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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연구]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사람
    언젠가 유명한 모 목사님께서 당신의 텔레비전 설교 방송 시청률이 1위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약간은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주님께서 <중요한 시청률은 따로 있다. 그것은 내가 너의 삶을 보고 듣는 것, 내가 너의 기도를 듣는 것>이란 생각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우리에게 열광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신다면 그건 무의미합니다. 주님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만드는 삶의 드라마를 보고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더러운 우리 삶을 외면하시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본문은 남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39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죽음을 준비하라고 통보하셨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죽고 싶지 않은 일반적 생각 외에도, 죽을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앗수르의 왕 산헤립의 침략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심으로 모면했지만, 아직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려면 할 일이 태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기도가 열왕기하 20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열왕기하 20장 5~6절입니다.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할 때 누가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기도자를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면 뜻밖의 인물이 선택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도자가 신앙생활의 경륜이 짧은 사람, 나이가 어린 사람, 아무런 직분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가 영혼이 맑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즐겨 듣고 응답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기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대개의 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 기도를 장로님들이 맡습니다. 그 장로님의 기도를 평소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장로님이 평소에 기도하지 않고, 어쩌다가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성도들을 대표하여 기도하는 것은 비극이 될 것입니다. 기도만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설교합니다. 그런데 설교할 때마다 두렵습니다. 제가 말씀을 잘 알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의 능력을 삶에서 체험하는 사람이라면, 설교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정하신다면 의외의 인물이 선정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믿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아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않은 사람이 단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설교를 해야 하고, 청중은 그런 설교를 들어야 한다면, 교회 전체의 비극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조직과 제도에 의한 직분이 아닙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설교하고, 장로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등의 방식만으로는 바로 서기 어렵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알기에 설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듣는 기도의 사람이기에 기도해야 힘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늘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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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시사칼럼] 북한의 핵실험
    작년부터 북한의 추가 핵실험을 둘러싼 소문이 무성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위험성 이 팽배했습니다. 지난 4월 26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선포된 ‘워싱턴 선언’의 주요한 내 용 중 하나가 바로 한국과 미국의 ‘핵협의그룹(Nuclear Consultative Group)’ 결성이었고, 게다가 5월 들면서 국제보건기구가 3년 4개월 만에 코로나로 인한 비상사태를 공식적으로 해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또 다시 핵실험을 감행한다면, 지난 여섯 번의 그것과 는 성질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2022년 김정은은 ‘북한이 핵보유국이며 북한의 정체성은 핵과 함께 한다’고 선언했기에, 앞으로 있을 추가 실험은 영국 공영방송(BBC)의 표현대로 “시험이 아니라 전투 훈련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외교적 고립이나 경제 적 타격을 무릅쓰고 왜 이토록 핵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1975년 병문안을 온 김일성에게 중국의 마오쩌둥은 “석유와 원자탄이 제일 중요하다. 그 것 두 개만 있으면 어디 가도 큰소리 칠 수 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잘난 척해도 국제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했다지요?(『선을 넘어 생각한다』, 212) 1991년 사회주의 정권들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위기감을 느낀 북한은 핵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 다.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감행하면서 초래한 1차 북핵 위기와 1994년 제네 바합의, 2002년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로 말미암아 초래한 2차 북핵 위기와 6자 회담 등 거듭되는 북한의 핵 도발과 이를 무마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제재 및 협상이 있었습니다. 