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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영헌 목사] 이 맘때면 생각나는 제자가 있습니다
    수업 시간마다 굉장히 독특한 반응을 하는 H가 있었다. 말하는 것도 삐딱하고, 친구들에게 비아냥거리고, 어쨌든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아이였다. 그래서 ‘참 묘한 녀석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은 수업 시간에 ‘나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학급의 친구들에게 자신을 오픈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퍼즐 조각을 맞추듯 조화를 이루는 학급이 되도록 하자고 하는 것이 그날 주제였다. 여러 학생이 자신의 강점으로 ‘끈기, 운동 잘하는 것, 말 잘하는 것,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 것, 수학, 영어 말하기, 리더십, 긍정적인 생각 등’ 다양한 답을 했다. 자신의 약점으로는 ‘끈기 부족, 집중력, 성적, 가정환경, 외모, 키 등’으로 대답을 했다. 그런데 H는 ‘나의 약점은 오른손인데요’라고 대답을 했다. “H야 넌 왜 오른손이 너의 약점이니?” 하고 물으니, 뒤쪽에 같은 중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픽픽하고 웃었다. “H야 왜 오른손이 너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니?” 재차 물었다. H가 책상 밑에 있던 오른손을 올리더니 “나는 내 오른손이 저주받은 손이라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 이 손에 카트 칼을 들고 친구를 찌르려고 했던 손입니다. 나는 이 손이 저주스럽습니다.” 같은 중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우~~~”하고 야유 섞인 소리를 내었다. 진정시키고 수업을 마친 후 H를 교목실에 불렀다. “너 중학교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이 있었니?”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친구들이 자꾸 놀렸습니다. 저는 외모 콤플렉스도 있고, 목소리도 이상해서 늘 움츠리고 있는데 그날도 계속 친구들이 나에게 찌질하다고 놀리는데 너무 화가 나서 가방에 있던 칼을 꺼내 휘둘렀습니다. 목사님 그런데요 그날부터 나는 화만 나면 칼을 찾습니다. 오늘도 교복 호주머니에 칼을 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가 너무 싫습니다. 안 그래야지 하는데 또 그러고 있습니다. 한 번은 제 오른손이 너무 싫어서 칼로 제 오른손을 그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를 더 피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제가 싫습니다.” 외모도 투박하고, 목소리도 독특하고 대인관계에 어려움이 있어서 안 그래도 친구들의 타겟이 되기 쉬운 아이였는데 중학교 때 일이 계속 H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목사님이 네 손을 잡고 기도해주고 싶은데 괜찮을까?” “네” “하나님, H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기 원합니다. H의 답답한 마음의 소리를 들어 주시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오래전의 일이 H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상처 있는 손이 사람을 살리는 손으로 바뀔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H의 손이 외로워하는 친구에게 위로의 손이 되게 하시고, 넘어진 사람을 일으킬 수 있는 소망의 손이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H의 손을 붙잡아 주십시오.” 녀석은 기도하는 내내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윽~윽”소리를 내며 울분을 토하고 있었다. 나보다 덩치가 큰 녀석을 안아주었다. 물론 H의 상처가 바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졸업하기 전에도 학교에서 한 번 소동이 일어났던 적도 있다. 지금 나는 H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른다. 소식이 닿지를 않는다. 그런데 문득문득 기억나는 제자 중 하나이다. 그냥 가슴 한켠에 아픔으로 남아있는 아이이다. 빠른 시간에 반응하고 바뀌는 아이들도 있지만 긴 시간이 지나서야 바뀌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H가 20대를 지나가는 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더 이상 자신의 손을 저주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약점이었던 오른손이 자신의 가장 강점이 되는 손이 되길 축복하며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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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5-20
  • [김태영 목사] 우크라이나 인접 국가들의 난민구호 현장과 기도요청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 중에 가장 악한 죄라면 그 첫째가 전쟁이다. 군인들끼리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그 안에는 인간의 탐욕과 소유욕, 정복욕, 과시욕, 교만이 들어있다.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비무장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이 희생당하고 얼마나 많은 약탈과 파괴가 있었던가.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되기도 하고, 나라가 통째로 무너지기도 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이나 인권은 깡그리 짓밟히고 만다. 참 무섭다. 온 세계가 지구촌이라며 그 어느 때 보다 정보, 통신, 교류가 활발한 21세기에 난데없이 전쟁이 터지고 벌써 2개월이 되어 가지만 휴전이나 종전 소식은 들리지 않고 많은 국민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필자가 섬기는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은 15년 전, 서해안 태안지역의 기름 유출 사고 때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 NGO들이 기름 방제 작업을 각각 하면서 효과적인 연합 사업을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국내의 크고 작은 재난 현장뿐 아니라 용산참사 유가족 위로,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마포 주택을 제공하였으며 해외의 네팔과 아이티 지진에도 현장에 가서 봉사하고 기술학교를 세워서 지금까지 섬기고 있다. 