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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혜경 사무총장] 핵발전이 없어도 에너지 자립이 가능하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를 겪으며 한국Y운동이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단기적으로는 노후핵발전소 폐쇄를 이루어 다가올 치명적인 사고를 예방하고, 핵발전과 방사능의 위험성을 대중에게 알려 시민의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탈핵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미래세대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된 사회를 물려주어야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핵발전을 통해 생산하던 대량의 에너지는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선진 에너지 자립마을을 탐방하는 연수에 참가하게 되었다. 탐방지역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작은 부거란트 주 남부의 귀씽마을, 제2차 세계대전이후 피해로 산업시설이 전무하고 인구의 대부분이 노인이며 가장 가난했던 마을에 시장의 헌신을 통해 재생에너지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에너지비용이 유출되지 않고 지역에 머물게 되고, 에너지기업이 유치되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어 세계에서 에너지전환과정을 경험하고자 매년 3만명이 귀씽모델을 찾아온다. 농축산부산물과 폐목재를 활용한 바이오매스, 바이오가스, 펠렛, 태양열을 통해 열과 전기를 생산하고 태양열지역난방시설을 적극 활용하여 석유고갈과 기후변화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농가수입이 증대되는 결과를 얻었다. 다음은 에너지절약을 위한 최적의 에너지이용을 위해 활약하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 정부와 에너지컨설팅기업의 협업사례를 보았다. 주 정부 담당부서가 별도 조직 운영되고 있으며 에너지컨설던트가 기관과 기업 그리고 시민에게 연간 3,000건의 현장 컨설팅을 한다. 주된 내용은 에너지 기기 구입 및 관리, 건축 등 소비자가 재생에너지 생산,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최적화)를 하도록 지원한다. 독일에서는 2000년 재생에너지법 제정되고, 2004년 재생에너지법이 개정(재생에너지 생산 시 이윤 4-8% 지원)되면서 폭발적으로 태양광이 보급되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시민태양광발전소가 세워졌다. 후쿠시마 사고 후 독일정부는 원전정책을 탈핵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재생에너지법을 강화하였는데 주요내용으로 공공건물 옥상에 임대료 없이 태양광설치를 가능하게 하여 2013 현재시민 에너지조합은 888개이다. 지역의 에너지 전환을 목표로 활동하는 사회적기업인 독일의 징엔 솔라 콤플렉스를 방문하였는데 현재 개인, 기업, 지역에너지회사, 정당 등 1,000명이 주주로 투자, 투자금액은 1억, 최소 4%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다. 주요 프로젝트는 지붕과 벽면, 나대지를 활용한 마을 하천 이용 생태적인 소수력발전소, 풍력발전소, 우드 펠렛 난방과 바이오 에너지 마을을 매년 1개씩 만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견학한 곳은 세계적 환경도시로 이름난 프라이부르크 시의 보봉 생태마을이었다. 1970년대 반전·반핵운동은 환경보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보봉 생태마을은 병참시설을 생태주거단지로 개조한 신흥주택지인데 1992년 기존주민(SUSI/주지)을 포함하여 전문가와 함께 구성된 보봉포럼과 시의회, 시정부가 협업하여 ‘쇼셜 에콜로지주택지’ 라는 개념하에 주택개발의 프로세스를 개발하였다. 주요내용은 도보와 자전거교통, 대중교통 절대적 우선과 큰 나무 보존 및 주택지 비오톱 보호, 다양한 사회계층이 입주, 녹지로의 우수한 접근성, 저에너지 건축양식과 지역난방이다. 이같이 주택과 사회적 가치가 접목된 생태적으로 건강한 저탄소 도시가 되어 하루 평균 약 6,000명이 찾아오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친환경 저에너지 주택단지의 모델이 되었다. 한국의 에너지정책과 비교하여 시사점을 찾아보았다. 먼저 시민의 힘이었다. 오스트리아는 핵발전소 건설을 완공했음에도 국민투표를 통해 여론을 확인하고 가동을 하지 않고 즉시 폐쇄하였다. 독일 또한 후쿠시마 사고이후 선거를 통한 국민의 여론이 작용하여 원전정책에서 탈원전정책으로 전환하여 노후원전 8기를 폐로하고 2022년까지 나머지 9기를 폐로하여 탈핵을 선언하도록 한 국민의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시민의 힘만으로 가능한가? 시민의 여론을 집중시키고 선도 할 수 있는 관련정책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우선 전기료의 적정화가 시급하다. 우리나라의 전기료가 값싼 이유는 한전이 독점운영하면서 운영손실분을 정부가 보조하기 때문에 결국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한다. 또 주목할 점은 온실가스를 감소하려는 자발적인 참여가 일어날 수 있는 권한이 시민에게 주어졌고 시민참여를 통해 정책이 입안되는 민관거버넌스로 재생에너지정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재생에너지생산에 따른 보조금 지원 정책은 개인에게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게 되어 실효성을 담보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재생에너지 자립은 지역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았다. 키워드는 “지역순환”이다. 