하 지만 결국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제1차 핵실험을 감행합니 다. 물리적으로는 소규모의 파괴력을 지녔으나, 국제사회를 강타한 충격파는 대단했습니다. 이후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제2차 핵실험을 강행합니다. 이전보다 훨씬 파괴력이 커진데다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할 수 있는 역량을 갖 추었다 하니 상당히 심각한 양상이 되었습니다.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안 1874호가 채 택되면서 시작된 각종 압박은 대화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2011년 김정일 이 사망하면서 궁지에 몰린 북한 수뇌부는 2012년 헌법 전문에 ‘핵보유’를 명기하기에 이릅 니다. 계속해서 북한이 ‘광명성 3호’ 등 위성까지 발사하며 도발하자 유엔안보리에서는 대 북제재결의 2087호를 채택했고, 이에 북한은 2013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 다. 당시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취했던 외교 정책인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는 오 히려 불장난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2016년 1월 4일 북한은 제4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가 이어지면서 북한은 같은 해 9월 제5차 핵실험을 단행하였으 며, 이듬해 1월 1일 “대륙간탄도로케트 시험 발사 준비 사업이 마감 단계”라는 선언이 나왔 습니다. 같은 해 미국을 겨냥한 ‘화성-12’호와 같은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발사가 이어지 면서 트럼프의 ‘화염과 분노’ 발언이 나왔고 북한은 즉각 9월 3일 제6차 핵실험을 감행했는 데 역사상 최대 규모일 뿐 아니라(진도 5.7) 수소탄 가능성마저 제기되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 문제를 한번쯤은 정리할 필요성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 로도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할 때 가장 심각하고 중대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바로 <핵>이 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처음 핵실험을 한 지도 어언 16년, 마지막 핵실험을 감행한 지는 6년째가 되었습니다. 2022년 9월 9일 북한은 ‘핵 포기는 절대 없으며.. 핵보유국으로 서 불가역적 지위’를 선언하고 나섰으며, 이제 ‘우리가 핵이 있으니 안보는 걱정 없고, 이제 군사를 경제로 돌려야’겠다고 공공연하게 강조한다 합니다(박한식). 이에 맞서 우리도 전술 한 바와 같이 일종의 한국형 핵공유정책을 들고 나왔습니다. 강대강의 전략도 때로 필요하 겠지만, 요한 갈퉁의 “안전으로 가는 길은 평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명언을 결코 잊지 말 아야 합니다. 세 차례에 걸친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사야를 통해 들 려주신 평화의 언약이 이 땅 가운데 파격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무리가 그들의 칼 (핵)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미사일)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 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사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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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은혜의말씀] 우리는 영가족입니다(막 3:31-35)
    하나님께서 이 땅에 친히 만드신 ‘조직’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은 가족으로 구성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족만큼 신비로운 관계가 있을까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나, 동생,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떨어져 있으면 그립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상처로 얼룩지고, 보기도 싫은 웬수?가 되지만, 여전히 가족이란 이름은 사랑과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전갈은 받은 예수님이 둘러 앉아있는 자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혈육의 가족을 무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족관계 그 이상의 새로운 가족, 바로 ‘영가족’ 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꿈꾸셨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그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순간, 우리는 새로운 가족, 영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영가족이란 영적인 가족이요, 영원한 가족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영가족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35절) 영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구성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 바로 우리들입니다. 자 그렇다면, 영가족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35절) 첫째, 영가족은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열두 제자만 해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성격도 다르고 출신도 달랐습니다. 우리도 다른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로 귀결되어야 합니다.(고전 1:10)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둘째, 영가족은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22:37-40) 가족만큼 친밀한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족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사랑도 하지만, 상처도 주고받습니다. 육신적 가족으로만 버텨내기 어려운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럴 때 우리 영가족은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짐을 함께 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영가족은 서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그곳에서 천국을 경험합니다. 