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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학칼럼]불면증 극복하기(2)
    3. 내가 불면증인지 자가 진단할 수 있는 방법도 있나요? 환자 본인 스스로 불면증이 있는지 자가진단을 위해서는 최근 약 2주간에 걸쳐서 정확한 실제 수면패턴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취침시간, 기상시간, 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 자다가 깬 횟수, 낮잠 유무와 시간을 수면일기의 형식으로 최소 2주간 작성해야 합니다. 작성한 수면일기를 통해 불면증의 네 가지 증상인 잠들기 어렵거나, 자주 깨거나, 새벽에 일찍 깨서 잠이 오지 않거나, 만성으로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이중에서 어떤 항목이 본인에게 해당되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다양한 수면설문지를 이용하는 것도 유용한 방법인데요. 환자의 실제 수면패턴을 파악하기위해 취침시간, 기상시간, 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 자다가 깬 횟수, 잠이 들었다가 깨서 자지 못한 시간을 매일 작성하는 수면일기를 최소한 일주일 이상 작성해 오도록 하면 환자의 수면패턴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수면 패턴을 확인하기 위해서 액티그래피(actigraphy)라는 센서를 손목에 착용을 한 채로 1-2주간 집에서 생활하면서 검사하게 됩니다. 4. 불면증이 계속되는 경우, 어떤 후유증이 있나요? 잠의 여러 가지 장점을 생각해볼 때 불면증은 우리 몸에 크나큰 후유증을 남깁니다. 불면증 환자들은 밤잠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주간 기능의 장애, 피로, 주의력, 집중력, 기억력 저하를 유발해 다음날 직장 및 사회생활에서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또한 불면증은 성장부진과 근력저하를 유발시키며 정서 불안, 의욕상실 및 우울증 증세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심장질환이나 소화기계 증상도 더 높아 질수 있다는 통계결과가 있기도 합니다. 5. 불면증은 어떻게 치료하나요? 불면증 치료하는데 있어서 원인을 정확하게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차성 불면증인 경우에는 원인질환을 함께 치료해야 합니다. 불면증 치료 중 약물치료는 효과가 즉각적이고 빠르다는 장점이 있지만, 장기간 복용 시 내성으로 효과 감소 및 소실, 약물 의존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불면증의 원인에 심리 및 인지 요인이 관여한다는 점이 알려져 여러 가지 비 약물치료가 있으며 그 중 인지행동치료는 만성불면증의 표준 치료로 권장되는데, 불면증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습관을 교정하는 것으로 4-8주의 치료 기간이 필요합니다. 6. 불면증을 극복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생활습관은 어떤 것이 있나요? 불면증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된 수면습관을 고치는 것입니다. 낮잠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정말로 졸릴 경우 10~15분 정도로 제한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2시간 이내 30분 정도 더운물에 목욕해 체온을 올려주는 것도 수면에 도움이 됩니다. 수면을 방해하는 카페인 음료나 담배 등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침실은 어둡고, 조용하고, 공기소통이 잘되고 편안한 실 내온도가 유지되도록 하고 침실에서 15분 이상 잠이 안 오면 일어나 단순작업을 반복 하는 다른 일을 하면서 잠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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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소강석 칼럼]파파게노 효과를 일으켜야 할 때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를 걸으며 모두 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부가 예배를 간섭하는 일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전염병 창궐이라는 특수적 상황만 아니라면 한국교회가 예배를 축소하고 온라인예배로 전환할 이유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합니다. 예배의 존엄성을 지키고 방역에도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자율 방역을 하면서 현장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에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한국교회가 선제적으로 자율방역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부가 예배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부총회장 때라 발언권이 약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미 제가 총회장이 되고 한교총 대표회장이 되었을 때는 예배의 주도권을 정부에 빼앗기고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방역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안전한 예배운동을 전개해 나갔어야 했는데 선제적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앞으로는 그 어떤 바이러스가 와도 한국교회가 자체적으로 철저한 방역 매뉴얼을 지키면서 안전한 예배를 드리는 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이 그랬지 않습니까? 중세 사제들은 흑사병이 창궐할 때 공간의 권위를 지키며 믿음의 힘으로 이겨보자고 했지만 오히려 성당이 감염의 온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그때 칼빈은 제네바에서 쿼런틴(quarantine) 즉 격리 시스템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창의적 상상력인 하이 콘셉트와 감성적 공감 능력인 하이 터치의 새 길을 모색한 것입니다. 오히려 칼빈은 구빈원을 만들어 전염병 환자들을 돌보며 정부 관리들에게 손을 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감염에 노출이 많은 분들은 교회로 모이지 말고 성직자들이 조심스럽게 가서 심방을 하고 예배를 드려주도록 했습니다. 당시 제네바 시민들이 볼 때 전염병을 대처하는 칼빈의 모습이 중세 사제들과 너무 비교가 되니까 칼빈을 응원하고 박수를 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흑사병이 결코 예배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처럼 무조건 모이라고 해서 이기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을 하였던 성직자들이 솔선수범하여 방역의 모범을 보이면서도 예배의 본질과 정체성을 지켰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개혁주의의 전통을 따라 방역을 철저히 하면서도 예배를 지켜가야 합니다. 