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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자칼럼] 작년 그리고 올해
    송구영신, 어제의 마지막과 오늘의 시작, 12월 31일 밤12시와 1월 1일 새벽0시는 무엇이 다를까? 12월 31일에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움직이지는 않지만, 1월 1일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저 멀리 있는 동해나, 저 높은 곳의 산을 오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는 똑같은 해인데 과연 무엇이 다르기에 사람들의 반응도 다른 것일까? 해의 무게가 늘어난 것도 아니고, 둥근 원이 더 커진 것도 아니며 하물며 해의 주변에 새로운 물체가 생겨 변화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른 것은 바로 12월 31일과 1월 1일, 단지 시간 차이이고, 이 하루의 시간 차이가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가져다 준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든 알지 못하든 의미를 추구하며,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이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1월 첫 주, 내 삶의 변화를 이끄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첫째, 의미가 무엇인가? 의미는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생각의 결과이고 철학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도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고생이 기쁨으로, 고난이 견딜 수 있는 훈련의 과정으로 변한다.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의미가 없으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내가 없어지며 모든 에너지를 자녀에게 쏟아 부어야 하는 고난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의미가 부여되면 어떠한가? 나에게 허락된 최고의 선물, 기쁨이 바로 자녀이고, 삶의 이유가 자녀 양육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을 더 확장시켜 오늘 내 삶의 행복과 기쁨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으니 하루가 왔다고 해서 그냥 저냥 하루를 보내면 의미있는 삶을 살아내기 힘들다. 어제 죽은 누군가에게 오늘은 꼭 살고 싶은 하루였을 것이니, 이 하루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에 따라 행복과 기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둘째, 의미는 누가 만드는가? 내 삶의 의미는 당연히 나 자신이 만든다. 내가 겪은 일이 어떤 이유 때문에 왔으며, 이 일로 인해 내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정확히 알기란 힘들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땅에서 태어나 나 중심으로 살다보면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지 않는 함정이 숨어 있다. 사실, 인생의 주인공은 나고, 내 의지와 힘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나를 만드신 분, 내 삶을 이끄는 분의 도움이 없이는 삶을 지속할 수가 없다. 겉으로 봐서는 내 삶의 의미를 내가 만드는 것 같지만, 결국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지속시키는 것은 내가 아닌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란 말이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삶이 주어진 것은 창조주에 의한 섭리이고 뜻이자 의미로운 사건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목회가 만만치 않아 삶에 의미를 갖기 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이 많았다. 행복, 감사, 기쁨은 나와 먼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성경 속에서 인생의 답을 찾았다. “나는 여수룬, 행복자입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가 인생의 종점인지 알기에 오늘도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의미가 무엇이고, 누가 의미를 만드는 것인지 알았다면, 마지막으로 의미있는 일이 무엇일까? 바로 살리는 일이다. 오래 전에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드라마의 명대사 중 하나는 김사부가 후배 의사에게 “의사는 돈, 명예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라고 말한 장면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육을 치료하는 의사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영혼을 치료하는 목회자들,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성도는 개인의 삶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며, 사회를 살리는 사람들이다. 작년과 다른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여러분들은 이제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갈 것인가? 나는 올해도 작은 촛불처럼 나를 태워 청소년을 살리고, 청년을 살리고, 장년들을 살리려고 기도하고 있다. 비록 이 일이 쉽지 않지만, 의미있는 일이고 가치있는 일이기에 다시 힘차게 한 걸음 내딛는다. 여러분도 다시 한 번 의미를 생각해보자. 2022년, 함께 사람을 살리고, 성령으로 교회를 살리는 이 일에 새 의미를 만들어보자. 그래서 2022년 12월 31일에는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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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기독교아동복리회2
