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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학칼럼] 원인모를 어지럼증, 귀가 원인일 수 있다?
    흔히 어지러우면 우리들은 뇌질환이나 빈혈을 먼저 생각해서 머리를 확인하는 CT(컴퓨터 단층촬영), MRI(뇌자기공명촬영)를 하거나 혈액검사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하고 진단이나 치료를 중단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어지럼증의 80%의 경우가 귀를 비롯한 말초 평형 기관의 원인을 가지는 경우가 많 아서 반드시 귀에 원인이 있는 어지럼증을 확인해야 한다. 전정기능 검사(어지럼증 검사)는 무엇을 보는가? 전정기능 검사는 어지럼증 검사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검사이다. 어지럼증 환자 중에서 머리와 귀에 걸쳐 있는 평형기관, 평형신경, 평형신경핵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안구(눈)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이다. 우리의 눈은 정상적인 경우 어떤 자세, 어떤 위치에서라도 정면을 바라보면 눈동자가 몸과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다. 그러나 평형기관의 경로에 이상이 생기면 눈은 내가 원치 않는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 움직임을 비디오 안진검사 등의 전정기능 검사는 찾아내어서 진단에 활용한다. 또한 여러 가지 어지러운 자극을 인위적으로 주면서 눈의 반응을 살펴서 평형기관의 기능을 평가 할 수 있다. 원인 질환에 따라 맞춤형 검사가 필요하다 기본적인 전정기능검사와 증상으로 말초평형기관의 문제라고 판단한다면 어지럼증은 양성돌발성체위성 어지럼증(이석증), 전정신경염, 메니에르 병 등으로 구분된다. 이석증은 귀 안쪽에서 평형을 감지하는 세반고리관에 이석이 흘러들어가 발생하는데 특정 자세를 취할 때 주위가 빙빙 도는 듯한 어지럼증을 호소한다. 이 경우는 비디오 안진기를 착용하고 눈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진단이 가능하고, 그 자리에서 치료까지 시행할 수 있다. 특정한 자세와 상관이 없는 어지럼증이 나면 메니에르 병이나 전정신경염 일 수 있다. 메니에르 병은 현기증과 청력저하, 이명(귀울림), 이충만감(귀가 멍한 느낌)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어지럼증은 수십분 동안 지속되고, 몇 달, 몇 년에 걸쳐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는 기본 전정기능검사와 더불어 청력검사, 특수한 전정기능 검사인 전기 와우도 검사 등을 시행하여 진단을 한다. 최근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메니에르 질환 환자가 5년 사이에 43%가 증가 했다고 한다. 아직 발병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정확한 진단 후에 여러 가지 약물치료가 시행되고 있고 좋은 결과를 보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전정 신경염은 바이러스가 원인으로 생각하며, 급격하고 심한 어지럼증이 구토, 오한 등과 함께 수일동안 지속된다. 급격한 안구운동을 보이기 때문에 간단한 전정기능검사 만으로 진단이 가능하고 조기 치료를 한다면 빠른 회복이 가능하다. 어지럼증은 전정기능 검사가 필수적이다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는 뇌나 심장 등의 문제보다는 전정기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훨씬 많으므로 전정기능 검사를 이용해 달팽이관, 전정기관 등의 문제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치료에 빨리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고신대복음병원 이비인후과 이환호 교수는 “최근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은데 정확하고 빠른 검사를 통해 추가적인 질병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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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교회학교를살린다] “코로나 이후, 다시 신앙교육이다”
    이전에는 그 누구도 상상 못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지 벌써 일 년이 훌쩍 넘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라는 영화 광고 카피가 생각날 정도로 코로나19는 주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의 상황을 현실 속에 만나고 있다. 특히나 교회학교는 폭탄을 맞은 상태이다. 모일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교회 안에서 가장 타격을 입은 분야는 아마도 다음세대 신앙교육일 것이다. 일 년 동안, 교회와 가정에서 다음세대를 양육하기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여전히 다음세대 신앙교육은 힘들다. 교역자들은 온라인 예배와 교육의 변화하는 체계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암담한 현실에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는 다시 코로나19상황에서 생존해야 하고,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많이 읽는 동화책 중에 ‘프레드릭’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색다른 양식을 모으는 들쥐의 이야기이다. 가을에 모든 쥐들이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을 모을 때, 혼자 색깔을 모으고 빛을 모으는 특이한 쥐다. 그러나 추운 겨울이 오고 희망이 다 떨어져갈 즈음 프레드릭은 자신이 모은 따스한 햇살과 아름다운 꽃들의 색깔을 동료들에게 나누어주며 힘든 시기를 버틸 희망을 심어주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주어지는 물질적인 것 얼마보다도 이 암담한 현실을 살아내고 버텨낼 환히 빛나는 희망이 아닐까. 그저 막연히 잘 될 것이라는 안개같이 모호한 말이 아닌 구체적인 미래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눈이 부시게 따스한 햇살과 알록달록 푸릇푸릇 솟아나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와 풀들, 그리고 그 앞에 끝도 없이 펼쳐지는 파란 바다처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희망을 우리는 노래하고, 붙잡고 싶다. 우리는 그런 구체적이고 강렬한 희망을 소유하신 분, 그 희망이 되시는 그분을 붙잡아야 한다. 희망이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절망의 시기를 희망으로 이겨내야 한다. 이 일은 우리 공동체에게 주신 사명이다. 모두가 함께 주님이 주시는 희망의 빛과 색깔들을 나누어야 한다. 먼저는 각 교회마다 나누어야 할 햇살과 색깔들이 있다. 교회 내에서 구태의연하게 교회학교 교사들만 잡으며 열심히 하자, 잘 하자는 막연한 구호를 외쳐서는 안 된다. 