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0-12-0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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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시섭 교수] 누가 누구를 오염시키는가
    의학전문저술가인 존 퀘이조(Jon Queijo)가 쓴「콜레라는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메디치미디어, 2012)를 읽다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200가지의 콜레라균은 대양성 박테리아(ocean-loving bacteria)의 큰 군집에 속하고 그 군집의 대부분은 무해한데, 단 두 종류의 독특한 유전자 결합이 사람의 장(腸)에 침범하여 나쁜 독소를 생산하고, 인간숙주가 죽을 때까지 세포가 기계적으로 다량의 수분을 배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종의 콜레라균은 주로 강어귀 해수에 사는데 비해, 인간에게 치명적인 2가지 콜레라균은 인간 거주지 근처 오염된 물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에 대한 해답을 질문형태로 우리 자신에게 던지고 있다. “누가 누구를 오염시키는가?”라고. 현재 모든 세계를 단숨에 멈추게 하는 강력한 코로나 19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우리 인류가 생태계환경을 망치면서 진행해온 산업화,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끊임없는 세계화로 인해 발생한 기후변화가 불러온 문명의 저주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한편 코로나 위기의 원인을 ‘숲의 파괴’에서 찾는 입장도 있다. 인간이 숲을 없애자 거기에 서식하던 야생동물을 숙주로 삼았던 바이러스가 인간 세계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구온난화로 빙하에 갇혀있던 질병이 인간세상을 덮쳤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어디까지 과학적인 증거로 입증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콜레라의 유행에서 발견된 인간과 자연간의 묘한 악연(惡緣)이라는 우연의 일치가 코로나에서도 불길하게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기간에 증명되기 힘든 코로나의 원인에 대하여 인간이 자연을 침범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 바라보는 관점은, 현재 우리가 당한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다소 넓혀주는 것은 사실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은 단지 우리의 미래가 백신의 개발에만 있지 않음을 보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희소식이 백신의 개발뿐이라면 인류의 미래 생존 이야기는 의학이나 약학의 발전과 동일시될 것이다. 하지만 백신개발만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깨닫게 되면, 우린 백신개발이라는 해결을 넘어선 더 높은 차원의 접근법을 만나게 된다. 정말 ‘화학백신’ 개발이외에 우리가 취할 해결책은 존재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한국 현대사회의 석학으로 불리는 이들이 코로나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살아갈 인류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 설파한「코로나 사피엔스」(최재천외 5인 공저, 인플루엔셜, 2020)에서,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은 새롭고도 선명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의 이정표에는, 시장근본주의의 극복, 포용적이고 효율적인 민주주의 구축,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방역, 욕망에 대한 질서부여, 인간서식지 무한 확대의 방지, 도시적 공간집약화 해소라는 것들이 제안되는데, 이는 최재천 교수가 ‘생태백신’이라 이름붙인 거시적인 해결방법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야의 제공은 마치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여성신학자 샐리 맥훼이그(Sallie MacFague)가 제창한 ‘전지구적 안녕’(planetary well-being)을 향한 생태적 공동체 구축을 위한 온 인류의 ‘우주적 회개’와 흡사하다. 다시 콜레라로 돌아가 보자. 19세기 중반 영국시민들을 끔찍한 죽음을 몰고 온 재앙을 겪어내며, 존 스노우(John Snow)라는 의사는 ‘근대 역학의 아버지’가 되었고, 애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이라는 변호사는 ‘근대 공중위생의 창안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인류는 ‘공중보건’이라는 혁명을 일궈냈다. 그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코로나라는 새로운 위기를 통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공의료’가 자리 잡고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교회들에서 ‘생태신학’이 꽃피며, 종교와 과학이 환경보전이라는 중간지대에서 함께 손잡는 거룩한 입맞춤이 이어진다면 오래지 않아 우리는 가까운 서점에서「코로나는 어떻게 인류를 구했나」라는 새로운 베스트셀러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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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6-24
  • [김영일 목사] '타산지석(他山之石)' 의 교훈
    최근 우리는 연일 매스컴을 통해 '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 대한 보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장 큰 이슈는 '주객의 전도' 와 '도덕적 해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욕스런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하겠다는 목적에서 정신대와 위안부로 끌려가서 짓밟힌 어르신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겠다고 나선 모임이 바로 이 정의연이 아니던가! 