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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내게 맡긴 직분을
    한국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웃에 선행한 사실을 공식화된 것만을 보아도 불교 신문에서 조차 불교보다 수 십 배로 많다고 불교인의 각성을 촉구한 기사를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 기독교가 극히 소수 종교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란 불명예스런 별명을 낳게 되었다. 기독교의 부패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직분을 받기 전의 세상적인 사고나 사명 의식 없이 시작한 것이 문제가 된다. 부쩍 2000년대에 들어 교회의 지도자인 소수의 직분 자들이 일 만 악의 뿌리인 돈을 하나님 위에 두는 것을 현실화 시켜 버렸다. 돈이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다는 물질제일주의가 교회 내에 들어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좋은 대학을 졸업하여 직장에 적응하지 못한 소수의 젊은이들이 사명감 없이 목사의 길을 택한 것이 문제가 되고 사회에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분들이 교회 지도자의 직분을 맡은 것이 더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21세기에 들어 젊은 직분자들은 목사사례를 보통 회사 사장월급으로 생각하고 장로는 무급 상무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는 것도 믿음은 뒤로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이나 세상 학문을 많이 수학한 사람을 직분자로 세우는 것이 상례가 되어 버렸고 직분을 신분 상승으로 여기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직분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교회의 모든 일을 사명감을 갖고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때가 많았다. 또한 학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학생이 사명감 없이 신학을 전공하여 목사가 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물론 하나님에게서 능력을 받아 잘하는 목회자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20세기에 교회의 직분을 받은 자와 현재 21세기의 직분자들의 믿음은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고 헌신하는 것도 엄청난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고 정말 놀랄 때가 많다. 오늘날의 직분자들이 옛날처럼 목회자를 존경하고 주의 사명을 헌신적으로 감당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 작금의 교회의 현실이라 하겠다. 말씀대로 살고 보수적인 신앙을 자랑하는 장로교 총회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극히 소수의 직분자지만 자기의 명예를 위해 금권을 발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웃 총회에서는 총회장직을 맡기 위해 공탁금을 엄청 내어 놓아야 한다니 일반 사회와 무엇이 다른가! 교회는 목사이면 충분한데 박사에 목매여 국내에서 아주 쉽게 박사를 취득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교회나 상회의 책임을 맡은 직분자들은 교인들이 헌금한 돈을 공짜 돈처럼 함부로 쓰는 것이 상습화 되어 버렸다. 교회당 부지를 구입하는 데 직분자가 이면계약을 하여 차액을 챙기는 불미스러운 일들도 생긴다. 큰 교회로 성장시킨 은퇴목사는 교회에서 자기가 맡은 직을 자녀에게 세습하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목적을 달성한다니 정말 한심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650만도 안 된다고 한다. 이제는 나이가 많은 성도로 채워져 있고,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많아지고 세례 받는 교인이 날로 적어지고 있는 것은 정말 걱정스럽다. 이렇게 진행되면 잠시 뒤에는 유럽이나 미주 교회처럼 교회당은 텅텅 비고 연세 많은 교인으로 명맥을 이어나가는 안타까운 현실이 바로 우리 눈앞에 도래하겠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더해 온다. 거기에다 거대한 이슬람의 침략이 더 무섭다. 그런데도 직분자들은 교회당을 자꾸만 높이 그리고 크게 지으려는 경쟁심으로 하나님의 집은 빚더미 위에 앉아있게 만들어 놓았다. 감당할 수 없이 지은 매머드 교회당을 내어 놓아 이단에 헐값에 처분하는 불행한 사태가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데도 남의 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렇게 빚에 쪼들려 이단에 헐값에 팔려나가는 교회당을 바라보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나에게 맡긴 귀한 직분을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확실히 믿고 주님이 우리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일을 제대로 감당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왜 손가락질을 한단 말인가? 비록 시작은 잘못 되었더라도 내가 받은 직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믿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사명을 잘 감당해야만 한다. 직분을 맡은 자는 누구든지 내가 모든 일에 주인공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주님을 최고의 자리에 좌정하시도록 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살고 다음 세대가 대대로 살아갈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오직 기도 밖에 없다. 지도자인 직분자가 크게 입을 벌려 우리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어야만 한다. 직분자들이 말씀을 떠나면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떠나신다. 그래서 내게 맡기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두렵고 성실한 마음으로 제대로 수행해야만 한다. 그리하면 가정의 모든 문제, 교회문제, 국가사회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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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3
  • [안동철 목사] 교회에서 다음세대가 사라지고 있다!
