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2(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교회음악칼럼]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 3
    지난번에 이어서 말씀을 중심으로 보다 디테일하게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언제 찬양을 할까? 야고보서(5:13)는 찬양하고 싶을 때, 시편(42:5)은 찬양하고 싶지 않을 때 그리고 시편(57:8) 새벽에, 시편(119:62) 저녁에 찬양하라고 한다. 즉 찬양의 삶 살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보면 레위인들은 24시간 하나님을 섬겼고(찬양, 예배), 신약 히브리서(13:15)에서는 항상 찬양의 제사를 드리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합3:17-18)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이다. 어디에서 드려야 할까? 시편149:5, 시편113:3에서는 어디에서나 드려야 한다고 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드리는 찬양을 좋아하신다고 하셨다.(시22:22,25, 시26:8,12, 시27:4, 시35:18, 시68:24-26, 시69:9, 시107:32, 시122:1) 나아가 모든 나라와 백성들 앞에서 찬양해야 한다고도 했다.(시96:3, 시40:3) 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뿐 아니라 당신의 영화롭고 위대한 역사가 불신자들을 포함한 만민들, 온 땅위에 충만하게 선포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드려야 할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선포되거나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사야서에서 나의 찬송을 부르라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주파수에 우리가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잡음이 되어 전달이 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시103:1, 시42:5-6), 진심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집중하여 드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출15:26, 창22장, 겔48:35) 무엇으로 드릴까? 입술로(시119:171), 마음으로(시13:5), 춤추며(시149:3, 시150:4), 손뼉 치며(시47:3), 영혼으로(시103:1), 악기들로(시150:3-4, 시15:16) 만군의 주요 전능자를 모든 것을 동원하여 찬양해야 한다. 다윗이 찬양한 것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을 수 있는데 그는 즐겁게(삼하6:15, 삼하6:16, 삼하6:21) 힘을 다하여(대상13:8, 대상16:5) 또 큰소리로(대상16:42, 대상15:16) 날마다(삼상18:10) 신령한 노래(대상25:1-3)로 감사의 찬양(대상16:4)을 드렸는데 우리도 날마다 순간마다 이와 같이 찬양하는 삶을 살아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베푸시는 선한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시대에 신실하고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음악칼럼
    2022-11-04
  • [목회자칼럼] 확증 편향(선택적 사고)
    “한국교회, 분열과 함께 확증 편향 회개해야…” 지난 달, 우연히 본 기독교 신문의 헤드라인입니다. 저 한 문장 중 ‘확증 편향’이라는 낯설지 않은 단어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정신’ ‘나와 너를 넘어 우리라는 공동체성’ 등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는 결코 확증 편향과 같이 있을 수 없는데, 한국교회가 확증 편향 속에 있다고 하니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 되었나, 막막함이 차올랐습니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 가치, 판단과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에는 다 무시하는 ‘선택적 심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그 외에 것들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 태도를 일컫습니다. 몇 해 전부터 현대인의 모습을 지칭하는 단어로 ‘확증 편향’이 등장했고,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확증 편향을 꼽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정보만 취합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해버리는 현상이 일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보니, 확증 편향의 시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를 보면 부모는 자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를 취합해 자녀에게 강요하고, 자녀 또한 부모의 말을 들어 고치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입장을 타당하게 해 줄 근거 찾기에 급급합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이기려고 하는 모습 속에서 확증 편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갈등 구조인 보수와 진보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수는 진보의 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오로지 보수쪽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을 더 많이 취합하므로 자신들의 신념을 강화시킵니다. 진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보에게 유리한 내용들만 골라 골라 자신들의 신념의 탑을 쌓습니다.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는 확증 편향의 정확한 사례로, 이들을 보면 절대 하나 될 수 없고, 끝까지 자신의 길이 진리인 것 마냥 목소리를 낼 것이 확실합니다. 사회가 이럴 때,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는 확증 편향과는 거리가 멀게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하려고 애쓸까요? 같은 교회에서 같이 예배드리며 같이 소그룹 나눔을 하는 교인들도 몇몇 성도들은 “말씀이 최고이기 때문에 무조건 말씀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또, 어느 성도들은 “봉사를 통해 섬기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에 식당봉사, 성가대 봉사 등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그래도 괜찮은데, “나는 기도원파이다. 나는 성령파이다. 