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목회자칼럼] “혹시, 부모 자격증이 있나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스승의주일 등을 보내며 교회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새롭게 여깁니다. 이번 글은 35년 동안 ‘십대의벗’이란 청소년교육센터에서 부모와 청소년들을 상담, 교육해 온 청소년 사역자인 저자가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초보운전 부모들, 자녀와 소통이 안되어 답답한 분들, 부모교육과 다음세대에 관심있는 분들, 믿음의 유산을 자녀에게 꼭 잘 물려주고 싶은 부모들>에게 전하는 ‘가정의 달, 부모 자격증’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사실, 저도 결혼이 뭔지, 자녀를 낳고 키운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고 결혼하며 아이를 낳았습니다. 잘 키우고 싶었지만 어떻게 키우는 것이 잘 키우는 것인지도 모른 채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한 문제이고, 별일 아닌 것 같은데 아이가 어릴 때는 부부도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지 참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사역한다고 온종일 교회서 시간을 보내고 자정 무렵에 집에 들어가면 아내는 육아로 인해 녹초가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내가 조금 힘을 내서 아내의 마음을 읽어주고, 공감해주며, 위로해줘야 하는데 나도 에너지가 바닥인 상태라 내 감정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아내와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매일 싸우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자녀들은 어떨까요? 이때 자녀들은 그 순간순간을 눈으로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 모아서 머릿속에 자신의 앨범을 만듭니다.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시킨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쌓여갑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길어지면 결국 자녀들은 부정적 자아상이 형성되어 삶의 태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자녀의 어린 시절 부모의 관계 및 갈등이 이렇게 큰 영향이 있다는 것을 부모로서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 어째서 다 키우고 난 뒤에 깨달았는지... 후회도 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음을 알고 부모로서 성숙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부모 자격증’을 얻으려면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요? 첫째, 자녀의 마음을 얻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한다고 부모 역할 다 했다며 자녀의 마음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보이지 않는 자녀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감정을 만질 줄 알아야 하며, 생각을 읽어줘야 합니다. 어쩌면 부모도 모르는 사이에 자녀의 마음속에 부모가 던진 수많은 화살이 박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둘째, 때로는 자녀 옆에서 침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발, 내 옆에서 조용히 있어 주세요” 아이들이 부모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이 이 말이라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자녀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때로는 부모의 속도보다 자녀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전문적인 대화와 소통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사랑을 담아 잔소리, 훈육을 하지만 그 말이 자녀에게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기 전에 양치를 해야 한다”는 부모의 요구가 있습니다. 1. <명령형, 강요형의 부모> “이, 꼭 닦고 자” / 2. <논리형 부모> “이 상하면 너만 고생한다” / 3. <설교형, 훈계형> “밥 먹고 나면 양치질해야 해. 지금 당장” / 4. <비난형, 비판형> “입에서 냄새 나면 누가 너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겠니?” / 5. <거부형, 반대형> “양치 하기 싫으면 저리가” / 6. <조롱형, 욕설형> “양치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데...” 혹시, 여러분은 위에서 열거한 6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하는가요?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랑과 수용의 언어가 아닌 명령, 논리, 설교, 비난 등의 대화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넷째, 쉬지 않고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면허증을 장롱에 오랫동안 묻어 두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끄집어내서 실전에서 써먹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를 어느 정도 길렀다고 배움을 멈춰버린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배움은, 특히 부모와 관련된 배움은 끝이 없습니다. 쉬지 않고 배워야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섯째, 말씀과 예배를 통한 부모 면허증을 획득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에너지의 힘은 엔진에 있듯 우리 자녀의 힘은 말씀과 예배에 있습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말씀을 보고 묵상하면 좋지만, 사실 쉽지가 않습니다. 부모들이 끊임없이 자녀들을 독려하고, 말씀의 자리로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가 먼저 말씀과 예배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예배의 부모 면허증’ 이제 한 번 따보시지 않겠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5-20
  • [부산기독교이야기] 한상동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강단 아래에서 인사하게 했는가?
