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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추수감사절을 맞으며(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목사로 살면서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목사답지 못할 때가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목사를 신뢰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다를 거야>라고 기대합니다. 강단에서 외칠 때만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목사가 부족 투성이라는 것을 아실까요? 목사가 정말 부족하다는 것을 몰라서 신뢰한다면 미안한 일이고, 알면서도 사랑하신다면 성도님들이 정말 귀하지요. 제가 젊은 담임목사였을 때, 연로하신 장로님께서 교회 마당에서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꼭 알아야 해서 그런데요, .....이란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오지요?>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구절은 아주 귀에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금방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얼버무렸습니다. <생각이 날 듯 한데 떠오르지 않네요. 제가 알아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조금 후에 바로 필요해서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성경 전부를 다 외우는 것도 아니니 – 외우는 분도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 변명은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부끄러운 게 있습니다. 그것은 뻔히 안다고 생각하는 말씀을 실제로는 모를 때입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 본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하길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래서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부분은 스물네 시간 기도하듯이 기도에 힘쓰라는 격려로 이해하고,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알 듯합니다. 물론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것은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부분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 같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겠지요. 11월의 갈등을 아시나요? 11월에는 추수감사주일이 있어서 모든 목사님이 감사를 주제로 설교합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하면서 설교하는 것일까요? 설교하는 것, 현재의 사역지, 둘러싸고 있는 성도들, 가정 등에 대해 감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목사인 나는 감사하지 못하지만, 성도들이라도 감사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일까요?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찌푸린 얼굴이라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하면서 원망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정말 말씀대로 살고 싶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행복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무슨 노하우가 있습니까? 강단에서 얼굴을 벌겋게 되도록 열을 올리면서 <항상 기뻐하세요>라고 강단을 치며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11월이 다가오면 제대로 감사하지도 못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설교하고, 진실한 기쁨을 알지도 못하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참 불편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처럼 <11월의 고뇌>입니다. 이제부터 진지한 고민을 해 봅시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진정한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감정은 강요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노력한다고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척 할 수 있지만, 서로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감정은 우러나야 합니다. 기쁨도 감사도 우러나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이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면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말씀했는데, 그때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감사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성령님께서 마음을 다스려 주시도록 기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면 우리는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성령님 안에서 감사하는 11월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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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소강석 칼럼]“한국교회여,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주세요.”
    최근 넷플릭스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한 관심이 가히 폭발적입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넷플릭스 TV 부문 시청률 1위에 오를 정도로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실업자, 신용불량자, 소매치기, 조직폭력배, 외국인 노동자, 탈북자, 여성 출소자, 시한부 환자 등 돈에 쫓겨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는 절박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총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게 되면서 시작합니다. 1번부터 456번까지 참가자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오징어 게임’ 등 총 6개의 게임을 통과해야 합니다. 최후의 승자만이 456억 원을 받게 되고, 게임에서 탈락한 사람은 총에 맞아 죽습니다. 영화는 너무나 잔인하고 선정적이며 엽기적인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이 영화는 자본이라고 하는 맘몬의 신에 영혼마저 빼앗겨 버린 채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적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보여주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드라마를 본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너무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폄하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설정하여 보기 불편하더라는 것입니다. 