그런데 거의 절규에 가까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과 연일 보도되는 의혹들은 이 정의연의 원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들의 절규 속에는, 어느 코미디언의 '그것은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본래 출발할 때 가졌던 그 마음들이 변해서는 안 되고, 주된 목적과 목표를 놓치고 엉뚱한 데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게다가 어린 아이들로부터 시작하여 어르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심지어 위안부 할머니의 피땀이 섞인 모금들, 국가의 세금으로 지원받은 것이 어떻게 정확하게 집행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애매한 기록들은 우리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물론 그들이 의도적으로 악한 모습을 행하였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미숙함과 소홀함은 도덕적인 해이까지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보면서 그것을 비난하는데 이 글의 방향으로 삼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사회적인 이슈를 보면서,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고, 또 문제점이 있다면 뼈를 깎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 이 문제로 남을 탓하기 전에 필자의 마음과 삶을 돌아보고 고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을 마음에 새겨본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예배하고, 세상 속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를 목양하도록 세움받은 자로서, 오직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 목사로서, 이런저런 감투에 휘둘리는 모습은 주객이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주된 사역이 아닌 것들에 집중하다가, 정말 잘 감당해야 할 사명을 놓치는 부끄러운 목사로 사는 모습에 깊은 한숨과 통회가 이어진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고백하며 출발하였지만, 이런저런 물질의 노예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어느 신실한 집사의 입에서 나온 자연스런 한 마디는 슬프게 한다. '목사님은 대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인데, 어떻게 대접을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만약 영원히 대접을 받아야 하는 분이 있다면 우리 주님이 아니던가? 이미 목사로서 필자는 받는 것에 익숙해져서, 섬기고 또 섬겼던 주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서, 필자는 이미 '타산지석의 교훈' 이 아니라, 이미 그들보다 더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자신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왜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런 목적은 아니었을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것이 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이 어찌 의도적으로 악을 행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서 주와 동행하는 모습이 식어지면, 멀찍이 주를 따르던 베드로가 주를 모른다 저주맹세했듯이, 지금 우리도 주님을 멀찍이 따르는 연유로 우리의 삶도 변질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르신 소명, 그 진실한 소명에 대해 주객이 전도된 모습, 주의 은해에 대해 배은망덕의 도덕적 해이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깰 수 있을 때 완전히 깨고, 팔 수 있을 때 완전히 파서, 고칠 것을 고치고 새롭게 할 것은 새롭게 해서 바르게 세워야 할 것이다. 주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그 목적과 목표를 바로잡고, 입술과 심령에 감사로 채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도록 다시 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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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6-10
  • [유의신 목사]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라는 종교는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기독(그리스도)은 영원하다. 기독교에 속한 교회는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기독(그리스도)에 속한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무너지게 못한다. 이글은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 배경에는 최근 기독교와 교회가 사회에서 혹독하게 비판을 받고 심지어는 혐오스러워하는 경향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판을 받아드리고 우리 자신을 재정비하여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고 원(原)기독(그리스도)을 최고의 가치로 다시 시작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원의도(原意圖)대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명을 다 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글을 풀어내려고 한다. 먼저 가장 큰 오해는 기독교(基督敎christianity)와 기독(基督Christ)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신자나 불신자가 별다르지 않아 보인다. 기독교는 개신교(protestant)를 대표하는 종교중의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교주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기독교라는 종교를 설립하신 분으로 오해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자칫 기독(그리스도)이 빠진 종교만 있게 되는 우를 범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처음과 나중 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아들이신 분이시기에 어떤 종교에도 매이시거나 간섭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신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골로세서1:15-16 다음의 오해는 교회(local Church)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회는 편협하고 독선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이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일반인에게도 못 미치는 각종 불법을 저지르고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데로 교회가 철저히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해있음으로 해서 종교단체화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종교 중에 하나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없는 교회이기를 자초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 지경 까지 갈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진정한 교회는 교단이나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값으로 사신바 된 거룩한(구별된) 교회라는 것을 일아야 한다.(마태복음16:16)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와 관계적 개념이지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라는 비유를 하신 것이다. 