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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호목사] 하나님나라의 풍경 안으로 빈번히 드나들자
    하나님은 한없이 아름다우신 분이다.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설계되었고 그분의 말씀의 선포로 나타난 것이다.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빛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다. 당신이 한없이 아름다우신 것처럼 당신의 자녀들도 한없이 아름답게 회복시키시기를 기뻐하신다. 1. 그 풍경을 경험하면 영혼의 정원이 달라진다. 하나님 나라는 성경전체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중심주제이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당신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응답으로 당신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하신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목도하는 즉시 내 영혼의 정원이 얼마나 초라한지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은 놀라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혼의 정원을 제대로 가꾸기 위해 말할 수 없는 열정이 솟는다. 2. 말씀 안으로 망명하지 말고 말씀을 통과하여 걸어가자. 하나님이 우리 손에 들려주신 성경은 우리의 망명지가 아니다. 말씀이 우리의 망명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에 감동으로 기록된 한 책, 지상에 존재하는 영원한 언어로 직조된 그 책, 곧 그분의 숨결이 배인 그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그곳이 우리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곳을 우리의 망명지로 제공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말씀은 우리에게 삶의 기준과 원리를 제공해 주시는 그분 자신이다. 그 책에 숨지 말고, 그 책을 통과하여 세상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말씀의 은혜가 뚝뚝 떨어지는 그 몸을 그대로 이끌고 세상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야 한다. 3. 신앙의 정점에 아름다운 향내가 진동하게 하라. 다윗의 신앙의 목표는 아름다우신 하나님에게 참여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우신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을 덧입는 것이었다. 지성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정서(그분을 향한 감정)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말과 행동, 태도가 한없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감동을 넘어 충격을 주는 아름다운 모습이 선함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앙의 정점에서 경험하는 일상이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영화로워지시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4. 새로운 교회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교회시대에 교회가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던 모든 순간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사랑과 공의)이 나타났을 때이다. 교회가 정치적 힘, 물질의 힘, 세속적인 어떤 능력으로는 절대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없다. 중세 카톨릭이 황제 위에 군림하고 세속 왕에게 대관식을 하는 파워로 군림했지만 중세의 풍경이 결코 아름답지 못했었다. 그 이유는 그 시대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종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창조주의 말씀이 역사하는 교회의 신비를 올바로 경험한 새로운 지도자들이다. 이들이 등장하게 되면 이제 새로운 시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겸비한 교회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 가정호 (세대로교회 목사, 부산기윤실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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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30
  • [최윤 목사] 맹목주의적 신앙이 교회를 죽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지혜롭지 못한 것인지, 또 어찌 보면 의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매한 것인지 모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정치 현장이나 국회 그리고 각종 집회에서 보더라도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문제해결과 협의과정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이 오직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큰 목소리에 따라 몰려다니는 맹목적 패거리주의들만 난무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가 그지없는데 역시나 시선을 교회로 돌리면 그 곳의 상황도 자못 심각하다. 목회자들은 동문과 교단에 발목 채워진 채 시정잡배(市井雜輩)같은 의리와 패거리주의로 인해 개혁자들의 모토인 5Sola는 색이 바래진지 제법된 것 같고 성도들은 목회자를 맹신하고 잘못 가르치고 전하는 바를 맹목하여 따름으로 한국교회의 수준을 후퇴시켜 놓았다는 세간의 비판에 절망스럽게 직면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이성과 논리를 이용하여 증명해 내거나 설명할 수 없는 체험적인 요소와 신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 보통 교회용어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지칭하는 개인적 회심을 경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의 실존을 체험하기도 한다(비기독교인이 그런 체험을 심리적인 착각이나 합리화라고 비난하더라도 어차피 개인의 체험의 영역이니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샤머니즘적 기복신앙과 다른 점은 그런 사사로운 체험이나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바램과 기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신의 음성, 즉 ‘계시’(Revelation)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지금도 신앙인들에게 임하고 있고, 그 계시를 통한 교제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도 신의 계시인 성경의 교리적, 신학적 해석의 범주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한다. 