정부가 예배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쁜 일입니까. 그래서 앞으로는 한국교회가 자체 방역 매뉴얼을 잘 만들어서 자율 방어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코로나는 이겨낼 것이 아닙니까? 방역도 애쓰고 기도를 함으로써 코로나는 아웃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코로나가 종식되면 정말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예배와 교회 운영에만 몰두했지 환경문제, 자연문제 등에 관심을 안 가졌습니다. 교회마저도 관심을 안 갖다보니까 자연이 분노해서 코로나 바이러스들이 왕관을 쓰고 우리에게 쳐들어 온 것이죠. 코로나를 종식시키고 난 다음에는 한국교회가 앞장서서 환경문제, 자연 생태계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만의 이너워십이나 카르텔을 벗어나서 행복 바이러스, 파파게노 효과를 이웃에게 퍼뜨려야 합니다. 파파게노 효과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에 나오는 '파파게노'라는 인물에게서 유래된 말입니다. 주인공 파파게노는 연인인 파파게나가 죽자 같이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정들이 나타나 파파게노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자 파파게노는 자살을 하지 않고 다시 힘을 내어 남은 삶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파파게노 효과는 베르테르 효과와 대비되어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자살을 하면 동조 자살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베르테르 효과와 대비되어 파파게노 효과는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어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코로나라는 전염병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하고 실의에 빠져 있습니까? 이러한 때, 한국교회가 행복 바이러스, 파파게노 효과를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앞으로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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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성서연구]자유, 그 다음(갈라디아 5장 1-6절)
    광복 76주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본 군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시편 126편 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라고 했는데, 광복은 우리에게는 꿈꾸는 것 같은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일이었습니다. 광복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두는 자유입니다. 광복으로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신사참배와 강제징용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양한 억압에서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일반적으로 벗어나는 자유만을 생각합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 1월 6일, 의회 연설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네 가지 자유를 언급했습니다. 첫째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 둘째는 신앙의 자유, 셋째는 건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마지막은 공포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이것은 <벗어나는 자유>의 대표적 예라고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자유는 <자유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은 자유를 자유보다 더 높은 가치를 위해 스스로 포기하는 자유입니다. 더 고귀한 것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지만, 이것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기에 거기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서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서라면 평생이라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성도들을 위하여 스스로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삶과 사회를 위해서는 이상의 두 가지 자유가 모두 필요합니다. 벗어나는 자유만 추구하면 점점 욕망에 빠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세끼 밥도 부족한 결핍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세끼를 먹게 되면 다음에는 간식을 원하게 되고, 나중에는 식도락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은 배를 채우고 건강을 위하여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하여 먹는 타락입니다. 그때 굶주리는 사람 옆에서 더 맛있는 것을 먹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더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지만 굶주리는 사람을 위하여 소박한 음식으로 바꿀 수 있는 자유, 자신의 세 끼 음식이라도 줄여 세 끼 모두를 굶는 이에게 나눠주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웃을 위하여 스스로 배고픔의 노예가 됩니다. 이때 그의 마음에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기쁨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와 죽음과 마귀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자유를 얻은 사람이 다시 종의 멍에를 메게 될 위험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이 다시 예전처럼 할례나 율법에 매이게 되면 그것은 또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자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모두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으로 이기적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얻어 누리는 자유만 주장할 때,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사회는 갈등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광복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를 배워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쁨으로 포기해야 합니다. 