나는 직통계시파이다” 등으로 확증 편향을 가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성도들은 자신이 믿는 방법만이 진리라는 확신을 갖고, 다른 방법은 믿음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수긍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인 확증 편향이 교회 안까지 깊숙이 들어와 성도가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이미 선택적 사고에 붙잡혀 있는 체계 속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내 생각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자기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짐으로 너도 나도 자기가 가진 정보는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너가 잘못됐어”라고 지적하면, 잘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우리의 생각은 항상 잘못될 수 있습니다. 어제 내가 알던 것이 오늘 잘못된 사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만이나 독선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항상 내가 틀릴 수 있다고 가정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대화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변화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 편향 속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는 나의 잘못을 고치려는 결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받아들이는 유연함을 가질 때 확증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입니다.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참된 교제가 있을까요? 자기 신념만이 진리라고 우기는 정치 집단 속에 합의와 타협은 있을까요? 내가 가진 신앙만이 참된 믿음이라 고집하는 성도에게 성령의 하나됨이 있을까요? 이처럼 확증 편향적 자세는 고립, 대립, 경쟁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반대로 발전하는 자세와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제 세상이 말하는 확증 편향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예수님이 원하는 가치고 돌아가야 합니다. 자발적인 순종과, 다른 이들을 향한 환대의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성숙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11-0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3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에서 복무 중이던 밀턴 로젠 랍비는 1950년 11월 5일 주일 이른 아침 제너럴 하세(General Hasse)호로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한국으로 향하게 된다. 그 배에는 미군 1천명 이상의 장교와 사병이 타고 있었다. 이틀 후 7일에는 일본 남부의 나가사키현의 사세보(世保, Sasebo) 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1천명이 탑승하여 한국으로 향해 11월 10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로젠이 Der Morgen Zhornal (Jewish Morning Herald)에 기고한 보고에 의하면 인천에 도착한 새벽 3시부터 낮 11시까지 8시간 동안 작은 선박으로 병사들의 상륙을 도왔다고 한다. 한국의 겨울이지만 이날은 맑고 따뜻했으나 큰 건물은 파괴되어 있었고 여기 저기 벽돌들이 흩어져 있고 거리는 정비되지 않은 어설픈 상태였다고 했다. 이날 처음 만난 한국인들은 남자이든 여자이든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난과 배고픔이 베여 있는 슬픈 눈빛이었다고 기록했다. 인천항에서 군 기지로 이동은 기차를 이용했는데, 군인들은 손을 흔드는 한국인들에게 창문으로 캔디와 담배를 던져 주었다. 기지에 도착했으나 허름한 건물이었고 침대가 없어 한국인들이 짚으로 만든 침대 비슷한 것을 만들어 주었고 거기서 군용 리쿠사쿠로 휴식을 취했다. 숙소에서 제일 먼저 한 일은 DDT로 소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식사를 못해 극도로 배가 고팠는데, 돼지고기가 나와 유대인이었던 밀턴 로젠은 채소와 과일, 그리고 커피만 마셨다고 한다.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한국인 남녀 어른과 어린아이들이 힘을 모아 캠프를 급조했다고 한다. 로젠과 미군병사들은 일단 인천항으로 입항했는데, 알몬드 장군(General Almond) 휘하의 원산의 10군단으로 배속되어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장비와 무기 이동이 우선순위였다. 그래서 예정된 날에 원산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것은 군사기밀이었는데 실제로는 목적지가 원산이 아니라 부산이었다고 한다. 로젠이 신문에 쓴 보고를 보면, 부산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게 되는데, 기차는 더럽고 성한 곳 없이 지저분했다. 무엇보다도 한국인 피난민들로 들끓었는데, 미군이 음식을 준비하면 어린 아이들이 몰려와 빈 캉통이라도 주워 먹으려고 경쟁했고, 아이들의 얼굴에는 지치고 고통스런 아픔이 서려 있었다고 기록했다. 인천에서 부산까지는 350마일, 곧 560km인데 주야로 며칠이 걸렸다. 문제는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북한 게릴라의 공격 또한 염려되어 두려웠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잠을 자는 것인데, 쉬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병사들 가운데서는 이미 북쪽에서 전선에서 싸웠던 이들이 있었고 어떤 이는 상처를 보여주었고 상처난 전투당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전선의 치열함을 알 수 있었다. 부산으로 이동하는 중 기차가 정차하면 키가 작고 바싹 마른 아이들이 잡다한 물건을 가지고 차에 올라 팔아달라고 조르는데, 로젠 군목은 “나는 나의 생애에서 이처럼 열정적이고 도전적으로 물건을 파는 이들을 본 적이 없다”고 기록했다. 13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돈을 가지고 미국 담배, 캔디, 껌을 사고자 했다. 담배 한 갑은 1200원(약 3달라), 껌은 한통이 6백원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이동하는 동안 일본어를 아는 한국인과 어렵게 대화했는데, 북한의 집은 파괴되고 재산을 강탈당하여 대구로 내려 가는 중이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서 신기했고, 한국인들은 유대인들은 다 부자인 줄로 착가하고 있다고 썼다. 유대인 군목 밀턴 로젠 랍비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1950년 12월이었다. 부산은 인민군의 공격을 받지 않는 것이었고, 철도도 무사했다고 기록했다. 