체험의 영역으로만 기준을 세우면 ‘정통과 이단’은 구분할 길이 모호해진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모습과 계시를 중시하는 이성적인 기독교의 원리 가운데 뭔가 어울리지 않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주변에 신앙이 독실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계시 의존적’이라기보다 ‘체험 의존적(Empiricism)’이며, 합리적이라기보다 ‘맹목적(Blindness)’이고, 지성적이라기보다 ‘반지성주의적(Anti-intellectualism)’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원래 계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면 계시를 분별하는 합리적인 이성을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성경구절을 외우는 것은 잘하지만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 되거나 난해한 구절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면 대부분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그건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 일단 믿어봐. 믿으면 다 이해가 가!” 게다가 성경에 대해 그리 해박하게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거나, 중요한 구절들을 주제별로 암송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요즘 젊은 기독교인들은 사실 이 정도의 성경암송조차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추앙받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순종’이다. 그것도 지성이 차단된 순종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 관한 것이든, 교리와 신학에 관한 것이든, 교회의 문화와 제도에 관한 것이든 어떤 질문도 용납되지 않는 문화가 있다. 조금이라도 꼬치꼬치 캐묻거나 따져 물으면 바로 불온한 신앙을 갖고 있는 신자로 찍히거나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곤 한다. 아니면 교회를 흔드는 불순한 사람으로 찍혀서 요주의인물이 되고 만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소통과 교제를 믿고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사도신경’을 매 주마다 외우는 교회가 가장 소통하기 어려운 ‘불통’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가나안 교인(교회를 안 나가거나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며 방황하는 교인)들과 정통을 떠나 이단에 늪에 빠져드는 교인이 점점 많아지는 현상의 이면에는 이런 뿌리 깊은 교회의 반지성주의 문화가 한 원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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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9
  • [원대연목사] 경남학생인권조례(안)는 마땅히 폐기되어야한다
    지난 5월14일 경상남도 도의회 교육위원회는 6대3으로 경남학생인권조례를 부결시켰지만, 박종훈 교육감과 찬성측은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언론 등을 통해 왜곡 선동하고 있음을 보며 개탄을 금치 못한다. 왜 경남학생인권조례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하는가? (1)계급투쟁적 헌법 제10조의 내용은 이렇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처럼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이란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이며, 인간이 태어나면서 본래 가지고 있는 누구나 보장되는 ‘보편적 인권’이지만, 경남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인권은 계급투쟁적 인권관에 뿌리를 둔다. 학생들에게 교사를 지배계급으로, 학생은 억압받는 피지배층으로 교육하여 대결구도를 만들고 있다. (2)특정이념적 교육기본법 제6조는 ‘학교 교육이 정치적, 파당적,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미 조례를 제정한 서울시 교육감 등은 전교조의 사상적 배경을 둔 진보 교육감들이요 공통된 인권 개념을 갖고 있다. 다시말해, 이들의 인권은 특정 사상을 가진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파당적 성격이 농후한 것으로, 학생들에게 특정이념을 주입하려는 의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교육의 중립성을 해친다. (3)초법적 경남학생인권조례 제42조(학생인권침해사건의 조사)에는 ‘학생인권옹호관은 구제신청이 있는 경우에는 인권침해를 받았다고 주장되는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사건에 대하여 조사한다. 다만, 사안이 중대하거나 향후 유사한 사건의 예방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등 조사를 하여야 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 학생인권옹호관은 피해당사자의 동의없이 조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학생인권옹호관이 교사 등을 직접 조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징계를 요청하는 권한을 가진 것은 국가사무와 관련된 것으로, 조례안의 제정 범위를 넘어선 초법적인 것이다. (4)반성경적 가장 큰 문제는 제16조(차별의 금지)와 제17조(성인지교육의 실시)이다. 성관계 경험이 있는 학생에 대한 차별의 금지, 성정체성, 성적지향의 자유와 보장을 명시하고, 청소년에게 임신과 출산이 한 인격체로서 주어진 성적자기결정권이기에 차별받을 수 없다고 하며, ‘성인지 교육’(젠더 교육)을 학교는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항은 동성애를 확산시키는 위험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조례안의 성평등은 우리나라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전제된 남녀 양성평등교육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원대연목사, 마산교회, 나쁜경남학생인권조례제정반대 경남도민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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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26
