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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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환 사무총장] ‘보시니 참 좋았다’ 하셨던 생명의 세상을 다시 향하여
    2024년 3월 11일이면 후쿠시마 핵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13년이 됩니다. 아직도 지진과 쓰나미에 휩쓸려가는 사람과 집, 불과 연기에 뒤덮인 원자력발전소의 모습이 트라우마처럼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자연과 재산의 피해를 입은 채 방치되어 있는 곳, 아직도 고향인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후쿠시마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핵사고로 인한 저장된 핵오염수가 해양 투기를 시작하여 바다를 따라 흐르며 해양 생태계,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2011년 이후 한국의 시민사회는 후쿠시마 핵사고를 교훈 삼아 핵 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한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대한민국은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려 하고 원전의 신규건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핵오염수 투기조차도 용인해 버리고 있습니다. 2024년 새해 첫날 전해진 일본 혼슈 중부 노토반도를 강타한 7.6규모의 지진은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습니다. 속보를 통해 언론으로 전해지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는 다시 한번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진으로부터 안전한가? 세계 최고의 원전 밀집을 보이고 있는 대한민국의 원전은 이러한 강진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선뜻 그렇다고 답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 2016년 9월 12일 국내 지진 관측 이래 사상 최대인 규모인 5.8의 강진이 경주 일대에서 발생했고, 1년 뒤인 2017년 11월 16일 사상 2번째 규모의 5.4 포항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지진이 계속 한반도에서 발생하고 있어 이제 더 이상 대한민국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 국민은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규모 4~5이상의 지진이 잇달아 발생한 동해 남부 해안지역에 18기나 되는 핵발전소와 그 반경 30km 이내에 살아가고 있는 수백만 주민들은 지진이 원전 사고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수명이 끝난 핵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려고 하고 지역주민들과는 제대로된 소통 없이 원전부지 내에 핵폐기장을 설치하려고 하는 정부 당국과 한국수력원자력에 대하여 시민,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세상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국민의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인 무엇인지를 강력하게 묻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핵발전은 방사능 위험뿐만 아니라, 지역 간 불평등, 핵폐기물 처리라는 거대한 숙제, 초고압 송전탑으로 인한 주민의 고통, 지역공동체의 파괴 등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다시는 후쿠시마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 지역 주민의 안전과 지구가 안고 있는 온실가스와 기후재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리2호기와 같이 수명이 다한 원전의 불을 완전히 끄는 일과 함께 기후 위기를 초래하는 탄소중심의 에너지 체제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낼 에너지 체제로 바꾸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태양과 바람과 물을 이용한 에너지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안전한 사회로의 전환을 만들어낼 분명한 대안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그 창조세계, 생명의 세상을 향해 다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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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4-03-04
  • [손영광 대표] 대한민국은 진정으로 저출산을 우려하고 있는가?
    1970년대 초까지 100만명을 넘어서던 연간 출생아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1990년대에는 60만명대까지 감소했다. 이 때까지는 합계출산율도 1.4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하향세가 이 즈음에서 멈춰 안정되지 않을까 짐작했던 예상과는 달리 출생률이 끝도 없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가속화되고 있는 모습까지 관찰된다. 2002년부터 2012년까지의 연간 출생아 수는 50만명에서 48만명으로 약 2만명이 감소했다. 그런데 그 이후 2012년부터 2022년까지는 연간 출생아 수가 48만명에서 25만명까지 23만명이 감소했다. 비율로 따지면 지난 10년동안 출생아 수가 반토막이 난 것이다. 합계출산율은 0.78명, 인류 역사상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으니 올해만큼은 반등하리라던 기대는 매년 속절없이 무너졌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합계출산율 통계는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진 않았지만, 연말까지 누적된 통계를 바탕으로 0.72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국가 소멸이라는 단어가 결코 농담이 아닌 것이다. 위기라고 얼마나 떠들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대한민국이 정말로 저출산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상당한 의구심이 든다. 결혼하고 이제 막 아이들을 키워나가고 있는 입장에서,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정책이나 문화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경우, 결혼을 하면 소득세율 구간이 2배가 늘어난다. 예를 들어 싱글일 때에는 연간 소득 5천만원을 기점으로 소득세율이 12%에서 22%로 상승하는데, 결혼 후에는 부부 소득을 합산하여 5천만원의 두 배인 1억원을 기점으로 소득세율이 22%로 상승하게 된다. 특히 외벌이 가정의 경우, 소득세가 수십 퍼센트 줄어드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맞벌이 가정의 경우에도 소득세 절감 혜택이 적지 않다. 