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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규철 장로] 다음세대를 살립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당면과제중의 하나는 주일학교의 부흥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일학교의 부흥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는 교회가 주일학교 학생들이 모여 있는 학교와의 관계에는 무관심한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것입니다. 흔히 인구 대비 기독교인의 비율이 2~5% 미만이면 미전도 종족지역이라고 합니다. 현재 많은 교회가 미전도 종족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물질로 지원하고 온 교회가 그를 위하여 기도로 후원합니다. 그런데 기독학생의 비율이 5%도 되지 않는 학교에는 왜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으냐고 질문하는 교회 지도자는 없습니까? 부산에는 기독교 건학이념을 가진 학교가 20개입니다. 그런데 교목이 있는 학교는 반이 채 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기독교 교육을 포기한 학교가 그만큼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다음세대 육성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교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근간이 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나 변명이 있겠지요. 재정이 부족하다든가, 마땅한 청소년 사역자가 없다든가, 혹은 오늘날 공교육에서 기독교 편향적인 교육을 금지한다든가....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학교를 책임지고 있는 이사장이나 학교장의 잘못된 시각과 무관심에 있다고 봅니다. 이는 교목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재정은 교목을 교양과목인 종교교사(기독교 윤리 전공)로 채용하면 해결되고 현재 신학을 전공하는 사역자들 중에는 얼마든지 뛰어난 청소년사역자들이 있으며 사학의 건학이념은 보존시켜야 하는 권리가 학교에 있습니다. 현재 교목이 활동하고 있는 학교에서 인기투표를 한다면 아마 교목이 최다득표를 받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교목은 학생들과 마음으로 만나는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교목실은 학생들의 사랑방이고 놀이터입니다. 실제로 학생들이 담임이나 부모한테도 말 못하는 고민을 교목한테는 다 털어놓고 상담하는 경우를 아주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교목이 친근한 보호자이며 상담자이고 자상한 형님이자 종교에 상관없이 의지할 수 있는 목사님입니다. 이들이 재학 중에도 교목의 영향으로 교회를 찾아가지만 졸업하고 난 뒤에 군에 가거나 어려움이 닥치면 이들은 목사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브니엘고에서는 한 해 동안 세례를 받는 학생이 100명 가까이 됩니다. 물론 일반교회에서 받습니다. 이는 한 학년 학생 인원 대비 30%가 넘는 숫자이며 입학할 때의 기독교인의 비율이 4~5% 밖에 되지 않음을 감안하면 기독교학교와 교목의 역할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학교에 할 수 있는 선교차원의 활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먼저 교목이 없는 기독교학교에 젊고 유능한 청소년 사역자를 교목으로 파송하는 것입니다. 주중에 학교에서 교목으로 활동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섬기면 됩니다. 이는 학교라는 선교지에서 다양한 학생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하므로 사역자 본인에게도 큰 도움이 됩니다. 학교는 교목으로 인한 교사정원의 마이너스가 없고 교회는 당당하게 많은 학생들을 상대로 전도할 수 있게 되니 서로가 윈윈 할 수 있습니다.현재 각 학교에는 상담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일학교 담당 사역자가 상담자격증을 갖고 있으면 학교에서 상담교사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활동비도 제법 상당합니다. 신학을 공부할 때 상담학을 부전공으로 한다면 더욱 좋겠지요. 현재 부산교육계에는 장로, 권사, 신실한 신자들로 구성된 교장신우회가 있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제도적으로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심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을 교회의 후원자들과 연결하여 도움을 준다면 이들은 잠재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다음세대를 걱정하며 육성하고 싶다면 우선 기독교학교를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지에 지원 하듯이 교회 주변의 학교와 학생들을 위한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합니다. 또한 교육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사들, 특히 교장들과의 유기적인 모임을 통해 체계적인 활동을 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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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2-03