    한국인들의 탈종교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갤럽이 2014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의 전체 종교 비율은 50%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10년 전인 2004년에 비해 4%가 하락한 수치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60대의 종교인구가 68%로 가장 높은 반면, 30대에서 38%, 20대에서는 31%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종교 비율은 전형적인 역삼각형 모델로 한국사회 전체의 종교 미래가 어두울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의 시각을 교회 내 다음세대로 한정해 본다면 더욱 충격적이다. 현재 한국의 중고등부 학생의 복음화율은 3.8%로 선교지에 가까운 참담한 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지난 1996년 미국의 ‘Christianity Today’가 ‘소리 없는 출애굽’(Silent Exodus)이라고 말한 현상과 비슷하다. 즉, 미국 내 한인교회 2세대들이 고등학교 졸업을 전후로 70%가 교회를 떠났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서 90%가 교회를 떠났다고 하는데, 지금 한국의 다음세대의 교회 이탈 속도가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이 말한 ‘박물관 교회’(Museum Church)가 되는 일은 머지않은 일이다. 젊은 세대의 탈종교화, 특히 교회의 미래가 될 다음세대의 급격한 교회 이탈은 왜 이렇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여러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한국교회의 이미지가 불신자들에게 너무 안 좋아진 것에서 찾고 싶다. 이는 비종교인에게 종교를 믿지 않는 것과 무관하게 가장 호감을 느끼는 종교를 물은 결과 ‘개신교’가 10%의 비율로 불교, 천주교 등 주요 종교들 중에서 꼴찌를 한 것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개선을 위해서는 교회의 미래인 다음세대에 전략적인 집중을 해야 하며, 그들을 복음으로 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학자 매튜 팍스(Mathew Fox)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는 전통적으로 볼 때 교회는 성경 안에서 보여 지는 두 가지 은총 중 ‘붉은 은총’(red blessing)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즉, 교회 중심의 신앙을 말하며, 죄와 용서에 집중한 것이다. 물론 붉은 은총이 없는 기독교는 없다. 그러나 매튜 팍스에 의하면 기독교는 또 하나의 은총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푸른 은총’(blue blessing)이다. 이 푸른 은총은 기독교인의 신앙의 관심을 사회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인간이 더불어 사는 것, 창조질서를 보존하고 회복하는 것 등에 대한 관심이다. 오늘의 다음세대가 주목하고 있는 바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건물을 짓는데 전념하던 패러다임을 ‘붉은 은총’과 ‘푸른 은총’으로 무장된 다음세대를 길러내는 데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사사기 2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이스라엘의 다른 세대가 여호와 신앙을 버렸다고 한다(삿 2:10). 여호수아가 위대한 믿음의 용장이었지만, 다음세대를 향한 신앙전수에는 실패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런 실패의 아픈 기사를 남겨놓으신 것일까? 필자의 생각에는 부모와 교회가 세속주의를 거부하고 신앙의 전승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다음세대를 향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 아닐까? ‘다음세대 부흥을 통한 한국 교회의 회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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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07-09
  • [강규철 장로] 예전의 목사님, 장로님이 많이 그리워집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저는 가끔씩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보며 배워 왔던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생활을 왜 나는 본받지 못하는지 안타까움에 현대 교회의 모습과 신앙관을 예전의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것과 비교해 보면서 옛날이 그리워지고 또한 아쉬움이 넘칩니다. 1. 목사님들의 삶은 교회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예전의 목사님들은 아주 엄격하고 매사에 철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삶은 빈틈이 없었으며 성경에 따른 생활을 강조하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맡긴 삶이었습니다. 먼저 이들은 금전을 초월하여 살았습니다. 대체로 목사님 가정에는 식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청빙의 조건에 사례금의 항목이 없었습니다. 그냥 교회 형편에 따라 주는 대로 받았습니다. 보통 쌀 몇 가마가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사택은 보통 한 두 칸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섬기게 된 것 만도 감사하며 시무하셨습니다. 그리고 외부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 받은 사례를 교회에 다시 헌금하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는 그것이 본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이지요. 설교 시간에는 예화가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설교시간 내내 성경구절을 찾고 읽게 하였습니다. 보통 한 시간 이상이었습니다. 옛날 학생신앙운동 수양회에서 밤새도록 설교하신 목사님도 기억납니다. 자고 싶으면 자라시면서 저녁설교를 다음날 새벽까지 하신 것입니다. 저는 자라면서 한 번도 아버님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대화를 나눠본 기억도 거의 없었습니다. 가정보다 교회가 우선이었기에 자식들을 돌보는 것은 어머님의 몫이었습니다. 