    CCF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6.25전쟁기 보다 구체화된다. 전쟁기 고아들이 급증하자 구호는 절실해 졌고 CCF는 이런 현실에 부응하게 된다. 당시에는 전쟁고아들도 있었지만 버려지는 아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런 참혹한 상황을 알게 된 밀즈 목사는 CCF 클라크총재로부터 일단 5천명d에 대한 재정 지원을 약속 받았고, 이 약속을 가지고 1950년 9월 한국으로 왔고, 9. 28 서을 수복 때 서울에 입성한 최초의 민간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51년 4월 부산에서 CCF한국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위원은 아펜젤러(H. P. Appenzeller), 휘치(George A. Fitch), 레인(Harold Lane), 아담스(Edward Adams),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목사, 그리고 오긍선, 이용설 박사였다. 위원장은 사우어(史越, Charles A. Sauer, 1891-1972) 목사였다. 1921년 미국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한 그는 영변, 공주 등지에서 일했고 1941년 3월 강제로 한국을 떠났으나 1949년 재내한 하여 교회 복구사업에 헌신했는데, 그의 아들 로버트 사우어(史路德, Robert G. Sauer, 1925-?) 또한 한국 선교사로 일했다. 초대 지부장은 알렌 시틀러(Arlene Sitler), 실행 총무는 노진박(盧鎭璞)) 이었다. 첫 사무실은 호주장로교 선교사이자 CCF한국위원회 위원인 레인의 동구 좌천동의 사택이었는데(1951. 4- 1953. 3), 후에는 동구 초량동 프랑스영사관이 있던 건너편 건물이었다(1953.3-1954.5). 서울 수복 후에는 사무실이 서울 정동 구세군 본영으로 이전하였다. CCF 한국위원회는 아동보호시설의 CCF 지원 대상 기관 가입업무를 시작하였고, 부산의 아동보호시설인 새들원, 박애원, 영아보호시설인 애린원, 순천의 인애원, 대구의 대구육아원 등을 CCF후원시설로 받아 들였고 이런 후원 시설은 점차 확대되었다. 부산의 새들원은 안음전 여사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CCF의 특별한 지원을 받았다. 이 무렵 부산에는 순교한 목사들의 유족과 그 자녀들을 돕기 위한 미실회((美實會)가 설립되었는데, 부녀자 복지사업의 효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미실회는 부산 범천동 가야산 아래 미실회 건물이 있었고, 순교자 유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미실회 설립과 운영 또한 CCF의 지원을 받았다. 1953년에는 김응상 나판수 은영기 한정교 홍성유 원장 등 당시 37개 CCF가입시설 원장들을 CCF한국지부와 업무협의를 위한 의도로 기독교아동복리회 한국연합회를 구성하였다. 이런 가운데 피 지원 기관이 확대되어 1955년에는 74개 시설로 증가되었고, 지원받는 아동수는 9,078명에 이르렀다. 1958년에는 77개 시설, 10,696명이 수혜 대상자였다. 그런데 CCF의 지원시설의 확대, 사무실의 서울 이전 등과 더불어 아동복지 전문학자인 헨리 티즌(Henry Tieszen)의 내한을 계기로 보다 조직화되고 체계화 되었다. 아동들의 생계를 위한 시혜에 머물지 않고 보다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를 시행하게 되었다. 헨리 티즌은 메노나이트계 인물로서 아동학 관련 전문 학자였고 후일에는 연세대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CCF의 부산에서의 할동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부산 동래 새들원을 특별히 지원했는데, 동래에 토지 10,400평 건물 515.228평 그리고 대청동의 토지 152평, 건물 258.97평을 증여했다. 또 송도의 맹인아동들을 위한 시설인 라이트하우스에 토지 736평, 건물 251.79을 증여했다. 특히 CCF는 부산 송도에 아동병원을 건립했다. CCF는 처음에는 보호받지 못하는 아동들의 의식주 문제 해결을 시급한 과제로 여겼으나 아동들의 의료 문제 해결 또한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그래서 1955년 1우얼 부산 서구 초장동 3-43번지에 부산보건원(Pusan Health Home)을 설립하여 아동의 입원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설이 부족하여 1957년 7월에는 서구 아미동 2의 126번지의 건물을 매입하고 보건원을 이전하였으나 시설 부족 현상을 해결하지 못해 다시 서구 암남동 18번지의 대지 약4천 평을 매입하여 1964년 2월 병원 신축을 시작하였고 그해 11월3일 총건평 449평의 현대식건물을 완성했다. 75명의 아동이 입원하여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이었다. 이것이 부산아동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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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서임중칼럼] 임마누엘의 은총
    인류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인류 구원에 크게 기여한 위대한 인물 가운데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우리는 잊지 못한다. 지금은 프랑스 영토지만 1875년 당시 독일의 영토이던 ‘알사스’ 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그는 태어났다. 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고, 장성하여 스트라스부르대학에 입학, 신학과 철학, 음악을 공부하였는데, 24살 때 철학 박사가 되어 스트라스부르대학 신학부의 교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파리의 유명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인 샤를 비도르에게서 연주를 배워 성 빌헬름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로도 활동했다. 신학자, 철학가, 음악가로 이름을 날린 그였지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했다. 천재이자 목사의 아들인 그는 부유한 나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안락하고 윤택한 생활을 하였지만 생각하는 것은 달랐다. 온갖 물질적 혜택을 누리며 살았지만 이런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생각으로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결국 성경속의 부자와 나사로 같은 부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를 힘들게 했다. 종내 그는 고난 받는 작은 자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기에 이르고 30세에 의과대학에 들어가 8년 동안 의학을 공부를 한다. 부와 명예,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을 다 뿌리치고 그는 간호사가 된 아내와 함께 마침내 아프리카로 들어갔다. 부유한 자가 빈한한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는 부유한 자였으나 빈곤한 자들을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었다. 후에 세계 평화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리며 노벨 평화상이 내려졌다. 한 해의 마지막 캘린더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빨간색으로 표시된 25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구주께서 세상에 오신 날이다. 천사들은 노래하기를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 노래를 곰곰이 묵상해 보면 참으로 ‘아픔’이 담긴 노래다. ‘아픔’이란 예수님이 하늘 영광을 포기하고 더럽고 추하고 죄 많은 세상에 오시되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며, 하나님께도 아픈 날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결국 십자가 참혹한 죽임을 당하게 하셔야 했기에 큰 고통을 안고 세상에 보내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 바로 그 날이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쁜 날인 성탄일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임마누엘의 은총’이다.