금년 2월 24일, 군사 강국인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EU소속 국가뿐 아니라 대다수의 국가들이 ‘전쟁을 그칠 것’을 권하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가까지 미사일이 떨어지므로 400만명 이상의 피난민이 생기고 방공호에 피신한 국민들은 날마다 생사의 기로에 놓여지게 되었다. 한교봉은 고난받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회를 한 후에 3.8-14 까지 기자들을 동행하여 8명을 루마니아 국경 지역으로 파견하여 긴급구호 활동과 사태의 심각성을 생생하게 보도하여 한국교회로 하여금 기도하고 관심을 가지게 하였으며, 4.1-8 2차로 필자와 함께 5명이 체코, 스로바키아, 헝가리를 방문하여 긴박한 구호 현장과 효율적인 피난민 지원을 점검하였다. 국경 인접 지역의 기독교 교단과 기독교 NGO, 한인선교사회, 우크라이나 선교사님들의 희생적 수고가 있음을 보았다. 체코에 머무르는 우크라이나 피난민은 약 30만명이며, 국립 프라하대학교 총장이며 신부였던 종교개혁가 얀 후스(1372-1415)가 종교 재판으로 화형당한 후 후스의 후예들이라고 하는 ‘체코형제복음교단’(ECCB) 소속 130교회에서 1,200명의 피난민들에게 숙소와 음식, 유치원 교육을 제공하고 있었으며, 이 지원을 총괄하는 디아코니아 기관이 있었다. 헝가리 정부는 에너지 정책 등의 이유로 친러 정책을 펴고 있으나 칼빈의 교리를 따르는 헝가리개혁교단(RCH)은 ‘약자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는 말씀을 모토로 1,249교회, 180만 성도들이 피난민 20만명을 적극적으로 보살피고 있었다. 한교봉은 헝가리개혁교단 봉사단과 MOU를 체결하고 종전 후 우크라이나 복구 때에도 함께 협력하기로 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 안에 헝가리개혁교단 소속 교회가 108교회가 있으며, 그중에 73명의 목회자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회중이 피난 간 교회에서 사례비조차 받지 못하면서도 남아 있는 교인들을 돌보고 있었다. 한교봉은 전쟁지역인 우크라이나에 입국할 수가 없어서 유엔 세계식량계획(UN WFP)과 유엔 난민기구(UN HCR)에 각각 10만 달러(환화 2억 6천만원)를 기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크라이나의 눈물을 닦아주도록 하였다.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은 한국교회가 전쟁 종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에 ‘알지 못하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은 교단이나 기독교 NGO가 각자의 방식으로 모금하고 돕고 있으나 종전 후에는 기독교 라운드 테이블을 만들어서 ‘한국교회 이름’으로 선교사회와 전후 복구에 함께 했으면 한다. 6.25 전쟁의 참회를 겪은 우리나라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하여 국가 안보의 소중함을 더욱 절절히 깨달아야 한다. 파스칼은 ‘힘이 없는 정의는 무능이요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라고 했다. 힘없는 우크라이나와 정의 없는 푸틴을 보면서 새 정부가 힘과 정의의 균형을 이루고 교회는 평화의 도구가 되는 일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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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4-29
  • [탁지일 교수] 부활과 이단
    이단 교주의 죽음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신이라고 믿었던 교주의 죽음은, 신도들에게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그렇기에 교주의 주검을 눈앞에 두고도 교주의 죽음을 부인하거나, 부활할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으로 주검을 방치하는 비상식적인 일까지 일어난다. 이해는 된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심지어 가족을 포기하면서까지, 인간 교주를 불로불사 영생불사의 신으로 숭배하며 추종했는데, 그 신이 사망한 것이다. 공황상태다. 교주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선택이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지부조화의 순간이다.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편을 선택한다. 그래야만 가족과 지인의 애틋하지만 냉소적인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교주가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그 죽음을 이내 미화하고 신격화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단계로 쉽게 넘어간다. 교주가 사망한 후에도 이단 단체에 계속 남아있기로 결정한 이들은 각기 다른 셈법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사리사욕을 계속 채우기 위해 사망한 교주를 이용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교주의 죽음을 스스로 합리화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돌아갈 곳이 없어 이단 단체에 자포자기 상태로 계속 머무는 편을 선택하기도 한다. 결국 교주의 죽음은 문제의 해소점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 6·25전쟁 이후 수많은 기독교 이단들이 발흥했고, 흥망성쇠를 거친 교주들은 예외 없이 사망했다. 하지만 교주가 사망한 후에도, 유사한 이단 단체들은 여전히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예를 들면 서울 한복판에서 이미 사망한 구인회 교주를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며, 그의 사진이 담긴 전단 벽보를 붙이는 재림예수교 전국복음 전도회 소속 신도들이 아직도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구세주”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문선명 교주는 사망했지만, 통일교는 여전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부인 한학자는 자신을 “6천 년 만에 탄생한 독생녀”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신이 되어 통일교를 이끌고 있다. 