평상시의 모습은 새벽부터 의관을 정제하고 성경 읽고 기도 하고 심방하시고 설교 준비하시고 그리고 교회가 어려우면 기도원에 가서 작정 기도하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이 분들의 삶에는 하나님, 기도, 말씀, 전도 등이 전부였습니다. 취미생활이란 말을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이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결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2. 제가 기억하는 장로님의 모습은 인자한 어머님의 모습입니다. 예전의 장로님들은 많은 고난을 감내하며 묵묵히 교회의 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어머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려운 목회자의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기도 어려운데 자녀들을 양육시켜야 하고 교회와 목사님과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느라 지쳐있는 어머님의 모습이 바로 예전의 장로님들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수시로 목사님 가정에 가셔서 혹시라도 먹을 양식이 떨어졌나 살피시고 부족한 것을 채우시곤 했습니다. 항상 교회에 들리시어 살피시며 청소도 하며 때로는 종도 치셨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대부분 장로님들께서 철야기도를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교인들의 눈에 비친 장로님은 권위와는 거리가 먼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습니다. 여름 성경학교를 하면 정말 맛있는 것을 장로님으로부터 많이 대접 받았습니다. 제가 마음에 항상 새기며 존경하는 장로님은 전교인의 아이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시고 주일에 만나면 안아주시며 축복기도를 해주셨는데 이는 아마 평생을 지나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놀라운 것은 장로님들이 목사님으로 부터 많은 야단을 듣기도 하시고 심지어 설교시간에도 꾸중을 듣기도 하셨는데 아무도 그에 대해 반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라 생각하시고 항상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3. 오늘의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을 봅니다. 오늘날에는 귀족목사님이란 말이 생겼답니다. 청빙을 하면 사례금, 사택 규모, 심지어 차량 종류까지 협상의 내용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예산으로 모든 것을 보장해 주고 있는데 부흥회, 외부설교, 결혼주례 사례금을 고액으로 챙기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설교준비는 인터넷으로 짜깁기를 하고 말씀 중심보다는 예화로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을 좋아 합니다. 심지어 설교를 인문학강의로 하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시무하고 있는 교회보다 더 큰 교회에서 요청이 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납니다. 무엇보다 목사님은 성도들의 눈에 저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에는 장로님들도 교회헌법에 있는 권한을 최대한 가지고자 합니다. 목사님을 청빙할 때 장로님들은 후보 목사님의 모든 조건을 살펴보면서 마치 직원을 채용하는 분위기를 가집니다. 그러다보니 목사님의 학벌이 청빙의 조건이 되며 마치 삯꾼 같은 느낌이 나게 되고 힘이 있는 장로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게다가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그 모든 책임을 목사에게 전가합니다. 현대 교회에서의 장로님의 권위는 정말 대단합니다. 공동의회라는 최고 의결기관이 있는데도 당회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합니다. 이 당회에는 파당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며 회의 때는 마치 국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은 장로가 되길 위해서 모든 것을 던지기도 하고 장로 직분이 쟁취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장로투표에서 떨어지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집사 시절에 그렇게 열심히 섬기고 낮은 곳에서 봉사하며 헌신하던 분이 장로가 되면 더 권위적이고 고집불통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이 장로들을 야단치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한번쯤은 현재의 우리의 모습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가를 냉정히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교회의 영적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우리들에게 깊은 반성이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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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6
  • [탁지일 교수] 신천지 건축 블랙코미디
    도무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신천지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144,000명이 완성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천지 신도들이 육체영생을 이루고, 세상을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날이 곧 온다는 얘기다. 실제로 신도수가 거의 144,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신천지는 요즘 왜 그렇게 건물 건축(매입)에 집착하는 것일까? 144,000의 날이 못 미더운 것인가? 아니면 그날이 와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반증하는 것일까? 144,000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자신들 소유가 될 터인데, 왜 이렇게 건물 건축(매입)에 힘을 쏟는 것일까? 의심할 여지없이, 144,000은 종교사기인 것이 분명하다. 