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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이럴 때 난 갈등한다
    1. 아무리 애를 써도 변화가 없을 때 난 갈등한다. 목회 초년 시절 또는 개척할 때, 있는 힘껏 애쓰고 힘써도 사람은 변화되기 힘든 것일까? 양적 변화로 성도 수의 부흥이 있든지, 아니면 질적 변화로 삶의 변화가 있든지 둘 중 하나의 결실은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없을 때, 이 때 우리는 좌절감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을 했나? 계속 해야 하는지, 어떤 변화를 찾아야 하는지... 2.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 될 때 난 갈등한다. 적은 수입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다가도 너무 오랫동안 힘듦이 지속될 때 우리는 갈등한다. 과연 이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인지, 다른 길을 가야 하는 것인지... 3. 나의 문제는 참을 수 있는데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때 난 갈등한다. 이 땅의 모든 아빠, 엄마들이 나름대로의 어려운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 목회자라는 직업은 자녀와도 연관이 있기에 더욱 힘겹다. 나는 목회자이고, 사명자이기에 참을 수 있지만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이 온갖 소문과 좋지 않은 이야기에 엮일 때 부모는 갈등한다. 4. 중년기는 마음이 전쟁터라고 하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안에서 싸우는 나를 발견할 때, 난 갈등한다. 좌절과 탈진이 반복될 때, 중년기 남자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반복된 갈등으로 에너지가 상승하거나 유지되기는커녕 성과 없이 끝도 없이 아래로 내려갈 때 어려운 마음은 갈등의 전쟁터가 된다. 5. 직장 상사와 마음이 맞지 않을 때 난 갈등한다. 남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직장인데, 그 속에서도 상사와 마음이 맞지 않을 때, 하루에서 수십 번 사표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며 참고 또 견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길을 걸을 때면 “언제까지 이 회사를 다녀야 하나?” 고민하고 갈등한다. 미래를 생각해서는 지금 그만두어야지, 라고 생각하지만 현재 상황을 봐서는 당장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머리와 마음이 매일 싸우는 상황에서 어떤 것이 정답인지 알지 못한 채 아침 출근길에서 매일 갈등한다. 6. 오늘 아침 이불 속에서 난 갈등한다. 기온이 내려간 추운 아침,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 속에서 5분만 더, 3분만 더, 머물고 싶은 유혹에서 난 갈등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중에 5분이라도 더 안식하고 싶은 마음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움직여야 하는 삶 앞에서 갈등한다.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은 누구나 갈등 속에 살며, 갈등하는 것이 곧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갈등을 하며 생각의 발전, 인격의 성숙을 이뤄간다. 갈등이 없으면 생각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고, 생각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의 모습을 바로 직면하기가 어렵다. 갈등을 통해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봄으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나는 어떤 사명자’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떤 사람은 그 갈등을 빨리 해결하고픈 마음에 온갖 방법을 동원해 답을 찾는다. 반면에 또 다른 사람은 갈등 앞에 “이 갈등이 왜 생겼는지” 고민하고 “갈등에 반응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 사건을 통해 내 모습을 보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과연 내가 정체성에 맞는 삶 다시 말해 사명을 깨닫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갈등 앞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문제 해결에 급급한 나머지 갈등이 주는 유익을 놓치고 현상에만 전전긍긍하지는 않는지, 아니면 갈등을 기회로 삼아 내 모습을 바로 보는 계기로 삼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현상과 깊은 의미를 파악해보면 갈등이 결코 피하고 싶은 숙제가 아니라 나의 정체성과 사명을 발견하는 감사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실존하는 우리가 크고 작은 갈등 앞에 사명을 발견하고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앞에 갈등이 있는가? 예상하지 못한 갈등을 실패의 걸림돌로 생각하지 말고 성장의 디딤돌로 여기는 건 어떨까? 같이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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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은혜의 말씀] 다시 시작하십시오(수8:1~7)
    믿음의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바로 말씀을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 속에 있는 여호수아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주십니다. 1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말씀이 없는 사람은 낙심과 좌절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있는 사람은 강하고 담대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의 채널이 회복되고 말씀이 펼쳐지는 순간, 우리의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임할 때 우리는 어떻게 변화됩니까? 1.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7:10을 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도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실패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실패의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으면 패배의식과 낮은 자존감이 나를 괴롭히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말씀에 순종해서 일어나게 됩니다.