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2-02(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 칼럼 기사

  • [시사칼럼] 세습사회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해져버린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세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을 의미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 중의 한 군데가 세습 문제 때문에 얼마나 큰 물의(物議)를 빚고 있는지를 목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 작업장에서 큰 사고 하나가 발생하기 전에 동종의 크고 작은 사고가 수십 · 수백 번 이미 발생한다는 ‘하인리히 법칙(1 : 29 : 300)’은 산업재해 분야의 고전이지만 인간사회의 여타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유독 그 교회만 세습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교계 전반에 걸쳐 아름답지 못한 세습이 만연하다가 마침내 교회를 넘어서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일반사회는 과연 “세습”으로부터 자유로울까요? 교회에서조차 세습이 문제가 되는 시대라면(1:), 이미 그 사회에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습 현상이 많은 영역에서(29 : 300) 횡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최근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선(人選)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각료 후보자들 하마평이 오르내리면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사실들이 있지요. 바로 ‘자녀’ 문제입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의사 출신의 한 인사는 자질 논란도 일었지만 결정적으로 자녀의 이례적인 의대 편입 및 자신이 병원장으로 근무하던 곳에서 인턴 과정을 거친 점 등이 집중적인 성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외교부 수장으로 거론되는 인물 역시 한 자녀가 이중국적을 가진 채로 특례입학을 했다는 문제 등이 불거져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판사 출신인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 역시 슬하의 아들과 딸이 ‘아빠 찬스’를 십분 활용해서 자신과 관련 있는 기관이나 회사에서 인턴 활동을 하거나 아예 취직의 기회를 얻지 않았나 하는 거센 의구심에 직면했습니다. 이러니 앞서 유사한 문제로 실각하거나 처벌을 받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은 ‘들킨 죄’밖에 없다는 항변을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유사한 사례들을 전수(全數) 조사해 보자는 파격적이지만 메아리 없는 제안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영국의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21세기 자본』(2014)에서 이미 현 시대를 ‘세습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 시대로 규정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올 ‘세습사회’를 경고한 바 있습니다. 한국도 얼마 전 한 잡지에 “우리는 ‘세습사회’에 살고 있다”는 제목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김정헌, 2020. 2). 그렇다면 어떤 “세습”일까요? “한편에서는 부모가 사교육, 인맥, 문화자본 등을 통해 자식에게 학벌과 일자리를 물려주는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손쉬운 계층의 대물림이 심화되고 있다. 자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바야흐로 ‘상속의 시간’ 곧 ‘부동산 세습사회’가 다가오고 있다.”(안선희, 2020. 10) 현대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세습은 이와 같이 전(全)방위적입니다. 사회 계층에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일대학교의 대니얼 마코비츠(Daniel Markovits)는 “엘리트 세습”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귀족주의(A New Aristocracy)가 중산층을 붕괴시킬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반면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세습이다!”라고 일갈하면서 한국은 중산층이 자신의 지위를 자녀에게 세습하려 한다는 견해도 등장했습니다(조귀동, 『세습중산층사회』) “세습”이 무조건 악하다는 명제는 항상 옳지만은 않습니다. “3대 째”라는 말만 검색해도 “3대 째 금하칠보 장인”, “3대 째 화살 만드는 가족” 등 “세습(?)”을 칭송하는 많은 기사를 찾을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4대 째 한지 명인”, “4대 째 나침반 장인” 그리고 “5대 째 옹기 장인”은 어떻습니까? 이런 세습은 재산과 권세가 아니라 가난과 희생을 수반합니다. 따라서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동기에서, 타인이나 공동체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런 세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세습”이 있었습니다. 귀족사회였으니 계층의 세습은 당연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고넬료(Cornelius)”(행 10:1)나 “글라우디오(Claudius)”(행 11:28, 23:26)는 당대 최고의 로마 귀족 가문들이었습니다. 계층뿐만 아니라 신분을 세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직전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라고 하지 않았던가요?(요 18:13) 하지만 예수께서 질책하셨던 세습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도 세습을 하셨습니다. 요셉 대신 목수로서 가계를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세습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까?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04-29
  • [은혜의말씀] 순종의 첫 걸음(출4:18~31)