부산역에서 군 캠프로 이동하는데 바싹 마른 아이들이 자기들 보다 세배 이상 무거운 짐을 나르고, 날씬한 여자들도 머리에 짐을 이고 두 손으로 가방을 들고 어깨에도 가방을 두르고 짐을 나르는데 놀라울 뿐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군목은 일단 부산으로 왔으나 약 일 주일 후 원산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는 저녁마다 부산 거리를 다니며 부산 사람들을 보았는데, 부산은 옛것과 새것이 뒤섞인 도시라고 생각했다. 지게를 지고 다니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현대적인 복장이나 물품들이 유통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로젠의 눈에 비친 부산은 도둑들이 설치는 도시였다. 군용품이 가게에서 거래되고 있었다. 또 미국 영국 인도 캐나다인 등 여러 종족의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인도군인들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잘 다려진 군복이 흥미로웠다고 기록했다. 로젠은 8일간 부산 생활을 경험하고 9일째 되는 날 부산을 떠나도록 명령을 받고 있었다. 이번에는 LST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가 다른 병사들과 무기 탱크 트럭 등 장비를 싣고 출발을 준비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11-04
  • [서임중칼럼] 지도자의 언행
    일찍이 나의 목회철학은 언행일치(言行一致) 학행일치(學行一致),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통해 ‘너의 유익을 위한 행동하는 나의 삶’이었다. 걸어 나온 길을 돌아보면 이 삶을 살기 위해 가히 몸부림을 친듯한데 원하는 만큼 살지만은 못한 것 같아 古稀의 중반에 이르러서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그래도 마음만은 늘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목사로서 오늘도 전국에 산재한 작은 교회를 향해 말씀사역 길을 행보한다. 이제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육신의 아픔도 하나 더 품었기에 운전도 더 벅차고 잠자리도 불편하며 기력도 하루가 다르게 쇠진하는 것을 느끼지만 오늘도 감사로 절차탁마의 삶을 다듬는다. 작금에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으로 세간이 시끄럽다. 범인들의 말이었다면 관심도 없을 일이지만 지도자의 언행이라 주목을 받는다. ‘비속어를 사용했느냐 안 했느냐? 언론사가 짜깁기를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결국 고소 고발에 이르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마땅히 국민들이 들어야할 대통령의 첫 해외순방 성과에 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가 없다. 본질과 비본질이 뒤틀린 논쟁으로 국격은 걸레가 된 듯하다. 요즘 들어 더더욱 살기 힘든 백성들을 좁쌀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마지막 보루라는 언론의 행태와 당리당략에 허우적거리는 정치권을 향해 분노를 넘어 허탈한 마음이다. 소망조차 보이지를 않는다. 전직 대통령 중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분이 계셨다. 그 분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이 알려져 있다. 어느 날 한 도시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나는 이 도시를 유명한 강간(관광)도시로 만들겠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을 수행했던 외무장관이 깜짝 놀라 용어 수정을 말씀 드렸다. “대통령님! 강간 도시가 아니라 관광 도시입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자존심 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 하셨단다. “애무(외무)장관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애무(외무)나 잘 하세요.” 사실관계를 떠나 이 같은 상황에서도 국민들은 그냥 파안대소하고 너나없이 대통령의 말에 대하여 달리 마음을 두지 않았다. 요즘 같으면 탄핵하라고 소란을 피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리더는 말과 행동이 명확해야 하는 것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웃기는 언행일치(言行一致) 사건 이야기가 생각난다. 2004년 11월 18일자 한국경제신문에 웃지 못 할 기사가 실렸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는 책을 출판한 저자 차모 씨가 구속 수감 된 이야기다. 차 씨는 경영컨설팅을 하는 사람인데, 요리조리 둘러대며 남의 돈 18억을 빌려 쓰고 중국으로 도주를 했다. 그런 그가 아내가 암으로 입원을 하게 되자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된 건이다. ‘빌린 돈은 갚지 말라’고 책을 쓰고 자기가 그 말대로 행한 웃기는 언행일치 사건인데, 이런 경우를 두고 당시 네티즌들은 “진짜 언행일치의 사람”이라고 댓글을 달았던 유명한 에피소드다. 갈라디아서 2:14절에는 우리가 주목할 말씀이 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사도 바울이 게바를 책망하는 말씀으로써 그리스도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목사가, 장로가, 목사답게 장로답게 살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답게 살라고 하느냐?”로 문장을 바꾸어 읽으면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다. 지도자의 언행을 다시금 일깨우는 교훈이다. 「왜 부모의 권위는 소중한가?」를 출간한 제임스 돕슨(James C Dobson)의 <Bringing Up Boys>가 있다. 이 책에서 돕슨은 “미국은 아버지의 몰락으로 무너졌다”고 역설했다. 이유는 지난 30~40년간 페미니스트(feminist)가 남녀가 똑같다는 논리아래 남성성(男姓性)과 여성성(女姓性)은 학습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남자아이용 완구와 여자아이용 완구의 구분은 모호해졌고, 그 결과 가정에서 남자의 모델이 없다 보니 아버지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가정도 무너지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흐름은 이미 한국에서도 정착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생태학적 심리학으로 볼 때 남성과 여성은 성 호르몬이 분명히 다르다. 진정한 남성은 희생할 줄 알며 책임성이 있고 가족을 위하여 스스로를 포기할 줄 알며 그래서 가장(家長)의 책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위치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중심으로 뜻있는 기관 단체는 그 단초가 되는 성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이다. 교회를 들여다보자. 언제부터인가 한국 교회에 당회장의 위치가 모호해 지고 있다고 우려를 한다. 당회장의 자리가 없어져 가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슨 말인가? 