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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철 목사] 무례한 기독교 탈피하기
    몇 주 전 한 지인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였다. 조용히 식사하는데, 갑자기 단체 손님이 들이 닥쳤다. 들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목사님, 권사님, 집사님...” 식당에는 이미 몇 명의 손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점령군들은(?) 다른 손님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 순간에 소수자가 되고 말았다. 그분들의 기세에 기가 죽고, 이들의 소리는 식당에 전세를 놓은 듯 더욱 커졌다. 이윽고 음식이 들어오고, 목사님이 일어서더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거센 경상도 사투리에 큰 목소리로 말이다. 각종 수식어를 붙인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성령충만’을 말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을 대적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참 길게도 하셨다. 사람들은 목사님의 간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멘’이라는 추임새를 계속해서 넣었다. 나도 목사이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불편해진다. 나는 대중음식점에서 기독교인이 단체로 들이닥쳐서는 예의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면 좌불안석이었다. 게다가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며 기도를 할 때면 그분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불교신자들이 식당에 승려들과 들이닥쳐서는 서로 합장을 하고,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하고, ‘반야심경’ 같은 불경을 외운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어떨까? 아주 불편할 것이다. 나는 공공장소에서의 기도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찰스 킴볼(Charles Kimball)은 그의 책 <종교가 사악해질 때>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신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그것이 이웃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 종교는 이미 타락해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확신해도 된다.” 얼마 전 식당에서 기독교인들이 식사기도를 하다 신천지로 오해되어 경찰이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다른 경우는 기독교인들이 식당에 들어오니까 식당주인이 집안 일이 있어서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손님 받기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해 받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대중식당에서 대표기도는 하지 말 것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묵상기도를 하고 식사할 것을 말이다. 정말 필요해서 기도를 해야 할 경우라면 옆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작은 소리로, 짧게 기도할 것을 말이다. 박성철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는 <한국교회 내 기독교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연구>라는 논문의 결론에서 로마서 12장 14-21절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타인까지도 품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다.” 코로나 19 이후 기독교가 이 사회 가운데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정말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생명의 도’라 불리는 기독교가 과거에 당연히 해왔던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린 유럽의 교회들처럼 화석화의 길로 들어설 것 같은 두려움이 크다. 어항 안의 물고기처럼 사회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이웃사랑’과 ‘섬김’(diakonia)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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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5-12
  • [노상규 목사] 딱 좋은 때
    코로나19(COVID-19)로 온 세상이 요란하다. 많은 분들이 죽어가고 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확진자의 숫자를 대하며 세계가 혼돈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요양시설의 노인들과 시신을 버려두고 달아나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화도 나게 하지만, 그 상황을 마주한 사람들의 공포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생필품 사재기를 하는 뉴스를 접하며 성숙한 우리 국민들을 다시 돌아보기도 한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운동을 한창 펼치는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하루 종일 마스크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공적마스크 판매처인 약국 앞에 장사진을 치게 하는 이해 못할 장면을 대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온 국민과 온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본격적으로 맞으며 많은 교회들이 선제적으로, 오프라인 예배를 잠정 중단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 기간이 자꾸 길어지며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정부시책을 준수하며 온.오프라인 예배를 겸하는 교회들도 있다. 한편 온라인예배를 드릴 수 없는 소규모교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주일 오전예배 한 번만 드리기도 한다. 성도들의 친밀한 식탁 교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급기야 정부가 교회를 타켓으로 삼은 냥하며 오프라인 예배 자제를 권고하고, 예배시간에 공무원이 출동하여 점검하고, 확진자 발생 시 구상권 청구 운운하며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리 저리 어려운 상황들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금이 딱 좋은 때이다. 