동안 별다른 하자 없이 제15대 대표회장 직(2013년 12월~2014년 12월)을 감당해 나올 수 있었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음을 고백하며 감사드린다. 그 하나님의 은혜! 지난 1년을 회고해 보면서 몇 가지로 축약시켜 본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마산재건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성전건축(2012년 11월~2014년 5월)이 한창 진행 중인 가운데서도 교회는 기도와 물심양면으로 담임목사의 연합사역을 적극 뒷받침해 주었다. 그와 같은 은혜는 평소에 쌓아 나온 담임목사와 성도간의 신뢰, 개교회 중심이 아닌 보편적 교회론, 재건교단의 위상 회복을 위해 힘써 나옴에서 주어진 열매가 아닌가 생각한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실무임원진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경남지역에선 가장 큰 기독교연합체이기에 임역원 규모만 할지라도 무려 팔십여 명에 가깝다. 그래서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 8명으로 구성된 실무임 원단 중심으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 나간다. 교파와 교단과 개인적 영성이 다름에도 섭섭했던 일이 전혀 기억에 없을 정도로 실무임원들은 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즐겁게 동역해 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교단의 형제교회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영남노회 산하의 교회들은 대부분 농촌교회들이고 미자립교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 행사 때마다 십시일반으로 기도와 물질로 동참해 나왔다. 그런 협력을 보며 감동을 받는다는 실무임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고 감사했던지... 교단이 작아서인지 모르나 재건교회는 가족 같은 사귐을 누리고 있다. 넷째, 하나님께서는 지역 내 많은 교회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본 연합회의 무게와 사역의 규모로 본다면 큰 교단, 큰 교회의 지도자가 대표회장직을 맡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조건에 해당되지 못한 나에게 그 무거운 직무가 주어졌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무거운 직책에 대한 두려움, 어찌할꼬? 다른 하나는, 감사제목, 작은 교단, 작은 교회도?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협력해 줌으로 가능함을 보여 주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는 지역 교계 지도자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어떤 사역이든 절대 필요로 하는 것은 선배들의 경륜과 지도와 도움이다. 마산에서 이십여 년 목회해 나오면서 확인되는 것 중의 하나는 교계 지도자들 간의 친밀함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부족이 많은 나는 특히 본 연합회의 대표회장 직을 거쳐 가신 10분의 명예회장, 그 분들의 한결같은 도움을 많이 받았다.여섯 번째, 하나님께서는 지역의 ‘기독방송+언론사+기업체’들을 통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의 사역에도 사방에 알림이 필요하고 물질적 후원이 필요하다. 교회들, 연합단체들이 해마다 경험하는 감사제목이겠으나 금번에도 그분들로부터 많은 편리와 지원과 도움을 받았다. 교회와 연합회에서도 저들의 선교사역과 성도의 기업들이 형통하도록 지속적인 기도와 관심을 보여야할 것이다. 피곤할 때 생기는 입가의 물집! 며칠 전에 나의 입가에 마치 훈장처럼 물집이 생겼다. 대표회장직이 나에겐 무거운 짐이었나 보다. 어제로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별다른 하자가 없었기에 다시 한 번 연합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와 그 직책을 나름대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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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서임중 칼럼]이름보다 삶이 중요하다
    전국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갔을 때 들은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3박 4일 일정의 강사가 광고되었는데 서임중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왔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임중 목사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아도 그 사람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그 마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삶인가를 알게 되면 어떤 마음의 소유자인가를 알 수 있다. 이름이란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작명소가 있어서 좋은 이름을 지으려고 가히 몸부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도 작명소가 호황을 누린다고 한다. 이름 짓는데 수십, 수만 원까지 들여가면서 이름을 짓는 경향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성경에서도 이름을 짓는 일에는 아주 신중했다. 모든 성경의 위인들이 이름대로 살다가 이름대로 죽은 경우가 많은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구약시대에는 그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 생활환경, 기타에서 취한 것이 여러 가지로 보여진다.동·식물에서 이름들을 취하여 명명했는데 다말은 종려나무, 데라는 염소, 레아는 들소, 라헬은 양, 갈렙은 개, 드보라는 벌, 요나는 비둘기 등이다. 사람의 얼굴 모습이나 성질에 따라 지은 것도 있다. 에서는 털 많은 자, 십보라는 아름다움 등이다. 그리고 부모의 경건성, 감사 등에 의해 지어진 이름도 있는데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등이다. 사건과의 관련해서 지어진 것은 야곱이 그 막내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으로 바꾼 것은 흉조(凶兆)에서 길조의 이름으로 바꾸는 데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해산하여 낳은 아이를 이가봇(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이라고 한 것이 그 예다. 