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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시섭교수] 3·1 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나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한국 기독교는 3·1운동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민족대표 중 최대 다수가 기독교인이었고, 각 지역의 교회들이 전 민족적 거사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독립선언식의 식순이 기도로 시작되었고, 참여 학교들도 기독교 계열의 학교가 많았다. 그래서 3·1운동은 교회의 사회참여로서의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빠지지 않고 회자되어 왔다. 하지만 3·1운동이라는 격랑 앞에서 조선의 기독자들은 각자 나름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야 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먼저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1907년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에서 회개를 촉발시켜 평양대부흥을 일으킨 분으로 알려져 있지만 민족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여러 종교에 심취하였다가 1897년 예수를 믿은 후 독립협회 평양지부설립의 발기인이 될 정도로 복음전파와 사회참여에 균형을 갖춘 분이었다. 이승훈을 통해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날인했으나 ‘태화관 모임’에는 불참했고 그 후 자진 출두하여 1년 7개월의 미결구금상태에서 재판을 받다가 무죄로 풀려나는 바람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200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뒤늦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 박사는 길 목사와는 다른 길을 갔던 인물이었다. 1887년 그의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한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 유학 등을 통해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로서, 또 외교가, 언론인, 교육가로 활동하면서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3년간 투옥되기 까지 하였으나, 3·1운동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졌었다. 당시 그도 다른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해 주길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이유는 순진한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일제 말기에 ‘독립무용론’과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동조하면서 귀족원 의원이 되어 결국 친일파의 거두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길선주 목사는 무죄판결을 받은 이후 1928년 경북 안동에서의 종말론 설교가 대중을 선동한다 하여 20일간 투옥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삶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은 뚜렷이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독립정신을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만 아마도 3·1운동의 실패는 그로 하여금 종말론 신앙에 천착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북간도와 전국을 돌면서 전도에만 매진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윤치호 박사는 3·1운동 불참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조(自助)의 입장에서 실력양성론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장장 60년 동안 써내려갔던 그의「일기」속에서 식민지체제라는 한계 내에서 조선인의 권익신장을 이루려는 삶의 고뇌와 식민지의 지식인이자 기독인으로서의 ‘양비론’(兩非論)적인 내적갈등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린 종종 한 인물에 대한 판단, 한 사건에 대한 평가를 너무도 쉽게 내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좁은 식견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소문에 기한 속단은 오판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특히 혹독한 일제치하에서, 그리고 3·1운동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 각자가 내린 결단들을 우린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윤치호 박사가 그의 일기에서 자주 되뇌던 말이 그의 일기를 묶은 책의 제목이 되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이 말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굳이 ‘협력’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지만 ‘저항’을 지지하지도 않았을 나에게 지금 이 시대의 모든 난제 앞에서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려놓고 긴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쉽게 수긍하긴 어렵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잠언(箴言)과 같은 말씀으로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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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2-20
  • [안동철 목사] 맘몬주의를 배격하라!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을 발표했다. 이 자료는 통계청이 전국적으로 실시한 인구, 주택 센서스 결과에 근거한 것으로 한국의 종교 인구를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2015년 11월 1일 기준 한국의 종교 인구수는 전체 인구수 4905만 명의 43.9%인 2155만 여 명으로 파악되었다. 