평소와 달리 교회봉사와 다양한 만남, 대외활동들을 자제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개인적인 시간을 보다 많이 누릴 수 있다. 무엇을 하기에 딱 좋은 때일까? 첫째, 말씀을 가까이 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성경읽기, 묵상, 성경필사 등으로 말씀의 깊이 있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때이다. 필자는 근래에 한문성경붓글씨 필사에 집중하고 있다. 예전에 한글성경필사, 영어성경필사에 이어 하는데, 그 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다르다. 한자 한자 뜻을 새기며 화선지 위에 붓을 옮기며 성경을 필사하는데, 때로는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직접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며 성경필사의 맛을 알기에 필자는 성도들과 지인들에게 성경필사를 자주 권하고 있다. 둘째, 기도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기도의 제목들이 뉴스로 수 없이 쏟아지고 있다. 코로나19사태 종식을 위해 힘쓰는 정부, 의료진, 확진자와 가족들, 선교지의 선교사들과 영혼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교회와 리더십들... 같은 시간대에 함께 모여 기도할 형편이 안 되는 교회의 성도들은 시간 나는 대로 교회를 찾아 코로나 대응수칙을 지키며 조용히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기도를 하기에, 개인 기도훈련을 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넷째, 가족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성도들은 주일 예배시간에도 가족이 모니터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평소와 달리 가족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며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이 때 평소 바쁨을 핑계로 실천하지 못한 가족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마지막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기독교인의 힘은 어려움의 때에 나타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도 조용히 어려운 이웃들의 먹거리와 생필품을 나누고, 필요를 채우는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음을 안다. 어려울 때 함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배가되어 나타난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이 때가 우리에게는 딱 좋은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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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4-10
  • [탁지일교수] 이만희의 목소리
    지난 3월 2일 이만희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이만희의 목소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목소리’에 더 집중해야 했다. 이만희가 뭐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을 보며, 뭔가 잘 못됐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평소에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는데, 이날은 이만희의 어눌한 목소리를 막는 한 피해자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메가폰 목소리가 거슬렸다. 이만희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집중했어야 했던 것은, 이만희의 목소리가 아니라 딸을 신천지에 빼앗기고 애통하게 울부짖던 피해자 ‘어머니의 외침’이었다. 우리가 이단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교회와 가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이단대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단에 빠진 이들을 모두 구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만희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애타게 딸을 찾던 어머니의 모습은, 신천지의 사기행위에 속아 집을 나간 딸을 찾기 위한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코로나 전염병이 신천지 신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천지에 속한 딸의 안전과 행방을 알려달라고 외치던 피해자 어머니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단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 이단문제는, 피해자의 눈을 통해 보고 귀를 통해 들었을 때, 그 본질과 위험성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이단문제는 고상한 교리적인 논쟁이 아니고, 이단문제는 교권 장악을 위한정치도 아니며, 정적 제거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이단문제는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거룩한 싸움이다. 한편 신천지에 빠진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되찾아오려는 가족들의 노력을 신천지는 소위 ‘강제개종’이라고 부른다. 적반하장이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정체를 숨기고 다가와 속이고 데려간 신천지가 ‘강제개종’의 주범이다. 얼마 전 법원은 이러한 신천지의 “사기행위의 기망이나 협박행위와도 유사”하다고 그 위법성을 판단했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신천지=거짓말=위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이미 교회가 알고 있었던 신천지의 정체를 이제 사회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게 되었다는 점은 일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외신들마저도, 신천지의 거짓말과 위장이 사태를 키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거짓말’과 ‘위장’을 교리적으로 합리화한 종교단체는 없다. 신천지의 2인자였다가 최근 신천지의 정체를 폭로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김남희의 표현처럼, 이만희의 신천지는 “종교사기 집단‘일뿐이다. 희망과 공포가 공존하는 어수선하고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건강’과 ‘안전’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신천지는 조직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도 신천지 신도들이 거짓과 위장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다. 만약 신천지 신도들도 국민이라면, 120억 원 기부가 답이 아니다.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한 진정성 있는 협조가 없을 경우, 신천지의 몰락을 위해 교회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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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3-16