요즘 신천지는, 144,000은 단순 신도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들”의 숫자라고 말을 바꾸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이 황당한 주관적인 판단 기준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신천지 교리는 지속적으로 변개되고, 144,000의 그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하지만 신도들은 144,000의 날을 위해, 가족의 품을 떠나, 끊임없이 거리로 내몰려, 피곤하고 지친 삶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물론 이만희씨와 후계자 김남희씨는 가평의 호화 별장에서 오늘도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들을 보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블랙코미디가 유행이라고 한다. 신천지의 최근 모습은 단연 종교적 블랙코미디의 초절정을 보여준다. 교리의 변개와 함께, 신천지의 또 다른 애처로운 모습은 부동산에 대한 집착과 탐욕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곳곳에 집회소 마련을 명분으로 부동산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부산에서도 거액을 들여 연제구에 안드레지파 본부 건물 마련에 혈안이 되어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허구적인 144,000 교리의 실패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다. 신천지가 몰락해도 재산(돈)은 남기를 바라는 탐욕 때문일 것이다. 둘째, 나름 정상적인(?) 사회적 노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팽배한 한국사회에, 자신들이 (간판도 붙이지 않는) 비밀조직이 아니라, 평범한 종교단체인 것을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144,000의 날까지 비밀조직(모략)을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신도들의 효과적인 통제가 목적이다. 계속되는 모략포교로 인해 신천지 신도들은 정신적으로 지쳐있고, 또한 거짓말 스트레스로 인한 낮은 자존감과 불안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제 지친 신천지 신도들을 다독거릴 번듯한 건물이 필요한 때가 된 것이다. 신천지는 144,000의 ‘단기전’이 아니라, 나름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전’을 준비하는 양상이다. 그렇기에 최근 그토록 부동산을 탐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영생과 144,000을 주장하는 신천지의 블랙코미디가 애처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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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11
  • [김충만 목사] 부모는 자식에게 카피된다
    30년 넘게 사역하면서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는 걸 본다. 한 쪽은, 좋은 직장에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크게 보아 평범한 중산층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자식들은 자기 부모를 대단한 부자로 알고 살아간다. 이런 배경에는 부모가 좀 허세를 부린 부분을 부정할 순 없다. 사실 부모가 다 알아서 해 주니까 자식 입장에선 그리 느낄 만도 한 것 같고. 그래서 일까, 일찍 유학을 가서 부모가 놓아준 징검다리를 밟고 인생스텝을 별 어려움 없이 밟으며 성장했다. 다른 한 쪽은, 내가 알게 된 것만으로도 분명 진짜 부자다. 그런데 자식들에게는 일체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 등록금 마련키도 만만찮다는 느낌이 들도록 자식들을 키운다. 해서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를 하게 해 등록금에 보탤 정도다. 물론 자식들도 유학을 보냈지만 자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근면한 것처럼 사는 게 아니라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참 검소하게 살아간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자식들이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다들 어엿한 청년이고, 또 결혼해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럼 이 두 쪽 부모에게서 자란 그들의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앞 부모를 둔 자식들은 부모가 다 알아서 모든 걸 공급해 줬기 때문에 성인이 된 지금도 부모가 주는 부스러기로 살아간다. 거의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면서도, 곧 죽어도 폼 잡고 산다. 나이도 들어 신입사원으로는 안 어울리고, 학위를 인정받아 학교나 직장에 들어가기에는 졸업한 학교가 좀 그렇고, 한국 기업문화와 다르게 외국생활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적응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 믿을 부모가 있기에 조금만 수틀리면 더 출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후자의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들은 스스로의 힘과 역량을 더해 자신의 날개로 비상하는 연습을 해 왔기 때문에 뭐가 되었어도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에게 의존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설령 부모가 조금만 더해준다 해도 그걸 기반 삼아 더 멀리 더 높이 날아오른다. 이 때문일까? 난 지금도 오늘의 부모를 보면 내일의 자녀가 조금은 보이는 것 같다. 부모는 자식에게 늘 카피되고 있으니까.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 교회하며 사는 것 같다가도 결정적일 때 “지금은 공부해. 그리고 교회는 이 다음에 합격(성공, 입사, 결혼)한 뒤에 해도 늦지 않아”라고면 자식은 이리 생각한다. “아, 우리 부모가 결국 제일 좋아하고 숭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S.K.Y이고 성공이구나. 결국 하나님도 이것 때문에 붙들고 있을 뿐이구나. 하나님도 별 거 아니네!” 그러니 그 부모 밑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배움은 가까이에 있다. 스승 또한 먼 곳에 있지 않다. 내가 부모이기를 포기하면 자식의 미래는 없다. 