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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영헌목사] 목사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지난 9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고등학교의 9월은 대학교 입학 수시 전형으로 인해 고3을 맡은 선생님들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까지 아주 분주한 기간입니다. 저도 고등학교에 근무하다보니 직간접적으로 학생들의 입시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서울 상위권 대학진학을 위해 준비하는 제자 A가 자기소개서를 적어서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자기소개서 지도를 요청해 온 것입니다. 이 일은 통상 늘 하던 일인지라 기꺼이 지도를 해주었습니다. 전국의 대다수 대학들의 자기소개서 질문은 비슷비슷 합니다. 보통 4가지 질문이 주어집니다. 고등학교 3년 과정동안 학생 스스로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역량에 관한 것, 고등학교 3년 과정 중 학교에서 의미가 있었던 활동에 관한 것, 봉사와 나눔 그리고 갈등해소를 위해 기울인 노력에 관한 사례, 마지막은 전공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진학 후 학업계획에 관한 질문들입니다. A는 자기소개서를 거의 완벽하게 잘 적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항목에서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고등학교 3년동안 본인에게 의미가 있었던 학교 활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본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A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을 해놓았습니다. “나는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대략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학교에 올 때에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학생이었는데, 우리 학교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배 때마다 앞에 나와서 찬양팀으로 섬겼고, 스스로 기독학생임을 드러내면서 누구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기에 자신의 고등학교 과정 중 가장 의미가 있었던 활동은 종교수업 시간과 학교에서의 예배라고 적어놓은 것입니다. 저는 A에게 2번 질문에 대한 내용을 수정하라고 했습니다. A가 가려는 학교가 신학대학이나, 기독교대학이 아니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학 중 하나인데 이런 식으로 쓰는 것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A가 저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목사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제가 만약 대학을 떨어진다면 2번 항목을 잘 못 적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실력이 모자라서 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사람의 끈이 아니라 하나님 붙들라고 하셨잖요. 그러니 걱정마셔요. 자기소개서는 정직하게 쓰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더 이상 제가 이 부분을 손댈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자의 이 마음을 듣고 나니 더 기도가 간절히 되었습니다. 미션스쿨은 이런 곳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미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학교에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주변 학교의 기독교사들에게 학원 복음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없는지, 도울 것은 없는지 주변을 돌아봐주셨으면 합니다. 학교는 다음세대를 위한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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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2-24
  • [김충만 목사] 하나님이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 김충만 목사(양무리교회 담임) 복음화율 100%였던 태초의 에덴은 전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아담이나 노아의 가정 역시 전도나 선교가 요구되는 세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족, 민족)가 점점 주류가 되어갔고, 급기야 하나님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차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아는 자는 역사(사회)에서 점차 소수로 전락했다. 우리 시대처럼 말이다.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이처럼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시대를 다시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시대로 되돌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도 모른다. 교회생태계, 소수종교로의 시그널 구약교회(광야교회, 행7:38)로부터 현대까지 기독교 역사를 놓고 볼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차 소수가 되어가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과연 우리는 아담과 노아의 후손들이 살아가던 시대가 그랬듯 점차 더 깊어져가는 불신(세속) 사회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신앙을 지키고, 또한 그것을 다음세대에게 과연 전수할 수 있을까? 기독교 미래학자들은 대략 한 세대(30년)가 지나기 전에 한국 기독교가 500만명 이하가 될 것이라 진단한다. 이는 서구 기독교가 그러했듯이 이제 우리도 텅 빈 예배당과 교회(건물) 유지도 벅찬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거기다가 국가가 복지를 주도하는 복지국가(유럽식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확대해 간다면 사회적 교회로서의 역할은 안팎으로 점점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진짜 고민은 과연 후기 기독교사회에서도 여전히 교회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살아있는 기독교 성태계일까. 