서로라는 단어는 절대로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가족은 서로를 위해, 서로 속에서 사는 것이 필수입니다. 영가족은 다 우리입니다. 왜요? 우리가 서로 지체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2:18-26) 영가족은 다른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내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머니 품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교제 속에서 평생을 함께 사는 사람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이 그런 복된 영적인 가족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사명을 위해 함께 나아갑시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함께 동역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럽디다. 좋은 교회는 추억이 많은 교회라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눈물도 흘리고, 함께 웃고 떠들고 추억이 많아야 합니다. 영원까지 이어지는 추억이 많아야 합니다. 우리 모든 영가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으로,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쌓아, 하늘나라 영원까지 이어지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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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목회자칼럼] 그도 예수의 제자라
    살다보면 기대했던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한다. 반면에 기대 밖의 고마운 사람, 기대 이상으로 멋진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병든 자식이 효도하고, 굽은 가지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좋고 친구가 많고 추억이 많고, 인간관계가 원만한 사람이 행복하다. 반면에 인간이 싫고 세상이 싫어서 왕따요 외톨이인 사람이 소외감을 느낀다.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지만, 세상에 끔찍한 것이 인간이다. 기적 중의 기적은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날 때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이다. 괴팍한 성격과 인색한 마음, 거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고 나면 사람이 변화된다.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 사람인지를 깨닫고 나면 까칠한 사람이 순해진다. 성령의 감동을 받고나면 격한 감정선에서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사람이 순한 양처럼 변해진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는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인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인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사람인가?를 보아야 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다. 만남의 축복이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인복이 많다. 은혜 입은 사람은 사방에서 돕는 자들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던 사람이 있다. 어떤 인간은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할 악연도 있다.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인 마27~28장에는 예수님의 부활 후에 여러 사람이 등장한다. 군중과 무리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스치고 지나가는 피상적인 만남으로 여겼기 때문에 호산나라고 찬송하던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가 되고 말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복음을 듣고도, 소귀에 경 읽기 하듯이,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하는 사람은 멸망당한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 예수님을 지키던 이방인 백부장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놀라운 고백을 한다. 구약시대에 믿음 좋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타락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피가 더러운, 모압 여인 룻과, 여리고의 기생 라합 같은 신앙세계와 전혀 관계없는 이방 여인들을 들어서 다윗의 왕통을 열고 메시야의 족보를 만드셨다. 크리스천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때에 어떤 경우에는 이방인들이 진리를 외친다. 그야말로 돌들이 소리 지르는 것이다. 또한 갈릴리에서부터 골고다까지 따라온 많은 여자들이 나온다. 믿었던 남자 제자들은 의리도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연약한 여인들은 십자가를 끝까지 따라붙었다. 그 중에서도 귀신같이 살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난 후 낙차 큰 변화구처럼! 최악에서 최상으로 변화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도하는 특권을 누리고, 이 복된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가졌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력서가 필요 없다. 오늘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이다. 가장 특별한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인데, 그를 소개하는 말이 "그도 예수의 제자라"는 표현이다. 요19:38을 보면 아리마대사람 요셉은 숨겨진 제자였다. 그는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남에게 알리지 말라”는 소위, 이순신 신앙이다. 소심하고 겁쟁이였지만, 그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시1편에 복있는 사람은 판단력과 위치선정이 남다르듯이 눅23:50~51을 보면 아리마대사람 요셉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결의하거나 동참하지 않았다. 사람 죽이고 악한 일에, 나서지도 말고, 동참하지도 말고, 함께 하지도 마라. 그는 참된 소망인, 하나님나라,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겁쟁이요 소심한 사람이었던 그가 여기에서는 당돌히 빌라도에게 나아갔다(막15:43). 소심한 사람이 복음을 접하면 담대해진다.