오대양사건과 세월호사건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유병언은 사망했지만, 구원파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오히려 두 사건을 거치며 충분한 학습효과와 면역력을 키운 모습이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1985년 사망한 교주 안상홍을 “재림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으로 신격화하고 있다. 게다가 소위 “어머니 하나님” 장길자를 중심으로 국내외에서 교세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1988년, 1999년, 2012년의 반복적인 시한부종말론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신도들은 또다시 종말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만약 신천지 이만희 교주가 사망하면, 신천지가 없어질까? 물론 역사 속의 다른 이단들처럼 반드시 몰락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이만희가 사망하면, 일단 신격화 교리가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 이만희를 노리는 추종자들은, 이만희를 이용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조직을 장악한 후에는, 마침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울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단 교주의 죽음을 계기로 이단을 떠나는 탈퇴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단이 싫어서 떠난 탈퇴자들의 경우, 반드시 교회를 대안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단도 싫고, 교회도 싫은 혼동과 혼란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피해 치유와 회복을 위한 절체절명의 시간이다. 만약 교회와 가정이 이단 피해자들을 따뜻하게 품어내지 못하면, 피해는 반복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부활 없는 인간 교주의 죽음을 미화하는 이단들의 허망지설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준비하는 교회의 선견지명이 필요한 부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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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4-12
  • [송시섭 교수] 노멘(nomen)과 아그노멘(agnomen)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할 것이다. 정부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사용하다가, 일종의 별칭(別稱)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그 시작으로 그 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는 명칭이 사용되다가, 다시 ‘이명박 정부’에 와서 다시 대통령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이는 아마도 미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미국에서는 바이든 행정부(administration)라고 부르고 있는 점에 비추어 ‘윤석열 행정부’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성경에서도 이름 또는 명명(命名, naming)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 곳곳에서 이름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운명이 결정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예수님도 의미심장한 순간에 제자 시몬에게 게바 또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을 보면 ‘이름’은 성경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다. 이름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평소 궁금했던 부분 중 하나가 ‘사울’에서 ‘바울’로의 이름 변경의 배경이다. 이전까지는 다메섹 도상(途上)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사울’이 ‘바울’이 되었다는 설교가 강한 인상으로 자리 잡아 아마도 그 무렵 언제쯤 이름을 바꿔 부르게 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이름이 바뀌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이름 변경의 배경을 1차 전도 여행으로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울이 바나바와 함께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Cyprus)섬에 도착하고, 섬을 가로질러 바보(Paphos)에 이르러 바 예수(Bar Jesus)라는 마술사(엘루마), 유대인 거짓 선지자를 만나 그의 방해를 물리치고 총독인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에게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갖게 했다는 기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특히 위 마술사를 주목하여 꾸짖는 장면에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 이전 줄곧 써왔던 ‘사울’이라는 이름 대신에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그 후론 ‘사울’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 이름을 ‘바울’로 통일하는 기술(記述)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름이 변경된 이유나 배경과 관련하여 학자들 간의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나 그 중 눈길을 끄는 설명이 있다. 