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6-01(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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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길원 목사] 내면의 배고픔, ‘외로움과 고립’
    6월 23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과부(寡婦)의 날’이다. 국제 과부의 날은 2010년 유엔이 정했다. 인도 펀잡 지방 출신 기업인 라즈 룸바(Raj Loomba, 1943~)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려 만들었다. 과부였던 어머니는 자신을 비롯 7남매를 길러냈다. 그가 설립한 ‘룸바 재단’에 따르면 설립 당시인 2015년 기준, 전 세계 과부가 2억 5,900만 명이었다. 그들의 손에 의해 5억 8,500만 명의 자녀들이 양육을 받았다. 그들 과부 중 1억 1,500만 명이 가난 때문에 생존의 위협을 당한다. 이들 과부를 넘어서 지구촌은 또 다른 가난, ‘내면의 배고픔(외로움과 고립)’을 겪고 있다. 고령층이 그들이다. 거기에다 1인 가구도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30% 가까운 사람들이 항상 또는 자주 외로움을 느낀다는 통계가 여럿이다. 세상은 초연결사회로 치닫고 있지만 여전히 모든 인간은 ‘외딴섬’처럼 살아가고 있다. 알베르 코엔은 장편소설〈내 어머니의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이고, 남의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저마다의 괴로움은 황량하고 쓸쓸한 섬과도 같다.” 미국 공중보건 서비스단의 보고에 의하면 외로움과 고립에 시달리는 이들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29% 더 높다. 뇌졸중은 32%, 치매는 50% 더 크다. 노화 속도는 1년 8개월 더 빨랐고 인지능력은 20% 더 빨리 저하됐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비벡 머시 단장은 외로움이 하루 담배 15개비만큼 해롭다며 외로움과 고립을 공중보건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외로움과 고립으로 인한 ‘내면의 배고픔’은 개인의 몫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외로움으로 인한 치매 등 건강 문제가 증가되었다. 업무 효율 저하를 넘어서 자살 및 고독사가 증가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국가 차원의 국민 돌봄이 필요해졌다. 영국은 2018년 1월,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직을 신설했다. 인간이 가진 고독과 소외에서 비롯되는 외로움을 줄이는 일이 의료비는 물론 교통사고와 범죄를 줄인다. 자살 예방의 최선책이 된다. 2021년 일본은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하고 총리관저 내각관방에 고독·고립 대책실을 출범시켰다. 외로움 시장이 커지면서 반려 로봇 상용화도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미 많은 과학자들이 ‘궁극의 공감기계’라 불리는 VR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한마디로 하면 세상은 ‘외로움’과 전쟁 중이다. 반려동물이 늘고 있다. 위로에 대한 갈망이다. 위로를 준 반려동물도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느냐는 질문과 상담이 늘었다고 한다. 이런 세태 속에서 교회는 이들의 외로움과 고립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믿음 없는 소리라고만 치부하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는 ‘3대 약자’가 자주 언급된다. ‘고아’, ‘과부’, ‘나그네’가 그들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학대하지 말고 돌봐야 할 것을 강조한다. 율법서만이 아니다. 예언자들 메시지에도 이런 정신은 자주 언급된다. 4계명의 안식일 법은 대표적인 약자 보호법이나 다를 바 없다. 요즘 말로 하면 ‘약자와의 동행’이다. 신약성경으로 눈길을 돌리면 과부들에게도 적극적인 주문을 한다.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딤전 5:5)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외로움을 ‘몸과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질병’으로 정의했다. 하나님은 이 질병에 대해 어떤 차방을 가지고 계신 걸까? “하나님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가정을 이루시고 사슬에 묶인 사람들을 풀어 주신다.”(시 68:6, 우리말) 개역개정은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로 번역했다. 가정의 달이다. ‘가정을 교회처럼, 교회를 가정처럼’이 헛구호가 되지 않도록 저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자. 저들의 요구는 딱 하나다. “외로운 영혼을 품어다오.” 오늘따라 시편 기자의 간구가 가슴을 울린다. “주님, 나를 돌아다보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는 외롭고 괴롭습니다. 원수가 내 마음에 고통을 더하니, 나를 이 아픔에서 건져 주십시오. 내 괴로움과 근심을 살펴 주십시오.”(시 25:16~22, 표준새번역)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부부 주일... 교회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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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19
  • [전영헌 목사] 엄마, 나 오늘 행복했어