  • [한석문목사] 나에게 연민을 느낄 때
    주일 저녁이 되면 목회자는 탈진을 경험합니다. 많은 시간 공들여 준비한 말씀을 한번에 쏟아 부은 후에 찾아오는 허탈한 감정인지도, 아니면 채 여물지 못한 말들을 주님의 이름을 빌어 쏟아낸 후에 찾아오는 정직한 가책인지도 모릅니다. 그 허탈과 가책의 시간이 이제는 제법 되어 무디어질 때도 되었건만, 오히려 그 석연치 않은 감정은 잿빛 만성으로 굳어져가는 느낌입니다. 새벽 예배를 마친 어느 날 동백섬을 따라 걷다가 문득 셈을 해보았습니다. “1년이 52주이니까, 주일 설교 52번, 찬양예배 52번, 수요예배 52번, 심야기도회 52번, 새벽기도회 350번 정도, 그러면 1년에 설교를 몇 번 하는 거지? 그리고 목회를 16년 했으니까 모두 합치면?” 소스라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설교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지만, 그렇다고 모세처럼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실시간으로 받아 적은 말씀이 아닌 바에야 그 설교에 목회자 개인의 신앙적 혹은 신학적 소견이 배제될 리 만무합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많은 설교를 쏟아냈을까?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설교를 해내야 할까?” 얕고 지저분한 우물과 그 바닥에 흙먼지 앙금처럼 가라앉은 참상이 흔들리는 필름처럼 지나갔습니다. 4세기의 에바그리우스(Evagrios)는 말했습니다. “수도자는 모든 것에서 떠난 사람이며 동시에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다.” 물론 세속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으며, 교우들과 부대껴 살아야 하는 목회자로서 수도자들에게나 있을법한 신비(神秘)를 기준 삼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잔인한 일인지 압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따로 수도자를 양산해내지 못하는 개신교(Protestant)의 안타까운 현실에서는 목회자에게서 수도자로서의 삶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에서 떠나 있지도 못하고, 그래서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많은 설교를 쏟아놓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섬뜩한 일이며, 하나님께 미안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늘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았던 헤지카스트(hesychast) 아르세니우스(Arsenius)는 자신의 책 「교부의 생애(Lives of the Father)에서 자신을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 은수자「隱修者(hermit)」가 되게 만들었던 콘스탄티노플 궁전에서의 하나님과 단 한 번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주여,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사람들 곁에서 떠나거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 성찰이 담겨있지 않은 잡다하고 분주한 만남들보다, 한적한 골방을 찾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정직한 시선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해 기운 교회당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보면, 지난하게 반복되어온 묵은 고민도 덩달아 깊어집니다. 모든 것에서 떠나 있지 못한 까닭에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즉 잡다하고 지루한 집착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하며 그런 가운데 주일이 다가오면 매번 조급해하고, 허겁지겁 성경을 넘기며, 어설프게 파악한 몇몇 구절을 조합해 건조한 설교를 만들어내는 삶에 이제는 스스로 연민(憐憫)을 느낍니다. 잠시라도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독방을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했으니, 고독이 지배하는 곳, 그래서 하나님만이 바라보이는 곳을 찾아 깊은 침묵에 잠겨보려 합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와 성령을 통하여 내 마음을 적시는 말씀으로서만 저와 교우들은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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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 [원대연 목사] 한국교회는 이 민족의 파수꾼
    ▲ 원대연 목사(마산교회 담임) 우리는 6.25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 집단이 비열하고도 잔악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참혹한 파탄을 우리 민족에 안겨주었다. 국군과 민간인 56만 1천여명이 목숨을 잃는 등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왜 이토록 많은 인명의 손실과 재산의 피해가 나기까지 사전에 막을 수 없었는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더라면 이런 엄청난 결과는 없었을 것인데..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과연 당시 나라 지도자들은 누구를 위한 파수꾼이었나? 에스겔 3장의 배경을 보면 에스겔이 비슷한 후회스런 고백을 하고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생활한 지 12년째가 되던 해에 조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완전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지난날 자신이 민족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사실 에스겔이 괴로워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12년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침략당할 때 이스라엘의 경비라도 맡았단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으로 이끄는 선지자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책임이라며 마음 아파했다. 