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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남북해빙기 이단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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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해빙기를 일면 불안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남북교류의 활성화는 곧 북한과 중국 동북3성에 거점을 확보하고 활동하는 한국 이단들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단 대처의 관점에서, ‘남북갈등의 완화’는 ‘이단위기의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
첫째, 1992년 문선명과 김일성의 만남 이후, 통일교는 북한진출의 광폭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문선명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 생가터에 ‘정주평화공원’이 세워졌고, 이곳을 찾는 통일교 신도들의 성지순례가 이어지고 있다. 평양 중심에는 북한에서 최대 흑자를 올린 통일교 소유 ‘보통강호텔’이 있고, 건너편에는 ‘통일교평양가정교회’가 위치한 ‘세계평화센터’가 있다. 2013년 말에는 통일교가 70% 지분을 확보하고 있던 ‘평화자동차’를 북한에 무상 양도하고, 그 대가로 북한 전역을 아우르는 유통망을 허가받았다는 소식도 있다. 개성을 중심으로 한 남한기업의 대북사업은 제한적이고 불안정하지만, 통일교 대북사업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매년 문선명의 생일에는, 대낮 서울 한복판 최고급 호텔에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보내는 산삼과 풍산개 등의 선물이 통일교에 전달되었다. 통일교의 대북진출은 지금 치외법권 지역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둘째, 남북평화 국면의 조성은, 중국 동북 3성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이단들의 북한 진출을 용이하게 만들 전망이다.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은 조선족 동포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며, 중국 이단들이 다수 발흥한 지역이다. 현재 이곳에는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구원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 이단들이 공격적인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조선족 신도들을 통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동북 3성은 중국과 북한 진출을 위한 한국 이단들의 베이스캠프가 되었다. 이들 한국 이단들의 무분별한 포교활동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중국 정부가 한국선교사들을 정기적으로 추방하고 있다고 한다. 남북교류의 활성화는 한국 이단들에게 북한과 중국 포교를 위한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 전망이다.
셋째, 국내에 거주하는 북한 이탈 주민과 조선족 동포들에 대한 이단들의 접근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남한에서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단들은 거절하기 힘든 도움의 손길을 주며 다가서고 있다. 남북교류가 본격화된 후,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지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면, 북한과 동북 3성에서 한국 이단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국내 거주 새터민들과 조선족 동포들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의 선교가 진행되어야 한다. 남한, 북한, 동북 3성을 잇는 ‘실크로드’가 ‘이단루트’가 되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의 연합적 이단 대처가 아쉽다. 이단들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북한에 진출하고 있는 반면, 한국교회는 경쟁적이고 낭만적으로 통일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북한선교는 보여주기식 통일운동을 넘어, 이단 대처 활동과 병행하여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불교와 천주교와는 달리, 한국교회의 사분오열된 연합운동은 이단 대처 전선의 혼란으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이 아니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을 자행하며, 교권장악과 정적제거의 수단으로 이단 문제가 악용되는 한, 효과적인 이단 대처는 요원하다.
남북갈등의 완화는 이단위기의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 한 세기 전 부흥의 불길이 일어났던 ‘동방의 예루살렘’평양으로 한국교회가 다시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날, 이미 그곳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있는 이단들과 피할 수 없는 거룩한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폭풍전야에 한국교회는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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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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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미안합니다""고맙습니다"를 배워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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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때로는 성취욕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좌절감을 맛보게 하기도 합니다. 성공한 사람을 보고 자신의 무능함과 실패를 좌절로 이어감으로써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함께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제한적 가치를 지닌 것을 가지고자 서로 다툴 때에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이유와 목적입니다. 어쩌면 냉혹한 현실은 수단과 목적을 섞어 버림으로써 삶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올바름의 결과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아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과 중심주의의 모습입니다. 