  • [김충만 목사] 사랑 2그램(2g) 먹고도 살지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나는... 사람은 밥과 고기와 물과 나물을 먹으며 살아간다. 단지 이것들만 먹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뭔가를 먹어야 하고, 그래야 기력을 얻어 건강을 유지하며 삶의 호흡을 신바람 나게 이어갈 수 있다. 혹여 며칠은 굶거나 물만 먹는 것으로 연명하거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응급 상태만으로 계속해서 살 수는 없다. 어떻든 살기 위해서라도 뭐든 먹어야 한다. 사람은 그리 만들어졌으니까.그럼 반전인데 사랑 2그램(2g), 기쁨 한 접시, 여기에 행복 한 공기와 감사국 한 그릇을 은혜라는 반찬과 함께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사랑과 행복과 기쁨과 감사와 은혜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손으로 쥘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무게를 달 수도, 색깔을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더욱 아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공기만 보아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가. 이렇듯 오감(五感)에 잡히지 않거나 경험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암(癌)에 걸려보지 않았어도 암은 있고, 내가 달나라에 가보지 않았어도 달은 존재하고, 내가 저 깊은 바닷 속 심해(深海)에 발을 딛고 서보지 않았어도 바다의 바닥은 단지 끝없는 물로 되어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니까 경험하고, 맛보고, 잡아보고, 눈으로 봐야만 그런 것들만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노라면 밥도 먹고 또 그런 게 자연스럽게 늘 곁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도 먹고 이를 나누고 흐르게 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기에 그렇다. 아쉬운 것은 세상이 언젠가부터 서서히 보이지는 않지만 있는, 그런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또 잊혀져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그저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힘이 되어주고 자신을 지켜줄 것 같은 그런 감각할 수 있는 것들에 소망을 두는 것인지도 모른다.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그런 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모르기에 말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그렇다고 사랑으로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렵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요4.32)이 있으셨지만 그럼에도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구운 생선 한 토막’(눅24.42-43)으로 식사를 하셨다. 앞서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5, 신8.3 참조) 친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이 둘 사이에 낀 게 인생 행로가 아닐까. 그래도 떡으로만이 아닌 사랑으로도 살도록 지어졌음을, 동시에 사랑만이 아닌 떡으로도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이것이 육신을 입은 인생인 것을 날마다 깨닫게 하시는 게 아닐까 싶다. 예수님으로 살아간다는 것, 이것은 보이는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세상은 이 비밀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을 위해, 이 땅 너머의 저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소망이 어리석고 무가치해 보이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떡으로만이 아닌 사랑 2그램으로도 살아가는 자임을 세상에 보여주며 사는 것 아닐까. 세상은 지금 자신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교회이고 그리스도인이어야 이 시대가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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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1-14
  • [김영곤 교수] 창조 질서와 때
    세포는 인체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다. 성인의 몸속에는 약 100조 개의 세포가 있으며 각 세포에는 칸막이 방처럼 존재하는 수많은 세포소기관들이 있다. 각 세포에는 단백질 분자가 약 10억 개 정도 들어 있으며 화학적으로 암호화된 DNA의 명령을 따라서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수많은 종류의 단백질을 꾸준히 만들어낸다. 세포에서 생성된 단백질은 적절한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소코드가 달려있다. 단백질은 이 코드를 따라서 세포 내의 다른 소기관으로 이동하거나 세포 밖으로 분비되어 혈관을 타고 필요한 장소로 이동하여 제 기능을 수행한다. 세포들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설계도를 따라서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조직을 재형성하고 조직들은 모여 장기를 구성하고 장기들은 연결되어 인체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인체조직은 주변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도 재형성 과정이 조절된다. 인체의 경우 1초에 약 50만개의 세포가 새로 만들어지며 동시에 비슷한 수의 세포가 소멸된다. 살아있는 세포는 지속적으로 분열하고 성장하지만 무한정 반복하여 분화되지는 않는다. 인체 세포는 복제되는 과정에서 염색체 말단에 부착된 텔로미어가 점차 소실되기 때문에 약 60회 정도만 정상적인 세포로 분화가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나이가 들 수 록 새롭게 생성되는 세포수보다 소멸되는 세포수가 많아져서 노화가 진행되며 생체조직은 약해진다. 궁극적으로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어 생명활동의 마지막 때가 이른다. 