출산 후 부부 중 한 명이 육아에 전념하느라 일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자연스럽게 소득세 감면 혜택 효과가 생기게 되기도 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결혼을 하면 세제 혜택은 커녕 오히려 세금을 더 내야 하거나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부부 합산 소득이 6천만원을 넘어 저금리 주택 자금 대출, 저금리 전세 대출을 받지 못하거나, 다주택 규제로 세금을 왕창 물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습게도 ‘위장 미혼’이 늘기도 했다. 그나마 현 정부가 발빠르게 대응하여 올해부터는 결혼 후에는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소득 상한이 두 배가 된다.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적어도 결혼을 한다고 손해를 보지는 않도록 정책을 조정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가지 조심할 점이 있다. 결혼을 장려하는 것과 출산을 장려하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서로 다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론 결혼을 해야 출산도 하겠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서 꼭 출산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남녀 갈등이 심화되고 출산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며 딩크족 (DINK, Double Income No Kid), 소위 맞벌이를 하되 자녀는 갖지 않기를 원하는 청년 세대들도 상당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 ‘결혼신고’를 장려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저출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출산 장려 정책을 펼치면 출산 혜택을 받기 위해서 어차피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혼도 덩달아 장려하는 효과가 부가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즉, 결혼보다는 가급적 출산을 장려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국가 재정 분배일 수 있다. 연말 정산 시즌이다. 인적 공제를 늘리는 것도 출산 장려 정책에 해당한다. 2008년 이명박 정부에서 1인당 150만원으로 상향시킨 인적 소득공제는 물가 상승과는 무관하게 지난 15년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인적공제를 대폭 늘리는 것도 고려해볼만 하다. 현재의 복지 제도처럼 신혼부부라고 무작정 저금리 전세 대출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그 재정을 아껴 자녀를 출산한 가정에 자녀 수에 따라 대출 금리를 낮춰주는 정책이 더 나을 수도 있다. 혹은 굳이 정부 지원금을 주택 시장에 밀어넣어 부동산 가격 상승을 야기하는 것보다, 복잡할 것도 없이 다른 복잡한 부동산 관련 복지 정책들은 과감하게 축소하고 자녀 수에 따라 부모에게 자녀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가정마다 분유값이든 생활비든 부동산 대출 이자든 각 가정의 상황에 맞게 가장 필요한 곳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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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2
  • [송길원 목사] 새해, 젊음을 나누어 갖자!
    유엔은 1956년, 노인의 기준을 65세로 정했다. 우리나라는 1964년부터 이 기준을 따랐다. 벌써 반세기를 넘고도 20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장수혁명과 함께 호모 헌드레드, 백세시대가 다가왔다. 표준 키가 25센티가 늘었는데 옛날 옷을 입으라면 어떻게 될까? 일본 의학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2007년의 87세는 1977년의 70세에 해당했다. 지금의 65세는 한 세대 전, 45세의 몸과 건강으로 산다. 우리는 45세를 팔팔한 청년이라 말하지 노인네라 하지 않는다. 마침 미국의 AARP(시니어 권익 보호 단체)를 모델로 한국형 <시니어 파트너스>가 출범했다. <시니어 파트너스>가 첫 작업으로 노년에 대한 호칭 변화와 함께 100세 시대에 걸맞는 <100세 시대, 세대구분 표준>을 발표했다. 어제의 지도로 오늘의 길을 찾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 노년(老年)의 ‘노(老)’가 들어가는 단어는 죄다 부정적이다. 노망(老妄), 노쇠(老衰), 노욕(老慾), 노파(老婆).... 심지어 ‘No人’(사람이 아닌)으로 부르기까지 한다. 불쾌함을 넘어 인권의 문제가 된다. <시니어 파트너스>는 우리 인생의 ‘길(路)’이 된 사람이란 의미에서 ‘노인(路人)’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존중과 공경을 담아낸 호칭은 널리 사회적 공감을 얻어냈다. 이와 함께 100세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세대 구분이 제안되었다. 봄: 0세~7세→ ‘유년’/ 8세~18세→ ‘청소년’/ 19세~40세→ ‘청년’ 여름: 41세~55세→ ‘중년’ 가을: 56세~79세→ ‘장청년(壯靑年)’ 겨울: 80세~99세→ ‘노년(路年)’, 100세 이상을 ‘완년(完年)’이라 불러 인생 완주를 축복할 수 있게 했다. ‘로고스’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말’ ‘계산’ ‘이성’을 뜻하지만, 이성이 관계하는 ‘척도’ ‘비율’ ‘원리’ ‘법칙’ ‘근거’ ‘좌표’를 뜻하기도 한다. 드디어 로고스의 세상이 다가온 것이다. 여기에 ‘인생 4계, 봄-여름-가을-겨울’의 의미를 보탰다. 겨울을 살면서도 봄을 그리고 가을을 살게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이전의 노인이 장청년(壯靑年)으로 등장했다. 알베르 카뮈가 말했던 ‘모든 잎이 꽃과 같은 두 번째 봄’이 된다. 청년의 가치를 부여함으로 인생 2모작을 살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이 젊어졌다. 다이나믹 코리아가 구현된 셈이다. 이 또한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할 K-세대 구분법이 아닌가?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여성초혼 연령이 1998년 기준 26.1세였다. 2023년에는 31.3세로 5년이 늘어났다. 출산 엄마의 평균연령이 26.0에서 2023년 33.0세로 바뀌었다. 7년의 차이가 있다. 여기에다 건강수명이 2000년 기준 67.4세였던 것이 2019년 73.1세로 늘었다. 기대수명은 1950년대 47.9세에서 83.6세(2023년)으로 늘었다. 평균수명은 1960년 약 52세에서 현재 약 83세(남 81세, 여 87세)로 껑충뛰었다. 중위연령이 45.6세다. 1956년 중위연령 20세보다 25년이 길어졌다. 노년의 연령 기준이 바뀌어야 중요한 지표다. 더 이상 고장 난 음주측정기로 모든 운전자를 음주 운전자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으면서 ‘나이를 먹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나 어른들을 향한 덕담은 ‘갈수록 나이를 거꾸로 드신다’는 말이었다. 2024년은 정말로 전 국민이 나이를 거꾸로 먹어볼 수 없을까? <시니어 파트너스>의 이런 운동이 오랜만에 세상과 교회에 푸르고 젊은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직도 우리는 젊다. 아니 더 젊어져야 한다. 새해, 젊음을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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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5