초대 교부시절부터 주장되어 오랫동안 인정받았으나 최근에 강한 비판을 받고 있는 해석으로, 그 주장의 요지는, ‘사울’로부터 ‘바울’로의 이름 변경과 관련하여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Scipio)가 아프리카(Africa)를 점령한 후 그의 이름(nomen) 뒤에 아프리카누스(Africanus)가 추가된 것처럼 ‘사울’이 총독 ‘바울’을 개종시킨 후 ‘바울’이라는 새로운 이름(agnomen)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로마의 특이한 명명법(命名法)에서의 착안한 발상이 아닐까 한다. 로마의 이름 체계상 ‘아그노멘’(agnomen)은 일종의 별명(別名) 내지는 훈장(勳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은 총독 ‘바울’이 믿음을 갖기 전에 이미 ‘사울이 바울로도 불렸다’(행 13:9)는 본문과 배치되지만 그 주장의 동기는 많은 생각을 갖게 했다. 이는, 우리의 이름이, 인생의 어느 순간을 지나며 우리의 성취를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본다면 ‘윤석열 정부’, 아니 ‘윤석열 행정부’는 출범시 이름(노멘)에 불과하고, 역사에 기록될 이름(아그노멘)은 분명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선거 과정에서 외쳤던 ‘공정의 정부’가 될지, ‘상식의 정부’가 될지, 아니면 ‘국민통합정부’가 될지는 앞으로 5년간 그 정부가 이룬 업적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역사적으로 최종결정될 것임은 분명하다. 부디 국민들의 정권교체에 대한 오래고 깊은 열망을 떠안아 탄생한 정부니만큼 5년이 지나 다시 얻게 될 이름이 영광의 ‘아그노멘’이 되길 기도한다. 그래야 찬반을 넘어, 코로나를 뚫고, 밤잠을 설친 모든 주권자들이 행한 투표의 가치가 온전히 구현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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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03-18
  • [송길원 목사] 자기 검역의 시간이 왔다
    "오, 신이시여, 당신의 바다는 더 없이 크고, 제 배는 더 없이 작습니다.”(O, God. Thy sea is so Great and my Boat is so Small.)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어부의 기도’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 위 동판에 새겨졌었다고 한다. 기도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의 첫 설교에도 인용된다. 그의 나이 23살 때다. ‘나는 이 땅의 나그네이오니...’ 어린 나이에 무슨 ‘나그네’일까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아니다. 나그네는 초기기독교인들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에 신앙고백이 담겼다. 아브라함이 말한다. “나는 당신네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 23:4). 어느 날 야곱이 바로 앞에 선다.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를 묻는다. 야곱이 자신의 나이를 밝히기에 앞서 스스로를 나그네라 칭한다. 묻지도 않은 일에 대한 고백이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창 47:9). 나그네는 돌아갈 본향이 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삶의 본적지는 하늘나라다. 지난 주, 한국 지성의 대들보라 불리는 이어령 교수가 ‘돌아가셨다’. 그는 생전에 죽음을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 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말했다.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 한 마디로 우리는 돌아서야 한다.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 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니까.”(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우리 모두 ‘귀환명령’을 따라 돌아가야 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앞서 세계 권력을 손에 쥔 케네디도 알았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작고 작은 보트에 비유된 겸손의 자기무장이었다. 고흐도 그랬다. 동생 테오에게 늘 빚진 삶을 살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고단했다.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자살을 시도할 만큼 생은 험난했다. 야곱만이 아니었다. 모든 인생은 고통과 함께 살아간다. 파도가 없는 바다가 진짜 바다가 아니듯 고통이 없는 인생은 진짜 인생이 아니다. 지난 주, 내가 담임으로 있는 청란교회 가족들은 나그네를 주제로 삶의 수칙을 만들어보았다. 하나. 낯선 것은 당연하다. 설렘으로 바라본다. 그렇다고 동경하지도 않는다. 둘. 불평하거나 투덜대지 않고 감사한다. 더 좋은 것이 있음을 알아서다. 셋. 다른 언어를 갑갑해 하지 않는다. 친절과 미소의 제 2 모국어를 쓴다. 넷. 너덜너덜 많은 짐을 거추장스러워 한다. 심플한 것의 자유를 누린다. 다섯. 조급하거나 초조해 하지 않는다. 영원히 머무르지 않은 것을 알아서다. 형제, 자매, 집사, 장로... 그 어떤 호칭보다 ‘나그네’가 정겹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그네는 초대교인들을 위로하고 다독이는 소망이고 꿈이었다. 그 삶이 파도로 일렁이는 바다를 헤쳐 나가는 조각배와 같을지라도 그들은 겁먹지 않았다. 엄마 태속의 아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나그네는 하나님의 마음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있음도 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약자들을 돌볼 줄 안다. 나그네들은 ‘험악한 세월’을 살고 세상을 떠날 때라도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고백처럼 ‘나의 집을 떠나듯이 인생을 하직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숙을 떠나듯이 인생을 하직’할 것이다. 재의 수요일(3월 2일)로 시작해 우리 모두 자기 검역의 사순절을 보내게 되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시간인가?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가?“나는 나그네이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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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4