하나님께서도 에스겔 선지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삼으셨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3: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파수꾼이라 말하지 아니한 점이다. 정치가들, 군인들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이라 말하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겔3:7)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간케 하고, 모든 삶의 지혜가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파수꾼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받기 때문이다. 하늘의 지혜를 좇아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에스겔이 가진 아쉬움을 가슴깊이 영원히 간직하고 살아야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깨어 기도하며 소금과 빛으로 존절히 살았더라면 오늘같은 참담한 현실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이렇게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심히 통곡하며 가슴 아파 해야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파수꾼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명을 다하지만 결국 자신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3:19) 단12:3의 말씀은 교훈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 시대를 밝히 보고 파수꾼의 사명을 어느때보다 잘 감당하여 더 빛나고 더 영화롭게 되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하자. 우리가 무너지면 이 나라 이 민족도 끝장이다는 사실을 항시 기억하자. 우리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다. 게으르거나 나태하면 무서운 책임이 뒤따를 것을 명심하자. 힘을 내자. 한국교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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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 [가정호 목사]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
    과몰입한 이데올로거의 입장을 탈피하면 보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이다. 당신의 머리에 파고든 사탄의 발톱을 뽑아라.1.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나, 성경적 옳음과 기독교적 바름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사람, 즉 "교회 된 삶" 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세속 정부와 세상 정치세력에게는 정치적인 존재로 보인다.2.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로 정치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와 하나님나라의 통치 본질이 "불의에 대한 야단치기" 이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제국 로마의 정치세력에게 귀챦거나 두려운 세력이었다.3.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다. 예수께서 로마황제 가이사의 정치를 디테일하게 비판했거나 분봉왕 헤롯의 정치에 대해 분야별로 간섭하고 관여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보았고 동시에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4. 세속정부와 세상 정치는 교회와 교회된 그리스도인들과 긴장관계를 갖는다. 교회란 존재 자체로 세속정부에 대해서 디_스트레스로 또 어떤 경우에는 유_스트레스로 작동한다. 그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떤 이데올로기든 마찬가지다.5. 오늘날 희한한 "기독교 종교인" 들이 보인다. 아니 그들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설쳐대는 역겨운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강력하게 "기독교인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세력이라고 편을 갈라버린다.6. 이 말은 "자신이 계시의존적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맘몬을 숭배하기 위한 자본주의자" 라고 스스로 증언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다른 이데올로기에 비해 우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그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부치기 때문에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간다.7. 이데올로기가 가진 문제점들에 대해 바른 말,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곧바로 자본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자니 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거로 몰아 부친다면 이데올로기에 과 몰입한 편향주의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기독을 말하는 유사종교인임을 고백하는 셈이다.8. 복음에 대한 단순한 생각, 복음에 대한 단순 무식한 생각과 과몰입한 이데올로거인 자신의 예민한 공격성과 결합되어 버린 나머지 참된 기독자들을 빨갱이 또는 종북좌파로 몰아 붙이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부인한다. 기독교를 자본주의 신봉종교로 끌어내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거나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9. 그들을 판별하여 정의하자면 "맘몬숭배를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과 교회를 소비하고 싶은 유사 기독교인" 이 되어 버렸을 뿐이다. 복음은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것이 가진 문제점이나 잘못에 대하여 심각한 긴장관계를 갖는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렇다.10.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공격한다고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에게 협조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공격한다고 그가 자본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그가 땅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걷는 천상시민이면서 동시에 땅의 백성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11. 