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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내 인생의 역주행을 위해!
    크레용팝의 ‘빠빠빠’, EXID의 ‘위아래’, 브레이브 걸스의 ‘롤린’, 비의 ‘깡’ 그리고 가장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sg 워너비까지, 앞에서 열거된 가수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역주행’입니다. 음원을 발표한지 꽤 지났지만 우연한 계기로 사람들에게 재조명 받으며 다시 인기를 모으는 가수들 혹은 그런 현상을 가리켜 역주행이라고 말합니다. 브레이브 걸스 같은 경우는 2017년에 데뷔했지만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하다 4년이 지난 2021년 유튜브에서 화제를 일으키며 각종 음원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며 역주행에 성공한 아이돌 그룹으로 꼽힙니다. 역주행이 유행처럼 번진다고 해서, 모든 무명의 가수들이 버티고 견뎌 하루 아침에 갑자기 짠하고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역주행에도 일정한 비결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포기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브레이브 걸스의 인터뷰는 이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그 때마다 희망을 꿈꿨답니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모두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을까요? 역주행의 두 번째 비결은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도 실력을 키우는 일에 매진했다는 사실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깡’이란 노래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가수 비는 스케줄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매일 노래 연습과 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다시 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날 잘 준비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비의 이런 성실과 노력이 역주행 신화의 보이지 않는 원동력일 것이라 확신합니다.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가수들처럼 우리 인생도 역주행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순히 운이 뒤따라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 결실의 열매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때로는 기다림도 필요하지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꽉 잡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역주행하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먼저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역주행은 시간이 지난다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비록 지금은 열매가 없는 것 같고, 화려한 결과를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역주행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두 번째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한걸음씩 해나가야 합니다. 즉,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게 맡겨진 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매일의 실력을 조금씩 쌓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꿈을 꾸고 앞을 향해 달려가지만 너무 멀게 느껴질 때,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도 나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함께 시작한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더 앞서 달려갈 때 그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포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꼭 오늘 당장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끝까지 가보는 자세, 그 마음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번째는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입니다. 삶의 자세와 태도는 작은 요소이지만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늘 당장 감사할 일이 없더라도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을 은혜와 감사로 여기는 삶이 인생 역주행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비결입니다. 역주행의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오늘, 지금, 나의 성실한 태도와 자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살아내고 있나요? 나의 모습을 돌이키면서 역주행을 향한 발판을 마련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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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시사칼럼]네카라쿠배
    혁명적 변화라 할 만한 시대 속에서, 스스로 적응하고 있는지 알고자 하면 다음과 같은 신조어들이 요긴합니다. ‘네카라쿠배’, ‘미라클 모닝’, ‘벤자민 버튼 증후군’, ‘코리안 멜랑콜리’ 이들 중 몇 개를 알고 계십니까? 먼저 ‘네카라쿠배’부터 보겠습니다. 이는 <네이버, 카카오, 라인, 쿠팡, 배달의 민족>, 이렇게 네 기업의 앞 글자를 조합한 말입니다. 현재 젊은이들이 가장 선망하는 회사들로서, 초임도 5천에서 6천 수준으로 높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내 복지라든지 워라밸 측면에서 압도적인 만족감을 준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이미 최첨단회사들을 가리키는 ‘마가(MAGA)’(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아마존) 혹은 ‘팡(FAANG)’(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 같은 단어가 유행한지 오래입니다. 한국의 네카라쿠배 또한 진화하고 있습니다. 