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2(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소강석칼럼] 상생과 화합의 꽃밭을 만들며
    저는 요즘 염증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작년에 고 문정남 장로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뒤통수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새에덴교회 개척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하신 문 장로님에 대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 제가 직접 상주가 되어 3일간 조문소를 지켰습니다. 그때 무리를 해서 그런지 뒤통수의 염증이 생기더니 사라진 듯하다가 재발하기를 몇 번 반복하면서 자그마치 세 번이나 수술을 했습니다. 뒤통수의 염증이 커질 때는 잠자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허리나 등에 욕창이 난 것도 아닌데 뒤통수 작은 염증 하나가 온몸을 얼마나 힘들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근래는 손톱을 너무 깊게 잘라가지고 염증이 생겨 통증이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손톱 하나도 이렇게 온몸에 고통을 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실 1, 2주만 고생하면 되는데 염증이 난 손톱이 왜 그렇게 다치고 또 다치는지... 오른손과 세게 부딪쳐 다치고,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다가 다시 다쳐 손톱과 살이 붙어 있는 부분이 완전히 벌어져서 얼마나 아렸는지 모릅니다. 엎친 데 덮쳐서 이번에는 코에 또 염증이 생겼습니다. 코 염증 정도야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시하고 놔뒀더니, 코가 딸기코가 되고 밤새 아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재훈 의료강도사님이 약을 잘 지어주어서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저는 작은 염증 하나가 온몸을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도가 넘는 스트레스로 몸의 면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몇 주간의 제 삶을 돌아보면 총회 선관위 일로 보통 신경을 많이 쓴 게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입니다. 소 목사님이 아니면 결코 이렇게 처리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정말 소 목사님의 지혜와 공명정대한 처사가 총회의 위기와 한국교회의 갈등을 중재하여 새 길을 열게 하였습니다”라고 칭찬과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남들은 그렇게 쉽게 말을 하지만 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신경 쓰고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자다가도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몸의 각 지체가 서로의 역할이 있기에 함께 돕고, 몸의 다른 기관이 아프면 다른 기관이 도와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말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때운다’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현재 우리 교계 상황을 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할 연합기관들이 여전히 분열되어 하나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이든 미움과 증오를 심으면 또 다른 미움과 증오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증오를 심으면 결국 그 조직도 나중에는 증오의 단체가 되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다가 분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과 화목을 심는 조직과 공동체는 또 다른 사랑과 화목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든, 총회를 섬기고 교계를 섬기든 언제나 사랑과 화목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의 작은 상처도 온몸을 이렇게 힘들게 하고 고통을 갖다주는데 하물며 우리 총회이겠습니까? 우리 교계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누가 뭐래도 미움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화목, 상생과 화합을 심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개척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분란이 일어나거나 분열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작은 열매를 보인 것처럼 앞으로도 저는 끝까지 교계에 상생과 화합을 심을 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미움과 증오의 가시덤불과 찔레가 가득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상생과 화합의 향기로운 꽃과 포도송이들이 가득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사랑과 화목의 꽃씨를 심으며 앞으로도 끝까지 상생과 화합의 꽃밭을 일구어 갈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2022-09-23
  • [성서연구] 버림받은 자의 기념비
    사무엘상 15장을 읽을 때마다 슬픔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했던 사람이 버림받는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버림받은 사람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었습니다. 그가 버림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아말렉 족속이 그들을 가로막아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모세는 두 손을 들었고,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싸웠고 승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을 진멸하겠다고 말씀하신 바 있었는데,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이 사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말렉을 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진멸하기는커녕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서 데려왔고, 수많은 짐승도 약탈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지 않는 사울에게 실망하셔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0~11절입니다. <10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사무엘은 슬픈 마음으로 사무엘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 사울 왕은 갈멜에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2절을 보면 <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울은 땅의 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땅에서는 그가 적의 왕을 사로잡고, 수많은 짐승을 약탈하여 대승을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영웅이 된 것처럼 보였고, 기념비를 세울 만 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일은 알지 못했습니다. 