    6.25 전쟁기 부산에서 체류하는 기간 이승만은 주로 미8군 교회당으로 가 예배를 드렸으나, 감리교도였던 그는 보수감리교회당에서 예배드린 일도 있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예배드린 일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한 가지 정리해 둘 것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화(戰禍)에 지친 피난민들을 만나고 격려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양성봉 경남지사의 건의에 따라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인 29일 주일 낮 예배 때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양성봉 장로는 이 교회 시무 장로였기에 대통령을 초량교회로 모시고 온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난을 통해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이날 한상동 목사는 신명기 11장 1절에서 9절까지 긴 본문을 읽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이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한상동 목사가 즐겨 봉독하던 본문이었다. 이 본문을 읽은 후 한상동 목사는 하나님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지킬 때 축복을 받고 나라가 강성해지며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설교 후 3장 찬송을 불렀다. “이 천지간 만물들아 복 주시는 주 여호와 전능 성부성자 성령 찬송하고 찬송하세.”라는 가사였다. 이어 담임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폐했다. 예배를 폐한 후 이 대통령은 담임목사의 안내를 따라 인사하게 되었는데, 그가 강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한상동 목사는 ‘아래 강단에서 인사하십시오.’라고 하여 대통령은 강단에 서지 못하고 강단 아래에서 인사했다고 알려져 있고, 이 일을 두고 한상동 목사는 대통령이라 할찌라도 강단에 세우지 않았던, 그래서 강단의 권위를 지켰던 목사로 널리 회자 되었다. 이 일은 한상동 목사의 미담으로 알려져 부흥사들의 예화로 원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실일까? 이 점을 심각한 왜곡으로 본 이가 초량교회 김성태(金性太) 장로였다. 1905년 7월 29일 경남 충무의 문화동 80번지에서 출생하신 김성태 장로는 교회 인근의 부산 초량동 824번지로 이주하셨고, 1947년 2월 25일에는 일신여학교 출신인 구소명(具小命) 여사와 혼인했다. 그의 가족은 오랫동안 초량교회에 출석했는데,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초량교회 예배 참석시의 목격자였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한상동 목사는 종전과 같이 하나님의 장중에 든 군의 필승을 역설, 강조하였고, 이날 부른 찬송가는 필승과 북진통일을 염원하는 삼천만 겨레의 우렁찬 합창곡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상동 목사가 강단에 세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 강단에 서지 않고 아래 강단에서 인사했다고 말한다. 한상동 목사는 이 대통령에게 강단에서 인사하도록 말했으나 이 대통령이 강단은 목회자가 서는 곳인데 감히 내가 설 수 없다며 사양하고 스스로 아래 강단에서 인사했다고 증언한다. 도서출판 광야를 운영하던 최수경 사장은 ‘한상동 목사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책을 편집하면서 『초량교회 80년사』를 집필했던 김성태 장로의 한상동 목사 관련 글을 전재(轉載)하기 위해 1986년 초에 김성태 장로를 만났을 때 그가 이 점을 증언한 것이다. 그는 최수경 사장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이 대통령은 미8군 군인교회 예배에 참석하시는 것이 상례였으나 종종 우리교회에 오셨지요. 당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목사님과 장로님들은 6.25 동란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맞아 통회와 승리를 구하는 애끓는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이 대통령께서 예배가 끝나고 자기 심중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한 목사님은 강대상에 이 대통령을 모시려고 하셨지요. 이때 대통령은, ‘주의 종이 말씀을 전하는 강단에 감히 설 수 없다’고 사양하여, 강단 아래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이 강단에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왜곡된 사실입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목격자인 김성태 장로의 증언은 신뢰할 만하고, 그의 영애인 김성로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 장로는 소천하기까지 기억력이 흐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성태 장로는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일생동안 가르쳤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신앙과 학자적 양심으로 사실을 증언함으로 왜곡을 바로잡으려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소소한 일화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진실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로마인들은 “진실은 모든 것을 이긴다.”(Omnia vincit veritas)라고 말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05-20
  • [서임중칼럼] 작은 자는 누구인가?