그동안 교육의 주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부모를 교사로 양육하자. 부모들은 가정의 아이들을 가르친다 생각하지 말고 함께 신앙의 추억을 쌓는다 여기며 가정예배를 비롯한 다양한 신앙 활동을 주도하고, 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교회가 가정예배 순서지나 활동패키지, 온라인 예배 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자. 그리고 전교인이 교사가 되어 그동안 남의 일처럼, 교회의 극히 일부처럼 치부되던 신앙교육이 전교인의 사명이 되게 하자. 교회의 미래를 일구는 일에 어느 누구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자세로 동참하고, 어른 예배 시간에 계속해서 다음세대를 노출시키고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키자. 그 다음으로 각 교회가 개별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해낼 네트워크와 플랫폼이 만들어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하나이다. 우리는 욕도 함께 먹고, 칭찬도 함께 듣는다. 운명공동체이다. 지역 교회 하나가 단독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교회들이 연대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힘들지만 그래도 다음세대를 양육하기 위해 노력한 다양한 결과물들이 크고 작은 여러 교회들에게서 속속 나오고 있다. 이처럼 개 교회가 하기 힘든 일들을 여러 기독교교육 연구소들이 해주고, 두각을 나타내는 교회들이 헌신하여 좋은 콘텐츠들을 공유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성민교회와 같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회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담임목회자부터 전교인이 함께 다음세대를 양육하고, 서로가 서로의 교사가 되어주는 건강한 양육시스템과 콘텐츠를 구축하여 이 노하우를 많은 교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는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런 교회들이 나와서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풍성하게 먹을 수 있는 신앙의 양식을 제공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코로나이후, 다시 신앙교육이다. 힘들겠지만 다시 시작이다. 함께 연대하여 다양한 빛과 색깔들의 교육콘텐츠들을 모으고 나누자. 가정과 교회가 함께, 교회들이 함께 연대하여 다음세대들의 예배와 신앙교육의 벽을 다시 세우고, 다시 한 번 우리의 다음세대들과 함께 한국교회의 희망을 노래하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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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성경인물탐구] 여성 지도자 드보라
    이스라엘 사회는 여성은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철저하게 남성 우위의 남성 중심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보라는 여자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사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는 인간 사회를 누가 다스리느냐가 중요한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다스리느냐? 아니냐? 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가 누구이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다스리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강권적 은총에 의해 여자로서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지만 은총으로 되었다고 해서 아무런 지도자적 자질을 갖추지 않은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능히 한 민족을 이끌어 갈 만한 지혜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자기 민족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드보라는 여자로서 직접 나가서 싸울 힘을 가지지 못하였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러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주저앉아서 입으로만 일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못하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자, 곧 바락에게 명령하여 전쟁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바락의 요청에 따라 자신도 직접 전쟁터에 나가서 싸움을 지휘하는 용맹을 발휘하였습니다. 드보라는 연약한 힘을 가진 여인이었지만 그 지혜 못지않게 모든 일을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는 실천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실행에 옮기지 않는 모든 생각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한 바를 실행에 옮기는 온전한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약2:17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란 글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를 일컫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순전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이로 보건대 드보라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순전한 삶, 곧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을 대하되 선하게 대하는 경건한 자였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은 기도에 게으르지 않는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드보라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기도에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기도에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락에게 명령하였다는 것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말씀을 바락에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기도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삶 전체가 기도하는 삶, 