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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규철 장로] 이런 삶도 있습니다
    남미의 조그만 나라인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에서 빈민가의 어린이와 외항선원들을 위해서 오늘도 하루 종일 일하고 있는 한국인 부부가 있습니다. 그는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개밥을 주는 것부터 농장의 잡일을 시작합니다. 9시에 아침을 먹습니다. 그리고 또 농장 일을 합니다. 1시에 점심을 먹고 잠깐 낮잠을 자고 다시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저녁 8시 경에 저녁을 먹고는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합니다. 그의 농장에는 사과, 옥수수, 오이, 고추, 부추, 상추, 깻잎 등 여러 가지 농작물을 수확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콩나물도 재배하여 이것들을 팔아 아이들에게 장학금도 주며 자급자족하며 교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16년 전에 잘나가던 해운회사의 이사직을 버리고 험난한 외항선원 선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왜나면 그곳에서 배가 정박하면 선원들이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 결과 현지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 아이들은 결국 버림받아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상황을 보고 이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헌신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는 사비를 털어 농장 부지 13,000평을 구입하여 선원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목욕탕, 찜질방, 축구장 등을 만들어 건전한 여가시간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세워 한국계 아이들과 빈민가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한 것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그를 떠나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했습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악착같이 일한 그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도 될 터인데 타지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난날 그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6~70년대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을 그대로 도입하여 시행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하게 하여 이 아이들이 철저히 성경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교육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교회에 오면 라면을 끓여주거나 초코파이를 주어 교회에 오는 것이 즐거워지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오는 길에 교회를 들렀다가 집으로 갑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교회가 좋다고 합니다. 한번은 교회 곁에 있는 빈민가에 살고 있는 꼬마 5형제가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악동들이 너무 까불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어서 이들이 교회로 오는 대신 선교사님이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성경구절을 외우면 과자나 사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아이들이 성경을 열심히 외우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성경말씀이 이들을 변화시켜 지금은 그 부모와 형제, 그리고 이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며 정상적인 직장을 가지게 되어 빈민가를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빈민가를 마음대로 들어 갈수 있는 한국인은 이 선교사외는 없습니다. 왜냐면 빈민가에는 마약굴과 창녀촌이 공존하는 우범지역이라 현지인조차도 꺼려하는 곳입니다. 한번은 다른 선교사님이 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고 돌아가다가 교통신호를 받고 잠깐 정차한 순간에 강도를 당해 소지품을 털려버린 적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도 초창기에는 수시로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주변에 3군데의 빈민가가 있는데 교회 봉고가 들어가면서 경적을 울리면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워줍니다. 선교사님은 당연히 그 부모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할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난 15년간 주일학교를 통해 양육받아 이제 교회의 청소년 리더가 되어 주일학교의 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청소년이 20명 가까이 됩니다. 놀라운 것은 이 교사들이 자기 수입의 십일조를 바쳐 70명이나 되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간식을 매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부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30여명의 청소년들을 위한 수련회를 2박3일간 진행하였는데 아주 진지하게 참여할 뿐 아니라 매일 밤 새벽 2시까지 뜨겁게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 땅의 미래를 위해 키우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이제 하나님이 두렵다고 합니다. 왜나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을 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70세가 된 지금도 그는 교회 2층을 직접 짓고 있습니다. 그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선원과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는 이명규 선교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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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 [김기현 목사] 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