땅에서는 사울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실망하셨고, 그를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고, 그의 왕위를 다른 자에게 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세요. 사무엘상 15장 26~28절입니다.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것도 모른 채, 기념비를 만드는 사울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결국 그의 왕좌는 다윗에게 넘어갔습니다. 저는 한국교회도 지난 세월 동안 이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제법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교와 봉사에 힘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했을까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념비를 세우느라 바빴습니다. 성도가 좀 모이면 목회에 성공했다고 자부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음에도 자신이 아말렉에게 이긴 것처럼 도취된 사울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기념비를 세우듯이, 한국교회도 자기 교회를 자랑했습니다. 세간에서 자신의 교회를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에 우쭐했습니다. 방송에 설교를 송출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한때는 이것이 선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는 방송 설교도 하고 있다>고 과시하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교회들은 성도가 좀 모이면 거대한 교회와 수양관을 짓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은 박사학위 과정에 등록을 하고, 노회와 총회에서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저런 모임에서 이사장, 회장 한 두 자리를 하는 것도 순수한 섬김보다 기념비적 측면이 강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설교집이라도 몇 권 내지 않으면 명함을 내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슬픔을 느낍니다. 교세가 급속하게 위축되고 있고, 세상에서 비난받습니다. 교회들이 자신감을 잃고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실망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실망하셨을까 하여 크게 염려됩니다. 촛대를 옮기시려고 작정하신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기념비를 세우는 데 열심인 우리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념비를 세우는 게 아니라,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의 기념비들이 버림받은 자의 기념비가 되지 않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전적으로 겸손하게 순종하길 원합니다. 그게 살 길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09-23
  • [시사칼럼] “욕망”의 개혁과 재구성
    교회와 백화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제임스 스미스의 문제작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에 답이 있습니다. 바로 “욕망”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뚜렷합니다. ‘카푸어(car poor)’나 ‘영끌족’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전자는 좋은 차 사느라 가진 돈 다 써버리고 가난하게 사는 경우를, 후자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주택(주로 아파트)을 구매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신종 용어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기성세대 대부분이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그게 어때서?’라며 나름대로 만족감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기존의 언론에서 다소 부정적인 논조로 이러한 현상을 보도하는 이유는 이를 ‘욕심’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인데, 차라리 “욕망”의 발로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욕망”이라는 개념은 좋고 나쁨의 양단에서 일종의 왕복 진자 운동을 보여 왔습니다. 제임스 스미스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함께 연구한 기독교학자입니다. 서구권에서는 원래 욕망을 ‘결핍’을 전제로 다소 부정적으로, 즉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욕망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2-1981)은 인간이 이성의 주체라기보다 욕망의 주체이며, 그것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거울 이론)라고 주장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에 따르면 역사는 생산의 시대에서 소비의 시대로 넘어 왔으며, 이 새로운 시대의 핵심은 바로 “욕망”인데 ‘욕구’가 자연적 필요와 관련된다면 “욕망”은 그 너머에 있는 추상적인 어떤 개념이라 정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는 이미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코나투스(Conatus)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코나투스”라는 단어는 사도행전 14장 6절에도 등장합니다. 곧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에서 마지막 단어가 이에 해당합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현대는 아마도 그의 시대라고 불릴 것이라 극찬했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6)는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coupures)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통해 욕망을 아예 우주의 내재적 원리이자 그 운행을 관장하는 에너지라고 선포했습니다(안티 오이디푸스, 11). 이들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는 ‘나는 욕망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하는 셈입니다. 물론 들뢰즈는 욕망을 이렇게 능동적으로 보지 않고 수동적 종합으로 이해합니다만, 아무튼 우리는 이들 사상가들의 주장을 결코 폄훼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읽고 저마다의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염연히 욕망이 존재합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저마다 이런저런 욕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돈과 욕망의 포로, 그것이 타락이다”(김기석) 식의 고전적인 해석이 아니라 욕망 개념의 개혁을 통해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선한 기독교적 욕망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의외로 “욕망”이란 단어가 흔치 않습니다. 다만 그 앞에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요일 2:16)와 같이 다소 부정적인 수식어가 붙은 채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러나 일절의 욕망이 부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일절의 욕망이 부정하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욕망덩어리인 사람 모양으로 오셨겠습니까?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십계명 해설에서 “사랑의 정신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욕망은 우리 마음에서 축출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Inst. 2. 12). 신자는 마땅히 사랑에 합당한 “하나님 나라를” 욕망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욕망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욕망해야 하고, ‘예배를’ 욕망하고 ‘선행을’ 욕망하고 ‘지복(至福)’을 욕망해야 합니다. 현대 사상가들은 현실의 욕망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으나 바라는 신령한 이런 바들을 욕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욕망”은 ‘생각’과 달리 실천을 전제합니다. 가령 하나님 나라를 생각만 하고 정작 실천하려들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욕망의 개혁과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09-23