데스 게임에 참가한 244번 참가자는 위기를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혼자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다가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을 밀어 죽인 후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합니다. 240번 참가자 지영은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면서,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인 아버지를 자신이 칼로 찔러 죽였는데 그 아버지가 목사였다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에 대해서 혐오적인 이미지를 조장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는지 분하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인간 내면에 잠재된 욕망과 탐심, 생존 본능을 들추어내고자하는 의도라면, 왜 굳이 기독교인만을 특정하여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국내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 드라마라고 하는데 그들의 눈에 기독교의 모습이 어떻게 이미지화 되었을 지를 생각하면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지금 현대사회는 극한의 생존 서바이벌 게임에 함몰되어 영혼마저 빼앗긴 채 서로 죽고 죽이는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비극의 데스 게임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오징어 게임은 참가자 중에 과반수만 반대를 해도 언제든지 게임을 멈추고 자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가자들은 거액의 상금에 눈이 멀어 끝까지 멈추지 못하고 죽음의 질주를 합니다. 그 죽음의 질주 끝에 최후 승자는 고향 후배 상호를 제친 성기훈이었습니다. 그는 456억의 우승 상금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지 못하고 노숙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 오징어 게임의 설계자를 만납니다. 그 설계자 역시 죽음을 앞둔 시한부 환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징어 게임을 만든 이유는 오로지 심심해서, 재미로였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기훈에게 인간을 신뢰하느냐고 물으며 또 다른 노숙자 게임을 제안하더니 갑자기 병상에서 죽고 맙니다. 아무리 창작의 자유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는 반인간적이고 패륜적인 모습을 지나치게 표출 시키고 말았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오징어 게임에 나타나는 탐심과 증오, 분노의 표출들이야말로 오히려, 인간 세계의 유일한 희망의 출구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잃어버린 채,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한국교회에 그래도 다시 한 번 구조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평론적 해석도 해 보았습니다. 이 오징어 게임을 본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제발, 오징어 게임을 멈추게 해 달라고, 부디 데스 게임에 몸을 맡긴 채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고 있는 상처 입은 영혼들을 사랑으로 안아주고 손을 잡아 구원해 달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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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시사칼럼]꽃길
    “가을이 깊어지면 산등선을 따라 억새가 은빛 물결을 이루며 일렁거린다. 밤에는 선명하게 빛나는 별이 보이고, 낮에는 땅에서 반짝이는 별인 억새가 만발하는 요즘이다.” 어떤 기자분이 쓴 글 중 일부입니다. “낮에는 땅에서 반짝이는 별”이라니, 그렇다면 지금 그 곳에는 낮에도 ‘억새의 은하수’가 펼쳐져 있겠습니다, 요즘 황매산을 가을에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하던데 이런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경남 산청과 합천을 잇는 해발 1,113미터의 이 산 정상에 서면 합천호,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이 다 보인다 해서 영남의 금강산이라고도 부른다는 이 산은 본래 봄철에 철쭉으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하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길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그 동안 적실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일상이 회복되었을 내년에는 억새든 철쭉이든 꼭 그 길 한 번 밟아보리라, 다짐해 보았습니다. 사실 가을의 상징으로는 단풍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늦가을 무렵 우리는 결단코 낙엽을 무시하고 지날 수는 없습니다. 특히 낙엽 밟는 소리,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버석버석? 사각사각? 그렇게 마음 하나 가득 낙엽이 쌓이다보니 문득 호기심이 하나 생겼습니다. ‘봄철 아름답게 피어서 찬란하게 만발한 꽃길을 걷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가을철 처연한 아름다움을 뿜으며 떨어지는 낙엽을 부러 밟으며 걸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람들은 꽃을 보면서 그리고 낙엽을 보면서, 활짝 피었을 때 자기 모습과 언젠가는 분분히 떠나고 말 인생의 진면목을 투사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꽃길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프랑스 시인 구르몽(Remy de Gourmont, 1858-1915)의 말처럼 “발로 밟으면 영혼처럼 우는” 낙엽 길을 걷고 있습니까?(Les feuilles mortes) 아니, 그 동안 당신은 꽃길만 사뿐히 밟으며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이리 저리 떨어진 낙엽 가득한 여정을 주로 걸어오셨습니까? 예수전도단 설립자로 지금도 생존해 있는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삶에서 뒤를 돌아보면 항상 꽃길인데, 앞을 보면 항상 낭떠러지였습니다.” 정말 공감이 가는 표현이 아닌가요? “꽃길만 걷게 해 줄래”라는 노랫말이 유명해진 까닭은, 누구나 그런 인생을 사모하지만 실상 우리 앞에 놓인 길들은 그렇지 못할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시밭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이어지는 그 길은 결국 낭떠러지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하지만 오늘부터는 우리, 그런 생각일랑 접어두기를 바랍니다. 막상 낭떠러지 같아 보이는 그 길이, 돌아보면 결국은 꽃길이었다는 고백을 로렌 커닝햄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가 운이 좋고 남다른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주의 도우심을 받고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신자였기 때문에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테니, 우리도 그와 같다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찬송가 191장 3절입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찬송가 430장 역시 3절입니다.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어떤 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누구와 함께 걷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당신 곁에는 누가 동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주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당신이 나아갈 길은 항상, 꽃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누군가와 함께 한다면 그런 길에는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더해지겠지요. 내년 봄이면 눈이 시리도록 피어날 철쭉을 보러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내년 가을이면 들판 가득 찬란히 빛나는 억새별을 보러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오다가다 살짝 신청해 주세요, 설렌 가슴에 담아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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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은혜의 말씀]근심을 이기는 비결(1)-믿음(요 14:1-3)