    매주 수요일이면 저를 찾아오는 형제가 있습니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저랑 일대일로 잠시 만나 책을 소개해주고, 읽은 것에 대해 몇 가지 코멘트를 해 줍니다. 그 중간에 이런저런 신앙적 의문을 묻기도 하지요. 이번에는 “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라고 물어옵니다. 그리스도인이 거듭났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이 지탄하는 이들, 명백히 부정한 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고민이 된 게지요.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다음 몇 가지 이유로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구원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엡 2:8)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만의 고유한 결정입니다. 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다르며, 하늘의 시각과 땅의 관점이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멀며, 순간과 영원이 같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지성과 영성으로 성서를 근거로 미루어 짐작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 틀리지 않는다는 것도 맞습니다. 인간이 다 틀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을 비하하는 위험한 반대편 오류에 봉착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타인의 구원을 가늠할 위치에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셋째, 불건전한 질문입니다. 누군가 성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뭘 하고 계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지.” 실제로 지옥 간다는 악담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정신 차리라는 깨우침의 말입니다. 그런 물음은 백해무익입니다. 알 수도 없고,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하나 없고, 간절히 대답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넷째, 건강한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건강한 일이란,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 곧 우리 각자에게는 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남을 돕기 위해서 그가 어떤지를 물을 일입니다. 타인의 구원 운운에 몰두하는 것은 높아지고자 하는 심리로, 보이지 않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탓이라면 지나친 걸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 나를 두고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다른 이를 보면서, 저런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냐, 어떻게 저렇게 행하고, 살면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 라며 혀를 끌끌 찰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느 곳에서는 그런 나를 두고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런 사람도 구원받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분에게 가는 날, 혹은 그분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는 묻지도 않을 것이고, 알려줄 필요도 없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딴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나 같은 놈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도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예서 멈추면 안 되지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신 주 은혜 놀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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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남송우 교수] 고통의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시대를 명명하는 다양한 별칭들이 난무하고 있다. 위험사회, 개인주의 사회, 후기자본주의 사회, 신자유주의 시대, 지식정보사회, 인공지능의 시대, 다원주의 사회, 대중문화의 시대, 4차 산업시대 등 변화하는 사회 현상에 따라 다양한 명명들이 쉼 없이 출몰하고 있다. 사회 현상을 예리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규명해보려는 학자들의 노력은 일견 그 사회의 특징과 현상을 적확하게 규정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이 사회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좀 다른 차원의 시선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말세라고 명명한다. 이 말세에 대해 사도 바을은 다음과 같이 그 특징을 설명한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 ; 1-5)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도 바울 이 시대를 보는 눈은 참으로 놀랍다. 그는 개인주의 사회나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은 정확하게 마지막 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의 삶을 살아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지금의 개인주의는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결혼과 가정까지 부정하는 혼족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혼밥이 일상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자기애의 극단적인 한 형태이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점점 더 심화․확대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사람들은 돈을 사랑할 것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후기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한 지도 오래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공산사회까지 몰락함으로써 지금 지구촌은 온통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모든 국가나 개인은 오직 돈을 더 많이 벌고 모으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그래서 돈이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시대인 듯 착각하고 모두들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인식할 정도로 돈이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 풍토로 자라나는 세대들 역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되어버린 지도 오래되었다. 말세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사랑과 돈 사랑에 빠짐에 따라 그 삶의 형태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배려하거나 생각하는 삶을 지향할 수가 없다. 타자가 안중에 제대로 들어올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 확보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이들의 삶의 형태는 자기 자랑, 교만 훼방, 거역, 무정, 원통, 참소, 무절제, 배반, 조급, 자고 등의 행각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행위들의 범람은 한 마디로 짐승의 차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도 바을은 이러한 상태를 ‘사나우며’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 한글 번역과는 달리 영어 번역은 'brutal'로 번역하여 잔인하고도 짐승같은 의미로 옮겨놓고 있다. 