곧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을 살 때에 들려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는 미약한 여인이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실천하는 삶으로 그 어떤 힘있는 자보다도 강하고 담대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미약하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면 세상을 이기고 강한 자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이면서 동시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했듯이 드보라 역시 바락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을 뿐만 아니라 장차 미래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예언하는 예언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드보라는 미래의 일을 볼 줄 아는 신령한 눈을 가진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미래의 일들을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적대감을 살 수 있어 예언을 한다는 것은 극단적인 경우 목숨을 내놓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예언은 이와 같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데 드보라는 그 용기를 가지고 담대히 예언을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용기 있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드보라는 바락을 통해 가나안 왕 야빈에게 이김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사람들의 손에서 구했습니다. 우리도 경건과 기도와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승리하여 의를 세상에 심는 의의 종, 승리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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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23
  • [서임중칼럼] 소문(rumor) (2)
    지난 한 세기동안 우리나라 교회에 관한 소문은 다양했다. 예배당 건물로, 교인수로, 새벽기도회로, 선교하는 모범교회로, 엘리트 교인이 많기로, 지역사회를 돌보는 교회로 소문이 난 교회들이다. 그런데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생활로는 어느 교회가 귀감이 되었는가? 예수님이 세우시기 원하셨던 에클레시아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이것이 목회를 시작하면서 나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었다. 나는 목회를 시작하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이 있다. 예배당 건물은 초라해도, 교인수는 적어도, 교인들의 수준은 낮아도, 예산은 적을지라도, 세 사람이 모이든 백사람이 모이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지향하는 목회를 서원했다. 구체적 개념으로 일만 마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하는 다섯 마디가 귀한 것을 알고 성도들에게 그것을 반복교육 했다. 즉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축복과 아멘이었다. 교회는 평행감축으로 부흥했다. 초라했던 예배당이 화려한 건물로 바뀌었고 교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해외선교에 앞장섰고, 국내외 20여 교회를 개척설립 하였으며, 국내 농어촌 미자립 수백교회를 후원했다. 국가정책에 협력하여 복지재단을 설립, 모범적으로 경영하며 작은 자를 돌아보는 교회 본래 사명 실천의 일환으로 매월 100여 가정을 후원했다. 소년소녀 가장들을 품고, 장애인복지에 앞장을 서며 그야말로 가히 몸부림치듯 하나님이 기뻐하실 교회의 모습을 구현하였다. 지방교회지만 모든 것을 갖추어 소위 대형교회가 되었어도 교회는 평행감축을 노래하고 이산과 저산이 마주쳐 울려 주 예수 은총을 찬송하는 교회로 그야말로 지상 천국이었다. 그런데 30년 목회를 마치고 은퇴 후 사단의 키질에 놀아난 몇몇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못된 소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사실과 반대되는 밑도 끝도 없는 인신공격으로써 특정한 문제에 대하여 불순한 의도로 유포시키는 선동적인 허위선전을 뜻하는 데마고기(demagogy)였다.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부언낭설(浮言浪說), 부언유설(浮言流說)의 유언비어(流言蜚語)였다. ‘세익스피어’가 갈파한 것처럼 ‘추측과 질투와 억측을 섞어서 피우는 파이프’가 되어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어 놓고 사랑을 증오로 변질되게 하며 결국 교회를 황량한 벌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럴 때 교회들과 동역자들 그리고 이웃들이 진실을 추구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문에 부채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보며 원망과 불평과 정죄의 유혹이 밀려드는 것을 힘을 다해 물리치면서 엎드림의 시간이 깊어졌다. 아름다웠던 목양(牧養)의 역사는 걸레처럼 되어갔고, 교회는 황량한 벌판처럼 되어가면서 교인들은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시대처럼 되는 것을 보았다. 牧會를 凩會로 만들어 버리는 사단의 전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목도했다. 그제서야 다시금 요한복음 13:2절이 깊이 묵상되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마귀가 그렇게 하게 한 것처럼 교회를 벌판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나는 그들을 단 한 번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기도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5:8)”는 말씀을 간과하고 현실에 도취되어 근신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깨어있지 아니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제 나는 은퇴목사로서 목회지가 없다. 그러기에 나는 지난 날 모래 위에 세운 집을 묵상하면서 날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오직 성경 한 권만을 품고서 농어촌 산골 개척교회를 다니면서 전국을 구역으로 삼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말씀 사역을 한다. 말씀 사역을 하면서 놀라운 것은 데살로니가교회처럼 아름다운 교회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좋은 소문이란 웅장한 예배당 건물이 아니었다. 