    드디어 모세는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첫째는, 장인의 허락을 받게 하십니다.(18절) 그리고 둘째는, 모세의 마음에 과거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십니다.(19절) 우리도 간혹 과거의 상처와 실패의 늪에 빠져, 영적 침체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때문에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두려움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회복의 날개를 폅시다. 모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했습니다.(20절) 사실 이 지팡이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칠 때 들고 다녔던 마른 막대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그 지팡이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질 것입니다. 지팡이 같은 우리도 하나님께 드려지면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광야의 한 숙소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입니까?(24-26절) 할례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십보라가 급히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이루어야 할 사람입니다. 지도자가 될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채,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명보다 중요한 것은 거룩입니다. 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으로 가능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요일 1:7) 예수님의 보혈로 과거의 모든 아픔과 상처, 모든 은밀한 죄를 해결하고, 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걷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이 일 때문에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은 미디안으로 돌아가고, 모세는 혼자 애굽으로 갑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닙니다. 모세가 애굽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맞이하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그리고 어디 아론만 모세와 동행했습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한시도 모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3:12) 사명을 향해 가는 길은 그렇게 외로운 길이 아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길을 걸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사직동 모든 성도님들이, 순종의 첫걸음을 내딛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04-29
  • [교회와세금] 교회의 법인세 납부와 면세 기준
    소득세와 법인세는 일정 과세기간 발생한 소득에 대해 부과하는 조세이다. 또한 통상 개인에 부과하는 세금을 소득세(income tax), 법인에 부과하는 세금을 법인세(corporation tax)라 부른다. 2020년 우리나라의 법인세 징수액은 총55.5조원이다. COVID-19의 상황 속 전년대비 16.7조원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득세 93.1조원과 더불어 국세수입의 52.0%에 이를 정도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법인세 항목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회계실무에 적용할 경우, 세금을 납부해야 할 경우와 그렇지 않음이 분명히 나뉘어짐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행세법은 교회와 같은 비영리법인의 경우, 고유목적의 활동과정에서 생긴 소득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있다. 즉 교회 고유의 예배 활동과정에서 성도들이 낸 헌금이나 헌물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 이는 교회 자체가 수익사업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전반에 유익을 주는 공익적 성격의 기관으로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교회가 이러한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신고절차를 숙지하고, 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행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국세기본법(제13조)에 따라 교회 설립시 관할 세무서에 신고를 하고, 고유번호 등록증을 교부 받아야 한다. 성도에 의한 헌금 수입은 과세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성도들이 헌금을 하고 소득세법에 따라 연말정산 등을 위해 기부금(contribution) 발행 신청을 한 경우, 반드시 그 영수증 내역을 다음연도 6월까지 관할 세무서에 신고를 하고, 관련 자료를 5년간 보관하여야 한다. 둘째, 교회의 고유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취득한 자산은 3년 이상 고유목적에 맞게 사용하여야 한다. 만약 동 기간 내에 자산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 경우 과세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특히 소급하여 취득세를 납부하거나 처분시 양도차액 소득에 대해 세금을 납부하여야 한다. 셋째, 교회가 만약 수익사업(부동산임대 등)을 하는 경우 사업자등록증을 교부 받아야 한다. 사업자등록증은 부가가치세가 과세되는 일반 사업자와 면세사업자로 구분되며, 고유번호 등록증은 부가가치세 납세의무가 없는 사업자에게 과세자료의 효율적 처리를 위하여 고유등록번호를 부여하는 것으로 수익사업이 없는 교회는 이에 해당한다. 넷째, 비영리법인의 수익사업은 제조업, 건설업, 도소매업, 부동산 및 서비스업 사업 중 수익이 발생하는 것으로, 교회에서도 이러한 사업을 하거나 고유 목적활동에서 벗어난 경우 법인세를 납부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유료 형태의 카페, 학사관, 선교원, 기도원 운영 등은 그 대상이 될 소지가 있다. 즉 이 경우 교회도 수익이 발생하면 세금을 납부하여야 함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즉 현행세법은 교회의 법인세에 대해, 고유목적 활동과정에서 발생한 헌금수입에 대해서는 비과세를 인정하면서도 자료신고를 요구하고, 또 수익사업에 대해서는 세금납부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church)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그 언약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신앙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힘을 쓰고, 또 성례전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의 재정회계 담당자 및 지도자는 그 운영을 맡은 청지기로서, 현행세법을 포함 국가법에도 내용을 잘 숙지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소홀함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문의: sblee6@hanmail.net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금
    2022-04-29