교회의 머리가 교단이나 목회자나 돈이 되어 버리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흥 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는 흥하고 망하고의 문제로 좌우 되지 않는다. 성도과 교회 가운데 그리스도가 있는 이상, 작고 크고에 관계없이 음부의 권세도 해할 수 없는 최강의 교회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16:18) 끝으로 기독단체(para Church)이다. 기독단체는 지역교회와 함께 서로의 파트너로 그리스도 대위임명을 실현해 나아가는 기관이다. 그러나 심히 우려스러운 것은 기독단체들이 기독이라는 단어를 단체 이름에 사용하면서도 기독(그리스도)과 무관하게 운영을 하는 곳이 많이 있다. 그런데다가 오히려 그리스도 이름을 해롭게 하고 있는 단체들까지 생겨 놀라게 한다. 그동안 기독교단체의 평판이 나빠지면서 단체 이름에서 기독이라는 단어를 빼고 일반 단체처럼 경영하는 곳도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모두 기독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기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여전히 기독(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단체명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기독(그리스도)과는 거리가 먼 가치를 추구하는 단체들도 있다. 그러려면 차라리 기독이라는 단어를 빼고 단체명을 새롭게 하여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어떤 기독 단체들은 설립 정신을 기독(교)정신이라고 하면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설립정신을 희석시키거나 아예 삭제하는 단체들도 보인다. 그러다가 경영난에 이르면 타 종교나 일반인에게 단체를 넘겨 버리기도 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비상사태에 임하고 있다.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와 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극히 제한받는 임계점에 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을 새롭게 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언행으로 우리가 생산 배출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내 지도록 살아 할 것이다. 빌립보서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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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5-27
  • [안동철 목사] 무례한 기독교 탈피하기
    몇 주 전 한 지인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였다. 조용히 식사하는데, 갑자기 단체 손님이 들이 닥쳤다. 들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목사님, 권사님, 집사님...” 식당에는 이미 몇 명의 손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점령군들은(?) 다른 손님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 순간에 소수자가 되고 말았다. 그분들의 기세에 기가 죽고, 이들의 소리는 식당에 전세를 놓은 듯 더욱 커졌다. 이윽고 음식이 들어오고, 목사님이 일어서더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거센 경상도 사투리에 큰 목소리로 말이다. 각종 수식어를 붙인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성령충만’을 말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을 대적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참 길게도 하셨다. 사람들은 목사님의 간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멘’이라는 추임새를 계속해서 넣었다. 나도 목사이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불편해진다. 나는 대중음식점에서 기독교인이 단체로 들이닥쳐서는 예의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면 좌불안석이었다. 게다가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며 기도를 할 때면 그분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불교신자들이 식당에 승려들과 들이닥쳐서는 서로 합장을 하고,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하고, ‘반야심경’ 같은 불경을 외운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어떨까? 아주 불편할 것이다. 나는 공공장소에서의 기도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찰스 킴볼(Charles Kimball)은 그의 책 <종교가 사악해질 때>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신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그것이 이웃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 종교는 이미 타락해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확신해도 된다.” 얼마 전 식당에서 기독교인들이 식사기도를 하다 신천지로 오해되어 경찰이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다른 경우는 기독교인들이 식당에 들어오니까 식당주인이 집안 일이 있어서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손님 받기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해 받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대중식당에서 대표기도는 하지 말 것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묵상기도를 하고 식사할 것을 말이다. 정말 필요해서 기도를 해야 할 경우라면 옆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작은 소리로, 짧게 기도할 것을 말이다. 박성철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는 <한국교회 내 기독교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연구>라는 논문의 결론에서 로마서 12장 14-21절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타인까지도 품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다.” 코로나 19 이후 기독교가 이 사회 가운데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정말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생명의 도’라 불리는 기독교가 과거에 당연히 해왔던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린 유럽의 교회들처럼 화석화의 길로 들어설 것 같은 두려움이 크다. 어항 안의 물고기처럼 사회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이웃사랑’과 ‘섬김’(diakonia)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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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5-12
  • [노상규 목사] 딱 좋은 때