지도자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어야 하고 지도자다운 말을 해야 하며 지도자다운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할 때 그 공동체가 힘이 있고 공동체 전체가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 기능과 권위와 능력을 잃어가고 있음은 그 원인행위가 지도자 자신에게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봄이 있어야 한다. “야옹거리며 우는 고양이는 쥐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말이 많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마디 말도 쓸모 있는 말이어야 하고 가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살다보면 한 마디 더 말할 시간은 있어도, 그 한 마디를 취소할 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한 말도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말이 말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말 한마디로 복도 부르고 화도 불러온다. 생각 없이 욱하는 감정으로 불쑥 내뱉은 말은 평생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아름다운 말이 아름다운 삶을 이끈다. 나의 말이 곧 나의 삶이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하다고 야고보 사도가 가르쳤다. 지도자의 언행은 그 무게가 그래서 다른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2-10-20
  • [성서연구] 천국에 관심없는 교회
    자기 나라가 아닌 타국의 국민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미국 국적을 얻는 것만 어려운 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얻는 것도 어렵습니다. 이미 영주권을 가진 사람을 전제로 말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대한민국 영주권자이면서 5년 이상 계속 한국에 거주하고 있을 것, 둘째, 경제적 요건으로 6천 만원 이상의 부동산 혹은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고, 일정한 직업 혹은 소득이 있을 것, 셋째, 사회통합 프로그램 귀화용 종합시험 및 면접심사를 통과할 것, 넷째, 큰 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서류를 제출하고, 2년 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것을 감사하면서 나라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천국이 왜 이상한 나라일까요? 우선 천국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입니다. 또 천국은 사람이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들은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독재자일 수도 있고, 무능할 수도 있고, 갈등만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나쁘거나 무능한 통치가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통치자이십니다. 또 천국은 영원한 나라입니다. 지금까지 땅에는 무수한 나라가 있었지만, 모두 사라지고, 새 나라가 생기곤 했습니다. 각 나라마다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을 국가반란죄 등으로 처벌하지만, 그렇게 해도 나라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새 나라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생긴 이래도 수천 년 이상을 조금의 변화도 없이 유지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변함없는 나라입니다. 또 천국이 이상한 나라인 이유는 백성이 되는 자격 때문입니다. 본문은 천국의 백성이 되는 조건을 말씀하는데, 그 조건을 한 가지만 말씀합니다. 그 유일한 조건은 회개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은 이렇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길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셨습니다. 천국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조건으로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회개가 무엇일까요? 회개란 땅의 나라 백성으로 살았던 과거를 청산하는 것입니다. 땅의 나라의 욕망과 부정한 모든 것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천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땅의 나라를 위해, 땅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그 삶의 대부분이 천국의 원리와 반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백성이 되려면 땅의 나라 백성으로 살던 과거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벗어나 천국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교회는 천국에 가겠다고 예수님께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임시 처소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합니다. 천국에 가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천국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일반 성도들도 땅의 나라 이야기만 합니다. 하나님을 통해 땅의 나라에서 잘 사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신청서는 냈지만, 별로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은 표정입니다. <드디어 허가증이 나왔으니, 천국으로 가세요>라고 할까봐 겁을 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것은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청선를 낸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밀 심사를 하는데, 그게 회개입니다. 신청서는 냈지만, 회개는 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 백성으로 합격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여전히 땅의 나라 방식으로 삽니다. 그래서 교회도 이상합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는데, 별로 천국에 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천국 이야기만 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회개를 말하면 어리석다고 합니다. 땅의 나라 원리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중요한 일을 맡기도 합니다. 어떠세요? 천국에 정말 가고 싶으신가요? 정말 그렇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를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머지 않아 천국이 정말 간절히 바랄 순간이 올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10-14