이런 결과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돈을 사랑하여 돈을 많이 모으게 되면, 자기 사랑에 빠진 인간은 결국 자기를 위해 쾌락을 좇아갈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 사실이 훤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즐거움을 좇아가는 이 삶이 결코 즐거운 삶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세태의 삶을 ‘고통하는 때의 삶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을 사는 자들로부터 돌아서라 라고 명령한다. 돌아서는 첫 걸음은 자기사랑과 돈의 사랑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나는 길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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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28
  • [이선복 교수] 부활 한국(復活韓國)
    “감옥에 가지 않는 총장이 되게 기도해 주십시오”. 취임을 며칠 앞둔 某국립대학 교수님이 1년전 기독모임에서 한 인사말이다. 또 3년전 某기독대학이 前총장을 횡령 혐의로 고발하는 일이 부산에서 발생하였다. 충격적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지도층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다. 심지어 이 나라의 시스템은 최근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을 탄핵, 구치소에 수감까지 하였다. 임기말 레임덕을 넘어, 대부분의 전직 대통령이 수난을 경험하는 불행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뇌물에 대한 법리 개념의 시시비비를 넘어 관련 사태로 기업 CEO가 구속되는 등 지금 대한민국은 너무나 큰 사회적 비용의 부담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이 나라의 병(病)인가? 사순절(四旬節) 기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셨듯이, 이 나라도 심한 열병을 앓고 있다. 진보와 보수, 촛불과 태극기의 갈등이 너무 심하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안에 2개로 갈라진 성도, 목회자의 모습이 보인다.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각기 다르다. 설교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심지어 심한 욕설과 공격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SNS 문화가 또 하나의 열병을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네 눈속에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마7:3-5)”. 온 국민이 한번 더 신중히 고민하며 행동에 옮기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생산할 뿐이다.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우리나라 2016년 회계 적절성에 대한 국제 경쟁력 평가는 61개국 중 최하위인 61위를 기록했다. 2011년부터 IFRS(국제회계기준)을 도입, 회계 선진국 진입을 표방하던 대한민국이 아니었던가? 부끄럽고 창피하다. 나 스스로 분식회계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도망치던 세월호 선장의 모습이 내 안에 감추어 져 있지는 않은지 먼저 돌아보며, 공동체의 비전과 정직을 함께 도모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진정한 개혁은 그 어떤 큰 목소리의 주장보다도 내 자신에 대한 반성과 희생, 회개, 그리고 실천이 먼저 선행 될 때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아가서2:10-13)”. 곧 부활절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장사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산 소망의 역사요, 능력의 역사이다. 온 국민이 부활 한국(復活韓國)을 향해 함께 달려갔으면 좋겠다. 분노와 지탄, 공격의 언어보다는 희망과 화합, 존중의 언어를 전달하는 메시지가 많이 선포 되었으면 좋겠다. 비선실세(秘線實勢)의 존재가 얼마나 큰 아픔을 주었는지 교훈으로 삼되, 국민의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달려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며 신뢰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9가지 열매이다. 마르틴 루터와 칼뱅에 의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진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한번 더 돌아보며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변화되어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고, 또 새로운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선출될 수 있도록 간구해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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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4-10
  • [전영헌 목사] 학교를 포기하지 맙시다
    나는 대안학교에 관심이 많았다. 더 이상 공교육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면서 기독교학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석, 박사 과정 모두 기독교학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다. 나는 기독교대안학교를 설립하여 기독교가정의 자녀들을 잘 양육해서 세상의 변혁자로 살게 하는 것이 내 꿈이요 비전이었다. 기존 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새로운 모델의 학교를 꿈꾸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10년 전부터 나는 공교육 현장의 목사 선생으로 살고 있다. 만 9년의 학교 생활을 통해 학교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변하게 되었다. 대안은 어디까지나 대안이지 주류는 여전히 공교육 현장인 학교라는 것이다. 기존의 학교를 포기해서는 교육의 물줄기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속해 있는 학교에서라도 우리 아이들이 ‘다닐만한 학교, 재미있는 학교’를 만드는데 한 부분을 담당하고 싶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억지로 왔던 학교에서 다닐만한 학교로, 나아가서는 정말 잘 온 학교로 바뀌어가는 아이들의 생각의 변화를 보면서 ‘아직 희망은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미션의 기능을 생각할 때는 더 그렇다. 교회가 지역 학교들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여전히 학교는 매력적인 전도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리 학교 인근에 있는 이삭교회에 교육목사로 9년을 섬겼었다.(2008.3-2016.12) 내가 속했던 교회가 브니엘고등학교에 들이는 공은 엄청나다. 