    “엄마, 나 오늘 하루 행복했어.” 학교의 3월은 정신없이 흘러간다. 새로운 아이들과의 적응,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학사 업무들까지 여러 업무들이 복잡하게 얽혀가다보니 3월이 길기도 하고, 빨리 지치기도 한다. 작년 가을부터 고신대 겸임교수 업무까지 겹치다보니 평상시보다 더 버거운 학기초의 시간이었다. 4년 만에 재개된 학부모 대상 학교설명회까지 교목실이 주관해야 하다 보니 여유없는 일상으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수업, 채플, 행정 등 여러 학교 업무들이 아무리 바빠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게 있는데 학생, 학부모 상담이다. 3월 중순 종교수업을 마치고 교목실로 왔더니 제자 하나가 나를 급히 따라왔다. “목사님 지금 상담이 가능할까요?” “ㅇㅇ야, 오늘 학교행사(학교 설명회) 준비 때문에 지금 시간이 안되는데 내일 1교시에 보자.내일 아침에 무조건 너 먼저 만날게.” 직감적으로 미루어도 되는 상담인지 즉시 필요한 상담인지는 이젠 빠르게 판단할 경험치가 쌓인지라 이 제자는 급히 봐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 출근하지마자 제자를 찾았다. 교목실에 들어오는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상담의 내용은 중학교 때까지 왕따를 당한 상처로 인해서 친구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거절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심이 입학 후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웃는데 웃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충분히 들어주고, 충분히 이야기를 나눴다. 드디어 얼굴에 머금은 눈물과 함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마무리 지으며 결론을 내려줬다. “ㅇㅇ야, 네가 다녔던 중학교 때까지는 지금 네 담임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안 계셨고, 그리고 목사님이 그 학교에 없었어. 근데 지금 이 학교에는 네 담임선생님도 계시고 나도 있어. 그럼 된거야” 그러자 환하게 웃었다. 그날 하루를 잘 지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날 ㅇㅇ는 집에 돌아가서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엄마 나 오늘 행복한 하루 보냈어.” 지난 10년 동안 학교를 다녀도 끌려가듯 갔던 학교여서 엄마 아빠는 늘 기도했었는데, 처음으로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하니 어머니는 울면서 감사 인사 전화를 주셨다. 여전히 이 아이는 고비 고비를 계속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젠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돌파를 위한 노력을 계속 하고 있다. 아이들의 행복. 이것은 나의 행복이기도 하다. 매일 사라지는 초코파이를 또 채워야 하는 부담이 있긴 하지만 작은 것 하나에 행복해하니 은퇴 때까지 퍼먹이는 일을 어찌 멈추겠는가. 올 한해도 이러한 행복의 시간이 많아지길 기대하며 3월, 4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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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8
  • [탁지일교수] 사이비 신들의 세상
    최근 이단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관심을 끌면서, 교회에 대한 사회적 오해와 불신과 냉소도 함께 깊어지는 양상이다. 교회는 교리적 이유로 정통과 이단을 비교적 명료하게 분류하지만, 사회는 아직도 이단 시비를 ‘교회 안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 평가하는 경향성이 여전히 짙다. “나는 신이다”의 후폭풍이 불고 있다. 긍정적인 면은, 넷플릭스 방영 이후, 사이비 종교에 대한 경각심과 관심이 높아졌고, 정부의 법적 대응도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나타나고 있다. 즉 사회적으로 개신교에 대한 오해와 외면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인제공자이자 가해자인 이단이 문제인데, 엉뚱하게도 교회가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거의 모든 이단들이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일반인들이 이름만으로 교회와 이단을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특히 문화행사나 사회봉사 등으로 ‘위장’하고, 자신들의 소속이나 교리에 대해서는 ‘거짓말’로 일관하는 이단들을 비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조차 분별하기 쉽지 않다. 한국교회는 “나는 신이다”로 인해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직면하고 있다. 이단의 위험성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공감과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만약 교회가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노출한다면, 교회나 이단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너나 잘하세요!’라는 냉소적 비난을 받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교회의 자정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순전하고 정결한 교회가 이단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단의 범죄는 엄벌하고, 동일한 교회의 잘못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면, 이는 불공평하다. 정통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비상식적·반사회적 범죄는 엄격한 잣대로 가중 처벌해야 한다. “나는 신이다”를 통해 그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이비 신’들에게 효과적으로 응전하기 위해서, 교회의 정결함은 필수요건이다. 한편 이단대처의 중심축이 되어야 할 기독교연합기관들이 난립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사리사욕이나 자리다툼이 아닌,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적 이단대처 활동이 필요하다. 또한 전국 단위의 이벤트성, 언론 홍보성, 이단대처 퍼포먼스보다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실제적이고 실효성 있는 이단예방과 대처 활동이 필요하다. 