    불혹의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고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무엇부터 담임사역을 시작할까 생각하면서 첫 심방을 교회 성도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영세민 아파트 거주 가정부터 심방을 시작했다. 그 시간들 가운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다. 10평이 안 되는 방 한 칸에 대여섯 식구가 사는데 가장(家長)이 지체장애인이라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한 가정을 심방할 때면 으레 준비한 찬송가와 성경본문으로 시작을 하지만 이 심방은 형식을 깨고 먼저 그 한 가정 한 가정을 통해 30 여분 가량 이야기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들의 아픔을 듣고 나누며 함께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돌아온 날이면 늦은 밤까지 기도실에서 침묵으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시작한 목회 사역 1호가 사랑의 주일이었다. 1년 중 다섯 번째 주일이 있는 주일을 ‘사랑의 주일’로 명명하고 특별헌금을 하여 소외계층을 돕는 사역으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2호 사역이 장애인 초청주일이었다. 포항시내 여러 장애인단체와 연결하여 매년 4월 셋째주일에 1천여 명의 장애인을 초청하여 함께 하는 위로와 희망의 날이었다. 이 또한 지금도 계속되는 ‘함께’라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사역 중 하나다. 이어서 세계선교위원회를 발족하여 44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16개 국가에 협력선교를 하며, 국내 선교의 일환으로 9개 교회를 개척설립하고, 택시 타기 주일, 천사운동, 합동결혼식, 동호인선교회, 사랑의 순교현장, 목회자 세미나, 장학위원회, 노인대학, 여성대학, 100여 곳 미자립교회 후원, 중앙장터, 재활용센터, 만나의 집, 중앙도서관, 월간목회 보내기, 소년소녀가장 돕기, 영세가정 후원, 다문화가정 후원, 청소년 공부방, 선한이웃 진료소, 엘림복지재단 설립 운영,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회 문화선교 연구소를 건립하여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을 준비하던 중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업의 중심은 ‘작은 자’였다. ‘작은 자’란 누구인가?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작은 자를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비교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곧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작은 자다. 성경은 어디서도 비교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그 존재로서 가치가 있다. 그래서 창세기 1:1절의 창조가 ‘빠라’ 곧 무에서 유의 개념이고, 창1:21절의 창조가 개조창조이며, 창1:27절의 인간 창조가 모방창조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그러므로 그 존재 자체로서 존귀한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과 무진장의 가치성과 유일한 독특성이 인간 창조, 곧 ‘야차르’의 내용이다. 곧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유일한 독특성을 지닌 것이다. 높고 낮음, 잘나고 못남은 나의 상(想)이 상(像)을 만들어 낸 인식의 차이다. 즉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란 내 인식이 상대방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물은 흰색인데 파란 안경으로 보면 파랗고 빨간 안경으로 보면 빨간 것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 것이다. 여기서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개념이 성립되고 그리할 때 인간관계가 원만해지는 것이다. 즉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라는 복음의 삶이 연주되는 것이다. 4월을 보내면서 포항중앙교회 장애인 주일 설교를 하고 귀가했다. 코로나로 인하여 ‘장애인 초청 주일’ 행사는 하지 못했지만 성도님들에게 장애인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사랑의 관계는 잊어도 잃어도 안 됨을 역설했다. 아직도 곳곳에서 장애인들을 비교법으로 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정신적 장애인이 되는 것인가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상이 누구이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작은 자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3가지 비유를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셨다. 첫째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 자세를 열 처녀 비유로 깨우쳤고, 둘째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로 달란트 비유를 하셨으며, 셋째는 심판에 대한 비유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하셨다. 그 말씀의 절정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구체적인 표현을 하면서 ‘작은 자’를 사랑하고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교훈하셨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와 불순종하는 사람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양으로, 불순종한 사람을 염소로 비유했다. 그리고 양은 오른 쪽에 염소는 왼쪽에 분류를 하고 오른쪽에 축복을 왼쪽에 저주를 선언하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와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에 대한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이 아주 리얼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내가 주릴 때에, 내가 목마를 때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내가 벗었을 때에, 내가 병들었을 때에,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함께 해준 사람들과 외면한 사람들을 분류하고 축복하고 저주하셨다. 오른편 사람들이나 왼편 사람들이 공히 ‘언제? 우리가?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했을 때 결정적인 말씀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하지 아니한 것이, 나에게 한 것,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에게 작은 자는 누구이며 나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톨스토이’의 유명한 단편 소설 <세 가지의 질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현재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현재 내가 만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다.” 그 사람이 작은 자다. ‘헤밍웨이’는 선에 대하여 “뒷맛이 좋은 것”이라고 갈파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뒷맛 좋은 삶을 사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작은 자가 누구인가? 지금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2-04-29