특별한 일로 이름이 바뀐 것도 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요셉이 사브넷바네아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된 일들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예언적, 상징적으로 명명된 경우도 있고, 하나님에 관계된 이름도 많으며, 가나안의 신 바알과 관계된 이름도 나타난다. 신약시대에는, 여러 나라의 국어가 사용되어 그리스명, 라틴명, 히브리명 등의 이름, 혹은 한 사람이 둘이나 세 가지 이름을 가진 경우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름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삶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름을 잘 지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그 이름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이름을 빛내는 것이 더욱 유명인(有名人)이 되는 것이다.예수라는 이름은 참으로 존귀한 이름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삶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이름 하나하나는 존귀한 이름들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삶이 이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유다’라는 이름은 ‘그를 찬미하자’, ‘그를 기억하자’라는 아주 좋은 의미의 뜻을 지닌 이름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간으로서 가장 실패한 인생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무슨 뜻인가?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중요한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이 아닌 Becoming으로 정의한다. 즉 존재가 아닌 존재화, 곧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져 간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의 약점이 “되었다”라는 의식에서부터 걸음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아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있지 않는 지도자의 지도력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지배자로서의 자기모순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갖는 직분을 마치 계급사회의 직무로 오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지도자가 아닌 지배자로 전락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한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현상이며 그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고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소위 유명(有名)한 사람들의 이름이 다음 세대에까지 아름답게 우러러 존경받지 못하고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사그라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름이 자기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자기의 이름이 되게 하여야 하지만 자기 스스로 유명인(有名人)에 도취해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삶이 이름 되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의 삶이 이름 되게 하여야 한다. 목사와 장로답게 살아 목사, 장로 이름이 존귀하게 되고,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존귀하게 되어야 한다.새해가 밝았다. 365일을 그리스도인답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이름이 높여졌으면 좋겠다. 이 땅의 온 교회가 그렇게 아름다움을 연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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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함께 생각해 봅시다]현역은 모르는 은퇴목사의 심경
    현역은 은퇴목사의 심경을 몰라은퇴한 후 비로소 실감하게 돼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지 않은가.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내 동무 어디 가고 나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어느 은퇴 목사는 이 노래를 은퇴 목사의 주제곡이라고 했다. 왜일까. 은퇴하고 나면 갑자기 주변환경이 어두워지는 느낌이 든다. 주변에 그토록 많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외로히 혼자 앉아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면 외롭기 한이 없다. 여러 해 전 얘기다. 은퇴한 P 목사에게 현역으로 있는 후배들이 물었다. “목사님, 은퇴를 해보니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의 대답은 “말도 마세요. 말로는 어떻다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한번 겪어보세요” 하더니 그 건강하던 분이 은퇴 후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목사들이 누구나 은퇴하기 전에는 은퇴목사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젊음을 경험한 노인들은 젊은 이들을 이해하지만 늙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 이들은 노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솔직히 저부터 그러했다. 은퇴목사 한 분이 사직동교회에 출석하셨다. 주일마다 설교하던 목사가 매주일 예배참석만 하고 가는 것을 보면서도 은퇴목사의 심경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은퇴한 후에 생각하니 그 어른의 따분한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후회된다.그러면 은퇴목사가 극복하기 어려운 점이 뭔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인 점은 은퇴하고 나면 고독하고 적적하다는 것이다. 시무할 때에는 연일 해야할 일이 있고 가야할 곳도 많고 초대를 받기도 하고 매일 시간을 쪼개어 일정을 소화한다. 은퇴하고 나면 하룻밤 사이에 사정이 달라진다. 