    ‘근심하다’라는 성경 원어는 ‘타라소’인데 이것은 ‘마음을 뒤흔들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 마음이 사방으로 나뉘어져 아예 마음을 확 뒤집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노라면,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뒤흔들어 놓는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요. 이렇게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근심을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근심하는 마음이 가득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마음은 자꾸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게 됩니다. 좋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항상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그 근심을 이기는 비결로, 믿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1절)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으시고, 죽을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논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창조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행하심을 말씀하시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근심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하늘 평안이 주어질 것입니다.(요 14:27) 2. 천국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2절)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곳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고통도 없습니다. 가슴 아픈 이별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곳입니다.(계 21:4) 우리 신앙에서 천국 소망만큼 우리를 흥분시키고 뜨겁게 만드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국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슴에 안고 씨름하는 모든 문제의 완전한 해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천국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이 세상으로 끝이라면, 우리는 염려하고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은 영원을 여는 문에 불과합니다. 영원히 계시는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3.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3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천국 거처를 마련하신 후, 다시 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의심 많고 잘 믿지 않는 우리를 위해, 천국행만큼은 우리 주님께서 확실하게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으로 갈 때는 예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영과 육이 분리되는 순간, 천군 천사들이 와서 우리의 영을 감싸고 천국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땅에서 눈을 감으면 저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손만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뵈면서, 그 주님의 사랑을 먹고 마시면서, 해같이 빛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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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역사바로알기]고신대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
    4) 6.25 전쟁과 귀국, 경남구제회 설립 그는 1951. 1. 9일 미국 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에 내렸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미국의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지부인 한국지부 구제위원회를 만들어야 했다. 이미 미국의 교회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영창을 한국으로 보내면서 전란중인 한국에 구호물자를 조직적으로 보내기 위해서 서둘러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었고 전영창을 미국의 지부격인 대한민국 경남지역 총무직에 임명하였다.(김은식, ‘장기려-우리 곁을 살다간 성자’ 봄나무 2006, 60쪽)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지부 총무로서 한상동, 이약신, 박손혁, 오종덕, 안용준을 만나 지속적인 구호품 획득과 분배를 위해서 미국의 기독교 구제위원회의 지부인 한국 내 구제위원회 설치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조직한 것이다.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전영창이 복음진료소를 개설함과 동시에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를 만든 이유는 본인의 생각이 아니라 미국교계의 요청 때문이었다. 귀국당시 미국교계는 한국 원조를 위한 '기독교 구제위원회'를 만들었고, 전영창을 한국지부 총무(한국 대표자)로 이미 임명했기 때문이었다. 명칭이 경남구제회였던 것은 6.25전쟁으로 공산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왔었고 남은 지역이 경남(부산시와 분리하기 전)뿐이기 때문이었다. 명칭이 경남구제회였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전체를 대표하는 미국지부였던 셈이다. 5) 복음진료소 설립(초대원장 차봉덕) 도착하자마자 불과 1주일 만에 경남구제회를 만들고 동시에 복음진료소를 개설했다는 것은 전영창이 얼마나 그 당시 상황을 엄중하게 보았고 바쁘게 일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서 모금해 온 구호기금 5,000불로 처음에는 항생제를 구입하여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부산에 상주하고 있던 노르웨이 구호담당 책임자인 넬슨을 만났다. 그런데 넬슨은 “그러지 말고 그 돈으로 조그마한 의원이라도 설립하면 매일 50인분의 약을 우리가 원조해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즉시 병원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며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난 의사가 차봉덕이었다.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대표: 전영창, 34세)는 미국교회의 요청으로 설립했고, ‘복음진료소’(원장 차봉덕)는 한국의 필요 때문에 개원한 것이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는 의료복지사업을 하기위한 사회복지법인체와 같은 것이고, ‘복음진료소’는 그 사회복지법인체의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의료기관인 셈이었다. 전영창은 귀국 후 단 1주일여 만에 경남구제회와 복음진료소를 동시에 설립하고 복지기관과 의료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전영창이 내걸었던 복음병원 원훈은 <1. 치료하는 병원, 2. 전도하는 병원, 3. 교육하는 병원>이었다. 이는 훗날 지금의 고신의료원(치료), 원목실(전도), 의과대학(교육)으로 잘 발전해 왔음을 볼 때 전영창의 설립비전과 꿈이 얼마나 크고 정확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6) 장기려 박사 초빙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시작된 복음진료소는 밀려드는 환자들로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무엇보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로는 외상환자들 치료나 수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를 만나 외과의사의 필요성을 의논했고, 마침 제3육군병원에 외과과장으로 부임해 와 있던 장기려 박사를 소개받았다. 1951. 6. 21일 전영창은 한상동 목사님을 모시고 김상도(복음의원 원목, 경남구제회 회계)와 함께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던 장기려를 찾아가 복음진료소 사정을 말씀 드리고 병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장기려는 흔쾌히 수락했고 6월 30일 사직을 하고 1941. 7. 3일 복음진료소로 부임 했다. 이때부터 장기려 박사의 복음병원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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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목회자칼럼]속도인가 방향인가?