당근마켓과 토스를 합쳐서 네카라쿠배-당토, 직방을 추가해 네카라쿠배-당토직, 야놀자를 포함한 네카라쿠배-당토직야, 이런 식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미래가 결국 이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새로운 관심과 흐름을 분별해야 합니다. ‘미라클 모닝’이란 글자대로 ‘기적의 아침’입다. 뜻밖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소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장로로서 새벽기도하던 습관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뚜렷한 차이도 존재합니다. 새로운 세기에 한 때 반짝하고 유행했던 소위 ‘아침형 인간’의 목표는 인생의 성공에 있었습니다. 먼저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대로였습니다. 반면에 2016년 미국의 할 엘로드(Hal Elrod)가 쓴 동명의 자기계발서에서 비롯된 ‘미라클 모닝’은 조금 더 포괄적인 목적을 가집니다. 현재 이 단어를 검색하면 수십 만 건의 게시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매일 습관적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 독서, 명상, 운동, 외국어 공부, 요리, 투자 같은 활동을 하고 사진으로 인증하는 개인 계정들이 넘쳐납니다. 단순한 성공을 초월해서 이들은 자기만족, 보다 효율적인 삶, 그리고 생활의 만족감과 행복의 증진을 추구합니다. 교회에는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세대를 향해 기적의 아침을 소망하며 기도해 적이 있습니까? ‘벤자민 버튼 증후군’은 2017년 나온 동명의 영화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극중 주인공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80대의 모습으로 출생하여 세월이 갈수록 젊어집니다. 그런데 기업 분야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서 불경기를 맞아 중형항공사 스카이마크 등 대기업들이 자본금을 일부러 줄여서 중소기업으로(자본금 1억 엔 미만)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국내의 경우에도 중견기업연합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근 몇몇 기업이 자발적으로 중소기업 회귀를 결정했다고 하니, 코로나가 불러일으킨 벤자민 버튼 증후군이 어쩌면 우리 사회에 더 넓고 깊숙이 자리 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즉 중소기업으로부터 대기업 군으로 진출한(자산 총액 5,000억 이상) 사례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네이버, 카카오, 하림, 셀트리온 등이 그러합니다. 이들을 보통 ‘유니콘’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벤자민 버튼’의 상극이라 할 수 있겠네요. 우리 사회에는 역(逆) 벤자민 버튼 증후군이 팽배하여 무수한 유니콘들이 새롭게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코리안 멜랑콜리’입니다. 세계적 위기 속에서 우리는 급속한 변화를 초월하는 속도와 성장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 방안이 나오지 않거나 속도가 느리면 참지 못하는 우울증 비슷한 것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특한 성향이 반전의 결과를 도처에서 양산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불편이나 지나친 규제들을 속속 개선하는가 하면, 바이러스 사태의 관리나 백신 공급 등에 있어서도 민첩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변화는 중요합니다. 신자인 우리에게도 변화는 중요합니다. 주님은 안주(安住)를 원치 않으시고(마 17:4), 당신 안에 있으면 이전 것은 지나고 새 것이라 하시며(고후 5:17), 세상을 대하여서도 언제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롬 12:2).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변화에 최적화된 인류입니다. 그런데도 변화가 두려워 우울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네카라쿠배!’ 이제 새로 배운 말들을 복창도 하면서 ‘크리스챤 멜랑콜리’의 태세로 새로운 시대를 선도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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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소강석 칼럼]그리움과 애태움의 연가
    가락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제가 직접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때는 우리 교회를 출석하는 한사람, 한 사람이 대부분 제 손에 의해서 이끌려 졌습니다. 출석교인이 100여명이 좀 넘었을 때였습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 장로, 권사님이시지만, 당시 김창환 집사와 유추자 집사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과 딸까지 데려가니 성도 4명이 교회를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봉고차로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는데요, 공항에서 헤어질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공항에서 교회로 돌아오면서도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왔습니다. “아, 그들은 꼭 이민을 가야 했을까. 내가 가지 못하도록 더 붙잡고 말릴 걸...” 사실 김장환 집사님 부부는 가락시장에서 장사해서 십일조도 잘하고 봉사와 헌신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먼저 간 형제가 자꾸 미국으로 오라는 바람에 꼬임을 받아 LA로 간 것이거든요. 저는 그들을 떠나보내는 아쉬움 때문에 몇 주일 동안이나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떠난지 1년 반쯤 되었을까요? 그때쯤 제가 미국에 가서 보니까 사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김창환 집사님 부부 역시 한국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김창환 집사님을 끌어안고 함께 울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여기서 이렇게 고생하지 말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세요. 한국에 오면 얼마든지 가락시장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 있잖아요?” 저의 말에 설득을 당하여 그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 부부가 다시 교회로 돌아왔을 때 얼마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교인 한 부부가 돌아오는 게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요. 