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2-03(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정론

실시간 정론 기사

  • [김성철목사] 가상공간(VR)이 만들 1평의 기적 시대를 준비하자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 많은 부분이 이전 일상으로 회복되고 있다. 변화된 것은 코로나시기에 경험했던 재택근무나 온라인 대면 문화인 온택트(ontact) 문화가 새로운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2022년 2학기 컴퓨터 강의를 진행하면서 현장과 온택트 이원 체계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현장에 온 학생들은 직접 노트북을 가지고 예전처럼 컴퓨터를 배웠다. 반면 온택트에 참여한 학생들은 집에 있는 컴퓨터 앞에서 현장과 연결된 화상을 통해 강의를 듣고 공유된 화면을 보면서 컴퓨터를 배웠다. 현장과 온택트 구분 없이 질문하고 소통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온택트 문화는 거리라는 공간적 난관을 극복하고 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실습을 요하는 컴퓨터 강의에 큰 어려움이 없다면 성경공부나 기도회 등의 교회 모임도 더 쉽게 이원 체계를 통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거리 때문에 참석이 어려운 성도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현장과 온택트 서비스를 함께 진행하는 것도 고려하면 좋겠다. 머지않아 새로운 일상으로 우리 곁에 다가올 또 하나의 문화가 VR 문화이다. VR은 가상현실을 뜻하는 Virtual Reality의 약자이다. VR은 이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 VR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머지않아 또 하나의 일상문화가 될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2021년 11월에 다시 만난 VR문화는 우리 부부의 일상에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VR문화는 우리 부부에게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서로 다른 가상공간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나는 VR탁구장에서 탁구경기를 즐기고 아내는 가상 공간에 펼쳐진 큰 체육관에서 강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다양한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탁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취미를 실천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1시간 운동을 위하여 준비하고 이동하고 샤워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은 바쁜 일상 속에서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VR은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가로 세로 1평의 공간만 있다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VR만 착용하면 1평의 공간은 가상공간 안에 완벽한 탁구장을 제공한다. 그곳에는 언제나 함께 운동할 전 세계의 탁구인들이 모여 있다. 실제 탁구장에서 운동하는 것과 90% 이상의 만족감을 느낀다.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주변 목회자들에게 이야기해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얼마 전 자주 만나는 분들과 내가 사용하는 VR기기로 체험의 시간을 가졌다. 한 목회자는 가상현실에 펼쳐진 탁구대가 실제 있는 줄 알고 손을 짚었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일이 생길 정도로 실제처럼 보인다. 앞으로 공간을 찾아서 움직이는 일은 급격하게 줄어 들것이다. 사이버 공간이 제공하는 1평의 기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1평의 공간만 있으면 프라이빗 영화관이 되기도 하고, 체육관이 되기도 한다. 멋진 풍경과 함께하는 회의장과 업무공간을 열 수 있다. VR문화는 이동하지 않고 필요한 공간에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든다. VR문화가 일반화되면 지금까지의 교회의 활동에 더하여 평일에도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실질적인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가능하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 평일에 이동에 필요한 시간과 재정을 절약하고 가상공간에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취미가 같은 성도들이 평일 교제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 청년 모임 중 하나로 사이버 공간에 함께 모여 같은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나눔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특히 미래세대를 고민하는 교역자들은 앞서 그들의 일상이 될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준비하여 그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권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01-20
  • [안동철 목사] 천안 예수상 건립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대강절 기간 중인 12월 5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한국기독교기념관 홍보관 및 예수 조형물 착공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모 인사는 “케이팝에 열광하는 전 세계인들이 한국에 왔다가 기독교기념관을 방문한 뒤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일에 작은 도구가 되길 바란다.”는 계획을 밝혔다. 보도에 의하면 한국기독교기념관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일대 65,000여 평 부지에 총 사업비 1조 800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짓는다고 한다. 이는 국내 최대 규모의 기독교 테마파크로 기념관 내에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보다 훨씬 더 큰 예수상을 세운다고 한다. 