  • [시사칼럼] 바이든 고개 들어 날리면 고개 들지마
    작년 연말 미국에서 흥미로운 영화 한 편이 개봉됩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블랙코미디 장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는 별달리 재미를 보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방의 무명대학 천문학과 박사 과정의 디비아스키는(제니퍼 로렌스) 에베레스트 크기의 혜성을 하나 발견하는데, 궤도와 속도를 계산해보니 6개월 후 지구와 충돌할 예정입니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랜들 민디 교수에게(무려 디카프리오), 박사는 정보기관과 대통령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언론에까지, 이 사실을 알렸지만 재선에 목을 맨 대통령은(메릴 스티립!) 의도적으로 이들을 무시하면서 비밀리에 숨기기 바쁘고 언론도 기업도 교만과 잇속에 물들어 저마다의 이유로 진실을 외면합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이 두 파의 사람들로 나뉩니다. “고개 들어”(look up)파와 “고개 들지 마(don't look up)”파로 말입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참고로 영화 제목은 ‘돈 룩 업’(Don't look up)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영화는 한국에서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내리고 난 후 약 6개월이 지난 현재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들이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발단은 역시 앞선 영화가 개봉된 미국에서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해서 미국 대통령이 주관하는 글로벌펀드 재정회의에 참석했고, 나오는 길에 측근을 향해 무심결에 던진 한 마디가(정확하게 27글자로 이루어진 한 문장) 한 방송국 카메라에 잡히는 바람에 난리가 났습니다. 언론은 보도하고 당국은 반박하면서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여부가 전 국민의 관심사였습니다만, 며칠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나 보도자제요청을 어기면서까지 국익을 해치는 보도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방송사에 대한 항의가 이어졌고 이 때문에 언론탄압 문제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말한 본인조차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이 문장의 뒷부분에 과연 현직 미합중국 대통령의 이름이 나오느냐 그렇지 않다면 일설에 따라 다른 말이 그렇게 들렸던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세상은 두 쪽이 나고 말았습니다. “바이든”파와 “날리면”파로 말입니다. 자, 이제 각각의 둘들을 비교하고 연결시켜 봅시다. 먼저 사실을 제기한 쪽은 “고개들어”파와 “바이든”파였고, 뒤에 반론을 제기하거나 묵살하려고 한 쪽은 “고개들지마”파와 “날리면”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개들어-바이든”파와 “고개들지마-날리면”파의 짝을 만들어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흑백논리만으로 재단(裁斷)할 수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고개들어-날리면”파와 “고개들지마-바이든”파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순서대로 편의상 ‘가, 나, 다, 라’의 기호를 붙여보겠습니다. 먼저 “가”와 “나”파는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사람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장에는 적어도 일관성이 존재합니다. 순수한 진보나 순수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라고나 할까요? 다음 “다”와 “라”파는 사안마다 절묘하게 융통성(?)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여지도 존재합니다. “다”와 비슷한 부류를 굳이 생각해 본다면 이른바 ‘태극기 보수’쯤 되지 않을까요? “라”와 비슷한 부류를 굳이 찾아본다면 이른바 ‘수박’쯤 되지 않을까요?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에 따르면 기호(sign)는 기표(signifie)와 기의(signifian)의 결합입니다. 이러한 고전파 언어학에 따르면 바이든은 바이든이고 날리면은 날리면이지 바이든이 날리면이 되고 날리면이 바이든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크 데리다(1939-2004)는 이러한 구조를 “해체”(deconstuction)하면서 본질적으로 다르게 보이는 이면에도 유사한 동질성이 있다며 “차연”(defférrance) 이론을 주창하여 일대 혁신을 이뤘습니다. “차연”(差延)이란 ‘차이’와 ‘연기’를 의도적으로 합성한 개념입니다. 만일 데리다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조금 만 더 들어가 보면(들어 보면?) 바이든이 날리면이고 날리면이 바이든이며 바이든이든 날리면이든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 마디 날리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그것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하셨습니다. 이중으로 “감추”(칼립토)고 “숨긴”(크립토) 진실도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제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하고, 바이든이든 날리면이든 힘을 합쳐 산적한 현안들부터 해결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10-14
  • [은혜의말씀] 십계명을 주신 이유(출 20:1~3)
