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함께 생각해 봅시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삼고 이승만은 건국대통령으로 인정해야 사람마다 태어난 생일이 있다. 그와 같이 나라도 태어난 건국절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부끄럽게도 건국절이 없다. 실은 건국일이 있지만 공인된 건국일이 없다. 아마도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뿐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가 ‘건국’이라는 말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지금 청소년의 90%와 일반 국민의 65%가 건국일이 언제인지 모른다. ‘건국’이라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한 원인은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려는 반 이승만 세력이 ‘건국’이라는 말이 일상에서 사라지도록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가 보고 놀라는 오늘의 대한민국에는 건국절도 없고 건국기념관도 없다. 미국에서는 한국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탄신 140주년과 서거 50주년을 맞아 탄신을 기념하고 서거를 추모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우리나라 건국대통령을 외국에서도 그토록 추앙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건국대통령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건국’이라는 말조차 사용하기 싫어하는 세력이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20대 청년기에는 암울했던 구한말의 사회개혁과 민중계몽가였고, 30~60대까지는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을 거점으로 평생토록 독립투사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초대 대통령이었다. 70대에는 혼란한 해방정국과 공산, 사회주의가 풍미하던 세계적 시대상황을 극복하고 드디어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이다. 신생국 대한민국이 채 정착하기도 전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에 그는 외교역량을 발휘하여 미군과 UN군을 1주일만에 참전시키는 쾌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호국영웅이기도 하다. 6.25전쟁의 휴전이 불가피해지자 이를 빌미로 미국을 회유협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고 지금까지 우리 국민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수 있도록 한 외교와 정치의 달인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지금이라도 당국은 중구난방의 건국일 논란을 정리하고 대한민국이 탄생된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임을 명쾌하게 결론 내리고 이 날을 국가의 경축일로 제정하여 광복절과 나란히 온 국민이 기념하고 경축해야할 것이다. 또한 한 평생 건국을 위해 고생하고 종내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해야함은 물론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9-24
  • [목회자 칼럼] 조국, 하나님의 선물 ①
    ‘선물’은 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가치와 무게가 달라진다. 귀하신 분, 높으신 분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면 그 선물은 더욱 귀하고 소중하다. 그러므로 잘 가꾸고 잘 간수해야 한다.「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 대한민국,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삶의 터전으로 허락해 주신 위대한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민족에게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주셨다. 우리나라 삼천리 반도는 화려한 강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단으로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답기가 그지없다.그리 크고 넓지는 않지만 어느 한 곳 단 한 뼘이라도 허술하거나 쓰지 못할 땅이 없다.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이토록 뚜렷한 나라가 지구상에 별로 없다. 여름이 되면 동해, 서해, 남해 해변에는 아름다운 해수욕장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추운 겨울이 오면 산악 지방에는 엄청나게 많은 눈이 내려 여기 저기 스키장이 펼쳐진다.하나님이 크게 복을 주셔서 기름진 땅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하다. 이 비옥한 땅에서 생산되는 오곡백과는 그 품질과 맛이 참으로 우수하다.나는 우리 선교사님들이 낯선 이국땅에서 선교 사역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가장 간절한 소망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오곡백과를 실컷 먹어 보는 것 이라고 털어 놓을 때 정말 감동을 느꼈다. 