브라질에 있는 예수상은 정식 명칭이 ‘구세주 그리스도상’인데, 높이 710m의 코르코바두 산 정상에 높이 30m, 양팔의 길이 28m, 무게 635t 규모를 자랑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을 상징하고, 에펠탑이 프랑스 파리를 상징하듯이 이 예수상은 리우데자네이루를 넘어 브라질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했는지 천안에 만들 예수상의 규모가 엄청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보다 3배나 더 큰 92m 예수상을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이날 참석한 교계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는 왜 이 프로젝트가 필요한지를 말했지만 아무리 좋게 봐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금지하는 일이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분명히 말씀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상). 물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쪽에서는 이 예수상은 우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는 이런 생각에 반하는 길을 걸어왔다. 항상 거대한 형상은 우상숭배로 연결되었다. 그랬기에 종교개혁자들은 과도할 만큼 교회당 안에 모든 성상을 없앴고, 십자가까지 우상화될 수 있어서 교회당에 설치하기를 꺼려했다. 둘째, 규모의 논리는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 지금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쪽에는 92m나 되는 예수상을 보러 온 사람들이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이 거대한 예수상 앞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이들의 주장대로 케이팝에 열광한 사람들이 거대한 예수상으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반복음적이다. 기독교 복음은 거대한 예수상이 아닌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지향한다. 세상의 종교들처럼 거대한 교주의 무덤이 아닌 빈무덤을 자랑한다. 기독교는 규모의 논리를 거부한다. 셋째, 상업적 생각이 가득한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어야 한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총 공사비가 1조 800억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엄청난 재정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이 정도 천문학적 금액이면 교회의 헌금으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사업자가 붙을 것이고, 여러 사업에 따른 각종 이윤을 추구하는 이런저런 방식이 개입되지 않겠는가? 이미 이런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말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예수 사업’을 하겠다는 것인데 교회가 이런 일에 함께 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이유로 이 사업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엄청난 돈을 들여 거대한 건물을 짓는 것보다 교회의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이다. 또한 세속화되고, 반기독교적 정서가 강한 우리 사회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낮아져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 정신’이 필요하다. 이런 거대한 예수상을 짓는데 시간과 막대한 돈을 쓸 여유가 없다. 천안의 거대한 예수상 건립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01-05
  • [전영헌 목사] 십대들이 사라진 교회
    6 주전 진주 공군 사령부 교회에 집회차 다녀왔었다. 오랜만에 만난 군목 목사님과 예배 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목사님, 부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최근 군인들 통계를 보고 놀랬습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종교분포 조사를 하면 10명 중 7명 정도는 친구 따라 갔든, 행사 때문에 갔든, 뭘 먹으러 갔든, 여러 이유들을 통해서 교회를 가봤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10명 중에 7명은 교회를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5년 전에 10명 중 7명은 어릴 적 교회를 가봤던 기억으로 언젠가는 교회를 찾을 가능성이라도 있는 반면에, 최근 통계에 해당하는 10명 중 그 7명은 어쩌면 평생을 교회에 다니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현재 지역교회 상황들이 군부대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듯 하다. 교회에 십대들이 사라졌다. 교회에서 사라진 십대들, 교회를 경험해보지 못한 십대들은 결국 교회와 상관이 없는,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안티기독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교회들은 모두가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교회에 아이들이 없어요” 아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있다. 다만 교회에만 없을 뿐이다. 그 십대들이 지금도 학교에는 있다. 우리 브니엘에도 교회에서는 사라진 십대들이 수백명이 있다. 교회에서는 예배가 안되는 아이들이 감사하게도 학교 안에서는 예배가 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 일상적인 채플은 학교에서 진행을 하지만 절기예배와 학교 부흥회는 지역교회의 도움을 얻어서 교회에 데리고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한다. 이유는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1년에 적어도 4-5번의 시간을 통해 교회라는 곳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 훗날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나 학교 다닐 때 교회 가봤어”라고 말할 수 있는 동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회를 경험한 세대가 훗날 교회가 이상한 곳이 아니라, 기독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하는 자들로 살아가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역교회는 학교에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 있는데 학교에 관심이 없다. 슬로건으로는 “다음세대”, “십대선교”를 외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수막과 구호일 뿐 십대들을 위한 관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의 아이들을 괴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교회에서 사라진 십대들을 위해서 선교회 이름만, 교회표어 속에서만 존재하는 십대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지역학교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전략들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인근 미션스쿨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방편들을 찾아보길 바란다. 교회에 없는 십대들이 학교에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지역교회가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12-20