  • [최병학 목사] 견리망의 시대, 절대적 환대 요청
    “환대란 시(詩)적인 행위이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말입니다. 데리다는 손님의 이름도 묻지 않고, 보답도 바라지 않으며, 모든 것을 주는 환대를 ‘절대적 환대’라고 불렀습니다. 절대적 환대는 주인이 주체가 되는 ‘초대의 환대’가 아니라, 예상치 않은 방문과 기대치 않은 방문자를 아무 조건 없이 맞이하고 환영하는 ‘방문의 환대’입니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적 환대는 도래자(방문자)에게, 마치 그가 구원자나 해방자라도 되듯, 나를 점령하고 내 안에 자리를 잡으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환대(hospitality)는 라틴어 ‘hospes’에는 주인(host)과 손님(guest), 두 뜻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주인이 손님이고, 손님이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인과 손님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의(敵意)’가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데리다는 결국 환대로 충만한 세상을 갈망하다, 환대가 사라지는 세상에서 영원한 환대가 가능한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지금 시(詩)적인 행위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시인(詩人)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환대가 사라지고 각자도생이 판을 칩니다. 전국의 교수들이 선택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이익을 보자 의로움을 망각하다.”라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입니다. 「교수신문」은 전국의 대학교수 1,315명을 대상으로 ‘2023년 올해의 사자성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견리망의가 396표(30.1%)로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견리망의는 논어 「헌문편(憲問篇)」에 처음 등장한 견리사의(見利思義)에서 유래합니다. “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라는 말인데, 견리망의는 반대의 뜻입니다. 이러한 견리망의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있습니다. 19세기 말 러시아 최고의 ‘리얼리즘화가’로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시초를 연 선구적인 작가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1844-1930)의 <쿠르스크 지방의 종교 행렬>(1880~1883)이라는 그림입니다. 레핀은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국민들이 국보로 여기는 예술가입니다. 세밀화, 인상주의, 성화(聖畵) 등의 다양한 장르로 작품을 남겼습니다. 레핀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표현된 세밀한 표정과 찰라의 순간 등을 역동적인 구조로 표현한 작품들을 보면 디지털시대인 현대 화가들이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그려도 쉽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작품입니다. 상황은 ‘쿠르스크의 성모’라는 이콘화를 코레나야 수도원에서 쿠르스크 시내로 옮기는 행사 모습입니다. 행렬에는 이콘화가 실린 화려하게 장식된 꽃가마를 어깨에 얹은 수도사들을 선두로, 농민들, 거지, 장애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고, 경찰부터 군인, 귀족 등 중요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평론가는 이 그림을 “다양한 러시아 사회의 구성원들이 먼지가 풀풀나는 헐벗은 풍경을 가로질러 불편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아무도, 심지어는 화가 자신도 볼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평합니다. 꽃가마를 진 수도사들은 마치 술 취한 사람들같이 무심하고 흐리멍텅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림의 한 가운데는 화려한 예복을 입은 사제가 혼자 걸어가는데, 시선은 그림을 보는 관중을 힐끗 바라보면서 손으로 자신의 금발을 넘기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엄숙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행사가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입니다. 왼쪽에 말을 타고 있는 경찰 앞으로 수도사들이 손을 마주 잡고 군중들이 가마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맨 앞 수도사는 목발을 집고 있는 장애인이 가마 쪽으로 가는 것을 지팡이로 막고 있습니다. 행렬 중간 중간 꽃가마 뒤쪽에 하얀 유니폼을 입은 기마 군인 하나가 행렬을 방해하는 듯한 사람에게 회초리를 크게 휘두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상황을, 아니 이 시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환대가 사라지고, 시인들이 죽어가고, 이익을 보자 의로움을 망각한 종교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시는 이 계절에 다시 절대적 환대가 시인들을 부활시키고 참종교인을 회복시키며 견리사의하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23-12-20
  • [박정곤 목사] 다(多)문화·다(多)민족·통일(統一)시대의 한국교회 선교에 대한 제언
    조선일보 11월 8일자 기사에 의하면 국내 거주 외국인 인구가 226만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4% 수치입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기준에 의하면 총 인구 중 외국인, 이민 2세, 귀화자 등 ‘이주배경인구’가 5%를 넘으면 다문화, 다인종 국가로 분류합니다. 2024년이 되면 외국인 또는 외국출신인구가 공식적으로 5%를 초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즉, 2024년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One Nation) 국가가 아니라 공식적인 다문화국가, 다민족국가가 될 전망입니다. 이미 세계화(Globalization)의 추세에 따라 국기에 대한 맹세 문구도 바뀌었습니다. 1972년에 수정된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2007년도 개정안에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로 바뀌었습니다. 