자식은 지식으로, 교과서에서, 학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고 보여줄 게 없다면 그 자식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믿음과 신앙을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어야 하고, 그게 자식의 미래를 자라게 하는 양식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은 물론 20년 후도 소망스러울 테니까. 자식은 A/S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나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것처럼 지금 바른 원본으로서의 부모됨이 아니면 이미 카피되어가고 있고 자식들의 모습을 되돌릴 길이 없다. 부모는 자식의 현재이자 미래다. 부모를 보면 자식을 알 수 있고, 자식을 보면 부모가 보인다. 당신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카피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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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9
  • [김양현 목사] ‘아버지 됨’을 생각하다
    [그러므로 먼저 인간적인 ‘아버지 되심’이 있고 그 다음에 소위 어떤 신적인 ‘아버지 되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먼저 참되고 본래적인 ‘아버지 되심’이 하나님께 있고, 그 ‘아버지 되심’으로부터 우리가 인간들 사이에서 ‘아버지 되심’이라고 아는 것이 유래한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모든 자연적인 ‘아버지 되심’의 근원이다.] - 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중 칼 바르트가 사도신경 첫 구절을 강해하면서 한 말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에 대하여 논한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때,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와 연상된 이미지로 생각합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투사’라고 했습니다. 프로이트의 주장에 의하면 결국 신이라는 것도 우리의 의식이 투사한 결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가 본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인간과 유사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는 바를 투사한 결과로서 신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르트가 말한 바는 이를 완전히 뒤집습니다. 우리가 영향받은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하나님께 투사하는 대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아버지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의 ‘아버지 상’이 교정되어야 마땅합니다. 물론 이러한 교정은 하나님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만나고 그 아버지를 통해 교정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했지만, 여전히 권위적이고 아니 더욱 위선적인 아버지가 되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 제법 많습니다. 특히 교회의 중직자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래서일까요? 목회자나 장로, 안수집사 등 중직자 자녀들 중에 적잖이 아버지의 모습에 실망하고 오히려 신앙을 등지는 경우를 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아니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자신 안에 체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르트가 지적하듯이 오히려 자신의 본래적 ‘아버지 됨’을 하나님께 거꾸로 투사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권위적이고 억압적이고 닫힌 구조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함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탈 권위적이며, 사랑의 총합이며, 섬김과 헌신이며, 자기 내어줌의 극치입니다. 그 ‘아버지 되심’에서 ‘아들 됨’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의 완전한 표본이 삼위일체 안에 있습니다. 진정한 ‘아버지 됨’에 의해 참된 ‘아들 됨’이신 예수가 나오셨고, 그 분은 아들로써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중적 위치를 가집니다. 모든 아버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아들들’입니다. 그 ‘아들’됨을 잘 이룬 자가 또한 ‘아버지 됨’을 이룹니다. 5월입니다. ‘아들’인 ‘아버지’, ‘딸’인 ‘어머니’의 위치를 회복하여 사랑과 은총이 가득한 가정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기 전에 하늘 아버지를 경험하고 변화되어야 함을, 그러한 사람이 참된 ‘아버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만들어 가는 5월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5-05-14
  • [김영곤 교수] 암을 치료하는 방법
    최근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망원인의 1위는 인구 10만 명당 149명의 사망률을 나타내는 악성신생물(암)이다. 암이란 학술적으로 세포분열의 주기가 조절되지 않아 분열이 계속되는 질병이다. 암세포가 인체의 장기에 고착되어 다른 부위보다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 이상조직을 악성종양 즉 암이라고 한다. 암 발생의 주요 원인은 방사선이나 전자기파와 같은 높은 에너지의 광선이 세포핵의 유전자와 충돌하여 암세포를 유발하는 물리적 요인과, 높은 활성화 에너지를 갖는 발암물질이 세포내에 흡수되어 암세포로 변형되는 화학적 요인 등이 있다. 대부분의 암세포는 면역체계에 의하여 소멸되지만 살아남는 암세포는 빠르게 증식하면서 부피가 팽창되어 주변의 장기를 압박한다. 이러한 압박은 장기에 필요한 혈액과 물질의 이동을 제한해서 생리적 기능을 약화 또는 상실시킨다. 