  • [송길원 목사] 임종실, 임종돌봄이 필요하다
    조르주와 안느, 음악가 출신의 80대 부부다.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내 안느에게 갑작스런 뇌경색이 덮친다. 다정한 노부부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수술후유증으로 오른쪽 편마비가 찾아든다. 스스로 배변을 해결할 수 없다. 몸을 씻을 수도 없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삼키기가 어렵다. 서서히 말라간다. 말조차 어렵다. 딸과 사위는 입원을 시키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아내의 뜻은 아니다. 남편 조르주는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는 아내와 실랑이를 벌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후려갈긴다. 상황은 처절하다. 결국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조르주는 죽은 아내를 꽃으로 장식하고, 방문을 테이프로 봉인한다. 장문의 편지를 남겨놓고 사라진다. 딸이 아빠⸱엄마를 찾았을 때 잠긴 문 뒤로 엄마의 시신은 꽃에 둘러싸인 채 썩고 있었다. 2012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의 줄거리다.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나라면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네 삶은 ‘맞이하고 싶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죽음을 맞이한다. 연간 사망자 30만 명 가운데 80% 이상이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ㆍ중환자실을 오가다 그 쳇바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는다. 4명 중 3명꼴이다. 정든 집에서 가족들의 손을 잡고 떠나는 죽음은 전설이 되었다. 66~83세까지 17년, 삶의 5분의 1을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사망 직전 1년의 의료비가 평생 쓴 의료비를 웃돌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렁주렁 기계장치를 달게 된다. 사지가 포승줄에 결박당하듯 묶이기도 한다. 콧줄로 영양 공급을 받으며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간다. 우리나라 ‘최빈도 죽음’의 풍경이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130만 명이다. 3년 새 6배로 늘었다. 하지만 전 국민의 3%에 불과하다. 통증을 줄여주는 완화의료센터를 이용하기도 어렵다. 매년 8만 명이 암으로 숨진다. 호스피스 병상은 1,500개도 되지 않는다. 암 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3%에 그쳤다. 의료강국의 이면은 의외로 어둡다. 반지하 방만이 아니다. 잠시 병원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병원에는 응급실에서 입원실, 수술실, 회복실, 재활치료실... 숱한 방들로 가득 차 있다. 장례식장으로 내려가 보자. 안내실, 추모실, 접객실, 휴게실, 안치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방이 보이지를 않는다. ‘임종실’, 의료진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의료행위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가족과 함께 임종을 그들을 임종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며 죽음을 맞이하게 도울 수는 없을까? 현재 우리나라는 빅 파이브에 해당하는 대학병원들조차 한둘 정도의 임종실을 두고 있을 뿐이다. 종합병원은 아예 없다. 우선 돈이 안 된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감염과 방역 규칙에 따른 운영지침도 없다. 제도와 법령준비도 필요하다. 결국 ‘편안한 죽음’을 원하지만 기대와 달리 대부분이 ‘고독사’로 세상을 뜬다. 곁에 가족은 없다. 의료진이 임종을 지켜보는 경우는 희귀하다. 신음소리를 내는 또 다른 환자 옆에서 가족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곁에 가족이 있다 해도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르의 영화 이야기가 프랑스만의 이야기일까?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도 조력 존엄사법이 제출되었다. 말이 존엄사지 속을 들여다보면 조력 존엄사는 의사조력 ‘자살을 통한 안락사’이다. 이런 법안이 법안 통과를 원하는 사람들이 80%가 넘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한다. 어쩌다 죽음마저도 여론조사를 따라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일까? 임종실이 있으면 달라진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환자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줄 수 있고 함께 부를 수도 있다. 못다 한 사랑고백을 나눌 수 있다. 멋진 엔딩파티를 준비할 수도 있다. 이때 세족식을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고인이 남기는 말이 유훈이 되고 고인에게 건네는 사랑의 말이 위로가 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장면이 떠오른다. 존 H. 밀러 대위는 라이언에게 말한다. “라이언 꼭 살아서 돌아가. 잘 살아야 돼”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밀러 대위의 무덤을 찾은 라이언이 말한다. “가족과 같이 왔습니다. 오고 싶어 해서요. 여기 오면 기분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다리에서 하신 말씀을 매일 생각했죠. 최대한 잘 살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최소한 대위님의 눈에 대위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보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한다. “여보, 훌륭히 살았다고 말해줘” 아내가 답한다. “물론이죠” 다시 라이언이 말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줘” “당신은 훌륭해요” 나는 많은 돌봄 가운데 ‘임종 돌봄’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 여긴다. 기독병원들이 먼저 나설 수는 없을까?