  • [한석문목사] 예수처럼
    원주의 예수라 불리는 무위당 장일순의 일화집인 ‘좁쌀 한 알’에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시골 아낙이 찾아와 딸 혼수 비용으로 모아 둔 돈을 소매치기 당했다며, 그 돈을 찾아 달라고 매달렸다. 선생은 아낙을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갔다. 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 놓고 노점상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러기를 사나흘 하자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들을 죄다 알 수 있었고, 마침내는 시골 아낙의 돈을 훔친 작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선생은 소매치기를 달래서 남아 있는 돈을 받아 냈다. 거기에 자기 돈을 합쳐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뒤로도 선생은 가끔 원주역에 갔는데, 그것은 소매치기에게 밥과 술을 사 주려는 것이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이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잔 받으시고 용서하시라고.” 앞으로 소매치기 같은 짓 하지 말라든가, 나무라는 말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선생에게는 그들 행동의 옳고 그름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더 컸던 것 같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사람들 앞에 끌려나와 부끄러움 가운데 내동댕이쳐졌던 한 여인이 생각난다. 그때 예수는 돌을 들고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인을 향해 이해와 연민을 가진 한 분이셨다. 예수는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묻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인을 안심시키고,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짓지 마라”며 여인을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힐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 역시 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삶을 살고 가신 분이다. 지난 달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프랑스군 특수부대가 무장조직과의 교전 끝에 인질 4명을 구출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출해 놓고 보니 인질 네 명 중에 한 명이 한국인이었다. 안타깝게도 인질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특수부대원 2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로 인해 네 명의 인질은 세간의 비난을 피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이번에 그들이 여행한 지역은 한국 외교부에서 정한 2단계 여행자제국가여서 한국인 여성에게는 더더욱 비난이 쏟아졌다. 발표 직후 온라인상에서는 긴급구조상황인 이 여인의 항공료 등에 대한 정부지원여부에 대해 일대논란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는 가족들이 항공료를 보내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지만, 여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반응이야 응당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겠다. 가치판단으로 사람을 재단하기 이전에,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심정을 헤아려 주는 여백이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수의 마음이 아닐까?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한잔 받고 용서하라고.” 예수의 마음이 아니면 절대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한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섬세해질 수 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 세상은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한석문 목사 | 해운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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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6-10
  • [노상규 목사] 첫 날부터 일꾼이다
    ▲ 노상규 목사(상내백교회 담임) 흔히 교회에는 방해꾼, 구경꾼, 일꾼이 있다고 한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방해꾼,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일꾼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고, 일꾼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많은 교회에서 “일꾼을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9:37-38)고 하신 말씀을 염두 해 두고 하는 기도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교회에 일꾼을 보내 주신다. 그런데 정작 기도의 응답으로 온 일꾼을 알아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교회의 일꾼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새로운 가족이 오랜 기간 잘 훈련을 받고,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분들이 많다. 일반적인 시간에서 보면 그 생각이 맞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필자는 새로운 가족이 교회에 출석을 한 첫 날부터 그는 그 교회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에 유익을 주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자가 오면 그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가장 힘을 얻는다. 그리고 새가족사역팀원들이 신이 난다. 