교인수가 많다거나 예산이 풍족한 것도 아니었다. 요즘처럼 세상적인 무슨 굉장한 인물이 많은 것도 물론 아니었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은 오직 성도들의 아름다운 신앙생활이 주 내용이었다. 곧 믿음의 역사였고, 사랑의 수고였으며 소망의 인내였다. 교회의 역사(歷史)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役使)였다. 개인적 소욕을 위한 수고가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실천하는 사랑의 수고였다.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열심이 아니라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교회 공동체를 바로 세워가는 소망의 인내였다. 보편적 사랑은 이성에 의한 감정적 격동이지만 성경에서의 사랑은 수고가 수반되는 것을 가르쳤다. 즉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은 매 맞고 못 박히고 죽으시는 수고로 이루어진 결과다. 거두절미하고 참 믿음의 사람은 사랑으로 확증되며 그 여정은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를 위한 소망을 잃지 않는 인내의 삶이 된다. 삶, 사람, 사랑은 같은 어원에서 출발했다. 즉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삶이 사람이고 사람이 사랑이고 사랑이 삶이라는 뜻이다. 반려견을 사랑하는 사람이 반려견 머리를 붙잡고 우유를 먹이려고 할 때 개는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우유를 먹으려 하지 않았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컵을 떨어뜨리고 우유가 쏟아졌는데 개는 그 우유를 핥아 먹기 시작했다. 개가 우유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우유를 먹이는 방법이 틀렸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를 사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는 좋은 교회다. 문제는 교회를 사랑하는 방법이 틀려서 교회가 시끄럽다. 거기서 좋은 교회가 못된 소문이 나게 된다. 그래도 세상에는 좋은 교회가 더 많다. 그런 교회를 보면서 나는 오늘은 이 산골, 내일은 저 어촌을 아내와 함께 운전하면서 그 아름다운 좋은 교회, 좋은 소문을 전하면서 사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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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소강석칼럼] 허들링 처치를 세워야 할 때
    지난 1월 21일 오전에 한교총 신년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작년 연말에는 제가 ‘영택트’라는 말을 썼는데, 이번에는 ‘허들링 처치(hurdling church)’, ‘찬란한 바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고통과 상처 속에서 우리만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며 치유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가 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지 답을 찾아본 결과, 가장 큰 요인으로 ‘한국교회의 공교회성 결핍’과 ‘리더십 부재’의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개교회 성장에 집중하는 동안 공교회와 대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리더십의 부재는 위기상황을 대응함에 있어 많은 혼란이 있었을 뿐 아니라 부끄럽지만 감염병 예방을 위한 실천과 대응에도 허점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한교총은 교계의 분열된 리더십을 원 리더십으로 통합하고, 교단과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공교회 세움과 사회적 리더십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한국교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아주 낮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대사회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첫째, 윤리와 도덕성 회복, 둘째,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 셋째, 생명존중과 건강한 가정을 기초로 한 국가 비전 제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사회적 신뢰회복을 위해 교회주의의 담 안에만 게토화 되지 않고, 사회적 감수성과 공감능력을 가지고 복음의 사회적 지평을 넓혀가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감염병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뛰어든 것처럼, 종교개혁시대 성도들이 두려움 없이 환자를 돌보는 일에 앞장선 것처럼,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백신을 들여오고, 환자들을 돕기 위해 피와 땀을 쏟은 것처럼, 사회적 고통에 동참하며 치유하는 허들링 처치(hurdling church)의 모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는 겸손을, 한국교회에는 신앙의 본질과 원형교회 회복이라는 시그널을 주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세계사적 축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비대면 온라인 사회로의 전환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와 예배의 본질은 더욱 강화하되, 사역의 방식은 언택트를 넘어 영혼과 영혼을 잇게 하는 영택트를 취하는 영적 역설적 슈퍼 처치를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남극의 펭귄들은 영하 50도의 혹한의 추위를 허들링의 사랑으로 이겨냅니다. 그런데 펭귄들이 바닷가에 도착하여 먹이를 구해야할 때 퍼스트 펭귄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장 먼저 뛰어 든다고 합니다. 이어령 교수님의 표현대로, 한국교회는 이제부터 우리 사회의 퍼스트 펭귄이 되고, ‘찬란한 바보’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이 찬란한 바보가 되고 허들링의 사랑으로 우리 민족과 시대를 섬겼던 것처럼, 이제부터 그들의 신앙과 정신을 이어받아 2021년을 퍼스트 펭귄, 찬란한 바보, 허들링 처치를 시작하는 원년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신년회견을 발표했더니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한국교회가 ‘허들링 처치’, ‘찬란한 바보’의 교회가 되어 사회의 고통에 동참하며 치유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형을 제시하였다고 보도를 하였습니다. 이제 정말 시작입니다. 공교회 세움과 원 리더십의 회복, 허들링 처치를 통한 한국교회의 브랜드와 이미지 회복을 위한 새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먼저 찬란한 바보가 되어야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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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8