아베신조 전 총리 피격살해 사건 이후 일본 정부 차원에서 운영 중인 ‘피해자신고센터’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단 피해를 지원하기 위한 ‘원스톱 이단피해 지원 및 신고센터’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 신중히 고려해야 할 때가 되었다. 사이비종교 피해자가 신고를 해 오면,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거나, 형사적, 법률적, 심리적, 신앙적 지원을 필요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 이단사이비 문제는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한국사회를 뒤흔든 사건들 중에서, 사이비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사건을 찾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단사이비에 대처하는 교회의 노력은, 이제 우리나라를 지키는 일이 되었다. ‘사이비 신들의 세상’을 와해시킬 수 있는, 교회의 강력한 한 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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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0
  • [김정환 사무총장] 하나님 주신 세상, 그 안에서 안전한 살 우리의 권리
    2015년 부산 시민은 힘을 합하여 30년 수명 후 10년을 더 사용한 뒤 다시 10년의 수명을 더 연장하여 사용하려고 했던 고리1호기를 마침내 폐로하였습니다. 수명이 다한 원전은 폐로가 답임을 믿고 있었던 약속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정권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시 바뀌었고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은 40년의 수명을 다한 고리 2호기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리원전 부지 내 건식저장시설을 확정했으며 이는 부산을 영구적인 핵폐기장으로 만들 수 있는 발전소 부지 내 건식 임시저장시설이 추진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울·경 지역은 세계 제1의 원전 밀집도뿐 아니라 노후원전 및 영구적인 핵폐기장까지 떠안게 되는 상황에 처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후쿠시만 방사능오염수를 해양으로 흘려보내려고 합니다. 그 어느 것도 시민들에게 정확히 공개하고 있지 않으며 대상 지역의 주민들에게만 거듭된 희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리에서 반경 20km 이내에 해운대가 있고 30km이내에 서면이 있습니다. 방사선 비상계획구역 내에 부산·울산·경남 시민 380만명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대 사고가 발생할 경우에 적용될 동시 대비 계획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수원은 고리2호기 수명연장을 위해 방사선환경영향평가 공람과 공청회를 지역을 돌면서 진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한수원의 모습은 많은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였고 공청회 과정에서 보여야 할 시민과의 소통과 교감은 갈등과 대결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고리2호기에 이어 후속으로 3호기, 4호기 등 원전이 계속 설계 수명이 만료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일원으로 부산 시민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하며 꼼꼼히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그리고 크고 작은 원전 사고는 엄청난 인명과 재산, 자연을 순식간에 훼손시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명확한 근거와 자료를 제시하지 않고 연장 해도 문제없고 안전하다고만 하는 한수원의 말을 우리는 신뢰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를 위해서, 또 앞으로 살아갈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 우리는 용기를 내어 참여하고 말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지 12년이 되었지만 그 피해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 어떤 정치적 견해도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미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이미 발생했고 진행 중인 경험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생명의 안전을 위해 안전이 도시 부산을 위해 고리2호기 수명연장과 영구화될 고준위 핵폐기장 계획은 함께 힘을 모아 반드시 막아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생명을 더 이상 망가뜨리는 우리가 아니라 생명이 숨쉬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가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권리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함께 참여하고 행동해 주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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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6