    하나님은 애굽에서 비참하게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어 자유를 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새로운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삶의 지침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 하면, 우리가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구약시대에는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지요! 십계명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언약인 것입니다.(엡 2:8,9) 또 하나는, 지금은 신약시대이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사역을 완성하신 우리 주님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보다 더 엄격한 윤리의식을 산상수훈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마 5:16,17)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오해는 십계명은 우리의 자유를 속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나라마다 법(法)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법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국민을 얽어매고 자유를 빼앗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보고하고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법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명이란 인간을 속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보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십니다.(1절)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막연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십계명 말씀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요 1:14) 2. 그러면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2절) 여기서 우리의 실체와 하나님의 실존을 말씀해 줍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종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긍휼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허물과 죄를 죽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3.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3절)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데 가장 중요한 것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인간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우선은 하나님입니다.(신 6:4,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이 말씀 가운데 담겨진 신앙이나 생활이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 은혜만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10-14
  • [교회와세금] 교회 재산세의 납부와 면세 기준
    재산세(property tax)는 토지, 건축물, 주택 등 부동산이나 선박 및 항공기의 소유에 대하여 과세하는 지방세이다. 즉 소득과 소비, 재산 3개 세원 중, 소유하는 재산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이다. 2022년 국회예산정책처의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2020년 재산세는 13.8조원으로 지방세수입 102.0조원 대비 13.5%를 차지하고 있다. 세율은 과세대상 및 과세표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주택분 재산세는 일반주택의 경우 과세표준 구간별로 0.1~0.4%의 초과누진세율이 적용된다. 별장은 과세표준의 4%로 단일세율이 적용된다. 토지분 재산세는 종합합산토지와 별도합산토지의 경우 과세표준에 따라 각각 0.2~0.5%, 0.2~0.4%의 초과누진세율이 적용된다. 분리과세 토지는 농지 및 임야의 경우 0.07%, 공장 등 공급목적 토지는 0.2%, 골프장 및 고급오락장은 4%로 단일세율이 적용된다. 건축물은 0.25%의 단일세율이 적용되며, 선박과 항공기의 경우 0.3%가 적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세의 납부를 실무적 차원에서 교회(Church)에 적용할 경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재산세는 보유중인 재산가치에 대해 과세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보유목적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즉 취득세 및 법인세와 동일하게 교회가 고유목적에 직접 사용하기 위해 보유하는 토지와 건물부동산은 타종교단체 및 공익법인을 포함해 재산세가 면제된다. 그러나 고유목적이 아닌 용도로 사용을 하거나 목적을 변경하는 경우 세금을 납부하여야 하며, 심지어 소급하여 부과될 수 있음을 주의하여야 한다. 참고로 2020년에 감면된 우리나라 재산세액은 학교・외국교육기관 3,805억원, 종교단체・향교 2,532억원, 임대사업자의 임대목적부동산 1,516억원(지방세특례제한법 50조)이다. 둘째, 교회재산의 과세와 면세기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교회 사택의 경우 담임목사가 거주하는 사택(1건)은 재산세가 면세되나 기타 부목사 등의 사택은 과세 대상이 되고, 교회 사찰 관리인이 부속 건물에서 관리를 위해 거주하는 경우도 고유목적을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어 재산세가 부과될 수 있다. 또 학사관, 카페, 스포츠센터의 예와 같이 수익창출 목적이 아니더라도, 일부 염가의 금액을 받을 경우 고유목적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셋째, 세법의 해석이 어려운 사례로서 예를 들어 주차장으로 사용되는 토지의 경우 교회당과 직접 연결되어 고유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비과세되지만, 주차장 면적이 연건평의 1/4을 초과하거나 교회에서 일정 거리(직선 300미터, 도보 600미터)를 벗어날 경우 판단의 문제가 발생하며 과세대상이 될 수 있다(지방세법 111조). 기타 본 칼럼에서는 지면 제한으로 충분히 소개할 수 없으나, 국가법령정보센터 웹사이트 『교회관련 판례』도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church)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언약에 따라, 말씀이 선포되며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성도들의 영적 신앙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의(義)를 구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코이노니아 나누기 위해 모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재산형성 자체가 교회의 목적이 될 수 없고, 과도한 욕심은 부패와 타락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중세시대 수도원이 과도하게 재산을 축적, 오히려 바른 신앙을 눈멀게 하는 사례가 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실무자나 지도자에게 있어, 교회 재산에 대해 바른 청지기적 자세와 통찰력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한 교회, 그리고 바른 재산형성과 세금납부 함께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금
    2022-10-14