즉 비교하며 살고, 때로는 비교 당하는 삶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자신만이 지닌 선물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점점 누구나 똑같이 어떤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이상한 평등(?)의 사상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 결과 부모는 아이들을 각각의 모습이 아닌 사회의 기대치가 요구하는 형태로 바꾸고자 하고 청년들이나 직장인들도 예외는 아닌 듯합니다. 그 결과 자신만이 지닌 아름다움과 행복을 뒤로 하고 모두가 똑같이 가져야 하고 누려야 하는 행복(?)의 신기루를 찾아 여정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인생의 끝자락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 그 행복이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입니다. 이는 마치 성악가 조수미씨의 노래를 들은 한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조수미씨처럼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소리가 있듯이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음색과 세계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놓치는 순간 그는 제한된 가치를 지닌 현실적 물건(때로는 성공을 포함하여)이 삶의 전부를 대변해 줄 것 같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신기루를 찾아 떠나게 되고 정작 자신에게 이미 주어졌던 행복은 버리게 됩니다. 그 여정의 마지막을 즐거운 결말로 끝내고 싶어 하는 것이 모두의 바람이지만 현실은 정반대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이제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우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유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제한된 가치보다 무한한 가치를 지녔으나 값없이 공급하는 자연에 감사하는 법을 먼저 가져야 할 것 입니다. 그리고 내일의 허상을 버리고 오늘의 삶에 감사하는 지극히 소박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비교가 주는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좋게 여기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향하여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평화의 법을 배우고,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 그 자리에서 “미안합니다”라는 자신의 서투름을 인정하는 법을 익히고, 또한 조그마한 것에도 “고맙습니다”라고 함으로써 나눔의 의미를 채워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참 쉬운 말임에도 실천하기는 녹녹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폐쇄적인 삶을 사는데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말과 조건 없이 안아줌으로써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사랑의 말과 안아 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가르쳐 줌으로써 함께 생명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제한된 가치(물건, 성공 등)를 소유하는 방법에 대하여 수많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한한 가치를 가진 생명에 대하여는 마치 저절로 따라 오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실제는 반대입니다. 무한한 가치를 먼저 알아야 비로소 제한된 가치의 바른 의미도 알게 되고 제대로 누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무엇을 먼저 교육해야 할지는 자명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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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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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 교수]부흥과 작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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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언제나 진리를 왜곡해 왔다. 시간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진리는 죽은 정통신앙으로 대체되고, 교회에는 생명을 잃어버린 종교인들로 넘쳐난다. 한국의 대학 청년들의 복음화율이 3% 이하가 되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지금 물질적으로 풍요해졌지만, 영적으로는 깊은 어둠의 상태이다.
이삭은 그의 가족, 종들, 그리고 가축들까지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새 우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생각해 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우물 자리를 찾아내고 블레셋이 버린 각종 쓰레기와 폐기물들로 채워진 그 우물을 다시 파냈다. 거기에는 여전히 맑은 샘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부흥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틴로이드 존스는 단언하였다. “하나님의 본질적 진리가 재발견되지 않고 부흥이 일어난 예는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2007년 부흥의 우물로 우리의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진 “윤인구(부산대 초대총장)를 세상에 드러내라”라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그를 탐구하여 다큐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메이지 신학학사, 미국 프린스턴 신학석사, 영국 에든버러 신학박사과정을 공부한 우리나라 근대 최고의 신학자였다. 부산대 초대, 연세대 3대 총장을 역임했다. 조선신학원, 장신대, 부산대, 부산교대, 소정교회와 광복교회를 설립하였다. 나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꿈꾸고 노래하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며,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참 교육과 참 스승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영적 가뭄이 극심한 이 시대에 바로 진리의 샘을 맛본 것이었다. 1년 동안 눈물과 기도로 윤인구의 다큐멘터리 ‘하늘열고 광명을”을 제작하고 발표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개인적 부흥을 경험했다.