암을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외과적인 수술로 제거하는 방법, 방사선을 쪼여서 괴사시키는 방사선치료법, 종양조직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약물을 투여하는 항암치료법, 특정 암 조직에 관여하는 단백질을 주입하는 면역치료법, 종양조직으로 통하는 혈관들을 폐쇄하여 종양조직을 석회화시키는 혈관색전술, 종양조직에 섭씨 45도 정도의 열을 가하여 선택적으로 암조직을 죽이는 온열치료법, 종양조직과 주변 조직을 높은 온도로 가열하여 단백질을 변성시키는 열치료법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법들은 모두 완전하지는 않아서 후유증이나 합병증이 발생하기도 한다. 성경에도 악성종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무엘상 5장에는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긴 여호와의 궤가 머무는 도시마다 독한 종기 즉 악성종양의 재앙이 발생하여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재앙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사장과 복술가들이 가르쳐 준대로 여호와의 궤를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되 속건제로 드릴 금 독종과 금 쥐를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수레에 실어 함께 보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는 두 암소를 보고 독종재앙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레위사람이며 아론의 후손인 벧세메스 사람들은 법궤를 돌려받고 제사의 방법을 몰랐는지 수소 대신 암소로 번제를 드렸고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크게 살육을 당하였다. 최근에 보도되는 뉴스들 중에도 악성 종양과 같은 사건들이 눈에 띈다. 우상의 위치를 차지하려는 금전 만능주의가 이권 청탁이나 납품 비리와 같은 사건들을 야기하면서 우리 사회를 암세포처럼 병들게 하고 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사건들로부터 자유롭지가 않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사사시대에 제사장직을 맡았던 벧세메스 사람들처럼 사명을 모르고 떠나 살다가 재앙을 당하는 상황과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도들을 떠나면 육신의 생각을 따라서 살게 되고 결과적으로 세상 사람보다도 못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과 받으실 찬송을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기 때문에 경고를 통해서 성도로 하여금 생명과 평안을 회복할 기회를 주신다. 대부분의 암 환자는 다른 질병과는 달리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는 축복을 받는다. 지금 우리에게는 속건제를 드려서 독종재앙을 면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잘못을 깨닫고 오분의 일을 더하는 속건제를 올바르게 드릴 때에 암처럼 병들어가는 사회의 면역체계가 다시 활성화되고 성도의 삶이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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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04-30
  • [김혜경 사무총장] 핵발전이 없어도 에너지 자립이 가능하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를 겪으며 한국Y운동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단기적으로는 노후핵발전소 폐쇄를 이루어 다가올 치명적인 사고를 예방하고, 핵발전과 방사능의 위험성을 대중에게 알려 시민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탈핵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미래세대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된 사회를 물려주어야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핵발전을 통해 생산하던 대량의 에너지는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선진 에너지 자립마을을 탐방하는 연수에 참가하게 되었다. 탐방지역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작은 부거란트 주 남부의 귀씽마을, 제2차 세계대전이후 피해로 산업시설이 전무하고 인구의 대부분이 노인이며 가장 가난했던 마을에 시장의 헌신을 통해 재생에너지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에너지비용이 유출되지 않고 지역에 머물게 되고, 에너지기업이 유치되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어 세계에서 에너지전환과정을 경험하고자 매년 3만명이 귀씽모델을 찾아온다. 농축산부산물과 폐목재를 활용한 바이오매스, 바이오가스, 펠렛, 태양열을 통해 열과 전기를 생산하고 태양열지역난방시설을 적극 활용하여 석유고갈과 기후변화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농가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얻었다. 다음은 에너지절약을 위한 최적의 에너지이용을 위해 활약하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 정부와 에너지컨설팅기업의 협업사례를 보았다. 주 정부 담당부서가 별도 조직 운영되고 있으며 에너지컨설던트가 기관과 기업 그리고 시민에게 연간 3,000건의 현장 컨설팅을 한다. 주된 내용은 에너지 기기 구입 및 관리, 건축 등 소비자가 재생에너지 생산,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최적화)를 하도록 지원한다. 독일에서는 2000년 재생에너지법 제정되고, 2004년 재생에너지법이 개정(재생에너지 생산 시 이윤 4-8% 지원)되면서 폭발적으로 태양광이 보급되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시민태양광발전소가 세워졌다. 후쿠시마 사고 후 독일정부는 원전정책을 탈핵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재생에너지법을 강화하였는데 주요내용으로 공공건물 옥상에 임대료 없이 태양광설치를 가능하게 하여 2013 현재시민 에너지조합은 888개이다. 지역의 에너지 전환을 목표로 활동하는 사회적기업인 독일의 징엔 솔라 콤플렉스를 방문하였는데 현재 개인, 기업, 지역에너지회사, 정당 등 1,000명이 주주로 투자, 투자금액은 1억, 최소 4%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 주요 프로젝트는 지붕과 벽면, 나대지를 활용한 마을 하천 이용 생태적인 소수력발전소, 풍력발전소, 우드 펠렛 난방과 바이오 에너지 마을을 매년 1개씩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견학한 곳은 세계적 환경도시로 이름난 프라이부르크 시의 보봉 생태마을이었다. 