이와 같이 오묘한 창조 질서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들과 범사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도 다 때가 있을 수밖에 없음이 명백하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화려한 생활을 하였던 솔로몬 왕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떠나서 사람 중심의 삶을 살다가 돌이킨 후에 모든 것들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전도서를 기록하였다. 전도서 3장을 보면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로 시작하여 14가지 좋은 때와 14가지 안 좋은 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과를 미루어 유추하면 좋은 때는 사람이 하나님께 접붙여져서 하나님을 사모하고 경외하며 축복을 누리는 시간들이고 안 좋은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사는 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도자 솔로몬은 이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기록하였다. 사람의 육체는 세포와 조직의 재형성 과정에 의하여 때가 차면 아름답게 변화되지만 한 사람 아담의 죄로부터 전수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를 수가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내 죄를 대신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재림 주로 오실 것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시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마지막 때를 보시면서 택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경고도 하면서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경외하면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늘 간섭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허락하신 창조질서 회복의 때를 누리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2016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 천하만사에 때가 있음을 깨달아서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믿음의 유산을 잘 계승하는 한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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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12-31
  • [박영규 관장] 장기려 장로가 추구한 삶
    이번 12월 25일이면 장기려 장로가 세상을 떠난 지 20주기가 된다. 그래선지 최근 작은 예수로 살다간 그의 삶이 매스컴을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안 본 용은 그려도 본 뱀은 못 그린다. (好畵未見龍)’는 말처럼, 자칫 후세 사람들이 고인을 설화 속 위인으로 만드는 것은 경계해야 할 듯하다. 얼마 전 이상규 교수님이 본란에 기고한 “장기려 박사는 월담을 권했는가?”가 그 전형적인 예이다. 며칠 전, 모처럼 청십자 옛 멤버들과 자리를 함께해서 수다를 떨었다. 오가는 얘기라야 뭐 그리 대단한 내용은 아니고, 그저 사소한 옛날 추억담이었다. 다만,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모두 사실이라는 점이다. 문득, 함께했던 지난 세월의 편린이 떠오른다. 결혼식 때 일이다. 중직자 자녀가 아닌 일개 청년의 결혼식이라 그런지, 청소하기 힘들다는 모 실세 권사님의 억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식장에서 하게 되었다. 그러자 청십자 식구들이 난리였는데, 장기려 선생님을 모시고 있던 간호사도 거들었다. “박사님이 평소 박 선생님 주례하고 싶어 하셨는데, 핑계김에 잘됐네요…” 하지만 담임목사가 엄연히 있는데 장로가 주례할 수는 없는 법, 게다가 불민한 신앙이지만 그래도 기복신앙에 길들여진 터라 머뭇거리자, 장기려 선생님은 “아냐, 그렇다고 똑같이 그러면 평화가 깨지는 거야” 그러면서 당시 부산에서 제일 좋다는 광복동 ‘새부산예식장’ 사장을 잘 아신다며 융숭한 결혼식을 준비해 주셨다. 게다가 주례를 못하니 대신 기도를 하시겠다는 거다. 천하의 장기려 박사가 직원 결혼식에서 기도순서를 맡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주님의 평화를 누려서 이 사회에 본이 되게 해 주옵소서”라던 기도소리가 아직 생생하다. 장기려 장로는 사랑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그건 그의 삶 자체를 보고 남들이 하는 헌사이고, 사실 그가 강조한 것은 평화였다. 1979년, 필자가 대학 시절 주도했던 모임에서 장기려 장로는 ‘진정한 평화’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적이 있다. 그는 분열의 주된 원인은 “인간이 평화의 주이신 하나님을 거역한 까닭”이라고 했다. 즉, 사람이 자기 설 자리에 서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한 까닭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깨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평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의 근본 치유책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평화의 주를 믿고 순종하는 것”인데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영적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전이며 그들의 가정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하는 가족 공동체여서 사회에 사랑과 평화를 제공하는 사회적 단위를 이루게 되고 나아가서는 국가와 사회에 자유와 평화를 전달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율법주의자들과 싸웠듯이 불의나 비진리와 맞서고, 악마의 유혹과 시험을 쳐부수고 승리하는 삶이 곧 진정한 평화의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당시 유신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비춰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었음에도 진리에 기초한 자유로운 말씀이었다. 