(3절)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히브리어로 뭐라고요? ‘쿰’ ‘다시 시작하다. 새롭게 시작하다.’의 의미입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실패 가운데서도 말씀이 임하면 다시 일어설 줄 믿습니다. 2. 올라가게 됩니다. 즉 행동하게 됩니다. 3절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했습니다. 말씀을 받은 사람은 움직이게 됩니다. 말씀이 임하면 비로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1)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2절 “너는 아이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이번의 방법은 여리고성의 방법과는 사뭇 다릅니다.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필요한 방법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사람마다 다르고, 작전도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입니다. 내 계획과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정확합니다. 2)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여호수아는 어떻게 순종하고 있습니까? 5절을 보면 모든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갔습니다. 10절, 백성에 앞서 아이로 올라갔습니다. 또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성은 작은 성에 불과했지만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최선을 다해 최선의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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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부산기독교이야기] 포로선교사 해롤드 보켈(1)
    6.25 전쟁기 부산과 거제도 등지에서 포로들을 위해 활동한 선교사가 헤롤드 보켈(Harold Voelkel, 1898-1984) 목사였다. 옥호열(玉鎬烈)이라는 한국이름을 널리 알려진 보켈은 무디 성서학원에서 2년간 성경을 공부했는데 이때 한국선교사였던 스왈른(소안론)을 만나게 되어 한국 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스왈른의 딸 거투르드 스왈른(Gertrude Swallen)과 1928년 8월 결혼하게 된다. 무디성경학교를 졸업 한 후에는 선교사 자격을 얻기 위해 사우스 다코다에 있는 후론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의 동료가 한경직 목사였다. 후의 일이지만 밥 피어스가 1950년 봄 한국에 왔을 때 그가 아는 이는 보켈 뿐이었다. 이때 보켈은한경직 목사를 피어스에게 소개하여 두 사람의 선린관계가 형성되게 한 것이다. 1929년 5월에는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졸업생들이 가장 많은 해였고 미국의 경제공항으로 선교사 후원도 어려운 시기였다. 그럼에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3개월이 지난 8월 아내와 함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게 된다. 처음에는 안동지역에서 개척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1941년 6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국을 떠나게 된다. 본국으로 돌아 간 그는 공군군목으로 봉사했다. 그러다가 1946년 11월 10여명의 동료선교사들과 함께 다시 내한하여 안동선교부로 돌아가 교회 복구사업을 전개했다. 1948-9년에는 안식년을 보내고 선교지로 돌아온 그는 1949년 서울로 이동하여 NCC사업을 후원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잠시 일본으로 피신했으나 미국 군목의 신분으로 인천상륙작전에 동참하였고,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진하여 그해 10월 29일 평양서문교회에서의 감격적인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한 이후 보켈은 부산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포로 선교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여기서 전쟁포로와 포로 수용시설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전쟁이 시작된 후 7월 초 국군이 최초로 5명의 포로를 잡았는데, 이들은 7월 8일 대전형무소 내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것이 첫 포로수용소라고 할 수 있다.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대전 포로수용소는 7월 14일 대구로 이동하여 달서구의 효성초등학교에 설치되었는데, ‘제100 포로수용소’라고 불렸다. 미군이 운영하는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대전에 설치된 미군 제24사단의 임시포로수용소였다. 그 후 영천의 제25사단 포로수용소(7월 16일), 영동의 제24사단 포로수용소(7월 19일)가 설치되었고, 이곳의 포로들은 후에 대구에 있는 미8군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국군지휘부는 전세의 변동에 따라 포로수용시설을 이전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판단하여 8월 1일에는 부산영도 해동중학교에 포로수용본소(捕虜收容本所)를 설치하고 대구에 있던 포로들을 이곳으로 집결시켰다. 전쟁이 계속되자 포로는 점차 증가하게 되는데, 7월 18일에는 부산시 동래구 거제리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였다. 이 시설은 유엔군 사령부 하의 미 제8군 사령부가 운영하였고, 포로들을 장기적으로 수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의도였다. 7월 26일부터 주한 미제8군 사령부 제1포로수용소(Camp EUSAK No.1)라고 명명되었다. 이 포로수용소를 통상 제1포로수용소(POW Enclosure 1)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24인용 천막을 치고 포로를 수용했으나 점점 확장되어 1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8월 당시 포로는 1천명에 달했는데, 이들을 이곳에 수용했다. 포로들은 최고의 정보원이었으나 이들을 심문하여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통역관이 필요했는데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을 피난처로 삼은 선교사들의 자원봉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는 한국군과 미군이 별도의 수용소를 운영했으나 한국군의 작전권이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자 포로수용소도 통합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8월 12일에는 한국군이 운영하던 영도의 수용소가 폐쇄되고 거제리에 있는 미8군 수용소로 통합되었다. 