이런 그리움과 애태움은 코로나로 인하여 저의 가슴 속에 다시 가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보랏빛 엽서’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불렀겠습니까? “♪ 보랏빛 엽서에 실어온 향기는 목자의 눈물인가 이별의 마음인가 / 한숨 속에 묻힌 사연 지워보려 해도 떠나버린 성도 마음 붙잡을 수 없네 / 오늘도 가버린 성도의 생각에 눈물로 써내려간 얼룩진 일기장엔 / 다시 돌아올 성도 모습 기다리는 목자의 사연” 또 ‘J’라는 노래를 사랑하는 성도를 향한 연가로 개사를 해서 불렀습니다. “J 아름다운 교회 생활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 J 난 성도들을 못 잊어 / J 난 성도들을 사랑해...” 그러나 공간대비 20% 예배를 드리는 기간이 너무 오래 되다보니까 이것이 너무 당연시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며 깊은 상념에 잠겨봅니다. “개척교회 시절에 성도 한 명을 보낼 때의 애태움과 그리움이 내게 아직도 남아 있는가. 한 성도를 떠나보내며 성도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애타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메말라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지난 주 저는 김부겸 국무총리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총리님, 언제 교회 예배 때문에 확진자가 나온 적이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서는 코로나 감염이 안 되었잖아요. 그러니 어서 빨리 예배가 더 원활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그래서 언론보도에 나온 것처럼, 김부겸 총리님께서는 “목사님들이 백신을 많이 맞도록 권면해 주십시오. 그러면 7월부터는 예배 제한이 좀 더 풀어지지 않겠습니까?”라는 긍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총리님, 저는 예배 회복을 위해서 이미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았습니다. 화이자나 모더나도 맞을 수 있었지만 저는 아스트라제네카를 선택해서 맞았습니다. 이렇게 예배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의 열정도 알아주시고 예배 회복 뿐만 아니라 문화예술활동도 회복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나 공간 대비 비율 예배 회복의 퍼센트가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목사의 가슴에 성도들을 향한 그리움과 애태움이 메말라가고 있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저는 총회 사역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공적 사역을 위해 바삐 뛰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저의 모습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유튜브로 예배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교회를 향한 애태움과 그리움이 메말라가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을 당연시해서는 절대로 안 되지요. 오늘밤은 아무리 하늘을 봐도 구름이 꽉 끼어서 별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별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비록 코로나의 먹구름이 성도들과 저를 갈라놓고 있다할지라도 저는 지금도 여전히 성도들의 영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영혼이 다시 예배의 감격으로 불태울 그 모습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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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4, 권세열
    권세열 선교사는 미국의 교회와 개인으로부터 구호품을 인계 받아 구호활동을 계속했는데, 그가 남긴 보고서는 전쟁 당시 한국과 부산의 상항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주고 있다. 1951년 2월 15일자로 작성한 보고에서는 전쟁이 발발한지 7개월이 지난 때의 피해상황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한에서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된 목사수: 장로교 136명, 감리교 24명, 북한에서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된 목사 수 장로교 111명, 감리교 31명, 그리고 남북한을 합쳐서 성결교 목사 6인, 구세군 사관 4명, 성공회 신부 6명, 로마가톨릭 80명, 외국인 선교사 32명, YM, YW총무 7명, Y직원 1명이 피살되거나 행불자가 되었다고 했다. 다 합치면 438명이나 피살되거나 행방불면된 것이다. 또 남한의 피해자는 47만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닐 수 있으나 그것이 선교사 사회에 알려진 통계였다고 할 수 있다. 제주도에는 1만2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제주도로 피난을 갔고, 이중 목사는 400여명으로 목회자 가족은 1천7백 명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제주도로 간 피난민들이 제주도에 40여 교회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1953년 8월에 기록한 보고서에서는, 3년간의 전쟁에서의 교회의 피해 상황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데, 500여 명의 목사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고, 파괴된 교회 수는 1천여 교회, 과부가 된 이가 10만 명, 전쟁고아가 20만 명, 파괴된 가옥 50만호, 시민 사상자 수는 1백만 명, 전쟁 피난민은 900만 명에 이르고, 북한땅에서 공산정권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보고하고 있다. 권세열은 부산에 거주하면서도 서울을 왕래하기도 했는데. 1951년 6월 11일 주일에는 부산영락교회에서 설교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교회(영락교회를 의미함, 필자 첨가)는 서울에서 회집되던 잘 알려진 피난민교회였고, 지금은 피난민 생활을 부산에서 다시 시작하는 피난민교회로서, 서울의 담임목사를 계속 모시고 주일학교와 청년부 등도 본래대로 운영하면서 모이는 교회이다. 주일 아침예배에는 500여 명에서 1천여 명에 이르는 이들이 참석하고 있다. 그 밖의 다른 서울교회들도 피난지 부산에서 재조직하여 전시 중심지의 바쁜 여건 중에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전시중의 신학교육에 대한 보고도 오늘 우리에게 소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권세열은 1951년 6월 16일자 보고에서, 서울 남산에 있던 장로교신학교는 1951년 5월 1일 부산진교회에서 피난 학교로 개교했는데, 100여명 등록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 등록학생이 275명에 달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스스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했다고 한다. 1951년 11월 7일자 보고에서는 대구에서 시작된 총회신학교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다. 500여 학생들로 개교하였고, 학생들의 절반 이상은 그들의 부모나 형제들이 순교당 했거나 이산가족들이고 북한에서 내려온 이들이라고 한다. 