또한 건강한 교회라면 온 성도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힘을 얻는다. 정작 새가족 자신은 모르지만 담임목사, 새가족사역팀, 온 성도들이 하나님이 그 교회공동체와 함께하시는 증거임을 보며 힘을 얻고 기뻐하는 것이다. 교회에 큰 유익과 힘을 주는 그가 일꾼이 아니라면 누가 일꾼인가? 새가족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가족에게도 그의 신앙생활이 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과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의 선한 부담감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자신과 가정, 교회공동체와 민족공동체, 열방을 섬길 수 있는 진정한 일꾼으로 세워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꾼을 보내어 주옵소서!”라고 말할 때, 이사나 결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전입해오는 헌신된 일꾼을 보내어 달라는 소망도 담겨 있는 것이다. 기존성도는 절대로 받지 않는다는 일부 교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일꾼의 부족을 피부로 느끼며 훈련된 일꾼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꾼이 왔을 때 그 일꾼이 정착을 하고 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배려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단에 대한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교회들은 새로운 일꾼이 오면 혹시 저 사람 이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고, 대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 새로 온 일꾼들도 그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단에 대한 염려는 담임목회자와 당회에 맡기고, 보내어 준 일꾼을 환영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일꾼이 왔을 때 담임목회자와 당회는 빠른 시간 안에 심방과 심도 있는 상담을 통해 그의 달란트와 그동안의 섬김을 파악하여 교회의 가장 적절한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기존의 성도들도 새로운 일꾼이 일할 수 있도록 과감히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다른 영역에서 섬기는 배려도 필요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직분에 대한 집착을 가진 분들은 새로운 일꾼이 오면 자신의 경쟁자로 보고 은근히 밀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까지 지방색, 정치색이 자리를 잡아서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 즉시 부정적으로 대하거나 여론을 형성하여 밀어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새가족이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전입을 온 훈련된 일꾼이든 그는 첫 날부터 주님이 보내주신 그 교회의 소중한 일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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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7
  • [최병학 목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86세대의 마지막 사명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일찍이 독일의 시인 B. 브레히트는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비극은 86세대의 비극입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세대’인 86세대(30대였던 1990년대까지는 386세대라고 불렸고, 이후 40대로 접어들어서는 486세대라고도 했지만, 2018년 이후 언론에서는 그냥 86세대라 표현)는 밖으로는 파시즘과 싸우면서 안으로는 파시즘을 키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회자되는 ‘꼰대론’의 발생사적 근원입니다. 한때 정의를 외치며 자신을 희생했던 세대의 정치적 실패는 사회 전반에 더 큰 실망감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를 퍼뜨립니다. 그리고 중앙대 독문과 김누리 교수에 의하면 “지금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의 뿌리는 바로 86세대의 실망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86세대가 꼰대 짓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틀을 잡을 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합니다. 재벌개혁, 정치개혁, 교육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감행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86세대는 폭압적인 군사독재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고, 민주적인 국가, 정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꿨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사명감이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현재 민주개혁정부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냉철해져 볼까요? 86세대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나요? 중·고등학생들은 살인적인 경쟁에서, 대학생들은 경제적인 압박에서, 청년들은 실업의 고통에서, 노동자들은 해고의 불안에서, 실업자들은 생존의 공포에서, 여성들은 성적 억압에서 해방 되었나요? 나아가 우리 사회는 더 평등해지고, 국가는 더 정의로워졌나요? 국민은 더 행복해졌습니까? 사실은 ‘헬조선’, 곧, 한국 사회는 시대착오적인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86세대의 실패는 무엇 때문인가요? 김누리 교수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줍니다. “첫째, 정치적 비전과 상상력이 빈곤했다. 둘째, 도덕적 우월감의 덫에 갇혔다. 셋째, 파시즘의 역설 때문이다.” 