누구 한 사람 차 한 잔 같이 하자는 사람이 없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전화도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교회가 운영하는 노인대학에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무할 때엔 모든 교인들의 관심이 담임목사에게 집중되어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든 교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교인들의 관심은 새 담임목사에게 집중된다. 공예배 시간에 기도할 때에도 멀리 해외에 가 있는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면서 은퇴목사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다. 그건 새 담임목사가 듣고 어떻게 생각할런지 몰라서 그런다는 말이 있다. 끝으로 은퇴목사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큰 대접은 무엇인가. 그건 그에게 설교를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현역으로 있는 동안에는 느끼지 못한다. 자기가 은퇴를 해 봐야 비로소 실감이 나게 될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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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성서연구]다시 원점에 서서(엡 6:24)
    신앙이란 변하는 것들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것만이 진리요, 진리만이 영원합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는 온 세상이 변질되는 것으로 가득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본성이 변질되는 것들에 더 쉽게 동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첫 타락도 그렇습니다. 하와는 이미 에덴동산에 있는 많은 과실들을 먹고 있었지만, 그것들로 만족하지 못하여 사탄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손을 뻗었고, 그로 인해 인류는 타락했습니다. 사람은 뭔가 새로운 것들을 접해보고 싶은 본능을 가진 것 같습니다.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가 권태를 느끼면서 한눈을 팔게 되는 것이라든지, 첫 출근하면서 감격하던 직장에 싫을 느끼고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마음 역시 그렇습니다. 신앙에 첫 눈을 떴던 교회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을 하다가 급기야는 다른 교회를 옮겨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처음 걷던 길에서 너무 많이 벗어난 듯이 보입니다. 마치 아침저녁으로 늘 걷던 산책로에 싫증을 느껴 새로운 길로 접어든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새로운 길이 우리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실상은 사람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해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테크닉에 더 의존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복음을 말했지만, 복음은 포장지일 뿐 그 안에는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겸손의 모범을 말하면서도 속 깊은 곳에서는 한 계단이라도 더 높이 서려는 욕망이 부글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을 실천하기도 하지만, 그 사랑은 우러난 것이 아니라 기획된 냄새가 날 때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자 한 사람의 가치를 알면서도 소자를 외면해 왔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처음 걷던 길에서 벗어난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지금 우리는 점점 낭떠러지로 가까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2015년을 시작하면서 다시 원점에 서길 원합니다. 2천여 년 전 갈릴리로 돌아가 거기서 말씀하시고 병자들을 어루만지시던 예수님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덧놓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 그리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흘리시던 그 눈물을 다시 주목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던 그 보혈이 얼마나 붉고 진한 사랑인가를 다시 느껴보길 원합니다. 아울러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생명의 능력을 가진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첫 사랑을 잃어버림으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 그 첫 사랑의 원점에 다시 서길 원합니다.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던 그 날로, 세례를 받던 그 날로, 직분을 받던 그 날로, 안수를 받고 임직하던 그 날로, 목회지에서 첫 설교를 하던 그 날로 돌아가 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 봅시다. 곁길로 나오라고 유혹하는 사탄을 뿌리치고, 오직 예수님만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6:24)’란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 첫 사랑이 변치 않도록 살아봅시다. 2015년, 다시 원점에서 출발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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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가정칼럼]새해, 행복 습관을 쌓기 위한 원칙