  • [최병학 목사]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와 한국의 이대남
    최근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사회의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로 인해 급속도로 ‘진보’가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일부 이대남들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곧 ‘일베 이대남’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을 ‘활성 이대남’으로 부르는 이도 있습니다만(사회비평가 박권일), 아무튼 이들은 ‘안티 페미니즘’의 기치를 내걸고 절차적인 측면에서 공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령 평창 겨울올림픽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과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관련 사안에 있어서 이대남들은 “왜 아무 근거도 없이 패자를 승자와 같게 만들어 버리냐?”라고 따져 묻습니다. 기성세대는 공정을 내용적인 공정, 곧 서로 경쟁하더라도 승자와 패자 간에 격차가 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대남들은 각자도생과 승자 독식의 가치관을 주입받았기에 사회적 평등보다는 개인의 만족과 자유를 중시하는 가치관에 길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는 능력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서열주의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우경화로 이대남들이 60대보다 더 보수적으로 되었습니다. 반면 미국의 이대남들은 급속도로 좌경화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씨앗은 일찌감치 뿌려졌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불평등을 인식하고 2011년에는 월가를 점거하고 “우리는 99%다!”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는 민주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힐러리 클린턴을 패배 직전까지 몰아세웠습니다. 물론 한국의 이대남은 그 반대 견해인 후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밀레니얼 사회주의 선언: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가난한 세대의 좌회전』(동녘, 2021)에서 미국 밀레니얼 좌파 정치의 주역이자 열렬한 민주사회주의자인 네이선 로빈슨(무려, 1998년생입니다!)은 미국 이대남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가난과 부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봤다. 명품 판매업체들이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파는 것을(티파니는 490달러짜리 순은 각도기를 판다). 나는 봤다. 미국인이 매일 먹지 않고 버리는 음식 15만 톤부터 버버리가 상품의 희소성과 비싼 값을 유지하기 위해 해마다 소각하는 수천만 달러어치 고가 핸드백까지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배출하는 것을. 나는 봤다. 누구는 해마다 새 휴대전화를 사고 전에 쓰던 휴대전화를 서랍에 넣어두는데,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일용 노동자들이 45센트를 벌기 위해 토마토를 따서 14㎏들이 바구니를 채우는 것을. 나는 왜 사람들이 이 모든 것에 분노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미국은 전역에서 밀레니얼 사회주의자들이 독서 모임을 시작하고, 책자를 출간하고,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집마다 찾아다니며 영향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의 문제가 역사상 가장 똑똑하지만 가난한 세대를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는 ‘사회주의’라는 단어만 봐도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남북이 갈라지고 휴전 중인 우리나라에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무찌르고 박멸해야 할 그 어떤 것으로 상징됩니다(재벌 부회장이 잘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 이념이 아니라, 현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이겠죠? 아무튼 이념에 공감하는 이들에게도 사회주의는 무겁고 비장하며 다소 칙칙한 정언명령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미국 밀레니얼 세대들에게는 사회주의 이념이 “따뜻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힙’ 한 상상력”이 됩니다. 로빈슨의 사회주의 개념 정리를 볼까요? “사회주의는 현실적인 믿음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돼야 하고 어떻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급진적 생각으로 나아간다. 사회주의는 인도주의적 공감에서 미래의 비전을 이끌어낸다. 즉 사회주의는 전쟁이 없는 세계, 계급이나 인종적·젠더적 위계가 없는 세계, 심각한 권력 불균형이 없는 세계, 부와 빈곤이 없는 세계, 모든 사람이 즐겁고 행복한 세계를 추구한다. 우리는 지금 이런 세계에 살지 않는다. 지금 세계는 불평등하고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으로 가득하다. 사회주의자는 엄청난 환경 파괴를 막고 자살과 영양실조, 독재자든 사장이든 압제를 없앨 때까지 쉬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야심 찬 포부의 말이지, 사회적 약자를 사랑하자는 막연한 주장이 아니다.” 새로운 세상에 동참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이대남들에게, 미국 이대남 따라하기를 제안하면 박멸될까요? 조카와 동생, 아니 아들 같은 이대남들에게 우려 섞인 걱정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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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1