이렇듯 그는 평화에 대한 열망이 컸다. 아마 한국전쟁으로 인한 가족 간의 이별도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평화의 사도 장기려 장로는 1979년 8월 31일, ‘막사이사이상’ 수상소감에서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나의 평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의 온 힘을 평화운동에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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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12-22
  • [김기현 목사] 책 읽는 자녀로 키우는 법
    뜻하지 않게 자녀 양육 강사 노릇을 하는 중이다. 아들과 함께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SFC)를 쓴 다음, 이곳저곳에서 어떻게 하면 책 읽는 자녀로 키우느냐며 강의를 부탁한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라고 쓰고는 ‘그런 아들을 어떻게 키워요?’ 로 읽는 형국이다. 아들의 이러저러한 신앙 고민에 대한 신앙 변증서가 자녀 양육서가 되었다고 출판사 편집자랑 같이 웃었다. 첫째는 태교부터 시작했다. 한의대를 다니던 선배의 조언을 따라 매일 10분가량 아내의 배에 손을 대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게 태담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아내는 성경과 잔뜩 빌려온 동화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시편과 잠언, 그리고 신약성경을 반복해서 낭독했다. 나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예컨대, 월요일에는 철학, 화요일은 신학, 수요일은 문학, 목요일은 역사, 금요일은 음악, 토요일은 성경, 일요일은 예배, 뭐 이런 식이었다. 태아 때부터 온갖 철학자와 신학자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아들은 결국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문학을 복수전공하여 신나게 놀면서 즐겁게 공부한다. 둘째, 말을 많이 해 주었다. 아이가 처음 집에 왔을 때, 아들을 가슴에 안고 온 방안을 돌아다녔다. 이 방은 엄마, 아빠의 침실이란다. 여기는 화장실인데 얼굴과 몸을 씻는 곳이고, 네가 여기서 목욕을 할 거야. 아, 저 끝 방은 아빠가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설교를 준비하는 곳이야, 라며 귀에 대고 속삭여주었다. 내 품에 안겨 잠이 들 때는 ‘사랑의 주님이 날 사랑하시네’를 주구장창 불렀고, 잠이 깰 때는 내가 생각한 것, 본 것, 그리고 지금 주변의 풍경과 상황에 대해 내 나름의 관찰과 해석을 곁들여 속살거렸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에서 아들의 어휘력과 문장력에 대해 감탄하는 것을 보면 분명 효과가 있었지 싶다. 셋째, 입이 아프도록 책을 읽어주었다. 무릎에 앉히고는 다리가 저리도록, 입이 아프도록 읽고 또 읽었다. 예외 없이 경험하지 않는가. 아이들은 반복을 사랑한다. 수십, 수백 번을 읽다보면 나는 지쳐도 아이는 즐겁다. 동화책 속의 인물의 목소리나 동물 소리를 어설프게나마 흉내 내며 읽노라니 턱이 얼얼하다. 종종 귀찮다고 짜증을 부렸다. 하도 읽어 달라 졸라 대는 통에 졸곤 했다. 10분만 더 읽자는 것이 한 시간도 되고, 딱 한 권만 더 읽자고 했는데 서너 권이다. 그랬더니 스스로 몇 시간이고 꼼짝 않고 앉아서 책만 읽는다.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않는가 보다. 마지막으로 도서관에서 빌려주었다. 가난해서 책을 많이 못 사준 것이 아쉽다. 남들에 비하면 평균 이상이겠지만 말이다. 해서, 도서관을 애용했다. 우리 네 가족 모두 한 사람당 3권씩 12권을 빌렸다. 갖고 오는 족족 읽어대는 통에 도서관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나중에는 각 10권씩, 총 40권을 대출해 주었다. 가파른 언덕 위 도서관을 무려 40권을 양 손 가득 들고 숨을 헐떡거리며 여름이고 겨울이고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다가 도서관의 추천으로 ‘책 읽는 가족’이라는 작은 상도 받았다. 그래서 그런가, 책을 정말 사랑하고 깨끗하게 읽는다. 행여 교회에서 누군가 책을 밟고 지나가거나 책 위를 넘어갈라치면 아들은 이상히 여기곤 했다. 어떤 때는 화를 낼 정도이었으니까.이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일이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는 수천 권은 족히 읽었을 것이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는 수십 번을, 조정래의 「한강」도 탐독했다. 글쓰기 대회에서 상도 곧잘 받았다. 그렇게 책을 끔찍이도 좋아하더니 중학교 들어가서 이러저러한 반항도, 방황도 하고, 음악과 운동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고등 2학년 때, 그런다. ‘나도 아빠처럼 책 읽고 글 쓰고 가르치는 인문학자가 될래요.’ 내게 방점은 ‘아빠처럼’이었다. 그래, 아빠처럼 말이다. 영리한 녀석은 내가 반대 못하게 그렇게 말했을는지 몰라도 나는 말 안 했지만 속으로 기뻐 울었다. 결국 내 아들, 딸이 책 읽는 자녀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닦달하지 말고 아빠부터 책 먼저 읽기! 그것이 책 읽는 자녀로 자라도록 하는 최고이자 최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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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02
  • [김혜경 사무총장] 탈핵, 그린에너지를 디자인하자