어떤 선교사님은 우리 땅에서 재배된 배가 먹고 싶어서 너무 힘들어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백화점은 말 할 것도 없고 재래시장과 골목시장 심지어 마을 가게에 까지 수북수북 아름답게 줄지어 쌓여 있는 온갖 과일들을 길을 가면서 바라볼 때 나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그리 크지도 넓지도 않는 우리 강산에서 어쩌면 저렇게 다양하고 잘 생기고 그 맛이 뛰어난 과일들이 많이 생산되는 것일까? 나는 자주 감탄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행복해 한다.동해, 서해, 남해 삼면의 바다에는 풍족한 각종 어족과 해산물이 넘쳐난다.그 품질은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 바다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최상급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땅과 바다를 기름지게 해 주시는 결과이다.한번 더 눈을 들어 바라보자. 농경과 각종 산업, 삼림(수목)에 필수적인 것은 강수량이다.강과 하천에 물이 풍부해야 한다. 물은 그 수요가 절대적이다. 우리 한반도는 작은 땅이다.중국의 50분의 1이요 러시아의 100분의 1이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 땅은 사막이 많고 동토도 많다. 우리나라 전 국토는 단 한 평(坪)도 버릴 것이 없다, 아름답고 비옥하다. 22만 평방킬로미터의 작아 보이는 땅이지만 저 아름다운 강(江)들을 보라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남대천,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동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이 한반도를 굽이굽이 마치 사람의 몸의 핏줄처럼 감싼 채 흐르고 있다.열차를 타거나 승용차를 타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이 아름다운 강들과 이름 없는 작은 하천(河川)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흐르고 있는 맑고 풍부한 물을 바라볼 때 나는 늘 행복해지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또 이 땅의 산(山)들은 어찌 그리 잘 생기고 많은지 ! 한반도의 북쪽은 놓아두더라도 설악산, 태백산, 오대산, 두타산, 대성산 향로봉, 북한산, 관악산, 인왕산, 도봉산, 대둔산, 덕유산, 월악산, 무등산, 금오산, 한라산, 지리산, 그리고 우리 주변의 황매산, 가지산, 무척산, 무악산, 금정산, 장산, 황령산, 천성산, 구덕산, 천마산, 승학산, 고갈산 ... 사방이 온통 산뿐이다. 산들은 하나같이 삼림이 빽빽하게 우거져 아예 발을 들여 놓을 수 없도록 울창하다. 여름 산들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고 건강하다. 바라만 보아도 흐뭇하고 행복해진다.아~ 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인가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15-09-10
  • [교회법률상식] 총회 유령 위원회가 노회에 하달한 유령 공문(2)
    2. 유령 공문의 실상(實相) 설령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를 인정한다고 가정할지라도 “위원회 심사의 원칙”에 의하여 위원회는 총회장 명의로 노회에 공문을 하달할 수는 없고, 위원회가 활동한 결과에 대하여 다음(제100회) 총회에 “이렇게 화해했습니다”라는 보고이거나 “화해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보고만 하는 것이 위원회의 한계이다. 그런데 치리회가 아닌, 그것도 유령 위원회가 “제99회 총회 특별재판국 보고는 잠재하고”라는 결의를 하고 총회 결의에 반하는 유령 공문을 조작하여 노회에 “제98회 재판국 판결 보고대로 처리하기로 결의하였기에 … 이행하여 주시고”라는 유령 고문을 하달하면서 변조된 판결문까지 첨부하여 하달하였다고 하니 천하에 이런 망나니 같은 행위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3. 법과 총회를 무시한 정치꾼들의 횡포 본 건은 합동 총회와 총회재판국은 “법이야 어찌 되었든지 고퇴만 두드리면 된다”는 말을 수시로 들었던 말이 사실로 입증된 사건이다. 제97회 총회 재판국의 동산교회 사건에 대하여 불법으로 고퇴를 두드린 재판이었는데 또한 그 판결문에 대하여 초유의 판결문 변조 사건으로 당시 재판국장이 세상 법정에서 이미 삼백만원의 벌금형을 확정 받은 바가 있고, 그 사건의 꼬리를 물고 총회가 조직해 주지도 아니한 유령 위원회가 “제99회 총회 특별재판국의 보고는 잠재하고” 그야말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변조된 문제의 판결문인 “제98회 총회 재판국 판결 보고대로 이행하여 주시고”라는 총회 결의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총회를 무시하는 안하무인격의 정치꾼들이 유령 공문을 조작하여 황해노회에 하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시한을 정하여 2015년 8월 17일까지 이행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유령 위원회가 “위원회심사의 원칙”도 망각하고 교회 헌법을 짓밟고 더러운 발로 총회를 밟고 서서 옥상옥이 된 해괴한 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아직 황해노회가 어떻게 처리하였다는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이제는 유령 위원회가 제100회 총회에 보고 사항을 무어라 작성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 걱정스럽기도 하다. 