1970년대 반전·반핵운동은 환경보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보봉 생태마을은 병참시설을 생태주거단지로 개조한 신흥주택지인데 1992년 기존주민(SUSI/주지)을 포함하여 전문가와 함께 구성된 보봉포럼과 시의회, 시정부가 협업하여 ‘쇼셜 에콜로지주택지’ 라는 개념하에 주택개발의 프로세스를 개발하였다. 주요내용은 도보와 자전거교통, 대중교통 절대적 우선과 큰 나무 보존 및 주택지 비오톱 보호, 다양한 사회계층이 입주, 녹지로의 우수한 접근성, 저에너지 건축양식과 지역난방이다. 이같이 주택과 사회적 가치가 접목된 생태적으로 건강한 저탄소 도시가 되어 하루 평균 약 6,000명이 찾아오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친환경 저에너지 주택단지의 모델이 되었다. 한국의 에너지정책과 비교하여 시사점을 찾아보았다. 먼저 시민의 힘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핵발전소 건설을 완공했음에도 국민투표를 통해 여론을 확인하고 가동을 하지 않고 즉시 폐쇄하였다. 독일 또한 후쿠시마 사고이후 선거를 통한 국민의 여론이 작용하여 원전정책에서 탈원전정책으로 전환하여 노후원전 8기를 폐로하고 2022년까지 나머지 9기를 폐로하여 탈핵을 선언하도록 한 국민의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시민의 힘만으로 가능한가? 시민의 여론을 집중시키고 선도 할 수 있는 관련정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우선 전기료의 적정화가 시급하다. 우리나라의 전기료가 값싼 이유는 한전이 독점운영하면서 운영손실분을 정부가 보조하기 때문에 결국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또 주목할 점은 온실가스를 감소하려는 자발적인 참여가 일어날 수 있는 권한이 시민에게 주어졌고 시민참여를 통해 정책이 입안되는 민관거버넌스로 재생에너지정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재생에너지생산에 따른 보조금 지원 정책은 개인에게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게 되어 실효성을 담보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재생에너지 자립은 지역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았다. 키워드는 “지역순환”이다. 지역에서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거나 자립하고, 개인이나 소규모 재생에너지발전으로 생산하여 지역이 사용하고, 지역일자리를 창출한다. 즉 지역주민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사고의 전환도 필요하다. 에너지는 반드시 생산하고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고의 에너지는 에너지가 필요 없는 것임을 볼 수 있었다. 에너지절약과 효율화(최적화)가 더욱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연환경을 잘 보전하면서 이를 충분히 활용하는 생명존중의 가치를 볼 수 있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5-04-16
  • [가정호 목사] 말씀의 부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매년 경험하는 부활절, 이젠 부활절이 주는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되새김질 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말씀의 부활이 없이는 안 된다는 점을 논하고 싶다. 말씀이 선포되지만 성도들의 삶이 안 바뀐다고 난리인 시대이다. 거꾸로 그럼 말씀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나는 바뀌었나? 만일 내가 안 바뀐 그 말씀으로 성도를 바꾼다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전 존재를 바꾼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하기에 유익한 말씀의 부활이 절실하다. 이번 부활절을 기념하면서 말씀의 부활을 외쳐 본다. 말씀 사역자라면 성경전체를 30분 만에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와 신구약 중간기,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서를 5분 정도씩 할애해서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그렇게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분 만에 성경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럼 어쩔 텐가... 훈련되지 않으면 버벅거리고 막상 지쳐서 포기한다. 줄이지 못하면 늘리지도 못하고, 늘어진 것을 줄이지 못하면 늘인 것도 허당일 수 있다. 교리와 신학은 죽을 때 까지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역사적 전통을 지켜온 바른 신학을 더 연구해야 한다. 그보다 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물론이고 성도도 동일하다. 짧게 핵심을 꿰고 있어야 한다. 이게 준비 안 되면 창조적인 스토리가 생기지 않는다. 거룩한 상상력이 전혀 일어 날수 없다. 그뿐인가? 성경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는지 알기위해 주도면밀하게 성경 각 권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서는 과거사건을 스토리로 전개하고 있다. 스토리를 정확하게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가서는 현재의 경험을 노래로, 시로 드러내고 있다. 거룩한 정서를 가지고 묵상해야 한다. 선지서는 미래에 일어날 기대를 설교로 메시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대는 영원한 현재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관통한다. 그러므로 시간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400년 침묵기에 일어난 역사를 알아야 복음서를 이해 할 수 있다. 400년 침묵기에 일어난 헬라와 로마 그리고 100년간의 이스라엘 독립기를 이해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열심당과 에세네 사람들과 율법,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하나님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히브리인에게, 로마인에게, 헬라인에게, 그리고 오고 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이야기를 꿰뚫어 설명해내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아무 퍼즐이나 하나씩 꺼내다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만다. 