이중 개신교 신자수가 967만 여 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오랫동안 신자수 1위를 유지했던 불교가 761만 여 명으로 급격히 감소했고, 천주교 신자수도 2005년 514만 여 명에서 2015년에는 389만 여 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통계를 접한 후 기독교계가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에 적대적인 세상 언론과 여러 집단들을 통해 교회에 대한 과도한 공격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통계 속에 잡힌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사람 중에는 신천지와 구원파와 같은 이단에 속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성장하고, 불교와 가톨릭이 퇴보한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필자는 한국교회가 교회 내에 잠재되어 있는 강력한 시한폭탄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숫자적인 통계는 곧 신기루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별히 물질과 숫자를 숭배하는 ‘맘몬주의’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에서 유일하신 하나님과 동급으로 소개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재물이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재물에 대해 ‘섬긴다’고 하는 것은 재물의 영향력이 하나님과 비교될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최근 필자는 한국교회에서 크게 존경 받는 목사님 한 분과 깊게 교제하면서 한국교회 내에 자리 잡은 이 맘몬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교회 안에 밀려들어온 맘몬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혀를 차야만 했다. 교인수와 돈의 힘에 의해 정의가 무너지는 경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목사 안수식에서는 안수 대상자에게 그날 순서를 맡은 목사와 장로의 사례비는 물론이고 플랜카드, 순서지, 심지어 예식에 사용되는 코사지에 드는 모든 비용을 요구한다고 한다. 성직을 받는 현장에 돈을 주고받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를 ‘수혜자 부담원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오래전 한 공중파 방송에서 가톨릭 신부가 되는 과정을 방영한 적을 본 후 이런 우리의 관행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가톨릭의 신부가 되는 과정은 총 7년으로 졸업 자체가 매우 엄격했다. 방송에 소개된 것을 보면, 가톨릭 신학대학에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입학한 학생이 290명이었는데, 이들 중 189명만이 사제 서품을 받았고, 101명이 중도 탈락했다. 탈락율은 무려 35%였다. 이렇게 7년의 힘겨운 과정을 모두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는 날의 장면이 아직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신부로 서품을 받는 대상자들이 죽은 듯이 땅에 바짝 엎드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자기는 이제 죽었고, 가장 낮은 자세에서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 순간 서품식에 참여한 사람이나 축하해주기 위해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흐느꼈다. 이 예식의 엄숙한 분위기로 볼 때 순서를 맡은 사람들에게 돈이 오고 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불교와 가톨릭 신자의 숫자가 줄고, 개신교 신자가 늘었다는 것에 기뻐할 때가 아니다. 교회 내에 깊숙이 침투한 이 더럽고 다양한 형태의 맘몬주의를 배격하지 않으면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세상은 교회를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공격할 것이다. 이 시대에서 교회가 살길은 적어도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재물에 대해서는 세상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정직함과 투명함이 있어야 하겠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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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1-22
  • [가정호 목사]"질료의 저항" 이 차라리 은혜이다.
    천재적인 예술가들 중 어떤 이들이 이데아를 작품으로 실현해내기 위해 빠져드는 것이 마약, 섹스, 술, 도박이었다. 마약, 섹스, 도박을 하고 나면 더 탁월한 예술적 심상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욕망이 피워낸 꽃을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이었다. 대부분의 천재 예술가들은 ‘질료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지나고 보면 그 ‘질료의 저항’이 그의 욕망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되었던 점이 오히려 돋보인다. 뉴욕, 푸동, 명동, 해운대, 남포동... 이런 곳들은 인간의 욕망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꽃핀 곳들이다. 계시록에는 두 여인이 나온다. 한 여인은 정결을 추구하는 여인으로, 한 여인은 화려함과 욕망을 꽃피워낸 여인으로 등장한다. 도시의 이야기들이 즐비한 공간이 계시록이다. 이미 인류가 맞이하게 될 종말의 모습이 어떻게 끝장나는지 잘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의 계시록이다. 국가와 시민들이 정치행위와 경제 확장에 있어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결코 그 이상을 이룰 수는 없다. 이미 고대 바벨론과 로마제국이 좋은 샘플이 되었었다. 요한이 쓴 계시록은 이 내용을 잘 보여준다. 사람의 영혼까지 팔고 사는 맘몬숭배는 세속국가의 필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교회된 목사나 성도들이 국가와 정부, 지도자들에게 이 짓을 잘하지 못한다고 서슴없이 몰아붙이는 모습을 본다. 어떤 정부가 들어섰을 때든 시민들은 그 정부를 향하여 욕찌거리 해댄다. 사실 그 욕찌거리의 핵심은 ‘맘몬; 돈’이다. 그 기저에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제 부모가 돈을 벌어주지 못한다고 패대기치는 패륜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과 글, 토론에서 국가나 정치지도자들을 무한경쟁에 내모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역지사지 해 보면 좋을 것이다. 계시록은 예루살렘과 바벨론이 극단의 맘몬숭배에 빠져들어 심판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사람을 종으로 만들고, 그 종을 사고팔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사고팔며 거래하는 인신매매 행위까지 요구한다. (계18:13) 이는 원형적 아름다움, 본래 존재했던 이데아에 대한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인 파괴행위이다. 자발적 가난까지는 아니라도 자발적 절제는 절실하다. 국가도, 교회도, 가정도 모두 자발적 절제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먹고, 어느 정도 쓰고, 어느 정도껏 소비해야 한다. 무한 욕망 무한 편리추구는 공멸이다. 먹방이 꽃핀 방송을 보노라면 국가적 종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미 미세 플라스틱이 어류나 동물에서 인체에 쌓이고 있다. 생물학적으로도 종말시계가 12시 3분전이다. 소득이 무한대가 되어 년 수십, 수백억씩 벌어들이는 이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 살펴서 알아야 한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들이 늘어간다는 말은 극단의 양극화가 결말을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들이 알바를 하는 것은 학교생활에 도움을 얻기 위함인데, 졸업을 하고도 알바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비극 그 자체라는 말이다. 