지역에서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거나 자립하고, 개인이나 소규모 재생에너지발전으로 생산하여 지역이 사용하고, 지역일자리를 창출한다. 즉 지역주민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사고의 전환도 필요하다. 에너지는 반드시 생산하고 소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고의 에너지는 에너지가 필요 없는 것임을 볼 수 있었다. 에너지절약과 효율화(최적화)가 더욱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연환경을 잘 보전하면서 이를 충분히 활용하는 생명존중의 가치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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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 [가정호 목사] 말씀의 부활이 이루어져야 한다
    매년 경험하는 부활절, 이젠 부활절이 주는 의미를 다양한 방식으로 되새김질 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필자는 말씀의 부활이 없이는 안 된다는 점을 논하고 싶다. 말씀이 선포되지만 성도들의 삶이 안 바뀐다고 난리인 시대이다. 거꾸로 그럼 말씀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나는 바뀌었나? 만일 내가 안 바뀐 그 말씀으로 성도를 바꾼다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말씀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전 존재를 바꾼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하기에 유익한 말씀의 부활이 절실하다. 이번 부활절을 기념하면서 말씀의 부활을 외쳐 본다. 말씀 사역자라면 성경전체를 30분 만에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인가가 중요하다.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와 신구약 중간기,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서를 5분 정도씩 할애해서 말할 준비가 되었는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누가 그렇게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0분 만에 성경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럼 어쩔 텐가... 훈련되지 않으면 버벅거리고 막상 지쳐서 포기한다. 줄이지 못하면 늘리지도 못하고, 늘어진 것을 줄이지 못하면 늘인 것도 허당일 수 있다. 교리와 신학은 죽을 때 까지 공부하고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역사적 전통을 지켜온 바른 신학을 더 연구해야 한다. 그보다 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일이다. 목회자는 물론이고 성도도 동일하다. 짧게 핵심을 꿰고 있어야 한다. 이게 준비 안 되면 창조적인 스토리가 생기지 않는다. 거룩한 상상력이 전혀 일어 날수 없다. 그뿐인가? 성경이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는지 알기위해 주도면밀하게 성경 각 권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서는 과거사건을 스토리로 전개하고 있다. 스토리를 정확하게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가서는 현재의 경험을 노래로, 시로 드러내고 있다. 거룩한 정서를 가지고 묵상해야 한다. 선지서는 미래에 일어날 기대를 설교로 메시지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대는 영원한 현재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관통한다. 그러므로 시간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400년 침묵기에 일어난 역사를 알아야 복음서를 이해 할 수 있다. 400년 침묵기에 일어난 헬라와 로마 그리고 100년간의 이스라엘 독립기를 이해해야 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열심당과 에세네 사람들과 율법, 이스라엘을 준비시키는 하나님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히브리인에게, 로마인에게, 헬라인에게, 그리고 오고 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이야기를 꿰뚫어 설명해내는 실력을 키워야 한다. 이게 안 되면 아무 퍼즐이나 하나씩 꺼내다가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가 만다. 결국 횡설수설이 되고 만다. 성도들은 오리무중이다. 퍼즐 하나의 이야기를 아무리 잘 이야기해도 그 다음 퍼즐과 아귀가 맞지 않으면 꽝이다. 전체를 연결하여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다음에야 비로소 퍼즐의 오묘함이 드러나고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순서를 잘 맞춰서 보여줘야 한다. 아무쪼록 어리바리 하다가 사역과 인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자리에서 든든하게 사역하다가 주님 뵈옵는 일이 일어나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황홀하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하나님, 거룩한 쾌락과 희락의 세계로 이끄시는 그 하나님을 지루한 하나님, 따분한 하나님, 재미없는 하나님, 매력 없는 하나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감동과 충격을 주는 하나님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나님, 반응 없고 대답 없는 하나님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 안내자가 길안내를 잘못하면 해고되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로 자신을 부리는 일꾼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금년 부활절에는 말씀사역자들 모두에게 말씀의 부활이 있었으면 좋겠다. 주님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종들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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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5-04-02