    코로나19(COVID-19)로 온 세상이 요란하다. 많은 분들이 죽어가고 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확진자의 숫자를 대하며 세계가 혼돈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요양시설의 노인들과 시신을 버려두고 달아나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화도 나게 하지만, 그 상황을 마주한 사람들의 공포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생필품 사재기를 하는 뉴스를 접하며 성숙한 우리 국민들을 다시 돌아보기도 한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운동을 한창 펼치는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하루 종일 마스크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공적마스크 판매처인 약국 앞에 장사진을 치게 하는 이해 못할 장면을 대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온 국민과 온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본격적으로 맞으며 많은 교회들이 선제적으로, 오프라인 예배를 잠정 중단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 기간이 자꾸 길어지며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정부시책을 준수하며 온.오프라인 예배를 겸하는 교회들도 있다. 한편 온라인예배를 드릴 수 없는 소규모교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주일 오전예배 한 번만 드리기도 한다. 성도들의 친밀한 식탁 교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급기야 정부가 교회를 타켓으로 삼은 냥하며 오프라인 예배 자제를 권고하고, 예배시간에 공무원이 출동하여 점검하고, 확진자 발생 시 구상권 청구 운운하며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리 저리 어려운 상황들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금이 딱 좋은 때이다. 평소와 달리 교회봉사와 다양한 만남, 대외활동들을 자제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개인적인 시간을 보다 많이 누릴 수 있다. 무엇을 하기에 딱 좋은 때일까? 첫째, 말씀을 가까이 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성경읽기, 묵상, 성경필사 등으로 말씀의 깊이 있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때이다. 필자는 근래에 한문성경붓글씨 필사에 집중하고 있다. 예전에 한글성경필사, 영어성경필사에 이어 하는데, 그 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다르다. 한자 한자 뜻을 새기며 화선지 위에 붓을 옮기며 성경을 필사하는데, 때로는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직접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며 성경필사의 맛을 알기에 필자는 성도들과 지인들에게 성경필사를 자주 권하고 있다. 둘째, 기도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기도의 제목들이 뉴스로 수 없이 쏟아지고 있다. 코로나19사태 종식을 위해 힘쓰는 정부, 의료진, 확진자와 가족들, 선교지의 선교사들과 영혼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교회와 리더십들... 같은 시간대에 함께 모여 기도할 형편이 안 되는 교회의 성도들은 시간 나는 대로 교회를 찾아 코로나 대응수칙을 지키며 조용히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기도를 하기에, 개인 기도훈련을 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넷째, 가족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성도들은 주일 예배시간에도 가족이 모니터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평소와 달리 가족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며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이 때 평소 바쁨을 핑계로 실천하지 못한 가족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마지막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기독교인의 힘은 어려움의 때에 나타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도 조용히 어려운 이웃들의 먹거리와 생필품을 나누고, 필요를 채우는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음을 안다. 어려울 때 함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배가되어 나타난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이 때가 우리에게는 딱 좋은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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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4-10
  • [탁지일교수] 이만희의 목소리
    지난 3월 2일 이만희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이만희의 목소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목소리’에 더 집중해야 했다. 이만희가 뭐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을 보며, 뭔가 잘 못됐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평소에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는데, 이날은 이만희의 어눌한 목소리를 막는 한 피해자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메가폰 목소리가 거슬렸다. 이만희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집중했어야 했던 것은, 이만희의 목소리가 아니라 딸을 신천지에 빼앗기고 애통하게 울부짖던 피해자 ‘어머니의 외침’이었다. 우리가 이단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교회와 가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이단대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단에 빠진 이들을 모두 구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만희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애타게 딸을 찾던 어머니의 모습은, 신천지의 사기행위에 속아 집을 나간 딸을 찾기 위한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코로나 전염병이 신천지 신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천지에 속한 딸의 안전과 행방을 알려달라고 외치던 피해자 어머니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단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 이단문제는, 피해자의 눈을 통해 보고 귀를 통해 들었을 때, 그 본질과 위험성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이단문제는 고상한 교리적인 논쟁이 아니고, 이단문제는 교권 장악을 위한정치도 아니며, 정적 제거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이단문제는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거룩한 싸움이다. 