국민은 더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미래와 통일된 미래를 위해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유를 누릴 줄 아는 성숙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참 자유를 누리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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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시사칼럼]나는 쉬고 싶다, 그래 우리는 쉬어야 한다
    최근 대권주자 한 사람의 ‘120시간’ 발언으로 논쟁 아닌 논쟁이 격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일종의 비진의표시(非眞意表示)에 해당한다고 봅니다(민법 107조). 요즘 세상에 어떻게 그런 노동이 가능하겠습니까? 당사자의 의도도 그렇진 않았을 것이고, 듣는 이 대부분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진 않았을 터,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주52시간제 시행에 예외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사람들은 앞부분만 집중하고 그 뒷말 즉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일하는 자체를 중시하던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쉼과 안식을 노동 못지않게 중시하기 시작합니다.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은 이미 이와 관련된 규정을 두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노동 시간의 합리적인 제한과 장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할 권리와 여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24조). 우리 헌법은 아직은 이러한 “휴식권”과 “여가권”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최근 근로기준법이 동일한 방향성을 가지고 개정되었습니다. 먼저 ‘선택적 보상휴가’ 제도를 두어서 사용자와 근로자가 연장, 야간, 휴일 근무에 대해 보상 대신 휴가를 택할 수 있도록 했고(동법 55조의 2), 또한 ‘휴가 촉진’ 규정을 만들어서 근로자 역시 적극적으로 이러한 휴가를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59조의 2). 그간 우리는 정신없이 달려오기만 했습니다. 성장과 발전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잠시 멈추고 쉴 때도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안식을 명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만 할 때, 때로는 신적인 강제 조치가 뒤따르기도 합니다. 바벨론유수 사건이 그러했고, 지금의 감염병 사태도 ‘하나님의 강제적 안식 조치’라는 측면에서 본질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얼마 전 작고한 여성신학자 마르바 던(Marva Dawn, 1948.8.20-2021.4.18)이 일평생 강조했던 바가 바로 이 ‘멈춤과 안식’이지 않았습니까? 누구나 쉼 없이 하던 일을 멈추는 순간이 필요하며, 잠시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안식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안식』(2001)은 이와 같은 과정을 네 단계 곧 ‘그침(ceasing)’, ‘쉼(resting)’, ‘받아들임(embracing)’, ‘향연(feasting)’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중요한 말들 중 하나가 바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인데, 요즘은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까지 등장했다고 하니 가끔은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 교회는 이러한 현대적이고 본질적인 흐름에서 저만큼 빗겨나 있는 듯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주40시간근무제나 주5일제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대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이는 이미 70여 년 전 인류가 선포한 본질적 인권의 시대적 구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이른바 ‘열정페이’가 난무합니다. 대부분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일 년에 한 차례 여름휴가를 제외하고 연월차나 생리휴가 혹은 육아휴직은 언감생심 꺼내기조차 어려운 말들 아닙니까? 우리가 쉬어야 하는 이유는 멈춤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도 아니고 인권적인 배려를 위해서만도 아니라, 이것이 영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뿌리를 깊이 내리라 하셨고(막 4:17)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눅 5:4)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깊음’은 시-공간적인 개념입니다. 인간은 노동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때로는 일을 그치고 쉼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피안을 생각하는 시공간의 체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물며 영적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체험이 더욱 밀도 있고 빈도 있게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았습니다. ‘나는 쉬고 싶다’는 애달픈 외침이 줄어들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나는 쉬어야 한다’는 선언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며, 나아가 ‘우리는 쉬어야 한다’는 엄숙한 선언이 교회를 비롯한 삶의 모든 분야에서 터져 나오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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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부산기독교이야기]전쟁기 구호단체들: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열러 외원 단체들이 한국 특히 부산에서 구호활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약 50여개의 민간단체 중에서 기독교 관련 단체는 40여개에 달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구호활동을 펼친 외국의 구호 기관의 80% 이상이 기독교 관련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교파별로도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를 비롯하여 메노나이트, 퀘이커 등 다양했다. 