교회 건물을 임시교사이자 기숙사로 사용하고 있고, 학과 공부 외에도 노방전도, 개인전도, 교회심방, 군인병원과 교도소 심방 등을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53년 5월 15일자 보고에서는 졸업생이 73명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제 2회 졸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 졸업생인 김광수와 이능백에 대한 정보를 주고 있는데, 김광수(金光洙)와 그의 동생은 평양에서 그의 부친이 공산당의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금광에 끌려가 하루 20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유엔군이 북진할 때 총살자으로 끌려가던 광수의 아버지는 탈출하여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또 이능백(李能伯) 은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공산정권의 징집을 피해 마루 밑에 구멍을 파고 숨어 지내거나 산에서 피해 지내던 중 유엔군의 북진으로 해방되었고, 곧 한국인에 입대하여 공산 정권과 싸웠고 재대 후 신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1953년 5월 22일자 보고에 의하면, 1953년에 이 총회신학교에 20여명의 학생이 지원하여 총 등록학생이 45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신학교가 되었고, 학생 중 4분지 3은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한 이들이라고 한다. 신학교는 신학고목 외에도 기독교와 민주주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등의 과목도 공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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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6-11
  • [은혜의 말씀]여호와의 종이 되십시오!
    오늘은 그동안 살펴보았던 여호수아서를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을 세겜에 모으고 마지막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시작할 당시 1:1 여호수아를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소개했지요. 그러나 오늘 여호수아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 성경은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끝맺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한평생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해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여호와의 종”으로 끝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서를 살펴보면서 어떤 사람이 ‘여호와의 종’으로 불릴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여호와의 종은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24장 전체를 통하여 여호수아가 회상하며 고백하는 말씀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 하나님의 이야기를(His +Story)를 역사(history)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걸음 걸음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 가운데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해서, 순종하는 백성이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습니다. 우리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고백은 “나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에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며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여호와의 종’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을 줄 믿습니다. 두번째, 여호와의 종은 끝까지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안다면,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적당히 믿고 대충 얼버무리는 신앙은 용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할지 심각한 갈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라는 우스게 소리가 진리처럼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진정한 신앙이란 우리가 버려야할 세상적인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결심을 보십시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나와 내 집은 나 뿐만 아니라 내 자녀들 자손들 미래까지 우리 가정은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모세도 지나갔고 여호수아도 지나갔습니다. 오리 모두도 이 세상을 지나 갈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한한 이 땅에서의 삶, 하나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하며 충성스런 삶, 후회 없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서를 마무리하면서 여호수아의 삶이 우리의 삶이되길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달려온 인생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므로 또 새로운 은혜를 향해 달려나가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우리의 최고의 선택입니다. 신앙의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서 평생을 아름답게 사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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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의학 칼럼]다낭콩팥병 새로운 치료제, 나에게도 필요한가?