  • [목회자칼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부름받고, 쓰임받고, 사랑받은 사람은 특징이 있다. 주님 손에 붙들려서 한 시대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은 나름대로 조건이 있다. 성경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친 사람인 다윗에게서 우리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왜 하필 다윗일까? 다윗의 그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었을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 주님의 눈에 띄었다. 다윗에게 주님의 시선이 머물렀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눈동자처럼 지켜주셨다. 주님의 마음에 쏙 들었다. 신약성경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였다(행13:22).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그를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중에 마음이 통하고, 마음이 편하고, 마음이 친하고, 마음이 즐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였다(시18:1). 하나님을 향하여 감히 사랑한다고 고백을 한 사람이 다윗이다. 평생에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었다(시27:4). 자기 삶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시대의 우울을 거절하고 새벽을 깨우듯이 그의 인생을 튜닝하고 연주하였다(시57:7~8). 무학이었던 다윗은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였고, 그가 악기를 연주할 때 뮤직 테라피, 음악 치료가 되어졌다(삼상16:23). 다윗은 하나님의 집, 성전을 짓기 위해 많이 준비한 사람이다(대상22:5). 그의 아들 솔로몬이 순적하게 성전을 완공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였다. 다윗은 자식농사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하였다. 다윗은 전쟁을 할 때 하나님께 물어보고 전쟁에 나아갔다(삼상30:8). 기분이나 감정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로 생활하였다.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다. 반면에 사울왕은 하나님께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기에 폐위를 당하였다(대상10:13~14). 사울왕의 범죄 행위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것이다. 기도를 쉬는 것이 죄이다. 기도를 쉬는 순간 마귀가 틈을 타기 때문이다(삼상12:2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다윗에게 기름 부은 이후로 다윗은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었다(삼상16:13). 성령보다 앞서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범죄 했을 때에도 “성신을 거두어 가지 마소서”라고 기도하였다(시51:11).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주께서 성신을 거두어 가시면 한 순간에 패가망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훼방하지 말고,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고,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된다. 다윗은 들판에서 아버지가 맡긴 양을 지킬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삼성17:34,37). 당면한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다. 사자나 곰의 발톱에서도 건지셨었은즉 골리앗의 손에서도 건져주실 줄을 믿었다. 다윗은 어릴 때 왕이 되려는 비전을 가진 적이 없었다. 다만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할 때에 주께서 부르시고 세우셨다. 미래를 꿈꾸는 몽상가가 아니라 현실에 주어진 사역에 성실할 때 더욱 큰일에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 받고 그때부터 만사형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극한의 어려움을 연속적으로 겪게 되었다. 사무엘상21장에서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골리앗의 고향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였다. 다윗은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며 미친체하며 살아나왔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피할길을 열어주신다. 그리고 다윗이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을 때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가 그에게로 400명이 모였고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삼상22:2). 그가 환난 당한 자들 400명과 함께 노숙할 때 거지 왕처럼 동거동락 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었고 헝그리 정신이 생겼다.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가 318명이었다(창14:14) 바울과 함께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헤쳐나간 사람이 276명이었다(행27:37). 어려울 때 한솥밥을 먹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끈끈한 정이 생기고 동지가 된다. 다윗이 순적하게 왕이 된 것이 아니다. 산전수전 겪으며 산수가 되고 10년의 피난생활이 그의 리더십을 탄탄하게 만들었다. 다윗은 끝까지 자기를 작은 자로 여겼다. 여인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고 노래할 때 사울왕은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지만, 다윗은 흥분하지 않았다(삼상18:7). 사울왕은 다윗을 묵상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하였다. 사울왕을 죽일수도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그를 살려주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지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의 죄를 지적하였고 다윗은 바로 회개하였다 (삼하12:13). 일국의 왕이 그 자리에서 체통도 없이 바로 회개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이 회개했을 때가 가장 용감했다. 회개하면 회복되고, 항복하면 행복하고, 해석이 되면 해결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실족하고, 실패한다.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실패를 했을 때 일을 망치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때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지막 기회이다. 실패하고 부끄러워도 회개하면 소망이 생긴다. 사람은 누구나 공과가 있다. 그러나 사람의 실수와 잘못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훨씬 크다. 다윗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완벽한 자가 아니라 치명적인 실수를 했음에도 회개하여 주께로부터 사함을 받았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자.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10-14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2)