  • [성서연구] 역사의 흐름을 인지하며
    유다 왕 여호야김 왕 4년에 향후 세계 판도를 바꿀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의 왕으로 즉위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주전 605년부터 562년까지 재위하였습니다. 그는 갈그미스에서 이집트 군대를 격파하여 대제국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 후 그는 갈대아 제국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런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을 때, 유다에서는 알았을까요? 어쩌면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주변 국가들에 새로운 왕의 즉위를 알리고 축하 사절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어쩌면 나중에서야 알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버지 나보폴라살이 죽은 후 전선에 나가 있는 느부갓네살이 서둘러 돌아와서 불과 3주 후에 즉위한 것을 보면 주변 국가들에 알릴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느부갓네살의 즉위를 알았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새로운 왕의 즉위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발생한 사건 자체 보다 그 사건이 가진 의미, 그 사건이 가져올 파장을 잘 분석하여 대처하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은 백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 대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백인들에게 내어준 채 초라하게 전락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을 때, 유다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냥 <주변 나라에 왕이 바뀌었는가 보다>라고 안연하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미칠 파장을 예의 주시하고 대처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그 새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고, 나라를 유린하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이 즉위하던 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그의 즉위가 가져올 파장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이것은 역사의 흐름에 대하여 무심하지 말고 대처할 것을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역사는 이런 점에서 역설적이고도 재미있습니다. 전에 고유가로 인해 세계가 몸살을 앓을 때, 이로 인해 생각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뜻밖에도 일자리가 늘어났다고 합니다. 기계로 하던 일 중 일부가 기계를 가동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을 동원하는 경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역사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 땅의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리에게 미칠 파장이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그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져 익사하지 않고, 잘 대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구원의 길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모든 역사가 그분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유다를 위협할 때,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역사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소용돌이치는 역사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간절히 의지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혼란 속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아울러 세계사적 흐름을 깊이 인식하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04-29
  • [시사칼럼] 세습사회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져버린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세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한 군데가 세습 문제 때문에 얼마나 큰 물의(物議)를 빚고 있는지를 목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 작업장에서 큰 사고 하나가 발생하기 전에 동종의 크고 작은 사고가 수십 · 수백 번 이미 발생한다는 ‘하인리히 법칙(1 : 29 : 300)’은 산업재해 분야의 고전이지만 인간사회의 여타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유독 그 교회만 세습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계 전반에 걸쳐 아름답지 못한 세습이 만연하다가 마침내 교회를 넘어서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반사회는 과연 “세습”으로부터 자유로울까요? 교회에서조차 세습이 문제가 되는 시대라면(1:), 이미 그 사회에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습 현상이 많은 영역에서(29 : 300) 횡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최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선(人選)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각료 후보자들 하마평이 오르내리면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사실들이 있지요. 