    상염색체우성유전 다낭콩팥병 또는 다낭신장병 (이하 다낭콩팥병)은 오랫동안 “부모를 닮아서 콩팥이 좋지 않아...”라는 말로 체념하면서 사는 병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낭콩팥병의 진행속도를 둔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약제가 등장하면서 체념보다는 적극적 전투에 나선 환자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 새로운 약제의 이름은 ‘톨밥탄’이다. 첫째. 톨밥탄은 바조프레신 수용체를 차단하는 약이다. 우리 몸에서 수분이 부족하면 분비되는 바소프레신이 콩팥 물혹의 성장에 주된 역할을 한다. 이 바소프레신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수용체에 먼저 붙어야 하는데 톨밥탄은 수용체 자체를 차단하여, 바소프레신이 분비되더라도 물혹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는 약이다. 둘째. 콩팥의 물혹을 없애는 약물이 아니다. 물혹의 성장을 차단하는 약이 아니라 억제시키는 약이다. 임상연구들에서 낭종의 성장을 억제시켜 콩팥기능을 보존하는 효과를 보였다. 대조군 (약을 쓰지 않고 비교한 환자들)에 비해, 물혹의 성장과 콩팥기능 저하를 약 50% 억제하는 효과를 보였다. 셋째. 모든 다낭콩팥을 가진 환자가 치료대상은 아니다. 톨밥탄은 빠르게 진행하는 다낭콩팥병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성인환자에서 콩팥기능이 천천히 저하되도록 하는 약이므로 빠르게 진행하는 다낭콩팥병 환자가 치료대상이다. 다낭콩팥병은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어도 부모형제 사이에도 질병의 양상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위험인자를 많이 가지고 있는 환자일수록 콩팥기능이 빨리 감소하여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에 투석이나 이식수술을 해야한다. 콩팥의 총부피가 큰 환자, 35세 이전에 고혈압 또는 요로계 합병증이 발생한 환자, 특정유전자 변이를 가진 경우 등이 위험인자가 된다. 넷째. 약물과 연관된 부작용이 흔한 약물이다. TEMPO(3:4) 연구에 따르면 적어도 하나 이상의 수분이뇨(소변량 및 횟수가 증가하는 증상)와 연관된 부작용을 경험한 환자가 78%에 이른다. 하지만 이러한 부작용은 수주 내지 수개월 사이에 호전을 보인다. 간독성이 발생하여 약을 중지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다낭콩팥병의 치료에 있어 큰 변화가 있었다. 톨밥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론이 아니다. 치료하기로 결정하든, 하지 않기로 결정하든지 적어도 치료결정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더 이상 체념하고 묻어 둘 질환이 아니니 주치의와 상담해 보시기를 환자와 가족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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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11
  • [부산기독교이야기]구호활동에 나선 선교사들3, 권세열
    권세열(權世烈)이라는 한국이름을 널리 알려진 프란시드 킨슬러(Francis Kinsler, 1904-1992)는 1904년 1월 13일 필라델피아의 저먼 타운(Germantown)에서 아더(Arthur) 킨슬러와 베르타(Bertha)의 아들로 출생했다. 위로 두 누이와 형이 있었다. 형은 후일 목사가 되었고, 두 누이는 한국 선교사로 살았다. 권세열은 1925년 매리빌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하여 3년 간 수학하고 1928년 졸업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4일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평양지부에 배속된 그는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1936년까지 성경과 영문학을 가르쳤다. 1930년 9월 18일에는 도로시(Dorothy Woodruff, 1907-2001)와 결혼했는데, 그는 권도희라고 불렸다. 이들은 오래 전 약혼한 사이였는데, 9월 12일 내한하였고 일주일 후 숭실학교 근처의 매쿤 선교사의 집 뜰에서 야외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금강산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이들은 성경구락부를 조직하고 거리의 방황하는 이들에게 성경과 한글을 가르치는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의 교육운동을 시작하여 큰 지지를 받았으나 1940년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해방 후 1948년 다시 내한하여 대구등지에서 활동하며 성경구락부를 조직하여 문맹퇴치 한글 보급 성경 교수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고,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신약을 가르쳤고, 1952년에는 교장 대리로 일하기도 했다. 1951년과 1957년에는 주한 북장로교선교부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고, 한국의 존경받는 선교사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여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43년간 일하고 1970년 9월 14일 정년으로 한국을 떠났고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1992년 1월 9일 캘리포니아 주 듀알테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주요한 사역은 한국 전쟁기 군목 제도 창설과 피난민 구호, 그리고 포로수용소 전도였다. 그는 전쟁기 피난을 가지 않고 부산에 체류했는데, 1950년 10월 5일자 선교보고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말자 나는 부산과 그 인근에서 구호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우리 선교부의 다른 분들은 대구를 중심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 중에막대한 양의 세계교회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구호품(약 2천 포대의 밀, 콩, 팥, 수백 통의 의류들, 1천톤이 넘은 기름, 50부대의 솜, 90드럼 이상의 분유, 약간의 비누, 신발, 실)을 서울로 가져가지 않고 부산의 창고에 보관중이었다. 