    후쿠시마 사고. 오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방사능 누출양이 체르노빌의 10배, 히로시마 원자탄 100배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후쿠시마는 현재 바다를 통한 오염수 방류가 4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후쿠시마 제1원전 부지 복구 작업은 10% 정도 진행된 상태인데 10배가 넘는 시간이 걸려야 복구 완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일본 오카야마 국립대 츠다 도시히데 교수팀이 2011년 10월부터 2015년 3월까지의 후쿠시마 인근에 거주하는 18살 이하 청소년 30만 명을 대상으로 갑상선암 검진 분석 결과, 청소년 갑상선암 발병률은 일본 평균치보다 20배에서 최대 50배까지 높게 나왔습니다. 먹이사슬을 통한 내부피폭은 상층으로 갈수록 심각해지고 대를 거칠수록 악화되는데 해양자원의 오염은 이제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인 것입니다. 국내 원전 현황 및 부산지역 현황 -2015년 기준 전체 24기중 6기 부산에 위치 한국에는 가동중인 원전이 총 24기가 있고 부산에는 고리1호기부터 4호기 신고리1,2호기까지 현재 6기가 가동중입니다. 게다가 신고리 3,4호기(2기,행정구역상 울산)가 완공 예정이고 신고리 3호기의 가동이 승인된 상태라 세계최대 원전 밀집단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신고리5,6호기까지 건설될 예정(2기,행정구역상 울산)이라 고리에만 총 10기의 원전이 밀집하게 될 예정입니다. 한 부지에 밀집되어 운영되는 원전이 많으면 많을수록 해당 원전 단지에서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고, 후쿠시마처럼 하나의 원인에 의해 다수호기에서 연속적으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고 발생 시 누출되는 방사능의 양도 더 많아지며, 전문인력이 한정되어 있어 사고 대응 및 수습도 더욱 어려워질 뿐 아니라, 원전단지 내부에 임시 저장되는 고준위 핵폐기물의 양도 많아 위험도가 월등히 높아집니다. 따라서 원전은 가능한 분산시키는 것이 안전 확보에 도움이 됩니다. 전세계에서 6기 이상 밀집지역은 단 11곳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중 4곳이 한국( 총 4개지역 모두가 6기이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잘못된 정책의 현주소를 볼 수 있습니다. 탈핵, 그린 에너지 전환 세계 원전산업은 기실 참혹했던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전부터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전력생산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6년에 최고치인 17.6%를 기록했지만 작년에는 10.8%로 감소하였고 반면 재생가능에너지는 지난 15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새로운 에너지에 대한 전 세계 투자 중 49%가 풍력과 태양광 같은 재생가능에너지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 후 선진국 독일은 탈핵을 선언하였고 1차 에너지 소비량을 2050년에는 2009년의 56%로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재생가능 에너지를 확대해 왔습니다. 심지어 중국과 같이 원전 확대가 진행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가에서도 미래를 위해 원전보다 재생가능에너지가 훨씬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2014년 원전 건설에 약 8조 원 정도를 투자한 반면 재생가능에너지에는 83조 원을 투자했다.) 이는 그간 태양광 산업을 선도해왔던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중국이 선두주자로 급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추세와는 달리 국내 상황은 제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라 6차(11기추가)보다 2기 많은 총 13기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할 예정입니다. 이는 철저히 전력수급 수요전망을 부풀리기 한 결과입니다. 그 반증으로 올여름 피크시에도 전력 예비률이 20%~30% 정도로 높았으며, 이는 여름에 전기세를 인하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돌았다는 뜻입니다. 그간 비싼 에너지라고 도외시 되었던 태양광발전의 경우 2011년 1kwh당 300원에서 2014년 150원으로 절반가격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갱신하며 급격하게 발전하였습니다. 반면 원자력은 비용이 상승하는 추세입니다. 태양광산업 1,2위를 다투는 독일, 일본에 비해 한국이 일조량이 월등히 높습니다. 또한 풍력 발전의 경우 안정된 수익구조로 민간 기업투자가 증가되는 추세이며 원전대비 5배 고용창출 효과가 있습니다. 실업문제가 심각한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차치하더라도 과연 우리는 어떤 에너지 정책을 펴야 할까요? 위험천만한 원전일까요? 재생가능한 그린에너지일까요?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상생으로의 인식전환이 최우선이 아닐까 합니다. 나아가가 상생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실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상생을 위해 할일-상생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기 (개인컵 사용, 멀티 탭 사용, 냉동식품 줄이기, 압력밥솥 사용하기, 샤워시간 1분 줄이기, 물받아서 설걷이하기, 냉장고 60%만 채우기->10%줄이면 4% 전기세 절감, 10분세탁->10분이상 세탁하면 때는 더 빠지지 않고 옷감손상, TV끄기, 가까운 거리 걷기, 대중교통이동하기, 냉방 온도 25도 난방 온도는 22도, 냉난방시 문닫기 )-절약이 어렵다면 효율화하기(1등급 전자제품, LED전등사용, 자동으로 전원 끄는 TV사용 등)-YWCA 활동하기(정책참여, 시민교육, 캠페인, 스터디, 자녀 환경캠프보내기, 후원하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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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18