    • 오피니언
    • 정론
    2022-11-25
  • [탁지일 교수] ‘하이브리드 이단’과 ‘K 이단’의 시대
    코로나 팬데믹은 국내외 이단 문제의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면 포교가 일반적이었지만, 코로나 발생 이후에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단들의 미혹이 본격화되었고, 최근에는 전통적인 대면 포교와 온라인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형태로 진화되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미혹의 시대, 즉 ‘하이브리드 이단’의 세상이 열렸다. 그리고 하이브리드 이단은 한류의 날개를 단 ‘K 이단’의 모습으로 진화하며 세계 곳곳으로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이단 대처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전통적인 이단 예방교육과 함께, 온라인 대응도 시급하다. 이단들의 고퀄리티, 즉 고화질과 고음질의 동영상이 유튜브를 뒤덮고 있고, 심지어 콘텐츠 구성과 완성도까지 높아 청소년과 청년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게다가 정체를 감추고 위장해 접근하기 때문에 피해는 점점 확산하는 추세이다. 신천지는 전통적인 모략 포교를 진행하는 한편, 온라인으로 포교, 교리 교육, 신도 통제를 병행하고 있다. 거짓말의 끈을 놓지 않는 동시에, 노골적인 커밍아웃을 통해, 오히려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언론매체에서는 '신천지자원봉사단’을 ‘SCJ 자원봉사단’이라고 눈가림하고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나저나 한때는 신천지 비판에 열을 올리며 실리를 챙기던 주요 언론들이, 이제는 신천지 선전을 통해 다시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후안무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하나님의교회도 전통적인 거리 포교와 함께 온라인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요즘 ‘어머니 하나님’을 선전하는 30~40대 여성 신도들이 곳곳을 누비고 있다. 거리청소는 물론이고 자연재해 지역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활발한 구제 활동을 벌이며, ‘선한 이웃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다. 하나님의교회는 온라인 홍보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한편, 실시간 업데이트를 통해 곳곳에 세련된 미혹의 덫을 설치하면서 가장 파급력 높은 K 이단으로 등장했다. 박옥수 구원파 경우도 국내외 활동이 활발하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월드캠프를 올해부터 다시 대면으로 진행했고, 마인드교육을 내세워 국내외 공교육 현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해외 교육 관련 정부 기관들과 활발한 MOU 체결을 맺고 있다. IYF의 경우, 국내 캠퍼스 활동으로부터 해외 자원봉사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K 이단으로 국내외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온라인 홍보를 통한 포교 활동이 대면 만남과 집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이브리드 홍보와 포교도 나름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단들은 시대적 트렌드에 민감하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신속하게 벤치마킹하고 스스로에 맞게 업그레이드한다. 문화적 키워드를 선점한 후, 정보기술력을 앞세워 포교 대상자를 공략한다. 교회의 선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후약방문식의 수동적 대처로는 이단 피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걸음 앞선 응전이 필요하다. 복음의 전래와 정착 시기에, 교회는 가장 선진적인 문화 도입과 선도적인 정보 제공으로 사회적 순기능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의 정보기술은 물론이고 이단들의 콘텐츠조차 따라가기 벅찬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사회를 걱정하던 교회가, 역으로 사회의 염려를 한 몸에 받는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경제력, 정보력, 기술력을 앞세운 하이브리드 이단의 시대, 한류를 이용해 세계화를 시도하는 K 이단의 시대, 교회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오히려 ‘복음의 순전함’ 즉 ‘신앙적 기본과 상식’으로 돌아가는 역발상적 접근이 필요하다. 세상의 방법으로 이단과 경쟁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복음의 순전함을 소유하고, 복음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온 시대를 초월한 교회의 생존전략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11-04
  • [송시섭 교수]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