그리고 우리 서울 선교부의 운전 기사 한 분이 선교부의 큰 트럭 한 대를 부산으로 가져왔다. 나 역시 좋은 지프차 한 대를 감리교 선교부로 부터 빌려 쓰게 되었다. 구호사역에 경험이 있는 후렛쳐(Fletcher) 박사와 그의 동역자들이 부산에 왔으므로 우리는 함께 구호사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권세열 선교사는 부산의 한 큰 교회에 구호본부를 설치하고, 1950년 7월부터 3개월 동안 곤핍한 이들에게 구호하고 그들을 도왔다. 그래서 6만 명의 피난민들을 구호했다.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선교부가 보관하던 솜을 가지고 1천개의 이불을 만들어 아기를 가진 이불 없는 가정에 분배했다. 구호품을 트럭에 싣고 시골교회로 순회하며 구호품을 분배하기도 했다. 이상이 1950년 10월 5일에 쓴 보고서의 내용이다. 1950년 11월 1일자로 서울에서 쓴 선교 보고에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국에 남기고 간 공산군들의 잔악상은 다 열거할 수가 없다. 나는 폐허가 된 도시들과 잿더미로 변한 가옥들, 파손되어 버려진 승용차, 지프차, 트럭들, 그리고 왜관, 김천, 대전, 서울, 사리원, 그리고 평양에 버려진 탱크들을 보았다. 그런데 공산군들이 가져온 최악의 파괴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한국인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당한 재난과 위협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한밤중에 불려나가서는 영영 무소식이 된 그들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공산군들은 총을 가지고 들어와서 식량과 의류를 탈최한 뒤 개별적으로 불러내어 처형하였다. 안심하고 지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보이면 모두 처형되었다.” 그런가 하면, 평양에서는 20여명의 장로교 목사들이 행방불명이 되었고, 사라진 사람까지 다 합하면 2만 명이 더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철의 장막 뒤를 보았고, 그 참상에 나는 전율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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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5-21
  • [목회자칼럼]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에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기대한다. 일을 할 때에는 유능하고 실력 있는 사람을 찾는다. 원동연 박사는 실력 있는 사람의 5가지 힘을 말한다. 첫째는 지식의 내면화 능력인 심력이다. 마음의 알통이 있고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마음이 무너지면 병이 온다. 둘째는 참과 거짓의 구별 능력인 지력이다. 인생은 판단의 연속이기 때문에 판단력을 길러야 된다. 셋째는 바라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인 체력이다. 체력을 기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넷째는 남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인관 관계력이다. 관계지수를 높여야 된다. 다섯째는 에너지를 분포할 수 있는 힘인 자기관리력이다. 이중에서 한 가지만 부족해도 거기로 모든 것이 쏟아져 버리는 최소량의 법칙이 있다. 실력 있는 사람은 8가지 “ㄲ”시리즈가 있다. 꿈, 꾀, 끼, 깡, 꼴, 꾼, 끈, 끝이다. 꿈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이 그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다. 안될 사람은 꿈도 없다. 요셉은 생생한 꿈을 꾸었다. 꾀는 잔머리 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이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얻었다. 지혜가 건강, 부자, 행복을 만든다. 끼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탈렌트를 말한다. 주신대로, 받은대로, 은사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럽고 쉽다. 깡은 담대함을 말하는데 몸짱은 아니라도 배짱이 있어야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깡살, 애살, 넉살이 좋아야 된다. 꼴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꼴값을 떨어도 되는 자존감을 말한다.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꾼은 강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말썽꾼이 아니라 일꾼, 프로, 달인, 전문가가 되어야 된다. 끈은 가방끈은 짧아도 기도의 끈은 팽팽해야 된다. 화끈, 불끈, 매끈, 질끈, 따끈해야 된다. 끝은 끝내주는 사람, 뒷태가 고운 사람, 나중 축복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실력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학창 시절까지는 교복이 비슷하듯이 친구들끼리가 비슷비슷하다.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차이가 나는가? 실력의 차이가 중요한 것 같지만 다른 면이 많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고민의 차이이다. 실력차이는 별로 없어도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뼈가 녹는 고민을 하고, 온갖 발상, 구상, 착상, 상상력을 동원하여 몸부림을 치다보면 주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시고 반짝거리는 영감도 주신다. 고장난 관념인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마가복음 2장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지붕을 뜯듯이 발상전환을 하면 된다. 안된다, 어렵다, 힘들다, 못살겠다, 죽겠다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걷어치우고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통해 고민을 하다보면 전혀 새로운 돌파구가 보일 것이다. 문제의식도 없고, 고민도 없고, 애씀도 없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영성도 없고, 야성도 잠들고, 정성도 소홀한 채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질문의 차이이다. 