한국교회, 다시 길을 묻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형경기장 안에 사자의 밥으로 끌려왔다. 그런데 며칠을 굶은 사자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잡아먹기를 포기한다. 이때 황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들은 누구인가?”라고 묻고, 혼이 나간 신하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황제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렇듯 세계를 정복한 로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 앞에서 그만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에 의해 하나님께로 정복되어 갔고, 십자가는 로마를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되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없을 때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꼭 많아야, 커야, 넘쳐야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신학에 길들여진 것이 아닐까. 베드로는 거대한 예루살렘교회를 만들지 않았고, 하나님은 바울이 초대형 안디옥교회를 만들기를 기대하지 않으셨다. 이런 플랜은 하나님과 사도행전교회에 없다. 초대교회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가정교회였으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능력과 야성을 잃지 않았으며, 세상을 향해 생명을 건 전쟁을 치르는 날마다의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로 살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 사자의 밥이 되는 걸 영광스러운 하늘의 상급으로 생각했고,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는 그런 자로 사는 것을 결연히 거부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에 사로잡힌 그런 사람들로 세워져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바로 그 교회를 꿈꾸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종인가. 나는 잘 죽기 위해 오늘을 복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인가. 나는 이 세상을 우리 주님의 눈과 마음과 울림을 가지고 읽어내고 또 대면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소명자인가. 나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나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언행(言行)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이 세우시고 말씀하신 바로 그 교회가 내 안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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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2-09
  • [최병학 목사] 포스트 뽀로로, 펭귄 예수인 펭수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포스트 뽀로로’를 꿈꾸며 남극에서 헤엄쳐 ‘BTS(방탄소년단)의 나라’ 한국까지 온 펭귄, ‘어른들의 뽀통령’인 펭수(Pengsoo, 10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뽀로로 선배를 이기기 위해 EBS에 온 겁니다.” 등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동요 대신 대중가요가 깔리고, 희로애락을 적극 표현하고, 인터넷 신조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펭수가 레트로(retro)현상을 가미한 B급 문화로 지금 대중문화를 유쾌하게 만듭니다.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위는 1인 크리에이터지만, 펭수의 목표는 방탄소년단(BTS)처럼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펭수의 목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펭수의 인기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직설화법입니다. 펭수는 어른들의 점잖은 척함, 근엄함, 가식, 꼰대질을 그 자리에서 막말급으로 지릅니다. ‘조국사태’에서 드러난(물론, 더 큰 문제는 검찰입니다만) 불공정, 그리고 최근 기성세대의 갑질(나 때는~)에 예민한 2030세대의 감성에 펭수는 속 시원함을 던져줍니다. 둘째, 상명하복에서 자유롭습니다. 탈권위주의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펭수는 선배인 뚝딱이가 충고를 하려고 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뚝딱이 선배, 잔소리 하지 마세요. 저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속인 EBS ‘김명중 사장’ 이름도 스스럼없이 부릅니다. 펭수는 이렇게 노래 부릅니다. “참치는 비싸, 비싸면 못 먹어, 못 먹을 땐 김명중!” 셋째, 유희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펭수의 인간적인 매력입니다.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주철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막 나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선량함을 지키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던 2030에게 내 주변에 이런 친구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다.” 그렇습니다. 정시냐, 수시냐? ‘조국대전’ 이후 이제 전쟁터는 또 다시 입시로 바뀌었습니다. 그 병사들인 10대, 그리고 취업과 생존으로 절망하는 2030세대에게 펭수는 전쟁터의 위생병으로, 혹은 친구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넷째, 모험심입니다.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인 펭수의 인기 배경에 관한 주철환 교수는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은 옛말이다. 이젠 자유롭게 말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덕목인 시대, 단정한 모범생의 시대가 아니라, 단순한 모험생(연습생)의 시대이다.” 파격을 좋아하는 2030 세대의 감정을 저격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을 찾아서 자연스럽게 모험하는 펭수를 향하여 젊은 세대가 손을 들어 열광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살아있는 캐릭터이기에 확장 가능성이 있습니다. 