바로 ‘자녀’ 문제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의사 출신의 한 인사는 자질 논란도 일었지만 결정적으로 자녀의 이례적인 의대 편입 및 자신이 병원장으로 근무하던 곳에서 인턴 과정을 거친 점 등이 집중적인 성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외교부 수장으로 거론되는 인물 역시 한 자녀가 이중국적을 가진 채로 특례입학을 했다는 문제 등이 불거져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판사 출신인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 역시 슬하의 아들과 딸이 ‘아빠 찬스’를 십분 활용해서 자신과 관련 있는 기관이나 회사에서 인턴 활동을 하거나 아예 취직의 기회를 얻지 않았나 하는 거센 의구심에 직면했습니다. 이러니 앞서 유사한 문제로 실각하거나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들킨 죄’밖에 없다는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유사한 사례들을 전수(全數) 조사해 보자는 파격적이지만 메아리 없는 제안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영국의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2014)에서 이미 현 시대를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 시대로 규정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세습사회’를 경고한 바 있습니다. 한국도 얼마 전 한 잡지에 “우리는 ‘세습사회’에 살고 있다”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김정헌, 2020. 2). 그렇다면 어떤 “세습”일까요? “한편에서는 부모가 사교육, 인맥, 문화자본 등을 통해 자식에게 학벌과 일자리를 물려주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손쉬운 계층의 대물림이 심화되고 있다.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바야흐로 ‘상속의 시간’ 곧 ‘부동산 세습사회’가 다가오고 있다.”(안선희, 2020. 10) 현대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습은 이와 같이 전(全)방위적입니다. 사회 계층에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일대학교의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는 “엘리트 세습”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귀족주의(A New Aristocracy)가 중산층을 붕괴시킬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반면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세습이다!”라고 일갈하면서 한국은 중산층이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세습하려 한다는 견해도 등장했습니다(조귀동, 『세습중산층사회』) “세습”이 무조건 악하다는 명제는 항상 옳지만은 않습니다. “3대 째”라는 말만 검색해도 “3대 째 금하칠보 장인”, “3대 째 화살 만드는 가족” 등 “세습(?)”을 칭송하는 많은 기사를 찾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4대 째 한지 명인”, “4대 째 나침반 장인” 그리고 “5대 째 옹기 장인”은 어떻습니까? 이런 세습은 재산과 권세가 아니라 가난과 희생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타인이나 공동체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런 세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세습”이 있었습니다. 귀족사회였으니 계층의 세습은 당연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고넬료(Cornelius)”(행 10:1)나 “글라우디오(Claudius)”(행 11:28, 23:26)는 당대 최고의 로마 귀족 가문들이었습니다. 계층뿐만 아니라 신분을 세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직전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라고 하지 않았던가요?(요 18:13) 하지만 예수께서 질책하셨던 세습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도 세습을 하셨습니다. 요셉 대신 목수로서 가계를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세습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04-29
  • [은혜의말씀] 순종의 첫 걸음(출4:18~31)
    드디어 모세는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첫째는, 장인의 허락을 받게 하십니다.(18절) 그리고 둘째는, 모세의 마음에 과거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십니다.(19절) 우리도 간혹 과거의 상처와 실패의 늪에 빠져, 영적 침체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때문에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두려움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회복의 날개를 폅시다. 모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했습니다.(20절) 사실 이 지팡이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칠 때 들고 다녔던 마른 막대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그 지팡이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질 것입니다. 지팡이 같은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광야의 한 숙소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입니까?(24-26절) 할례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십보라가 급히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이루어야 할 사람입니다. 지도자가 될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채,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명보다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요일 1:7) 예수님의 보혈로 과거의 모든 아픔과 상처, 모든 은밀한 죄를 해결하고,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걷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일 때문에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은 미디안으로 돌아가고, 모세는 혼자 애굽으로 갑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닙니다. 모세가 애굽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맞이하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그리고 어디 아론만 모세와 동행했습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한시도 모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3:12) 사명을 향해 가는 길은 그렇게 외로운 길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길을 걸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사직동 모든 성도님들이, 순종의 첫걸음을 내딛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04-29