    교회를 떠나는 청소년들이 교회가 위안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억압의 장소로 이해하고 있다는 분석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 부모세대가 이루어놓은 물질적 풍요와 휴대폰 속에 넘쳐나는 대중문화의 유혹은 극심한데, 21세기의 삶을 사는 자신들에게 여전히 19세기의 방식을 주입하는 어른들에 대하여 문화적 격차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는 청년들도 예외가 아닐 것인데,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복음의 본질을 듣지 못하거나, 설교가 자신들의 삶의 고민과 동떨어진 다고 느낄 때라고 한다는 점은 뼈아픈 현실이다. 그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올 수 있는 다양한 해결방안에 대하여 모두 동의하면서 필자는 작지만 의미 있는 제안을 한 가지 더하고자 한다. 그건 다름 아닌 성경에 대한 인식의 변화다. 다소 오래된 미국의 통계이긴 하나, 1991년 바나 리서치(Barna Research)가 ‘성경이 가르치는 원칙들은 정확무오하다’라는 언술(言述)에 대한 동의 여부를 질문했을 때 46%가 강력하게 동의했는데, 2016년경에는 같은 조사에서 30% 정도만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결과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이러한 경향은 우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속단한다면 위험한 추정일까. 아마도 청소년, 청년들은 성경에 대한 다소 고루한 인식, 즉 성경은 교조적이며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고지식한 명령들로 가득 찬 낡은 법률 서적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성경은 생각보다 열려 있고, 타협적이며, 각 시대의 역사적 소명의 맥락을 읽는 깊은 통찰을 보여주며, 동시에 또 다른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두고 있는 책이라는 점은 젊은 세대에게 잘 전달되지 못한 면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例)가 바로 레위기의 희년(禧年, jubilee)규정을 읽을 때다. 성경은 희년규정을 설명하면서 ‘무르기’(redemption)에 대한 대표적인 예외로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dwelling house in walled city)에 대하여는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허용한 뒤 그 뒤로는 무르기가 불가능함을 천명하고 있다.(레위기 25장 29-30절)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읽다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융통성’을 보게 된다. 그 중 한 견해는 성벽 있는 성내가옥은 주로 부자들의 소유물이므로 희년의 취지인 약자들의 생존권보장의 보호범위 밖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1년이라는 유예기간을 허용해줌으로써 부자도 주택 무르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조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다른 견해는 희년이 일방적인 분배철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보다 유연한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있으며 더구나 1년이 지난 가옥의 경우 매입자가 새롭게 형성한 부가가치를 인정하여 매도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 성경은 우리의 청소년, 청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세밀하고 정치(精緻)하며 놀라울 정도의 현실적 구체성을 띄고 있으며, 시대적 배경과 경제 사조까지 반영한 아주 합리적인 책이라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성경 속 이야기를 위인과 기적위주로 전달할 때 청자(聽者)는 그 본래 취지에 맞지 않게 성경을 영웅위주의 차별적이며, 신중심의 권위적인 문서로 이해할 위험을 안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이 참으로 유연하면서도 새로운 해석에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있는 놀라운 합리성을 갖고 있는 책(冊)임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를 제공해주며, 천국과 구원에 대한 영적인 진리뿐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깊은 깨달음을 전해준다는 점을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늘 우리에게 ‘~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새로운 성경해석에 대한 열린 자세를 늘 강조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선생님은 결코 성경을 묵고 굳은 계명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요즘, 다양한 대책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지금, 어쩌면 미래세대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전략은, 성경에 대하여 ‘알기를 감행하는’(dare to know) 칸트의 제안을 실행해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기에 바로 이 지점에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고 외친 종교개혁가들의 주장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조하는 바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9-23