금정구청의 자원봉사센터와 연계하여 매년 4-5천만원의 돈을 들여 지역 홀로어르신들의 사랑의 도시락 반찬 나눔 운동을 기획해서 우리 학교 120명의 학생들이 매주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를 통해 매주 금요일 오후 교회에 봉사활동을 오는 학생들이 교회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를 갖게 할 뿐 아니라, 지속적인 장학금 지원, 그리고 교회 소그룹(사랑방)에서 학생들을 1:1 결연하여 어려운 학생들의 용돈을 지원하여 돕는방법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학교를 돕고 섬기고 있다. 이를 통해 학교는 지역 교회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전도의 문을 열어 주었고, 이삭교회는 브니엘고등학교 학생들이 친근하게 찾는 곳이 되었다. 이것은 미션 스쿨인 우리 학교와 교회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들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역 교회 인근의 학교와 교회가 오랜 시간 연계하여 교회가 학교를 돕는 시간이 쌓여서 학교가 교회를 보는 시각이 바뀌게 되고, 나아가서는 전도의 문이 닫혀 있다고 하는 학교의 문도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지역에 미션 스쿨들이 의외로 많다. 지역교회들이 미션스쿨들을 입양 개념으로 결연하여 지속적으로 장학금 지원 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관계를 맺어간다면 미션 스쿨의 특성상 학교 전도의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종교교육이 자유롭지 못한 시대라 할지라도 미션 스쿨들은 건학이념이라는 이름 아래 학원선교라는 숙제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지역교회가 먼저 학교에 관심을 가지고 문을 두드린다면 얼마든지 교회와 학교가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나는 지역교회들이 학교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청소년 집회를 다니다보면 대부분의 교회들이 청소년들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나 학교에는 청소년들이 있다. 문제는 그 청소년들을 안을 수 있는 정책들이 필요한데, 나는 교회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여전히 학교의 청소년들을 교회로 불러들일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선교사님들의 순교와 눈물로 세워진 수많은 미션 스쿨들이 오래 전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학교만의 힘으로, 소수의 교사의 힘으로, 목사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같이 움직여줘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부탁드린다.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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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3
  • [박철 목사] 가벼운 스님이 떠나면 되듯이
    하늘은 늘 공평하여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골고루 주었다. 간혹 배분이 잘못되어 조금 더 낫거나 약간 모자라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확실한 건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가령 힘 좋고 튼튼한 사람에게 냉철한 머리까지 준다거나, 기발하고 뛰어난 머리에 건강한 신체까지 준다는 건 좀처럼 없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재주가 열 두 가지면 굶어죽는다"라고 했을까? 한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일개 서민이 '선택된 사람' 인양 행동한다면, 그렇게 큰 피해가 없지만 위쪽, 즉 지도층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일개 서민이 천지를 모르고 설친다면 그냥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한 바퀴 빙글 돌리고 무시해 버리면 되지만, 지도층에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 그 피해가 예삿일이 아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되고 세상을 바꿀 사람은 나뿐이며 나부터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이 위험한 생각, 공평하게 나누어준 하늘에 도전하는 이 생각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은 수년간 그야말로 '욕봤다'. 아비가 제 자식을 교정하기도 어렵고 아랫사람이 어른의 생각을 바뀌게 한다는 것도 쉽지 않고 다른 모든 친구를 자신의 취향에 맞게 바꾸는 것도 역시 어렵다. 하물며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혼자 맞는다고 우기는 일들을 우리는 요즘 신문이나 TV를 통해서 너무 쉽게, 자주 본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는 좋은 말이 있다. 나 하나 변하는 것이야 좋은 책을 몇 권 본다거나 좋은 스승이나 친구를 만난다거나 어느 날 문득 득도해서도 가능하지만 자기를 뺀 다른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건 솔직히 말해 불가능하다. 약삭빠르고 싹싹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은 마음속이 쉴 틈이 없다. 무슨 일이든 만들어 꾸며 보려는 욕심으로 마음을 가만 두질 못한다. 성급하고 조급해서 양은그릇처럼 잘 달구어지기도 하고 잘 식어 버리기도 하는 사람은 진득하게 살지 못한다. 어수선하게 일을 벌여 놓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이 밤낮으로 쫓기면서 자신을 돌이켜 볼 줄 모른다. 이런 사람은 영악할 수는 있어도 어질 수는 없다. 약삭빠른 현대인은 자신을 이길 생각은 않고 남을 이길 생각만 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벗을 잃었고 이해상관으로 얽힌 동료만 있을 뿐이며, 항상 서로 경계하면서 다투어 상대를 이길 생각만 골똘히 한다. 그리고 염치를 모르며 겸허할 줄 모르고 우쭐대면서 자기선전을 하여 씨름판의 천하장사가 된다.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잊어버린 지 오래다. 사람들이 뻔뻔스러우니까 세상은 점점 추해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는데, 우리는 먼저 남을 탓할 때가 많다. 잘못은 내게 있는데, 내가 오해받을 일을 했는데도,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화를 낼 때가 많다. 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내 실수인 줄 알면서도, 알량한 자존심과 유치한 자기체면 때문에 먼저 다가가 서 사과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먼저 숙이고, 내가 먼저 이해하고, 내가 먼저 인사하면, 내가 먼저 사과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따뜻한 마음을 만날 수 있는데 왜 나는 그리 못하는 것일까? 지금은 그의 잘못이 크다 해도, 내가 먼저 큰 사람이 되어 마음을 먼저 열기만 하면 그 사람은 오히려 낯이 붉어지며 미안해 할 텐데…. 그 멋지고 아름다운 일을 왜 내가 먼저 못하는 것일까? 스님이 절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절더러 떠나라고 할 것인가? 가벼운 스님이 떠나면 되듯이 나를 뺀 모든 사람을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내가 변하자. 순리대로 좀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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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03
  • [안동철 목사] ‘사랑’의 바구니 안에 ‘진리’를 담아야 된다!