단일민족사상에 근거한 ‘조국’과 ‘민족’이라는 표현대신에 ‘대한민국’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미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단일민족국가의 정체성 보다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하나의 국민이 되는 ‘대(大)한민국’을 전망했던 것입니다. 2008년 11월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는 오는 2025년에 남북한이 통일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통일연구원(KINU) 2023 한반도 정세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여전히 남북관계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향후 5년안에, 북한체제가 무너지든지, 남북한이 통일이 되든지, 통일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북한의 문이 열리게 되는 모습으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하는 1998년 CIA 보고서의 ‘북한붕괴론’이 다시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화시대 그리고 남북통일시대에 한국교회는 어떤 선교적 전략을 가지고 앞으로의 상황을 대비해야 할까요? 먼저 새터민 선교와 디아스포라 외국인 선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새터민 선교입니다. 한국에도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먼저 주의깊게 살펴봐야 할 사람들은 탈북한 새터민들입니다. 헌법 3조에 의하면 북한의 주민들도 우리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래서 탈북한 북한의 주민들에게도 대한민국정부는 합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와 자격을 부여해 줍니다. 성경에는 성도가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을 ‘형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3:10;4:20). 물론 여기에서 ‘형제’는 믿음으로 하나님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는 바울사도의 경고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딤전5:8). 탈북민들은 같은 민족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선교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고려인, 조선족들도 같은 동포들이지만 100여년이라는 세월동안 떨어져 지내다 보니 언어와 사상과 관습에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점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남북한도 다른 체제에서 70년 이상을 떨어져지내다 보니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보다는 이질감이 더 많아진 상황입니다. 또한 선교는 세상 나라의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로 들어오게 되는 영적(靈的)이민의 도구이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적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해와 인내심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2022년 6월 기준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민 수가 33,981명입니다. 사망자와 이민자를 제외하면 현재 약 2만 7천명의 탈북자가 거주 중인 것으로 추산됩니다. 한국교회는 이 탈북새터민들을 얼마나 잘 돌아보고 있을까요? 북한기독교총연합회가 발표한 '2023년 전국 탈북민교회 기본 현황'을 보면 올해 탈북민교회는 72개로 지난해보다 4곳 늘었습니다. 2000년 이전 2곳에 불과했던 남한 탈북민교회는 2000년대엔 18개, 2010년대 51개, 2020년대엔 19개가 들어섰습니다. 뉴코리아교회 정형신 목사는 “탈북민교회가 세워진 지역의 탈북민 거주 현황을 대조해보면 인구대비 교회 숫자는 제주도가 157명당 1개로 가장 높고, 경남이 1,082명당 1개로 가장 낮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교회가 있는 부산, 경남지역엔 탈북민교회가 부산에 1개, 경남에 1개입니다. 탈북민선교에 대한 교회들의 관심은 증가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새터민 중심의 탈북민 선교센터와 교회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두 번째로 이주 외국인 선교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함에 따라 전세계가 일일(一日) 생활권이 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몰려든 많은 이민자들의 성공신화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전쟁이나 기근, 국가부도와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 때문에 베트남의 보트피플이나 우크라이나 난민들처럼 대규모 이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부산 경남에 합법적으로 체류중인 외국인 인구가 20만명이 넘었습니다. 10년전에 5만명이 채 안되었으나 현재 한국인의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감소로 인해 외국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중심으로 영어예배나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실제로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예배는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일본의 고령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한국사회의 인구절벽입니다. 그 와중에 지속해서 인구가 늘어나는 계층이 다문화가정입니다. 2022년 통계청자료에 의하면 2022년 국제결혼이 17,000건으로 2021년보다 27.2% 증가했습니다. 국제결혼의 비중이 전체 커플의 11%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문화가정에 대한 정부의 교육, 경제적 지원등 여러 정책들이 있지만, 실제적으로 2세들의 교육과 국방의 의무, 정체성 문제에 대한 교회의 역할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장기체류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5년이상, 10년이상, 영구정착하는 외국인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들을 외국인이 아닌 대한민국에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선교적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각 나라, 각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현지 사역자, 지도자 양성 및 외국인 교회 개척, 설립이 필요합니다. 김해시에 네팔인 목사가 운영하는 외국인센터에 2-300명의 외국인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밀양에는 다카공동체같은 일부 모범적인 선교사례가 있긴 하지만, 수 많은 외국인들에게 각 나라와 각 민족의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지역 교회들의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문화, 다민족, 통일시대의 디딤돌과 걸림돌 문제입니다. 한민족(韓民族)은 수 천년에 걸쳐 하나의 문화와 언어로 형성된 단일민족(單一民族)집단입니다. 