  • [교회와세금] 교회의 법인세 납부와 면세 기준
    소득세와 법인세는 일정 과세기간 발생한 소득에 대해 부과하는 조세이다. 또한 통상 개인에 부과하는 세금을 소득세(income tax), 법인에 부과하는 세금을 법인세(corporation tax)라 부른다. 2020년 우리나라의 법인세 징수액은 총55.5조원이다. COVID-19의 상황 속 전년대비 16.7조원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득세 93.1조원과 더불어 국세수입의 52.0%에 이를 정도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법인세 항목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회계실무에 적용할 경우, 세금을 납부해야 할 경우와 그렇지 않음이 분명히 나뉘어짐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행세법은 교회와 같은 비영리법인의 경우, 고유목적의 활동과정에서 생긴 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있다. 즉 교회 고유의 예배 활동과정에서 성도들이 낸 헌금이나 헌물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 이는 교회 자체가 수익사업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전반에 유익을 주는 공익적 성격의 기관으로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교회가 이러한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신고절차를 숙지하고, 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행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국세기본법(제13조)에 따라 교회 설립시 관할 세무서에 신고를 하고, 고유번호 등록증을 교부 받아야 한다. 성도에 의한 헌금 수입은 과세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성도들이 헌금을 하고 소득세법에 따라 연말정산 등을 위해 기부금(contribution) 발행 신청을 한 경우, 반드시 그 영수증 내역을 다음연도 6월까지 관할 세무서에 신고를 하고, 관련 자료를 5년간 보관하여야 한다. 둘째, 교회의 고유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취득한 자산은 3년 이상 고유목적에 맞게 사용하여야 한다. 만약 동 기간 내에 자산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 경우 과세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소급하여 취득세를 납부하거나 처분시 양도차액 소득에 대해 세금을 납부하여야 한다. 셋째, 교회가 만약 수익사업(부동산임대 등)을 하는 경우 사업자등록증을 교부 받아야 한다. 사업자등록증은 부가가치세가 과세되는 일반 사업자와 면세사업자로 구분되며, 고유번호 등록증은 부가가치세 납세의무가 없는 사업자에게 과세자료의 효율적 처리를 위하여 고유등록번호를 부여하는 것으로 수익사업이 없는 교회는 이에 해당한다. 넷째, 비영리법인의 수익사업은 제조업, 건설업, 도소매업, 부동산 및 서비스업 사업 중 수익이 발생하는 것으로, 교회에서도 이러한 사업을 하거나 고유 목적활동에서 벗어난 경우 법인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유료 형태의 카페, 학사관, 선교원, 기도원 운영 등은 그 대상이 될 소지가 있다. 즉 이 경우 교회도 수익이 발생하면 세금을 납부하여야 함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즉 현행세법은 교회의 법인세에 대해, 고유목적 활동과정에서 발생한 헌금수입에 대해서는 비과세를 인정하면서도 자료신고를 요구하고, 또 수익사업에 대해서는 세금납부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church)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그 언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신앙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힘을 쓰고, 또 성례전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의 재정회계 담당자 및 지도자는 그 운영을 맡은 청지기로서, 현행세법을 포함 국가법에도 내용을 잘 숙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소홀함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문의: sblee6@hanmail.net
    • 오피니언
    • 칼럼
    2022-04-29
  • [목회자칼럼] 기도와 회복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단번에 알 수가 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므로 가장 모범적인 기도이며 예수님의 교훈이 농축되어 있는 말씀이다. 주기도문은 생일이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나 전쟁터에서나 잔칫집에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주기도문을 통하여 회복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하늘에 계신”은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가 바다 끝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거기 함께 계시며 내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나를 굽어보신다. 보름달은 부산에서도 보이고 서울에서도 보인다. 인공위성이 하늘에 떠 있으면 GPS기능으로 온 땅을 커버할 수가 있다. 이 땅에 계신 육신의 아버지는 소통이 안될 수도 있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다. 핸드폰은 통화중일 때도 있지만 헤븐폰은 걸면 걸린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달이 온 땅을 비추이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아니고 나를 가까이 지켜 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은 주님과 나와의 거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라는 말은 울, 울타리가 되시고 보호막이 되시는 분이시다. 우리나라 말 중에 “우리”라는 말이 참 좋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듯이 너와 나 사이는 남이 아닌 가까운 사이를 말한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공동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 “아버지여”는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원점은 아버지이다. 부부, 부자, 부녀관계... 눅15장, 탕자의 비유에는 탕자의 엄마, 이모, 누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 사회의 상속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 아버지는 상속권을 물려줄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아버님이 누구시니?”는 중요하다. 