  • [박 철 목사] 크기에 대한 성찰
    오늘날 개신교인, 특히 개신교 목회자와 개신교 내의 평신도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존경은 고사하고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선호도 조사에서 개신교의 꼴찌를 예상하는 일은 이제 내기거리도 안 되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왜,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담한 심정이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책임 또한 크기는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포도원을 가꾸는 청지기의 직분을 맡고서도 포도원을 망치는 여우가 되지는 않았는지, 오늘 우리 개신교의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은 함께 그 책임을 통감하여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크기'에 대한 집착, 남들보다 높아지고 커지는 것을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왔던 우리의 잘못을 회개해야 하겠다. 소위 '큰 목사님'과 '큰 스님'을 모시는 기준은 사뭇 다르다. 목회자의 성공과 실패는 그의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지향과 실천으로부터 평가되지 않고, 오직 하나의 기준, 곧 교회와 회중의 '크기'로 평가되기 일쑤이다. 내면의 크기가 큰 목사가 '큰 목사님'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교회의 크기를 키워놓으면 '큰 목사님'으로 불리는 종교, 그것은 이미 종교이기를 포기한 종교상인의 집단이라고 밖에 달리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목사직을 성직이 아닌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로 보는 세속의 시각을 두고, 남을 탓 할 이유가 없겠다. 반면 불교의 경우 큰 절의 스님이 ‘큰 스님’이 아니라, 정신의 크기가 큰 스님이 ‘큰 스님’으로 불린다. 성철 큰 스님이 ‘큰 스님’인 이유는 그분이 큰 절의 주지라서가 아니라, 그 정신의 크기에 있어 큰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 목회자의 경우에는 너나할 것 없이 외형적인 '크기'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인다. 목회자들이 모여도 온통 '크기'에 관한 얘기뿐이다.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냐, 올해 몇 명이 새로 등록 했냐, 어떻게 전도(광고) 할 것이냐"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런 관심에 동참하지 않거나 다소 비판적인 거리라도 취할라 치면 “교만하다, 복음적이지 않다”는 비난을 받으며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처럼 정신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에 들어서기보다 외형적인 ‘크기’를 키워 남들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자기만족을 누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돌아본다. 건강한 아이가 키와 몸무게가 성장하듯, 건강한 교회가 적절하게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장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조치를 취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크기에만 집착하여 아이가 100 킬로, 200 킬로, 500 킬로그램이 되고, 심지어 메가톤급 아이로 성장해도 마냥 좋다고 박수치는 것은 크기에 대한 집착이 빚어내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성장은 크기에 집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말씀의 근본정신을 꼭 붙들고 그것을 잃지 않고 살아내려는 굳은 의지와 진실한 믿음의 실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강이 우선이지 성장이 우선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교회성장을 위해 ‘꼼수'를 부려서는 머지않아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빈곤한 정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 영혼으로는 깊은 바다와 같은 성숙과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 크기에 집착해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는 개신교의 부끄러운 자화상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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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9
  • [정병갑 교수] 교회 안에 갑질은 없는가?