현재 중국땅에서 수십개의 나라와 수백개의 민족들이 비교적 짧은 주기의 나라의 역사를 가지고 세워졌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한 번 세운 나라는 수 백년, 거의 천년가까운 세월을 유지했습니다. 그것은 배타성이 아닌 다양성 속의 하나됨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다양한 나라의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비록 자신들의 출신과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대한민국의 법을 따라야 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에 어느정도 함께 맞추어 살아야 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법무부에서 운영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 같은 정부기관의 공신력있는 활동에도 참여해야 하지만, 민간외교차원에서 특히 교회에서 ‘한국어 학당’, ‘한글교실’ 같은 외국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활성화 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외국인들이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히도록 하고, 교회의 섬김과 헌신을 통한 선교적 열매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국제 외교는 상호주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국가간 등가인 것을 교환하거나 동일한 행동을 취하는 주의로 외교의 기본적 원리의 하나입니다. 이슬람권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거나 예배당을 합법적으로 세우는 일 등도 이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이슬람권에서는 법으로 기독교나 타종교 전도를 불법으로 금지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신들의 기도할 권리, 선교할 권리, 모스크를 지을 권리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호호혜주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이러한 여러 이유들로 인해, 일본은 기독교 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호 호혜주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이슬람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무슬림들을 사랑하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외교의 기본적인 원칙하에 이들을 우리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무분별하게 외국인들을 받아들이면 서구권에서 겪었던 사회적 갈등과 혼란을 우리도 동일하게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외국인들이 통일시대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력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선교적으로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기 힘든 지역에서 우리나라에 다양한 외국인들이 몰려오는 것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공산권, 힌두교, 불교권, 이슬람권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은 좌우(左右)대립, 동서(東西)대립등 지역감정과 지역불균형의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있습니다. 통일시대에 이 땅에 들어온 이민자와 외국인들로 인한 다극화 상황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양극화의 긴장상태를 완화시켜줄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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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1
  • [전영헌 목사]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요
    우리 학교(브니엘예술고) 교문을 들어서면 돌비에 새겨진 교훈을 보게 된다. 우리 학교 교훈은 좀 특별하다. 무엇보다 아주 길다. 1.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2. 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3. 나는 웃는 자와 같이 웃고, 우는 자와 같이 우는 사람이 되련다. 4. 나는 조국과 인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학생들은 교훈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학교 교훈을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교훈은 그 학교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따라서 교훈을 통해 우리 학교가 어떤 정신에서 출발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6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굴곡을 지나온 우리 학교지만, 다른 미션 스쿨과는 달리 아직도 종교라는 교과목을 통하여 신앙 교육을 하고 있고, 아이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상관없이 ‘중생회’(BORN AGAIN)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기독교에 대해 거의 안티 수준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학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회 때마다 회심하는 아이들이 수십 명씩 나온다는 점이다.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항복하고 엎드리는 아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전히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다. 나는 학교에 부임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 브니엘이 이 땅에 있는 또 하나의 학교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에 유일한 학교로 사용되게 해 주십시오!” 나는 우리 학교 아이들이 학교의 교훈대로만 산다면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학교 학생뿐 아니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학교의 교훈대로만 살아도 이 땅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날 것이다. 나는 다시 이 땅에 있는 미션 스쿨들이 설립 당시의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 신앙의 정체성을 다시 세워 나가기를 소망한다. 나는 아직 학교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대의 흐름상 종교 교육을 마음껏 할 수 있거나 학교에서 복음을 마음껏 전파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이유는 학교의 생명은 진학의 결과에 달려 있기 때문에 종교교육이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고등학교의 존재 목적이 단순히 대학 진학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진학만큼이나 중요한 기능이 있다. 