  • [목회자칼럼] 기도와 회복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단번에 알 수가 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므로 가장 모범적인 기도이며 예수님의 교훈이 농축되어 있는 말씀이다. 주기도문은 생일이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나 전쟁터에서나 잔칫집에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기도이다. 주기도문을 통하여 회복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하늘에 계신”은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가 바다 끝에 자리를 펼지라도 주께서 거기 함께 계시며 내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주님은 나를 굽어보신다. 보름달은 부산에서도 보이고 서울에서도 보인다. 인공위성이 하늘에 떠 있으면 GPS기능으로 온 땅을 커버할 수가 있다. 이 땅에 계신 육신의 아버지는 소통이 안될 수도 있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라도, 어디서라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다. 핸드폰은 통화중일 때도 있지만 헤븐폰은 걸면 걸린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달이 온 땅을 비추이듯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아니고 나를 가까이 지켜 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은 주님과 나와의 거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라는 말은 울, 울타리가 되시고 보호막이 되시는 분이시다. 우리나라 말 중에 “우리”라는 말이 참 좋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듯이 너와 나 사이는 남이 아닌 가까운 사이를 말한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우리 하나님이 되시니 공동체적인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된다. “아버지여”는 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모든 인간관계의 원점은 아버지이다. 부부, 부자, 부녀관계... 눅15장, 탕자의 비유에는 탕자의 엄마, 이모, 누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 사회의 상속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 아버지는 상속권을 물려줄 수 있는 분이다. 그래서 “아버님이 누구시니?”는 중요하다. 왕대밭에 왕대나고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상속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아버지여”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기뻐하신다. 어느 교회의 평생 구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가정을 행복하게, 교회를 건강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인격을 향기롭게”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공이 아니고 성결이다. 가정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고 거룩이다. 이 기도는 거룩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룩을 회복하면 주께서도 나를 마음껏 들어쓰신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나라가 회복되어야 된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제이다. 정권의 힘이 무섭다. 대통령이 바뀌면 다 바뀐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람이 1만5천명이라고 한다. 왕이 덕이 있으면 백성들이 태평성대하고 왕이 복이 없으면 흉년이나 홍수나 염병이나 대재앙이 임한다. 생사화복,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왕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구국기도를 해야 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실 때가 가장 안전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가 내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심을 살피고 그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기도는 내가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뜻을 묵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다. 정으로 살지말고 뜻으로 살아야 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회복해야 된다. “오늘”은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우리 앞에는 어려움이 있다. 내일 일을 알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이 구원의 날이고 지금이 은혜의 때이다. 시간을 회복해야 된다. 하루를 천년 같이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이다. 내가 오늘 누구를 만나거나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것은 일용할 양식이다. 하루 삼시세끼면 필요충분완전하다. 욕심을 내어서 만나를 많이 거두어 들이면 썩었다. 영광의 주께서는 날마다 때마다 나의 필요를 아시고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이다.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는 빠삐용신앙이다. 빠지지도 말고 삐지지도 말고 용서하는 것이다. 분노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요셉처럼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다. 감정선을 회복하는 것이다. 분노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사랑과 용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주를 믿는 자는 시험을 감당하고 환난을 벗어나고 피할길을 열어 주신다. 시험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시험에 퐁당 빠지는 것이 아니고 건짐 받고, 구원받는 것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는 죄악이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시다.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는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4-29
  • [부산기독교이야기] 마리안 앤더슨의 부산공연
    전화의 파도가 휩쓸고 간 피난민의 도시 부산에서 미국의 유명한 흑인가수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1993)의 공연이 있었다. 휴전을 2달가량 앞둔 1953년 5월 28일이었다(강인숙은 이때가 1952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인문학자의 6.25』, 180쪽). 미8군의 요청으로 마리안 앤더슨은 피아니스트 후란츠 루프(Franz Ruff)와 함께 일본을 경유하여 내한하였고, 이날 대청동 제3육군병원 앞 뜰 야외 곧, 지금의 부산의 남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한국음악협회 주최로 앤더슨의 공개공연이 펼쳐졌다. 어수선한 피난지 부산에서 마땅한 공연장을 찾지 못해 초등학교가 인접해 있는 가설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공연은 오후 6시 시작되었다. 