    난 갈등했다. 그리고 지금도 갈등하고 있다. 이 방법으로 하면 사람이 변할 줄 알았다. 해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저 방법으로 변화를 유도했다. 그렇게 저 방법도 아닌 모양이다. 새로운 방법으로 해보면 어떨까? 선택과 번복,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청소년을 향한 사역이 벌써 햇수로 35년째이다. “35년 동안 하고 있지만 이 사역이 나에게 맞는 것일까?” 여전히 물음표이다.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갈등과 고민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데 왜 빨리 변하지 않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고집을 피울까?” “더 많은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덧 바른 방향보다 속도에 조급해하며 갈등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쯤되니 정리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청소년들도 35년을 하고 보니 철이 들어 성인으로 자기의 역할을 하나씩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속도, 양, 수준만큼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모두 변화되어 있었다. 나는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은 일하고 계셨다. “내가 주님보다 앞서 있었구나. 내가 성령보다 앞서 나갔구나. 내가 조급했구나” 흰머리가 희끗희끗해서야 깨닫는다. 참 미련한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싶다. 둘째, 아기를 낳고 기뻐하며 그렇게 좋아하고, 배밀이 할 때 아장아장 걸을 때는 또 얼마나 귀여워했나?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되니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을 피우는 모습을 보니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이 많이 아프다. 이 자녀가 청년이 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키우고 다시 자신의 부모와 같은 상황이 되면 그 때 자기의 모습을 알게 될까? 신앙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좋았는데, 육적 자아가 자라고 자기 철학이 생기면서 신앙의 성장에서 반항기가 올 때, 옆에서 보고 찾고 기다려주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 아버지는 잘도 견디어 주고, 잘도 참아 주며, 끝까지 사랑하시는데 나는 어떤가? 셋째, 양이냐? 질이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디 쉬운가? 모든 목회자들이 성도의 양적 부흥과 질적 성장을 함께 바란다. 둘 다 건강하게 성장하며 든든한 교회를 세우길 원한다. 나도 이 둘의 조화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질적 성장이 안 되어서 고민일까? 아니면 양적 성장이 안 되어서 더 갈등하는 것일까? 부모님들은 자녀가 키와 몸이 자라기를 원할까? 아니면 공부, 성적, 인격도 모두 다 자라길 원할까? 분명 겉으로는 둘 다 조화롭게 자라길 원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말은 자녀가 성경적 세계관으로 건강하게 자라기만 바란다고 하지만, 막상 반에서 성적이 하위권 이거나, 대학 입시에 실패할 때, 취업이 안되어 집에서 놀고 있을 때, 부모로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마찬가지로 교회의 질적 성장을 추구한다고 말하지만 양적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넷째, 그래서 지금도 나는 두 나라에서 갈등한다. 세상과 교회, 과연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교회에서도 성공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한가? 배우고 공부할수록 세상은 교회의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데, 성경 중심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섬기며 살아야 하는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으로 살아내야 하는 삶을 쉽지 않다. 이건 평신도나 목회자나 다 똑같은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갈등하며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기도한다. “주님, 바른 분별력을 주옵소서! 성령님이 내 속에서 새 영으로 역사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를 주옵소서” 끝나지 않는 갈등, 멈출 수 없는 사역 속에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물으며 방향을 결정하고 한걸음씩 나아간다. 그래서 나는 갈등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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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5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4