그가 계시의존적 복음에 사로잡힌 복음주의자이거나 개혁주의자라면, 이른바 예수와 부활과 성령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든 비판적 또는 비평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복음을 복음되게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면 그길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그것들로 부터 성도를 구별되게 살도록 돕는 역할이 교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12. 당신의 머리에 장착한 사탄의 발톱을 뽑으라. 상대를 악마화 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거는 그가 충성하는 이데올로기 숭배자, 또는 맘몬숭배자, 자기 숭배자일 뿐, 예수를 따르는 제자이거나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 할 수 있는 참된 기독자가 아니다. 당신이 만일 그렇다면 당신도 신천지같은 이단의 무리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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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8
  • [노상규 목사] 농촌교회, 도시교회
    ▲ 노상규 목사(함양 상내백교회 담임) 농촌교회에 온 지 만1년이 지났다. 그동안 대전, 광주, 창원, 김해에서 목회를 하다가 농촌교회에서의 사역은 첫 경험인 것이다. 아직 농촌교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느끼는 바들이 있다. 도시교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지역의 선후배 목사님들을 만나며 간접적으로 경험을 하고 있다. 농촌교회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도시교회와 농촌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 서로 협력하여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할 때이다. 농촌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1년을 지나도 애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농촌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최근 이곳 함양 서하초등학교가 뉴스의 초점이 되었었다. 예전에는 학생들도 많고 모범학교였는데, 현재 전교생 14명 중, 올 해 4명이 졸업예정이어서 폐교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학생유치에 나섰던 것이다. 학교에 입학이나 전학을 오면 부모의 일자리를 안내해 주고, 년 2백만 원의 사용료만 내면 주택을 제공해 주고, 학생들은 년1회 해외연수를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한국고용정보원이 분석한 소멸위험도시 1위 지역이 경북 의성이다. 의성의 인구는 예전에 230,000명인 때도 있었는데, 작년 11월 기준 52,606명이다. 이 중 39.8%인 20,947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이라는 것이다. 농촌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자연스럽게 농촌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특수한 곳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농촌교회의 교인수 감소와 고령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이렇게 교인수가 줄어들고, 고령화 되어 가는 농촌교회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감당할 일꾼이 없으니 교역자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예배 인도, 설교, 기도회 인도, 심방, 운행, 마을행사 참가, 농번기 일손 돕기 등등을 한다. 그러다보니 목회자의 탈진이 오기도 한다. 사모도 나서서 일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다 보니 갈등 상황과 탈진을 만나기도 한다. 재정적으로도 자립적으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교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미자립 농촌교회는 도시 교회들에 손을 벌리며 후원을 받고 있다. 목회자의 인맥에 따라서 후원을 많이 받아 재정적으로 어려움 없이 사역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턱없이 부족하다. 각 교단에는 농어촌선교회와 같은 기구들이 있지만 농촌교회의 문제를 풀기에는 역부족이다. 도시의 교회들이 농촌교회를 품고 매월 후원금을 보내지만 그것도 편차가 심하고, 그나마 대부분의 농촌교회들에게는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농촌교회는 도시교회의 못자리교회이고, 부모가 있는 고향교회이기도 하다. 각 교단은 농촌교회의 목회자들이 생활비에 매여 살아가지 않도록 목회자 평균 생활비 지급 등의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도시교회는 농촌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성도들에게 고취시키고, 함께 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방법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매년 의료봉사, 농촌봉사활동 등을 꾸준히 하는 교회들이 있다. 봉사활동 자체에 의미를 두지 말고, 농촌교회의 필요를 세심히 살피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도록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이다. 부산의 모 대형교회는 절기 때에 교인들을 나누어 도시나 농촌의 미자립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고 있다. 어느 교회는 직분자 임직식에서 임직자 가정을 적정 인원으로 나누어 미자립교회로 파송하였다는 기사를 접한 일도 있다. 가서 6개월을 섬기고, 돌아와도 되고, 그 교회를 섬겨 되도록 하였다는 것이었다. “거룩한 공교회와...믿습니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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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3