믿고 싶지는 않지만 들리는바 더욱 우려되는 것은 황해노회 동산교회 당회는 만약 총회가 유령 위원회의 불법적인 보고를 채용하거나 제100회 총회에서 교회나 노회를 상대로 이전 총회 결의에 반하는 어떠한 결의가 이루어질 경우 즉시 교단을 탈퇴하기로 결의해 놓았다고 하는데 유령 위원회는 이와 같은 실상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반총회적이고 위헌적인 불장난을 계속하고 있는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4. 결론 필자의 견해로 볼 때에 총회 임원회나 소위 동산교회 화해수습위원회는 교회법으로나 사회법으로도 완전히 종결된 황해노회 동산교회 사건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도 하지 말고 관여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여 진다. 하면 할수록 지금 회자되고 있는 총회 정치권간에 유착 관계의 의혹만 증대시킬 뿐이고, 화해나 수습, 조정, 합의 등의 단어가 유치한 말장난에 불과해 보이기도 하며 그 시효와 단계가 이미 물 건너가 버렸기 때문이다. 만일의 경우 정치꾼들의 오판으로 소위 황해노회 동산교회화해수습위원회 사건이 꼬리를 물고 다음 총회까지 이어진다면 역사적인 제100회 총회는 물거품이 되고 후대에 부끄러운 총회로 전락해 버릴 것이 자명해 보이지 않는가? 이제 제100회 총회는 이상과 같은 유령 위원회와 유령 공문에 대하여 전국 교회와 노회가 납득할 수 있도록 조사처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위탁하여 명명백백 불법 사실을 가려내어서 누구라도 두 번 다시 총회의 기강을 흔들지 못하도록 철퇴를 가함은 물론 무너진 총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딤후2:5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제100회 총회여! 코람 데오!
    • 오피니언
    • 칼럼
    2015-09-10
  • [성경인물탐구]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2)
    베드로는 예수와 함께 삼 년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 신앙적 교훈과 체험을 얻었습니다. 예수께 직접 듣고 직접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는 후에 그가 복음을 증거 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과 기사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메시야이심을 교훈하셨지만 백성 중에는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던 메시야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능력과 권위 있는 말씀으로 보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엘리야나 예레미야 정도의 선지자로 보기도 하고 헤롯에게 죽음을 당했던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자신과 함께 다니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예수에 대한 정확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며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반석 위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 대한 이러한 고백은 모든 성도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모든 교회가 고백할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을 최초로 함으로써 모든 믿는 이의 대표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영적인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깨달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복 있는 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과 함께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광경을 보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예수께 건의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자신이 초막 셋을 짓되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를 위하여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광경에서 천국을 체험했고 그 황홀경 속에서 계속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는 하나님의 음성이 구름 속에서 들려 왔습니다. 베드로와 두 제자의 이러한 체험은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이심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시는 세 명을 데리고 산에 올라 그러한 광경을 목격케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세상 만방에 증거 해야 할 자들에게 이와 같은 광경을 보여 주심으로써 복음을 확신 가운데 담대하게 증거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의 부활 후에 이 사건이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데 주요 간증 거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성도의 신앙 내용은 이와 같이 사도들이 직접 보고 들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도는 성령 안에서 예수의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광채를 믿음의 눈으로 보고 증거 하는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참조, 히 11:1).