정부의 잘못이거나 정치의 잘못이 아니라 (이건 어떤 정부도 이겨낼 수 없다.) 인간의 탐욕에 잠금장치가 없도록 풀어놓은 것, 맘몬종교가 가져다준 비극이라는 말이다. 시장자유화라는 말이 아주 멋져 보이지만, 맘몬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시민을 학살한다. 이는 계시록 일곱천사 일곱 금대접 환상에 잘 나타난다. ‘자살 권하는 사회, 죽음 권하는 사회’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본다. ‘레밍_딜레마’에 빠져 버린 세속사회에 교회도, 성도들도 편승하여 허우적거린다. 성도들의 헌금을 이자로 거반 쏟아 부으면서도 과도하게 큰 건물을 올리고, 삐까뻔쩍 뽀대내기 바쁜 이 시대의 건물숭배자들을 바라보면 그 비극의 미래를 가늠해 본다. 이미 이자 갚다 종말을 고한 교회당 매물이 지천인 시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것을 합리화 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것이 자신이 만든 정의로움이 되어 사람들을 비난하고 따지고 신경질 낸다. 나는 그저 한마디 하고 싶을 뿐이다. “욕망이라는 전차는 브레이크가 없다.” 과도한 욕망탐지 기능, 적정한 욕망 제어장치, 욕망버블 센서를 장착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시대적 요구이다. 한마디 더 하고 싶다. ‘마이 헤무긋다 아이가, 이자 고마 해 무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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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1-07
  • [탁지일 교수] 3.1운동 100주년과 므두셀라증후군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과 행사가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1919년 3.1운동은 우리 겨레와 민족을 위한 한국교회의 성격이 형성된 사건인 것은 분명하다. 첫째, 3.1운동 당시 교회는 가장 가시적인 전국적 조직이었다. 장로교회의 경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함께 독노회 설립되었고, 1912년 총회가 설립되었다. 동일한 시기에 비록 조선의 국권은 피탈되었고, 왕위는 찬탈되었으며, 군대마저 해산되었지만, 오히려 교회는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오랜 일제강점기를 인내로 지켜 나아갈 수 있는 든든한 기초를 내렸다. 둘째, 교회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교회에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를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지만, 민족의 독립과 개화를 위한 목적으로 교회를 찾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에 눈에 비친 서구 강대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믿을만한 조력자로 보였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민족운동이 교회 안에서 꽃피웠다. 셋째, 기독교는 근대교육의 중심이었다. 곳곳에 설립된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에서는 신앙교육과 함께 근대 인문사회과학교육이 제공되었다. 학생들은 신앙의 기초위에 조선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근대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3.1운동을 촉발한 이들이 바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기독학생들이었다. 넷째, 교회는 일제강점기하 가장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전국 도시들과 도서산간지역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없는 곳이 없었으며, 게다가 매일 새벽, 수요일과 주일 등 수시로 정기적으로 모여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모세가 히브리민족을 이끌고 출애굽하는 장면은 조선 기독교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드려졌다. 일제강점기하의 비참한 조선반도의 현실이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시 애창된 찬송의 가사처럼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었다. 마지막으로, 1919년 교회는 저항과 순교의 중심이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인 참여가 주축을 이루었으며, 다치거나, 갇히거나,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또한 파괴당한 교회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민족주의적인 열정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비타협적인 정결함을 지닌 용사들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1919년 민족의 소망이었던 교회는, 일제강점기 후반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좌절과 변절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수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났으며, 이로 인해 1920년대는 반기독교적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게다가 1938년에는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므두셀라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 있다. 과거의 나쁜 일은 잊어버리고, 좋았던 일들만 선별하여 기억하는 경향성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한국교회가 3.1운동 100주년의 영광을 기억하기에 앞서, 일제강점기하 한국교회의 고난과 변절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에 묻혀, 좋은 일만 취사선택하여 기억하고 기념한다면, 한국교회는 현재의 고립과 위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이 일회적인 이벤트성 행사가 되기보다, 민족을 위한 교회로 새로 거듭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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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2-26
  • [김광석 목사] 생명회복을 위한 절반의 눈물