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으로 정치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자기에게 큰 피해가 올지라도 담대히 나섰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27:57) 예수님은 운명하시고 날은 저물었으니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은 그 결정적인 시간에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이 등장한다. 그는 보아스처럼 유력한 부자였기에 세마포 흰옷과 새 무덤을 가지고 예수님의 장례식을 잘 모실 수 있었다. 사사시대에, 소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사람 육백 명을 죽인 사사 삼갈을,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삿3:31).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물맷돌, 기드온의 보리, 엘리야의 손 만한 구름, 라합의 붉은 천 조각처럼 주께서는 작은 것을 가지고 위대한 구원역사를 이루셨다. 그도 우리의 구원자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교회에 보내놓고 정중하게 부탁하였다. 디모데는 누구보다도 병약하고 심약하고 허약해서 비실거렸기 때문에 그가 두려움 없이 사역하도록 배려하였다.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다. 그도 사역자다. 그도 일꾼이다(고전16:10). 눅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께서 세리장 삭개오 집에 들어가시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렸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도 우리 가족이다. 그도 한 식구다. 사람을 속단하지 마라. 사람을 무시하지 마라. 그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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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이상규 교수의 역사탐색] 만주의 사도바울 한경희 목사의 순교
    공산주의자에 의해 만주에서 죽임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장로교의 한경희 목사였다. 한경희(韓敬禧, 1881-1935) 목사가 북만주의 호림현에서 순행 전도하던 중 오소리강에서 공산 공비 40여명을 만나 목사임이 드러나자 총에 맞아 죽었고 얼어붙은 강에 던져졌다. 1935년 1월 4일이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 말살을 의도했다고 하지만 같은 민족의 공산당이 더 악독했다. 이 참화를 듣고 총회 전도국은 송창근 박사를 보내 북만교회를 시찰했는데 그 보고를 받은 김인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북만주교회는 순교의 피로 쌓은 교회다. 우리는 북만의 순교자라면 한경희 목사만을 알되, 한 목사 이외에도 순교한 신자의 이름은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잔악을 극(極)한 공산당에게 몽치에 맞아 죽은 순교자, 정수리에 못 박혀 죽은 순교자, 머리 가죽이 벗겨 죽은 순교자, 말 못할 학살을 당한 여 순교자, 기십 기백에 달하였다 한다. ...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여서도 김현점(金炫漸) 목사와 같이 공산당에게 살을 찢어내는 핍박을 당하는 등 여러번 사경에 출입하는 이가 많다. ... 만주에는 교회가50여 처, 교인이 3천여 인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7목사, 20여 장로의 아름다운 노회를 이루어 전진도상에 있다하니 이는 눈물로 땀으로 땀으로 터 밖은 교회요, 피로, 순교의 피로 세우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성신이 사도 대와 같이 역사하는 교회이다. 만주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자, 만주교회를 위하여 연보하자. 만주에 전도하자.” 한경희 목사는 1881년 음력 11월 5일 (양력은 12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 외상면 남시리(구 의주군 양광면 송정리)에서 아버지 한승주(韓承周)와 달성(達成) 서(徐)씨 어머니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탐관오리들에 의해 수탈을 당하자 가세가 기울어 져 4세가 되던 1885년 가족들은 양서면(楊西面)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수재(水災)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평안도 북부지방을 전전하며 지내 던 중 한경희는 19세가 되던 1900년 신효정(申孝正)의 장녀 경원(敬元)과 혼인했다. 그러던 중 1903년 동문외교회(東門外敎會) 전도인 송문정(宋文正)이 전해 준 『구세론(救世論)』을 읽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그해 10월 첫 주일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신앙생활을 하게 되자 가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인내하였고, 후에는 자신을 핍박하던 맏형 한찬희(韓燦禧)도 회심하였고 후에는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한경희는 23세가 되던 1904년 6월 22일 동문외교회에서 학습을 받았고, 그 해 11월에는 서리집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16일에는 이 교회에서 선교사 계인수(Carl E. Kearns, 桂仁秀) 목사로부터 부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동시에 집사로 피택 되었다. 이후 그와 함께 전도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7월에는 동문외교회의 영수로 선출되었다. 영수가 된 그는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고 창신학교(昌新學校) 속성반에 입학하여 6개월 후에 졸업했다. 이듬해인 1908년에는 이 학교 교장이 되었다고 한다. 인근 주민과 학교 직원들ㅢ 신뢰를 받고 교장으로 추대된 것이다. 한경희는 1909년부터는 고난 속에 살아가던 만주로 눈을 돌려 훌루투(葫蘆套)와 자피구(夾彼溝)에서 전도하여 두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1910년에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14년 5월 15일 동료 17명과 함께 제7회로 졸업했다. 33세 때였다. 그해 8월 7일에는 양전백(梁甸伯, 1869-1933) 목사에 의해 중국 길림성(吉林省) 중동선(中東線) 지역 전도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그는 만주 지방 전도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쿡(Welling T. Cook, 鞠裕致, 1878-1952)의 기록에 의하면 1920년 당시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50만 명에 달했다. 