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성부 하나님께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位格과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하는 용어다.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עמ)’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מנו)’, ‘하나님(God)’이라는 뜻의 ‘엘(אל)’이 결합된 형태로서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즉 하나님께서 높고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몸소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것이 임마누엘이다. 이사야 9:6절에는 임마누엘의 다른 이름들의 기록이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는 기록이다. 여기 기묘자는 ‘아름다운 분(Wonderful)’, 모사는 ‘상담하시는 분(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으신 분(The Mighty God)’이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은 ‘평강을 주도하시는 왕(The Prince of Peace)’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이름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Messiah)’, 인자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 예수(Jesus)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을 기르고 먹이는 자, 양을 위하여 죽는 자(Good shepherd)’이다. 이 모든 이름의 뜻과 능력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임마누엘’의 은총이 된 그 날이 12월 25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함께 하시는 은총은 어떻게 누리는가? 그것은 나와 함께 하시고자 오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요1:12). 영접하게 되면 삶의 가치관의 변화가 있다(빌3:5~9, 롬14:7~8). 거기에는 일치와 화합이 있다(행2:42~47).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며 찬양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과 인간의 높은 담을 헐어버리고 인간과 인간의 불신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것, 곧 일치와 화합의 은총이다. 신분과 세력, 학력과 성격적인 특성을 뛰어넘은 일치가 실현된 것,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은총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합뿐만 아니라 인간과 물질과의 조화가 이루어졌으며, 인간과 하나님과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것은 이로부터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물질과의 조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실현하기 어려운 재산의 공유라는 것이다. 즉 가난한 자를 위하여 나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하는 아름다운 역사의 시작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화합이라는 것은 이로써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실천되었으며 미움도 갈등도 다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복음의 역사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입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오늘의 삶의 현장이 교회다. 곧 일치와 화합을 통한 천국을 경험하는 삶의 장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소란하다. 대선을 앞둔 여의도 정계는 날마다 분쟁이다. covid 19는 우리 사회를 카오스 상황으로 만들어 놓았다. 경제 현장도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통해 이 모든 상황을 일치와 화합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교회다. 그런데 교회들마저도 많은 것이 소란스러운 것을 본다.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 들썩거리기에 그렇다. ‘임마누엘의 은총이 있는 곳’은 일치와 화합과 조화가 있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은총이 없는 곳’은 분쟁과 분열이 있다. 2021년의 성탄절을 맞으면서 온 누리에 임마누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충심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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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성서연구]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살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의 현몽으로 요셉은 마리아와 예수님을 모시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후 헤롯이 죽었고, 다시 주의 사자의 현몽으로 예수님의 가족이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장 19-21절입니다.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예수님의 가족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의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꿈에 지시를 받아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했습니다. 나사렛은 본래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나사렛 예수라 불리셨습니다. 이 내용으로 마태복음 2장이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3장으로 넘어가면 세례 요한이 말씀을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입니다.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 2장과 3장 사이에는 오랜 세월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에 계셨던 기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애굽에 있는 예수님 피난 교회에 갔을 때, 그곳의 안내원이 예수님께서 머문 기간이 대략 7,8년이라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돌아오신 때는 7,8세 때였고, 서른 살 즈음에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셨으므로,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머문 기간은 23년 정도라 하겠습니다. 