가만히 있는 것이 제일 나쁘다. 미주알고주알 주님께 물어보라.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을 선택하며 얼마나 집중하는가가 중요하다. 기도제목을 보면 그의 믿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소원을 품을 때 주께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 비전, 응전의 삶을 살아가야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한도전하고, 큰 비전을 가진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부딪쳐 나가는 것이다. 그럴때에 마침내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고, 느낌표가 말줄임표가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였다. 시대마다 쓰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입은 자였다. 결국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열정의 차이이다. 엘리야는 열심이 특심이었기에 구약최고의 선지자가 되었다. 성장엔진, 발동이 꺼지지 않도록 기름부어 주옵소서. 쓰임 받은 사람의 DNA에는 갈증, 긍정, 열정이 있다. 그들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하며 절대긍정 사고방식을 가지고 해도해도 지치지 않는 열정의 소유자이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의 차이이다. 사랑은 기술이다. 사랑은 예술이다. 사랑도 실력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뿐이라(시109:4) 사랑을 하다보면 사랑과 전쟁이 되고 원수 같은 그 인간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킨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기도의 차이이다.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최고의 선물은 기도해 주는 것이다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눈물의 차이이다. 부모님은 나를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주셨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모든 겸손과 눈물로 섬겼다. 한나와 히스기야는 통곡기도를 하였다. 땀과 눈물과 피흘림이 없이는 사랑도 없다. 나는 가정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얼마나 땀흘려 수고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피 흘리기까지 사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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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시사칼럼]알파세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에 이름 붙이기를 즐겨 하였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먼저 나타난 세대 즉 이차 세계대전 이후의 ‘베이비붐세대’ 같은 말도 있었습니다만, 상용어처럼 쓰기 시작한 것은 지난 세기 후반의 ‘엑스(X)세대’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세기 말의 세대를 자연스럽게 ‘와이(Y)세대’로 부르게 되었고, 새로운 세기의 출발 시점에는 당연히 ‘제트(Z)세대’로 이어지면서 동시에 천년을 뜻하는 ‘밀레니엄’이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MZ(엠지)세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십여 년 동안 태어난 그야말로 최신세대를 일컫는 말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알파세대’를 거론합니다. 영어 알파벳 끝이 ‘제트/지(Z)’니 이제 새롭게 그리스어의 첫 글자로 시작하자는 취지입니다. 대체로 2010년 이후 출생한 아이들이 그 대상이 되겠습니다. 알파세대는 앞선 세대와 구별되는 다음과 같은 뚜렷한 특징들을 지녔습니다. 공교롭게도 모두 영어 문자 ‘엔(N)’을 초성으로 가지고 있어서 ‘4N’이라고 지칭하겠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뉴노멀(New Normal)’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진행 중인 판데믹 현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알파세대는 급작스럽게 찾아온 가치와 기준의 대전환기에 태어나서 활동하게 될 주역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수(Number)’라고 규정해 보았습니다. 사상 초유의 낮은 출산율과 급전직하한 취학연령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복수형 ‘알파들(αs)’이 아니라 단수형 ‘알파(α)’ 하나가 정말로 소중한 세대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네이티브(Native)’입니다. 언어를 그 나라 사람처럼 즉 원어민처럼 잘할 때 보통 ‘네이티브 스피커’라고 하지 않습니까? 알파세대는 전통적인 언어가 아니라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디지털과 함께 태어나 디지털과 함께 자라는 세대입니다. 네 번째 특징은 ‘넷(Net)’으로 보았습니다. 인터넷망을 뜻하는 기존의 ‘넷’을 넘어서 이들은 오늘날 인터넷과 미디어를 아울러 범지구적, 전방위적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넷플릭스(Netflix)’ 세대라 불릴 만하기 때문입니다. 알파세대가 그러나 꽃길만 걸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깔려 있기에 더욱 낯설고 헤매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음세대를 생각하게 되는 오월을 맞아 그러면 이제 어떻게 이들 알파세대를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알파세대에게 있어서 ‘공동체’는 새로운 의미로 중요합니다. 형제자매가 많았던 예전과 다른 알파세대는 공동체라는 개념에 태생적으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교회수련회가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신앙공동체를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고용수).