한경희 목사는 마적(馬賊)의 출몰하고 일제의 위협과 수탈,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는 마주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전도자로 활동하게 되는데, 영안현(寧安縣) 신안촌(新安村), 석두하자(石頭河子), 위하현(葦河縣) 일면파(一面派), 목릉현(穆稜縣) 목릉(穆稜), 팔면통(八面通), 그리고 밀산현(密山縣) 백포자(白泡子), 십리와(十里窪) 등 일곱 곳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5년 후반 한경희 목사는 서간도(西間島)의 전도목사로 임명되어 온가족이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로 이사하여 삼원포, 해룡(海龍), 동풍(東豊), 서풍(西豊), 휘남현(輝南縣)의 5개현을 담당하였다. 개척 전도자 한경희 목사는 고결한 인품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고, 나중에는 방기전(方基典, 1861-1920)이 1912년 10월 설립한 은양학교(恩養學校)의 2대 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는 교회 개척과 전도 외에도 교육사업에 관여하였고,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3월에는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3년 2월 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이때 ‘아리랑’이란 소설로 유명한 김산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1월 29일 출옥한 이후 창성읍(昌城邑) 교회와 평로동(坪路洞) 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하였다. 한경희 목사는 길림성 동북쪽에 위치한 호림(虎林), 요하(饒河), 수원현(綏遠縣) 등에서 사역자를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곳으로 자원하여 갔다. 친구들은 그곳은 공산당과 비적들이 많아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나라를 잃고 해외에 망명하여 슬퍼하는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여 새 생명을 주고 위로하며 독립정신을 키워주는 만주선교가 나의 사명이다”라고 여기고 1933년 북만주로 파견되었다.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그는 1935년 1월 1일, 교인 4명과 함께 북만주 호림현 지방교회 순방길을 떠났는데, 1월 4일 오소리강(烏蘇里江) 소목하(小木河) 지점에서 40여 명의 공산당원들에게 잡혔다. 그들은 한경희 목사에게 일본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2시간 동안 구타하고 그와 4명의 교인을 총살하고 시체를 얼어붙은 강 속에 던졌다. 한경희 목사의 순교는 조선 전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후에 손양원 목사는 설교하면서 한경희 목사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그가 신사참배 거부로 1941년 11월 4일 피체되어 광주 지방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략) 참 신앙은 고난이라 시련을 겪은 다음에 비로소 얻는 것인 고로 우리들은 이 고난을 이기고 신앙을 점점 공고히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런 때를 당하여 현하(現下) 교회는 사랑과 지혜와 용맹을 가지고 일하는 교역자를 요구한다. 우리 조선 기독교 교역자는 모두들 순교자 한경희 목사와 같이 순교 정신으로 선교에 종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한경희 목사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만주의 사도바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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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소강석칼럼] 새순이 나르샤
    “새에덴의 꽃, 생명 / 순장들이 모인 은혜 넘치는 / 이 좋은 시간과 공간에 / 나를 택하여 주사 더 큰 사명으로 날아오 / 르게 하시니 더욱 주님 높이 섬기며 / 샤론의 꽃을 피우겠습니다.” 이건 지난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있었던 ‘새순이 나르샤’ 시간에 어느 순장이 저에게 보낸 ‘새순이 나르샤’로 지은 6행시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순장은 ‘맨발의 소명자’로 6행시를 썼습니다. “맨 처음 교회를 간 건 그저 예쁜 여학생 때문이었습니다. / 발치에 앉아 멀리 떨어져서 들은 제자 베드로의 배신 이야기에 / 의로운 분노가 타올랐습니다. ‘나라면 그렇게 배신 안 한다. 사내 대장부가 3년이나 따라 다녔으면서 배신을 하냐?’ / 소리치듯 내뱉은 마음의 소리에 / 명령이 내려오듯 제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 자녀로 삼아주시고 주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순이 나르샤’라는 프로그램은 코로나 이후 소그룹과 생명순(구역)을 살리기 위한 중간 그룹의 모임이었습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00명에서 150명 단위로 교회 카페에서 교회 오빠인 담임목사와 교회 언니인 순장들과의 영적인 따뜻한 대화와 소통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코로나 상황에서는 겨우 교회를 유지하고 회복을 하였지만, 이제 코로나의 검은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새로운 부흥과 성장을 이루어야 할 시기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순(구역)이 살아야 되고 생명순이 살기 위해서는 생명순장(구역장)들과의 긴밀한 소통과 관계성이 필요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제가 먼저 격려의 메시지를 하고 성도들이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을 엽서에 적어서 주면 그걸 일일이 다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어느 한 장도 가볍게 취급하지 않고 진솔하고 성심성의껏 일일이 다 대답을 해주니까, 그곳에 모인 성도들이 감동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후문에 의하면 가까이에서 단둘이 이야기하듯 그런 분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교구마다 직접 만든 선물을 저에게 전달을 하였습니다. 어떤 교구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케이크, 김밥, 저의 캐리커쳐와 제 시를 캘리그라피로 쓴 액자 등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어떤 교구에서는 저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고 메달을 만들어서 목에 걸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구에서는 콩나물 꽃다발을 가지고 왔습니다. 새순이 콩나물처럼 막 자라라고 말입니다. 그런 후에 순장들과 함께 가수 이선희의 ‘그중에 그대를 만나’를 개사해서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 그렇게 대단한 기대까지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 그대 하나 떠나간 우리 교회 이제 그대 아님 채울 수 없소 /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성도로 만나 / 꿈을 꾸듯 새에덴을 이루고 / 주님의 은혜로 벅찼던 우리가 예배로 만나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 모든 건 은혜이었음을….” 