    • 오피니언
    • 칼럼
    2015-09-10
  • [성공칼럼] 기쁨과 쾌락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더러운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옳지 않은 방법으로라도 돈을 벌기 원하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돈 버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또 여행을 가는 것도 어떤 사람은 한 곳을 집중해서 자세히 보고 느끼고 깨닫는 것을 좋아하고 또 다른 사람은 여러 장소를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때 상대방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말이다. 즐거움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쁨이며 또 다른 하나는 쾌락이다. 기쁨과 쾌락은 즐거움이라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방향은 전혀 다르다. 기쁨은 안을 향하고 있으며 쾌락은 밖을 향하고 있다. 기쁨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쾌락은 보이는 것을 추구한다. 또 기쁨은 영원한 기쁨을 향하고 있지만 쾌락은 잠시 동안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쁨은 선한 것과 관계를 맺지만 쾌락은 악한 일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기에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은 천국을 향하지만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옥을 향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들의 인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현재의 삶도 결정되지만 내 사후의 삶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늘 선과 악 앞에서 선택해야 하며 육체와 영을 함께 갖고 있기에 기쁨을 추구하기도 하고 쾌락을 추구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 기쁨이며 어떤 것이 쾌락인가? 여기 한 사람이 있다하자. 그는 심심하고 외롭고 답답해서 인터넷 도박을 했다. 그러자 그 순간, 즐겁고 행복이 찾아왔고 심심하고 허전한 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더욱이 도박에서 많은 돈을 따기도 했다. 그 때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즐거웠다. 이것은 쾌락인가? 기쁨인가? 모든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갑질’이라는 것을 한다. 갑질은 회사의 사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들도 한다. 인터넷에 악플을 다는 사람들도 갑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힘으로 상대방을 무시하며 화를 내면서 상대방을 굴복시킨다면 이것은 갑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갑질로 상대방을 굴복시켰을 때 느끼는 희열은 기쁨인가? 쾌락인가? 도둑질, 지배욕, 소유욕, 자기자랑, 기분전환을 위한 쇼핑, 성적인 즐거움 등 이 모든 것은 다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원망하고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상담이나 말씀이나 훈련을 통해서 두려움과 미움이 사라지고 사랑과 희열이 생겼다면 이 때 느끼는 가슴 벅참은 기쁨인가? 쾌락인가? 또 내가 누구인지 알았을 때의 환희, 참된 진리를 깨닫고 느끼는 기쁨,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가슴 벅찬 느낌은 기쁨인가? 쾌락인가? 아무 조건 없이 그냥 사랑하고 좋은 것을 줄 때 생기는 행복감,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 나를 희생하며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것, 내 것을 내어주는 것 등은 모두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부부끼리도 쾌락을 추구할 수도 있고 기쁨을 추구할 수도 있다. 결혼하는 젊은 청년들이 결혼을 통해서 더 좋은 집, 더 좋은 환경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쾌락을 추구하면 사랑이 들어갈 수 없기에 이런 사랑은 거래이며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일 수 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 순간부터 사랑과 선으로 시작하지 않고 쾌락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도 부모의 기대에 차면 기뻐하고 어긋나면 화를 내고 미워하면 이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사이이다. 삶 속에서도 내 생각이나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기뻐하고 그것을 벗어나면 실망하고 미워하는 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인가?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인가?
    • 오피니언
    • 칼럼
    2015-09-10
  • [은혜의 말씀] 그 시대, 그 땅의, 그 사람 (시31편 13~15절)