그렇다면 86세대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김누리 교수는 독일의 68세대를 소개합니다. ‘반(反)권위주의’적인 운동으로 부조리한 세계, 억압적인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했던 68세대는 나치 전력을 가진 자가 수상이 되는 파렴치한 나라를 철저한 ‘과거청산의 나라’로 바꾸어놓았고, ‘라인강의 기적’ 속에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던 나라를 모범적인 복지국가로 변화시켰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감행’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동서독의 오랜 적대를 허물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동방정책을 발전시켰습니다. ‘경쟁은 야만’이라는 철학 아래 경쟁을 금하고, 아이들에게 자유와 행복감을 만끽하게 하는 학교, 학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연구보수’라는 명목으로 생활비까지 주는 대학,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검소하고 유능한 의원들로 채워진 연방의회, 노동자들이 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업, 100만 난민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민사회. 이것이 68세대가 만들어낸 독일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86세대가 꼰대 짓을 버리고, 다른 세상의 기틀을 만들면 됩니다. 적폐청산과 개혁을 감행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촛불세대들에게 지금보다 못한 세상을 물려주지 않는 것, 헬조선인 ‘지옥’을 넘겨주지 않는 것, 이것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86세대에게 남겨진 마지막 시대적 사명입니다. 그 소명을 소리 없이 감당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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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5-13
  • [유의신목사] 골라먹는 재미
    몇 년 전 모 식품 업체의 카피라이팅이 떠오른다. ‘골라먹는 재미로....“ 그러고 보면 참 많이 변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던 시절이 아득하게 여겨 질 정도이다. 이제는 교회가 어린이들에게 과자나 사탕을 줘도 자기 취향이 아니면 받아먹지 않는다. 그만큼 3만 불 시대에 이르면서 호불호(好, 不好)가 노래 제목이 될 정도로 모든 것이 다양하고 풍부해 졌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물에 대하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대인관계에서도 좋고 싫은 것(好, 不好)으로 구분하고 선택하며 자기취향에 길들어져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증상은 일상에서 뿐 아니라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도 오랜 동안 서서히 잠복해 들어오면서 심한 중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언론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하는 가운데 한 번씩 질문하는 것이 있다.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즐겨 암송하는 구절이나 평소 마음에 새겨둔 성구를 내어 놓는다. 이렇게 별 생각 없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곤 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이 호불호로 뇌새김이 되어서 그 심각성을 모르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에 균형 감각이 상실 된 상태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라면 내가 싫어하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약은 쓰기도하고 달기도 하다. 구약신약의 말씀은 꿀같이 달기도 하지만 심령골수를 쪼개는 아픔도 주는 쓰디 쓴 말씀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증상을 가진 성도들은 설교를 경청 할 때도 호불호가 분명하여 좋은 설교 나쁜 설교로 기가 막히게 구분하며 편식을 함으로써 심한 편견을 가진 문제적 자아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편식을 오래하면 건강에 문제가 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는 불호(不好)로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은 호(好)라고 해오는 데서 문제의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각성과 부흥은 골라 먹는 재미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잠자는 자아를 깨우는 우레 같은 소리도 들어야 한다. 죄책을 불러일으키는 직설(直說)에도 예민한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첫 메시지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 절실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광야시험을 받으신 후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심한 편견에 사로잡힌 유대교 기득권층에게 이 메시지는 불호(不好)였던 것이다. 그 당시와 지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더 종교화가 심해져서 총제 적으로 골라먹는 문화에 길들어진 교회와 성도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항변도 있을 것이다. 편식은 서서히 건강을 해친다. 골라 먹는 재미로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잘살고 못살고 보다는, 크고 작은 교회를 떠나서, 유명과 무명을 가리자 멀고, 골라 먹는 재미에서 벗어나야 한다. 건강한 교회와 성도가 되려면 골라먹는 편식에서 벗어나서 온전함(wholeness)을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오피니언
    • 정론
    2019-04-29
  • [전영헌 목사] 돈벌어 남주는 인생이 되라