키 큰 배우가 목소리와 더불어 연기하는 펭수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까요? 더욱이 무대본, 무연출의 예측 불가능한 전개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이러한 펭수가 기성세대를 꼬집고 기득권의 카르텔을 해체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다른 세상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펭수의 의상이나 언행 등이 저급한 B급 문화 콘텐츠라고 볼 수 있지만, 가식을 들춰내는 통쾌함, ‘근데 뭐가 어때서’라는 여유로운 상쾌함, 그리고 권위에 대한 기발한 도전, 펭수가 지금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펭수의 말에 다른 세상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펭수를 통해 펭귄식 예수님의 형상을 엿보게 됩니다.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른이고 어린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면 되는 거예요.” 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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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1-25
  • [유의신목사] 서열(序列)의 허구(虛構)
    최근 교육계에서는 서열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서열을 없앤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은 줄 세우기 서열문화에 길들어 있다. 하루아침에 힘 있는 사람이 없애라고 한다고 없어질 것도 아니다. 그렇게 쉽게 서열문화가 바뀌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와 집단에는 뼛속까지 서열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줄을 세우는 문화가 일상이 되어 버린 우리 사회현상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첫 학교 입학을 하면 선생님께서 운동장에서 한 줄로 키대로 세웠다. 그리고 각자의 번호가 주어지고 책상 위치도 이 번호대로 앉혔다. 그러다 보니 조숙하거나 생일이 빠르거나 유전자적으로 덩치가 큰 녀석들이 뒷번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뒷줄 아이들이 교실을 장악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성적순으로 힘이 나뉜다. 성적이 좋은 친구가 선생님이 배경이 되니 주먹도 맥을 못 추게 된다. 그러다가 머리가 커지고 어느덧 본격적으로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주먹 순서나 성적순이 아닌 연공서열(年功序列)로 사회생활이 재편된다. 결국 이런 서열은 절친들과의 서열이 서서히 재산순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변화되는 서열은 나이가 들면 또 한 번 바뀐다. 건강서열이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건강이 무너지면 서열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온통 건강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건강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서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후의 서열이 기다리고 있다. 사후의 서열은 2진법으로 진행된다. O(천국)과 X(지옥)이다. 이 사후 서열은 생전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13:30) 인간들이 만들 놓은 서열은 하나님 앞에서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장교후보생으로 훈련 받을 때에 일어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구대장이 40명 구대원을 얼차려 시키려고 완전군장으로 하고 연병장에 집합을 시켰었다. 우왕좌왕하는 훈련생들에게 ‘후방 전봇대 선착순’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5번째까지 열외’하고는 다시 선착순을 시킨다. 나의 한계에 다되었을 때였다. 세 번째도 5번째에 들지 못했었는데 짓궂은 구대장의 구령은 ‘뒤로 돌았!’ 하고는 ‘뒤로 번호’ 끝에서 5번째인 나까지 끊고 다시 선착순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구대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은혜로 열외가 되었었다. 그렇다 구대장이 ‘뒤로 돌았!’하면 서열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뒤로 돌았!’하는 날에는 이 세상에서의 서열은 의미가 없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인)[그리스도교(인)]는 서열이 존재한다. 아니 종교라는 시스템 가운데 있으니 서열이 필연적으로 존재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서열문화가 자리 잡고 있어서 직무와 직분이 계급으로 여겨지는 타락한 군상들이 되고 만 것이다.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기독(인)[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관계로서의 유기적 관계를 회복하는 부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실된 기독인이라면 서열을 넘어 서는 십자가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는 무서열(無序列)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이 땅에서의 서열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깊이 깨달아서 탈 서열화로 교회에서 계급을 타파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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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11-12
  • [송시섭 교수] 시간을 묻고, 장소로 답하다