  • [김기현 목사]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동아시아 사람에게는 익숙한 선문답 같다. 깊이 들여다보면 아둔한 사람이 ‘퍽’ ‘확’ ‘쾅’ 깨치는 천둥 같은 가르침이지만, 설렁설렁 보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 같달까. 종잡기 어렵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골이 깊다. 어리석은 제자들과 지혜로운 예수 사이의 대화는 어리숙한 신자를 진리에 이르게 하는 좋은 교육이다. 우리 주님 말씀, 참, 맥락 없다, 제자들에게. 기껏 드실 양식 구하느라 온 동네 돌아다니며 탁발을 했건만, 스승이 한술 떠야 제자도 먹는데, 얌체처럼 혼자 드셨다는 건가, 뭔가. 드실 것이 있으면 나눠 먹어야지. 제자 수준에서는 알아먹지 못할 말씀만 하는 예수님이 멀면서도 오묘해 보인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론으로 풀면 되지 싶다. 인간이란 무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동물과 천사의 두 얼굴을 지녔다. 동물이란 본능, 욕망, 야수적 폭력과 악을 말하고, 천사는 동물적 제약을 뛰어넘은 인간, 곧 철학에서 말하는 성찰적 인간일 테고, 신학에서는 초월적 관점으로 자기를 바라보기, 이다.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와 타인을 보기, 그리고 사랑하기. 그러니까 여기서 양식은 제자들에게 동물적 차원, 예수에게는 천사적 맥락인 게다. 분명히 말하지만, 피곤해서 우물가 기대고 누운 예수에게 주린 배를 채울 양식이 필요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영지주의가 되고 만다. 몸이 없는 영은 없다. 영이 육이 되었고, 변화된 몸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풀 스토리에서 보면, 영과 육은 하나다. 말씀 없이 살 수 없고, 밥 없이도 못 산다. 인간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은 아닌 것을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인데, 인간은 신(神)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이유를 소크라테스와 톨스토이는 ‘생각’에서 찾는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것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은 기계적, 산수적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행위를 되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이다. 본능적, 기계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단어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가른다. 바로 ‘의미’이다. ‘가치’라고 해도 된다. 먹기만 하고, 배만 부르면 끝인 것이 동물과 인간의 공통점이지만, 아니, 인간은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먹는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추구한다. 그것이 없으면 동물이 되고 만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동물이 자살하는 사례가 극히 드물게 있다는 부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는데, 하여간에 인간만 자살을 한다. 하긴, 대량 학살을 하는 것도 인간이지. 그것은 공허해서 그렇다. 살 이유와 의미를 모르면 죽음을 선택한다. 더 나아가 살 이유와 의미를 찾으면 그걸 위해 죽기도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전에 도를 듣고 깨치기만 한다면, 저녁에 죽을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하신 말씀은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장삼이사의 희로애락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겠으며, 오병이어 표적을 일으킬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 없이는, 그러니까 육체적 주림을 해결해야 영적인 것도 찾는다. 아니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동시적이라고 해도 되고. 우리 사회의 한켠에는 여전히 먹을 것의 문제로 고달픈 이들이 많다. 다른 한쪽에는 의미의 부재로 인한 영적 공허와 허기로 방황하고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 이들이 많다. 앞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마가복음의 이적 또는 요한복음의 표적이 필요하다. 뒤의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필요하다. 그걸 먹지 못하니까, 진짜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니까 별 짓 다 하는 거다. C. S. 루이스가 생각나는구나. 그는 일평생 ‘기쁨’(Joy)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뒤에는 어땠을까? 「예기치 못한 기쁨」에서 대략 이렇게 말한다. 예수가 기쁨이었다. 그 기쁨의 근원과 실체를 만난 다음에는 기쁨에 대한 갈망이 사라졌다. 그게 인간이다. 의미, 가치를 발견하면 산다. 나는 예수가 좋다. 배가 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맘이 고픈 자에게 의미가 되어 주는 예수가 좋다오. 오늘도 나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열심히 글을 짓고, 가족들의 먹을 것을 위해, 교우들의 영적 양식을 위해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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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10
  • [김성철목사] 가상공간(VR)이 만들 1평의 기적 시대를 준비하자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 많은 부분이 이전 일상으로 회복되고 있다. 변화된 것은 코로나시기에 경험했던 재택근무나 온라인 대면 문화인 온택트(ontact) 문화가 새로운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2022년 2학기 컴퓨터 강의를 진행하면서 현장과 온택트 이원 체계로 강의를 진행하였다. 현장에 온 학생들은 직접 노트북을 가지고 예전처럼 컴퓨터를 배웠다. 반면 온택트에 참여한 학생들은 집에 있는 컴퓨터 앞에서 현장과 연결된 화상을 통해 강의를 듣고 공유된 화면을 보면서 컴퓨터를 배웠다. 현장과 온택트 구분 없이 질문하고 소통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온택트 문화는 거리라는 공간적 난관을 극복하고 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데 아주 유용하다. 실습을 요하는 컴퓨터 강의에 큰 어려움이 없다면 성경공부나 기도회 등의 교회 모임도 더 쉽게 이원 체계를 통한 서비스가 가능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거리 때문에 참석이 어려운 성도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현장과 온택트 서비스를 함께 진행하는 것도 고려하면 좋겠다. 