    오늘날 입시 제도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많이 달라졌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가 필수이지만, 봉사 활동과 같은 이른바 ‘스펙’들도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에 있다 보니 아이들이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이리 저리 방법을 알아보던 중 우연히 ‘밥퍼(밥퍼나눔운동)’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2010년부터 6년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밥퍼 봉사를 했었다. 밥퍼 봉사는 부산 시청 광장에서 노숙인들과 노인들에게 밥을 퍼 주는 사역이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여기에 동참하여 설거지, 식판 나르기, 어르신들 안내하기 등의 봉사를 했다. 섬김의 정신을 배우면서, 아울러 봉사 시간도 덤으로 얻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봉사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매주 참석했지만, 학교 업무가 많아지고 다른 봉사 단체와도 연결되면서 매주 참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학생 중 S를 팀장으로 세워 그에게 밥퍼 봉사의 인솔을 맡기고, 나는 다른 봉사 활동을 진행했다. 그렇게 8개월 정도가 지났다. 나도 시간이 되어 밥퍼 봉사를 함께 나간 어느 날, 뜬금없이 S가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여기 오신 어르신들 밥값이 얼마나 드나요?” 나 역시 모르는 사항이었기에 국장님께 물어보았다. “국장님, 이렇게 어르신들 식사 대접을 하면 하루에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음, 350만 원 정도 듭니다.” 국장님과 내가 대화하는 것을 듣더니 S가 끼어들었다. “목사님, 15년 안에 제가 한번 쏘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저분들께 밥을 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참 귀한 말이다. 그동안의 봉사 활동을 통해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았다. 물론 S의 말이 지켜질지는 15년 후가 되어 봐야 안다. 그가 어려운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쏠 수도 있고, 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의 목적과 돈을 버는 목적이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S는 앞으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이들의 스펙을 쌓게 해 주기 위한 도구로 봉사 활동을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어느새 작은 섬김 속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고 있었다. 나는 S가 대견스러웠다. “짜식, 꼭 그렇게 해라.”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걸작이다. “네, 목사님. 오천 명을 먹이겠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라는 가치가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삶의 모토가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대학 입시에서 면접관들을 대할 때마다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단다. 이는 분명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면접관들이 면접 중에 칭찬하더라는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듣는다. 이와 같이 교육은 반응이다. 반응이 올 때 가르치는 이는 춤추게 된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학교현장에서 이러한 반응들이 일어나길 바란다. 초점잃은 아이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를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19-04-19
  • [김충만 목사] 건강한 교회(敎會)가 답이다
    모죽(毛竹) 이야기 나무 중에 모죽(毛竹)이라는 대나무가 있다. 이 ‘모죽’은 씨를 뿌린 후에 무려 5년 동안이나 물을 주고 가꾸어도 어찌 된 게 싹조차 나지 않는다. 씨를 뿌린 땅 위 표면이 그렇다는 얘기다. 때문에 이쯤 되면 어디에 심었는지, 혹은 이를 과연 심었는지조차 기억에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뿌린 것으로 만족하거나,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라며 비싼 수업료 지불하고 말았다고 아쉬워하듯 마무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5년이 지나고, 모죽은 그 이듬 해 봄이 되면 놀랍게도 하루에 70-80cm씩 쑥쑥 자라기 시작 해 무려 30-40m까지 자란다. 이쯤 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에 대해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이렇다: 그 5년이란 시간은 모죽의 뿌리가 사방으로, 또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때이다. 그렇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을 묵묵히 땅 밑 사방으로 뿌리를 내리며 건강한 대나무로 준비하다가 5년 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더 놀라운 것은 다 자란 모죽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서 그 후엔 모든 영양분을 뿌리에게 내어준다. 또 다른 너(모죽)를 위해서 기꺼이 나를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영혼도, 구원도, 천국도 없는 미물의 한 나무도 이처럼 산다. 또한 5년 후, 그렇게 한번 화려하게 꽃이 피는 것으로 끝이 아닌 계속되는 건강한 생명으로의 자라감을 이어가는 것까지를 내다보며 ‘모죽공동체’와의 아름다운 상생을 이루어간다. 건강한 교회(敎會) 교회를 얘기할 때 ‘건강하다’라는 그림이 자연스러운 답이다. 한국교회도 100년을 넘어 200년을 향해 좀 더 자라가는 과정에서 나름 여러 몸부림을 치다가 건강한 교회가 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알아가는 중이다. 이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는 이해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 먼저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경과 목회자를 주신 목적이 “성도를 온전하게”(딤후 3:17, 엡 4:12)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를 원함에서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성경만큼이나 목회자를 주셨다는 얘기다. 그러나 목회자가 중요하다 할지라도 교회는 목회자만으로 세워지고 자라가고 열매 맺어가는 독주(solo)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몸에 많은 지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신다(고전 12:12-31). 따라서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와 함께 동역하는 성도들로 이루어질 때 건강한 열매를 맺게 된다. 이처럼 건강한 교회는 만인제사장(벧전 2:9)으로서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인가에 있다. 