    “습관들을 지배하지 않으면 습관들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Master your habits or your habits will Master you)라는 말이 있다. 버릇은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볍지만 머지않아 밧줄처럼 튼튼해진다. 따라서 습관을 정복하는데 인생의 성공이 있다. 무엇보다 습관은 습관으로만 정복된다. 따라서 나쁜 습관을 근절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나쁜 습관과 경쟁이 되는 새 습관을 기르는 일이다. 여기 새 습관으로 나아가는 좋은 길이 있다. 맥주병 마개와 같이 병뚜껑에 주름이 여러 개 나있는 것을 ‘크라운“(왕관)이라 부른다. 어느 병뚜껑이든 펼쳐진 지름은 32mm이고 6mm마다 홈이 나 있으며 21개의 주름을 갖고 있다. 이는 피라미드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주름이 21개일 때 병마개의 견고함과 밀봉 상태가 가장 우수하기 때문이다. 병뚜껑만일까? 암탉도 딱딱한 달걀을 품고 21일이 지나면 병아리가 되어 나온다. 1. 두려움은 당연하다. 숨기지 마라. 스코트 팩은 말한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뇌 손상의 증거다.” 두려운 곳에 길이 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에는 공기 저항을 받는다. 비행기는 공기 저항이 있기 때문에 하늘을 날 수 있다. ‘체중감량을 하다 쓰러지지 않을까?’ ‘금연을 하다가 친구를 잃지 않을까?’ ‘술을 끊는 일로 사업상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등등. 그러나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은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하라. 2. 핑계를 버려라. 가장 먼저 정복해야 할 습관은 ‘탓’이다. 선택과 성공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 존재하지만 실패에는 수천 수만 가지의 변명이 따른다. 습관을 정복하려면 탓을 버려라. ‘친구 탓’ ‘환경 탓’ ‘부모 탓’ ‘날씨 탓’ ‘건강 탓’... 결국 버려야 하는 것은 「탓 증후군」이다. 3. 긍정적 사고로 나아가라. 생각이 해답이다. 습관이란 내가 진리라고 믿는 생각의 결정체다. ‘자살’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하루야마 시게오는 “좋다 될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다「플러스 발상」을 계속하면 뇌에 좋은 호르몬을 분비시켜 사람의 의욕 고취, 인내력과 창의력 강화, 건강증진에 도움이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 몸무게를 빼겠다는 목표보다 나의 몸에 안식년을 선포하고 금식보다 몸의 「대청소의 날」이라 선포해 보라. 한결 의미가 있어지고 쉬워진다. 4. 쉬운 것부터 단계를 따라 구체적으로 시도해라. 1Km를 가는 것은 시련이고 1미터를 가는 것은 어렵지만 1센티를 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금연을 위해서라면 점차 개비 수를 줄여 나가는 것은 물론 니코틴 함량이 낮은 담배로 서서히 옮겨가 금단증상을 충분히 극복한 뒤 끊는 것이 지혜롭다. 몸무게를 뺀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번 5월까지 5킬로를 빼겠다는 따위의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일곱 번만 해라. 길게 잡지 마라. 작심 삼일이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곱 번만 하면 21일이 된다. 21일이면 계란도 생명으로 부활한다. 모든 병 뚜껑은 주름(크라운)이 21개다. 피라미드의 원리에 따라 가장 견고한 밀봉상태를 가지게 되어서다. 새로 태어난 아이도 세이레가 지나 외출이 허용되었다. 면역체계의 생성 때문이었다. 평생동안 술을 안 마시겠다는 것보다 단지 오늘 하루만 절주하자고 다짐해라. 성공의 열쇠는 오늘 하루에 있다. 6. 그 날 그 날이 첫 날이 되게 하라.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란 어제 죽어갔던 사람들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던 내일이었었다. 그토록 소중한 한 날로 맞이해라. 그래서 매일 매일 새롭게 시작해라. 날마다 새로운 결심으로 다짐한다면 이루지 못할 약속은 없다. 오늘이 새로 시작하는 날이다. 아침운동의 첫날이다. 「5분 행복」의 첫날이다. T.V 안보기 첫날이다. 매일 그렇게 다짐해라. 첫날은 누구에게나 의욕을 가져다 준다. 21일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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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교회법률상식]리폼드 뉴스의 권징 제110조에 관한 왜곡된 해석
    -헌법에 “목사가 노회에 이명청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직접규정은 없어 -노회가 이명서를 교부해 주는 직무규정이 곧 이명청원서 제출 근거 규정 리폼드 뉴스가 “신현만 목사의 교회 분쟁상담의 딱한 사정”이라는 당치도 않는 머리기사(2014.11.22.일자 입력)를 보도하면서 권징 제110조의 왜곡된 해석으로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 기사 내용에 혼란을 주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총회가 권징조례 제110조를 근거해서 ‘헌법대로’라고 답변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순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권징조례 제110조는 목사의 이명청원을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한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110조는 A노회 목사가 B노회로 가겠다고 이명증서를 받은 후에 B노회로 가지 아니하고 C노회나 D노회로 가면 안 된다는 규정이다.” 여기에서 리폼드 뉴스는 권징 제110조에 관하여 포괄적인 해석을 피하고 부분적인 해석으로만 일관했다는 점이다. 물론 리폼드 뉴스가 해석한 것처럼 권징 제110조의 규정은 “A노회에서 B노회로 가겠다고 이명증서를 발급 받은 후에 B노회로 가지 아니하고 C노회나 D노회로 가면 안 된다”는 부분적인 해석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리폼드 뉴스가 “A노회에서 B노회로 가겠다고 이명서를 받은 후에”라고 언급한 내용 자체에서도 목사가 A노회에서 B노회로 가겠다는 이명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것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헌법에 근거하여 이명청원서를 제출했다고 동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문맥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징 제110조는 목사의 이명청원을 할 수 있는 근거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고 일관하는 것은 왜곡된 헌법 해석에 다름 아니다. 그 이유인즉 장로교회 정치의 대원리에서 하회의 고유한 특권은 상회에 청원권이요, 상회의 고유한 특권은 하회의 청원에 대한 허락권(정치 제10장 제6조 2항)이다. 이와 같은 고유한 특권에 의하여 하회의 청원 없는 상회의 허락은 있을 수 없고, 상회의 허락 없는 하회의 시행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상회는 하회의 치리회에서만 헌의를 받을 수 있도록 헌법은 규정하고 있으나, 고소장(권징 제7조), 소원장(권징 제84조), 상소장(권징 제94조), 이명청원서(권징 제110조), 진정서(제2회 총회록 p.32) 등은 치리회가 아닌 개인도 상회에 청원할 수 있는 특례 규정을 두고 있다. 