    시편 31편은 다윗왕의 가장 어려운 시대에 기록한 내용인데 이스라엘 최고인물이 다윗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데이빗, 다윗을 롤 모델로 하고 미국의 링컨 대통령, 한국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리더십을 본받으려 합니다. 성경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가장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다윗이고, 다윗의 일생 중에 가장 어두운 시절 깊은 골짜기와 같은 시절에 기록한 내용이 시편 31편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가운데 13절에 「무리들이 비방 하고, 죽이려 덤비고, 사방팔방에서 두려움으로 다윗을 에워싸고 감쌀 때」 다윗이 하는 고백은 「그러하여도 나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주께 의지하고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15절에 「나의 앞날이 내 시대가 주님 손에 있기 때문에 주님 나를 건져주시고 주님 나를 들어 쓰시고 주님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다윗의 시편 내용입니다. 31편의 배경을 사무엘상 20편에 가서보면 다윗의 일생 중에 최악의 시대, 가장 힘든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서 계속 피난을 다닌 지가 십년입니다. 십년동안 떠돌이 생활, 왕따를 당하고 피난 생활을 하는데 사울 왕이 그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니 사울 왕과 같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을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 와중에 쫓고 쫓기고, 도와주고 하는 가운데 다윗이 시편을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사방팔방 전후좌우에서 덤비니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동서남북 전후좌우가 막히고 에워싸도 하늘문은 열린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내 성적표나 반응을 보고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실패할 수 없는 사랑, 변질이 안 되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으로 다윗을 건져주신다는 게 16절 말씀입니다. 그 시대, 그 지경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응답하는가? 선택하는가? 의지하는가? 가 그 사람의 미래를 결판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다음에 반드시 심판이 있는데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한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시편 90편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고, 팔십이고 강건해 보았자 팔십이지만 그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 신속히 날아간다. 너의 생명이 무엇이냐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이사야 41장10절에 한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내 시대가 주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월을 아끼기만 하면 안 됩니다. 세월을 내가 얼마나 채워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때를 분별하고, 때를 열어가고, 때를 채워가야 됩니다. 영적으로 그 시대를 분별하고 때를 열어가야 됩니다. ‘내 미래가 내 시대가 주님 손에 있사오니’ 저는 이 고백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이 더 험악한 세월, 더 까칠한 세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마음이 엉클어져서 이 패역한 세대가운데 지치고 상해서 마음의 트라우마가 많겠지만 오늘 성경을 보면 다윗은 전혀 트라우마 얘기가 없습니다. ‘나는 상처가 많습니다. 트라우마가 있다’는 말을 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송한 것입니다. 이 시대에 쓰임 받은, 이 시대의 향기로운, 이 시대의 독특한 칼라로, 독특한 멜로디로 여러분만의 고백을, 여러분 나름으로 쓰임 받는, 여러분만의 연주를 여러분만의 노래를 성군다윗처럼 하시고, 이스라엘의 노래잘하는 사람, 영향력 있고 멋지게 쓰임 받은 다윗처럼, 이 시대 고통을 감당하고 이 시대, 내 시대가 주님 손에 있는 줄로 믿고, 의지하고, 주님 손에 꽉 붙들려서 오늘 하루도 감당하는 우리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15-09-10
  • [교회회계] 교회 재무제표의 분석과 활용
    2010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초대형 복음주의 교회인 ‘수정교회’의 파산을 통해 우리 교계는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교회 도산건수가 줄지 않고, 심지어 과도한 부채를 상환하지 못해 이단단체등에 자산을 매각하는 사례가 계속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본 칼럼의 목적은 교회의 재무제표 분석과 활용방법을 찾아보는 데에 있다. 즉 지금까지 제1-6회 칼럼을 통해 작성된 운용성과표와 재무상태표를 이용, 교회 재산관리에 필요한 분석과 활용방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구체적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무제표 결산자료에 나타난 수치의 의미를 파악하고, 연도별 비교를 통해 추세분석을 한다. 즉 사전에 편성한 예산과 비교해 달성된 수익의 정도를 파악하고, 비용과 자산구입, 부채상환등을 위해 소요된 지출이 목적에 맞추어 적절하게 집행되었는가를 분석한다. 또 연도별 비교를 통해 교회의 재무구조가 건전하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화폐액으로 표시된 재무제표의 자료를 백분율(%)로 수정하여 공통형 재무제표를 작성하고, 각 항목간의 구성비율을 검토한다. 