수용소가 단일화 되면서 수용소도 5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확장되었다. 곧 임시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을 다 이곳으로 집합하여 부산 거제리의 포로수용소는 국군 및 유엔군이 획득한 포로들을 수용 관리하는 시설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계속되자 포로수가 증가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 포로가 5만 명이 넘었고, 1950년 10월 말까지 국군 및 유엔군이 관리하는 포로수는 11만7천여 명에 달했다. 이중 6만2천697명이 부산에 있었다. 1950년 12월 3일 기준으로 포로 수는 14만6천135명에 달했다. 부산과 거제에 분산 수용하였으나 시설이 턱없이 부족했고 식량도 부족했다. 당시 거제에는 28개의 수용동(棟)이 있었고, 각 수용동에는 500-800여명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포로수가 아군의 수용 및 관리 한계를 초과하는 상황이었음으로 미8군 사령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2군수사령부(2nd Logistical Command)를 창설하고 포로 관리를 위하 인력과 장비를 보강하였다. 이때에도 인천에 임시포로수용소가 있었고, 서울 마포형무소도 포로수집소가 있었으나 이곳에서 절차를 마친 이들은 부산으로 보내졌다. 9월 하순부터 포로들이 집결하게 되자 거제리의 수용소가 확장되었고 그래도 다 수용할 수 없어 수영에 대밭 제1, 제2, 제3 수용소와 가야리에 가야제1, 제2, 제3 수용소를 증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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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3-05
  • [성서연구]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
    지난 2007년은 평양대부흥 100주년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제2의 부흥을 기대하면서 많은 집회를 열었으나, 찬물을 끼얹는 일이 있었는데, 분당샘물교회 성도들이 중심이 된 선교단이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반군에게 피랍된 일이었습니다. 이때 배형규목사님과 다른 청년 한 명이 순교했고, 나머지 생존자들이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일단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위험한 줄 알면서 왜 갔느냐>며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경우>와 <되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안 되는 줄 알면 안 하면 되고, 되는 줄 알면 하면 되는데, 왜 우리는 그 반대로 행동할 때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다니엘이 좋은 답이 됩니다. 다니엘은 페르샤의 다리오 왕 시대에 세 명의 총리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신실하고 재능이 뛰어났기에 다리오는 나머지 두 명의 총리를 폐하고 다니엘이 전국을 다스리게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을 시기하는 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어리석은 다리오를 부추겨서 삼십 일 동안 다리오 외의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넣는 법을 공포하게 했습니다. 이때 다니엘의 행동이 어떠했습니까? 다니엘 6장 1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았습니다.> 정적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획책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니엘이 그 모든 정황을 알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어야 할까요? 상식대로라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중단하거나 다리오에게 하소연했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살길을 찾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다니엘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마음에는 지식보다 더 위에 있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신앙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지식과 정보는 그 아래였습니다. 신앙으로 지식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지식은 부패한 지식으로 전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을 줄 알고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쌓도록 도와주면 부모 역할을 잘한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지식이 오히려 자식을 망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많은 사람이 법망을 피하는 범죄를 하고, 해킹을 시도합니다. 모르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아는 것보다 신앙이 최고입니다. 마태복음 21장 45절에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비롯해서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심판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잘 알았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그 다음 46절을 보면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잡으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알았다면 그들은 <회개>했어야 합니다. 알면서도 그들은 오히려 더 큰 악을 행하였습니다. 무리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았는데,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라,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질렀습니다. 아는 게 다가 아닙니다. 신앙으로 지식을 다스려야 합니다. 신앙 없는 지식은 멸망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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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시사칼럼] 영화의 상상이 현실이 되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습니다(2013). 