국가별로는 미국과 캐나다 독일 호주 영국 아일랜드 스위스 벨기에 이탈리아 등이었다. 국가별로 볼 때 미국이 가장 많았다. 이중 가장 큰 규모의 외원조직이 세계기독교봉사회인데(Church World Service)인데 흔히 CWS로 불렸다. CWS는 미국교회협의회(미국 NCC) 산하단체로 미국 NCC와 WCC의 지원과 협력을 받으며 구호활동을 전개했다. CWS는 1946년 조직되었는데, 1950년 미국 NCC가 결성되자 NCC의 협력단체가 되었고, 감리교 선교사 빌링스(Bliss W. Billings, 1881-1969)의 책임 하에서 한국에서 구호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에는 북장로교 선교사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 1881-?)가 책임자가 되었다. CWS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CWS는 1947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인구를 200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고 이들을 구호하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 신자들이라고 보았고, 이들을 위해 식품과 의류품을 지원했다. 즉 6.25 이전까지는 월남한 이들을 구호대상으로 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하고, 전재 난민을 구호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실해하기 위해 한국교회 대표들을 초청하여 한국위원회를 조직하게 된다. 1951년1월 25일 부산 대청동의 부산중앙교회당에서 각교파 대표자들이 모여 감리교 선교사 찰스 사우어(Charles A. Sauer, 1891-1971)의 사회로 기독교세계봉사회 한국위원회(KCWS: The Korea Church World Service)를 구성하게 된다. 조직을 갖춘 후 한국위원회는 북장로교선교부 대표인 안두화(Edward Adams) 선교사를 미국 본부에 파송하여 한국의 난민 상황를 보고하고 구호물자 지원을 요청하도록 했다. 또 다른 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나거나 일본으로 피신했는데 한국에 남아 있던 안두화 선교사는 부산 창고에 남아 있던 구호물자 사용 승인을 얻고 이를 난민에게 보급하였다. 그 동안은 안두화 선교사가 책임자(president)로 일했으나 1951년 2월에는 초대 선교사 아펜젤러의 아들인 1948년 재입국한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958-1953)가 CWS의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다. 이때 아동복지 담당자가 캐나다인 앤 데이비슨이었고, 산파훈련담당자가 미국인 에디스 골트(Edith J. Galt)였다. 고미옥으로 불린 그는 미국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of America) 선교사 딸로 중국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성장했는데, 미국으로 돌아가 간호사가 되어 중국 꿍밍으로 돌아 가 일하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된 선교사였다. 이런 조직을 갖춘 CWS는 의료, 농업기술, 전재민을 위한 간호, 과부와 고아 후원 등 여러 분야에서 후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52년부터는 외국민간원조단체연합회(KAVA: The Korean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의 관할 하에서 활동했다. 연합회를 조직할 당시 처음에는 7개 단체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49개 단체로 증가되었다. 또 1953녀부터는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UNCACK: The 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in Korea)의 통제 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렇듯 CWA 전쟁 전 후 한국에서 피난민과 전재민을 위해 봉사했던 대표적인 구호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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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8-13
  • [목회자칼럼]국가대표 배구선수, 국가대표 크리스천
    4년 마다 지구촌을 들썩이게 하는 올림픽이 코로나로 인해 한 해 연기되었다 올해 일본 도쿄에서 열렸습니다. 양궁의 김제덕과 안산 선수, 체조의 여서정, 신재환 선수 등 이번에도 새로운 올림픽 스타들이 탄생하면서 코로나로 인해 힘든 국민들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많은 올림픽 경기 중, 온 국민을 긴장하게 했던 경기를 꼽으라면 아마 7월 31일 한국과 일본의 조별리그 마지막 여자 배구 경기가 떠오를 것입니다. 올림픽 경기에 앞서 한국 팀의 주장인 김연경 선수는 다른 경기는 몰라도 “일본과의 경기만은 꼭 이기고 싶다”며 굳은 각오를 보일만큼 일본과의 경기는 그 어떤 경기보다 무게가 달랐습니다. 선수들의 굳은 의지 때문인지, 일본과의 경기에서 세트 스코어 3-2로 겪고 8강에 진출했습니다. 한일전 배구의 승리로 인해 대한민국의 분위기는 고취되었고, 이후에 이어지는 올림픽의 다른 경기에서도 상대가 일본이면 경기를 하는 선수들은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더 힘을 내서 응원의 열기를 더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왜 이토록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꼭 승리를 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마 오랫동안 역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국가의 자존심과 억울함의 표현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단순한 경기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에서 한일전 여자 배구 경기를 지켜보며 기독교인으로 다양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자존심입니다. 