한편 신천지에 빠진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되찾아오려는 가족들의 노력을 신천지는 소위 ‘강제개종’이라고 부른다. 적반하장이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정체를 숨기고 다가와 속이고 데려간 신천지가 ‘강제개종’의 주범이다. 얼마 전 법원은 이러한 신천지의 “사기행위의 기망이나 협박행위와도 유사”하다고 그 위법성을 판단했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신천지=거짓말=위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이미 교회가 알고 있었던 신천지의 정체를 이제 사회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게 되었다는 점은 일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외신들마저도, 신천지의 거짓말과 위장이 사태를 키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거짓말’과 ‘위장’을 교리적으로 합리화한 종교단체는 없다. 신천지의 2인자였다가 최근 신천지의 정체를 폭로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김남희의 표현처럼, 이만희의 신천지는 “종교사기 집단‘일뿐이다. 희망과 공포가 공존하는 어수선하고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건강’과 ‘안전’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신천지는 조직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도 신천지 신도들이 거짓과 위장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다. 만약 신천지 신도들도 국민이라면, 120억 원 기부가 답이 아니다.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한 진정성 있는 협조가 없을 경우, 신천지의 몰락을 위해 교회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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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3-16
  • [한석문목사] 나에게 연민을 느낄 때
    주일 저녁이 되면 목회자는 탈진을 경험합니다. 많은 시간 공들여 준비한 말씀을 한번에 쏟아 부은 후에 찾아오는 허탈한 감정인지도, 아니면 채 여물지 못한 말들을 주님의 이름을 빌어 쏟아낸 후에 찾아오는 정직한 가책인지도 모릅니다. 그 허탈과 가책의 시간이 이제는 제법 되어 무디어질 때도 되었건만, 오히려 그 석연치 않은 감정은 잿빛 만성으로 굳어져가는 느낌입니다. 새벽 예배를 마친 어느 날 동백섬을 따라 걷다가 문득 셈을 해보았습니다. “1년이 52주이니까, 주일 설교 52번, 찬양예배 52번, 수요예배 52번, 심야기도회 52번, 새벽기도회 350번 정도, 그러면 1년에 설교를 몇 번 하는 거지? 그리고 목회를 16년 했으니까 모두 합치면?” 소스라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설교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지만, 그렇다고 모세처럼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실시간으로 받아 적은 말씀이 아닌 바에야 그 설교에 목회자 개인의 신앙적 혹은 신학적 소견이 배제될 리 만무합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많은 설교를 쏟아냈을까?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설교를 해내야 할까?” 얕고 지저분한 우물과 그 바닥에 흙먼지 앙금처럼 가라앉은 참상이 흔들리는 필름처럼 지나갔습니다. 4세기의 에바그리우스(Evagrios)는 말했습니다. “수도자는 모든 것에서 떠난 사람이며 동시에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다.” 물론 세속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으며, 교우들과 부대껴 살아야 하는 목회자로서 수도자들에게나 있을법한 신비(神秘)를 기준 삼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잔인한 일인지 압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따로 수도자를 양산해내지 못하는 개신교(Protestant)의 안타까운 현실에서는 목회자에게서 수도자로서의 삶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에서 떠나 있지도 못하고, 그래서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많은 설교를 쏟아놓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섬뜩한 일이며, 하나님께 미안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늘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았던 헤지카스트(hesychast) 아르세니우스(Arsenius)는 자신의 책 「교부의 생애(Lives of the Father)에서 자신을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 은수자「隱修者(hermit)」가 되게 만들었던 콘스탄티노플 궁전에서의 하나님과 단 한 번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주여,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사람들 곁에서 떠나거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 성찰이 담겨있지 않은 잡다하고 분주한 만남들보다, 한적한 골방을 찾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정직한 시선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해 기운 교회당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보면, 지난하게 반복되어온 묵은 고민도 덩달아 깊어집니다. 모든 것에서 떠나 있지 못한 까닭에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즉 잡다하고 지루한 집착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하며 그런 가운데 주일이 다가오면 매번 조급해하고, 허겁지겁 성경을 넘기며, 어설프게 파악한 몇몇 구절을 조합해 건조한 설교를 만들어내는 삶에 이제는 스스로 연민(憐憫)을 느낍니다. 잠시라도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독방을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했으니, 고독이 지배하는 곳, 그래서 하나님만이 바라보이는 곳을 찾아 깊은 침묵에 잠겨보려 합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와 성령을 통하여 내 마음을 적시는 말씀으로서만 저와 교우들은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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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5
  • [원대연 목사] 한국교회는 이 민족의 파수꾼