바로 ‘삶의 변화’이다. 그리고 내가 모든 관심을 쏟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나는 우리 학교에 온 아이들이 성적 향상과 함께, 다른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그것은 ‘세상을 보는 눈’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이며 소명 의식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미션 스쿨에 속한 교사들만 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같이 해야 한다. 과거 미션 스쿨들의 영광을 회복하고, 신앙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할 수 있도록 미션 스쿨을 위한 관심과 기도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학원 선교는 학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와 믿음의 가정이 같이 해야 한다. 나는 90퍼센트의 학생이 불행한 교육적 상황에서 90퍼센트 이상의 학생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고 싶다. 다시 한 번 미션 스쿨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다. 최근 SNS 담벼락에 학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목사님 한분의 글을 보았다. 아니다 학교가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이다. 교회가 학교를 위해서 어떤 수고를 했는지, 교회가 기독교사들을 위해서 어떤 격려와 힘이 되어 주었는지...비판만 하고 말로만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동산으로 만들 책임은 학교와 함께 교회에도 있는 것이다. 부탁드린다.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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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0
  • [임창호 목사] 소금의 맛을 되찾아야 한국교회가 산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마5:13)”이라고 명했다. 세상에 감칠 맛을 만들어 내고 부패방지 역할을 요구하신 것이다. 8복을 설명하신 직후 천국시민 자격과 자질을 지닌 자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신 역할이다. 반대부급 효과까지도 부언하셨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것이라고. 맛을 잃어버리면 쓸모없는 존재, 버려지는 존재, 사람들에게 밟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2천년 전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자가 없을 것이다. 한국갤럽이 2022년 2월부터 11월까지 만19세 이상 성인 남녀 9,182명을 직접 대면조사한 ‘2022 종교분포’ 결과를 목회데이터연구소가 분석해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기독교인 비율은 15%로 나타났다. 2012년도 23%, 2017년 20.3%, 2021년도 20%이던 것이 1년 사이에 갑자기 5%나 감소한 것이다. 한목협은 이들 중 기독교인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성도를 29%로 보았는데, 이를 인구수로 환산하면 전체 기독교인 771만명 중 약 226만 명으로 추산되며, 따라서 실제 정기적으로 교회 출석하는 한국교회 교인은 545만 명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고 했다. 주목해야 할 부분 중 하나는 기독교 인구 15% 가운데서 30대 청년이 15%, 20세 청년은 11%로서, 실제로 30대 이하는 26%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지난 7월에 발간한 한목협의 한국기독교리포트에 의하면 30대 이하 청년 48%가 코로나시기에 교회를 떠났으며, 그 가운데 42%는 교회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다른 하나는 현재 자기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니는 사람들이 6~12%%나 된다는 사실이다. 출석교인 545만명을 볼 때 약 48~66만여명이 이단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자기교회를 이단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고 했다. 영적 분별력도 상실한 것이다. 이단교회 출석자들을 제외한다면 한국교회 출석교인은 실제로 500만명도 안될 수도 있다. 이렇게 급격하게 기독교인들이 줄어들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권위적인 문화가 싫다는 내용이었다. 교회 내에서 목사와 장로와 중직자들의 권위적인 모습과, 교인들의 배타적인 문화가 싫다는 것이다. 교회 내 청년들과 교회 밖 사람들에게 교회문화가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면 한국교회의 미래가 사라지는 일이며, 세상이 교회를 불신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어찌 복음을 전하겠는가? 문제는 소금이 제맛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체생명을 유지시키는데 필요한 체내 소금양은 0.9%라고 한다. 생리식염수가 0.9%로 조정되는 이유이다. 음식이 부패되지 않을 정도의 소금 적정양은 5%라고 한다. 저장음식이 가능한 수준이다. 20%가 되면 거의 부패가 불가능한 수준이며, 80%상의 농도에서는 항구적으로 부패가 불가능하단다. 벌꿀이나 조청수준이다. 소금으로 칭해지는 한국기독교인이 15%라는 현실은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수준이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칭찬을 들어야만 한다. 교회지도자들은 권위적 태도를 과감히 내려놓아야 한다. 성도들은 순도 높은 말씀으로 분별력을 강화시키자. 교회의 경직되고 화석화된 배타적 문화는 바꾸자. 그래야 한국교회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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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10-20