그리고 제가 마무리 축복기도를 하고 일일이 한 분 한 분 다 악수를 하였습니다. 천 명이 넘는 순장들이 한꺼번에 모이면 그냥 하나의 집회로 끝났을텐데, 교회 카페에서 100명, 150명 단위로 모이니까 느낌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역시 작은 공간이 주는 분위기의 효과가 크다는 것을 다시 느꼈습니다. 서로 작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악수를 하며 아이컨택을 하니까 정말 가까이에서 단둘이 데이트(?)한 것 같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겠죠. 이러기를 어떤 날은 하루에 몇 번씩 하니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끝나고 잠시 누우면 진짜 순장들이 새순이 되어 날아오르는 환상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정말 콩나물 꽃다발처럼 생명순들이 쑥쑥 자라 오르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변함없이 교회 오빠인 담임목사를 응원하고 추앙하고 지지해준 교회 언니인 순장들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교회는 ‘새순이 나르샤’할 뿐만 아니라 ‘생명이 나르샤’하고 ‘부흥이 나르샤’하게 될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에 새로운 부흥의 역사를 쓰고 불멸의 성장 신화를 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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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성서연구] 순리를 따라서
    시편 19편은 다윗의 시로서 몇 단락으로 나눠집니다. 1~6절은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7~11절은 여호와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언뜻 이 두 단락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두 단락을 연결하는 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순리>입니다. 1~6절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서 주시는 삶의 순리>입니다. 1절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은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2절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합니다. 어제는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은 내일로 이어집니다. 어젯밤은 오늘 밤으로, 오늘 밤은 내일 밤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날들이 흐르면서 세월이 갑니다. 3절의 말씀처럼 거기엔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 4절의 말씀처럼 듣는 귀가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이 전해 주는 소리가 온 땅에 통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자연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자연을 통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양을 몰고 들판을 누볐습니다.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그가 본 하늘과 땅, 낮과 밤, 자연은 다윗의 귀를 열어 주었고, 거기서 하나님의 소리 없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자연에서 키워야 합니다. 요즘처럼 방에서만 크는 아이들은 심각한 인격적 결함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방 밖의 자연을 경험하도록 돕는 게 중요합니다. 7~11절은 <여호와의 율법이 가르치는 인생의 순리>를 보여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을 증거, 교훈, 계명, 도, 법 등 다양하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며,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진실하여 다 의롭다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가 꿀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이것을 통해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연과 율법을 통하여 인생의 순리를 가르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이 그 순리를 따라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선 자연이 가르치는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봄날이 오면 파종합니다. 여름날에는 가꿉니다. 그리고 가을날에 추수합니다. 이게 날은 날에게, 밤은 밤에게 전한 진리를 터득한 삶의 순리를 따르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을에 파종하거나, 봄에 거두려 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욕망을 따라 무리수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순리를 따라 평온한 삶을 삽니다. 또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이 가르치는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자연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죄인을 구원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영생의 복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어떤 평안과 행복과 기쁨과 형통이 주어지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자연의 순리를 무시하고, 말씀의 가르침을 거역합니다. 그게 허물이요, 죄입니다. 다윗은 12~13절에서 그러한 허물과 죄에 빠지지 않길 기도합니다. <12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우리도 순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봄에 파종하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이 순리이듯이, 인생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나이에 따라 올바르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리를 따르는 삶은 마치 물처럼 흐르는 삶입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우리도 자연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욕망은 순리를 거스르게 하고, 하나님의 원리에 도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도는 삶을 관조하듯 삽니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거기 참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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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시사칼럼] 지구의 날