  • [성서연구] 지식을 넘어서는 믿음
    신앙생활의 어려움 중 하나는 아는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아는 것은 객관적으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어려서는 성경시험, 성경퀴즈대회 등을 통해 누가 더 많이, 정확히 아는지 파악하곤 했습니다. 그때 시험성적이 좋고, 퀴즈대회에서 많이 입상하면, 자연스럽게 착한 아이, 믿음 좋은 아이로 인식되었습니다. 저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습니다. 어른들은 그런 저를 쓰다듬으면서 <운성이는 믿음이 좋아. 너는 커서 목사가 되면 좋겠어!>라고 말씀하곤 했습니다. 철없는 저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커서 목사 될 거에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만은 아닙니다. 신학대학원에서는 시험성적으로 학생을 뽑습니다. 성적이 소명과 주님을 향한 사랑, 복음의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목사고시가 있고, 장로로 피택되면 장로 고시를 치릅니다. 이처럼 시험 성적, 즉 지식의 정도가 믿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식인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문적으로 교육받았고, 율법을 연구하였습니다. 일반 백성이 볼 때 이들의 종교적 지식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교육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믿음이 좋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영적인 것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믿음도 부족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세속적이라고 멸시당하거나, 스스로 비하하였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1장 33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과 망대까지 완벽하게 갖춘 후에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그 후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으나, 농부들은 예물을 드리기는커녕 종들을 때리고 거저 보냈습니다. 종들을 다시 보냈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후에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아예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상속자인 아들을 죽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까지 말씀하시고 <나중에 주인이 와서 농부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비유를 듣던 이들은 정답을 말했습니다.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다음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이들 중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을 맡았으나, 하나님의 종들을 죽였고, 아들이신 예수님도 죽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한 농부라고 책망하시는 것임을 알았는데도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잡고자 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45-46절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했고, 지식과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회개하는 결단과 변화된 삶을 사는 용기에 있습니다. 아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지, <많이, 정확히 알아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믿음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진 많은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은 많은 지식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믿음은 아닙니다. 참 믿음은 지식을 넘어서서 회개를 통해 변화된 삶에 이를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 아는 것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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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8
  • [통일칼럼] 한국교회는 통일운동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통일전략은 국가와 정부지도자들의 과제만이 아니다. 민의가 제외된 채, 국가와 몇몇 정부지도자들의 합의에 의해 통일된 베트남과 예멘을 보라. 실패한 통일국가의 케이스들이다. 베트남은 1975년,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수도 사이공을 점령하고 1976년 공산주의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예멘은 남북예멘 지도자들의 합의에 의해 통일국가를 이루었지만(1990), 통일 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지도자들의 갈등으로 내전이 촉발(1994.4)되었고, 결국 무력을 앞세운 북예멘에 의해 곧바로 적화통일 되었다(1994.7). 2015년 이후 남예멘국민들의 불만 폭발로 또 다시 내전을 거듭하다가 2018년에 휴전하여 현재까지 분단된 상태로 있다. 정부주도로 통일을 주도한 두 나라는 자유민주주의가 실종된 대표적인 통일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통일독일의 경우는 국가와 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아 이룬 통일국가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를 이룬 동서독의 통일은 단순한 국제사회의 협조와 정치적인 타결로만 이루어진 통일이 아니었다. 긴 세월동안 서독은 서독대로 국가와 교회시민 단체들과 협력하여 동독 안에 민주화 바람을 불어 넣었고, 동독 안에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시민들과 연대하여 통일로 이끌었다. 