  • [김기현 목사] 태초에
    새해니, 뭐니 하는 것에 시큰둥한 이들이 있다. 어제와 오늘이 무엇이 다르며, 작년과 올해가 어떻게 구분되겠나. 나 역시 그렇다. 다를 것 하나 없다. 똑같다. 괜히 요란 떨 것 없다. 그럴수록 남는 것은 허탈함 뿐. 실망만 더 커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제정한 새해 첫날에 의미가 없지 않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첫 단어가 입증한다. “태초에” 아니 2022년을 맞이하는 것에도 토를 다는 이들이 허다한데, 웬 고려적 이야기도 아니고 원시 시대로 돌아가느냐고 타박할는지 모르겠다.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5절을 읽어보면,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데자뷔를 느낄 것이다. 많이 들었고 보았던 본문이다. 신년 첫날만 되면 펼치던, 올해는 꼭 성경 일독하리라 마음먹고 열었던 그 본문, 바로 창세기 1장 1절이고, 좀 더 넓게 펼치면 창세기 1장 전체다. ‘태초에’로 시작하고, 천지창조를 이야기하는 바로 그 성경 말이다. 그렇다. 사도 요한의 의도는 예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창세기 1장에 기대고, 끌어와서 자신이 말하는 바를 강화하고 논증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의 바로 그분이고, 창조주이기에, 지금도 창조자라고. 두어 해 전부터 나는 한나 아렌트를 틈틈이 읽고 있다. ‘악의 평범성’으로 잘 알려진 이 정치철학자는 곳곳에서 ‘탄생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의 정치 공동체가 이전과는 다른, 즉 나치즘과 전체주의, 아우슈비츠와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지닌 새로운 공동체로 태어나기 위한 그녀의 염원이 담긴 말이다. 끝도 없이 뱅뱅 도는 시간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궁구했다. 그 단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온 것이다. 그렇게 연원을 추적하면 성경에서 나온 개념이 ‘탄생성’이고 명확하게 짚는다면, 창세기 1장 1절과 요한복음 1장 1절의 이 단어, ‘태초에’이다. 사도 요한이 말하려는 바는, 태초, 즉 시작점이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인류 역사와 공동체, 그리고 개인에게 가능하다, 현실적이다, 그렇게 말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시작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과 설계도는 예수이다. 그냥 예수라고 하면 안 된다. 특정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손가락으로 특정한 대상을 가리켜야 한다. 저것은 아니고 바로 이것이라고 하는 그것을 지시해야 한다. 예수라는 인격 앞에 어떤 단어를 붙이든가, 아니면 ‘=’ 부호를 사용해야 한다. 예수 = ??일까? 그렇다. 예수 = 말씀이다. 말씀인 예수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나요? 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말씀요’라고 한다. 말씀을 듣는 것을 성서가 그토록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을 낭송하는 것, 묵상하는 것, 암송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간을 부여한다. 말씀인 예수를, 말씀 = 예수를 주야로 묵상할 때, 내 삶에, 내 공동체가 재탄생한다. 성경을 읽기로 마음먹고, 묵상하는 바로 그날이 새해 첫날이고, 태초의 그날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태초의 시간이다. 돌고 도는 시간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시간을 선물로 받고자 하는 이에게 단 하나의 선택과 결정은 성경 묵상이다. 아, 태초의 그 날이 오늘이었구나. 잘 읽자! 잘 살자!! (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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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07
  • [강규철 장로] 성탄의 추억
    12월이 오면 나이 많은 성도들이 추억 저편으로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탄절과 새벽송입니다. 그냥 국밥 한 그릇 먹고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여 캐롤을 부르고 따뜻한 단술을 대접 받고 사탕 한 꾸러미를 받아오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많은 성도들의 가슴속에 간직한 로망이었으며 소중한 추억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교회 생활은 바로 성탄절에 관한 것이 아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한 달 전부터 성탄 트리를 만들고 교회 안팎으로 장식을 하고 새벽송을 할 때 들고 다닐 별모양의 등과 십자가 등을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성탄 축하 찬양과 성극 등을 준비하느라 매일 저녁 예배당이 북적거렸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한껏 부풀었으며 즐거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성탄전야에 중고생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물교환입니다.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은 학생들은 싱글벙글 하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또다시 내년을 기다려지는 것은 모두의 마음일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우리 모두의 축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캐롤송을 들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온 가정이 즐거워하는 국민 전체의 축제였습니다. 