    ▲ 원대연 목사(마산교회 담임) 우리는 6.25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 집단이 비열하고도 잔악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참혹한 파탄을 우리 민족에 안겨주었다. 국군과 민간인 56만 1천여명이 목숨을 잃는 등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왜 이토록 많은 인명의 손실과 재산의 피해가 나기까지 사전에 막을 수 없었는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더라면 이런 엄청난 결과는 없었을 것인데..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과연 당시 나라 지도자들은 누구를 위한 파수꾼이었나? 에스겔 3장의 배경을 보면 에스겔이 비슷한 후회스런 고백을 하고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생활한 지 12년째가 되던 해에 조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완전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지난날 자신이 민족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사실 에스겔이 괴로워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12년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침략당할 때 이스라엘의 경비라도 맡았단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으로 이끄는 선지자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책임이라며 마음 아파했다. 하나님께서도 에스겔 선지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삼으셨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3: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파수꾼이라 말하지 아니한 점이다. 정치가들, 군인들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이라 말하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겔3:7)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간케 하고, 모든 삶의 지혜가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파수꾼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받기 때문이다. 하늘의 지혜를 좇아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에스겔이 가진 아쉬움을 가슴깊이 영원히 간직하고 살아야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깨어 기도하며 소금과 빛으로 존절히 살았더라면 오늘같은 참담한 현실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이렇게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심히 통곡하며 가슴 아파 해야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파수꾼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명을 다하지만 결국 자신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3:19) 단12:3의 말씀은 교훈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 시대를 밝히 보고 파수꾼의 사명을 어느때보다 잘 감당하여 더 빛나고 더 영화롭게 되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하자. 우리가 무너지면 이 나라 이 민족도 끝장이다는 사실을 항시 기억하자. 우리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다. 게으르거나 나태하면 무서운 책임이 뒤따를 것을 명심하자. 힘을 내자. 한국교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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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 [가정호 목사]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
    과몰입한 이데올로거의 입장을 탈피하면 보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이다. 당신의 머리에 파고든 사탄의 발톱을 뽑아라.1.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나, 성경적 옳음과 기독교적 바름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사람, 즉 "교회 된 삶" 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세속 정부와 세상 정치세력에게는 정치적인 존재로 보인다.2.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로 정치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와 하나님나라의 통치 본질이 "불의에 대한 야단치기" 이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제국 로마의 정치세력에게 귀챦거나 두려운 세력이었다.3.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다. 예수께서 로마황제 가이사의 정치를 디테일하게 비판했거나 분봉왕 헤롯의 정치에 대해 분야별로 간섭하고 관여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보았고 동시에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4. 세속정부와 세상 정치는 교회와 교회된 그리스도인들과 긴장관계를 갖는다. 교회란 존재 자체로 세속정부에 대해서 디_스트레스로 또 어떤 경우에는 유_스트레스로 작동한다. 그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떤 이데올로기든 마찬가지다.5. 오늘날 희한한 "기독교 종교인" 들이 보인다. 아니 그들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설쳐대는 역겨운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강력하게 "기독교인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세력이라고 편을 갈라버린다.6. 이 말은 "자신이 계시의존적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맘몬을 숭배하기 위한 자본주의자" 라고 스스로 증언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다른 이데올로기에 비해 우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그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부치기 때문에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간다.7. 이데올로기가 가진 문제점들에 대해 바른 말,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곧바로 자본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자니 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거로 몰아 부친다면 이데올로기에 과 몰입한 편향주의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기독을 말하는 유사종교인임을 고백하는 셈이다.8. 복음에 대한 단순한 생각, 복음에 대한 단순 무식한 생각과 과몰입한 이데올로거인 자신의 예민한 공격성과 결합되어 버린 나머지 참된 기독자들을 빨갱이 또는 종북좌파로 몰아 붙이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부인한다. 기독교를 자본주의 신봉종교로 끌어내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거나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9. 