    오늘 이야기는 사람 사는 세상의 한 쪽 이야기이다. 그 한쪽을 이렇게 풀어 본다. 하나, 오늘 나는 무엇이나 통계화 되는 세상에서 산다. 현대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숫자로 표시되는 통계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표시 방법이다. 신문을 비롯한 많은 언론 매체에는 수많은 통계들이 제시된다. 경제에 관한 것부터 정치 여론 조사 통계, 그리고 자살률 같은 사회 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그 뿐인가. 우리 자녀들의 성적도 온통 숫자를 중심으로 한 통계 일색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숫자의 마력에 빠져 살 정도이다. 경제지수가 좋게 나왔다고 발표되면 언론은 한차례 잔치를 벌이듯 알린다. 아이가 1등을 하면 그 집안은 흥분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실업률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지표들의 통계는 현대인들을 웃고 울리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 그 통계가 나에게 주는 체감온도는 어떤가? 때로 그 숫자로 표시된 통계라는 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원하지 않는 고통을 부담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둘, 오늘 나는 문명과 문화가 마치 이분화된 사회에서 산다. 개인적으로 나는 미국에서 원조로 온 곡식가루와 우유를 먹은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 풍성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내 위의 세대에게는 지금의 풍요로움이 신비로울 정도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을 비롯한 많은 전자 기계들은 그 사용법을 몰라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다양하다. 뿐만 인가?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게 살도록 도우는 기계의 발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복한가? 이상하게도 휴가가 되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 편리함을 뒤로 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산이나 계곡으로 가서 쉬고 싶어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편리함을 주제로 하는 문명의 발달이 사람의 정신세계를 움직이는 문화의 발달과 함께 가지 않으면 결국 그 편리함은 또 다른 불편함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날로그적 삶을 살기 위하여 나는 디지털을 배운다’고 말이다. 사람에게는 편리함이 모두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편리함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하고 있다. 조금의 수고로움이 때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소도구임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셋, 오늘 나는 진단과 치료가 동행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산다. 각 언론 매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는 진단지가 달려 있는 것 같다. 주변의 수많은 사건들과 현상들을 보고 판단하여 진단하는 능력도 대단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진단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진단 뒤에 따라 와야 할 치료제가 희귀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진단에 따른 처방전을 말한다. 그러나 그 처방전의 효과는 기대만큼 없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진단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사건 그 자체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사건에 대한 판단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왜 진단은 많은데 처방이 많지 않을까? 사건만을 보고 그 사건 속에 있는 사람은 잊어버린 결과는 아닐까? 넷, 오늘 나는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사회에서 산다. 내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셔서 징집을 당하시고 많은 공부를 하지 못한 분이다. 그러나 그 분에게 받은 너무나 소중한 유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책임감이다. 특히 가족에 대한 부분은 나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이다. 비단 내 아버지뿐일까? 우리의 부모님들이 한결같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며 진 십자가도 할 수만 있다면 벗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사회가 바르게 유지될 수 있는 중요한 힘은 바로 사회와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다. 이 같이 살아가는데 그래도 사람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을 가지고 사는지 오늘도 나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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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2-12
  • [최윤 목사] 기독교 경제윤리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지금 이 시대는 돈이 최고인 물질만능주의와 물신숭배의 시대라는 사실에 모두 공감할 것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게 다 되는 세상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고, 비교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이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매일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못 박아 말씀하셨다.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와 물신숭배 풍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 경제윤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성경 말씀과 기독교 경제윤리를 실천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물신숭배의 시대, 지금 한국교회는 기독교 경제윤리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때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이지만, 우리가 살면서 겪어야 되는 경제생활에 관한 축복의 원리를 잘 말해주고 있다.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믿음에 관한 성구가 215개, 구원에 관한 성구가 218개나오는데 금전과 물질, 재정에 관한 성구는 2,086개나 된다. 열배가 넘는다. 또 예수님이 어리석은 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주신 비유가 38개인데 그중에 16개가 다 물질에 관한 비유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곧 신앙이며 대부분이 경제활동에 치중되어 있고 그것이 곧 신앙의 표출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기독교 경제윤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경제문제가 영적인 기독교 신앙과 무슨 상관이냐며 반문한다. 교회 잘 다니고, 봉사 잘하고, 성경 잘 읽고, 기도 잘하면 됐지 무슨 경제얘기냐는 반응이다. 사람이 돈을 벌거나 쓰면서 사는 한 모든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 살 수 없다. 