  • [최병학 목사] 동물의 눈에서 예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발견한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본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 이름은 몰라도, 적어도 소설 『침묵』(1966)이나 영화 <사일런스>(2017)는 알 것입니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가 죽어가는 일본 농부들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후미에를 밟고 배교하면서 이렇게 되뇝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해 분명히 배교했을 것이다. 자,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를 하는 거야!” 지금까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것, 가장 맑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것, 인간의 이상과 꿈이 담긴 것을 밟는 것입니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분이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침묵했던 신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의 말, 아니 신의 시선은 동판에 새겨진 예수의 얼굴뿐만이 아닙니다. 엔도는 동물들의 눈에서도 예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발견합니다.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정은문고, 2018)는 엔도의 진지한 듯 유쾌하고, 무심한 듯 애정이 가득한 동물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엔도는 동물은 친구고, 때론 친구 이상의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는 개, 고양이, 원숭이, 너구리, 구관조, 송사리, 물벼룩까지 많은 동물과 곤충이 나옵니다. 이렇게 동물의 눈을 통해 “인생을 슬픈 눈초리로 바라보는 하나의 존재를 의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식물도 마음이 있다!”라고 외칩니다. 1장 ‘개는 인생’의 짝꿍에서 엔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는 인간의 슬픔을 달래준다. 양친의 사이가 차츰 나빠져 이제껏 즐거웠던 가정이 저물녘 갑작스레 해가 기운 것처럼 어두웠다. 소년이던 그때는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저 당혹스러워 숨죽인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상냥하게 대해주면 어머니를 배신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리면 아버지를 거스르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마음의 고통을 상담할 수는 없었다. 말한들 또래 아이들이 이해할 리 만무했다. 학교를 가고 오는 길, 항상 내 곁을 어슬렁어슬렁 따라다니던 검둥이. 어‘집에 가고 싶지 않아!’ 검둥이한테만은 나의 슬픔을 털어놨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그는 눈물 어린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어요.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요.’” 이렇게 엔도의 동물 이야기는 어린 시절 한 마리 개와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그 개는 엔도가 어렸을 때 중국 다롄에서 기른 만주견 ‘검둥이’입니다. 엔도는 부모한테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못하고 느릿느릿한 엔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민이나 슬픔을 자주 검둥이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아직 집에 돌아가기 싫어”, “학교는 재미없어” 같은! 그러면 검둥이는 엔도를 잠자코 바라봅니다. 눈물이 맺힌 듯한 눈을 하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이 세상은 참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따라서 엔도는 어린 시절, 부모나 형제 말고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상대는 개라고 고백합니다. 특히 엔도에게 첫 이별을 알려준 이도 검둥이였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작별 인사도 변변히 못 한 채 검둥이와 헤어진 것에 대한 속죄의 마음은 엔도 슈사쿠 문학의 중요한 원점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깊은강』의 누마다의 이야기죠?). 엔도 슈사쿠의 첫 마음이자 첫 이별인 검둥이입니다. 엔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검둥이만은 내 외로움을 알아줬어” 물론 이런 외로움과 이별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엔도 특유의 유머도 책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엔도는 기르던 개가 새끼 고양이를 잘 보살피자, “저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지도 몰라. 그러면 ‘야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한바탕 돈을 벌어야지. 놀면서도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을 거야.”라고 우리를 웃깁니다. 판다의 교미를 적나라하게 보도하는 방송을 보고 “판다의 사생활을 지키는 모임을 만들자!”라고 술자리에서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렇게 이 책은 만주견 ‘검둥이’로부터 시작해 개, 고양이, 원숭이, 너구리, 구관조에 이르기까지, 엔도가 키우거나 만나왔던 여러 동물과의 이런저런 인연을 가식이나 과장이 없는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일생을 통해 사랑하고 교감했던 여러 동물의 눈에서 예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발견한 엔도입니다. 따라서 엔도는 다음 생에는 ‘사슴’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엔도가 인도에 갔다가 세계 제일이라고 자칭하는 점술가로부터 “당신의 전생은 비둘기, 다음 생에는 사슴으로 태어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훗날 나라 공원에서 사슴이 된 자신을 만난다면 사슴 전병을 많이 던져주세요.”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동물들의 눈에서 예수의 시선을 발견하는 나라일까요?