동독 안에서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1981년부터 시작)와 겟세마네교회 등의 평화기도운동과 역시 서독 안에서 교회와, 뉴포럼(Neues Forum),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 민주봉기(Demokratischer Aufbruch), 원탁회의(Runder Tisch) 등의 시민단체들이 통일운동을 주도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당시 민주봉기 단체의 대변인을 맡았던 앙겔라 메르켈은 통일독일의 최장수 총리로 현재 16년째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통일독일은 대통령도 동독 출신을 선출하기도 했다. 동서독의 통일은 성숙한 시민운동과 교회들의 단결된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낸 무혈혁명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통일독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만 한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의 전략과 외교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통일은 국가와 전 국민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민적, 시민적 지지와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만일 대통령이 북한지도자를 만나서 합의하여 영웅적 남북통일을 이루려 생각한다면, 예멘 꼴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통일을 소수 지도자들의 특정한 이론을 실험하려는 장으로 삼으려고 시도한다면, 역사를 돌이킬 수 없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독일의 사례는 물론 부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을 이루었고, 통일의 결과 유럽 최강국으로 발전하였고, 세계의 지도국으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요인보다도 긍정적인 요인이 더 많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치가 없다. 실패한 베트남과 예멘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시민운동과 교회들의 지원을 얻어야만 하며, 한국교회는 자유민주주의 통일한국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힘을 모아 하나로 연합해야만 한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한국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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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8
  • [시사칼럼]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프랑스 철학자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1981)에서 현대사회는 현실의 복사나 때로는 원본조차 없는 이미지가 실재(實在)를 대신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체물을 ‘시뮬라크르’, 그 과정을 ‘시뮬라시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결과 “시뮬라시옹 시대에는 가공의 이미지인 시뮬라크르가 새로운 질서를 지배한다.”라는 명제가 등장합니다(최효찬). 마치 이러한 현상을 입증이라도 하듯 발생한 사건이 걸프전(Gulf War, 1990~1991)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생중계되는 TV와 인터넷 영상에 나타난 미사일과 포화를 전쟁 그 자체로 인지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999년에 발표된 기념비적인 영화「매트릭스(Matrix)」의 대사나 장면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뮬라시옹’에 바치는 헌사를 방불케 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virtual reality)를 진짜 현실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홈쇼핑 광고 속 이미지를 보고 홀린 듯이 상품을 주문하는 우리네 모습도 이미 영화 속 세상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시뮬라크르의 친근한 예로는 ‘대중 스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스타는 매체와 자본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상품과 같은 존재들이며, 그 자체가 전형적인 현대사회의 시뮬라크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스타는 단순한 모형이 아니며 오히려 찬양과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승화된 초과 실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타는 이상적이거나 뛰어난 데가 전혀 없다. 즉 스타는 인위적인 존재이다. 스타의 얼굴에는 영혼이나 감수성이 전혀 없다. 오히려 의미 없는 미소 가운데 모든 감수성과 표정을 제거한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타는 신화에 도달하고 제의적인 찬양의 집단적 의례에 도달한다.”(보드리야르,「유혹에 대하여」중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前)미국대통령을 보십시오. 누구보다도 대중매체 활용의 달인이었던 그는 현대 미국의 시뮬라크르를 조작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하나의 시뮬라크르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자의 예로는 극단적 미국우선주의를 표방하는 ‘트럼피즘(Trumpism)’을, 후자의 예로는 연 초에 발생한 트럼프지지자들에 의한 국회의사당 난입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시뮬라크르 역시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금세기 초 일어난 테러에 의해서 세계무역센터빌딩이 파괴된 사건을 금융자본주의와 신자유질서를 상징하는 ‘시뮬라크르의 죽음’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최근 유사한 사례를 많이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교계에만 알려졌던 신천지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극우집회를 주도했던 한 교회의 면모가 각 언론에서 시사 문제로 다루어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편향적인 신학과 공격적인 선교로 우려의 대상이었던 어느 선교단체의 정체가 수면 위로 부상하기도 했고, 기묘한 대안학교 운동을 주창하면서 급부상하고 있던 사이비 선교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점에 있는 교주 혹은 지도자를 향한 열광적인 추앙과 그가 구축한 권위적 조직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입니다. 