어쨌든 2장과 3장 사이에는 적어도 이십 년 이상의 세월이 들어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어려움 속에서도 2021년도 성탄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교회마다 예수님의 성탄을 생각하고 축하합니다. 설교자들은 마태복음도, 누가복음도 3장부터는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다루기 때문에, 2장까지가 성탄 사건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설교 본문을 정하여 설교합니다. 그러나 저는 2장과 3장 사이의 침묵하는 시간 역시 성탄의 시간이요, 그 후의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도 성탄 사건이요, 길게는 지금도 성탄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탄이 무엇일까요? 최근에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기도를 들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평화의 왕으로, 생명의 빛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었습니다.....> 이 기도는 어법에 맞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평화와 생명의 왕으로 탄생하셨으니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인데, 그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기도하니 시제가 맞지 않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어법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탄생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탄생하여 오셨습니다. 가버나움 길거리에서 예수님께 나온 혈루증을 앓던 여인, 세관에서 예수님을 만난 세리 레위 등은 마리아와 요셉에 비해 삼십 년 늦은 성탄절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삼십 년 늦게 그들의 인생에 탄생하셨습니다. 한 행악자는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 자신의 인생에 탄생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 이천여 년 동안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인생의 마구간에 탄생하시는 일은 현재진형형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렛에 정착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뒷바라지하고, 요셉은 목수로서 가장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한 것은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의 인생에 탄생하시도록 돕는 고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성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을 가슴에 품고 수십 년 동안 그에게 예수님께서 임하시도록 기도하는 이, 기도로 말씀을 준비하는 설교자, 사랑의 섬김으로 예수님을 소개하는 많은 이들이 다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성탄절은 12월에 한 번 지나가는 사건, 행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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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은혜의말씀] 열매 맺는 삶(요15: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농부로 예수님 자신은 포도나무이며 제자들과 믿는 우리들을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농부의 소원이 가을의 풍성한 수확이듯이 농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은 포도나무 가지마다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있어야 한다,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 그걸 강조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열매의 정의를 이렇게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 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인격과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모든 것” 첫째, 인격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소위 being의 문제입니다. 갈 5장 22,23절은 특별히 인격의 성숙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이런 아홉 가지 열매의 요소를 갖춘 대표적인 인격, 모델이 되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품, 예수님을 닮아가는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사역의 열매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느냐? 이것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being도 중요하지만 doing!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역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의 사역 입니다. 전도하는 사역입니다. “가서 열매를 맺어야 된다.” 말씀하십니다.(마 28:19)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를 통해 복음을 받고 천국에 온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큰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직동교회 성도님들은 전도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5장 전체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 대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주 안에 있으면 됩니다. 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몸부림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꼭 붙어 있으면 됩니다.(4절) 그런데 주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 있지만, 그 관계를 토대로 지속적인 교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깊이 있게 교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이고 그분과 먹고 마시는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7절에 두 가지 비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모시는 것,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 기도가 있습니다. 