    영화나 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상을 잘 반영한다. 그래서 필자는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나 책은 보거나 읽으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1997년에 개봉된 ‘라이어 라이어’(Liar Liar)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현대인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 영화는 세계적인 배우인 짐 캐리(Jim Carrey)가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이 영화의 감독은 톰 새디악(Tom Shadyac)인데, 그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진실’의 소중함이다. 영화에서 짐 캐리는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그는 소송에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질 변호사로 등장한다. 그의 거짓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아들인 맥스에게도 완전히 신용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가족들과의 약속을 번번이 어기던 어느 날, 그는 아들 맥스에게 생일만은 축하해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날도 불륜에 빠져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기다리던 아빠가 나타나지 않자 맥스는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기 전 아빠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기도는 이루어진다. 이후 짐 캐리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진실만을 말하게 된다. 톰 새디악 감독은 영화를 통해 온갖 거짓에 물든 현대인을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세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까? 에베소서 4장 15절을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해야 한다. 영어 NIV성경은 이 부분을 “speaking the truth in love”(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라고 번역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말의 내용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은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의 원수 마귀를 향해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하고 있다. 반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요 16:13). 며칠 전 모 방송사 뉴스를 통해 ‘가짜뉴스’가 SNS를 통해 급속히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리고 필자에게도 그런 글들이 요즘 끊임없이 전달되고 있다. 유명 단체 어떤 유명인이 말했다고 하는데 거짓된 정보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전 국민이 비탄에 빠져 추모의 의미로 노란리본을 달았을 때 이것을 정령숭배이고, 노란색은 특정 정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해서 비난의 글을 퍼붓기로 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노란색도 하나님의 색이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시민으로 정치적인 의사를 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주장이나 글은 반드시 진리에 기반을 둬야 한다. 덧붙여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 갈등이 심각한 한국 땅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의 바구니에 담길 때에만 가치가 있다. 가슴 아픈 것은 모두 다 핏대를 올리며 주장하기만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모든 갈등과 상처를 보듬고 치료해야 할 교회도 이 갈등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회는 이 땅의 것에 영원한 가치를 두지 않는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지 않는가?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담대히 말했고, 대적자들은 결국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지 않는가? 혼란한 이 땅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바구니 안에 ‘진리’를 담아야 한다. 이때 거짓과 갈등으로 점철된 이 땅을 아름답게 밝힐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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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2-16
  • [주광순 교수] 기독시민의 자세
    새해 초부터 우리나라는 작년부터 이어져 온 탄핵정국과 대선으로 시끄럽다. 사람들은 패가 갈려서 나뉘어 싸운다. 정치권은 물론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이제 필자는 묻고 싶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필자는 학교 다닐 때에 두 분 선생님으로부터 기독교인이 변해야 한다고 배웠다. 손봉호 선생님으로부터는 단지 교인일 뿐 아니라 제대로 된 시민으로 살아야 할 것과 이만열 선생님으로부터는 단지 교인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으로도 살아야 할 것을 배웠다.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한 나라가 아니라, 두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냉철하고도 합리적인 자세로 이 땅을 살아가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당위론적인 원칙이 우리 현실의 복잡 미묘한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기는 어렵다. 좀 더 자세한 원칙들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교회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세상과 마찬가지로 나뉘어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지만 한쪽에서는 탄핵 집회에 나가고 다른 쪽에서는 탄핵 반대 집회에 나간다. 양쪽 모두 건전한 시민과 바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목회자가 요즘 정치적 이슈를 논하면 교회가 갈라질 판이다. 단순히 일반 교회만이 아니라, 필자가 관여하는 부산 기윤실 같은 시민 운동적 성격을 띤 기독교 단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기윤실에서 아무리 토론해 보아도 선거에 영향을 주기가 어렵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각자는 모두 자기 견해를 단단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옛 전통처럼 정치와 사회에는 관여하지 말아야 하는가? 