  • [탁지일 교수] 연합인가, 야합인가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떨쳐낼 수 없다. 연합이라는 미명으로, 이단마저 수용하려는 연합기관의 통합 시도를 수긍하기 어렵고, 또한 연합의 기치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뒤로는 명분과 존중은 상실한 채, 독단과 독선으로 공익을 위한 연합사업을 주무르며 그르치는 행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한다. 그런데 만약 연합이라는 미명으로 신앙고백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교계의 분열을 조장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다. 부산, 광주, 제주는 역사적으로 국내에서 교회연합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곳들이다. 서울처럼 기독교 교세와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교파 및 교단 간 연합과 협력의 필요성이 그다지 절실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차별화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광주와 제주, 그리고 복음화율이 저조한 불교의 땅에서 고군분투하는 부산지역에서의 연대와 연합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연합을 통해서만이 기독교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고, 사회적 순기능과 선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지역의 경우, WCC 문제로 지역 교계가 이견을 노출하고 갈등했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또한, 교계가 연합으로 주관하는 대표적인 사업이었던 광복동 트리 축제의 의미도 상처받고 퇴색되어, 이제는 이전의 위상을 유지하고 역할을 회복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게다가 부산지역 교계의 숙원사업이었던 기독교 역사박물관 건립 추진도 난항을 거듭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런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부산지역 기독교 연합운동에 대한 실망과 허탈함이 자꾸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다행히 지역교회 후원과 기도로 운영되는 부산성시화 이단상담소의 초교파 이단 대처 활동에 참여하는 일은 가뭄 속의 단비와 같은 느낌이다. 퇴색되어 가는 연합정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는 마치 선물과 같은 사역이다. 날로 심각해져 가는 이단사이비 문제를 생각하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부산지역의 초교파적인 이단 대처 노력이 고마울 뿐이다. 연합과 연대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상호존중과 배려이다. 배려는 ‘내가 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세밀하게 살펴 베푸는 행위이다. 존중과 배려의 마음은, 다가오는 추석 명절에 가족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는 곳도 다르고, 형편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지만,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살아온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 품에 안긴 사랑하는 가족들을 추모하며,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용납하고 받아드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의견 충돌이나 다툼이 있어도, 매년 다시 고향을 찾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합기관들의 명분 없는 경쟁과 다툼은 주변 사회의 냉소적인 비판을 초래하고, 반대로 선한 연대와 연합은 교회의 순기능적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동시에, 복음의 본질 가운데 계속 머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을 위한 교계의 상호존중과 배려가 절실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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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9-22
  • [손영광 대표] 오펜하이머의 원자폭탄을 압도하는 파괴적인 무기, 다름 아닌…
    최근 북미에서 영화 <바비>가 커다란 흥행을 거두었다. 한국에서는 힘겹게 60만명의 관람객을 동원하는데 그쳤지만, 전세계 박스오피스에서 9월 4일 기준 13억 81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며 올해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 <바비>는 정치적 올바름과 페미니즘과 관련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노골적으로 관객을 훈계하려 드는 장면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이에 젠더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꼬집은 다큐멘터리 <여자란 무엇인가? (What is a woman?)>로 유명한 맷 월시 감독은 영화 <바비>를 동시기에 상영중인 영화 <오펜하이머>와 비교하며 트위터에 “지금은 페미니즘이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기억하기 딱 좋은 때”라고 논평했다. 놀랍게도 맷 월시의 논평은 과장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수많은 태아들을 죽였다.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존귀하고 무고한 한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낙태의 현실이다. 태아는 수정 시점부터 지구상의 그 누구와도 구별되는 유일한 유전자를 가진다. 또 겨우 임신 6주차 즈음부터는 태아의 심장박동이 시작된다. 엄연한 생물학적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따라 미국의 많은 주는 심장박동이 확인된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소위 심장박동법을 제정하여 태아를 살인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오늘도 페미니즘 진영은 ‘나의 몸은 내가 선택한다(My Body, My Choice)’라는 구호를 외치며, 태아는 세포덩어리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후기 낙태의 합법화까지 밀어부치고 있는 모양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물론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또한 페미니즘은 가족을 해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차일드 트렌드(Child Trends)에 따르면 페미니즘이 등장하기 전인 1960년대 초에는 미국에서 한부모 가정에서 자라는 어린이가 9%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2년에는 그 수치가 30%까지 증가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의 이혼율도 2배 이상 증가했다. 1세대 페미니즘이 여성인권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로가 있다고 무작정 미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출발부터 불안했다. 페미니즘 운동은 우생학과 성해방을 주장하는 운동가들과 뒤엉키며 반가족적이고 반남성적인 기조가 강했다. 이후 2세대 페미니즘은 더욱 노골적으로 가족의 해체를 주장했다. 2세대 페미니스트들 중 한 명이었던 케이트 밀레는 그녀의 논문 ‘성 정치(Sexual Politics)’를 통해 “성 혁명은 전통적인 성적 억압의 종식을 요구한다. 특히 가부장적 일부일처 결혼을 가장 위협하는 동성애, 청소년기의 성관계, 혼전 및 혼외성관계 등을 금기시하는 것을 철폐하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가족의 존재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믿었다. 