그들을 판별하여 정의하자면 "맘몬숭배를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과 교회를 소비하고 싶은 유사 기독교인" 이 되어 버렸을 뿐이다. 복음은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것이 가진 문제점이나 잘못에 대하여 심각한 긴장관계를 갖는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렇다.10.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공격한다고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에게 협조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공격한다고 그가 자본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그가 땅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걷는 천상시민이면서 동시에 땅의 백성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11. 그가 계시의존적 복음에 사로잡힌 복음주의자이거나 개혁주의자라면, 이른바 예수와 부활과 성령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든 비판적 또는 비평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복음을 복음되게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면 그길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그것들로 부터 성도를 구별되게 살도록 돕는 역할이 교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12. 당신의 머리에 장착한 사탄의 발톱을 뽑으라. 상대를 악마화 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거는 그가 충성하는 이데올로기 숭배자, 또는 맘몬숭배자, 자기 숭배자일 뿐, 예수를 따르는 제자이거나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 할 수 있는 참된 기독자가 아니다. 당신이 만일 그렇다면 당신도 신천지같은 이단의 무리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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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8
  • [노상규 목사] 농촌교회, 도시교회
    ▲ 노상규 목사(함양 상내백교회 담임) 농촌교회에 온 지 만1년이 지났다. 그동안 대전, 광주, 창원, 김해에서 목회를 하다가 농촌교회에서의 사역은 첫 경험인 것이다. 아직 농촌교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느끼는 바들이 있다. 도시교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지역의 선후배 목사님들을 만나며 간접적으로 경험을 하고 있다. 농촌교회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도시교회와 농촌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 서로 협력하여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할 때이다. 농촌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1년을 지나도 애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농촌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최근 이곳 함양 서하초등학교가 뉴스의 초점이 되었었다. 예전에는 학생들도 많고 모범학교였는데, 현재 전교생 14명 중, 올 해 4명이 졸업예정이어서 폐교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학생유치에 나섰던 것이다. 학교에 입학이나 전학을 오면 부모의 일자리를 안내해 주고, 년 2백만 원의 사용료만 내면 주택을 제공해 주고, 학생들은 년1회 해외연수를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한국고용정보원이 분석한 소멸위험도시 1위 지역이 경북 의성이다. 의성의 인구는 예전에 230,000명인 때도 있었는데, 작년 11월 기준 52,606명이다. 이 중 39.8%인 20,947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이라는 것이다. 농촌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자연스럽게 농촌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특수한 곳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농촌교회의 교인수 감소와 고령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이렇게 교인수가 줄어들고, 고령화 되어 가는 농촌교회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감당할 일꾼이 없으니 교역자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예배 인도, 설교, 기도회 인도, 심방, 운행, 마을행사 참가, 농번기 일손 돕기 등등을 한다. 그러다보니 목회자의 탈진이 오기도 한다. 사모도 나서서 일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다 보니 갈등 상황과 탈진을 만나기도 한다. 재정적으로도 자립적으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교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미자립 농촌교회는 도시 교회들에 손을 벌리며 후원을 받고 있다. 목회자의 인맥에 따라서 후원을 많이 받아 재정적으로 어려움 없이 사역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턱없이 부족하다. 각 교단에는 농어촌선교회와 같은 기구들이 있지만 농촌교회의 문제를 풀기에는 역부족이다. 도시의 교회들이 농촌교회를 품고 매월 후원금을 보내지만 그것도 편차가 심하고, 그나마 대부분의 농촌교회들에게는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농촌교회는 도시교회의 못자리교회이고, 부모가 있는 고향교회이기도 하다. 각 교단은 농촌교회의 목회자들이 생활비에 매여 살아가지 않도록 목회자 평균 생활비 지급 등의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도시교회는 농촌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성도들에게 고취시키고, 함께 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방법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매년 의료봉사, 농촌봉사활동 등을 꾸준히 하는 교회들이 있다. 봉사활동 자체에 의미를 두지 말고, 농촌교회의 필요를 세심히 살피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도록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이다. 부산의 모 대형교회는 절기 때에 교인들을 나누어 도시나 농촌의 미자립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고 있다. 어느 교회는 직분자 임직식에서 임직자 가정을 적정 인원으로 나누어 미자립교회로 파송하였다는 기사를 접한 일도 있다. 가서 6개월을 섬기고, 돌아와도 되고, 그 교회를 섬겨 되도록 하였다는 것이었다. “거룩한 공교회와...믿습니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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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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