목사 혼자 뛰는 교회가 건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어떤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죽 이야기에서처럼 다음세대라는 모죽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변함없이 감당하고 있는가가 건강한 교회로 가는 중요한 시그널이다. 마치 한 가정에서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고 세워지고 있는가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되는 집은 자녀의 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강한 교회는 주일학교를 보면 알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이미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그만큼 주일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 또한 유지하는 교회들도 통폐합하거나 건물만 있는, 그러니 교육의 질적(質的) 저하는 누가 봐도 예측가능하다. 한국교회의 씨앗이자 모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일학교를 모죽 이야기처럼 회복해야만 한다. 우리가 가정과 자녀들을 늘 돌아보듯이 교회를 진단해 보고 건강한 교회로의 회복을 꿈꾸어야 할 때다. 건강한 교회는 멋진 구호와 계획으로 되지 않는다. 건강한 교회로 자라가는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기 위해 모죽은 이처럼 말을 걸어온다. 지금은 모죽에게서라도 배워야 할 때다. 그만큼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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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3-27
  • [강규철 장로]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입니까?
    저는 유년주일학교 시절 참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은 오후 예배시간에 우리에게 ‘천로역정’ 등 재미나는 기독교 책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교리집인 ‘대소요리문답’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 폐결핵 말기 환자여서 항상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며 정말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예수님과 같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또 한 분은 엿장수였습니다. 맛있는 엿을 팔다가 우리가 보이면 공짜로 엿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늦은 오후가 되면 항상 예배당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셨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낭랑하고 청아하게 들렸습니다. 주로 시편을 큰소리로 낭독하셨는데 정말 듣기에 좋았습니다. 그가 온 성도들을 감동시킨 것은 어느 추수감사주일 때 였습니다. 그 날 아침 교회로 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 강대상에 커다란 엿 한판이 통째로 놓여 있었습니다. 가난한 그가 자신의 생활 전부인 엿 한판을 감사헌금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때 제가 받은 감동과 충격은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열정적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마음을 시원하게 울려주던 그 청아한 목소리가 저의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분들을 떠올리면 저의 입가에 미소가 생기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와 같은 참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선한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도 많이 계셨고 그 분들의 희생적인 가르침과 영향이 좋은 성도들을 많이 양육시켰으며 이로 인해 한국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높은 곳에 계시는 일부 영적 지도자들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존경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면서 만족감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서는 탐욕스런 사탄의 모습이 보이고 또 어떤 분에게서는 성적으로 타락한 음침한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도 예수님의 가르침인 ‘사랑과 용서’가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또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를 이룩하셨던 분들 중에는 은퇴 후에도 그동안 누렸던 것을 내려놓지 못해 그것이 너무 추한 모습으로 보여 안타깝기도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교계나 세상 사람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며 비판하는 데 정작 본인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로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우는 결과가 되었음에도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행실을 보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하여 교계가 분열되고 교회가 쪼개어 지는 아픔을 겪게 되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개독교’라 조롱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교계지도자들은 사회로 부터도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진정한 목회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의 언행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서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보이고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먼 훗날 우리를 생각하는 후배들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의 모습을 떠 울리고 미소를 짓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9-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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