아인슈타인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개인의 본보기 삶” 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윤인구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꿈꾸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가득한 부흥’은 결과적 부흥이다. 그것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 그 부흥의 과정 특히 그 과정에 더 깊이 마음을 두어야 한다. 부흥의 시작은 한 사람이 부흥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부흥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펴져 나가는 것이다. 다큐 제작 인터뷰 과정에서 “윤인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김기열은 거침없이 대답했다. “윤인구는 작은 예수야!” 부흥은 작은 예수들을 일으킨다, 이전처럼 살 수 없는 새로운 존재가 되고, 그를 통해 복음의 강력한 능력이 역사하여, 또 다른 작은 예수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시대가 전하는 빛바랜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선혈 낭자한 복음의 현장에서 자신의 삶을 다 바쳐 오직 믿음으로 다음세대를 살려낸 우리의 선배와 선조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부흥의 우물이다. 거기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작은 예수로 변화되어야 한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_이사야 26:19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노래를 잃어버렸다. 아니 영이 죽어 있었다고 말해야할지 모른다. 주께서 티끌에 누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깨어 노래하라!” 노래는 나를 살리고, 노래를 듣는 자를 살린다. 이제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는 역사가 나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 작은 예수! (참고 https://www.revival-wel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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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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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호 목사]욕망의 정치, 절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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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구의 절반은 굶주릴까? 다국적 기업의 음모일까? 지구인 개개인은 관계없을까? 정치인들의 선거공약에는 무조건 잘살게 해주겠다는 공약밖에 없다. 지금도 이 정도면 그런대로 잘살고 있는데도 더,더, 더, 더욱 더 잘살게 해주겠다고 불안한 미소를 보이며 설득한다. 아마 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아프리카 (Africa) 사람들이 한국처럼 욕망에 충실하게 소비하는 국가가 되기 시작하면 지구의 자원은 얼마 안가서 끝장나고 말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의 음모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안 보인다. OECD국가 지도자들, 구교의 교종, 복음주의권의 지도자들...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이들의 입에서 이런 말을 빈번하게 듣고 싶다. "이제 우리 그만 절제합시다. 이제 우리 그만 먹읍시다. 이제 우리 이 정도 사는 것으로 만족합시다." 이런 외침이나 슬로건들이 꼭 조그만 단체의 몇몇 사람들, 또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자는 기독 시민단체에 소속된 몇몇의 입에서만 외쳐져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는 지금 소비에 대한 부추김 때문에 둘이 벌어도 먹고 살기 힘들다. 둘이 죽어라 하고 일해도 집 한 채 장만하기 힘들다. 먹고, 입고, 즐기고, 장만하는 일들은 어느 정도에서 자발적 절제를 해야 소망 있는 지구촌이 될 것이다. 지속가능한 지구는 반드시 일정한 기준에서 멈추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이대로 가면 분명히 한계에 달한다. 사람들은 애써 그것을 외면할 뿐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지구에 종말을 결정하는 것보다 인간 욕망추구의 총량이 더 빨리 지구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다수의 청년들은 이제 재정을 모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절제나 절약, 이런 용어들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따름이다. 굳이 힘든 일도 하지 않고 싶어 한다. 결혼도 출산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꼭 쓸 만큼만 벌어서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다가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1세기 새로운 유형의 히피 열풍이 재현될지 모른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우리시대의 자녀들에게 욕구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절제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시장을 어지럽히는 부덕한 인간이라 욕을 얻어먹기 십상이다. 무한대의 맛을 추구하고 무한대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에 감히 자발적 절제와 자발적 가난을 외치는 것은 이단아처럼 느끼는 세태이다. 어떤 음식이나 맛에 "TRUTH_진리"를 붙이고, 어떤 사람에게 "갓_GOD"을 붙인다. 하나님과 진리를 맛이나 인기인에게 붙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말들이 조크나 우스갯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매스컴은 무한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대세가 그쪽으로 흐른다. "왜 나만 절제하고 불편하게 살아야 하나? 내가 바보인가? 무지렁이인가? 나도 어깨 힘주고 떵떵거리면서 큰소리 쳐대며 멋지게 살란다" 이런 의식이 뇌를 지배한다. 갈망해도 이루어 지지 않으면 비난과 원망, 상대적인 박탈감과 비교의식에 시달린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종말은 어떤 모습일까?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 중반까지 유럽을 휩쓸었던 "다다이즘(Dadaism);<무의미를 의미화 했던 문화, 퇴폐적 예술사조>" 처럼 젊은이들이 자기와 친구를 꾀어 동반자살을 일삼으면서 자유죽음을 찬양했던 광기의 시대를 몰아오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우울한 청년들이 많아진다. 청소년 조현증이 급증하고 있다. 가정을 버리는 이들이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늘어나고 있다. 노인들이 외면당하고 버려지는 시대이다. 고독사가 늘어간다. 묻지마 살해를 저지르는 이들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자식을 버리고 외면하는 파괴적인 정서를 가진 부모들이 늘고 있다. 가히 신 해체주의 시대라고 명할 만큼 무너져 내리는 중이다. 