    지난 4월 22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일이기도 했던 이 날은 오십 세 번째 맞이하는 <지구의 날>이었습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전국 소등 행사’였습니다. “저녁 8시부터 불을 끄고 지구를 밝혀주세요”라는 문구로 환경부가 주관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알지도 못한 채 관심 있는 소수들만 조촐하게 치렀습니다. 하기야 역사상 명멸했던 수많은 운동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기는 권리 즉 인종, 계층, 재산에 관계없이 일정 연령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보통선거권 역시 초창기에는 극소수 사람들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실망하는 대신, 이제 몇 걸음 못 왔다가 아니라 벌써 이만큼 걸어왔다 생각하고 힘을 내야 할 일입니다. <지구의 날>을 알게 되었다면, 이번 기회에 환경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환경’이라는 개념조차 희박했던 1962년,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이라는 여성이 인류 역사를 바꾸는 책을 한권 출간했는데 그게 바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었습니다. 삼백 페이지 분량이지만 묵직한 무게감을 자랑하는 이 책에 한 번 도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당시 신제품으로 개발되면서 각종 병충해를 제거하고 농사나 위생에 혁혁한 성과를 자랑하던 디디티(DDT) 같은 제품의 위험성을 고발한 작품입니다. 이 책이 발표되고 난 지 10년 만에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유엔 주관 인류환경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20년 뒤 브라질의 리우에서 국제연합환경개발회의가 열렸고, 이후 각종 환경 관련 회의와 선언과 기구와 단체들이 발족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학술지는 조금 부담스럽다면, 고전으로 평가받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은행나무, 2011)을 추천합니다.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는 김한민 씨가 쓴『아무튼, 비건』(위고, 2018),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시공사, 2008)을 추천해 드립니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 다들 정신없는 틈을 타서, 일찍이 유래가 없을 만큼 엄청난 분량의 일회용 쓰레기가 배출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인류 전체에 큰 부담으로 다가오리라고 봅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심해 바닥에서 탐사단의 시야에 처음으로 들어온 물체가 플라스틱 쓰레기였다는 기사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다면 『플라스틱 바다』(미지북스, 2019)를 소개해 드립니다. 어떤 책을 보시던, 신선한 충격을 받으실 테고 환경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지시리라 확신합니다. 이제는 환경에 대한 관심과 독서와 진지한 토론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실천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기는 합니다. 어제 했던 <전국 소등 행사>도 그런 흐름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별 것 아닌 듯 보여도 개인적인 작은 실천 하나 하나가 모여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항상 거론되는 이야기지만 많은 음료를 소비하는 추세에 맞추어 실제로 개인용 물병이나 음료용기를 모두 다 들고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플라스틱 방앗간>이나 <제로웨이스트카페> 같은 환경지향성 가게나 기업들을 돌아보는 일도 의미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인용 혹은 단체로 세상을 향해 작지만 큰 목소리를 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결국 기업이나 정부를 움직이는 힘은 환경 여론이기 때문입니다. 내년 이맘때면 잊지 말고 10분간 불끄기에 동참해 봅시다. 물통을 들고 다니는 환경 운동가가 되어 봅시다. 그리스도인은 더 그래야 합니다. 왜일까요? 최근 요하임 라트카우(Joachim Radkau)가 『생태의 시대』(열린책들, 2022)라는 환경역사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그는 환경운동의 역사가 일천하다고 보았습니다. 아닙니다. 일찍부터 환경을 소중하게 여기고 인간은 물론 동식물까지 배려하는 책이 존재했습니다. 성경입니다(출 22:30, 23:5, 19; 레 22:27, 28, 신 22:6 등). 하기야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인데 어련하겠습니까? 예수께서도 하늘의 새와 땅의 풀과 양과 소까지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마 6:26-30; 12:11; 눅 13:15). 신약성경에는 더 분명한 환경 보호 선언들이 존재합니다(롬 8:21-22; 엡 1:23; 골 1:20 등). 리용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엡 1:10)을 근거로 <총괄갱신(Recapitulation)>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개발과 이윤을 이유로 환경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만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피조 세계를 존중하고 아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중대한 책무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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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은혜의 말씀] 생명을 구하는 것(막 3:1-6)