  • [전영헌목사] 목사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지난 9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고등학교의 9월은 대학교 입학 수시 전형으로 인해 고3을 맡은 선생님들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까지 아주 분주한 기간입니다. 저도 고등학교에 근무하다보니 직간접적으로 학생들의 입시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서울 상위권 대학진학을 위해 준비하는 제자 A가 자기소개서를 적어서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자기소개서 지도를 요청해 온 것입니다. 이 일은 통상 늘 하던 일인지라 기꺼이 지도를 해주었습니다. 전국의 대다수 대학들의 자기소개서 질문은 비슷비슷 합니다. 보통 4가지 질문이 주어집니다. 고등학교 3년 과정동안 학생 스스로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역량에 관한 것, 고등학교 3년 과정 중 학교에서 의미가 있었던 활동에 관한 것, 봉사와 나눔 그리고 갈등해소를 위해 기울인 노력에 관한 사례, 마지막은 전공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진학 후 학업계획에 관한 질문들입니다. A는 자기소개서를 거의 완벽하게 잘 적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항목에서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고등학교 3년동안 본인에게 의미가 있었던 학교 활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본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A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을 해놓았습니다. “나는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대략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학교에 올 때에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학생이었는데, 우리 학교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배 때마다 앞에 나와서 찬양팀으로 섬겼고, 스스로 기독학생임을 드러내면서 누구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기에 자신의 고등학교 과정 중 가장 의미가 있었던 활동은 종교수업 시간과 학교에서의 예배라고 적어놓은 것입니다. 저는 A에게 2번 질문에 대한 내용을 수정하라고 했습니다. A가 가려는 학교가 신학대학이나, 기독교대학이 아니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학 중 하나인데 이런 식으로 쓰는 것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A가 저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목사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제가 만약 대학을 떨어진다면 2번 항목을 잘 못 적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실력이 모자라서 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사람의 끈이 아니라 하나님 붙들라고 하셨잖요. 그러니 걱정마셔요. 자기소개서는 정직하게 쓰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더 이상 제가 이 부분을 손댈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자의 이 마음을 듣고 나니 더 기도가 간절히 되었습니다. 미션스쿨은 이런 곳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미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학교에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주변 학교의 기독교사들에게 학원 복음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없는지, 도울 것은 없는지 주변을 돌아봐주셨으면 합니다. 학교는 다음세대를 위한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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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4
  • [김충만 목사] 하나님이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 김충만 목사(양무리교회 담임) 복음화율 100%였던 태초의 에덴은 전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아담이나 노아의 가정 역시 전도나 선교가 요구되는 세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족, 민족)가 점점 주류가 되어갔고, 급기야 하나님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차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아는 자는 역사(사회)에서 점차 소수로 전락했다. 우리 시대처럼 말이다.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이처럼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시대를 다시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시대로 되돌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도 모른다. 교회생태계, 소수종교로의 시그널 구약교회(광야교회, 행7:38)로부터 현대까지 기독교 역사를 놓고 볼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차 소수가 되어가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과연 우리는 아담과 노아의 후손들이 살아가던 시대가 그랬듯 점차 더 깊어져가는 불신(세속) 사회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신앙을 지키고, 또한 그것을 다음세대에게 과연 전수할 수 있을까? 기독교 미래학자들은 대략 한 세대(30년)가 지나기 전에 한국 기독교가 500만명 이하가 될 것이라 진단한다. 이는 서구 기독교가 그러했듯이 이제 우리도 텅 빈 예배당과 교회(건물) 유지도 벅찬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거기다가 국가가 복지를 주도하는 복지국가(유럽식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확대해 간다면 사회적 교회로서의 역할은 안팎으로 점점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진짜 고민은 과연 후기 기독교사회에서도 여전히 교회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살아있는 기독교 성태계일까. 한국교회, 다시 길을 묻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형경기장 안에 사자의 밥으로 끌려왔다. 그런데 며칠을 굶은 사자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잡아먹기를 포기한다. 이때 황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들은 누구인가?”라고 묻고, 혼이 나간 신하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황제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렇듯 세계를 정복한 로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 앞에서 그만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에 의해 하나님께로 정복되어 갔고, 십자가는 로마를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되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없을 때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꼭 많아야, 커야, 넘쳐야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신학에 길들여진 것이 아닐까. 