    앞에서 MCC의 조직과 한국에서의 사역의 시원, 초기 사역자들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제 구체적으로 한국전쟁기 MCC의 초기 사역이 어떠했는가를 몇 가지 항목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구제 사역이었다. MCC의 대표적인 활동이 구제활동인데, 이는 사역의 최우선 순위였다. 인간의 가치와 인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메모나이트 정신에 따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어 생존하게 하는 것이 우선적인 사역이었고, 이것이 바로 식량지원이었다. 지원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통계가 있기 때문에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한데,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에는 79톤의 구호물자를 보냈는데, 우유와 식품이 중심이었고 그 외 의류 성탄절 선물꾸러미 등이었다. 이들이 지원 대상은 부산이나 경남지방 뿐만 아니라 서울 인근, 인천과 수원, 38도선 이북의 화천, 그리고 울릉도 등까지 확대되었다. 그것은 MCCC가 세계교회 봉사회(CWS)와 동역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량 지원 외에도 소고기 통조림 등을 공급하고 부산과 대구 등지에 우유급식소를 설치하고 어린 아이들의 건강과 위생을 지켜 주었다. 구호통조림 통에는 ‘Food for Relief, In the name of God’이라는 문구를 넣어 무상 공급이라는 점을 알리고, 이를 판매하거나 되팔아서도 안 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무상 구호 식량을 판매하여 특정인이 사유화하지 못 하게하기 위한 조처였다. 둘째, 직업교육이었다. MCC는 고아들의 자립갱생을 위해 직업교육을 실시하기로 하고 1953년 5월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천동의 78에이커(약 9만5천평)의 땅과 거기 부속된 27채의 건물을 구입했다. 47에이커의 땅은 운크라(UNKRA)의 지원으로 구입하였고, 논과 밭과 언덕이 있는 31에이커는 한국정부로부터 임대한 것이다. 이 토지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농업실습장인 농도원(農道園)이었으나 해방 이후 한국정부가 관리하고 있었다. 이 학교 사업은 MCC의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이곳에서 남자 고아들을 위한 중등과정의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하여 살아갈 수 있게 구상한 것이다.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이사회를 구성했는데, 초기 사역자인 위버 선교사를 비롯하여 경상북도 도지사, 경상북도의회 의장, 경북대학교 총장 고병간 박사, 사회사업가협회장인 이영식 목사, 대구동산병원 부원장 황용운 박사,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로버트 콜스(L. Robert Kohls, 1928-2006) 선교사 등 8명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가 1953년 10월 개교한 메노나이트실업중고등학교였다. 일차적으로 전쟁고아들을 위한 학교였음으로, 학교는 무상교육만이 아니라 의류와 숙식을 제공하는 기숙학교로 출발했다. 첫해에 14명의 고아가 입학했고, 학교교육은 1971년까지 약 20년간 지속되었고, 그 후 학교는 폐쇄되었다. 한국은 급속도로 산업가 이루어지고 삶의 환경이 개선되자 MCC는 더 시급한 도움이 요청되는 월남으로 물자와 인력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첫 교장 콜스는 한국이름 고을수(高乙秀)로 불렸는데, 1953년 10월 내한하여 1956년 3월까지 2년 6개월간 교장으로 재직했다. 오하이오주 달라스카운티 출신인 그는 드레이크 대학(Drake University)에서 1년간 수료하고 제2차 대전 막바지인 1945년 5월 28일 징집 서류를 제출했고, 1945년 12월 31일 입대하였는데 전후 1946년 한국에 주둔했다. 한때 대구 동촌의 K2공군부대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후 드레이크대학에 복학하였고, 1949년 6월 17일에는 노르마 차펠(Norma Glee Chappell)과 혼인했다. 대학 졸업 후 3년 교사로 일했고, 메노나이트교인은 아니었으나 어려운 환경에서 견딜 수 있는 인물로 간주되어 교장으로 임명을 받고 내한한 것이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는데, 메노나이트교회와 더불어 평화교회를 지행했음으로 그를 교장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일 『한국식으로 사고하기 Learning to Think Korean』과 같은 책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이런 문서를 보면 그는 매우 지성적인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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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11-05
  • [성서연구]그녀가 거기에 간 이유(요한복음 20장 1-2절)
    지금까지 저는 어려운 교회에서 목회한 적이 없습니다. 서울에서 수백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에서 교육지도사와 전임전도사, 부목사 사역을 했습니다. 만 32세에 담임목회를 시작했는데, 어려운 개척교회가 아니라, 장로님이 여러 명 계신 교회였습니다. 그 후 지금은 그 보다 훨씬 큰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부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주님을 따르는 고단함을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있을 때 일부러 일 년에 한두 번 아내와 함께 차를 몰고 부산 외곽의 시골로 나갔습니다. 지나다가 교회가 있으면 무턱대고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날에는 모든 것이 값진 교훈이었습니다. 낯선 교회에 처음 들어가는 경험, 그 교회의 성도들이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을 때의 느낌, <지나가다 들렸다>고 대답하고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잠시 드리는 기도, 그 후 교회 주보를 읽어보고, 교회 내부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피던 생소한 느낌, 그리고 조금 분위기가 다른 예배와 설교..... 어떤 교회의 목사님은 일찍 나오셔서 직접 교회 문을 열고, 불을 밝히고, 강단을 정리하고, 예배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오길 초조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그러다가 네댓 명의 성도들이 참석했겠지요. 저희 부부 두 사람은 예배 분위기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목사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설교했을까요? 그리고 다음 주일에도, 그 다음 주일에도 계속 그러했겠지요. 