지금쯤 정치인들은 무한 욕망을 자극하는 유세보다 우리사회의 격과 질을 높이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발언을 해야 할 때이다. 하기야 이런 일에 목숨 걸어야 할 종교가 자기자리를 버렸으니... 그래도 외쳐본다. 이제 우리 격조 있는 세상, 질 높은 사회를 위해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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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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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목사]스승의 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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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미풍에 몸을 맡겨 초록물결로 춤추는 청보리 밭과 파아란 하늘을 노래하며 낮게 날아가는 종달새는 우리들의 뇌리 속에 천국의 한 장면일 것처럼 각인되어 있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렀으며 좋은계절, 좋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할 기념의 날도 많아 하나님의 손길로 창조하신 푸른 계절을 호흡하며 은혜의 향기 가득한 이즈음에는 인류의 구원이시자 큰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욱 사무친다. 그런 5월의 한가운데 ‘스승의 날’이 있다. 제자가 된 처지에서는 스승의 은혜를 되새기고 스승의 처지에서는 올 곧은 스승의 길을 다짐하는 날이기도 하다. 제자로부터 언제나 존경을 받아야 하고 또 존경을 받기 위해 늘 반성하고 노력해야 하는 스승의 길은 참으로 힘든 길이다. 그래서 이 길을 묵묵히 가는 스승은 언제나 높고 큰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높고 큰 존재인 ‘스승’은 본래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그것을 밝힐 수 있다면 ‘스승’이 걸어가야 할 길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스승이란 흔히 선생(先生)이란 뜻으로 이해하여 먼저 태어나 경험이 많은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문장가이자 사상가인 한유(韓愈)는 그의 「사설(師說)」에서 나이나 신분을 묻지 않고 도(道)가 있는 곳에 사(師)가 있다고 했다(道之所存 師之所存). 그러기에 성인(聖人)에게는 “정해진 스승이 없으며(無常師)” 스승을 특정한 사람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전도(傳道), 수업(受業), 해혹(解惑), 즉 도(道)를 가르치고, 실천적 모범을 보여주고, 의혹을 풀어주는 사람은 누구나 스승이라고 하고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도(道)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도(道)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며, 도를 가르치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가장 위대한 참 스승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최선의 교육자이며, 가정은 하나님이 세운 첫 번째 배움터입니다. 자녀들을 말씀으로, 믿음 안에서 양육하여야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해 자녀들에게 믿음의 가치관을 심어줄 책임이 있다. 한국 사회의 비극중 하나는 부모가 더 이상 교사이기를 포기한 데 있다.
이는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믿는 자들도 ‘신앙교육’은 당연히 교회에 맡겨버리는 것이다. 어머니보다 더 많은 영향을 주는 스승은 없다. 어머니는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을 만드는 위대한 스승이다. 아이들의 가슴에 가장 뚜렷한 자국을 남기는 것은 어머니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입은 어머니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이 세계에 기독교의 토대를 세운 위대한 힘이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하나로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이며 훌륭한 크리스천이었던 ‘토스토예프스키’는 말하기를 “좋은 기억처럼 훌륭한 교육이 없다.”라고 했다. 최대의 교육은 좋은 기억을 자녀들에게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그 무릎을 세워 실천하며 자녀들과 다음 신앙의 세대들에게 본이 되도록 자애롭게 가르치며 가정과 공동체에서 성경이 가르쳐주신 교육을 세워 나가면 주님께서 기쁨의 열매를 복의 결실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죽이고, 나를 닦고, 나를 세우면 이 어려운 불신앙의 시대를 이겨 나가며 좋은 제자로 스승으로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을 것이다. 땅을 단단히 다지고 반석을 반듯하게 놓지 않고 지은 건물은 작은 일상의 변화에도 쉬이 무너질 것이다(마7:25).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내 생각과 달라도 잘 인내하는 곳에, 포기하지 아니하고, 흔들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까지 가는 곳에 결국은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신 6:3). 바라기를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라는 엄중하고 영광된 사실과 돌아서면 뭇 영혼을 제자 삼는 스승이라는 위대 막중한 사명(약 3:1)을 오월의 하늘처럼 밝고 청명하게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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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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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우 교수] 한반도 평화 정착과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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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남북 정상의 회담으로 한반도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심심찮게 거론되던 때를 생각하면, 분명 큰 변화이다. 이제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시작이긴 하지만, 모든 국민들의 가슴에 희망의 등불이 달리기 시작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일부 정치인들이 정략적으로 정상회담 자체를 쇼에 불가하다고 딴지를 거는 소리를 내고 있긴 하지만, 변화의 큰 물결을 막지를 못할 것 같다. 북미간의 정상회담 결과가 긍정적으로 결론지어진다면, 한반도는 새로운 평화를 향한 전기가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들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동안의 분단체제가 고착된 세월이 상당하고, 온전한 평화 정착까지에는 남북한이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현실적인 과제다. 한국교회는 분단 이후 쉼 없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기도와 북한 선교를 해왔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을 엄정히 살펴보면, 한계가 많았다. 