즉 수익합계100을 기준으로 십일조등 각 헌금과 기타수익의 구성비율을 파악하고, 지출의 경우도 예배비, 사례비, 선교비, 건축비, 구제비등 각 항목 비율을 분석해 교회 고유의 목적에 합당한 균형있는 지출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자산도 전체금액에 비교해 토지, 성전, 사택, 차량운반구, 기타자산등의 구성비를 파악해, 불필요한 자산의 구입을 줄이고 효율적 관리가 이루어지게 한다. 셋째, 재무제표의 항목을 분자/분모에 적용해 유동성, 성장성, 수익성, 효율성 등을 파악할 수 있는지표를 산출하고, 재무비율분석을 통한 의사결정을 한다. 유동성은 교회의 현금창출능력과 부채상환능력을 보기 위한 것으로 유동비율의 경우 [유동자산/유동부채]의 식으로 산출한다. 즉 1년 이내에 상환해야 할 유동부채에 비해 이를 갚을 수 있는 유동자산의 크기를 산출, 상환능력을 평가한다. 또한 부채비율은 [부채합계/순자산합계]로 계산, 재무구조의 건전성을 살펴보기 위한 것으로 건축등을 위해 대출을 할 경우 부채수준을 결정하는 중요요소가 된다. 이자보상비율은 통상 [영업이익/이자비용]으로 계산하나, 교회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아 영업이익의 구분이 어려우므로 [경상수익/이자비용]으로 산출한다. 경상수익은 총수익에서 특별헌금등 경상적으로 얻기 어려운 수익을 차감한 금액이다. 계산결과는 자산대비 부채가 7:3을 넘지 않도록 요구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기업회계가 5배이상의 이자보상비율을 바람직한 것으로 봄을 고려할 때, 필자는 경상수익 대비 이자비용은 5%, 원리금 균등상환은 10%을 넘지 않도록 추천을 하고 싶다. 즉 성도 1000명의 교회가 건축시 조달할 부채는 10억원, 연간 원리금 상환액 1억원, 이자비용 5000만원의 수준에서 결정할 것을 권면하고 싶다. 성장성은 교회의 총수익과 총자산, 순자산이 전년도에 비교해 어느 정도 변화하였는가를 나타내는 것으로 [당기말총수익-전기말총수익/전기말총수익×100]의 식으로 표시한다. 교회는 예배와 복음전도를 위한 성도의 신앙공동체이다. 또한 그 사명을 위해 노력할 때 부흥성장이 수반될 수 있으므로, 교회지도자는 성장에 대비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여야 한다. 수익성은 총자산 또는 매출액대비 순이익률을 보기 위한 것으로 [순이익/총자산]으로 산출하나, 교회는 이익 개념이 없으므로 유보가치를 적용하였다. 유보가치는 수익-비용=이월금액에 당해연도 조성한 기금과 신규 자산구입액을 합한 것이다. 즉 총자산 또는 순자산 대비 교회 미래 재산가치를 증가시킬 요인이 어느 정도 발생하였는가를 보기 위한 것이다. 효율성은 교회자산이 어느 정도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가를 파악, 추가 시설등이 필요한 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으로 총자산회전률의 경우 [총수익/총자산]으로 산출한다. 또한 기업회계에서는 없으나, 필자가 교회의 특성을 반영해 제시한 방법으로 성도수와 총자산과의 관계, 성도수와 총수익과 관계를 고려해 의사결정을 하는 것도 유익해 보인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상에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 즉 부채의 상환은 물론 그 어떤 도산도 없이 부르심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며, 또 이를 위해서는 교회 지도자가 끊임없이 재무구조를 검토하고 관리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음 호는 교회의 회계감사에 대해 설명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5-09-10
  • [시사칼럼] 아일란 쿠르디
    작년에 터키선교여행을 갔을 때 이스탄불에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시리아 사람들이 길거리 골목에서 “우리는 시리아 난민입니다. 도와주세요.(We are Syrian refugee. Please help us.)”라고 적힌 작은 팻말을 들고 구걸하는 장면을 곳곳에서 보았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의하면 수년 째 이어지는 내전으로 1,000만 명 이상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이 중 400만 명 이상이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더 이상 이들을 받아줄 나라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지난 2일 터키 보드룸(Bodrum) 해안에서 터키 민영통신 사진기자 닐류페르 데미르(Nilufer Demir, 29세 여성)가 찍은 사진 한 장이 지구촌 사람들을 경악과 슬픔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파란책 청바지와 붉은색 남방을 입고 모래사장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숨진 채로 발견된 3살짜리 아기 아일란 쿠르디(Aylan Kurdi) 때문입니다. 5살 형과 함께 아빠를 따라 월경(越境)하는 배를 탔다가 보트가 뒤집히는 바람에 숨진 꼬마 난민입니다. 100m 떨어진 곳에서 형 갈립(Galib)과 엄마도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인근 국가들은 물론 이슬람 대국인 터키조차 이들을 외면했기에 작은 배에 의지하여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피난처를 찾아 출아시아(exodus from Asia)한 길이었습니다. 외신은 이 사진에 “파도에 쓸려간 인류애(Humanity washed ashore)”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사진을 찍은 데미르의 생각도 같았습니다. “아일란이 핏기 없는 얼굴을 모래에 댄 채 엎드려 있었다. 충격을 받고 슬펐지만 이 비극을 알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비극이 오늘부터 바뀌기를 바란다.” 아일란의 죽음을 애도하는 세계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집트의 한 부호는 사재를 털어 그리스의 섬 하나를 사서 난민들을 수용하겠다는 호기로운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시리아계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이들 난민에 대해 공공연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하던 영국의 캐머런 총리는 여론에 밀려 시리아 난민 15,000명을 받아들일 뜻을 비췄습니다. 