갑자기 교인이 많이 늘어나거나 재정이 불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늘 모자라고 쪼들렸을 것입니다. 처음엔 3년 정도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3년이 30년이 된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누가 <왜 이 교회에서 목회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어떤 분은 그 지역에 대한 소명 때문이라 대답하겠지요. 제가 들은 대답 중 하나는 <능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목사로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대답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실적 대답이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정답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보내셨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서 섬긴다>입니다. 그러나 이 정답은 머리에만 있을 뿐, 가슴으로부터 이 대답을 하는 분이 몇 분이나 있을까요? 제 동기 목사님 중에 김동찬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인도네시아에서 삼십 년 이상을 사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고등학교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신학교에 간다고 하니 아버지는 학비도 끊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길을 갔고, 지금은 온 가족을 주님께 인도하셨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일입니다. 지리산 자락의 목사님을 몇 분 알고 있습니다. 삼십일 년째 골짜기에 머무는 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지나가다 갑자기 들렸더니 일을 하시느라 바빴습니다. 얼굴을 그을리고 옷맵시는 흐트러져 있었지만, 얼굴에서는 천사의 웃음이 배어났습니다. 이분 역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 머물게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안식후 첫 날,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갔습니다. 아직 어두울 때 여인의 몸으로 무덤에 가는 것은 쉽지 않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왜 무덤에 갔을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도 이기게 했습니다. 저의 숙제는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가>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농어촌의 어려운 교회에서, 개척교회에서, 힘든 선교지에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감당하고 계신 분들처럼, 저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설교하고, 심방하고, 기도하는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 외의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덤에 간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섬겨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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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서임중 칼럼]허리를 굽혀라.
    한 잎 낙엽이 속삭이듯 창문을 노크하며 날아 내린다. 아파트 앞 둘레길 가로수도 어느새 울긋불긋 채색 옷을 갈아입고 빼곡히 짙던 잎새들을 조금씩 솎아내며 서 있다. 열어놓던 창문도 이제는 닫아야 하는 계절의 변화에 분주함을 잠시 멈추며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고희의 세월을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는 가운데 나는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 거룩한 옷을 갈아입으려 얼마나 애쓰는가 생각해 본다. 어린 나이에 포항중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을 했었다. 목회 추억이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노회를 마친 어느 주일 당회 모임에서 평소 어린 목사를 따뜻하게 품고 지극히 아껴 사랑하며 동역하시는 큰형님 같은 장로님이 웃으시며 조용하게 “목사님께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목사님, 노회에 가셔서 너무 그렇게 허리 굽혀 인사 안 하셔도 됩니다. 큰 교회 당회장이라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앙교회 당회장의 자리에 걸맞은 모습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로님의 말씀을 백분 이해하면서 나도 웃으면서 말씀을 드렸다. “대형교회 목사가 인사할 때 허리 굽히면 안 된다는 성경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당회원들은 파안대소하면서 분수에 맞는 언행이란 꼭 필요한 것임을 서로 이해하고 포항중앙교회는 관계개념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섬기고 베풂의 삶을 실천하는 교회를 지향하자고 했었다. 나의 목회병법에는 10가지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휴지통 목회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필요에 따라 사용한 후 버려야 할 것들은 휴지통에 버린다. 휴지통은 가득차면 비우고 다시 채운다. 교인들이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일들에서 오는 불평 원망이 왜 없겠는가? 그럴 때면 상호간에 얽히고설킨 것들을 목사에게 와서 털어놓는다. 그리고 자기 뜻이 관철되면 웃고 돌아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온갖 아픔을 목사에게 되돌려주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런 경우에 나는 휴지통 목회로 일관한다. 