한일전 경기의 핵심은 자존심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배구팀은 선수 한 명의 자존심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심을 안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코로나19로 인한 기독교인의 자존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성경적 정체성과 자존심은 어디에 두고 지금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벨론 포로 시대에 다니엘은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해야 할 일을 감당했습니다. 코로나 시대, 오늘 나는 신앙의 자존심으로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둘째, 정체성입니다. 올림픽에 나선 배구 선수들은 무엇보다 올림픽이라는 국제 무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국가 대표로서의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그 정체성이 정신력이 되고 결국 어려운 상황에서도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 사탄은 우리의 정신력을 흔들며 교묘하게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너희들, 하나님만으로 살 수 있어? 돈도 필요하고 마음도 편해야지 하나님을 섬기지...”라며 조롱 섞인 말투로 지금도 나를, 우리를 우롱하고 있습니다. 흔들리기 쉬운 시대, 유혹당하기 좋은 환경에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 더없이 중요한 때입니다. 셋째, 가치관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뇌가 바뀐다”는 말처럼 어느새 우리 머릿속에는 물질, 편안함, 성공 등의 가치관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나라 배구 선수들은 배구 외에는 다른 것이 몸에 배지 않도록 밤낮 배구 생각, 배구 연습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엇이 몸에 배어야 할까요? 우리의 뇌는 무엇으로 가득차야 할까요? 국가대표 배구선수는 배구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듯, 국가대표 기독교인 또한 신앙 생활 말고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스며들지 않게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관용과 사랑입니다. 스포츠 정신의 화합과 사랑을 생각해 봅니다. 승리하기 위해 경기 내내 긴장하며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지만 경기가 끝난 후에는 일본 선수라 하더라도 서로 용납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에게 꼭 필요한 자세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원수라 할지라도 용서하고 용납하는 신앙 자세로 목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메달의 유무가 아닌 경기 그 자체를 즐긴 선수들의 태도였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올림픽 경기 중계의 핵심은 메달을 따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올림픽에서는 메달보다는 경기를 즐기며 행복해하는 선수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그만큼 선수들도 국민들도 성숙되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목표나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 매 시간 하나님과 관계하며 그 주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삶, 이것이 바로 국가 대표급 성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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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은혜의 말씀]수가 성에서 만난 한 여인(요 4:3-18)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상처로 얼룩진 사람입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여자입니다. 동네 사람들도 그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낮 12시가 다 되어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므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이 기적 같은 회복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우리 안에도 남모르는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는 은총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1. 우리의 상처 한 가운데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셨을까요? 보통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때 요단강을 건너 우회하여 가거나, 아니면 지중해로 둘러갑니다. 사마리아를 지나지 않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십니다.(4절) 왜 그러실까요? 답은 하나지요. 예수님은 한 영혼을 만나주시기 위해,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상처와 아픔 가운데 있어도 소망이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상처 속에 계속 머물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상처는 치유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2.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의 실존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장 감추고 싶은 문제를 들추어 내어 고백하도록 하셨습니다.(16,17절)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앞에서 내가 제일 감추고 싶은 것을 고백하십시오. 우리 모두에게는 사마리아 여인 같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털어놓을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우리의 과거를 맡기면, 주님의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는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사직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과거의 상처를 묵상하지 말고, 새로운 미래와 소망을 안고 힘차게 달려나가는 기적이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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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의학칼럼]불면증 극복하기(1)