그 중에 목사의 이명청원서를 노회에 제출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는 권징 제110조에 노회가 “목사, 강도사, 목사 후보생에게 이명서를 교부할 때에 그 지정한 노회의 명칭을 분명히 기입할 것이요”에서 노회가 이명서를 교부하는 근거는 목사가 이명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목사가 가는 노회도 분명히 기입하였기 때문에 “지정한 노회의 명칭을 분명히 기입할 것”이라고 명문화 한 것이다. 따라서 “노회가 이명서를 교부”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권징 제110조 안에는 이명서를 교부받는 자가 본조에 근거하여 이명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노회가 본조에 근거하여 이명서를 교부해 주는 법적 근거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법리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목사, 강도사, 목사 후보생은 다른 노회로 옮기려 할 때 노회에 이명청원서를 제출해야 한다.”라는 직접적인 명문 규정이 헌법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권징 제110조에 목사, 강도사, 목사 후보생의 이명서 교부에 대한 노회의 직무수행 규정과 정치 제10장 제6조 3항에 노회의 목사 이명을 관리하는 직무규정과 권징 제114조에 이명자의 이주기간에 관한 규정이 있을 뿐이다. 헌법이 정한 목사의 이명청원서를 제출하는 법적 근거는 이명을 원하는 목사가 노회로부터 이명서를 교부받는 노회의 직무규정인 권징 제110조와 정치 제10장제6조와 권징 제114의 이주기간의 규정이 곧 이명청원서를 제출하는 법적 근거가 분명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리폼드 뉴스가 권징 제110조는 목사가 이명청원서를 제출하는 법적 근거 규정이 아니라고 고집을 한다면 권징 제110조와 동 제114조와 정치 제10장제6조 외의 헌법 규정으로서 “목사가 이명청원서를 노회에 제출해야 한다.”는 직접적으로 명문화 된 법적 근거를 반드시 제시해야 한다. 결론으로 한국 장로교 100년의 역사는 목사와 강도사와 목사 후보생이 노회 소속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권징 제110조와 동 제114조와 정치 제10장 제6조 등에 근거하여 노회에 이명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노회 역시 권징 제110조와 동 제114조와 정치 제10장 제6조 등을 근거하여 청원자에게만 이명증서를 교부해 왔다. 이와 같은 한국 장로교회 100년의 역사가 “목사의 이명청원서는 권징 제110조를 근거로 노회에 제출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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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 [성경인물탐구]형제들의 시기로 팔려간 요셉(2)
    요셉의 꿈 이야기는 그에 대한 형제들의 분노를 자극시켰고 급기야는 요셉의 생명을 해하려는 모의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형제들이 양을 치러 세겜에 가서 있을 때에 요셉은 아비 야곱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갔습니다.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목격한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그들은 요셉을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맏형 르우벤은 요셉의 생명을 구하려고 요셉을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던지자고 제의했습니다. 르우벤의 제의에 따라 요셉은 옷이 벗겨진 채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형제들은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은 이십 개에 그를 팔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은 형제들의 악행은 천인공노할 일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계획과 뜻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후에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창 50:20)다고 말함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길을 선한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정직히 행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갔지만 그 곳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성실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보디발 가정의 총무로서 신실히 행하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미디안사람 상인들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갔을 때 바로의 신하 시위 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사서 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케 되었습니다. 요셉의 주인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의 모든 일을 형통케 하심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행사는 이방 사람이 보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요셉은 억울하게 종이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신실한 모습을 주인에게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신임하게 되었고 그를 자기 집의 가정 총무로 삼아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쳤습니다. 요셉의 형통함은 하나님을 항상 가까이하고 사랑함의 결과였습니다. 다윗이 복 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행사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같이 다 형통할 것이라고 노래한 것과 같이, 요셉은 하나님과 늘 동행함으로써 모든 행사가 형통하는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는 세상 사람에게도 인정과 칭찬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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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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