약간 패러디해서 '영화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말을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2004년 방영된 <투모로우>라는 영화가 최근 다시 역주행을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기후가 급강하하여 지구가 얼어붙는다는 내용입니다.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는 공감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는가, 영화는 영화일 뿐, 상영 당시에는 이런 느낌과 감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 그 장면들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신년을 맞아 겨울 폭풍과 대설이 덮친 미국은 국토의 70% 이상 지역이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따뜻한 기후로 인해 한파에 취약한 남부 텍사스 같은 곳은 상황이 더욱 심각한데, 수도와 가스와 전기가 끊겨서(요즘 같은 세상에!) 멀쩡한 실내 가구를 태워 난방을 하고 식수를 얻기 위해 눈과 얼음을 끓이는 정도였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하기야 3월 초입에 펑펑 내린 눈으로 강원도 산간도로에 갇혀 몇 시간을 오도 가도 못한 채 결국은 의지하던 자동차 기름마저 떨어지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영화 같은 현장을 며칠 사이 우리도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1995년 개봉된 <아웃브레이크>라고 하는 영화의 사례는 더욱 극적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더스틴 호프만과 미투 운동으로 체면을 구긴 모건 프리만이 주연하고 극 속에서 한국인과 한국말이 부정적인 뉘앙스로 등장할 때는 불쾌해 하면서 보았던 이 영화는 1976년 아프리카 자이르에서 발견된 에볼라 바이러스가 미국에 상륙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상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과 7년 뒤인 2013년 아프리카 기니와 시에라리온 등지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무서운 기세로 번져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올해 2월 다시 콩고와 기니 일대에 발생하여 비상이 걸렸습니다. 에볼라 바이러스 빈발의 상상이 현실이 된 자체도 놀랍지만 소름 돋을 만큼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의료진과 관계자들이 착용하고 있는 복장이었습니다. 영화 속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감싸고 눈만 볼 수 있도록 한 특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때는 영화라 과장이 심하다 생각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25년이 흐른 지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습 그대로를 전 세계 곳곳에서 매일 각종 미디어를 통해 목격하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에 일어날 각종 재앙을 다룬 영화가 급증하고 있는데 주로 그 원인을 환경 문제에서 찾으려는 경향입니다. 환경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고, 환경 문제야말로 작금의 인류가 겪고 있는 많은 재앙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성찰이 많은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지구촌 전체를 힘들게 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의 본질도 결국은 환경 문제로 수렴합니다. 서울대학교 홍윤철 교수는 최근 <팬데믹>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무서운 전염병들은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사람을 공격했다기보다는 사람이 세균의 생태계를 교란한 후 사람과 병원균 사이에 새로운 생태학적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팬데믹을 비롯한 각종 바이러스와 감염병의 근본적인 원인은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횡포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에 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아마존 밀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규모 벌목, 홍수 조절을 명분으로 감행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댐 건설, 간척 사업을 명분 삼아 덮어버린 갯벌 등과 그로 인해 초래되고 있는 생태계 교란과 환경 파괴를 생각해 보십시오. 진짜 문제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사람이 아닐까요? 요즘 들어 사순절을 지키는 교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본래 개혁파는 성경에 없는 절기나 예식을 거부하였습니다만, 아무튼 사순절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금식이나 절식 혹은 기호품이나 세속적 활동을 자제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 문제를 거론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환경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심각한 고난의 현장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녹색기독교십계명>을 다시 한 번 소개해 볼까 합니다. 하나, 일회용품을 쓰지 맙시다. 둘, 대중교통을 이용합시다. 셋, 합성세제를 삼가합시다. 넷, 중고용품을 사용합시다. 다섯, 물과 전기를 아껴 씁시다. 여섯, 육식을 줄이고 음식을 절제합시다. 일곱, 시간에 쫓기지 말고 쉼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여덟, 불필요한 소비를 줄입시다. 아홉, 작고 단순하고 불편한 삶을 추구합시다. 열, 십자가 정신으로 가난한 이웃을 도웁시다. 해마다 이맘때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소환되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생태계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언젠가는 이런 상상이 현실이 되어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득한 교회들이 이 땅 가운데 속출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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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의학 칼럼] 백내장이 생기는 원인은?