    누가복음 17장 중반부에는 재미있고도 유명한 대화가 소개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할지를 묻는다. 그런데 그 대답은 한 마디로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예수님은 시기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덧붙여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고 설명하시면서 그 신비한 답변으로 그들의 질문에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우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시간(when)에 대한 질문을 공간(here, there)으로 답하신 것에 주목한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적인 시간의 축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을 초월해서 임하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하시는 듯하다. 본디 그 분의 나라는 시간에 구애됨이 없으셨다. 오히려 그 분은 ‘시간’보다는 ‘장소’와 ‘공간’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다. ‘때’는 언젠가 이를 것이다. 노아의 ‘때’처럼, 롯의 ‘때’처럼 인자의 ‘때’도 분명히 이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리고 그들에게는 ‘때’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주님의 관점은 시간을 넘어서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물리적인’ 공간에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더라도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하신다. 그리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결국은 사람간의 ‘관계’속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안에’라고 번역된 헬라어(ἐντὸς)는 장소적인 의미로 ‘안에’(within, inside)로 번역될 수 있으나 ‘손닿는 곳에’, ‘가까이에’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고, 나아가 ‘관계’적인 용어로서 ‘가운데’(midst)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내면적인 해탈의 상태가 아니라, 사람들 간의 실재적인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구현되는 것임을 잘 암시해주고 있다. 혹시 우리가 저 너머 어딘 가만을 계속 응시한다면, 또한 여기저기로 향방 없이 목적지를 찾아 방황한다면 우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린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경험해야 한다. 그러기에 천국(天國)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나라(神國)로 다시 되새김되어져야 하고, 우리의 시선은 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져야 할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그 도래지가 ‘너희’라는 것이다. 너희가 누군가? 바로 질문을 던진 사람들, 대답의 수신자들인 ‘바리새인’이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바로 그들의 코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하다니. 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주고 있다. 이는 우리의 관점이 ‘우리’로부터 ‘그들’에게로 돌려져야 하고, 우리가 ‘그들’ 가운데, ‘그들’ 속으로 더 많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우린 현재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그들의 사태에 더욱 깊이 그리고 광범위하게 관계해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은 결코 잘 난체, 아는 체 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섬기고 나누고 목숨을 바치는 관계의 방식이어야 하며, 향기를 풍기며 빛을 발하는 존재로서의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대화와 설명의 끝을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살리리라’는 엄청난 부담으로 마무리하신다. 그 표현이 자신의 목숨만 보존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생명, 나아가 공동체를 구원하는 우리 각자의 거룩한 사역까지 포함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들이 물었고, 주님이 답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시간을 초월하고, 장소를 뛰어넘어 우리와 그들의 관계 속에서 임하게 될 것을, 아니 이미 임했음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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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28
  • [안동철목사] 생명을 살리는 교회
    얼마 전 필자가 사역하는 교회 새벽기도 때 소란한 일이 있었다. 한 낯선 남성이 새벽기도회가 끝날 때까지 들어오는 문 앞 끝자리에 앉아서는 등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불이 꺼지고 개인기도를 시작하자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거친 말과 심한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기도를 중단하고 나가 보니 교회에 가끔 오는 50대의 알코올중독자 형제였다. 이 형제와 새가족실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님이 제게 “그 형제의 집으로 가서 기도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셨다. 솔직히 무슨 일이 닥칠지 몰라 피하려고 했지만 주님의 마음이 너무 분명해 그 형제를 따라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형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때로는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고 했다. 이런 세상과 사람이 싫어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다고도 했다. 솔직히 두려웠다.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형제의 방은 알코올이 주인 된 비참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한 사람 겨우 누울 수 있는 방에는 온갖 쓰레기와 술병이 널려져 있었고, 코를 뜰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필자에게 월드비전의 세계시민학교장인 한비야 자매가 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의 내용을 생각나게 했다.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 주었다.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했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이것이 내 마음이다.”