    1. 불면증은 무엇인가요? 불면증은 왜 생기게 되고 어떤 종류가 있나요? 잠을 충분히 잘 수 있는 상황임에도 지속적으로 수면 개시, 지속 시간, 수면 구조 통합 및 수면의 질 저하와 함께 주간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경우를 불면증이라고 합니다. 불면과 주간 증상이 3개월 이상 지속 유무에 따라 만성불면증과 단기불면증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불면증은 크게 일차성과 이차성 불면증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스트레스에 의하여 시작된 불면증이 환자 스스로 악화시켜서 만성화되는 정신생리학적 불면증, 스트레스에 의한 일시적 불면증 등이 일차성 불면증에 속합니다. 반면에 이차성 불면증은 다른 원인에 의한 불면증으로 수면 무호흡증, 하지불안증후군 같은 다른 수면장애에 의한 불면증, 우울증 같은 정신과적 원인, 위 식도 역류 같은 내과적 원인에 의한 불면증, 알코올에 의한 불면증 등이 이차성 불면증에 해당됩니다. 2. 일차 불면증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종류가 있고 어떤 상태를 말하는 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일차성 불면증의 대표적인 질환으로 정신생리불면증을 들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한 일차불면증으로서 스트레스에 의하여 시작된 불면증이 환자 스스로 악화시켜서 만성화되어 수면방해연상으로 불면증이 생기는 질환입니다. 환자는 자려고 하면 머릿속에 온갖 잡념이 든다라고 표현하는데요. 잠을 자려고 노력할수록 환자는 더 흥분하고 잠을 더 못 자게 됩니다. 수면방해연상은 처음에는 우울증이나 통증, 나쁜 수면환경에 의해 불면증이 생겼다가 지속되어 학습이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환자는 잠을 자려고 지나치게 노력하면서도 잠을 잘 수 없으나, 잠자려는 노력이 없이 단조로운 일을 하면 쉽게 잠이 들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모순불면증이 있습니다. 환자들은 오랜 시간 전혀 못자거나 거의 못 잤다고 표현하지만 이와 같은 심한 수면 부족에 합당한 주간기능저하나 졸림이 거의 없는 불면증입니다. 특징적으로 환자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수면다원검사에서 보면 잠을 충분히 잔 것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부적절수면위생으로 인한 불면증인데요. 잦은 낮잠, 매우 불규칙한 취침시간 및 기상시간, 너무 많은 시간을 잠자리에서 보내는 것, 잠자기 전에 술, 니코틴, 카페인의 정기적인 섭취, 잠자리에서 수면 외에 다른 일, 즉 TV시청이나 독서, 공부 등과 같은 적절하지 않은 수면 위생으로 불면증이 생기는 것을 말합니다. 3. 내가 불면증인지 자가 진단할 수 있는 방법도 있나요? 환자 본인 스스로 불면증이 있는지 자가진단을 위해서는 최근 약 2주간에 걸쳐서 정확한 실제 수면패턴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취침시간, 기상시간, 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 자다가 깬 횟수, 낮잠 유무와 시간을 수면일기의 형식으로 최소 2주간 작성해야 합니다. 작성한 수면일기를 통해 불면증의 네 가지 증상인 잠들기 어렵거나, 자주 깨거나, 새벽에 일찍 깨서 잠이 오지 않거나, 만성으로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이중에서 어떤 항목이 본인에게 해당되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다양한 수면설문지를 이용하는 것도 유용한 방법인데요. 환자의 실제 수면패턴을 파악하기위해 취침시간, 기상시간, 잠드는 데 걸리는 시간, 자다가 깬 횟수, 잠이 들었다가 깨서 자지 못한 시간을 매일 작성하는 수면일기를 최소한 일주일 이상 작성해 오도록 하면 환자의 수면패턴을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수면 패턴을 확인하기 위해서 액티그래피(actigraphy)라는 센서를 손목에 착용을 한 채로 1-2주간 집에서 생활하면서 검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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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성서연구]어떻게 빛이 나는가(출애굽기 34장 29절)
    미국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란 작품을 아시지요? 남북전쟁 직후에 한 시골 마을에 살던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을 듣게 됩니다. 어니스트는 그런 사람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도 큰 바위 얼굴 같은 부드러운 모습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삽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돈이 많은 부자, 전공을 많이 세운 장군, 유명한 정치인, 글 잘 쓰는 시인들을 만났지만,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외칩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작가는 위대한 인생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행이 일치하는 진실한 삶에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바위 얼굴 같은 사람이었음을 말씀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아 내려올 때 모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후에 그는 백성 앞에 나갈 때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많은 후보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후보들은 국민에게 큰 바위 얼굴처럼 보이길 원할 것입니다. 얼굴에 빛이 나길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장점과 지금까지의 다양한 경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되면 국민을 위해 많은 정책으로 훌륭한 봉사를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과연 국민들은 그들의 얼굴에서 광채를 볼 수 있을까요? 이들의 모습은 모세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는 후보들은 스스로 자기 얼굴에 빛이 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얼굴에 빛이 나게 하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백성 앞에 내려올 때까지 자기 얼굴에 빛이 나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후반부를 보면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굴에 빛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빛이 날 때, 그게 진짜입니다. 둘째는 후보들은 자신에게서 빛이 나게 하려고 여러 가지 신경을 씁니다. 