또한 현실의 경제문제에 있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인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경제이론과 경제 윤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자신만의 경제이론과 경제윤리가 성경적인지 아니면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경제윤리에 대해 알아야 한다. 교회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찾아서라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을 비롯해 우리보다 앞서 간 수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가르쳐 왔듯이, 기독교 신앙은 물질적인 경제문제와 영적인 신앙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분리된 이원론이 아닌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하나로 통합된 일원론에 가깝다. 즉 물질적인 문제는 바로 영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이원론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닌 고대 헬레니즘에서 온 이단적인 것이다. 초대교회도 바로 이 영지주의 이원론과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유대 헤브라이즘과 기독교는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강조한다. 기독교는 물질세계와 육체, 노동을 천시하고 경멸하는 헬라 철학이나 영지주의 이원론의 창조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인간은 영(靈)과 혼(魂)과 육체(肉體)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존재이듯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이다. 육체 없이 영혼만 있는 인간은 없다. 반대로 영혼 없이 육체만 있는 인간도 없다. 인간은 물질적인 육체와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혼이 통합된 존재이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열린책들)>에서 경제를 "생명을 낳고 기르고 보존하는 모든 일"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물질적인 경제생활은 하나님과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에 관계된 경제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경제문제에 대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자신을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특별히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는 경제문제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기독교 경제윤리를 배우고 실천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나라에 가깝게 만들어 가야 한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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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1-27
  • [남송우 교수] 한국교회의 생태계 회복을 위하여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선교역사에서 드문 경우로 평가된다. 짧은 기간 동안 교회와 교인수의 증가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런 긍정적 평가와는 다른 선상에 놓여 있다.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척교회를 세우는 일도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그 결과 교인의 규모가 큰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로 양분되면서, 교회 생태계의 파괴 또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작은 교회 운동이 일고 있지만 크고 거대한 것에 매몰된, 근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교회는 작은 교회가 설 자리를 앗아가고 있다. 소위 대형교회는 더 대형화되어가고 있고, 소규모의 교회는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는 기존신자들의 교회 수평 이동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저 교회 출석만으로 만족하는 대형교회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타성화된 교회생활의 편의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문제는 교회의 대형화가 한국 교회의 생태계를 엄청나게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은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몸은 각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고, 유기체를 이룸으로써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다. 교회는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특별한 공동체이다. 하나의 교회는 이러한 유기체성을 언제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손가락 한 부분에 상처가 나서 아프면, 몸 전체에 아픔이 전해져 온 몸에 아픔이 느껴지듯이 교회 공동체는 한 구성원의 아픔과 기쁨을 하나의 몸처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유기체성이 지닌 본질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한 사람의 아픔과 기쁨을 전적으로 감지하고 나눌 수 없는 수를 넘어선다면, 교회의 본질은 유지되기 힘들다. 초대교회가 가정 교회 중심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 원리는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가정교회로 출발한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거대한 몸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자, 핍박을 통해 디아스포라 상태로 흩어졌다. 이렇게 된 연유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선교사적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거대한 조직으로 변하면, 교회의 본질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현대에 와서, 교회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교회에는 경영의 원리가 도입되었다. 담임목사 외에 소위 부목사나 협동목사제도가 일반화되어, 한 교회에 여러 목회자들이 함께 교회를 섬기는 형태로 변했다. 많은 교인들을 관리하기 위한 일종의 교회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에 경영원리가 작동하면서, 교회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경영원리의 핵심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남기는 데 있다. 