다 받아들이고 더 담을 수 없도록 채워지면 십자가 앞에서 다 비워버린다. 그것은 육체의 허리를 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굽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목회병법의 한 가지다. 가을이 깊어가던 어느 날 청소를 하는 집사님을 계단에서 만났다. 걸레를 들고 청소 도구를 옆에 세우고 있던 집사님은 나를 보자 언제나처럼 애기 같은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비켜서다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떨어뜨렸다. 내 발 앞에 떨어진 빗자루를 내가 엎드려 주워서 건네주니 “목사님, 목사님, 죄송, 죄송해요, 죄송해요”하며 어쩔 줄 몰라 하시던 모습을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집사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먼지를 닦고 휴지를 줍고 연신 허리를 굽히고 일어서고 굽히고 일어서고...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집사님은 그렇게 교회를 쓸고 닦는다. 집사님의 아름다움은 육체적 허리를 굽힐 때보다 마음의 허리를 굽힐 때 더욱 확연히 전해져온다. 이조(李朝) 역사에 가장 겸손하면서도 충정 어린 재상으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 가운데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을 빼놓을 수 없다. 일생을 가난하게 지내면서도 성품은 온유했고, 그러면서도 공사(公私)를 분명하게 하면서 직무에 강직했던 재상이었다. 그는 이조(李朝) 역사의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로서 공직자가 지녀야 할 자세를 오직 목민(牧民)에 두었고 청렴결백(淸廉潔白)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청렴하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강직했던 고불(古佛)의 정신은 오늘처럼 공직사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처처에 공직자의 비리가 만연해지는 때에 참으로 좋은 본보기가 되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다고 고불이 본래부터 겸손하고 훌륭한 재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명석한 머리로 교만했던 고불이 그처럼 훌륭한 인물이 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맹사성이 열아홉에 장원급제-正史는 1386년(우왕 12년) 27세에 문과 전시에 장원급제- 후 파주 군수로 명을 받았을 때 선사(禪師)를 찾아 훌륭한 정치를 수행할 수 있는 고언(高言)을 듣기를 청했다 그 때 고승(高僧)이 이르기를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악한 일은 하지 마시오”라는 지극히 평범한 한마디를 들려주었다. 오만한 맹사성은 “스님, 그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올라온 줄 아십니까?” 하며 노기 띤 얼굴로 일어섰다. 고승은 “먼 산사(山寺)까지 오셨는데 녹차라도 한 잔 들고 가시기 바랍니다” 하고 권유했다. 오만했던 맹사성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못 이긴 체 자리에 앉았다. 고승은 맹사성 앞에 녹차 잔을 놓고 차 주전자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런데 찻물이 흘러넘쳐 방바닥을 적시는데도 계속 따르고 있는 것을 본 고불이 더 화가 나 “스님, 지금 찻잔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화를 냈다. 고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고승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녹차 잔의 물이 넘쳐 방바닥 버리는 것을 보고 알면서 왜 지식이 넘쳐 자신의 성품과 인격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할까?” 이 말을 들은 맹사성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어 황급히 차를 마시고 일어서 문밖으로 나갔다. 자리를 피하려는 급한 마음에 서두르던 맹사성이 낮은 문지방에 이마를 부딪치고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나가는 맹사성의 뒤에서 고승의 설법 같은 두 번째 말이었다. “엎드리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오만했던 고불이 위대한 이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이 되게 한 한 사건이 이것이었다. 교회도 사회도 정치도 어느 한 곳 성한 곳이 없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왜 모두 이렇게 시끄럽고 불편한가를 생각해 보면 맹사성을 향한 고승의 말 한마디가 명언이 된다. 마음의 허리를 굽히면 육신의 허리도 굽혀진다. ‘허리를 굽혀라’ 그것이 너의 마음을 나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아름다운 삶의 지남철이다. Bend down! Bend over!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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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시사칼럼]깐부