머지않아 새로운 일상으로 우리 곁에 다가올 또 하나의 문화가 VR 문화이다. VR은 가상현실을 뜻하는 Virtual Reality의 약자이다. VR은 이전에도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 VR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머지않아 또 하나의 일상문화가 될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 2021년 11월에 다시 만난 VR문화는 우리 부부의 일상에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VR문화는 우리 부부에게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운동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에는 서로 다른 가상공간에서 각자가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나는 VR탁구장에서 탁구경기를 즐기고 아내는 가상 공간에 펼쳐진 큰 체육관에서 강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다양한 운동을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탁구라는 스포츠를 좋아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취미를 실천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1시간 운동을 위하여 준비하고 이동하고 샤워하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은 바쁜 일상 속에서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VR은 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었다. 가로 세로 1평의 공간만 있다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VR만 착용하면 1평의 공간은 가상공간 안에 완벽한 탁구장을 제공한다. 그곳에는 언제나 함께 운동할 전 세계의 탁구인들이 모여 있다. 실제 탁구장에서 운동하는 것과 90% 이상의 만족감을 느낀다.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주변 목회자들에게 이야기해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얼마 전 자주 만나는 분들과 내가 사용하는 VR기기로 체험의 시간을 가졌다. 한 목회자는 가상현실에 펼쳐진 탁구대가 실제 있는 줄 알고 손을 짚었다가 앞으로 넘어지는 일이 생길 정도로 실제처럼 보인다. 앞으로 공간을 찾아서 움직이는 일은 급격하게 줄어 들것이다. 사이버 공간이 제공하는 1평의 기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1평의 공간만 있으면 프라이빗 영화관이 되기도 하고, 체육관이 되기도 한다. 멋진 풍경과 함께하는 회의장과 업무공간을 열 수 있다. VR문화는 이동하지 않고 필요한 공간에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든다. VR문화가 일반화되면 지금까지의 교회의 활동에 더하여 평일에도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실질적인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가능하도록 그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 평일에 이동에 필요한 시간과 재정을 절약하고 가상공간에서 성경공부를 하거나 취미가 같은 성도들이 평일 교제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다. 청년 모임 중 하나로 사이버 공간에 함께 모여 같은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한 나눔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특히 미래세대를 고민하는 교역자들은 앞서 그들의 일상이 될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준비하여 그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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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안동철 목사] 천안 예수상 건립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대강절 기간 중인 12월 5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한국기독교기념관 홍보관 및 예수 조형물 착공 감사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모 인사는 “케이팝에 열광하는 전 세계인들이 한국에 왔다가 기독교기념관을 방문한 뒤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일에 작은 도구가 되길 바란다.”는 계획을 밝혔다. 보도에 의하면 한국기독교기념관은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일대 65,000여 평 부지에 총 사업비 1조 800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짓는다고 한다. 이는 국내 최대 규모의 기독교 테마파크로 기념관 내에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예수상보다 훨씬 더 큰 예수상을 세운다고 한다. 브라질에 있는 예수상은 정식 명칭이 ‘구세주 그리스도상’인데, 높이 710m의 코르코바두 산 정상에 높이 30m, 양팔의 길이 28m, 무게 635t 규모를 자랑한다.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을 상징하고, 에펠탑이 프랑스 파리를 상징하듯이 이 예수상은 리우데자네이루를 넘어 브라질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했는지 천안에 만들 예수상의 규모가 엄청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보다 3배나 더 큰 92m 예수상을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이날 참석한 교계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는 왜 이 프로젝트가 필요한지를 말했지만 아무리 좋게 봐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이 프로젝트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금지하는 일이다.