교회는 결코 경영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체가 아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대화가 교회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훈련소가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에 경영의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랑을 훈련할 수 있는 적정수를 넘어섰다는 증거이다. 한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훈련하며, 이를 세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의 수가 한 교회의 적정수라는 말이다. 한 몸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교회 단위들이 모여, 우주적 차원의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주인인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한국교회의 개혁은 소위 대규모의 교회들이 스스로 작은 교회로 나누어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속에 자리한 경영의 원리를 포기하고, 사랑의 원리를 쫒아 가는 첫걸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작은 교회들이 다양하게 생존하면서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회복하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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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2
  • [박용성 목사] 다음세대 교육은 부모교육이다
    한국 교회 곳곳에서 다음세대를 살려야 된다고 외치고 있다. 다음세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방법과 대책에 있어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 다음세대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들면서 정체기를 맞았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감소 현상을 겪고 있다. 가면 갈수록 교회 내에서 다음세대를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다음세대가 없어지는 교회가 늘어갈 것이다. 그러면 다음세대가 잘 성장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목회자의 관심과 교회의 지원이 있으면 해결되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다음세대가 잘 성장하려면 좋은 부모가 있어야 한다. 모세는 장성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누가 모세를 가르쳤는가? 그가 배운 것은 애굽의 문화와 정치이다. 바로 왕궁에서 그는 애굽의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애굽의 지도자가 아닌 당시 애굽 사람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교육학적으로 볼 때 그가 받은 교육의 영향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받은 교육은 바로 왕의 궁중에서 유모의 신분으로 자신을 돌보았던 친모로부터 받은 교육이다. 나일강에 목욕하러 왔던 바로의 공주는 아이 하나가 바구니에 담겨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물에서 건져 올렸다. 공주는 그 아이를 자신의 양 아들로 삼고 그를 키우기 위해 유모를 구했는데 그가 바로 모세의 친모였다. 공주는 젖을 뗄 때 까지 모세를 맡겼다. 이 때가 모세의 교육 중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바로 왕의 궁중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여자 그것도 모세의 친모의 손에 맡겨졌다. 모세는 젖 먹는 시기 동안 어머니의 품에서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는 애굽인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이다. 사람이 어떤 시기에 어떤 교육을 받는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누구에게 교육을 받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모세에게는 가장 훌륭한 교사가 있었다. 그 교사는 바로 모세의 모친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부모이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정체성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다음세대 교육의 승부는 부모교육에서부터 시작한다. 모세가 중요한 시기에 친모의 손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던 것처럼 우리 다음세대의 교육을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교육을 제대로 받아서 부모가 되지 않았다. 영적인 교육보다는 세상의 교육과 가치관을 따라서 자녀를 양육한다. 신앙과 삶이 다른 부모의 모습을 보고 다음세대는 자란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다음세대에 대한 희망은 사라진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 이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를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해 부모교육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불투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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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0-29
  • [송시섭 교수] 같은 사건, 다른 시각
    최근 ‘가짜뉴스’(fake news)에 대한 국무총리의 의법처리발언이후 국감에서도 인터넷상의 ‘허위조작정보’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여당에서는 타인의 명예와 권리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고, 야당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재갈물리기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언론 및 표현의 자유란 근대시민사회의 여론분출구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와 관련되어 있는 기본권이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서는 그 행사의 범위가 확대되어 새로운 문제점들을 던져주고 있다. 모든 자유가 그렇듯 이들 자유도 공동체 내에서 타인과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헌법과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그것이 형법이나 정보통신망법등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나 최근 한 일간신문이 제기한 ‘기독교 가짜뉴스’ 논란은 우리들의 고민을 깊게 한다. 한 선교단체를 가짜뉴스공장이라고 지목한 일간신문 기획기사의 핵심적인 근거는 그 단체가 정확한 ‘사실확인’(fact check)을 거치지 않은 기사를 배포하거나, 심지어 의도적으로 왜곡된 사실들을 짜깁기 하여 허위정보를 유포하는 ‘공장’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세력과의 연결을 통해 금전적인 거래까지 시도했다는 의혹제기였다. 