말씀에 응답하면서 이제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면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기도가 터집니다. 기도는 사랑하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나무에 꼭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능력은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께 붙어 있으므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직동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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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시사칼럼] 개천용 성탄절
    2022년 대학수능시험 과학탐구영역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에 관한 논란에 관한 법원의 판단이 나왔습니다. 수험생 92명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대상으로 제기한 정답결정취소소송에서 법원은 원고승소판결을 내렸고 이에 따라 평가원은 해당 문항을 ‘정답 없음’으로 정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험생 일부가 동 문제를 직접 번역해서 세계적인 권위자에게 보냈고, 이 분야의 석학 중 한 사람인 스탠포드 대학의 조나단 프리처드(Jonathan Pritchard) 교수가 이에 반응하여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문구를 남겨서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단유전학, 대학입학시험, 수학적 역설(paradox), 법원의 가처분명령.. 이 문제가 우리 과학자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웠다.. 고등학교 시험에서 이렇게 어려운(hard) 문제가 출제된다는 점이 매우 놀랍고 인상적이다.” 우리 아이들이 이토록 범세계적으로 똑똑해졌나 싶어서 뿌듯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대학교수마저 고개를 흔들 정도의 문제가 도대체 왜 대입시험에 나오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알고 보니 해당 과목은 의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선택하기 때문에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그처럼 터무니없이 어려운 문제들이 곧잘 출제되곤 한답니다. 하지만 다른 과목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인기 동영상 가운데 ‘한국 수능영어 풀어보기’라는 계정을 찾아보십시오. 영국인이나 미국인 학생들은 물론 성인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들마저 쩔쩔매는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학문의 수준이 높아지는 일은 대단히 고무적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정과 형평’은 어느 정도 지켜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해서는 집중적이고 반복적인 훈련은 물론 고교 교과 내용을 넘어서는 수준의 학습을 어느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최근 공개된 한국장학재단 자료에 따르면 전국 39개교 의대 신입생 중 80.6%가 국가장학금 수혜대상에서 제외되는 소득 상위 20%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로스쿨’로 알려진 법학전문대학원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말합니다. “개천에서 나는 용(개천용)은 이제 없다!” 바야흐로 대선이라고 하는 광풍이 휘몰아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개천용”이 뜨거운 화두(話頭)가 되었습니다. 야권의 대통령 후보 선거전에 나왔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서민 자제가 공부만 열심히 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게 스펙사회를 실력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로스쿨, 의학전문대학원, 국립외교원 등 음서제도를 폐지하고 사법시험 등 고시도 부활시켜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당사자 자신이 바로 전형적인 “개천용”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과감한 선언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측면에서는 현재 여당 대통령 후보도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합니다. 안동 화전민 가정 출신인 그는 ‘흙수저 비주류’를 자칭하며 더 많은 “개천용”들이 우리 사회에서 배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각에서는 “개천용”을 ‘철 지난 감성팔이’로 비판하기도 합니다. 타당한 측면이 있는 지적입니다. 국민의 대표는 철저하게 비전과 정책 위주로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종의 개천용처럼 이 땅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도 마땅히 주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규모 있는 교회일수록 개천용 출신을 지도자로 받들 수는 없을까요? 보잘 것 없는 개천들만 골라가며 살펴서 그곳으로부터 숱한 인재들을 키워내는 일에 전력을 쏟을 수는 없는 걸까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은 자가 되고 높은 줄 알았던 자는 낮은 자임을 퍼뜩 깨닫는 그런 교회들이 될 수는 없는 걸까요? 권정생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니다. 벌써 기독교는 망해버렸고 죽어버렸다. 지금 우리가 거대하게 지어놓고 모이고 있는 교회는 망한 교회, 죽은 교회다. 오직 물질과 현실의 성공만이 있는 썩은 교회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요즘 교회는 주가로 치면 바닥을 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낮아지지 못하니 주께서 강제적으로 낮아지게 하셨습니다. 다시 비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는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낮은 자와 함께 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낮은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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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목회자칼럼] 행복한 성도