이날 공연은 전화로 지친 고난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날 병원 야외에 설치한 가설무대에서 진행된 무료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는 무려 1만여 명에 달했고 대청동, 보수동 거리를 매운 인파는 발 디딜 여지도 없었다고 하니 이날의 열화 같은 성원을 헤아릴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콘트랄토 앤더슨은 인종차별이 심하던 1800년대 말 미국 필리델피아에서 출생하였고,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교회에 다니며 6살 때부터 성가대에서 활동하며 음악성을 키웠다.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음악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28세 때는 300여명의 기라성 같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자로 뽑혔고, 성악가의 길을 가게 된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거절당한 그는 주린 채로 무대에 서기도 했고, 호텔에서 투숙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워싱턴의 컨스티튜션 홀에서 리사이틀을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흑인이기에 연주장 임대가 취소된 일도 있었다. 이 때 앤더슨은 항의의 표로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연주를 강행 했을 때 무려 7만 5천명의 청중이 운집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처지를 딛고 일어선 그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성악가였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앤더슨을 가리켜 “100년에 한 명 나올 수 있는 성악가”라고 극찬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와 영국 여왕을 위한 독창회를 가질 정도로 국가적인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저명한 성악가가 1953년 대청동, 보수동 거리에서 1만 명을 앞에 두고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던 일은 전쟁기 부산에서의 감동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그가 불렀던 노래가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두곡은 알려져 있는데, 한 곡은 지금 찬송가 372장에 편집되어 있는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Nobody Knows’ 이고, 다른 한 곡이 ‘깊은 강 Deep River’이었다. 어디서든 흑인영가를 즐겨 불렀던 그는 고난의 현장, 전쟁의 아픔을 안고 하루를 마감하는 부산시민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노래로 대신했던 것이다. 이 두 노래는 앤더슨이 불러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흑인영가 가운데 하나였다.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황폐한 거리에 울려 퍼졌던 이 노래가 지금도 우리 가슴을 감동으로 채워 준다. 이 노래는 세계적인 가수가 불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 노래 자체가 앤더슨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고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몇 분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다시 부른 노래가 ‘깊은 강’이었다. “깊은 강, 내 집은 저편 요단강 너머에 있네. 주여, 저 강을 건너 그리운 땅으로 가고 싶네.” 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고난의 현실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으로 가고 싶다는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였다. 가사나 곡은 슬픔을 당한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였다. 이날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다. 어떤 기자가 마리안 앤더슨에게 그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날이 언제였는지를 물었을 때 “나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의 집 빨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던 그 날이었습니다.” 그 때가 공연료를 처음 받았을 때였다고 한다. 흑인이라는 멸시와 가난, 인종차별의 아픔을 겪어왔기에 그의 노래 ‘깊은 강’은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위안을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리안 앤더슨은 1958년 10월 다시 한국을 찾았고 그 때는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공연장이었던 이화여전 강당에서 노래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감동의 무대였고 앵콜 송으로 ‘아베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앤더슨은 1993년에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오피니언
    • 칼럼
    • 부산기독교이야기
    2022-04-29
  • [성서연구] 십자가 – 거꾸로 보기
    물구나무서기를 해 보셨지요? 아니면 고개를 숙여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세상이 거꾸로 보입니다. 거꾸로 보는 순간 세상이 새롭게 보이고, 새로운 안목이 생깁니다. 변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환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기를 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합니다. 시각과 생각이 변하면 그는 새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거꾸로 보게 만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기존의 질서를 반대로 뒤집었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아진 곳입니다. 가장 강한 분이 가장 약해진 곳입니다. 또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죄수가 매달리는 형틀인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 붙인 것도 역설입니다. 왕은 가장 높은 존재인데, 가장 낮은 자가 매달리는 형틀에 붙었으니, 이것도 역설입니다. 죄수가 왕이라니, 또 진정한 왕이 죄수라니, 십자가는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습니다. 또 십자가는 본래 치욕적 형틀이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되어 구원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배당 첨탑을 장식한 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가장 부끄러운 형틀이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갈라디아 6장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십자가에서는 죄인이 의인이 되고, 멸망할 자가 영생을 얻고, 높았던 자가 낮아지고, 낮았던 자가 높아집니다. 세상이 십자가에서 뒤집힙니다. 