  • [가정호 목사] 우울한 시대 낙관하기 힘든 일상
    우울하다. 한두가지로 우울한 것이 아니다. 생각의 출발점마다 우울이 파고든다. 이 우울함을 이겨내는 힘이 어이없게도 쓰디쓴 커피에 한줌 집어넣어 마시는 설탕의 달달함 때문이 아닐까하고 스스로 의문한다. 내가 밉다. 문제의 본질이나 사태의 진실을 해결하려고 해도 어디서 부터 어떻게 해결할지 몰라 미봉책으로 머리를 흔들어 잊으려는 마약성 일상화가 두렵다. 상식이 무시되는 사회는 폭력사회이다. 불통사회로 인해 집단 우울이 누적되면 자살증가, 실종 증가율로 나타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는 중얼거림과 함께 무책임의 역습이 쓰나미처럼 몰려 올 미래를 걱정한다. 폭력적이지 않은 시대가 있었는가 반문해 보기도 한다. 창세이후 세상은 언제나 폭력적이었다. 전쟁의 반복, 국가폭력, 인종차별과 인종청소, 종교전쟁, 살인의... 반복, 강도상해의 반복... 그것은 국가도 그랬고 개인도 그랬다. 우리눈으로 보고 느끼고 확인하는 폭력은 빙산의 일각이다. 실제 지하에서 행해지고 있는 폭력과 살인, 강도, 속임, 착취, 거짓말 등등은 도도한 강물처럼 흐른다. 폭력사회를 일신하고자 하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증가되어 왔다. 선진국이라는 말도 나왔고, 근대화, 세계화라는 말들도 그런 동기로 유익하게 쓰여졌다. 실제로 세상은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사회를 만들어 낸 것일까? 세상이 좀 살기 좋아졌는가? 일부국가가 소비하는 물품이나 식탁은 풍요로워진 듯하다. 그러나 그 소비물품을 공급하기 위한 제3세계의 노동자들의 피해는 한층 더 더 증가하고 있다. 가난은 증가하고 있다. 상대적 빈곤감에 시달린다. 청년들의 결혼은 늦춰지고 있다. 핵에너지 사용의 증가로 인한 피로도도 증폭되고 있다. 다문화 세계로 돌입한 이후 이슬람 포비아도 증가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인한 이유도 있겠지만 인공지능 롸봇으로 인한 일자리 상실도 만만치 않다. 식탁의 죽음도 공포중 하나이다. 유전자 변형식품이 식탁을 점령해간다. 국산 먹거리는 점점 설자리를 잃고 수입산 식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방부제와 농약의 사용증가로 상세불명의 질병들이 증가한다. 자본주의 후기증상인 빈익빈 부익부로 인해 발생하는 시민생활격차로 인해 삶의 질과 행복지수는 점점 추락중이다. 지구 ‘종말의 날 시계(Doomsday Clock)’는 자명종 가운데 제일 무섭다. 시카고대에 설치된 이 시계는 밤 12시 자정(子正)에 맞춰져 있다. 시계 바늘이 여기에 다다르면 ‘지구 최후의 날’이 온다. 물론 이 시계는 세계환경에 대한 경고를 알리는 시계이다. 그런데 이 시계 바늘이 2010년 1월14일을 기해 11시54분으로 멈춰서있다. 인류의 마지막이 어느 순간에 닥쳐올지 정확하게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12시 5분전이라는 표현은 적절해 보인다. 그만큼 세계시민 우울지수는 높아지고 있다. 전국민의 25%정도가 경미한 우울에서 중증 우울로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점점 소통 단절로 치닫고 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기관이나 소통의 부재는 비극을 해산한다. 소통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피차 존경하는 마음으로 낮아짐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하다. 폭력이나 무력은 소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악한 행위이다.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홍보나 광고, 힘의 우위를 이용한 설득은 폭력을 세련되게 행하는 것일 뿐 진정한 소통은 아니다. 고상하고 예술적인 소통은 아닐지라도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소통을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터이다. 출판되는 책이 증가하고, 종이 소비가 늘고, 포럼이나 세미나가 즐비하여도 대안이나 해결책이 없다. 매스컴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 세련된 이론으로 미래를 진단하고 지속가능성을 추론하는 일로 24시간 연일 바쁘다. 그러나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국가폭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21세기 첨단세기에 백주대낮 길거리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시민의 목을 참수한다. 동족을 종교적인 이유로 내쫓아 1000만의 난민이 발생하여 대양을 떠돌다가 젖먹이 아이를 바다에 빠뜨리는 이 우울한 사회, 아침에 타국이 내나라에 끼친 피해를 보상하라고 눈흘기고, 밤에 총칼로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제국들의 협박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우울한 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피로도가 증가하고 우울권하는 사회 심지어 마약권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낙관적인 삶을 살수 있을까? 쉽지 않다.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지않고는 결코 낙관을 가질수 없다. 어쩌면 낙관은 일종의 회피나 도피, 무책임을 포장한 심리적 자기속임이라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성경66권을 관통하는 종주권적 편무 언약을 확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언약을 놓치면 낙관도 유실된다. 창세기의 시작에서 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그 사랑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이 험한 시대를 맨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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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05
  • [박영규 관장] 민간 복지의 주체를 꿈꾸며..