    주께로부터 부름 받고, 사랑받고, 쓰임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가 소명자, 은총자, 사명자이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시대가 요청하고 내면의 절규가 있고 교회가 필요로 할 때 선뜻 응답하는 자는 존귀하게 쓰임 받는다. 바울의 옥중 서신인 빌립보서에서 성도의 특징은 기쁨이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은 천재도 이길 수가 없다. 믿음이 역사하고, 소망이 인내하고, 사랑의 수고가 많은 사람은 아름다운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다. 아이돌 그룹에서는 센터가 중요한데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 신앙생활의 쓰리 센터이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의 삼겹줄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온몸이 강건한 것이 삼중축복이다. 별세하신 조용기목사는 폐병, 심장병 등으로 6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지만 성경 속에서 3중 축복, 4차원의 영성, 5중 복음, 7대 사역을 발견하고 체계화 시켜서 세계적인 사역을 일으켰다. 모든 것의 시작은 소명감에서부터이다. 내가 설치는 것은 별 영향력이 없지만 주께서 부르실 때는 역사가 달라진다.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일은 곧 사그라지고 말지만 주께로부터 말미암은 일은 반드시 승리하고, 반드시 복을 받는다. 주께서는 지구촌 70억 인구 중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로 나를 부르신다. 펭귄 무리가 많고 생긴 것이 비슷하지만 어미와 새끼는 그 부르짖는 소리로 서로를 알아본다. 주께서 나를 부르시고 부탁하신 일, 콜링이 천직이고, 직업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할 때에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을 불러서 사명을 주셨다.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가 이스라엘의 사울왕, 다윗왕을 기름 부어 세웠다.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엘리야에게 세미한 소리가 들려오면서 치유와 회복이 되었다. 큰 잔치 입구에서 초청자 명단을 확인하는데 내 이름이 없다면 얼마냐 부끄럽겠는가. 천국 입구에 섰을 때 그 때에는 부끄러움이 없어야 된다. 착하고 충성되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악하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더디 믿는 종은 한 데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된다. 이사야는 “주여 제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응답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리는가? 하나님의 본심을 알겠는가? 주님의 부르심에 누가 선뜻 대답할 것인가? 차든지 뜨겁든지 반응하라.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내가 열심히 할 때는 금방 한계가 온다. 주께서 부탁하실 때는 감당할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돕는 자도 붙여주신다. 세상의 부름과 허망한 인기에 현혹되지 마라. 허무한 것에 질질 끌려 다니지 마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이 사탄의 미끼이다. 하늘의 소리를 경청하라. 지혜는 경청에서 온다. 듣는 것이 제사보다 낫다. 노래 실력은 청음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경에 쓰임 받은 사람들은 듣는 귀가 발달되었다. 골리앗이 40일 동안을 조석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할 때에 그 소리를 유달리 민감하게 들은 사람은 다윗뿐이었다. 소명자가 사명자가 된다. 주께서는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가지시고 나를 부르신다. 내가 시작한 일은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주께서 부르시고, 주께서 부탁하신 일은 아파도 해야 되고, 싫어도 해야 되고, 힘들어도 해야 된다. 소명자가 수명자다. 주의 일을 할 동안에는 망할 틈도, 죽을 틈도 없다. 거침없이 담대하게 나아간다. 일을 하는 중에 일 머리가 생기고, 일을 하는 중에 깨닫게 된다. 열정은 해도 해도 지치지 않는 힘이다. 가속도가 붙고, 탄력성이 생긴다. 은혜위에 은혜, 빈익빈 부익부가 나타난다. 사명자는 필드, 현장에 서면 설레임이 생긴다. 주께 부름 받은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는 자가 아니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사명은 ‘내가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아’이고, 사랑은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다가 죽어도 좋다’이다. 어릴때부터 사명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교회에서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가 않는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 고인 물은 썩는다. 주께서 주신 축복을 흘려 보내는 자가 축복의 통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서 천당에 끌고 가서 알바 시키려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랑해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구별 되이 부르셨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것이다. 사람은 밥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받고 산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에 세상의 짝퉁 사랑을 버리고 나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소명보다 중요한 것은 사명이고, 사명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고, 은총 받는 귀염둥이, 예쁜 둥이 우리자기이다. 나는 소명자인가? 나는 사랑받는 자인가? 나는 쓰임 받는 자인가? 나는 사명자인가? 나는 행복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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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7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구호단체들: 기독교아동복리회(CCF)