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알파세대와 공동체를 연계할 수 있을까(Westerhoff), 이 문제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둘째, 알파세대에 절실한 것은 ‘공감’입니다. 진즉부터 감성지수와 공감능력을 강조하는 견해가 속속 등장했습니다(Daniel Goleman, Howard Gardner).자칫 이기적이고 기계적일 수 있는 알파세대에게 ‘공감’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셋째, 알파세대에게는 ‘공간’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함의를 가집니다. 파커 팔머(Parker Palmer)는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에서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그가 독창적으로 재정의한 ‘공간’의 핵심은 ‘개방성, 경계, 환대’에 있는데, 기존의 전통을 답습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새로운 배움의 공간 개념을 열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언뜻 보면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근본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1:5-6). 시대가 아무리 달라지고 환경이 얼마나 바뀌어도 ‘알파’의 근원은 언제나 여일하고 영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침 ‘알파세대’라 불리는 저들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소중한 것 역시 바로 그 ‘알파(the α)’가 아니겠습니까? 어린이날은 지났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신약성경의 각 권 5장 5절을 보면 이러한 알파세대 어린이들에게 꼭 들려주어야 할 구절들이 많습니다. 성령(고전 5:5; 고후 5:5; 갈 5:5), 기업(엡 5:5), 빛(살전 5:5), 소망(딤전 5:5), 아들(히 5:5), 여기에 이미 ‘알파’로부터 비롯된 ‘공동체’와 ‘공감’과 ‘공간’이 망라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제 새롭게 등장한 알파세대에게 변함없이 우리는 그 알파와 알파의 말씀들을 내리내리 가르치고 물려주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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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은혜의 말씀]영원한 도피성 예수 그리스도(수20:1-6)
    이스라엘의 가나안땅 분배가 모두 마쳤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도피성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들이 복수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난처의 역할을 하는 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도피성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도피성은 생명의 존중을 보여줍니다. 도피성 제도는 우리의 한 생명 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존중이 담겨있습니다.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라 할지라도 사람의 복수로 그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종과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창 1:27,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존재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작품 중에도 작품, 걸 작품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기에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고 때로는 섬김을 통하여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길 축복합니다. 2. 도피성은 모두의 피난처(보편성)임을 보여줍니다. 도피성은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있는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피성은 민족이나 인종간에 어떠한 차별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든 갈 수 있게 이스라엘 전역에 있습니다. 요단 동편에 3곳, 요단 서쪽에 3곳 모두 6곳을 지정하여 누구든지 하룻밤에 달려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영혼의 도피성, 피난처입니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교회는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3.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살인자는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으면 죄가 있고 없고 간에 상관없이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인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본향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보여줍니다. 마 11:28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문제와 아픔, 고통의 짐을 예수님께 맡기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짐을 받아주시고 대신 져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 눈물을 아시고 붙들어 주시는 영원한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피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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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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