가공되고 포장된 이미지가 실체를 지배하고 대체하며 그를 향한 제의적인 찬양이 이루어지는 시뮬라크르의 전형입니다. 철저한 시뮬라시옹의 과정 속에서 교묘하게 조작되어 많은 사람들을 호도해 왔던 악의적인 시뮬라크르들이 이번 기회에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뮬라시옹 이론은 나아가 신의 개념조차 하나의 시뮬라크르로 간주합니다. “신은 사실성이 아니며, 결국 본질적으로 신은 없었고 오직 시뮬라크르만 존재하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신 자체도 단지 하나의 거대한 시뮬라크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보드리야르) 그러나 우리는 결코 이러한 결론에는 찬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원본의 모사나 가공된 이미지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만유의 근원이자 진정한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존하신 하나님의 교회요, 예수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라, 전과 지금과 이후에 만국의 성도니 그 명칭은 거룩한 공회”(교단 헌법 2조 1항)라 정의하는 교회는 결코 시뮬라시옹의 과정을 통해서 세워지거나 파괴될 수 없는 실체입니다. 지금 교회는 안팎으로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참된 교회마저도 시뮬라크르로 간주하려는 생각이 팽배하고, 역(逆) 시뮬라시옹을 통해 교회를 파해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딤전 4:7) 교회의 참된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버립시다. 부디 “껍데기는 가라”, 외치고 탈피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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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8
  • [부산기독교이야기] 부산아동자선병원
    6.25 전쟁기 부산에 설립된 의료 기관으로 아동자선병원(Pusan Children's Charity Hospital)이 있었다. 아동병원은 부산에만 있는 자선 병원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제2병참기지 사령부 소속으로 부산에 체류하던 메컨 대위가 1950년 가을 전재(戰災)고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부산 서구 아미동의 국립행복산육아원 구내에 의무실을 열었는데 이것이 후일 부산 자선병원으로 발전했다. 의무실은 얼마 후 부산 메소닉클럽의 후원으로 소아과 의원으로 발전했는데 이것이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부산무료소아과의원’이었다. 이 때의 원장이 내과 전문의 정구현 의사였다. 그러다가 1952년 1월 부산시와 경상남도 사회사업 연합회, 그리고 메소닉 클럽과 일반 유지 대표로 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산아동자선병원으로 개칭하고 부산시 소유 건물인 완월동으로 이전하였다. 1953년 5월에는 사단법인을 구성하였는데 이 당시 장기려 박사가 중심이 되었고, 그는 발기 취지문이 남아 있다. 1955년 8월에는 메소닉 클럽 주관으로 ‘미군대한원조’(AFAK: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의 건축자재 제공과 기독교세계봉사회(CWS: Church World Service)의 원조로 부산대학교 병원 구내에 100병상 규모로 건물을 짓고 이곳에서 진료했다. 주된 환자가 고아원에 수용되어 있는 아동들이나 일반 고아들과 극빈 아동들이었다. 이곳 부산아동자선병원을 위해 영국의 아동구호제단인 SCF(Save the Children Fund)은 매달 200파운드를 지원하여 주었다. SCF는 1919년 창설된 구호단체인데, 한국에서는 1953년부터 활동했고, 아동자선병원 외에도 여러 고아원을 후원하고 빈곤아동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1960년에는 송윤규(宋允奎, 1918-?) 의사가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한국의 초기 신학자인 송창근 박사의 장남인데, 함경북도 웅기에서 출생했다. 1944년 대구의전을 졸업하고 흥남질소비료공장 부속병원 소아과(1944), 용산철조병원(1951), 유엔규 야전병원(1951), 영연방아동구호재단 진료실(1953)에서 일하고 1955년 미국으로 가 4년간 내과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 1960년부터 부산아동자선병원장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1966년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0년대 초 아동자선병원의 현황을 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는데, 1963년 11월 1일 당시 미국 메노나이트교회 중앙위원회(MCC)에 보고된 자료이다. 메노나이트 중앙위원회 요원으로 한국에서 일했던 마벨 브랑크(Mabel Brunk)가 작성한 이 문서에 보면 병원 주소는 부산대학교 병원 구내인 아미동 2가 10번지였고, 원장은 송윤규 박사였다. 입원환자는 60-65명 정도이고 외래환자는 일일평균 50여명이었다고 한다. 직원은 총 62명인데, 종교별로 보면, 천주교인이 10명, 개신교 신자가 24명, 나머지는 비종교인이었다고 한다. 부산아동자선병원은 설립된 이후 1968년까지 어린이 27만 명을 치료해 주었다고 한다(중앙일보 1968. 10. 16). 이 해 11월에는 원장인 송윤규 박사는 새싹회가 수여하는 제12회 소파상을 수상했다. 그러다가 1971년에는 부산 아동자선병원은 기독교아동복리회(CCF)가 운영하던 ‘회복의원’과 병합되어 부산아동병원으로 개칭되었고 회복의원이 있던 부산시 서구 암남동 18번지로 이전하였다. 이곳이 바로 암남동 34번지의 송도 고려신학대학과 마주한 곳이었다. 이렇게 됨으로 아미동의 병원 건물은 국유재산관리법에 따라 부산대학병원에 양도되었다. 여기서 기독교아동 복리회의 회복의원에 대한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본래 1955년 서구 초장동에서 ‘결핵요양소’로 출발했는데, 1957년 7월에는 아미동 2가 126번지로 이전하였고, 1962년 9월에는 서구 암남동 18번지에 4천여 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1964년 2월 병원 건축을 시작하여 11월 5일 449평의 건물을 준공하고 1966년 부산아동회복의원으로 개칭했다. 아미동 부산대학병원 구내에 있던 부산아동자선병원은 바로 이 회복의원과 통합한 것이다. 1972년 5월에는 기존 회복의원 부지에 병원을 증축하여 총건평은 800평에 달했다. 이 병원은 여전히 자선병원이었고 사회복지시설에 수용된 아동들의 무료 치료하였다. 그러나 특별한 조원조달이 어려워 경영난에 직면하였고, 아동복리회의 지원 중단으로 재정난은 가중되었다. 1977년 1월에는 의료보호 2차병원으로 지정되고, 1979년 12월부터는 수련의 병원으로 지정되었으나 경영악화로 1992년 9월 30일 결국 폐쇄되고 말았다. 1980년대 이 병원에서 일했던 의사가 부평교회 박영식 장로였다. 그 동안 장기려 송윤규 김동수 박사가 이사장으로 일한 바 있다. 전란의 와중에서 육체의 아픔을 안고 고통당하던 아이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던 부산아동자선병원은 40년 간의 사역을 마감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사람도 가고 병원 건물도 사라지고 아파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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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교수의 역사탐색