  • [은혜의말씀] 시내산 언약(출 19:1~6)
    반복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굽을 떠난 지 꼭 삼 개월이 되던 날 시내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리트”라고 합니다. 이 뜻은 ‘묶는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하나로 묶는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이 ‘시내산 언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맺으신 언약입니다. 언약은 본래 쌍방간의 합의하에 이루어진 약속입니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 은혜로 베풀에 주신 언약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일을 해나가고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4절에 나옵니다.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인도하였다’는 말은 강하신 하나님의 손길,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독수리 날개에 업혀 구원을 받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업혀 구원을 받았습니다. 2. 그런데 이 언약에도 순종이 필요합니다.(5절) 하나님은 이제 언약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아는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여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순종에는 엄청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1)내 소유가 되고(5절)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내 소유라고 특별하게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온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이스라엘을 가장 보배로운 소유로 삼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사 43:1) 여기서 ‘소유’라는 말은 보석 곧 귀중한 재산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집안에 있는 값비싼 보석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며, 그것을 특별한 기쁨으로 여기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이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2)제사장 나라가 되며(6절) 제사장은 사람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중보합니다. 축복을 빌어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나라로 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이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삼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벧전 2:9)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제 성도들이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누군가 축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거룩한 백성이 되리라(6절) ‘거룩’이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하게 되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거룩’이라는 개념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셔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또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며, 이 놀라운 복을 주시는 은혜를, 늘 찬송하며 살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09-23
  • [교회음악칼럼] 교회음악의 새로운 이해 2
    찬양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정의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방향을 맞추는 것이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앞서 강조한바 있지만 찬양의 사전적 정의는 칭찬하다, 갈채를 보내다, 존경 또는 인정을 표현하다, 말이나 노래로 높이다, 크게 보이게 하다, 영광을 돌리다, 즉 하나님을 최고로 높임을 이러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의를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두 가지 관점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로 우리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거나 혹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서 찬양하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가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칭찬하거나 혹은 크신 분으로 보이게끔 찬양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은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드릴수도 있고, 하나님에 관하여 다른 사람에게 표현함으로서 드려질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에 근거한 찬양의 특징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찬양은 활기찬 축제 분위기에서의 노래나 외침 또 말이나 악기연주 그리고 춤 등 다른 외적인 모습으로 외부로 표출되어야 하는 특이점이 있다. 구약 시편을 통해서 볼 때 이스라엘의 찬양과 경배는 매우 감정적이면서 열정적으로 소리를 높여서 거기에 다양한 악기들과 함께 드리는 모습을 많은 부분에서 보게 되는데 충분한 상상이 가능한 그림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왜 찬양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도 다시금 명확하게 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를 찬양할 지어다.(시150:1, 시150:6) 2.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시22:3) 3. 찬양은 영적 전쟁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즉 찬양 속에 힘이 있다는 말이다.(대하20장) 4.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시92:1) 5.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시48:1, 계4:11) 6. 우리를 창조한 이유가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렘13:11, 벧전2:9, 이43:21) 이처럼 성경은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하는지를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창조의 목적에 부합되게 거룩함과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행이도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찬양하고픈 마음을 넣어 두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양하는 것은 삶을 통해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끔 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이 얼마나 축복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음악칼럼