새벽송을 돌 때 성도들의 가정만 방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새워 수고하시는 파출소, 소방서 등 관공서를 찾아 캐롤을 부르며 선물을 드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예배당의 종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어스름한 저녁놀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마치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피곤한 육신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안식과 위로의 종소리였습니다. 무엇보다 성탄절에 울리는 탄일종소리는 이 땅에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가 오셨으며 평화의 왕이 오셨음을 알려주는 기쁨의 종소리였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주고받는 카드에는 주로 눈 덮인 시골 조그마한 교회와 종각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종소리가 챠임벨로 바뀌고 그 챠임벨 소리가 소음이라 하여 사라지면서 성탄의 기쁨과 추억도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지금은 교회의 상징 중 하나였던 종각이 있는 교회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땡그랑 땡그랑 울리던 그 종소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옵니다. 그래도 12월이 되면 거리마다 볼 수 있는 구세군의 자선냄비와 종소리가 그나마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태어나신 날, 그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즐거이 맞이하면서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아름다운 추억을 갖게 되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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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7
  • [김영일 목사] 버려야 할 ‘꼰대’, 지켜야 할 ‘꼰대’
    최근 우리사회가 급속한 변화를 추구하면서 생겨나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그런 많은 말들 중에 소위 말하는 ‘꼰대’ 라는 것이 있다. 이 ‘꼰대’ 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의미는 ‘꼰대’ 는 은어로 ‘늙은이’, 학생들의 은어로는 ‘선생님’을 의미한다고 나와 있다. 이로 보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며, 이를 분명히 하려면, ‘꼰대질’ 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기성세대가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젊은 사람에게 어떤 생각이나 행동방식 따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행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 이라고 되어 있는 데서, 소위 ‘꼰대’ 라는 것은, 현장감각을 잃은 체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이 ‘꼰대’ 라는 말은 다분이 우리들에게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이 ‘꼰대’ 라는 말은, ‘되어서는 안 되는 어떤 이미지’ 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필자 역시 이 ‘꼰대’ 가 없는 세상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다분히 있다. 필자 역시 이 ‘꼰대’ 라는 말을 분명히 좋아하지 않는 단어의 목록에 들어있음도 사실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하고 넘어가고 싶다. 어릴 때 필자 역시, 선생님 중에서 강하게 생활규범을 강조하면서, 바른 이미지의 어떤 표상들을 제시하면서 일러주던 선생님을 향하여, 시대감각이 뒤떨어진 분이고, 뒤돌아서 가시는 선생님의 뒤에다 들리지 않는 소리로, 수없이 ‘꼰대’ 라는 소리를 외치곤 했었다. 그 당시 필자의 기준에는 그 선생님은 너무나 답답하신 분이었고, ‘저렇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는 분’ 이라는 이미지를 끊임없이 새기곤 했었다. 얼마 전 옛친구를 만나 담소하던 중, 필자는 문득 친구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가끔 놀러가는 필자를 앉혀두고, 장시간 이런저런 좋은 지도의 말씀들을 들려주시던, 그 아버지가 떠올랐다. 친구의 아버지를 만나는 것 때문에 친구네 가기가 발길이 참 무거웠었다. 또 잡히면 한두 시간은 족히 들어야 하는 잔소리에, 친구네 놀러갈 때는 꼭 아버지가 계신가를 확인하곤 하였었다. 바로 제게는 지독한 ‘꼰대’ 였었다. 그런데 왜 그분들이 그리워지는 것인가? 답답하게, 그리고 접미사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필자의 숨이 막히게 했던 그분들이 그립다. 어투까지 기억나며, ‘그리 살았어야 했었는데...’ 를 되내이며, 가슴이 먹먹해지도록 그리운 것은, 그런 선생님을, 그런 친구 아버지를 둔 필자만의 생각이며 삶일까? 바로 그 필자의 ‘꼰대’ 들이 산 바로 그 삶이, 필자가 걸어가지 않은 삶이었기에 이토록 미안해지는 것은 왜일까? ‘꼰대’ 가 그립다. 지금 우리시대에 비록 정해진 틀 때문에 답답하고 힘든 것은 있지만, ‘이것이 제대로 된 길이야. 이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이 진리를 따라 살지 않으면 망할 수 있다.’ 며, 폐부에 깊은숨을 토하면서 알려주는 ‘꼰대’, 바로 그 ‘꼰대’ 들이 있는가? 완전한 정답은 아니어도, 적어도 인생을 살면서, 그 인생에서 나름대로 얻은 진리를 전해주면서, 삶의 확신, 인생의 철학을 전수해주던 그런 ‘꼰대’ 가 지금 이 시대에 있는가? 