왕대밭에 왕대나고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상속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여”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기뻐하신다. 어느 교회의 평생 구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인격을 향기롭게”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공이 아니고 성결이다.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다. 이 기도는 거룩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룩을 회복하면 주께서도 나를 마음껏 들어쓰신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나라가 회복되어야 된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제이다. 정권의 힘이 무섭다. 대통령이 바뀌면 다 바뀐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람이 1만5천명이라고 한다. 왕이 덕이 있으면 백성들이 태평성대하고 왕이 복이 없으면 흉년이나 홍수나 염병이나 대재앙이 임한다. 생사화복,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구국기도를 해야 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가 가장 안전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가 내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심을 살피고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기도는 내가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뜻을 묵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다. 정으로 살지말고 뜻으로 살아야 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회복해야 된다. “오늘”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우리 앞에는 어려움이 있다. 내일 일을 알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이 구원의 날이고 지금이 은혜의 때이다. 시간을 회복해야 된다. 하루를 천년 같이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이다. 내가 오늘 누구를 만나거나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것은 일용할 양식이다. 하루 삼시세끼면 필요충분완전하다. 욕심을 내어서 만나를 많이 거두어 들이면 썩었다. 영광의 주께서는 날마다 때마다 나의 필요를 아시고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이다.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빠삐용신앙이다. 빠지지도 말고 삐지지도 말고 용서하는 것이다. 분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요셉처럼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다. 감정선을 회복하는 것이다. 분노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사랑과 용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주를 믿는 자는 시험을 감당하고 환난을 벗어나고 피할길을 열어 주신다. 시험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시험에 퐁당 빠지는 것이 아니고 건짐 받고, 구원받는 것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는 죄악이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시다.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4-29
  • [부산기독교이야기] 마리안 앤더슨의 부산공연
    전화의 파도가 휩쓸고 간 피난민의 도시 부산에서 미국의 유명한 흑인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1993)의 공연이 있었다. 휴전을 2달가량 앞둔 1953년 5월 28일이었다(강인숙은 이때가 1952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인문학자의 6.25』, 180쪽). 미8군의 요청으로 마리안 앤더슨은 피아니스트 후란츠 루프(Franz Ruff)와 함께 일본을 경유하여 내한하였고, 이날 대청동 제3육군병원 앞 뜰 야외 곧, 지금의 부산의 남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한국음악협회 주최로 앤더슨의 공개공연이 펼쳐졌다. 어수선한 피난지 부산에서 마땅한 공연장을 찾지 못해 초등학교가 인접해 있는 가설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공연은 오후 6시 시작되었다. 이날 공연은 전화로 지친 고난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병원 야외에 설치한 가설무대에서 진행된 무료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는 무려 1만여 명에 달했고 대청동, 보수동 거리를 매운 인파는 발 디딜 여지도 없었다고 하니 이날의 열화 같은 성원을 헤아릴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콘트랄토 앤더슨은 인종차별이 심하던 1800년대 말 미국 필리델피아에서 출생하였고,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교회에 다니며 6살 때부터 성가대에서 활동하며 음악성을 키웠다.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28세 때는 300여명의 기라성 같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자로 뽑혔고, 성악가의 길을 가게 된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거절당한 그는 주린 채로 무대에 서기도 했고, 호텔에서 투숙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워싱턴의 컨스티튜션 홀에서 리사이틀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흑인이기에 연주장 임대가 취소된 일도 있었다. 이 때 앤더슨은 항의의 표로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연주를 강행 했을 때 무려 7만 5천명의 청중이 운집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처지를 딛고 일어선 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성악가였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앤더슨을 가리켜 “100년에 한 명 나올 수 있는 성악가”라고 극찬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와 영국 여왕을 위한 독창회를 가질 정도로 국가적인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저명한 성악가가 1953년 대청동, 보수동 거리에서 1만 명을 앞에 두고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던 일은 전쟁기 부산에서의 감동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그가 불렀던 노래가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두곡은 알려져 있는데, 한 곡은 지금 찬송가 372장에 편집되어 있는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Nobody Knows’ 이고, 다른 한 곡이 ‘깊은 강 Deep River’이었다. 