필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답변하고 싶다. 좀 더 적극적으로 교회에서도 사회에서처럼 바른 길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서로 다른 의견들이 생겨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제야 교회도 정치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수학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싸우지 않는다. 다만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수학 문제에서와는 달리 다툼이 늘 일어나게 마련인 것이 타락된 인간의 본성이다. 하나님께서 보신다면 정답이 있겠지만, 인간의 눈에는 자기만의 대답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정치로부터 돌아설 것이 아니라, 커다란 원칙을 넘어서 작은 원칙들을 찾아보아야 한다. 개인적인 문제 뿐 아니라, 정치 문제에 관해서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힘써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제안해 본다. 우선 언론이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공통으로 보도하는 것은 인정해 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개인이 자격도 없이 국정에 관여하여 자신이나 그 주위의 집단의 이익을 챙겼다고 언론은 보도한다. 경향이나 한겨레는 말할 것도 없고 동아, 조선, 중앙조차도 한결 같이 최순실씨가 미얀마 대사를 임명하는데 부당하게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 교우로부터 충격적인 카톡을 받은 적이 있다. ‘조선일보는 호남 향우회보이다’ 라는 제목을 달고 있어서 읽지도 않고 삭제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언론이 한 목소리로 비판하는 것조차 색안경을 끼고 본다면 정치 문제에 대해서 논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기도회를 한다면 기도회의 본래적 목적과는 어긋나기 쉽다. 비록 국정농단에 대해서는 같이 고발할 지라도 경향, 한겨레와 동아, 조선, 중앙은 정말 다른 목소리를 낸다. 명백하게 한 쪽은 진보이고 한 쪽은 보수이다. 그 어느 쪽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중대한 일에 무자격한 간섭이나 자기 이익챙기기가 끼어 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공감해야 한다. 지금 청년 실업이나 노후 보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가! 국가 정책이나 재정은 이러한 일에 쓰이도록 기도할 일이고 투표할 일이다. 그것이 좀 더 진보적이거나 좀 더 보수적인 길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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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2-03
  • [송시섭 교수] 교회법을 재건하라
    올해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지 500년이 되는 해다. 루터가 1517년 교황청의 면죄부판매에 반대하여 비텐베르크성(城)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일 때 중세교회는 새로운 도전을 맞게 되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누구든지 면죄부를 반대하는 수도승은 이단’이라고 선언했고, 루터는 1520년 12월 10일 교황의 소환장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그러나 그 날 루터가 불태웠던 것은 소환장만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법전’ 또한 공개적으로 불태웠는데 이는 당시 중세교회의 또 하나의 큰 축인 교회법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는 교황의 수위권(papal supremacy)이 교황의 칙령에 기해 구축된 것이고, 그 칙령의 결정판이 교회법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루터가 교회법전을 연구하면서, 법전을 이루고 있는 많은 교황의 칙령, 그리고 교회 공의회의 많은 법령 등이 위서(僞書) 내지는 위작문서임을 발견하게 되면서 교황과 더불어 로마가톨릭교회를 지탱하고 있던 큰 기둥인 교회법전이 썩어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교황청이 루터의 책들을 불태우라고 명하자, 그에 대항하여 루터는 교황의 칙령이 집대성된 교회법전을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교회법이 없어지지 않는 한 교회는 개혁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던 루터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교회법’은 무시되고 배척되어야할 대상이었고, 교회법연구의 흐름은 그 맥이 끊어져버렸다. 그러한 교회법 배척의 흐름은 칼빈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만 3년(1538-1541)의 깊은 사색과 목회, 연구와 저술생활을 마치고 1541년 9월 제네바로 돌아온 후 자신을 다시 부른 제네바의 개혁을 구체화하기 위해 3대 프로그램을 가져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교회법’이었다. 칼빈이 만든 1541년의 「제네바 교회법」(Genevan Ecclesiastical Ordinances)은, ‘우리 주님께서 그 분의 교회를 다스리기 위하여 제정하신 직분은 네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목사이고, 다음은 교사, 그리고 장로, 넷째는 집사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어 성찬(聖餐)의 의미를 강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교회법을 통하여 그의 종교개혁의 의지를 펼쳐 보임과 더불어, 자신이 꿈꾸는 바람직한 교회공동체의 비전을 담게 되었다. 이제 다시 교회는 세속법전과는 다른 영적규율의 근거로서의 ‘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지나 우린 ‘교단헌법’이라는 명칭의 법전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개신교 크리스천에겐 아직도 ‘교회법’은 다소 생소한 단어다. 아마도 우린 칼빈의 길보다는 루터의 여정을 따라 너무 오랫동안 걸어왔던 것은 아닐까. 루터와 함께 우린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순수 신앙의 견고한 진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우린 루터의 길 위에서 세상과 공통된 ‘법’이라는 창구를 통해 세상을 섬기고 이해하며 함께 소통하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도구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준비될 것이다. 필자는 그 행사가운데 하나로 ‘교회(헌)법의 재건과 통일’을 제안하고 싶다. 유대 율법주의와 중세 교회법의 폐단을 극복하면서 성경이 담고 있는 인류보편의 가치들을 새롭게 구축해야 할 교회법은, 교단통합의 출발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확립, 대사회적인 신뢰성의 회복과 공감대형성의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루터가 태워버렸던 교회법전의 잿더미에서 새로운 개신교 교회통일헌법전이 불사조처럼 탄생하길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새해에 간절히 기원해본다.