그녀를 포함한 대부분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낙태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했다. 현재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트랜스젠더리즘 역시 페미니즘의 탄생과 함께 등장하였다. 남성과 여성은 생식기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던 사람들이 바로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성역할은 일종의 고정관념이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계승한 것이 바로 트랜스젠더 운동가들인 것이다. 페미니즘의 산물인 트랜스젠더리즘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트랜스젠더들이 여성 운동 대회에 참가해 메달을 휩쓸거나 탈의실, 화장실 등 여성의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결국 페미니즘은 전 세계에 큰 파괴와 혼란을 가지고 왔다. 아래는 오펜하이머가 트리니티 핵실험에 대해 언급하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그러나 해당 대목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은 원자폭탄이 아닌 페미니즘인지 모른다. 대한민국도 페미니즘이라는 강력한 살상무기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남녀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결혼과 출산율 역시 바닥을 모른 채 감소하고 있다. 저출산과 대한민국 소멸의 해결책을 찾으려면 그 원인을 잘 파악해야 한다. 결정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생각과 가치관이다. 남녀 갈등과 가정 해체를 부추기는 페미니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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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8
  • [박만 교수]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하자
    나이 들고 은퇴가 가까워지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시간 생각하면 아쉽고 후회스러운 점 있지만 감사할 일들이 더 많다. 많이 모자란 사람이 그저 은혜로 여기까지 왔구나 싶다. 아울러 남은 시간 더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다짐 한다. 그 가운데 요즘 들어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에피큐로스를 곧잘 생각한다. 에피큐로스(BC 341-BC 270)의 가르침은 대단히 직설적이고 분명하다. 곧 쾌락은 좋은 것이고, 삶의 목표는 가능한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기쁨과 쾌락을 저해하는 요소들을 우리 삶에서 떼어내려고 했다. 가령 신들이 있고 그들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신들의 심판과 저주를 생각하며 살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조언한다. ‘신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설혹 있어도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당신에게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신들 생각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각자 알아서 행복의 길을 찾으라.’ 더 나아가 그는 영혼도 내세도 부인한다. 이들은 몸이 죽으면 영혼(정신작용)도 끝나고 그것으로 끝이니 영혼이니 내세니 하는 데 골몰하여 지금 눈앞의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에피큐로스의 이런 주장 때문에 그의 사유는 보통 쾌락주의(Hedonism)로 간주된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쾌락주의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첫째, 이들이 말하는 쾌락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는 쾌락이었다. 그는 귀족이나 부자 남성 같은 특권층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릴 권한이 있으며 사회 역시 이처럼 그 구성원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쾌락에도 등급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이 볼 때 맛있는 것을 먹고, 원하는 물건을 소유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 역시 쾌락을 주지만 이런 종류의 쾌락은 일시적이고 열등한 쾌락이며 정말 중요한 것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쾌락이다. 곧 이들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 해방되어 평정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진정한 쾌락이며 삶은 이런 높은 차원의 쾌락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필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도 없고 내세도 없다는 에피큐로스의 주장은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은 행복하기 위해 있고, 행복에는 등급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누구도 차별 없이 모두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깊이 공감한다. 실상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 이유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긍지있고 행복하게 살게 하려 하심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최근 들어 좀 더 행복하게 지낼 길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취미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기타를 다시 손에 잡았고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서툴지만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고 친교를 나누니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면서 다짐한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설교, 행복한 강의를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스스로 먼저 행복하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분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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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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