    ‘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 이하 CCF)는 ‘중화아동기금’(China Children's Fund) 라는 이름으로 1938년 10월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비분파적 비영리 구호단체로 시작되었다. 클라크(J. Calvitt Clarke)라는 장로교 목회자와 나글 (Dr Nagle)이라는 중국 출신 감리교 선교사가 한 이발소에서 대화하던 중 중일전쟁으로 인한 중국 난민들과 중국의 굶주린 아이들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클라크 목사는 중국 아동들을 위한 기금을 모우는 재단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이 일이 결실을 맺어 1938년 10월 6일 ‘중화아동기금’이라는 조직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CCF의 시작이었다. 1939년 12월 27일에는 모금한 기금 중 1만3천 달러를 중국 광동지역 고아들과 링난대학에 보냈고, 1940년 8월 21일에는 다시 1천 달러를 중국아동복지위원회에 보냈다. 이 구호사업이 확장되어 1941년에는 중국의 29개 고아원을, 1944년에는 중국의 45개 고아원을 도왔는데 이 해에만 26만3천 달러를 후원했다고 한다. 1946년 6월과 7월 클라크 목사는 밀스 목사(Verent Russell Mills)와 함께 중국을 방문하고 21개 고아원을 둘러보면서 중국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클라크는 중국 특히 광동지역 고아들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펼쳤으나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화되고 중국의 반기독교 정책 때문에 1950년 9월 말 이후로는 중국의 고아들을 더 이상 도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46개 고아원과 고아원에 수용된 5천여 명의 아동들, 그리고 2백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포기하고 중국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아동구호단체 명칭도 동일한 영어 이니셜을 사용하여 1951년 2월 6일자로 기독교아동복리회(CCF)로 변경되었다. 그 후 CCF는 홍콩, 대만, 마카오에 새로운 시설을 설립하고 구호 사업을 계속하였고, 이 사역은 말레시아, 미얀마, 인도 필리핀으로 확대되는데, 한국에서의 사역은 1948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아동복리회’라고 해서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도움을 베푼 것은 아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구별 없고, 종교나 국적 인종적 차별 없이 도움을 베풀고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2002년 6월에는 여러 나라에서 사역하고 있는 아동후원단체가 국제적인 연락망(network)을 구성하였고, 2009년 7월 1일에는 기독교아동복리회는 국제어린이재단(Child Fund International)로 개칭되어 오늘이 이르고 있다. 당시 31개 국가에서 1,300만명 이상의 어린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그렇다면 CCF는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사역하게 되었을까? CCF해외사업본부 홍콩사무소 책임자였던 밀즈 목사는 1948년 10월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의 3개 고아원, 곧 서울의 구세군 후생원, 구세군 혜천원, 그리고 절제소녀관(후에 연세사회복지관으로 개칭되었다)을 돕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CCF의 한국에서의 사역의 시작이었다. 이들 세 시설에 수용된 아동들은 약 400여명에 달했다. 곧 이어 구세군 후생학원과 안양기독보육원을 후원하였는데 이들 시설에 수용된 아동들은 대부분 공산정권에 반대하여 월남한 사람들의 자녀이거나 월남하던 중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안양기독보육원은 오긍선 박사가 운영하던 아동보호시설이었다. 오긍선 박사는 한국인 처음으로 경성보육원을 설립했는데, 1930년대 안양시 만안구 안양2동으로 옮기면서 안양기독보육원으로 개칭한 아동보호시설이었다. 밀즈는 CCF의 초기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중일전쟁(1937. 7. 7- 1945. 9. 3) 당시 죽어가던 수많은 어린이들의 실상을 보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해결하게 위해 노력하여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바로 그의 노력으로 한국에서도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클라크, 버본 켐프(Verbon E. Kemp)에 이어 1970년 CCF의 제3대 총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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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7
  • [은혜의말씀] 근심을 이기는 비결(3)-성령님 (요 14:16-18)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오히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 말씀하십니다. (요 16:7)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면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성령께서 제자들의 근심이 깊어질 때 예수님이 해주신 것처럼 그들과 함께 해주시고 그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성령님을 말하지만 성령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1)성령님을 하나님께 속한 하나의 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을 능력이나 힘, 기적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은 그동안 없다가 오순절날 이 땅에 임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신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고전 12:3)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 내 속에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왜 근심을 이기는 비결입니까? 1.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16, 17, 18절)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십니다. 성령님의 이름이 보혜사인데, 그 뜻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오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돕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내주’라고 합니다. 나아가 성경은 성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고전 3:16) 또, 한번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해 주십니다. 성령의 내주로 구원받은 백성은, 천국 가는 순간까지 성령께서 붙들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성령님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17, 26절)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세상에 오시는 이유에 대해 명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바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2)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닫고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야 가능합니다. 성도 여러분, 평강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로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하늘 평안을 누리면, 우리의 모든 근심은 물러가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걱정스러웠던 일도 별로 걱정이 안 됩니다. 그렇게 무거웠던 십자가도 가벼워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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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소강석칼럼] 청춘은 단풍 들지 않는다