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은 분명히 말씀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상). 물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쪽에서는 이 예수상은 우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는 이런 생각에 반하는 길을 걸어왔다. 항상 거대한 형상은 우상숭배로 연결되었다. 그랬기에 종교개혁자들은 과도할 만큼 교회당 안에 모든 성상을 없앴고, 십자가까지 우상화될 수 있어서 교회당에 설치하기를 꺼려했다. 둘째, 규모의 논리는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 지금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쪽에는 92m나 되는 예수상을 보러 온 사람들이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이 거대한 예수상 앞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이들의 주장대로 케이팝에 열광한 사람들이 거대한 예수상으로 인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반복음적이다. 기독교 복음은 거대한 예수상이 아닌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지향한다. 세상의 종교들처럼 거대한 교주의 무덤이 아닌 빈무덤을 자랑한다. 기독교는 규모의 논리를 거부한다. 셋째, 상업적 생각이 가득한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어야 한다.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총 공사비가 1조 800억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 엄청난 재정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가? 아마도 이 정도 천문학적 금액이면 교회의 헌금으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사업자가 붙을 것이고, 여러 사업에 따른 각종 이윤을 추구하는 이런저런 방식이 개입되지 않겠는가? 이미 이런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말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예수 사업’을 하겠다는 것인데 교회가 이런 일에 함께 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이유로 이 사업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엄청난 돈을 들여 거대한 건물을 짓는 것보다 교회의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이다. 또한 세속화되고, 반기독교적 정서가 강한 우리 사회의 물줄기를 바꾸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낮아져서 인간이 되신 ‘성육신 정신’이 필요하다. 이런 거대한 예수상을 짓는데 시간과 막대한 돈을 쓸 여유가 없다. 천안의 거대한 예수상 건립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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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3-01-05
  • [전영헌 목사] 십대들이 사라진 교회
    6 주전 진주 공군 사령부 교회에 집회차 다녀왔었다. 오랜만에 만난 군목 목사님과 예배 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목사님, 부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최근 군인들 통계를 보고 놀랬습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종교분포 조사를 하면 10명 중 7명 정도는 친구 따라 갔든, 행사 때문에 갔든, 뭘 먹으러 갔든, 여러 이유들을 통해서 교회를 가봤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10명 중에 7명은 교회를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5년 전에 10명 중 7명은 어릴 적 교회를 가봤던 기억으로 언젠가는 교회를 찾을 가능성이라도 있는 반면에, 최근 통계에 해당하는 10명 중 그 7명은 어쩌면 평생을 교회에 다니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현재 지역교회 상황들이 군부대의 이야기와 일치하는 듯 하다. 교회에 십대들이 사라졌다. 교회에서 사라진 십대들, 교회를 경험해보지 못한 십대들은 결국 교회와 상관이 없는,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안티기독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교회들은 모두가 동일한 이야기를 한다. “교회에 아이들이 없어요” 아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있다. 다만 교회에만 없을 뿐이다. 그 십대들이 지금도 학교에는 있다. 우리 브니엘에도 교회에서는 사라진 십대들이 수백명이 있다. 교회에서는 예배가 안되는 아이들이 감사하게도 학교 안에서는 예배가 되고 있다. 우리 학교에서 일상적인 채플은 학교에서 진행을 하지만 절기예배와 학교 부흥회는 지역교회의 도움을 얻어서 교회에 데리고 가서 예배를 드리곤 한다. 이유는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1년에 적어도 4-5번의 시간을 통해 교회라는 곳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 훗날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나 학교 다닐 때 교회 가봤어”라고 말할 수 있는 동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교회를 경험한 세대가 훗날 교회가 이상한 곳이 아니라, 기독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변하는 자들로 살아가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역교회는 학교에 관심이 없다. 아이들은 학교에 있는데 학교에 관심이 없다. 슬로건으로는 “다음세대”, “십대선교”를 외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현수막과 구호일 뿐 십대들을 위한 관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의 아이들을 괴물로 생각하는 듯 하다. 교회에서 사라진 십대들을 위해서 선교회 이름만, 교회표어 속에서만 존재하는 십대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지역학교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전략들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인근 미션스쿨들과 함께 걸어갈 수 있는 방편들을 찾아보길 바란다. 교회에 없는 십대들이 학교에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지역교회가 할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2-12-20