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쓰레기와 같은 인생’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눈으로 본다면 그 형제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귀한 인생’임을 주님이 보여주셨다. 그리고 필자는 그 악취 나는 방에서 형제의 몸에 안수하며 그 형제를 위해 기도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저와 그 분에게 큰 은혜를 주셨다. 형제가 갑자기 흐느끼며 “목사님, 저 같은 인간도 희망이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아무 말 않고 악취가 진동하는 그 형제를 안아주었다.그리고는 “제가 형제님의 친구가 되어 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집을 나와 교회로 돌아가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사는 그 형제를 돕고,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솔직히 내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과 관계없이 분명한 사실은 이런 잃어버린 한 사람을 위해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이런 사람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주변을 둘러본다. 절망적 상황이 우리를 덮고 있다. 주님이 피값을 주고 산 존귀한 형제자매들을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정죄한다. 내가 조금 아는 지식과 정보로 모든 것을 아는 양 함부로 판단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입에서 생명을 살리는 말과 복음과 하나님 나라 이야기보다 세상의 이야기들과 죽음의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교회의 모판과 같은 다음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가나안 교인’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그러나 하나님 나라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예수쟁이는 달라야 한다. 주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을 안아주고, 살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죽음을 노래하지 말고 생명을 노래해야 한다. 갈등의 증폭자가 되기보다 갈등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 성도가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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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4
  • [강규철장로] 이제는 돌이켜야합니다
    얼마 전에 중남미의 한 선교사님이 가짜 선교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현지에 사역하는 선교사로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거주하지 않는 선교사의 수가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불안한 치안과 열악한 환경,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운 요인으로 인하여 안전하고 살기 좋은 나라에서 살면서 현지 사역을 하고 있지 않고 있는데 본국에는 현지선교사로 파송 받고 지원을 계속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방문한 남미의 어느 선교지에서는 현지 사역을 하지 않는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본인은 도심지 아파트에서 살면서, 현지에서 원주민들을 상대로 교회를 세우고 아주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하는 다른 선교사의 선교 센터를 며칠 빌려 현지인을 상대로 세미나를 열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마치 본인의 사역지인 것처럼 호도하는 경우였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런 잘못된 일에 대하여 내성이 생겨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선교사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세를 규합하여 열심히 사역하는 선교사를 음해하거나 왕따를 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이런 가짜 선교사들 때문에 진정으로 선교사역에 전심을 다하는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본국 교회와 성도들의 오해로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도 처음에는 뜨겁게 타오르는 선교적 사명을 갖고 선교지에 부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는 현지적응과 자녀교육 문제 등으로 인하여 잘못됐지만 쉽고 안전한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된 행위가 사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행위는 이들을 파송하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기만하는 중대한 범죄입니다. 오늘의 선교사역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기에 성도들은 선교사님들에게 많은 물질과 기도로 지원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짜 선교사들의 행위가 성도를 기만하고 그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있으며 나아가 선교에 대한 열정을 식혀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의 책임에서 본국 교회 지도자들의 관리, 감독의 소홀함도 한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파송 선교사를 선정하기 위해 그들의 사명감, 열심, 준비성 등을 고려하여 선정하고 철저히 교육을 시켜 파송했다면, 그리고 파송 후 세밀한 지원과 철저한 관리 감독이 이루어졌다면 이런 한탄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선교사와 배우자의 선교적 소명과 열정 보다 인맥과 학맥 위주로 선정하여 파송하고 그 뒤론 한 번도 확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해주는 본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더 나쁘고 더 큰 책임을 져야합니다. 오늘의 세계는 하루거리 밖에 되지 않고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어느 곳이든지 진출하고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는 어느 곳이든 선교사님들의 모습과 행태가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단지 본인들만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요. 이들 가짜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의 땀 흘려가며 만든 선교헌금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미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는 선교현장에서도 알곡과 가라지를 가려내야 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만약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해 지체한다면 한국교회는 성도들로 부터의 엄청난 지탄과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은 당연히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9-09-23