각 교단 별 북한 선교회를 통하든, 개별교회를 통하든, 초교파적인 북한 선교단체를 통하든 북한을 향한 선교는 총체적 전략이 부재했다. 모든 한국교회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긴 했지만, 하나 된 힘을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교회는 현실적으로 하나 되지 못한 상태에서 각개전투만 벌여왔던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실상 교회는 하나 되지도 못하고 민족통일이란 더 큰 하나 됨을 부르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아이러니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남북한의 평화정착에도 교회가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도 크다. 지금과 같은 각개전투가 교회마다 이루어진다면,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양상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지향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단순한 북한 선교가 아니라,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의 토대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한국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교회는 지금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철저한 개교회주의를 극복해야 하며, 일차적으로 남한 교회가 하나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성이란 미명하에 분열과 갈등을 계속해온 한국교회 교단들이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란 하나의 목적 아래 아무런 조건 없이 모여들어야 한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협의와 평화정착에 필요한 정부 차원의 조치와 실천들도 단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정치적으로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다 해결될 수는 없다. 다양한 모든 영역에서 한반도의 평화정착이란 목적을 위해 해야 할 소임들을 주체적으로 찾아나서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도 한국교회의 역할은 중차대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은 한반도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 상황을 먼 산 불구경하듯 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지금 이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기도해야 할 시점이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이번에 전개되는 한반도 평화 정착에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지나간다면, 정말 한국교회는 한반도의 역사 속에서 그 존재가 사라져 갈지도 모른다. 주어진 현실을 하늘의 뜻을 따라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때, 교회와 신자의 삶은 무력해지기 마련이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주어지는 평화가 어찌 십자가 없이 실현될 수 있겠는가?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먼저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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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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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 학교를 포기하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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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지난 10년간 근무했던 브니엘고등학교를 떠나서 같은 재단의 브니엘 예술 고등학교로 전보를 받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10년의 시작을 하게 되었다.
브니엘 고등학교나 브니엘 예술 고등학교와 상관없이 나에게 3월은 전쟁과 같은 사역이 시작이 되는 시간이다. 고등학교에서 목사 선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종교인으로, 비기독교인들이 관심가지지 않는, 특히 개독이라고 부르는 기독교 교과목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다. 이유는 일반 교과목과 달리 종교학(성경)이라는 교과목은 일반 고등학생들에게 없어도 그만인 교과목인 동시에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는 더욱 더 거부감이 생기는 교과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3월 첫주간 교목들은 종교 첫 시간에 모든 승부를 다 걸게 된다. 그 첫 시간이 3년을 결정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수의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던졌던 메시지들을 기억하고 꿈을 발견하기 위한 여행을 시작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도전받고, 그리고 스스로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로 많은 친구들이 방문을 하곤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인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기도 한다. 올해 새로 부임한 브니엘 예술 고등학교 학생들은 자기 목사 선생을 보고 “목사님, 우리 아빠 해주시면 안되요?”라고 울먹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 많은 미션 스쿨들이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이유는 선교사님들이 시작했던 건학 이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고, 또 한가지는 공교육 현장(학교)에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브니엘 고등학교에서 미션 스쿨의 목사 선생으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바로는 학교는 참 매력있는 장소라는 것이다. 결과를 떠나서 학원선교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이 일에 관심이 없다.
학원 선교는 학교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에 청소년들이 없다고 말을 하고, 청소년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다고 말만 한다.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미래에 대한 투자와 관심은 적게 가지면서 결과만을 볼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학교라는 현장에 있다보니 수많은 교회의 청소년부서와 교사헌신예배 강사로 설 일이 많다. 가는 교회들 마다 청소년들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부흥(인원의 증가)이 되겠냐고 이야기를 한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똑같다. “지역 학교롤 포기하지 마십시오”라는 대답이다.