    √백내장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요? (안 좋은 습관 등) 백내장의 주요 원인은 노화입니다. 나이가 들면 몸이 늙어가 듯 눈도 노화 증상이 나타납니다. 원래 맑고 투명하던 수정체가 점점 뿌옇게 변하고 딱딱 해집니다. 뿌옇게 변한 수정체로 인해 시야가 흐리고 잘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 백내장입니다. 이 외에도 안구내 포도막염 발생, 아토피나 당뇨, 스테로이드 장기간 투약, 실외 활동이 많을 경우 자외선 노출로 인한 백내장 발병 등도 있습니다. √어떤 때 백내장을 의심해 봐야 하나요? 백내장이 오게 되면 가장 큰 변화는 시력저하 입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이는 증상이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가까운 물체가 갑자기 더 잘 보이게 된다거나, 밝은 햇빛에서 볼 때 오히려 뿌옇게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한쪽 눈을 가려도 물체가 두개로 보이는 단안 복시 현상도 백내장을 의심해 볼 수 있는 증상 입니다. √백내장 치료의 시기가 중요하다던데 왜 그런가요? 백내장은 발병 시 자연 치유가 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 치료를 통해 개선해야 합니다. 백내장을 오래 방치할 경우 수정체가 점점 혼탁해질 뿐만 아니라 딱딱해지고 부풀게 됩니다. 이때 눈 속 액체인 방수가 빠져나가는 길을 막아서 안압이 올라가게되면 폐쇄각 녹내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백내장을 오래 방치하면 추후 수술 시 어려움이 많습니다. 백내장 수술은 눈 속에서 수정체를 분해하여 제거하게 되는데 딱딱해진 수정체는 분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만약 눈 속에서 분해가 안된다면 수정체를 그대로 빼내야 하는데 이 때 각막을 절개하기 때문에 수술부위의 통증이 발생할 수 있고, 회복시간도 오래 걸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각막 절개로 난시가 심해질 수 있습니다. √백내장 환자의 연령은 어떻게 되나요? 백내장은 대표적인 노인성질환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의 평균 연령대를 보면 50~60대 환자들이 가장 많습니다. 과거에 비해 수명은 늘어났지만 환경오염으로 인한 강한 자외선과 디저털기기의 대중화에 따른 생활방식의 변화로 인해 백내장 발병 시기가 점점 앞당겨지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활동이 많은 50-60대 환자들은 시야에 불편함을 느끼자마자 병원을 찾기 때문에 백내장 환자의 평균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수술하고 났을 때 예상 시력은 어떻게 되나요? 백내장 수술은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인공수정체를 삽입하는 방법입니다. 이 때 삽입하는 인공수정체의 종류에 따라 노안과 백내장을 동시에 치료할 수도 있습니다. 인공수정체는 원/근 거리 중에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는 ‘단초점렌즈’와 여러거리에 초점을 맞출 수있는 ‘다초점렌즈’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환자의 눈 상태와 라이프스타일등을 고려하여 인공수정체 종류를 선택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레이저 장비와 렌즈 등의 개발로 백내장 수술방법이 진화하면서 시력회복의 기대치가 굉장히 높습니다. √백내장 수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나요? 수술 전 정밀 검사를 통해 현재 눈 상태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중요합니다. 백내장 수술 결과는 의료진의 경험과 기술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숙련된 의료진을 통해 자신의 눈에 맞는 치료법과 수술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공수정체 선택에 있어서도 눈 상태와 생활패턴에 적합한 인공수정체를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백내장 치료의 중요성 백내장은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게 되면 수술이 더욱 까다로워지고, 녹내장 등의 질환이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녹내장은 시신경이 천천히 망가져 실명까지 초래할 수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의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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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소강석 칼럼]허들링 처치를 세워가야 할 때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초대교회 시대에 이교도들은 전염병에 감염된 환자들을 내쫓아 버렸고 죽은 시신들을 오물처럼 취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염병 환자들을 찾아가서 기도해 주고 돌봐 주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돌봄만으로도 사망률을 크게 줄였고 이로 인해 기독교가 로마에 공인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사회학자인 로드니에 의하면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봉사 때문에 기독교가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팬데믹 시 초대교회는 예배를 드리는 것 못지않게 환자들을 돌보는데 치중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더 그랬습니다. 특별히 제네바에서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못지않게 목사의 환자 심방을 의무화 하였습니다. 흑사병 감염을 두려워하여 환자의 심방을 거역하는 목사는 면직할 정도로 환자 심방 사역에 치중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용기 있는 불랑쉐목사, 마티우목사 등이 자원하여 흑사병 환자들을 찾아갔지만 곧 감염이 되어 사망을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제비뽑기를 하여 한명은 병원심방을 하고 또 한명은 코론티난(quarantine, 격리 당해 있는) 가정에 심방을 하게 했습니다. 