어디서든 흑인영가를 즐겨 불렀던 그는 고난의 현장, 전쟁의 아픔을 안고 하루를 마감하는 부산시민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노래로 대신했던 것이다. 이 두 노래는 앤더슨이 불러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흑인영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황폐한 거리에 울려 퍼졌던 이 노래가 지금도 우리 가슴을 감동으로 채워 준다. 이 노래는 세계적인 가수가 불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노래 자체가 앤더슨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고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다시 부른 노래가 ‘깊은 강’이었다. “깊은 강, 내 집은 저편 요단강 너머에 있네. 주여, 저 강을 건너 그리운 땅으로 가고 싶네.” 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고난의 현실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으로 가고 싶다는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였다. 가사나 곡은 슬픔을 당한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였다. 이날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다. 어떤 기자가 마리안 앤더슨에게 그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날이 언제였는지를 물었을 때 “나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의 집 빨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던 그 날이었습니다.” 그 때가 공연료를 처음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흑인이라는 멸시와 가난, 인종차별의 아픔을 겪어왔기에 그의 노래 ‘깊은 강’은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위안을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리안 앤더슨은 1958년 10월 다시 한국을 찾았고 그 때는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공연장이었던 이화여전 강당에서 노래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감동의 무대였고 앵콜 송으로 ‘아베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앤더슨은 1993년에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오피니언
    • 칼럼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2-04-29
  • [성서연구] 십자가 – 거꾸로 보기
    물구나무서기를 해 보셨지요? 아니면 고개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세상이 거꾸로 보입니다. 거꾸로 보는 순간 세상이 새롭게 보이고, 새로운 안목이 생깁니다. 변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환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기를 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합니다. 시각과 생각이 변하면 그는 새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거꾸로 보게 만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기존의 질서를 반대로 뒤집었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아진 곳입니다. 가장 강한 분이 가장 약해진 곳입니다. 또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죄수가 매달리는 형틀인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붙인 것도 역설입니다. 왕은 가장 높은 존재인데, 가장 낮은 자가 매달리는 형틀에 붙었으니, 이것도 역설입니다. 죄수가 왕이라니, 또 진정한 왕이 죄수라니, 십자가는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습니다. 또 십자가는 본래 치욕적 형틀이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되어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배당 첨탑을 장식한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가장 부끄러운 형틀이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6장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십자가에서는 죄인이 의인이 되고, 멸망할 자가 영생을 얻고, 높았던 자가 낮아지고, 낮았던 자가 높아집니다. 세상이 십자가에서 뒤집힙니다.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뒤집기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입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교인과 성도가 구분됩니다. 교인은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함으로써 그는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과거에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이제는 하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하찮게 여기던 것이 이제는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됩니다. 이에 대해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뒤집힌 사람, 그래서 세상을 거꾸로 보게 된 사람 중에 바울 사도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고, 과거에 핍박하던 주 예수님을 삶의 모든 것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런 고백이 빌립보서 3장 7~8절에 나오는데, 『쉬운성경』으로 적어드립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세상을 거꾸로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는 대로, 죄인이었을 때 보던 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거꾸로 보기를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복음 때문에 고난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고, 사람들이 칭찬하면 오히려 불편하게 여기고,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섬김으로 섬김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르게 보는 것, 거꾸로 보는 것, 뒤집어 보는 것, 그리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에 성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04-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