독일에 도착한 난민들을 환영하는 인파가 몰렸는가 하면 지난 7월 독일 방송에 출연해 메르켈 총리에게 직접 망명을 호소했다가 거절당해 울음을 터뜨렸던 팔레스타인 난민 소녀 림(14세)도 최근 거주허가증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일린의 주검이 발견되고 며칠 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럽의 모든 가톨릭 교구에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문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뉴질랜드까지 시리아 난민 200명 수용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시리아 난민 수가 급증하면서 한국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입었습니다. 2015년 1월까지 650여 명의 시리아 난민이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했고, 이 중 500여 명이 인도적 체류 비자를 받았습니다. 이번 아일란 사건으로 시리아 난민들의 망명 신청은 더욱 급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이 사태는 단순히 인도주의적 차원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무엘 헌팅턴의 말처럼 한국도 바야흐로 문명의 충돌 지점이 되었습니다. 시리아를 비롯한 이슬람 세력의 한국 진출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된다는 뜻입니다. 왜 독일이나 영국이 중동 지방의 난민들에 대해 그 동안 난색을 표해 왔겠습니까? 무슬림의 확장 속도는 무섭습니다. 난민으로 받아들인 무슬림들이 개종할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종교를 명분으로 어찌 아일란 같은 아이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신중하고 지혜로운 처사가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일을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15-09-10
  • [소강석 칼럼] 산을 오르며, 영혼을 씻으며
    산에 오면 속세를 떠나서 때 묻은 마음이 정결하게 되고 세탁이 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야산이 아니라 깊은 산에 은둔하며 사는 스님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나는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종교적 성향으로는 승려가 되었을지 모른다. 물론 나는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을 벗 삼아 살고 싶은 여린 순정이 있다. 아침에 계곡에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고 일어나고 겨울이 되어 눈 덮인 산사의 절경을 바라보면 산 그 자체가 천국처럼 느껴진다. 사람들 틈 속에서 살다보면 문득 공허할 때가 있다. 그때 산을 찾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다보면 번뇌가 쌓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러나 산에만 가면 잠이 절로 온다. 설악산 오색그린야드나 지리산 화엄사 입구에 있는 한화 콘도 같은 곳에서 청명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면 그 날 밤, 아무 잡념도 없이 그냥 툭 떨어져 버린다. 그런데 너무 바쁘다 보니까 산에 자주 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산을 찾으면 모든 스트레스와 시름을 다 잊어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같다. 사실 나에게 있어서 산은 세속에 오염되지 않은 에덴의 모형이고 그림자이며 원형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면 나의 내면에서는 꼭 하나님을 찾아오는 것처럼 일치가 된다. 그런데 너무 바빠서 산을 자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가 산에 가면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산에 와서’라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죄송합니다 / 너무도 오랜만에 와서 / 마음이 때 묻다 보니 / 몸도 함께 때에 묻혀 / 이리도 오랜만에 왔습니다 / 부끄럽습니다 / 쉴 새 없이 전화하고 / 사람 만나느라 / 분주하기만 했던 지난 삶들이 / 경건한 당신의 품 / 출애굽기의 세계에 와보니 / 수줍기만 한 마음 / 견딜 수 없네요 /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처음에 느꼈던 사랑 / 그 초심을 회복하여 / 다시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산을 자주 찾지 못하고 멀어지면, 나도 때 묻어가는 것은 아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바쁘고 일이 많을수록 산을 자주 찾으려고 한다. 한 때 미국의 40대 남자들이 번듯한 직장을 버리고 산과 사막을 찾아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현대인들은 물질만능시대를 살아가면서 때 묻지 않은 영성과 자연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대부분 군중 속에서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야성의 질주를 하며 살고 있지만 때로는 산에 와서 스스로 고독의 숲을 거닐어본다. 때로는 중세 사막의 수도사처럼 나만의 광야에 칩거해 본다. 나는 목회하면서 소원이 있다면 한 달이라도 깊은 산 계곡에 천막을 치고 자연인으로 살고 싶다. 아무도 없이 혼자 밥 해 먹고 빨래하고 시 쓰고 책 보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자연인으로 완전히 빠져버리면 안 되고 다시 활력을 충전 받아 생활 현장으로 돌아와야 하지만 말이다. 아, 오늘도 나는 영혼의 원형인 산을 오른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원초적 에덴의 신비 속을 걷는다. 산을 오르며, 영혼을 씻으며 도시와 멀리 떨어진 산 속에서 잃어버린 길을 찾는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15-09-10