    지난 해 말, 국내 언론을 뜨겁게 달군 땅콩회항 사건은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승무원의 땅콩 서비스를 문제 삼아 승무원에게 폭언, 폭행은 물론 출입문을 닫고 이륙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비행기를 램프로 되돌리고 승무원을 내리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망신을 당했으며 당사자는 구속되었고 징역 1년이 선고되어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땅콩회항 사건의 시작은 가진 자의 갑질이었지만 그 이후의 진행과정을 보면 갑질 이상의 무서운 행위가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를 협박하고 회유하였으며 진실을 은폐하려 했을 뿐 아니라 국가 기관에서의 조사 과정에도 압력을 행사하여 국기를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더구나 유치장 면회실을 독점하여 다른 재소자들이 면회도 못하게 하였으며 반성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던 갑중의 갑, 슈퍼 갑의 행동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오죽하면 판결을 내린 판사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린 일” “인간을 노예로 여기지 않았더라 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이라고 했을까?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인 판단 잘못으로 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기본적인 양심이 있어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조 부사장의 경우는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듯이 보인다. 아마도 감옥 안에서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지나 않을까 염려된다. 교회 안에는 땅콩회항 사건 같은 갑질이 없을까? 기독교TV 회장인 모 장로는 횡령죄로 두 번이나 실형을 선고 받고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갑이고,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전 해군 참모총장 역시 교회에서는 존경받는(?) 갑질 장로이며, 수년간 제자들을 갑의 위치에서 성추행한 서울대 모 교수 역시 교회 장로이다. 결혼 주례를 부탁하러 온 자매를 현장에서 성추행 하였을 뿐 아니라 여자 성도들을 수 년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성추행한 목사에게 퇴직금 등으로 13억원이 넘는 돈을 지급하기로 결정한 당회는 슈퍼 갑이었다. 목회자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힘 있는 장로, 수년 간 설교 표절로 문제가 되자 결국 물러나면서 교회에 2억원의 퇴직금을 요구한 목사, 박사학위 논문이 표절로 결론이 나자 자숙하는 의미에서 6개월간 반성의 기회를 가진 후에 슬그머니 복귀한 어느 대형교회 목사, 1년에 수천만원 어치 옷을 사는 목사! 이들은 갑 중의 갑, 슈퍼갑이 틀림없다. 목사, 장로 등 교회 지도자들의 부부동반 공식 해외 연수(?)에서 포도주, 쓸개 탄 소주, 생선회와 함께 소주를 마셨는데도 교인들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기는 커녕 노회에서 사과 한번으로 덮어버린 지도자들의 행동 역시 교인들을 무시한 갑질이다. 이러한 갑의 눈에 을이 보이겠는가? 좋은 집에 대형 세단을 타고 두둑한 사례비에 등 따시고 배부른 갑, 뇌물과 횡령으로 부유하게 살고 있는 갑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섬기라고 세운 것이지 군림하라고 세운 것이 아니다. 교인들을 섬기고 스스로 낮아져야하며 교회내의 작은 잘못에도 “내 잘못입니다!”를 선언하고 재를 무릅쓰고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사람이 교회지도자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문제는 지도자들의 잘못으로 일어나며 이러한 문제는 모두 영적 싸움이기 때문이다. 영적권위가 사라진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대하는 행동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필자는 잘 알고 있다. 미꾸라지 한 두 마리가 방죽 물을 흐린다. 사람들은 흐린 방죽물만 보고 방죽 전체가 탁하다고 평가하며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교회 지도자의 7~80%는 방죽물을 흐릴 수도 없는 위치에 있다. 성도라고 해야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인 시골교회에서, 식사하는 자리에서 밥그릇을 나르고 봉고차를 운전하는 지도자가 갑질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낮아져서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낮은 자세로 헌신하며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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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7
  • [김길구 부산YMCA 사무총장]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하여