    6.25 전쟁기에 유대인 군목이 부산에 왔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그가 밀턴 로젠(Milton J. Rosen)이라는 랍비였다. 그는 부산에 온 최초의 유대인 군목이었는데, 1906년 러시아가 통치하던 리투아니아(Lithuania)의 빌라(Vilna)에서 6남매 중 막내로 출생했다. 얼마 후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하여 시카고에 정착했다. 철저한 정통 유대교도였던 아버지는 큰 아들이 미국문화에 쉽게 적응하자 자녀들이 유대교 전통을 고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막내인 밀턴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밀턴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면서 토라와 탈무드를 배웠다. 그런데, 얼마 후 아버지는 폐렴으로 어머니도 건강을 잃고 사망하게 되자 밀턴은 예루살렘의 디스킨(Diskin) 고아원에서 양육을 받았고, 제1차 대전 후에는 주임 랍비였던 쿡(Kook)과 가족의 도움으로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밀턴이 14살 때였다. 유대인으로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거주한 관계로 그는 히브리어와 이디쉬(Yiddish)어, 아람어와 영어를 알게 되었다. ‘이디쉬어는 중앙 및 동부 유럽에서 사용되던 유대인들의 언어였다. 이런 지역에 살던 흩어진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이디쉬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뉴욕에서는 이디쉬어 일간 신문이 발행될 정도였다. 밀턴은 시카고의 해리슨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하였고, 1925년부터 29년까지는 시카고의 히브리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29년 랍비가 되었다. 후에는 메디슨의 위스칸신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학사학위(BA)를 받기도 했다. 곧 사라(Sarah)와 결혼했고, 이후 19년간 정통유대교 랍비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47년 아무런 훈련도 없이 비공식적인 요청으로 미육군 군목이 되었다. 밀턴의 아들 스탠리 로젠의 증언에 의하면 약 10분 정도의 군대식 경례법을 배웠을 뿐이라고 한다. 군목으로서의 첫 임지는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 브래그(Fort Bragg)였다. 이곳에서 장교이자 군목으로 활동하는데 필요한 교육을 받고 유대인 성직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본에 주둔한 미군 군목으로 배속되어 1948년 1월 일본 요꼬하마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에는 러시아와 나치독일을 피해 일본에 온 유대인들이 있어 이들과 접촉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면서 예배당(chapel)을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에서의 최초의 유대인 집회소(Jewish Chapel)였다. 그는 일본어를 익히면서 유대교를 알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에게도 설교하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일본에서 하나의 조직체를 구성하게 되는데, 그것이 일유회(日猶會, Japan-Israel Society)였다. 이렇듯 일본에서 군목으로 활동하면서도 이스라엘과 유대교를 소개하던 밀턴은 2년 5개월가량 일본에서 근무를 마치고 1950년 여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의 친구들과 군인들 민간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이 전역에서 38도 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한 것이다. 밀턴 로젠 군목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태평양 선상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 귀국선이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 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밀턴 로젠의 고국에서의 안식은 길지 못했다. 그는 곧 한국으로 돌아왔고, 앞서 소개 한 바처럼 한국 땅을 밟은 첫 유대인 군목이 되었다. 유대인 군목의 한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기 전에 유대인 군목 이야기가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을까? 밀턴 로젠은 자신의 일에 대해 과묵했고 자식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사망한 이후 가족들은 밀턴은 정통 유대인의 관점에서 일기를 썼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군목으로 일하는 동안 뉴욕에서 발간되던 이디쉬(Yiddish) 일간지인 Der Morgen Zhornal (Jewish Morning Herald)에 기고문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밀턴은 몇 번이나 연제했는지도, 그리고 기고문을 모아두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신문은 보관되지 않았으나 이 신문이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되어 미국 유대인 정기간행물 센터(American Jewish Periodical Center)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센터의 도움을 받아 신문을 열람하는 가운데 밀턴은 1950년 11월 10일 한국전쟁에 대한 첫 원고를 기고하였고, 1951년 3월 11일까지 19회 분의 원고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밀턴의 아들 스탠리 로젠은 한권의 책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한국에 온 미국인 랍비’(An American Rabb in Korea)라는 책이다. 필자는 미국 미시간 앤아버를 방문했던 2014년 9월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접하게 되어 약간 비싼 책이었으나 이 책을 샀고, 전쟁기 유대인 군목이 부산에 왔다는 사실을 알 게 된 것이다. 밀턴의 아들 스탠리 또한 정보장교로 한국에서 근무했고, 후일 내과의사가 되어 일리노이와 위스칸신주에서 활동했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10-1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