    요즘 유행하고 있는 “깐부”라는 말을 아십니까? 어릴 땐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참 많이 했는데, 그래도 실력이 꽤 좋은 편이어서 따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몽땅 다 잃고서는 무척 속상했던 날이 하루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상대방 두 사람이 같은 편이었고, 서로를 뭐라고 부르면서 둘 사이에는 계산을 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때 자기들끼리 부르던 명칭을 한참의 시간이 흐른 1986년에 또 듣게 되었습니다. 배우 박중훈과 김혜수의 데뷔작이기도 한 영화의 개봉 때문이었는데, 그 제목이 바로 “깜보”였습니다. 그 후로는 또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같은 뜻을 가졌다는 단어 하나가 21세기에 이토록 세계적으로 유행하다니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되어 모조리 시청률 1위를 휩쓸어버린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에 등장해서 어쩌면 앞으로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될지 모르는 “깐부” 말입니다. 알고 보니 지역에 따라 “깜보(부)”나 “깐부(보)” 혹은 “가보(갑오)”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일단 “깜보”에 대해서는 미8군 시절의 소규모 음악 밴드 ‘캄보(combo)’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오종석, 국민일보), 늘 밖에서 같이 뛰어 놀아 가무잡잡해진 친구를 가리키는 우리말이라는 견해도 있는바(네이버 사전), 앞선 영화 속 주인공 장두이 배우의 극중 별명이 “깜보”였는데 이런 뜻으로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깐부”와 관련해서는 일본어 ‘카부(株)’가 어원이라고 하는데, 에도시대 상인조합 ‘카부나카마(株仲間, かぶなかま)’ 또는 지분을 가리키는 말 ‘카부시키(株式, かぶしき)’의 “카부”가 일제강점기 때 들어왔다는 견해로(이무완, 오마이뉴스), 쓴 돈을 나누어 낼 때 ‘카부시키하다’라는 말을 썼다는 증언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간 “깐부치킨”이라는 가게를 운영해 온 분은 요즘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특수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어원을 묻자 어릴 때 고향(평안도)에서 쓰던 말이라 했다고도 하고, 친구로 유명한 고사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중국어 발음 ‘꽌보’나 일본어 발음 ‘깐보(かんぽう)’가 변해서 생긴 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안 그래도 한국을 시샘하기 바쁜 일본이나 중국에서 “깐부”도 자기네 것이라 주장할지도 모르게 생겼습니다. 현대판 “깐부”는 드라마 속에서 이렇게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깐부잖아. 깐부끼리는 니꺼 내꺼가 없는 거야.”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함께 소유하고 사용하는 관계, 그런 의미라면 진정한 “깐부”는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각자의 소유를 심지어 팔아가면서까지 함께 쓰고 함께 나누며 살았다고 사도행전은 두 차례나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행 2:44-45, 4:34-35).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재물이나 재산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들을 어떻게 소개했던가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 대해서는 “나를 위해서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고(갈 4:15),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 관해서는 “자신을 위해 목이라도 내놓을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롬 16:4)? 아무리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는 동역자라 하더라도 어떻게 눈을, 목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 속 신자들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나환자 친구들을 위해 자신의 안위와 가족과 심지어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던 최흥종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답은 여기 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신 예수께서는 누군가를 위해 마찬가지로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이들을 향해 “친구”라 부르셨습니다(요 15:4).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깐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곁에는 이와 같은 깐부가 있습니까? 아니,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이와 같은 깐부가 되어 주고 계십니까? 만일 그렇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진실한 깐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너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깐부가 되어 준다면, 이 세상사람 모두에게 하나쯤은 주님 닮은 깐부가 하나씩 붙어있지 않겠습니까? 대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에서도 깐부라는 말이 연일 등장해 화제입니다. 야당의 어느 예비주자는 “우리 깐부 아닌가요? 치열한 경쟁은 하되 품격 있게, 동지임을 잊지 맙시다”라 했고, 여당의 원내대표도 “오늘부터 우리 모두는.. 깐부, 네것내것 없고 네편내편도 없다, 우리만이 있을 뿐”이라 했다지요? 좋습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 지금까지 격동의 세월을 용케 함께 헤쳐 온 사이들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부디, 더러운 이(利)나 부패한 사욕(私慾)이 아니라,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열정과 미래의 비전과 타자를 위한 희생과 헌신의 깐부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보다 우리부터 주 안에서 그런 깐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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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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