    2021-02-08
  • [교회학교를살린다] “최고의 교육과정, 성경을 알자3”
    요즘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갖는 분야를 찾는다면 부동산과 주식일 것이다.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전무후무한 지각변동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생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자산 가치를 높일까 하는데 열중하다보니 단기간에 빠른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부동산과 주식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다보니 상대적으로 집값이 많이 오르지 않았거나 집이 없는 사람들을 ‘벼락거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부동산이 로또가 되어버린 현상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주식은 또 어떤가? 고등학생이 주식에 뛰어들면 주식을 뺄 때라고 하는데, 우리 집 고등학생이 주식에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공부를 하더니 대학 진학보다 주식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차라리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정작 본인은 매우 진지하다. 이처럼 부동산이나 주식이나 너도나도 광풍이다. 우리에게 경제문제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람들은 부를 쌓는데 그 어떤 때보다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진지하게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그러나 어떻게 벌까 하는 데에는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하지만 정작 왜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많지 않다. 인생은 무조건 모으는데 있지 않고 왜 모으는지에 대한 깊은 사고가 필요하다. 그것이 인생관이고, 가치관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남들이 하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기준점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혼란의 때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신앙인으로서의 기준과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생존비법이다.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의 생존비법을 담고 있는 최고의 교육과정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새롭게 다시 배워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삶과 신앙의 가치와 기준으로 우리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세상적 논리에 이리저리 흔들릴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며 가장 많이 겪는 오류는 성경 속에서 인생의 성공 비결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성경이 나의 개인적인 욕심을 합리화시켜주고 내 욕망과 이기심을 뒷받침해주는 책인 것으로 착각하고 내 입맛대로 성경을 가져다가 포장해서 왜곡하곤 한다. 때로는 정말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쓸 수 있는 본문이 아니라는 걸 한 두 번은 들어봤을 텐데도 자신에게 적용할 때는 거의 막무가내식이다. 그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사도바울의 선언은 예수를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슈퍼맨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우리가 잘 알 듯이 인간적인 성공이나 욕망성취가 아니다. 때로는 부유한 환경에서도 때로는 곤핍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고 견뎌낼 수 있고 감당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는 신앙인의 인내와 충성, 복음 전도와 형제 사랑이다. 하나님은 항상 일관되게 말씀하시는데, 인간은 자신의 편의대로 해석한다. 그래서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내 인생의 욕망을 향해서 올인 한다. 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있고, 신앙으로 양육하는 우리라면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부와 성공이라면 마른 낙엽처럼 쉽게 흔들리고 날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성경의 가치관에 붙들어 매야 한다.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이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성경의 일관된 가치와 기준을 견지하며 성경을 배울 때 우리는 인생의 목적과 방향에 맞는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신앙의 어른들이 성경을 잘 배워야 우리 다음세대들에게도 성경을 잘 가르쳐줄 수 있다. 성경은 배우고 또 배워도 배울 것이 있는 오묘한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다 배웠다 생각하지 말고 계속 배워야 한다. 계속 배우고 계속 따르고 삶으로 구현해내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다음세대들도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오늘도 기도한다. 신앙과 삶에 괴리가 없기를.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기를. 신앙이 아닌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지 않기를. 내가 말하듯이, 찬양하듯이 살아갈 수 있기를. 그것이 나의 자녀와 다음세대를 위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기독교교육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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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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