  • [송길원 목사] 임종실, 임종돌봄이 필요하다
    조르주와 안느, 음악가 출신의 80대 부부다.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아내 안느에게 갑작스런 뇌경색이 덮친다. 다정한 노부부의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수술후유증으로 오른쪽 편마비가 찾아든다. 스스로 배변을 해결할 수 없다. 몸을 씻을 수도 없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삼키기가 어렵다. 서서히 말라간다. 말조차 어렵다. 딸과 사위는 입원을 시키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아내의 뜻은 아니다. 남편 조르주는 병원에 보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게 해달라는 아내와 실랑이를 벌이다 자신도 모르게 아내의 뺨을 후려갈긴다. 상황은 처절하다. 결국 아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조르주는 죽은 아내를 꽃으로 장식하고, 방문을 테이프로 봉인한다. 장문의 편지를 남겨놓고 사라진다. 딸이 아빠⸱엄마를 찾았을 때 잠긴 문 뒤로 엄마의 시신은 꽃에 둘러싸인 채 썩고 있었다. 2012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의 줄거리다. 영화는 끊임없이 묻는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나라면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네 삶은 ‘맞이하고 싶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죽음을 맞이한다. 연간 사망자 30만 명 가운데 80% 이상이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ㆍ중환자실을 오가다 그 쳇바퀴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는다. 4명 중 3명꼴이다. 정든 집에서 가족들의 손을 잡고 떠나는 죽음은 전설이 되었다. 66~83세까지 17년, 삶의 5분의 1을 각종 질병에 시달린다. 사망 직전 1년의 의료비가 평생 쓴 의료비를 웃돌기도 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렁주렁 기계장치를 달게 된다. 사지가 포승줄에 결박당하듯 묶이기도 한다. 콧줄로 영양 공급을 받으며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간다. 우리나라 ‘최빈도 죽음’의 풍경이다.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사전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은 130만 명이다. 3년 새 6배로 늘었다. 하지만 전 국민의 3%에 불과하다. 통증을 줄여주는 완화의료센터를 이용하기도 어렵다. 매년 8만 명이 암으로 숨진다. 호스피스 병상은 1,500개도 되지 않는다. 암 환자의 호스피스 이용률은 23%에 그쳤다. 의료강국의 이면은 의외로 어둡다. 반지하 방만이 아니다. 잠시 병원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병원에는 응급실에서 입원실, 수술실, 회복실, 재활치료실... 숱한 방들로 가득 차 있다. 장례식장으로 내려가 보자. 안내실, 추모실, 접객실, 휴게실, 안치실.... 그런데 정작 있어야 방이 보이지를 않는다. ‘임종실’, 의료진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의료행위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가족과 함께 임종을 그들을 임종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머물며 죽음을 맞이하게 도울 수는 없을까? 현재 우리나라는 빅 파이브에 해당하는 대학병원들조차 한둘 정도의 임종실을 두고 있을 뿐이다. 종합병원은 아예 없다. 우선 돈이 안 된다.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감염과 방역 규칙에 따른 운영지침도 없다. 제도와 법령준비도 필요하다. 결국 ‘편안한 죽음’을 원하지만 기대와 달리 대부분이 ‘고독사’로 세상을 뜬다. 곁에 가족은 없다. 의료진이 임종을 지켜보는 경우는 희귀하다. 신음소리를 내는 또 다른 환자 옆에서 가족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하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곁에 가족이 있다 해도 소리 내 울지도 못한다.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르의 영화 이야기가 프랑스만의 이야기일까?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도 조력 존엄사법이 제출되었다. 말이 존엄사지 속을 들여다보면 조력 존엄사는 의사조력 ‘자살을 통한 안락사’이다. 이런 법안이 법안 통과를 원하는 사람들이 80%가 넘는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근거로 한다. 어쩌다 죽음마저도 여론조사를 따라야 하는 세상이 된 것일까? 임종실이 있으면 달라진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환자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줄 수 있고 함께 부를 수도 있다. 못다 한 사랑고백을 나눌 수 있다. 멋진 엔딩파티를 준비할 수도 있다. 이때 세족식을 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고인이 남기는 말이 유훈이 되고 고인에게 건네는 사랑의 말이 위로가 되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장면이 떠오른다. 존 H. 밀러 대위는 라이언에게 말한다. “라이언 꼭 살아서 돌아가. 잘 살아야 돼”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밀러 대위의 무덤을 찾은 라이언이 말한다. “가족과 같이 왔습니다. 오고 싶어 해서요. 여기 오면 기분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다리에서 하신 말씀을 매일 생각했죠. 최대한 잘 살려고 노력했고 그런대로 잘 살아왔습니다. 최소한 대위님의 눈에 대위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보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한다. “여보, 훌륭히 살았다고 말해줘” 아내가 답한다. “물론이죠” 다시 라이언이 말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해줘” “당신은 훌륭해요” 나는 많은 돌봄 가운데 ‘임종 돌봄’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 여긴다. 기독병원들이 먼저 나설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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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11-25