    오늘 본문을 보면, 생명을 살리려고 하시는 우리 주님과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안식일날 회당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 주시하고는 고발할 조건을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완악함을 다 아시면서도,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고는 “네 손을 내밀어라” 하시면서, 그의 손을 고쳐주십니다.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죽일까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하나 살자고 이웃을 죽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시고 노하셨다고 합니다. '완악하다'란 단어의 뜻은 ‘자기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기만의 생각으로 굳어진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경건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런, 이런 계명들을 지켰다고 하면서” 자기 행위와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깔보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열심을 다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살기가 등등합니까? 복음이 없고, 율법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적으로 몰아 죽이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자기 혼자 의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형제의 잘못을 보거든 정죄하기보다 먼저 우십시오. 새벽에 그 영혼 생각하면서, 눈물을 쏟으십시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죄인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그래서 교회가 죄인의 무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살려내는 클리닉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시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모의할 것을 아시면서도, 불쌍한 한 영혼을 위해, 한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옳은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말할 수 없이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심정과 자비를 가지고 손 마른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님처럼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 포도주를 담았다면, 우리의 생활양식, 우리의 의식구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가?’ 여기서부터 우리의 복음적 삶의 모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입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복과 치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이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교회는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을 통해 세상을 구하고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죽이는 일을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살리는 일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이는 것이 아니라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일을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사랑으로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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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교회음악칼럼] 찬송(예배)하며 사는 사람들 4
    오래전 미국에서 한 집사님께서 노래를 잘해보고자 레슨을 청하여서 가르친 적이 있다. 한두 번 정도 한 것 같은데 뭔가 표정이 이상하다. 이유인즉 레슨 두 번을 받았으니 자신이 기대한 놀라운 변화를 있어야 했는데 그것이 충족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성악이라는 예술에 대한 무지로 인한 해프닝이기는 했으나 나로서는 씁쓸했던 기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빠른 것을 좋아한다. 나 역시 처음 미국 갔을 때를 생각하면 그들의 여유로움이 무척 답답하고 견디기 힘들었다. 신앙생활 속에서도 급한 마음으로 인한 우리의 부족을 종종 보게 된다. 삶을 통하여 인내함으로 받은 주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였어도 늘 조급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재밌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서양에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다. 어린 시절이긴 하겠으나 이것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번쯤 상상을 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정말이라면 소원을 이루는데 참으로 좋은 도구들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서양 것 보다 우리 것이 사용하기에 훨씬 좋은 것 같다. 요술램프는 몇 가지 과정을 거치지만 도깨비 방망이는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소원이 이뤄지니 말이다. 한국 사람들의 심리가 그대로 반영된 이야기다. 혹 우리가 신앙(기도)생활을 하면서 자주 겪는 일은 아닐까? 빠른 응답이 없을 때의 실망감이나 상실감으로 고민가운데 헤맬 때가 있었던 거 같다. 절박하였는데 무심하심에 분노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요술램프의 지니나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시다. 당연히 우리의 명령(기도)에 즉각 반응하시는 종은 더더욱 아니시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착각을 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다. 부활절이 지났다. 착각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묵상해 보자. 오래 참음과 기다림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주님을 다시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공로 없이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또 생각하기를 싫어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쉽지 않다면 생각하는 연습을 해서라도 날마다 생각하는, 기억하는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작금의 시대를 돌아보라. 말도 안 되게 간악한 무리들이 세상을 현옥하며 어지럽히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때에 진실한 믿음의 강력한 부활의 예배(찬양)는 우리 자신을 날마다 돌아보며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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