나는 이 글을 보는 교회 지도자들이 학원 선교 현장에서 몸부림치는 교사들과 학교의 몸부림을 기억하고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여러분이 섬기는 지역에 미션스쿨이 있다면 그곳의 선교담당 교사나 목사에게 따뜻한 격려의 메시지라도 전해 주면 좋겠다. 지역교회와 학교가 더 연합하여 선한 열매들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강단에서만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외쳐지는 기도와 메시지보다 교회의 실천이 더 중요한 시대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주면 좋겠다.
학원 선교를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간곡히 부탁한다.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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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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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호 목사] 제국인가? 천국인가? (빌레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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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주인의 돈을 동시에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다. 그의 주인은 골로새지역에서 주님을 섬기는 빌레몬이었다. 이 노예가 로마감옥에 구금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노예는 당시 골로새 교회의 주된 지도자였던 빌레몬의 집에 재산을 축내는 도적질을 했던 사람이었다.
이 노예는 로마에 있는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 감옥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이유로 구금된 노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울이었다. 이 노인이 감옥에 붙들려와 함께 지내는 젊은 노예인 오네시모를 주목한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이 지냈다. 그리고 그는 바울사도의 돌봄 가운데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평강가운데 빠져든다. 밤과 낮을 함께 지냈다. 마치 주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고동락하였다. 노예인 오네시모는 회심했다. 바울이 경험했고, 빌레몬과 그의 가족이 경험한 믿음과 사랑을 맛보았다.
오네시모는 노예였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맛보았고 바울의 창자같이 귀한 심복이 되었다. 무익한 사람에서 크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복음이 그렇게 사람을 바꿨다. 복음과 성령의 역사는 환경과 시간 공간을 초월한다.
바울은 골로새 지역교회를 섬기는 빌레몬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단 스물다섯구절로 구성된 엽서같은 편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나와 너에게 참으로 필요한 오네시모에게 자유의 표를 주길 바란다. 오네시모가 진 빚과 손해는 내가 배상하겠다". 바울의 삶은 복음전파라는 틀 속에서 체계적으로 섬세하게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너는 내게 진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과 사랑의 빚을 고려하여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유의 표를 주어라. 내게 주어진 권위로 이 일을 할 수 있으나 너의 허락 없이는 이일을 진행하지 않겠다. 너는 내가 권한 것 보다 더 이 일에 협조할 것을 믿는다.
당시 로마제국 전 지역에 노예제도는 탄탄한 사회체계로서 그 틀거리에 어느 누구도 균열을 낼 수 없었다. 제국의 기반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동일한 인간이 짐승취급을 당하는 현장을 보면서 아무도 그것이 잘못된 죄악임을 말하지 못했다.
디도서에서 나타나듯이 바울은 노예제도를 혁파하려는 기획을 한 일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안에서 노예에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신 그리스도의 종이 되도록 그의 전 인격, 전 존재를 바꾸었다. 노예인 오네시모를 자유인이며 해방자로 바꾼셈이다.
공동체의 리더였던 빌레몬은 큰 손해를 감수하고 바울 프로젝트에 자신의 뜻을 합했다. 빌레몬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각성된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 압비아와 아킵보는 골로새 교회의 사역자들이었다.
감옥안에서 교회된 오네시모는 보편교회인 골로새 교회의 도움속에서 자유인이 된다. 해방된 노예가 된 것이다. 로마제국의 기반이 되었던 노예제도는 감옥안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빌레몬서는 이 시대에도 큰 충격을 던진다. 예배당 밖 감옥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본질을 실천함으로서 보편교회가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실천한다. 바울의 복음사역은 충격적이다. 복음은 그렇게 세상에 큰 충격을 준다.
작금의 교회들은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람을 발생시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탄탄한 세속적 틀거리에 균열을 내는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는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속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충격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더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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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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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만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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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와 세계의 역사를 BC(Before Christ, 주전/主前)와 AD(Anno Domini, 주후/主後)로 나눈 분은 누구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의 종교와 사상과 신념이 무엇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과 동서고금을 망라해서 온 인류는 지금 주후 2018년을 살고 있다. 무슨 말인가. 그가 비록 모슬렘이든, 공산주의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 2018년째 되는 해를 온 세상과 열방은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강생(降生)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야)가 역사적 부활을 이루신 날, 바로 그 부활절을 맞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가 만들어낸 허구(신화, Myth)가 아니다. 역사와 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인류를 죄와 사망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는지와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예수는 서구 기독교가 만들어낸 기독교의 아바타(Avatar)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신화(허구)적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단군처럼 신화(허구)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BC와 AD를 가르시면서 역사 한복판에 사람으로 오신 분이시다.