    요즘 교계의 사회적 참여가 활발해 지고 있어 관심을 끈다. 고리1호기 폐쇄 부산범시민운동본부에서도 교계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과거 일부 교단이나 교회가 참여한 예는 있었으나 부기총에서도 고리원전 폐쇄촉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성명서를 내는 등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광복동의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는 명실공히 부산의 동계축제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로 이른바 거버넌스를 구현하여 교계봉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줌으로써 전국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타 도시에서도 벤치마킹이 한창이다. 부산역에서의 탈북난민북송반대 촛불집회 및 통일광장기도회는 또 어떤가? 매주 100~200명을 동원하며 이번 주로 제154주차를 기록하며 진행 중이다. 몇 번 하다가 말겠지 라는 선입견을 깨고 교계의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여주어 눈길을 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일부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특정 이념의 틀에 갇히지 않고 교회의 높은 담을 넘어 시민들과의 공감대를 넓혀가며 공공의 영역에서 교계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다. 공공성 확대의 의의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믿기에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할 사회적 책무가 있다. 교인들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지역사회의 구성원이자 국가의 시민이다. 따라서 우리를 둘러싼 시대와 환경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 없으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공공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반문해 보는 것은 그리스천의 정체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시대일수록 공적인 영역에서 신앙적 의미를 되묻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공공성은 공개성을 통하여 실현되는 특성이 있다. 최근 신학계에서도 교회의 공공성 논의가 한창이다. 이는 교회가 공적인 영역에서 점차 영향력을 잃고 신앙의 내면적 영역에 머물고 있는 앞선 기독교국가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람직한 일이다. 과제교회의 공공성확대는 양날의 칼이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안 쓴 만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몇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첫째 기독교사회의 인프라를 확대하는 일이다. 교회의 주장을 논증적으로 제시하여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선 훈련된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이 필요하다. 교육과 훈련은 물론 전문집단간의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다. 둘째 시대정신을 붙잡는 일이다. 우리시대의 핵심적 과제를 선정하여 이를 신앙적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우리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교회의 주장이 아무리 정당해도 설득력을 잃어 외면받기 쉽다.셋째 교회는 성장논리에만 매몰 맘몬화된 물질주의에서 벗어나 지극히 작은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주류에서 벗어나 주변부로 밀려 소외된 작은이들을 대변하는 시각과 관점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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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4
  • [박 철 목사]신앙인들의 숙제
    스페인의 화가 고야(Goya, 1746 ~1828)의 그림 중에 ‘이빨 사냥‘이란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한 여인이(교수형을 받은 사내의 이빨에는 마법의 힘이 있다는 그 당시의 미신을 믿고) 시체 곁에서 결사적으로 이빨을 뽑으려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 공포에 떨면서 팔을 뻗어 굳어진 시체의 입 속으로 자기 손을 넣고 있다. 귀중하고 탐나는 목적물을 향하여 움직이는 자기 자신과 비참한 심정으로 자기의 행동으로부터 얼굴을 돌리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를 고야는 참으로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선거철만 되면 나는 문득 이 ‘이빨 사냥‘이란 고야의 그림을 연상하게 되었다. ‘귀중한 한 표‘를 얻기 위해 말쑥하게 차려입은 국회의원 입후보자가 땅바닥에 엎디어 있고, 그 앞에는 허름한 차림의 농군이 당황한 몸짓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서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죽은 조상 묘 앞에서라면 모르되 산 사람 앞에서 저렇게까지 땅바닥에 엎디어 머리를 조아릴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야, 저게 바로 민주주의라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백성을 섬기는 자세로 모든 정치인들이 정치를 했더라면 세상은 지금쯤 많이 달라졌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도 왠지 씁쓸한 감회에 젖어 들고 마는 것은 사진에 나타난 대조적인 두 사람의 관계가 지극히 형식적이란 점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서로 엇갈린 시선이 너무나 멀고 깊은 소외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보장을 위한 비정규직 철폐문제와, 관계노동법 개정 문제, 밀양송전탑 문제, 쌍용노동자 강제해고 사태에 따른 문제, 농수산물 전면개방에 따른 향후 농촌문제, 빚더미 위에 앉은 농민들의 관심과 국회의원 입후보자들의 관심 사이에 작용되는 괴리감이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 풍토가 아닐까.