당시에도 감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격리를 시켜 놓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위로와 격려의 심방을 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시대에도 사제들은 허들링 목회를 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는 무엇보다 전인적 생명존중사상이 있었습니다. 영혼을 중요시한 것만 아니라 육체의 생명까지도 존중하였습니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환자들을 시 당국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직접 돌보고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전염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를 한 것이죠.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목회사역의 교훈을 오늘 우리 현실에는 어떻게 반영을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예배가 교회의 생명이고 본질이기 때문에 예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환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환자들을 의료진들이 다 돌보는 현실에서는 교회가 방역수칙을 잘 지키고 교회에서 확진자가 안 내는 것이 의료봉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환자들을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만의 이너서클, 우리만의 카르텔로만 존재하려고 했을 때 일부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집단 감염 사례가 나오면서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지 모릅니다. 이제부터라도 교회는 다시 자성하고 집단 확진자들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더 이상 한국교회 브랜드와 이미지를 추락시키면 안 됩니다. 모두가 소탐대실의 실수였습니다. 요즘 시대는 아무리 제품이 좋아도 기업의 이미지가 추락해버리면 그 회사의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인데 우리의 실수로 복음의 진보를 막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땅을 치고 가슴을 치고 싶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우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얻으려고 무리수를 두는 것보다 조금 절제하며 감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방역에 미숙함이 있고 교회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복음의 진보, 멀리 보는 선교전략, 다음세대까지 이어갈 교회 부흥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조금만 더 참고 감내할 수 없을까요. 우리만의 소리를 내고 규탄하는 것보다 우리가 낮아지면서 국민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며 감동을 주는 교회가 될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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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5
  • [성서연구] 이상한 승리
    우리는 참 많이 싸웁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남학생들은 좀 거칠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학급의 아이들이 싸우기 시작했는데, 당시는 겨울이라 조개탄 난로가 교실 가운데 있었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서너 명의 싸움이 점점 격해졌습니다. 나중에 한 학생이 창문짝을 빼서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유리가 와장창 깨졌고, 덮어쓴 학생의 머리에서는 선혈이 낭자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조개탄 난로의 탄을 뒤집을 때 사용하는 쇠 막대기를 들고 와서 상대방을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쳤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심하게 싸웠습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이긴 사람도 없고, 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 부상했고, 모두 패배자였습니다. 이건 학생 때 일이고,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싸웁니다. 공부도, 기업 경영도 전쟁처럼 합니다. 대한민국은 유독 그런 것 같습니다. 지역감정으로 수십 년을 싸웠는데, 요즘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싸웁니다. 근로 현장도 그렇고, 요즘엔 아파트 위아래 층 주민 사이에 층간 소음으로 인한 다툼이 심각합니다. 평생 싸우다 끝나는 인생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싸우지 않고 사는 법, 다투지 않고 이기는 법은 없을까요? 다투지 않고 이기는 법을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2장 17-21절은 이사야 42장 1절 이하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2장 19절을 보면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투지 않으셨고, 다투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셨습니다. <들렌다>는 말은 어리석은 자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로 행동하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침묵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침묵이 빌라도를 당황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외침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참히 패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위대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셨지만, 빌라도를 총독으로 파송한 로마 제국이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고발을 당하셨지만, 사도행전에 보면 수많은 제사장이 예수님의 복음에 복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지만, 영원히 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지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마귀에 대해 결정적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씻음의 길이 열렸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도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대로 승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다투지 않고, 들레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조용히 이기는 법,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다툽니다. 