결국 횡설수설이 되고 만다. 성도들은 오리무중이다. 퍼즐 하나의 이야기를 아무리 잘 이야기해도 그 다음 퍼즐과 아귀가 맞지 않으면 꽝이다. 전체를 연결하여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다음에야 비로소 퍼즐의 오묘함이 드러나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순서를 잘 맞춰서 보여줘야 한다. 아무쪼록 어리바리 하다가 사역과 인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리에서 든든하게 사역하다가 주님 뵈옵는 일이 일어나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황홀하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하나님, 거룩한 쾌락과 희락의 세계로 이끄시는 그 하나님을 지루한 하나님, 따분한 하나님, 재미없는 하나님, 매력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감동과 충격을 주는 하나님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 반응 없고 대답 없는 하나님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안내자가 길안내를 잘못하면 해고되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로 자신을 부리는 일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금년 부활절에는 말씀사역자들 모두에게 말씀의 부활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종들이면 좋겠다.
    • 오피니언
    • 정론
    2015-04-02
  • [박 철 목사] 크기에 대한 성찰
    오늘날 개신교인, 특히 개신교 목회자와 개신교 내의 평신도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존경은 고사하고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개신교의 꼴찌를 예상하는 일은 이제 내기거리도 안 되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왜,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담한 심정이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책임 또한 크기는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청지기의 직분을 맡고서도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가 되지는 않았는지, 오늘 우리 개신교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그 책임을 통감하여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크기'에 대한 집착, 남들보다 높아지고 커지는 것을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왔던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겠다. 소위 '큰 목사님'과 '큰 스님'을 모시는 기준은 사뭇 다르다. 목회자의 성공과 실패는 그의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지향과 실천으로부터 평가되지 않고, 오직 하나의 기준, 곧 교회와 회중의 '크기'로 평가되기 일쑤이다. 내면의 크기가 큰 목사가 '큰 목사님'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교회의 크기를 키워놓으면 '큰 목사님'으로 불리는 종교, 그것은 이미 종교이기를 포기한 종교상인의 집단이라고 밖에 달리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목사직을 성직이 아닌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로 보는 세속의 시각을 두고, 남을 탓 할 이유가 없겠다. 반면 불교의 경우 큰 절의 스님이 ‘큰 스님’이 아니라, 정신의 크기가 큰 스님이 ‘큰 스님’으로 불린다. 성철 큰 스님이 ‘큰 스님’인 이유는 그분이 큰 절의 주지라서가 아니라, 그 정신의 크기에 있어 큰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 목회자의 경우에는 너나할 것 없이 외형적인 '크기'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 목회자들이 모여도 온통 '크기'에 관한 얘기뿐이다.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냐, 올해 몇 명이 새로 등록 했냐, 어떻게 전도(광고) 할 것이냐"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런 관심에 동참하지 않거나 다소 비판적인 거리라도 취할라 치면 “교만하다, 복음적이지 않다”는 비난을 받으며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처럼 정신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에 들어서기보다 외형적인 ‘크기’를 키워 남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자기만족을 누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돌아본다. 건강한 아이가 키와 몸무게가 성장하듯, 건강한 교회가 적절하게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장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조치를 취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크기에만 집착하여 아이가 100 킬로, 200 킬로, 500 킬로그램이 되고, 심지어 메가톤급 아이로 성장해도 마냥 좋다고 박수치는 것은 크기에 대한 집착이 빚어내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성장은 크기에 집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의 근본정신을 꼭 붙들고 그것을 잃지 않고 살아내려는 굳은 의지와 진실한 믿음의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강이 우선이지 성장이 우선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교회성장을 위해 ‘꼼수'를 부려서는 머지않아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빈곤한 정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 영혼으로는 깊은 바다와 같은 성숙과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 크기에 집착해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는 개신교의 부끄러운 자화상 아니겠는가.
    • 오피니언
    • 정론
    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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