    매년 9월 7일은 ‘사회복지의 날’이다. 부산에서는 ‘사회복지의 날’이 지정되기 이전인 1994년부터 11월 한 달을 ‘부산복지의 달’로 정해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해왔다. 그러다가 2000년 사회복지사업법에 의거 정부가 9월 7일을 ‘사회복지의 날’로 정함에 따라 2001년부터 ‘사회복지의 날’과 ‘부산복지의 달’을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올해는 9월 10일, 『제16회 사회복지의 날』과 『22회 부산복지의 달』을 겸해서 기념식을 가졌다. ‘사회복지의 날’은 사회복지사업법에 명시된 법정 일로서 “국가는 국민의 사회복지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사회복지사업 종사자의 활동을 장려하기 위하여 매년 9월 7일을 사회복지의 날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법조문의 취지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민이 사회복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알려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동안 다양한 전달체계를 통해 복지정책이나 사업 등이 알려졌고, 특히 몇 차례 선거를 거치며 언론과 정치권을 중심으로 불거진 복지논쟁 탓에 복지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그 취지가 어느 정도 달성된 듯하다. 또 하나의 취지는 사회복지 종사자들의 활동 장려이다. 다시 말해 사회복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와 지지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념식 때 사회복지 유공자와 자원봉사자에 대한 시상과 축하는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종사자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처우와 근무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사회복지 영역에 국가정책 변화에 따른 중요한 현안이 대두하였다. 최근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논의가 한창이다. 이른바 ‘송파 세모녀법’이라 불리는 『사회보장급여의 이용 제공 및 수급권자 발굴에 관한 법률』(이하, ‘사회보장급여법’)의 제정에 따라 그동안 사회복지의 준거 역할을 한 ‘사회복지사업법’이 전면 개정되게 되었다. ‘사회보장급여법’은 공공복지전달체계를 통해 전달되는 급여를 주로 다루고 있는데, 실질적인 사회복지서비스에 관한 부분은 결국 민간영역에서 담당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물론, 사회복지의 일차적 책임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들의 몫이다. 하지만 양극화가 심화되고 저출산·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복지 욕구가 다양화되고 복지대상의 확대와 수요증가 등으로 인해 현실적으로 정부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갈수록 종교계를 비롯한 민간 영역의 역할이 더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랑의 대명사라 자처하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회 내 어려운 성도는 물론이고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시기가 우리에게 왔다(A Time of Need Is Upon Us)”던 2003년 말, ‘뉴욕타임스’의 사설을 한국교회에 던지는 거룩한 부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나눔 문화를 견인한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자타가 인정한다. 그러나 여기에 만족하면 안 된다. 그 어느 영역보다 풍부한 교회 내 인적·물적 자원과 효율적인 시스템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전달체계와 네트워크를 구축해 소외된 이웃을 상시 돌볼 수 있는 민간 사회복지의 주체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에 앞서,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며, 개인의 삶은 물론 나아가 신앙공동체를 아름답고 윤택하게 만드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 강단을 통해 계속 선포되어야 함은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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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 [이상규 교수] 장기려 박사는 월담(越壁)을 권했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장기려 박사는 존경받는 인물이다. 손봉호 교수 같은 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장기려 박사를 꼽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양자로까지 일컬어지던 양덕호 박사를 비롯하여 이건호 박사, 정태산 박사 강현진 박사 등도 장기려 박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을 추수하는 문도들이다. 안양샘병원의 박상은 원장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나 장기려 선생의 정신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부산으로 내려와 복음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았고 지금도 그런 정신으로 성산생명윤리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필자 역시 장기려 박사의 신앙과 삶을 배우고자 그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모임이나 부산 부용동의 기독교사회관에서 모였던 ‘부산모임’ 말석에 앉아 말씀을 듣고 배운 바 있다. 후에는 부산 초량의 YMCA 건물에서 모이던 ‘종들의 모임’에 참석하여 휠체어에 앉아계시던 장박사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어떤 인물을 존경하고 흠모하다 보면 사실과 다른 전설이 유포되기도 한다. 정도 이상의 경외심은 세월이 지나면서 확대 재생산되어 왜곡되거나 과장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교회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흔히 나타나는데 중세시대 성인전(聖人傳)에서 더욱 그러했다. 이런 경향의 역사편찬을 하기오그래피(hagiography)라고 말한다.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은 칼라일의 의도와 관계없이 특정 인물에 대한 맹목적 숭배 혹은 절대화를 자극했다. 장기려 박사의 경우에도 이런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 한 가지 사례를 지적하고자 한다. 장기려 박사의 일화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복음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은 환자 한사람이 병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원장 장기려 박사가 “오늘 저녁에 이 담을 넘어 도망가시오.”라고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선의의 월담권면이 처음 언급된 것은 모 출판사가 제작한 장기려 박사에 대한 책에서부터였다. 그 이후 이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재생산 되었다. 그리고 장기려 박사의 주된 담론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장 박사의 일이 아니다. 사실은 이러했다. 우측 골수염으로 고생하던 환자가 있었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치료했으나 별 차도가 없었고 재산만 탕진했다. 