우리의 삶에서 마냥 뒷방늙은이 신세로 몰아 넣어버리며, 앞뒤 돌아보지도 않는 체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이 시대적 상황에서, 그런 깊은 철학을 가진 진정한 ‘꼰대’ 를 지켜야 하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면에 ‘꼰대’ 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순간순간 우리들에게 살아져야 할 삶에서 ‘꼰대질’, 그야말로 버려져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줌도 안 되는 권력과 권위, 아무 가치도 없는 기득권을 끝까지 주장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치없는 ‘꼰대’ 와 ‘꼰대질’ 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도 새롭게 일어나는 신진학자들을, 그동안 자신의 업적에만 매몰되어 막으려는 선배학자들이 무시한다면 그것이 ‘꼰대질’ 이며, 건강한 주장들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에 배치된다고 하여, 그 주장들을 발로 밟아버리는 것은 대표적으로 축출되어야 할 ‘꼰대질’ 인 것이다. 이런 것들이 자리잡고 있는 한, 시대적인 발전은 결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깊은 삶의 철학, 인생의 깊은 의미, 그리고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를 고수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꼰대’ 들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고루하게 만들고, 별 가치없는 몇몇의 권위의식과 기득권 주장 같은 생각들은 우리 가운데서 반드시 제거해 내어야 할 ‘꼰대질’ 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무가치한 꼰대질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이 시대의 진정한 ‘꼰대’ 까지 버리면, 이 시대는 바람에 날려가는 초개같이 가벼워져, 어디로, 무엇을 위해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까지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반드시 지켜야 할 진정한 ‘꼰대’ 와, 가차없이 버려야 할 ‘꼰대’를 잘 구별하여 세워가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좌표가 없이 방황하는 가치기준을 분명하게 세워주는 존경받는 ‘꼰대’ 들을 충분히 인정하고, 뿌리뽑아야 하는 기득권 주장에 매몰된 ‘꼰대’ 는 축출하여, 균형감각이 살아있는 아름다운 세상,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모두 눈을 떠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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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3
  • [김태영 목사] 인격의 크기와 신앙의 깊이
    근대로 넘어오기 전에 서양에서는 신분제도가 있었고 마차가 교통수단이었다. 말이 끄는 마차에도 1등석부터 3등석까지 있던 시절이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면 퍼스트 클래스석, 비즈니스석, 이코노미석이 있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달리던 마차가 고장 나거나 진흙탕에 빠지면 3등석 사람은 내려서 마부와 함께 마차를 끌어내고, 2등석은 내려서 지켜보고, 1등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고 한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다 못해서 갑질로 비난을 받을 일이다. 사회에서 명망 있고 직장에서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곧 인격의 크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인격은 계급과는 상관없다. 교회에서도 목사, 장로, 노회장, 총회장이 되면 신앙의 깊이가 깊을까? 그럴 수도 있으나 나의 경험으로는 집사님 중에 본 받을만한 한결같은 신앙으로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많다. 직분과 신앙이 비례되는 것은 아니다. 산상 보훈 중에 ‘세상의 소금과 빛’에 대한 교훈은 교회는 교회로서, 기독인은 기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소금의 기능이란 아주 간단하다. 짠 맛을 내는 것이다. 그 맛을 잃으면 버려지게 된다. 소금다움이란 짠 맛으로서의 역할을 의미한다. 설탕 없이도 밥 먹을 수 있지만 소금 없이는 밥 먹기가 힘들다. 간이 안 되어 있으니 무슨 맛이 있겠는가. 소금이라도 자연산 천일염과 맛소금은 다르다. ‘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맛소금은 인공조미료(MSG)를 배합하여 감칠맛까지 더하여 음식점 요리에 많이 사용되었지만 요즘은 건강을 따지다보니 맛소금은 외면하고 미네랄이 풍부한 자연산이 대세다. 교회 강단의 설교자들은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해서 자연산 천일염을 공급하려고 힘을 써야 하는데 성도들의 입맛을 맞추려고 온갖 MSG를 첨가해서 성공, 소원성취, 믿습니까, 아멘 유도 발언등 기복이 섞여서 말씀의 원래 의미(맛)는 사라지고 강단이 세속화되어 만담과 농담을 늘여놓는다면 어디에서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겠는가. 강단이 영적 성숙은 커녕 미숙자를 양산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하자. 어릴 적 여름 방학 때는 한 밤중에 어디를 가든지 반딧불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나 여기 있소!’ 하고 존재감으로 반짝였다. 요즘은 세상이 워낙 밝으니 그 반딧불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어라’고 하셨는데 등대와 등불은 못되더라도 반딧불 정도라도 비추어야 할 텐데 혹시 반딧불 빛마저 잃고 어둠에 어둠을 보태지는 않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희미하나마 작은 빛이 기독인의 존재감이다. 신앙의 연수를 자랑하는 만큼 신앙의 깊이가 있는지를 돌아보자. 중직과 요직이라는 직분에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것만큼 인격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지 성찰하자.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지니고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천일염 소금과 반딧불 빛이 되는 삶을 살아가자. 별 빛을 따라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 마구간까지 인도함을 받은 동방박사들을 생각하는 성탄 계절이 다가왔다. 새벽별이신 주님을 따라 한걸음씩 나아가자.
    • 오피니언
    • 정론
    202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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