그 싸움에서 많은 성도가 상처를 받습니다. 성도가 상처를 받고, 교회가 쪼개집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38절 이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싸우지 않으면 지는 것 같으나 사실은 이깁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상대방이 소리를 지르걸랑 우리는 침묵합시다. 상대방이 싸우자고 하면 사랑해 줍시다. 다투지 않고 이기는 이들로 인하여 대한민국이 조용해지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다투지 않음이 승리로 증명될 때까지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공급받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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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시사칼럼] 소의 백신과 야소의 백신
    신축년을 맞아 오늘은 소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합니다. 우직한 소는 동양의 열두 동물 중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더욱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였습니다. 한 때 대학을 상징하는 조형물 상아탑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소를 팔아서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00년 전 평양의 한 농부가 야소(耶蘇) 교인이 되었습니다. 마을의 첫 개종자였고 자신의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았으며 교회의 영수(領袖)로 섬겼습니다. 얼마 후 교인이 많이 늘어 예배당을 짓는데 다들 가난한 시절 아닙니까? 결국 농부는 황소를 팔아 건축 빚을 갚았습니다. 이듬 해 봄 이 지역을 방문한 선교사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밭갈이를 하는데 쟁기를 끌고 가는 자리에 소 대신 영수와 그 동생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순종과 희생이 있었기에 당시 교회의 80%가 자립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의 한국교회는 거꾸로 80%가 미자립 상태라고 하니(옥성득, ‘소와 한국교회’) 안타깝기만 합니다. 소는 인류의 질병 퇴치를 위해서도 기여한 바가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만, 인류 최초의 팬데믹(pandemic)이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 세상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질병이 바로 천연두였습니다. 1796년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는 우연히 소젖을 짜는 여인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종두법을 창안합니다. 정원사의 아들이었던 제임스 핍스(James Phipps)라고 하는 여덟 살 소년의 양팔에 상처를 내고 우두 고름을 나무 조각에 묻혀 문질렀더니 경미한 증세를 보였다가 이내 회복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제너는 조심스럽게 천연두 병균을 조금 주입했고, 소년은 결과적으로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1979년 세계보건기구가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완전히 박멸되었노라고 선언하게끔 만든 위대한 출발이었던 셈입니다. 제너에 의해서 보급되기 시작한 접종법에서 유래한 것이 백신(vaccine)입니다. 백신은 <v-a-c-c-a> 즉 ‘바카’라고 읽지만 원래는 ‘와카’라고도 발음했던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라틴어로 소를 의미합니다. 소는 성경에서도 사자에 이어 두 번째 상징적 피조물로 등장합니다(계 4:7).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상징으로(아타나시우스)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천연두는 소를 통해 잡았다지만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완전한 백신은 아직까지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설령 백신이 나온다 해도 또 다른 형태의 질병이 끊임없이 인류를 위협할 것이 분명합니다. 1937년에 처음 발견된 코로나 바이러스만 해도 2003년 사스(SARS)와 2015년 메르스(MERS)를 야기하더니(치사율이 각각 9.4%, 36.1%), 코비드(COVID)-19라 부르게 된 팬데믹 감염병을 또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물론 백신도 필요하고 치료약도 중요합니다.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공교롭게도 마가복음 끝부분에 이런 구절이 존재합니다.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8). 