    • 오피니언
    • 정론
    2022-09-08
  • [김기현 목사] 사울은 천천
    창을 들고 앉아 있는 사울은 고립무원이다. 사방팔방이 적들로 우글거린다. 처음에는 다윗 한 명만 적이었는데, 적 곁의 적이 하나둘 늘어난다. 듬직한 요나단은 다윗을 구명하는 탄원을 하지 않나, 신하 중에 언제부턴가 다윗에 줄을 대지 않나, 어찌 키운 내 딸인데, 그 죽일 놈을 사랑한다니. 최악은 그도 그가 사랑스럽다. 신앙 좋지, 인품 좋지, 실력 좋지, 뭐 하나 나무랄 것도 없는 그가 충성심도 단연 최고다. 사울은 만인에게서, 자신에게서 스스로 소외되었고, 그런 다윗이 밉고, 그런 자신이 미워 죽을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선택받은 왕인 사울이 왜 버림받고 실패했는지, 가족과 장인과 아내에게서 홀대받던 다윗은 추앙받는 최고의 왕이 되고, 군주의 모델이 되었는지, 그 갈림길이 어디인지 퍽 궁금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자 건국자가 아닌가? 그 정도면 태조 왕건, 태조 이성계급인데, 그의 최후는 너무 쓸쓸하고 아리다. 무엇이 그를 무너뜨렸을까? 그는 지금이라도 제정신 차리고 예의 그 용감무쌍하고 총기 넘치는 초기의 사울로 돌아갈 순 없을까? 창을 들 것인가, 시를 쓸 것인가? 분노, 시기, 적대감과 열패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둘을 갈랐다. 다윗이라고 그런 감정이 없을 리 만무하다. 시편을 보라. 폭력으로 분출하느냐, 일기장에 털어놓느냐의 차이일 뿐. 그 무언가에 들들 볶이고 미쳐 돌아버릴 것만 같을 때, 한 사람은 창을 던졌고 또 한 사람은 시를 썼다. 던진 창은 부메랑이 되어 자기 배에 꽂혔고, 외롭고 무서울 때 그 감정을 글로 남겼더니 절창이 되었다. 운명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 결정한 것이다. 창을 던질 것인가, 글을 쓸 것인가, 선택하라. 그것이 그대의 데스트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하나의 대명사요 고사성어로 인류 역사가 존재하는 동안, 내내 전달되고 전파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의 공적을 기리는 여인네들의 춤과 노래가 없을 수 없다. 그것이 사울의 심기를 건드린다. 다윗은 만만이고, 나는 천천이라. 그의 전공에 비해 10분의 1이잖아. 그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나는 바닥을 치면, 왕좌가 위험하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다. 일거수일투족을 의심하고 호시탐탐 염탐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를 죽여야 내가 산다. 사울은 비운의 왕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대미문의 길, 인간 왕이 다스리는 국가의 길을 열어야 역사적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 그러나 선례가 없다. 비교 대상이 없다. 남의 나라는 모방하지 말고, 하나님을 모방하라는데, 뭔가 손에 잡혀야, 눈에 보여야 배우든, 따라 하든 할 텐데.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앞길에는 아무도 없고, 그가 맨 앞에 홀로 섰다. 뒤에서는 다윗이 맹추격하는 중이다. 나아가 길을 열 수 없다면, 돌아서 다윗을 쳐내는 수밖에. 사울은 비교 대상을 잘못 골랐다. 나와 남을 비교할 것도, 나의 최악과 남의 최고를 견줄 것도 아니다. 나의 장점을 무참히 깎아내리고, 남의 장점은 한없이 우러르고, 나의 단점에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남의 장점은 망원경으로 숭배할 일이 아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라. 내가 내게 기준이다. 나는 나다. 나는 딱 하나다. 비교 불가의 존재다. 대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비교하라. 어제는 백백, 오늘은 천천, 내일은 만만이 될지니. (삼상 18:7)
    • 오피니언
    • 정론
    2022-08-12
  • [김정환 사무총장]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작은 실천 - 다시 아나바다!
    봄은 새싹이 움트고 여름은 만물을 키우고 가을이 오면 결실을 맺고 겨울은 결실을 함께 나누는 계절의 섭리가 이제는 완전히 변했다. 봄이 오는지 가을이 가는지도 모르게 여름과 겨울이 온다. 거기에 더해 날씨까지도 심상치 않다. 전 세계적으로는 때 아닌 한파와 폭염, 홍수가 발생해 지구촌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보지 못했던 큰 산불로 그동안 잘 가꾼 숲이 훼손되었다. 이번 장마에도 서울을 비롯한 중부권은 폭우가, 남부지역은 폭염으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날씨를 경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인간의 무절제한 삶의 행태가 만들어 낸 기후 위기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고 해가 갈수록 두려운 마음이 든다. 요즘 탄소중립, 넷 제로라고 해서 이해하기도 어렵고 알게 되어도 선뜻 실행하기 힘든 말들이 언론을 통해 계속 들려오고 있다. 기후변화로 위기에 처한 지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탄소중립을 위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정부는 탄소중립을 위해 각 나라들과 연대하며 지원하는 정책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해 나가야 하며 기업은 기업의 이윤 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탄소중립을 향한 노력을 해야 한다. 시민은 정부나 기업이 그 책임을 다해 나갈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뿐 아니라 정책 과정과 기업의 노력을 점검해 나가야 한다. 그와 함께 개개인은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재사용 재활용 등을 통해 탄소 배출량을 최대한 줄이는 제로웨이스트 운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감으로써 삶의 변화도 필요하다. 2009년 캘리포니아의 한 여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제로웨이스트 운동’은 처음에는 한 여성의 블로그에서 시작된 개인으로부터의 작은 실천 운동이었지만 지금은 생활 속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최소화함으로써 환경을 살리고 탄소 발생도 줄여나가는 개인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일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고 다회용 컵을 사용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비닐봉투 대신 장바구니를 사용하고 채소나 과일은 다른사람 보다 먼저 용기에 담아서 오는 ‘작은 용기’도 필요하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크고 작은 생활협동조합, 제로웨이스트 매장이 있다. 