자기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굳어진 시체의 입에서 마법의 이빨을 구하려는 고야의 그림에 나타난 그 여인과 오직 한 표를 얻기 위해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입후보자들, 이 두 사건의 상황은 서로 다르다 해도 전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후자는 자기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바로 이러한 소외 현상이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이러한 현상이 어디 우리나라 정치 풍토뿐이겠는가. 남을 도와 줄 때는 생색을 내서는 안 된다고 입이 닳도록 얘기하고도 교회 안에서 생색이 나야지만 돈을 내놓는 신도들, 그리고 교회당을 시장바닥으로 만들어 놓아야만 남을 도와 줄 수도 있고 교회 건축도 가능한 오늘 우리 교회의 분위기는 또 어떠한가. 그리고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다‘는 성서의 말씀을 곧잘 인용하면서도 조금만 섭섭해도 마음의 상처(?)를 쉽게 받는 목회자, 신도들. 이같이 만연한 소외현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이 문제가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숙제가 아닐는지….부버의 말을 하나 인용해본다. “모든 참된 삶이 ‘만남‘에서 이루어지듯 우리 눈을 가리는 모든 장애물, 그 장애물을 걷어치우고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매개물‘이 무너진 곳에서 진정한 만남과 인간회복이 가능하다“ 참으로 어려운 신앙인들의 숙제이다. 어렵다고 안 해도 되는 숙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해야 할 숙제이다. 이 땅에서 숙제를 잘 마치고 가야할 텐데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지는 까닭은, 시방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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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31
  • [박영규 관장]그리스도의 새 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이는 많은 교회의 송구영신 예배나 신년예배 설교 주제일 것이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이전 것은 대부분 잘못으로 치부되고, 새로워질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거나 새로이 단체의 대표를 맡게 되면 이제까지와는 차별화된 새로운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쓰는가 보다. 그러나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과거의 모든 허물을 만회할만한 쇄신은 쉽지 않다. 새로운 시도 역시 우리가 이전에 대부분 시행했던 일로 단지 외형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골백번 투표를 하고 개혁한다고 떠들어 봐야 늘 그래 왔듯이 우리 사회는 별 변화가 없으리란 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다. 유대교 랍비가 제자들에게 “동이 트는 시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한 제자가 “멀리서 개와 양을 구별할 수 있는 때”라고 말하자, 또 다른 제자는 “무화과나무와 포도 덩굴을 구분할 수 있는 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랍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희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들을 너희의 형제나 자매로 인식할 수 있을 만큼의 빛이 있을 때가 바로 동이 트는 시간이고, 그전까지는 아직 어두운 밤이다.” 하시디즘(Hasidism)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동이 트고 새날이 온다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인식하고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부터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변화의 본질을 깨우쳐 주는 듯하다. 필자가 출석하는 부산 산정현교회의 이번 송구영신 예배 주제 역시 ‘새 일을 행하리라’였다. 새해를 맞는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새해 비전이 선포되었다. 부임한 지 3년 차에 접어드는 담임목사는 그동안 본 교회의 역사와 정체성(identity)을 세심히 헤아린 듯하다. 평양을 시작으로 이어져 내려온 본 교회 성도들의 삶은 주기철 목사의 순교, 조만식 장로의 애국, 장기려 장로의 봉사를 뜻하는 소위 『주·조·장의 정신』으로 대변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순교나 순국을 말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바탕으로 『섬김』이라는 비전이 선택된 것 아닌가 싶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 서로를 섬기며, 지역을 섬기는 교회!” 이것이 새해를 맞는 우리 교회를 통해 행하시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새 일’인 것이다. 지금은 지구촌 일원으로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지만, 오랫동안 외부와 단절이 되어 어둠 속에 있던 대륙 아프리카. 이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타민족을 위해 평생을 숨어 봉사하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온 기자가 원주민들에게 “슈바이처 박사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고 물었을 때, “그분이 무엇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줬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를 사랑한 것은 알고 있다.”라는 원주민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야말로 온 세상 구석구석의 어둠을 밝히고 새날이 오게 하는 원천이며, 이는 인간을 사랑하여 성육신 해서 지극히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제자 된 삶을 사는 우리들의 새로운 행동 강령이어야 하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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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7