초창기 이 땅의 교인들은 소보다 야소를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어려운 시절에도 교회마다 자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여기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초창기 교인들은 소의 백신이 아니라 야소의 백신을 더 의지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마가복음의 “독”이 바이러스(virus)라는 말의 원뜻이라면 “해를 받지 아니하며”는 감염을 예방하는 일종의 백신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1886년부터 시작된 콜레라와 1918년 독감의 대유행 속에서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방주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즐비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헤집고 다니며 병든 자를 돌보고 버려진 이들을 수습하는 신자들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모두가 새로운 백신을 바라보는 상황입니다. 속히 안전하고 효과적인 백신이 개발되어 원하는 사람 모두 다 맞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결핍과 공포와 차별의 독소마저 막아주는 영적 백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이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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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목회자칼럼] 황금 비율
    골든타임이 있듯이 황금비율, 황금분할이 있다. 모든 것은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다. 코로나는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겨울철 농사는 가지치기가 있다. 차량흐름은 교통정리가 되어야 된다. 일에는 구조조정이 있고 재배치가 필요하다. 황금비율은 가구의 배치나, 그림을 구성하는 선이나, 모양들의 배열이 특히 멋져 보이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은 어떤 배치가 다른 배치보다 좋다는 것을, 눈을 즐겁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전 회화에서는 각 부분들과 전체의 비율이 완벽한 비율을 이루고 있다. 황금비율은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에 의해 ‘신의 비율’이라고 정의되었다. 황금비율은 선을 긴 부분과 짧은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대략 8:13인데 그의 이러한 생각은 신의 비율이라는 책을 통해 출판되어 레오나르드 다빈치(Leonardo da Vinci)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건강에도 균형가 조화가 필요하고 신앙생활에도 황금비율이 있다. 여호수아의 황금비율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균형”이었다. 여호수아는 모세이후에 원만한 정권교체를 위한 바통터치가 되었다.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 엘리야와 엘리사, 바울과 디모데에게서 나타나는 연결처럼 원만했다. 여호수아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하는데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절대 균형 감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좌우에 치우쳐 진영논리에 빠져있다. 신령한 강단에서 정치이념을 초월한 반듯한 영성을 견지해야 한다. 이편 저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야 된다. 기드온의 황금비율은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에는 나팔”을 든 것이다. 가장 작은 자였던 기드온이 300용사의 대장이 되어서 13만명이나 되는 미디안 대군을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한 손에는 나팔을,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손을 들고 쌍끌이작전을 성공한 것이다. 행복한 가정의 필요 충분한 황금비율은 존경받는 남편, 사랑받는 아내이다.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들라고 하였다.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와 같이 성경말씀에 능통해야 되고, 다윗의 용사 잇사갈처럼 시세를 알아야 된다. 성경에는 박사, 기도에는 도사, 전도에는 프로, 찬양에는 가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신앙생활의 황금비율은 “뱀같이 지혜롭게 비둘기같이 순결하게”이다. 뱀은 구약성경에서 사탄의 상징이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자기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지혜롭다고 하였다. 성령님은 비둘기같이 임하신다. 요즘 비둘기는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지만 원래는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다. 비행기는 두 날개로 균형을 잡고 시속 200km로 맞바람을 안고 이륙한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는, 만성피로 시대에 청춘은 독수리 날개침 같이 비상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청년들은 날개가 꺾어진 세대이다. 3포, 5포, 7포 시대이다.(연애, 결혼, 출산/ 집, 인간관계/ 꿈, 희망) 꺾어진 날개로는 하늘을 날수 없다. 두 날개를 마음껏 펼치고 펄떡거릴 때 독수리 날개침 같이 비상할 수 있다. 노를 저을 때 한쪽 노만 저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만 뱅뱅 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덕을 갖추고, 나무를 보고 숲도 볼 줄 아는 안목을 갖추고 스케일이 있으면서도 디테일이 있는 사람이 균형잡힌 리더이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온몸이 강건한 사람이 3중 축복, 4차원의 영성, 5중 복음을 갖춘 자이다. 아름다운 카리스마는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가 만나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있는 사람, 행복한 가정, 건강한 교회, 신바람 일터,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 축복의 DNA는 갈증, 긍정, 열정이다. 이 모든 것이 균형과 조화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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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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