  • [성서연구] 우리의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시편 18편 1절)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평화의 인사를 드리는 이유는 최근에 이 땅의 평화가 큰 위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목함 지뢰 도발에 이어 지난 20일에는 경기도 연천 지역에서 고사총과 직사포를 발사함으로써 엄청난 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일촉즉발의 전면전 위기로 치닫던 남북간의 군사 대결이 고위급 접촉을 통해 극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이번 위기 국면을 바라보면서 우리 국민들이 느낀 여러 가지 중의 하나는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번에 여러 가지로 우리를 위협했습니다. 포 부대를 비무장지대 안으로 전진 배치하는가 하면, 상륙용 공기부양정이 대대적으로 출동했습니다. 또한 잠수함정의 7할에 가까운 전력이 동시에 작전에 들어갔고, 우리는 잠수함의 위치를 알지 못해 불안해했습니다. 북한이 과시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수를 알 수 없는 특수부대가 있고, 화학무기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무기는 핵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미 북한이 핵을 보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를 통해 북한은 자신들의 힘을 나름대로 과시했다고 하겠습니다. 고위급 접촉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것은 다행이지만, 그 뒷맛이 떨떠름한 이유는 그들이 보유한 힘이 그대로 남아 앞으로도 언제든지 우리에게 위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협 앞에서 가지는 결심은 힘을 길러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군사적인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번에도 미국은 참 고맙게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언제까지나 미국을 의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자체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자주 국방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의 단결력입니다. 이번에 북한이 문제 삼은 것은 우리의 대북방송입니다. 야간에는 개성까지도 들리는 대북방송에 대해 북한은 신경질적 반응을 보여 왔습니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체제에 대해 자신감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정보가 차단된 북한 사회에 바깥세상 소식이 알려질 때 체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아무리 대한민국에 사회구조적인 갈등과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우리 체제는 북한보다 천 배, 만 배, 월등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에는 마음껏 하나님을 믿고 찬송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북한보다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승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것이 될 줄 믿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힘을 길러야 할 것을 역설한 대표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안창호 선생님은 일제의 억압 아래서 신음하면서 일본을 비난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잘 알았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보다 소리 없이 힘을 키우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그 분은 단결의 힘, 도덕의 힘, 지식의 힘, 금전의 힘, 인격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을 통해 힘을 키우자고 역설하셨습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힘은 어느 정도입니까?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별 힘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런 우리에게 다윗은 좋은 모델이 됩니다. 다윗은 시편 18편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약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없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힘>을 가져야 합니다. 아니 힘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믿음의 힘을 가져야 합니다. 한편으로 힘을 기르면서, 한편으로 연약한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양한 힘을 길러 수치스러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15-09-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