그러든 중 복음병원으로 와 입원하였고 당시 외과과장 이상기 선생의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치료가 잘 되어 완치되었으나 퇴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치료비를 낼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탁한 사정을 안 병실 간호사 김경애씨는 이상기 의사의 조수이자 외과 수련의였던 박영훈 의사에게 말했다. “치료비를 낼 형편은 못되고 밥만 축내고 있으니 차라리 오늘 저녁에 도망가라고 합시다.” 박영훈 의사 생각도 동일했다. 치료비를 받을 형편이 못되니 차라리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합시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박영훈 의사는 환자에게 여비까지 챙겨주면서 “오늘 저녁에 그냥 도망가시오”라고 말했다. 당시는 병원 울타리도 없었고 요즘같은 경비체계도 없었다. 그날 밤은 도망가기 좋은 환경이었다. 인적이 드믄 늦은 시간을 택해 그는 병원을 빠저 나와 당시 거주지였던 경남 산청군 척지리로 돌아갔다. 그가 1934년생인 정명헌이라는 환자였다. 1961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장기려 박사의 일로 각색되어 회자되었고, 장기려 박사의 아름다운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난한 환자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잃지 않으셨던 장 박사는 능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분이다. 그것이 장박사의 일이 아니라고 해서 장 박사에 대한 존경심이 감소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장박사의 일이라 하여 장 박사를 더 존경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사실(fact)이 어떠한가이다. 팩트를 확인한 이상 그것을 밝혀두는 것이 역사학도의 의무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는 역사를 ‘탐구하여 획득된 지식’으로 정의했다. 금년이 장기려 박사 20주기가 된다. 그가 주로 일해 왔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외에도 인제대학병원, 부산대학병원 등도 그를 기리고 있고, 그의 이름 석자로 후광을 노리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역사의 장기려’에 무심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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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10-07
  • [이용희 교수]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서는 방파제, 거룩한 대한민국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을 내림으로써 전 세계 200여 개 국가들 중 현재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는 21개국이 되었다. 반면,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법적으로 죄라 규정하는 나라는 약 80개국에 이른다. 동성애를 가장 강력하게 막아서고 있는 나라들은 아프리카 국가들로 아프리카 55개국 중 38개국이 동성결혼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에이즈로 인해 지난 20여 년간 약 2천 5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에이즈로 부모를 잃어 생긴 고아만해도 약 2천만 명에 달한다. 이처럼 에이즈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에이즈의 근본 원인인 동성애에 대해 강력한 처벌 규정 만들었다. 미국 질병관리본부는 청소년·청년(만13~24세) 신규 남성 에이즈 감염자 약 94%가 동성 간 성행위로 감염된다고 밝혔다. 성과학연구협회는 공식적으로 “동성애는 에이즈를 전파하는 위험행동”이라고 발표했다(2014.11). 지난 10년 간 우리나라의 에이즈 감염자 수는 4배가 증가했으며 특히 청소년 감염자수는 8배나 증가했다. 2013년 우리나라의 에이즈 감염자 수는 1만 명을 넘어 공식적으로 에이즈 확산 위험국가가 되었다. 동성애가 합법화 된 선진국 사례를 보면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2015년 새롭게 개정한 성교육 커리큘럼에 의하면 3학년(만8세)은 동성결혼이 정상이라고 배운다. 6학년(만 12세)때는 자위행위를 학습하고 7학년(만 13세)때는 항문성교와 구강성교를 학습한다. 더 나아가 동성애 합법화는 비정상적인 성적 결합도 허용하게 만든다. 동성애가 합법화된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등 유럽 국가들에서는 동성애뿐 아니라 근친상간, 소아성애(아동과 성행위), 그리고 수간(동물과 성행위)까지 합법화되었다. 헝가리, 핀란드, 루마니아, 네덜란드, 독일 등은 동물매춘을 합법적으로 하고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7년, 2010년, 2013년 세 차례에 걸친 동성애 합법화를 위한 차별금지법 입법 움직임이 있었다. 2013년에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에 따르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비윤리적이라 말할 경우,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5회 반복, 강제이행금 3천만원 추가)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논란이 됐었다. 다행히 헌신된 성도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막았지만 통과될 경우 동성애를 ‘죄’로 명문화하고 있는 성경은 불법한 책이 되며 동성애가 ‘죄’라고 성경대로 가르치는 교회는 불법 집단이 되고 공인된 학교에서 성교육 시간에 이성 간 성행위뿐만 아니라 동성 간 성행위인 항문성교와 구강성교를 배워야만 한다.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없으므로 에이즈에 대한 감염 노출도 높아지게 된다. 거룩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선 다음 6가지 방안이 시급히 요청되는 상황이다. 첫째, 성과학 연구소를 설립하여 동성애는 결코 유전이 아니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가정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동성애의 폐해에 대해 바르게 알리고 홍보하는 국민교육과 계몽, 홍보 활동이 필요하다. 셋째, 동성결혼 합법화를 시도하는 모든 법적 소송에 대항할 수 있는 기독교 법률단이 세워져야 한다. 넷째, 동성애를 미화, 조장하는 언론, 대중매체를 모니터링하며 국민 다수가 동성애에 대한 바른 인식과 반응을 이끌어 낼 SNS 대응팀이 조직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동성애의 실체를 바르게 알리고 성윤리를 계몽하는 언론, 미디어가 창출되어야 한다, 다섯째, 고통 받는 동성애자들의 내적 치유와 중독 치유를 위한 동성애 치유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해야 한다. 여섯째,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반기문 UN 사무총장 그리고 서구에서 동성애 합법화를 위해 앞장서는 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해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한 80개국들 간의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동성애가 합법화 됐다고 한국이 따라할 필요는 전혀 없다. 동성애로 인한 가정 붕괴와 에이즈 확산 그리고 이에 따른 세금폭탄, 그리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배워야만 하는 동성애 교육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꼭 감안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서구에서 몰려오는 동성애의 물결을 막아서는 방파제가 되고 전 세계를 선도하며 ‘성결의 빛’을 비추는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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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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