이 역사적 사실과 진리를 성경을 중심으로 좀 더 살펴보자. 복음서와 고린도전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한 세대가 가기 전에 기록되어 당시 기독교 세계(팔레스타인, 유럽, 아시아)에 널리 필사되어 읽혀지던 문서였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만일 앞서 얘기한 성경들이 예수가 사신 후 수 백년 혹은 천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면 역사적 신빙성(Credibility)은 그만큼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성경(복음서, 고린도전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지 불과 한 세대(30년)가 지난 바로 그 전후에 기록된다. 예를 들자면,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난지 불과 30년이 지난 게 지금 2018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당시 서울올림픽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있는 때라는 뜻이다. 그럼 거짓이나 과장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하거나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잖은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면 고린도전서 15장에 많게는 500여 형제가 지금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 아니고서야 어찌 밝은 대낮에 기독교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버젓이 기록하여 세상 앞에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라.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고 이스라엘 역시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바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기록(마 28:11-15, 눅23:52, 24:20-49)에서 로마와 로마 황제를 모독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록들이 공공연하게 복음서 안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사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이를 그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이는 사실이며 역사라는 얘기가 된다. 사람들이 자기가 믿지 않으면 사실인 것까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보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으니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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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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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교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넘어 위덴티티(WEdentity)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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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 too)가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누군가는 오래되고 뿌리 깊은 남성우위 문화의 붕괴라고 하고, 혹자는 이를 모든 권력관계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한다. 오랫동안 억압된 여성들의 한이 터져 나오는 도도한 흐름의 끝에는 보다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고 소망한다.
우리가 느끼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허탈감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 뿌리는 타락한 우리의 죄성(罪性)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죄성으로 모두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걸 보면 거기에는 우리의 본성이외의 또 다른 요소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리라. 여러 원인중 하나라도 찾을 수 있다면, 어둠을 모두 지울 수는 없으나 그 원인을 캐내어 작은 빛을 밝힐 수는 있지 않을까.
현재의 거대한 탁류의 근원에는 ‘정체성’(Identity)에 대한 혼란이 자리 잡고 있다. 근대이후 진리탐구의 시야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타인을 상실하고 자기만을 집중하는 근대인들은 결국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이 지옥’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자기중심의 시대에서는 타인이 객체화되고, 대상화되며, 결국 도구화되고 만다. 그곳에 폭력의 상대방, 사회적 약자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가 「타자의 추방」(Die Austreibung des Anderen)에서 말하듯이 우린 세계화, 정보화를 통해 모두가 같아져버린 사회 속에서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을 하고 있다.
팀 켈러 목사는 「답이 되는 기독교」(Making Sense of God)에서 우리에겐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으로 알려진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의 저자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의 정체성을 향한 세 가지 길을 인용하면서 현대인들은 ‘안을 보는 부류’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주적 질서를 믿지 않고, 자존감을 얻으려고 늘 경쟁하고 변화하는 유행에만 민감한 우리들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그 탈출구로서 ‘위를 보는 사람’을 제시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우리 말 ‘위’(上)와 같은 발음의 영어가 ‘위’(We)라는 사실이다. 이제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던 자존감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려야 한다. 자아의 압제를 벗어나 ‘우리’로의 여행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나만 보는 관점을 돌려 위를 바라보고, 내 옆의 이웃을 보게 되는 순간, 아이덴티티(Identity)로부터 위덴티티(WEdentity)로 한 걸음 나가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조어(造語)를 발견하곤 무릎을 내리쳤다. 깨달음의 눈을 떠 가장 가까운 아내와 남편을 바라보자.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오랜 정을 나눈 친구들, 그리고 매주 만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보자. 나를 벗어나 너를 발견하며, 나의 믿음이 아닌 우리의 고백을 다른 본문의 다양한 톤으로 읽어보자. 신경(信經, Creed)은 단조로운 음의 합성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역정을 담은 화음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의 눈앞에서 포스트모던이 무너지고 있다. 모두를 연결해줄 것처럼 외치던 신탁(神託)들은 결국 모두를 끊어놓고 말았다. 이제 나(I)만 외치던 주문에서, 주님의 마지막 기도처럼 우리도, 우리(We)가 가득 찬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우린 새로운 인식, 위덴티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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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