세례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찾아간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뒤집기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입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교인과 성도가 구분됩니다. 교인은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함으로써 그는 거꾸로 뒤집혔습니다. 과거에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이제는 하찮은 것이 되었습니다. 과거에 하찮게 여기던 것이 이제는 소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됩니다. 이에 대해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뒤집힌 사람, 그래서 세상을 거꾸로 보게 된 사람 중에 바울 사도가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고, 과거에 핍박하던 주 예수님을 삶의 모든 것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런 고백이 빌립보서 3장 7~8절에 나오는데, 『쉬운성경』으로 적어드립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여전히 세상을 거꾸로 보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는 대로, 죄인이었을 때 보던 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거꾸로 보기를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복음 때문에 고난 당하면 오히려 기뻐하고, 사람들이 칭찬하면 오히려 불편하게 여기고,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섬김으로 섬김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르게 보는 것, 거꾸로 보는 것, 뒤집어 보는 것, 그리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에 성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성서연구
    2022-04-12
  • [소강석칼럼] 코로나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당신에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너만이 아니다 / 눈보라가 치고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날 허리가 부러지는 것도 너뿐 아니지 / 거센 눈보라와 칼바람에 마디마디가 꺾이고 찢겨질 때가 오면 / 나도 그때 상한 갈대가 되어 강바람에 쓰러지리니 /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그냥 서 있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닌가 / 너도 나도 살아 있기에 바람에 흔들리며 상한 갈대가 되는 거지.” 이는 제가 한겨울에 갈대밭을 거닐며 쓴 ‘갈대 앞에서’라는 시입니다. 갈대가 되었건 억새가 되었건 푸르른 날 하늘을 향하여 칼을 갈기도 하고, 갈바람에 춤을 추기도 하고, 눈보라 속에서 허리가 꺾이고 백설에 자취를 감춘다 할지라도, 바람에 흔들리며 춤을 추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기만 합니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죽은 것입니다. 상처 받지 않는 것들도 죽은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예측에 의하면 오미크론 확진자가 하루 60만이 넘는 숫자로 정점을 찍고 이제 조금씩 감소세로 간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20만~30만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여전히 코로나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이미 코로나 확진을 받아 치료를 받았다 한들 항체가 100% 형성된다는 보장도 없고, 또 항체가 형성이 되어도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뉴스를 접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여전히 코로나의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잘 버텨왔던 사람들 가운데도 어느 날 갑자기 코가 맹맹하고 목이 아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닐 거야. 절대로 코로나가 아닐 거야” 그런데 여전히 코가 맹맹하고 목이 아프며 기침까지 해서 자가진단키트로 검사해보니까 두 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줄 중에 한 줄은 희미하게 나오기 때문에 “이건 코로나가 아닐 거야”하면서 퀴블러 로스가 말한 ‘부정의 단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도 행여나 해서 병원에 가서 신속 항원 검사를 해보니 양성이 나옵니다. 그래서 다시 퀴블러 로스의 이론대로 ‘분노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니 어떻게 내가 코로나에 걸릴 수 있어! 감히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에게 틈타다니! 하나님께서 불담과 불성곽으로 지켜주실 줄로 믿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안 지켜주실 수 있단 말인가!” 그 분노가 심하게 되면 깊은 우울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짧아야 되는데 우울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우리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해칩니다. 그래서 제가 코로나로 인하여 치료를 받거나 격리 중에 있는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마12:20) 아니, 오히려 상한 갈대를 일으켜 주시고 꺼져가는 심지에 기름을 공급해 주시고 사랑과 희망의 불꽃을 타오르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코로나에 안 걸리면 더 좋죠. 그러나 그 코로나 때문에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고, 현장예배가 이렇게 소중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 모든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지요. 또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지만 코로나의 바람에 겁이 나고 흔들리고 있는 분도 많으실 겁니다. 그분에게는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죽어 쓰러진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시들어 떨어져버린 꽃잎은 찬이슬이 내려도 떨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살아 있으니까 겁이 나기도 하고 흔들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코로나의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코로나의 바람 때문에 우리의 육체가 더 강력하게 되고 생명력이 더 질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바람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더 강인해지고 그 어떠한 혹한의 바람과도 맞설 수 있는 전천후 신앙이 될 겁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격리되어 있는 분들, 그리고 그 바람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당신을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당신이 상한 갈대와 같은 모습이고 꺼져가는 심지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고 불꽃처럼 타오르게 해주실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소강석 칼럼