    2022-09-23
  • [목회자칼럼] 목회자의 중심잡기
    야외 활동하기 좋은 계절에 공원에 가면 이제 막 두발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이들을 종종 만납니다. 세발자전거를 탈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겨우 바퀴 하나만 떼어내도 앞으로 가는 것조차 힘겨워합니다. 잘 가다가 오른쪽으로 한번, 또 잘 가다가 왼쪽으로 한번, 수없이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배우는 것은 다름아닌 자전거의 가장 기본인 ‘중심잡기’입니다. 자전거 타기의 중심을 제대로 잡으면 속도, 방향 등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가장 기본적인 중심잡기를 잘 배워 놓으면 자전거를 탈 때마다 산들산들한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자전거를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유년기에 자전거를 통해 중심잡기를 배우듯, 우리 인생의 중요한 성장 지점마다 중심잡기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한참 자라야 하는 청소년 때는 공부와 놀이라는 두 중심을 잘 잡아야 하고, 청년 때는 비전과 현실이라는 두 중심을 잘 맞춰야 합니다. 어른이 되었다고 중심잡는 일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이라면 회사의 수익과 직원들의 복지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춰야 하고, 자녀를 키우는 엄마라면 자녀 양육에 있어서 훈계와 자유 사이를 조절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중심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성으로 중심을 잡고 있는 듯하다가도 세상의 작은 유혹이 오면 또 쉽게 균형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양 축을 든든히 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매일 조금씩 기울어지는 것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특히, 목회를 할 때는 사랑에도 균형을 잘 잡아야 됨을 느낍니다. 공의의 사랑과 아가페 사랑. 어떤 때는 아무 조건없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주다가도, 필요할 때는 공의의 사랑을 행해야 하는 것. 목회를 수십년 해도 사랑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매일 매일 지혜가 필요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중심잡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심잡기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를 꼽으라면 현대인들의 분주함을 들 수 있습니다. 분주함이란 일의 순서가 정해지지 않고 계획없는 일들이 몰려올 때, 이리저리 바쁘고 수선스러운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일이 아무리 많아도, 일의 중요도와 긴박함 등을 따져 우선순위를 정해서 처리하면 분주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현대인들이 사회적, 개인적 요인에도 오는 분주함들로 인해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사는, 그래서 중심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중심잡기가 힘든 이유는 묵상할 시간의 부족입니다. 자전거를 탈 때 중심을 잡기 위해 수십번의 넘어짐이라는 시행착오의 과정이 필요하듯, 인생에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묵상할 시간’을 통해 생각의 시행착오를 겪어내야 합니다. 어느 리서치기관에 조사에 따르면 현대인들이 휴대폰 하기, 미디어 보기 등 이런 행동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생각만 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아보았는데,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쁜 현대인들이 생각없이 주어진 대로 산다는 것이죠. 묵상없이, 생각할 시간이 없이 산다는 것은 결국 닥치는 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중심이 흐트러짐을 예고합니다. 만약, 내가 지금 묵상할 시간이 없이 분주하게 살고 있다면 나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첫째, 멈추어야 합니다. 일단 바쁜 것에서 멈추어야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멈추려고 마음은 먹어도 실행하려고 하면 잘 안됩니다. 불안하기 때문이죠. 그래도 나의 중심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는 일단 멈추어야 합니다. 둘째, 시끄러운 장소에서 벗어나 조용한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이 말은 비단 장소적인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 내면을 정리정돈 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육적으로는 평안한 쉼, 영적으로는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중심잡기의 또 다른 표현은 기본으로 돌아가기입니다. 육체의 기본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고, 영적인 기본은 예배, 말씀, 기도입니다. 넷째, 우선순위를 정해서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분주함이 있고, 쉼없이 일들을 해나가면 균형을 잃고 탈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다시 일어나 우선순위를 정하고 결단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넘어졌다고 주저앉거나 머물러서 좌절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다시 결단하며 중심을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나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중심을 잡고 가고 있는가요? 만약, 내 인생에 빨간불이 켜졌다면, 다시 중심을 바로 잡고 기본부터 다시 시작하길 바랍니다. 그러다보면 시원한 봄날, 아주 능숙하게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을 조화롭고 균형있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9-23
  • [부산기독교이야기] 전쟁기 부산 교계: 부산에 온 유대인 군목