  • [탁지일 교수] ‘하이브리드 이단’과 ‘K 이단’의 시대
    코로나 팬데믹은 국내외 이단 문제의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면 포교가 일반적이었지만, 코로나 발생 이후에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이단들의 미혹이 본격화되었고, 최근에는 전통적인 대면 포교와 온라인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형태로 진화되고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미혹의 시대, 즉 ‘하이브리드 이단’의 세상이 열렸다. 그리고 하이브리드 이단은 한류의 날개를 단 ‘K 이단’의 모습으로 진화하며 세계 곳곳으로 침투하고 있다. 교회의 이단 대처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전통적인 이단 예방교육과 함께, 온라인 대응도 시급하다. 이단들의 고퀄리티, 즉 고화질과 고음질의 동영상이 유튜브를 뒤덮고 있고, 심지어 콘텐츠 구성과 완성도까지 높아 청소년과 청년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게다가 정체를 감추고 위장해 접근하기 때문에 피해는 점점 확산하는 추세이다. 신천지는 전통적인 모략 포교를 진행하는 한편, 온라인으로 포교, 교리 교육, 신도 통제를 병행하고 있다. 거짓말의 끈을 놓지 않는 동시에, 노골적인 커밍아웃을 통해, 오히려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언론매체에서는 '신천지자원봉사단’을 ‘SCJ 자원봉사단’이라고 눈가림하고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나저나 한때는 신천지 비판에 열을 올리며 실리를 챙기던 주요 언론들이, 이제는 신천지 선전을 통해 다시 돈벌이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후안무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근 하나님의교회도 전통적인 거리 포교와 함께 온라인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요즘 ‘어머니 하나님’을 선전하는 30~40대 여성 신도들이 곳곳을 누비고 있다. 거리청소는 물론이고 자연재해 지역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활발한 구제 활동을 벌이며, ‘선한 이웃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다. 하나님의교회는 온라인 홍보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고 있다. 세계 거의 모든 언어로 된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한편, 실시간 업데이트를 통해 곳곳에 세련된 미혹의 덫을 설치하면서 가장 파급력 높은 K 이단으로 등장했다. 박옥수 구원파 경우도 국내외 활동이 활발하다. 그동안 중단되었던 월드캠프를 올해부터 다시 대면으로 진행했고, 마인드교육을 내세워 국내외 공교육 현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해외 교육 관련 정부 기관들과 활발한 MOU 체결을 맺고 있다. IYF의 경우, 국내 캠퍼스 활동으로부터 해외 자원봉사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K 이단으로 국내외에서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온라인 홍보를 통한 포교 활동이 대면 만남과 집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이브리드 홍보와 포교도 나름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단들은 시대적 트렌드에 민감하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신속하게 벤치마킹하고 스스로에 맞게 업그레이드한다. 문화적 키워드를 선점한 후, 정보기술력을 앞세워 포교 대상자를 공략한다. 교회의 선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후약방문식의 수동적 대처로는 이단 피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걸음 앞선 응전이 필요하다. 복음의 전래와 정착 시기에, 교회는 가장 선진적인 문화 도입과 선도적인 정보 제공으로 사회적 순기능을 감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의 정보기술은 물론이고 이단들의 콘텐츠조차 따라가기 벅찬 시대가 되었다. 심지어, 사회를 걱정하던 교회가, 역으로 사회의 염려를 한 몸에 받는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경제력, 정보력, 기술력을 앞세운 하이브리드 이단의 시대, 한류를 이용해 세계화를 시도하는 K 이단의 시대, 교회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오히려 ‘복음의 순전함’ 즉 ‘신앙적 기본과 상식’으로 돌아가는 역발상적 접근이 필요하다. 세상의 방법으로 이단과 경쟁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긍심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복음의 순전함을 소유하고, 복음의 능력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온 시대를 초월한 교회의 생존전략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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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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