    2022-04-12
  • [시사칼럼] 용산의 부활
    대통령 당선인이 집무실과 거처를 기존의 청와대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겠다고 발표하고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논쟁이 야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 지역이 우여곡절 끝에 “용산”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용산”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적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비교적 최근인 2009년에 일어났던 이른바 “용산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인명 피해를 동반했던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인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억을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 현재 각종 미디어에서 용산을 엄청나게 언급하지만 그때 일만큼은 거론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시 희생자의 가족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내 시계는 2009년 1월 20일에 멈췄다”고 할 만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건입니다(고 양회성 씨의 부인 김영덕 씨의 말, 2019. 1. 20, 중앙일보). 푸코(Foucault)는 이런 경우를 ‘대항기억(counter-memory)’이라고 불렀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용산으로 이동한다면 역사에서조차 소외되어 가는 이런 존재들이 다시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용산 이전과 관련해서 당선인이 던진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슨 의미로 썼는지 알 길이 없으나, 이를 각각 건축의 측면이나 전통 사상의 맥락 혹은 공간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관한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공간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결코 경시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분야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앙리 르페브르(Henry Lefebvre, 1901-1991)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공간”을 중시하여 현대사회는 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독특한 공간 구조(공간의 재현) 안에서 생존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공간에 적응하거나 저항한다(재현된 공간)고 보았습니다(『공간의 생산』). 용산에 존재했던(하는) 군사기지와 빈민촌을 생각해 보십시오. 각각의 공간에 적응한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공간의 실천”을 통해 용산에는 눈물과 이윤과 축제와 비극이 교차해 왔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용산이 새로운 화해 공간으로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은 국가 안보나 국민 소통의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용산과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 관심사는 오로지 한 곳에 몰려 있는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한 일간지가 내보낸 기사를 보십시오(매일경제, 4. 1).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서는.. 부동산 투자 가치도 올라가지 않을까요. 핵심 개발 프로젝트를 비롯해 재건축, 리모델링 사업이 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됩니다”(서울 용산구 이촌동 주민 A씨), “아무래도 대통령 안보, 경호 문제로.. 청와대 주변처럼 용산도 부동산 개발 사업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원효로 B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그야말로 권력이 아니라 재산이 문제입니다! 십여 년 전 용산의 비극도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빈곤에 저항하는 그리스도교”의 저자 탁장한은 용산의 ‘쪽방촌’ 같은 낙후 지역을 “역유토피아(Dystopia)”라 부르고 이를 둘러싼 재개발이 초래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원주민추방)”이 용산 비극의 주범이라는 취지의 글을 쓴 바 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는 용산이 욕심을 못 박는 땅, 그래서 무욕의 십자가와 같은 상징적인 땅으로 부활하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 동안 현대의 도시는 “시민에게 도시를” 혹은 “인간과 함께 하는 도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1960년대 자동차가 지배하는 미국의 도로를 보고 충격 받은 콜롬비아의 한 청년이 시작한 운동이 “자전거도로(Ciclovia)”를 만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도로를 자동차와 자전거가 공유(share)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그 표지판 모양이 화살(arrow)을 닮았다 해서 미국의 덴버 시는 이를 “셰로우(Sharrow)”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동차 없는 도시(Carfree Cities)”를 주창하던 사람(J. H. Crawford)의 꿈은 오늘날 많은 곳에 “차 없는 도로”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예 도로를 일종의 ‘공유 공간’으로 만들어서 자동차와 자전거와 보행자와 동물(시낸스로프)까지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도로를 만들자는 시도가 생겨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모두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일체의 신호나 표지를 두지 않는다 해서 “아무것도 없는 도로(Naked Street)”라 하고, 이런 도로가 있는 곳을 “공간 공유 마을(Shared Space Village)”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도시의 보이지 않는 99%』). 금번 “용산 이전”은 대단한 결단과 엄청난 역량이 필요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용산이 부디 ‘시민과 인간의 도시’로 부활하기를 소망해 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시사칼럼
    2022-04-12