이에 대하여 ‘가짜뉴스배포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이는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혐오표현금지법·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활동 등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자신들을 일정한 프레임을 설정하여 재갈을 물리려는 움직임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가짜뉴스의 온상은 오히려 그 일간신문이며, 자신들은 그 어떠한 정치권과의 연계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사실, 똑 같은 상황을 두고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다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면서 현 상황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들을 기독교 내부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기독교단체가 복음적인 시각으로 사회적 이슈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하지만 기독교를 표방한 그룹이나 단체가 특정한 정치이념과 연결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특정 정당과의 연결은 오히려 교회의 운신의 폭을 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조사 등을 통해 이 부분이 명확히 정리되길 바란다. 또한 사회의 여러 이슈들을 하나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것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염려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뜨거운 인권, 동성애, 난민 같은 이슈들은 그 유형이 유사해 보이지만 동일한 접근과 해결방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폭넓은 전문가들의 참여가 요구되는 지점이고, 기독교계내의 ‘공론화위원회’같은 것이 필요한 이유다. 더불어 우리 기독교인들도 가짜뉴스감별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 먼저 기사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단체의 배경도 살펴보고, 최소한 두 세 개 이상의 기사를 서로 비교하면서 너무 자극적이거나 선동적인 문구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우린 뉴스를 단지 ‘팩트체크’로만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건전한 신앙과 보편적인 신학의 바탕위에서 다른 사건들을 같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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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15
  • [강규철 장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믿음
    이 할머니는 올해 85세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철저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사상으로 양육되었는데 언니가 일찍 불교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는 영향으로 불교를 믿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시골에서 혼자 살던 중 위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고 난 후 그는 부산으로 와서 예수를 믿는 집안에 시집 간 큰 딸네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온 식구가 교회를 가는데 그는 적적한 집안에 하루 종일 혼자 지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가족 간의 대화가 단절되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쇠약한 몸으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무런 낙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딸에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예수를 믿어야 겠다’고 말하고는 먼저 간 남편이 묻혀있는 선산으로 가서 술을 한잔 부어주며 ‘이제부터 내가 예수를 믿어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언니, 동생 등 친지에게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그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로 부터 세례기념으로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귀한 책을 받았으니 읽어야 한다며 매일 성경을 읽었는데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완독을 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깨끗한 새 돈을 준비하여 헌금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부터는 자녀들로부터 받는 용돈과 구청에서 하는 취로사업에서 일하며 받는 지원금에서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웠던 삶이 예수를 믿고 난 후 감사함이 넘치고 남을 돌아보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는 식사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진심으로 합니다. 또한 교회와 목사님과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선생님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으로 자신을 가르쳐주며 이끌어 주시니 존경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의 분란을 야기하는 교인들을 이해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욕하고 대적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제는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매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여러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평생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눈을 뜨고 걸을 수 있으면 그는 교회에 가겠다고 합니다. 그가 예수를 믿으며 사는 삶은 초창기 한국교회의 순수했던 성도들의 삶과 거의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를 믿어도 정말 똑 부러지게 믿고 있습니다. 그는 남산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권순한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예수를 제대로 믿었으면 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8-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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