  • [이상규 교수]오늘의 한국교회 어찌할꼬?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에 처해있다. 한국교회 역사상 교회가 오늘처럼 사회로부터 불신을 받은 일이 없었다. 초기 한국교회는 국민적 신뢰를 받았고, 민족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교회를 향하여 도움의 손길을 애절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1890년대 초 우리나라가 시련의 와중에 있을 때 <코리안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는 “이 가련한 조선인들이 두 손을 뻗쳐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썼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백성의 체면이 처절하게 유린당하고 일본의 조선침략 야욕이 드러났을 때, 교회는 나라사랑의 노래를 지어 민족의 아픔을 평풍처럼 막고 일어섰다. 민족에 대한 충애(忠愛)로 교회는 신뢰를 받았고, <독립신문>은 기독교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종교로 인식할 정도였다. 삼일운동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한국사회의 선한 이웃이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는 전체인구의 1%에 불과했으나 독립만세운동의 준비 및 거사 단계에서 25-30%의 역할을 감당했다. 중국 공산당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천두슈(陣獨秀, 1879-1942)는 3.1운동에 참여한 한국기독교의 역할을 알게 된 후 종교를 미신이라고 보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우리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을 볼 때 기독교를 경시하던 사상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교회는 민족과 함께하는 고난 받는 교회였고, 따라서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이런 전통은 해방당시까지 계속되었다. 교회는 근대학교와 서구식 병원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고, 육신의 아픔을 안고 고통당하던 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금주단연운동을 전개하고 여권 신장에 기여하였고, 민주의식을 고취하고, 미신을 타파했다. 참된 효행과 바른 가정생활을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의 근간을 제공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계몽과 계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신앙의 자유는 주어졌으나 해방정국의 교회는 대립하였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친일적 기회주의자들을 해방 후에도 득세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드렸고, 교회는 이들을 잠재우지 못함으로써 신앙적 정기(正氣)를 바로 잡지 못했다. 1950년 4월 대구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에서는 한국기독교역사상 최초로 경찰이 투입되었다. 치안(治安)을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6.25가 발발했다. 당시 손양원을 비롯한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의 대립과 분열이 전쟁의 내적인 원인이라고 인식했다. 1950년대 교회분열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단들이 출현하고 창궐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대 사회적 영향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 국가주도형의 성장주의에 영향으로 교회는 수적 혹은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여 극심한 개교회주의에 빠졌다. 섬김과 봉사, 사랑과 배려, 절재와 검약, 겸손 등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혹은 거룩한 삶에 대한 이상은 권장되지 못했다. 현세적 풍요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천박한 기독교로 변질되었다. 무인가 미자격 신학교의 범람, 선교라는 이름의 상업주의, 사려깊지 못한 노상전도행위 또한 기독교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혹자는 무례한 기독교라고 혹평한다. 교회성장이 멈춘지 오래고 기독교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주일학교가 사라지고 있고 교회구성원의 노령화는 심화되고 있다. 이런 판국이니 이단이 활개치고 있다. 신천지가 도래했다며 전국교회를 들쑤시고 있다. 한국교회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늘 한국교회는 기로의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의 비윤리적 행태이다. 도덕의식의 상실과 함께, 성직자의 성적 타락은 심각한 수준이다. 교회의 계도적 권고는 능멸당하고 있다. 한국교회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무자격 신학교의 난립, 무자격 그리고 훈련되지 못한 목회자의 양산은 한국교회 근원적인 문제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에게는 교회의 자정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한해는 가고 새해가 되었는데, 한국교회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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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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