  • [은혜의말씀]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0)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제자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골방에 꽁꽁 숨어 있었습니다.(19절) 왜냐하면, 유대인이 자기들을 예수님처럼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두려움이 몰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 또,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19,20절) 그제서야 제자들은 말로만 듣던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으며,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이 두려움을 벗고 ‘평강-샬롬’을 노래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두려움은 죽음으로부터의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비참하고 초라해집니다. 이 땅은 죽음이 지배하고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의 뿌리, 죽음을 누가 깨뜨려 주셨습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벗겨 주시고, 우리에게 ‘평강–샬롬’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요 11: 25, 26) 여러분, 오늘 우리가 죽음을 두려하지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샬롬’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14:26, 16: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평강–샬롬’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이 준비되셨습니까? 기억하십시요! 우리는 죽음을 이긴 자들입니다. 우리 사직동 모든 성도님들이, 이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부활의 ‘생명–샬롬’을 노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은혜의 말씀
    2022-04-12
  • [목회자칼럼] 선물같은 삶, 그 누림을 위해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지난 2월 26일 소천한 이어령 전 장관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의 첫 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문학 평론가이자, 교육자, 언론인, 저술가 등 한 시대에 지성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는 고백입니다. 한국의 대표 지성으로 일반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지식, 부, 능력 등이 내 힘으로 일구고 얻었다 생각했는데, 인생을 마감할 즈음에 돌아보니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많이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선물같은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한번 주어진 우리의 인생, 선물같은 우리의 삶을 좀 더 멋있고 여유있게 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요? 먼저, ‘읽어야’ 합니다. ‘읽기’와 ‘뇌과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를 통해 읽는 행위를 뇌과학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문장을 읽을 때, 비판적 사고, 공감과 이해, 내면의 성찰 등이 일어남을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읽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요즘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SNS를 읽고 TV, 영화 매체를 보고 읽고 삽니다. 글을 읽음으로 우리 뇌는 사고를 위한 체계를 갖추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을 갖고 있을 때, 그리고 이 생각이 쌓여 갈 때 삶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왕 무언가를 읽어야 한다면, 좋은 것을 읽읍시다. 지금 나는 어떤 책을 얼마나 읽고 있는가요? 두 번째는 ‘묵상해야’ 합니다. 무언가를 읽다보면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을 하다보면, 그 생각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사람들이 갖고자 원하는 ‘지혜’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물론, 창의력도 생각을 통해 드러납니다. 읽고, 그 읽은 내용을 조용히 읊조리면서 표현하면 동시에 머리에 새겨지고 묵상은 시작됩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며 써야’ 합니다. 기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바로 기록입니다. 어떤 사람이 “머리가 좋지 않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 말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돌이나 비석에 글을 새기면 절대 없어지지 않고 오래 갑니다. 광개토 대왕릉비에 새긴 글귀는 비바람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닳아지지 않고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쓰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단지 쓰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기록이 되고 역사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확장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글로 남겨봅시다. 예수님도 글을 쓰시며 간음한 여인을 살리셨습니다(요8: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네 번째는 ‘토론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혼자만 간직하고 있으면 외고집, 외골수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SNS를 활용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나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졌습니다. 생각을 쓰고, 정리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과 비교한 후 다시 내 생각을 정리하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훨씬 분명해져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4가지를 토대로 좀 더 멋있고 여유있는 삶을 살고 싶은가요? 그러기 위해서는 3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공동체, 지도자, 좋은 공간입니다. 교회는 이 3가지를 다 갖춘 최상의 곳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같은 삶을 멋있고 여유롭게 잘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자칼럼
    2022-04-1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