넥타이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준비합니다. 말도 품위 있게 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국민의 귀에 닿는 공약을 준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난 것은 여호와와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을 보면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는 것>이 진짜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모세의 얼굴에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빛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언제부터인지 한국교회 안에 외모를 보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목회자를 청빙할 때도 가문, 학벌, 외모, 경력 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중시합니다. 저는 종종 매우 훌륭한 조건을 갖춘 목회자가 부임했음에도 교회와 목회자가 어려워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여호와와 말하는 것>, 즉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핵심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빛이 그의 인격과 삶에서 배어나고, 하나님의 향기를 풍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고 모세처럼 가릴 것이며, 그것을 자랑하지도 않고, 늘 하나님만 바라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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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 [시사칼럼]남겨진 시간을 위하여
    그분이 떠났습니다. 마지막 붙잡았던 손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참 무심히 흘러 벌써 달포가 지났습니다. “2001년 5월 31일, 꼭 기억해주세요. 제가 새롭게 태어난 날입니다.” 그랬습니다. 예전 나이로 치면 환갑을 지나 중생을 체험한 그는 20년 세월을 한결같이 살다가 새롭게 얻은 고귀한 두 번째 생일을 며칠 더 넘긴 어느 날 홀연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세상은 그를 잘 몰라도, 몇 차례 급습했던 병마의 가공할 기세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불굴의 사람 장 집사님, 일천 명의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비장한 사명을 이제는 우리에게 맡겨둔 채로 어쩌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천국 소풍을 떠나셨겠지만, 우리는 그가 몹시 그립습니다. 역사학자 피터 래슬릿(Peter Laslett)은 인생 단계들이 보통은 시간 순으로 진행되지만 반드시 살아온 햇수로 나뉘는 것은 아니라면서 ‘제3연령기(Third Age)’라는 표현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앞선 두 단계와 달리 생물학적 나이나 개인적인 성취를 초월하는 몇몇 행동 요소를 기준으로 삼는데, 앞선 사례와 같이 비교적 노년의 때에 극적으로 맞이하는 신앙적 회심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제3연령기가 점차 부각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이 단계를 유의미하게 거치지는 못하고 있고, 현대사회 역시 새로운 이 개념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지침이나 제도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 노인의 죽음을 계기로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사회가 이미 고령사회(Aged Society)로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65세가 넘은 인구가 전체의 14% 이상을 차지할 때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제3연령기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기를 선용하지 못하고 허송세월하기 일쑤입니다. 둘째는 ‘코로나 블루(Corona Blue)’” 현상 때문입니다. 한 바이러스가 초래한 세상은 특히 노년층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훗날 제대로 된 학술적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최근 노년층의 일반 장례를 상당히 많이 치렀습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사회분위기와 외부 활동의 저하 그리고 교류 단절로 인한 고독감 등도 영향을 끼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사실 요즘 모두가 ‘실버 쓰나미’를 두려워합니다. 유례없이 길어진 인간 수명과 그로 인한 인구 초고령화 현상이 우리 사회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 거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1980년 서구에서 처음 사용된 이래 오늘날 이코노미스트, 워싱턴 포스트 같은 언론지나 뉴잉글랜드 메디슨 저널 같은 학술지는 물론 정부 문서에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개념입니다(루이스 애런슨, ‘나이듦에 관하여’(Being)). 물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인생의 마지막 국면인 “제4연령기”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준비하는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이듦이 마냥 두려운 쓰나미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눈에 선한 장면을 추모의 마음으로 회상하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감염병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까지 먹을거리들을 잔뜩 챙긴 채로 인근 중학교 하교 시간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손주뻘 아이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시던 장 집사님께서 마지막으로 제게 남긴 말씀은 이랬습니다. “이제 나 대신 맡아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슬퍼하지 마세요. 나는 천국으로 갑니다. 거기서 다시 만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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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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