그곳에 가면 다양한 제로웨이스트 제품이 지구를 위해 환경을 위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제로웨이스트는 새로운 실천 운동이 아니다. 1997년 한국YWCA에서 시작한 재활용운동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아나바다 운동’이 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렵고 힘들었던 IMF 시기에 아껴 쓰고 사용할 수 있는 물품은 이웃과 나누고 내가 필요한 것과 바꿔쓰고,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수리해서 쓰는 아나바다 운동은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전 국민의 호응을 받았다. 이제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제로웨이스트라는 이름의 아나바다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우리 모두를, 지구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를 회복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7-15
  • [강규철 장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의 교회에는 많은 갈등과 분란이 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 목사님과 장로님간의 갈등이 가장 큰 요인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 장로님들 중에는 장로가 되기 전에는 정말 열심히 섬기며 교회의 모범이 되었던 분이 장로안수 받고 난 뒤에는 교회의 걸림돌이 되어버린 경우가 종종 들려지곤 합니다. 이는 이분들이 장로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믿음의 깊이와 신앙적인 훈련보다는 외적으로 잘 나타나는 활동과 봉사, 그리고 인맥과 재물의 우위를 통해 장로가 되니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장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은 많았지만 장로가 되고나서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 왔을 때 교회의 장로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믿음이 깊고 신망이 있는 성도를 투표하여 결정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 천시 받던 백정도 장로가 되었으며 신분이 미천한 머슴이 양반인 상전을 제치고 장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현상을 모든 성도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훌륭한 전통과 신앙의 선배들이 한국교회의 굳건한 초석을 세웠으며 오늘의 한국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은 어떠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어떤 목사님은 자기 교회 성도 중에 명문대 출신의 학벌 좋은 사람이 많이 출석하고 있으며 특히 대학교수와 의사들이 많음을 자랑하고 이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장로가 되도록 애쓰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현재 많은 교회에서 재산이 많다고 해서 혹은 사회적 권력을 가졌다고, 신앙의 연륜과 교회에서의 헌신과 봉사와 관계없이 빠르게 장로가 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교회를 빠르게 성장시키고 싶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길 원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화려한 교회당을 지어서 대외적으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학식과 경제적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학식과 경제능력을 갖춘 분이 깊은 신앙과 믿음을 가졌다면 이는 교회의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장로님들 중에 병든 성도들을 위해 손잡고 기도 할 수 있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교회에 나온 성도들을 위로하며 보살피고 교회 장년들의 성경공부를 담당하며 그들의 신앙을 지도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장로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로로서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많은 교회가 그렇게 가고 있는데 뭘 유별스럽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그 시류에 편성하여 따라가다 보니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세속주의다 또는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많은 분란과 갈등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큰 나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뿌리가 땅속에서 뻗어 있습니다. 아무리 비바람이 들이치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그 큰 나무가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은 그 존재감을 자랑하지 않는 뿌리 때문입니다. 교회의 뿌리는 묵묵히 교회 곳곳에서 겸손하게 헌신하고 있는 평신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장이, 웅장한 교회의 건축이 나의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흘린 많은 헌신, 수고의 땀과 기도를 하찮게 여기며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든 영광을 가져가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목사나 장로가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똑똑하다고 해서 혹은 재물이 많다고 해서 지위가 높은 것은 더욱 아닙니다. 모두가 한 지체이고 단지 맡은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두 렙돈을 더 귀하게 보시고 성전 구석에서 죄인이라며 흘리는 눈물의 기도를 더 높이 평가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06-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