    6.25 전쟁 중 유대인 군목이 참전했고, 그 유대인이 부산에 왔고 일시 부산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한국과 유대인, 혹은 한국에서의 유대인의 존재는 흔치 않았다. 유대인 군목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국에 온 유대인 몇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에 온 첫 유대인은 오페르트였다. ‘오페르트도굴 사건’으로 알려진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 1832-1903)는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1868년(고종 5년) 홍콩으로 건너가 사업을 하던 중 사업이 어렵게 되자 조선으로 관심을 돌리고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통상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상하이 미국 영사관에 근무한 바 있는 미국인 프레더릭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를 자본주로 하고,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Stanislas Féron, 1827-1903) 신부를 통역관으로 고용하고 차이나 호(號)에 백인 8명, 말레이인 20명, 조선 천주교도 몇 명, 청국인 승무원 약 100여 명을 태우고 상하이를 떠나 충청도 홍주목(洪州牧) 행담도(行擔島)에 와서 인접한 덕산군 가동(伽洞, 지금의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했으나 주민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1868년의 일이었다. 이 도굴 사건의 오페르트는 우리나라에 온 첫 유대인이었다. 두 번째 우리니라에 온 유대인은 첫 개신교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KarlGuetzlaff, 1803-1851)였다. 독일 루터교 배경의 화란선교회 소속 귀츨라프는 인도네시아 말레시아 태국 중국 등에서 일했던 선교사인데, 그는 태국에서 일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그가 중국에서 사역하는 기간인 1832년 7월 말 고대도에 상륙하여 최초로 한글 주기도문을 번역하였고, 한글의 우수성을 독일어와 영어로 서양에 소개했다. 또 최초로 서양 감자를 심고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던 이가 귀츨라프였다. 한국에 온 3번째 유대인은 시편 번역으로 유명한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였다. 한국이름으로는 피득(彼得)으로 불렸다.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71년 우크라이나에서 정통파 유대인(Orthodox Jew) 가정에서 출생한 그는 히브리어 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히브리어에 능통하였다. 그가 직장을 얻기 위해 24세 때인 1895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화란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고 개신교도가 되었고,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 선교사가 되었다. 조선어를 공부한지 3년 만인 1898년 62편의 시편(저주시를 제외한)을 한글로 번역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시편촬요’였다. 우리나라 교회 역사상 최초의 구약성경 번역본이었다. 후에도 구약성경 번역에도 기여하여 최초의 구약 역본인 ‘구약젼셔(1911년)’의 출판에 도움을 주었고, 후에는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개역 구약성경(1938)’ 출간에도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다. 그가 지은 찬송이 지금의 찬송가 75장 ‘주여 우리 무리를’과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이다. 히브리어가 능통한 유대인을 통해 한국어 성경번역에 기여하게 하신 것이다. 그는 70세에 한국에서 은퇴한 이후 미국 LA 인근 파사데나 소재 은퇴 선교사 주거 시설에서 여생을 보내고 1958년 87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곳의 공용묘지(Mountain View Cemetery)에 안장되었다. 그 외에도 한국과 유대인과의 교류가 없지 않았을 것이지만 6.25전 쟁기 정통 유대인 랍비 군목이 있었고 부산에서 활동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미군에 속했던 밀턴 로젠(Milton J. Rosen)이었다. 미국에서 군목 제도는 1775년 7월 29일 대륙의회가 군목협의회를 조직하고 미국성공회의 샤무엘 프로보스트(Samuel Provoost, 1742-1815)를 첫 군목으로 임명했는데, 이것이 군목 제도의 시작인데, 미국의 독립 이전 해였다. 유대인 랍비가 군목으로 복무하기 시작한 때는 남북전쟁기였다고 한다. 이때 유대인도 군목으로 근무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고, 여성군목과 흑인군목도 이때 처음으로 임관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거의 90년 만인 2019년부터 유대인 군목의 보무를 허락했다고 한다. 제1차 대전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을 위해 싸웠고, 수십명의 랍비들이 종군했는데,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모든 유대인들이 공공생활에서 배제되고 추방된지 90여 년 만에 다시 유대인 군목을 허용한 것이다. 배경 이야기가 길었다. 다음 호에 유대인 군목 밀턴 로젠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09-23
  • [서임중칼럼] 광야의 은총
    역사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고난의 날을 경험하지 않은 자는 없다. 그래서 苦尽甘来(고진감래)라는 말이 명구가 된다. 고진감래의 반대어로는 興尽悲来(흥진비래), 곧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뜻으로 세상은 돌고 돌아 순환됨을 이르는 말이 있다. 하여 인생을 塞翁之馬(새옹지마)라고들 한다. 전국 교회의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인도할 때마다 회중에게 묻는 말이 있다. “제가 고생한 사람 같이 보입니까?” 그럴 때면 거의 이구동성 ‘아주 귀한 가정에서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자란 사람 같다’고들 한다. 그러나 둘째 날 저녁에 필자의 간증을 들으면 여출일구 “아이구 세상에나, 아이구 세상에”를 연발하며 필자의 지난 고생에 감정이입이 되어 함께 아파한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이렇게 행복한 삶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필자에게 모두 진심의 박수를 보낸다. 부흥사경회는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역이 더욱 보람된 것은 고난가운데 힘들고 지쳐 좌절과 우울증으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소망을 갖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 소성하는 사람은 목사나 성도나 차등이 없다. 고희의 세월을 걷는 부흥회 인도가 때로는 지치고 일어서기 벅찬 시간도 있다. 그러나 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복되는 양떼들을 보며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 오늘도 감사의 옷깃을 여미며 말씀사역을 현재진행형으로 써간다. ‘광야 같은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곧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삶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광야(曠野)’라는 원문은 ,מִדְבָּר(미드바르)’이다. 그것의 헬라어는 ἔρημός(에레모스)’로 번역이 되었다. 넓은 들판으로서 거친 땅, 빈들, 사막 등의 여러 가지로도 번역되는데 불모(不毛)지인 ‘씨 뿌리지 못하는 땅(렘 2:2)’, ‘사람 없는 땅(욥 38:26)’, ‘짐승이 부르짖는 황무지(신 32:10)’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사람이 살기 어려운 상황을 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무 인적의 광야가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을 뵈옵는 장소이기도 했다. 예수님도, 사도 바울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 시험을 받으셨다. 