베드로는 거대한 예루살렘교회를 만들지 않았고, 하나님은 바울이 초대형 안디옥교회를 만들기를 기대하지 않으셨다. 이런 플랜은 하나님과 사도행전교회에 없다. 초대교회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가정교회였으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능력과 야성을 잃지 않았으며, 세상을 향해 생명을 건 전쟁을 치르는 날마다의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로 살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 사자의 밥이 되는 걸 영광스러운 하늘의 상급으로 생각했고,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는 그런 자로 사는 것을 결연히 거부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에 사로잡힌 그런 사람들로 세워져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바로 그 교회를 꿈꾸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종인가. 나는 잘 죽기 위해 오늘을 복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인가. 나는 이 세상을 우리 주님의 눈과 마음과 울림을 가지고 읽어내고 또 대면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소명자인가. 나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나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언행(言行)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이 세우시고 말씀하신 바로 그 교회가 내 안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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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9
  • [최병학 목사] 포스트 뽀로로, 펭귄 예수인 펭수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포스트 뽀로로’를 꿈꾸며 남극에서 헤엄쳐 ‘BTS(방탄소년단)의 나라’ 한국까지 온 펭귄, ‘어른들의 뽀통령’인 펭수(Pengsoo, 10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뽀로로 선배를 이기기 위해 EBS에 온 겁니다.” 등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동요 대신 대중가요가 깔리고, 희로애락을 적극 표현하고, 인터넷 신조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펭수가 레트로(retro)현상을 가미한 B급 문화로 지금 대중문화를 유쾌하게 만듭니다.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위는 1인 크리에이터지만, 펭수의 목표는 방탄소년단(BTS)처럼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펭수의 목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펭수의 인기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직설화법입니다. 펭수는 어른들의 점잖은 척함, 근엄함, 가식, 꼰대질을 그 자리에서 막말급으로 지릅니다. ‘조국사태’에서 드러난(물론, 더 큰 문제는 검찰입니다만) 불공정, 그리고 최근 기성세대의 갑질(나 때는~)에 예민한 2030세대의 감성에 펭수는 속 시원함을 던져줍니다. 둘째, 상명하복에서 자유롭습니다. 탈권위주의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펭수는 선배인 뚝딱이가 충고를 하려고 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뚝딱이 선배, 잔소리 하지 마세요. 저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속인 EBS ‘김명중 사장’ 이름도 스스럼없이 부릅니다. 펭수는 이렇게 노래 부릅니다. “참치는 비싸, 비싸면 못 먹어, 못 먹을 땐 김명중!” 셋째, 유희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펭수의 인간적인 매력입니다.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주철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막 나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선량함을 지키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던 2030에게 내 주변에 이런 친구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다.” 그렇습니다. 정시냐, 수시냐? ‘조국대전’ 이후 이제 전쟁터는 또 다시 입시로 바뀌었습니다. 그 병사들인 10대, 그리고 취업과 생존으로 절망하는 2030세대에게 펭수는 전쟁터의 위생병으로, 혹은 친구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넷째, 모험심입니다.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인 펭수의 인기 배경에 관한 주철환 교수는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은 옛말이다. 이젠 자유롭게 말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덕목인 시대, 단정한 모범생의 시대가 아니라, 단순한 모험생(연습생)의 시대이다.” 파격을 좋아하는 2030 세대의 감정을 저격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을 찾아서 자연스럽게 모험하는 펭수를 향하여 젊은 세대가 손을 들어 열광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살아있는 캐릭터이기에 확장 가능성이 있습니다. 키 큰 배우가 목소리와 더불어 연기하는 펭수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까요? 더욱이 무대본, 무연출의 예측 불가능한 전개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이러한 펭수가 기성세대를 꼬집고 기득권의 카르텔을 해체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다른 세상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펭수의 의상이나 언행 등이 저급한 B급 문화 콘텐츠라고 볼 수 있지만, 가식을 들춰내는 통쾌함, ‘근데 뭐가 어때서’라는 여유로운 상쾌함, 그리고 권위에 대한 기발한 도전, 펭수가 지금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펭수의 말에 다른 세상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펭수를 통해 펭귄식 예수님의 형상을 엿보게 됩니다.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른이고 어린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면 되는 거예요.” 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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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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