    저는 군산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때 당시 저의 모교는 전라북도에서 떠오르는 명문학교였습니다. 우리 동문들 중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해서 유명 법조인, 중앙부처 공무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창생들이 졸업 40주년 기념 행사를 하는데, 축사자 두 명을 선정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탤런트 김응수씨 이고 또 한 사람은 저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마침 토요일입니다. 그날 오후에 최남수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의정부광명교회에서 고등학교 동창이 장로 장립을 받는데 저에게 예배 설교를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곳에 가게 되면 설교 끝나고 바로 군산으로 가야 합니다. 또 다음날 이 주일인데, 토요일 오후에 군산을 다녀 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런데 저에게 동문회 축사를 미리 써 보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가는 게 무리수인데도 40 년 전 까까머리 친구들이 보고 싶어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낸 축사를 써서 보냈는데 일부만 소개 하겠습니다. “(상략)... 모교 2학년 시절, 여러분들이 열심히 공부할 때 저는 사감 선생님께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뭘 알았겠습니까? 그냥 예쁜 여학생들 만나러 간 것이죠.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목사가 되어 버렸네요. 목사도 그냥 목사가 아니라 맨손으로 개척해서 대형교회를 이룬 목사요, 교단의 총회장,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표회장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상에서부터 각국의 많은 정상들을 만나봤는데, 결국 인생이란 다 바람처럼, 강물처럼 지나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인생을 계절로 비유한다면 가을의 어디쯤에 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권우열씨가 쓴 ‘청춘일 때는 단풍 들지 않는다’는 책처럼 우리의 마음이 청춘으로 있는 한, 우리 삶의 잎사귀는 언제나 햇빛 찬란한 푸른 잎사귀로 빛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육체는 분명히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될 때가 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님을 만나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그래서 저는 영생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친구요, 동문으로서 애틋한 마음을 갖고 제가 만난 예수님을 믿고 함께 영원한 천국에 같이 가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온 천하에 생명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동문들이여, 100세 시대라는데, 이 땅에서도 건강 장수하시고 천국에서 영원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친구들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그날, 친구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니까 벌써 가슴이 설렙니다. 저는 목회 하느라 한 번도 동창 모임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재경동문회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모임을 꼭 금요일 저녁에 하니 철야기도 때문에 못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도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저의 작년 사진과 지금 사진을 보면 4-5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작년의 동영상과 사진을 보면 진짜 40후반이나 50초반 같습니다. 진짜 1년 만에 폭삭 늙어 버렸습니다. 왜 늙었냐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총회장, 한교총 대표회장으로서 예배 회복, 반기독교 악법 저지, 생태계 보호, 연합사역 등을 하느라 제 힘과 에너지를 너무 쏟아 버린 것입니다. 오죽하면 제가 서재에서 교회 본당으로 내려가는 길에 낙엽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네 모양이나 내 모양이나 어쩌면 그렇게 똑같으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권우열씨가 쓴 ‘청춘일 때는 단풍 들지 않는다’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맞아, 지금도 내 마음은 영원한 청춘이다. 광주신학교를 다니던 때의 청춘, 백암교회를 개척하던 청춘은 아직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아니, 고등학교를 다니던 까까머리 소년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저는 누가 봐도 인생의 계절로 보면 가을이고 나무 잎사귀로 보면 낙엽은 아니지만 단풍 초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까까머리 청소년, 광주신학교와 백암교회, 가락동 개척시절,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풍의 질주를 하던 청춘은 내 안에 빛바랜 추억의 앨범이 아닌 여전히 눈부신 동영상으로 쉬지 않고 비춰지고 있습니다. 청춘은 단풍 들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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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강석 칼럼
    2021-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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