나아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다. 이 같은 광야의 시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피할 것만은 결코 아닌 필요한 시간이다. 이 광야의 시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더 깊이 있는 삶을 위하여는 반드시 이겨내야 하는 교훈임을 깨닫게 된다. 사노라면 오늘의 삶이 광야 같아서 우리를 힘들게도 한다. 육신의 아픔도, 일상생활의 어려움도, 인간관계의 모든 범사도 때로는 우리를 주저앉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우리를 거꾸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으로 가는 길목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의 고난인 광야의 시간을 만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인생에 필요한 광야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깨달음의 은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의 시간도 ‘이것은 내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광야의 시간’임을 깨닫고 극복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극복하는 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눈으로 가능하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고 말씀하셨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 산맥에서 자라는 장미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 최상의 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밤중에 따는 장미를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격과 신앙의 향기도 극한 고난의 밤, 절망과 아픔의 광야의 시간을 통과하며 발산되는 것이다. 같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한 사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어두운 벽을 바라본다. 광야의 시간에서도 희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성공자가 된다. 보리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이나 열린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기는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 없고 겨우 80알 또는 90알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농부는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는 보리밟기를 한다. 이 때 허약한 싹들이 모두 꺾이고 다시 일어나는 싹들은 밟히기 전보다 훨씬 강한 줄기가 되어 수백 알이 달리는 보리알도 넉넉히 받쳐 결실한다고 한다. 요셉은 13년의 광야 같은 시간도 포기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았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센 믿음으로 나아가 애굽의 위대한 총리가 되었고 축복의 반열에 섰다. 탈무드 속의 이야기 한 토막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가고 있었다. 날씨는 타는 듯 뜨거웠고 길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 저는 힘이 다 빠진데다가 목이 타서 죽겠어요.” “아들아 용기를 내어라. 우리의 선조들도 이 고통의 길을 다 걸어갔단다. 이제 곧 마을이 나타날 거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이때 그들의 눈앞에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아버지, 저것 보세요, 우리 선조들도 여기서 모두 죽어갔지 않아요. 도저히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아들아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은 이 근방에 동네가 있다는 표시다.”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거기에 희망도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다. 밤도 사경이면 아침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겨울에 제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제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제비는 다시 돌아온다. 한겨울 앙상한 가로수를 보고 그 나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봄이 오면 다시 싹이 나고 푸른 나무가 되기 때문이다. 안개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좋은 섬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고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변함없이 대지에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사노라면 광야에 들어서는 시간도 있다. 어떤 이는 밤 4경 고난의 막바지에 이르게 될 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는 곧 날이 밝고 해가 뜬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겨야 한다. 고난이 닥칠 때 절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일생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광야의 은총’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서임중 칼럼
    2022-09-08
  • [성서연구]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목회자로 살면서 요즘처럼 무기력함을 느낀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여 앉으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한국교회의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속한 교단의 경우 매년 수만 명씩 교세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2030년에는 무척 어려워질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일신하고 끌고 나가야 할 교회들이 지속적인 문제를 야기하여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 예배 출석 회복이 요원합니다. 코로나 이전의 절반 수준에 머무는 교회가 아직 많습니다. 성도들의 신앙과 삶이 세속화되어 신앙에 온 마음을 두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장식품 정도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런 우리에게 본문은 근본적인 해결의 방안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람은 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이 사람은 청년이었고, 부자였고, 신분이 높은 관원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세속적 성취에만 도취된 저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생에 관심을 가진 고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의 결과는 실망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근심하며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가 좌절한 결정적 이유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0~2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요구를 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구제가 소중함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을 비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럴만도 했습니다. 