    • 오피니언
    • 정론
    2017-01-19
  • [탁지일 교수] 개신교인 증가 사실일까?
    1995년, 2005년, 2015년에 진행된 인구총조사는 한국 종교인구 변동 분석을 위한 주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한다. 특히 2015년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인들이 약 100만 명 정도 증가했다. (1995년 8,760,336명; 2005년 8,616,438명; 2015년 9,675,761명).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악화되고, 종교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상황에서(1995년 51%, 2005년 53%, 2015년 44%), 개신교 인구 증가는 한국교회로서는 믿기 어려운 낭보이다. 하지만 인구총조사의 종교분류 항목을 고려할 때, 최근 통계를 그대로 받아드리기는 조심스러운 면이 있다. 즉 한국 개신교단들이 이단으로 분류한 단체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통계청의 인구총조사 종교별 분류는, “불교, 기독교(개신교), 기독교(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대순진리회, 대종교, 기타, 종교없음”으로만 한정되어있다. 1995년과 2005년도 역시 유사하다. 만약 이단단체에 속한 신도들이라면, 어느 항목에 체크를 할까? 아마도 “기독교(개신교)”로 자신의 종교를 분류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다른 가능성도 있다. 10년 마다 약 300만 명씩 종교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반면, 2005년 통계 대비 불교는 250여만 명이 줄었고, 천주교도 100만 명 넘게 감소했다. 불교인들과 천주교인들이 개신교로 개종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다수의 이단들이 개신교 통계에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역시 배제할 수 없다. 1995~2005년 기간 동안, 불교와 천주교는 각각 310만과 130만 정도 감소한 반면, 개신교 인구는 2005~2015년에는 100만 명 이상 증가했다. 주목할 점은, 이 시기가 이단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신천지 내부 통계에 따르면, 2016년 1월 현재 신도 수가 161,691명이라고 한다. 하나님의교회는 국내외 합쳐 결코 신천지보다 작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구원파를 포함해 한국교회가 이단과 사이비 등으로 분류한 단체들의 신도 수를 포함하면,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볼 수 있다. 한편 20~39세 청장년들의 통계를 분석하면, 이러한 염려가 더욱 깊어진다. 개신교 20대와 30대 청장년들의 숫자는, 1995~2005년에는 60만여 명이 감소했고, 2005~2015년에는 35만여 명이 감소했다. (1995년 3,335,988명; 2005년 2,761,863명; 2015년 2,413,709명) 다음세대인 청장년들이 감소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100만 여명의 교세 증가는 무엇을 의미할까? 과연 청장년이 수십만 명 감소한 한국교회에서 100만 이상의 교세 증가가 가능할까? 지난 10년 동안, 불교의 경우에는, 전체 교세가 300만 정도가 감소하고, 청장년 교세도 150만 정도 감소했다. 천주교는, 전체 교세가 120만 정도 감소하고, 청장년은 60만 정도 감소했다. 즉 총 감소 인구의 반 정도가 20~39세의 청장년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00만여 명이 증가한 개신교는 오히려 청장년들은 35만여 명이 줄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한다면, 최소한 50만 명 정도가 증가해야 맞는 이야기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개신교에서 감소한 35만여 명의 청년들, 그리고 수십만 명의 이단 신도들의 수를 합치면, 100만이라는 숫자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100만 명의 개신교 인구 증가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성장의 기쁨을 나누기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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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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