젊고, 부자고, 신분도 높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질 만 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완전히 비우길 원하셨습니다. 소유를 팔아 구제함으로써 부자라는 자부심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세상의 관원의 삶을 내려 놓으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크게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26절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답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비우도록 요구하신 이유는 사람의 방법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언제나 자신이 주어로 등장합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도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또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라고 합니다.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인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난관에 봉착한 개인과 가정과 교회에 해결책입니다. 며칠 전 새벽기기도 시간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화된 교회 생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다시 힘을 내어 전진하길 원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09-08
  • [시사칼럼] 공정의 추석
    어김없이 찾아온 반가운 명절, 추석입니다. 본래 우리네 추석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시점에 잘 먹고 잘 입고 잘 노는 절기였지만,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에게는 지치고 힘이 드는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에서 획기적인 ‘추석 차례상 표준안’을 내놓았습니다. 중요한 줄로만 여겼던 ‘홍동백서(紅東白西)’나 ‘조율이시(棗栗梨枾)’는 원래 예법 관련 문헌에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다섯 가지 기본적인 음식과 네 가지 과실만 차려도 충분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예법을 다루는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으니, 앞으로 상당한 변화가 뒤따르리라 생각합니다. 추석과 관련해서 “기준”을 거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도 해제되었으니 이번 명절은 모처럼 온 가족이 함께 한 자리에 모일 수 있겠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될 터인데, 의외로 정치적인 대화가 많이 오간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번 추석에 가장 많이 언급될 말들 중 하나가 “공정”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저마다 “공정”을 외쳤고, 이제 백여 일이 지나 그 평가가 이루어질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공정”이 “기준”과 관련 있습니다. 일상에서 언제 “공정”이란 말을 쓰나요? ‘공정한 심판’, ‘공정한 거래’, ‘공정한 경쟁’ 등인데, 모두 “기준”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영역에서 기준이 정해져 있으면, 그 영역에 속하는 누구에게나 형평성 있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운동경기를 예로 든다면, 친정팀에게는 유리하게 원정팀에게는 불리하게 동일한 규칙을 달리 적용한다면 그 경기는 공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공정”은 “공평(公平)”이나 “형평(衡平)”과는 사뭇 다른 개념입니다. 일단 “평(平)”자가 들어가는 말은 ‘같게 하다, 고르게 하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기준”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공정은 주어진 기준을 전제로 하지만 공평은 그 기준 자체가 불합리하다면 이를 문제 삼는 측면이 있습니다. 같은 기준 하에서 똑같이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정”하다고 할 수 있으나, 그 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어 같은 기회를 주어도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된다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근자에 펴낸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2020)이 이러한 측면을 잘 설명합니다. 서울대의 신재용 교수 또한 『공정한 보상』(2021)에서 비슷한 취지로 공정은 ‘능력주의(Meritocracy)’로 빠질 위험성을 안고 있으며, 단적으로 ‘공정한 불공평’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적인 요소보다 외적인 공정 자체를 더 강조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MZ 세대’가 대표적인데, 이른바 ‘인국공 사건’이나 ‘반페미 논쟁’에서 이들은 얼마나 공정을 중요시하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은 어떨까요? 공정입니까, 공평입니까? 정답은 “공의(체데크)”로, 양자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성경적 공의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곡식 되와 저울 추 그리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명령인데(신 25:13; 잠 20:10),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공정의 원칙을 선언한 말씀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이들을 돌보라는 명령인데(출 22:21-22; 신 24:19-21),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경쟁력이 없는 이들을 배려하려는 소수자 보호의 원칙을 선언한 말씀들입니다. 이러한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공의로 이루어진 신적 질서가 깨어질 때, 이를 복구하기 위한 조치가 바로 성경적 “정의(미쉬파트)”입니다. 재판관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사사(Judges)”가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 말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추석과 비슷한 성질을 띠는 성경의 초막절에 관해 신명기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신 16:14)라는 구절을 부가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공정의 원칙을 강조해 왔더라도, 명절만은 공평의 원칙을 잊지 말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번 추석에 우리 신앙인들만이라도 공정과 공평을 함께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대화만 할 게 아니라 십시일반 가족들이 힘을 모아 어려운 이웃이나 먼 나라들을 위해 성경적 공의를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이번 추석은 공평이 뒷받침하는 공정이 말해지고 행해지는 뜻 깊은 명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09-0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