  • [김영일목사] 정도, 반드시 가야 할 그 길
    ▲ 김영일 목사(통영시민교회) 며칠 전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목사가 제직회, 당회, 공동의회 등 교회 내의 모임을 합당하게 실시하지 않으며, 성도들은 교회당 건축을 위하여 부지와 헌금을 드리는데 목사는 자신이 건축위원장직을 맡아야 한다고 하고, 교단의 정체성과 다른 곳에 기도하러 간다는데 이런 목사를 우리는 거부하니 지도자급에 있는 분들이 중재, 조정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라며 상기된 어조로 항변하는 것이었다. 한 동안 전화기를 들고 있으면서, 이런저런 항의를 들으니 정말 기가 막혔다. 그래서 여러 차례 부탁도 하고, 항의도 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 라는 말로 목사는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대화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 바깥에서 이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교계의 정치체계 테두리 안에서 해결해 보고자 이 사람, 저 사람 전화로 자문과 도움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화를 끊기 전에 그는,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해 보고, 가능성이 없을 때는 연말 예산을 세울 때, 목사의 생활비를 대폭 삭감하여 스스로 임지를 구하여 나가도록 하는게 현명한 방법이라' 는 친구성도의 자문을 받았는데, 그 방법을 사용해 볼 참이라는 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교회 안팎에서 끊임없이 문제들이 발생한다. 그런데 지혜롭게 그 문제를 잘 풀면 아주 아름다운 일이 있지만, 그것을 바르게 풀지 못하면 복잡하게 되어 천사라도 풀 수 없게 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지도해주시는 분들에게서 한결같이 들은 말이 인생의 지침처럼 되어 있다. 그것은 '문제는 풀기 위해 있는 것이지, 망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다. 문제는 분명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그 문제를 푸는 과정에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경우도 발생한다. 그런데 아무리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그 문제를 푸는 데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 있는 법이다. 필자는 그것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종종 정도는 융통성이 없어 보이기도 할 수 있고, 항상 한 발 늦어 손해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 그런 피해를 만나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융통성이나 꼼수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해결은 아니다. 순간적인 봉합이며, 언제든지 다시 터져 나올 때는 그 전보다 훨씬 더 엄청난 문제로 나타나게 된다. 오히려 정도로 걸어가서, 그 결과 실패라는 것을 안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또 다른 승리를 위한 멋진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필자는 다시 전화를 들었다. '감정 대 감정의 대립은 불이 되는 경우가 많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이 되는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으니, 정도를 찾도록 하고, 비록 늦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속해서 합의점을 찾아가보도록 하며, 주위의 협력자들이 동역할테니 인내하며 가고, 목회자에 대해 감정적인 결정은 결코 정도가 아니라' 는 간절한 호소를 하고 전화를 마쳤다. 이제 필자에게는 숙제가 남았다. '그 호소를 한 성도의 대상이 된 목회자에 대해서는 어떤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말인가?' 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설득할 수 있고, 그의 멘토가 되는 사람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지나친 간섭이 될 수도, 한쪽만 지펴진 불씨가 자칫 잘못하면 두 배의 불씨가 될 수도 있으므로 어느 것이 정도인지를 찾아야 한다. 정도는 중요하다. 그 정도는 각 사안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도를 구하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정도, 그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정도만이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도 당당하며 떳떳한 삶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19-09-10
  • [남송우교수] 한일 경제전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인본사회연구소 이사장 아직 한 여름의 더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올 해는 예년 같지 않은 무더위를 경험했다. 여름이란 계절이 주는 더위를 무색하게 하는 한일 간의 경제전쟁이 한 여름을 덮쳤기 때문이다. 일본이 총성없는 경제전쟁을 선포함에 따라 한국민의 반일, 극일의 목소리가 열기를 더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악연과 순연을 지속해온 이웃이다. 이런 연유로 한일 간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적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는 한일 간의 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한일 갈등의 근원을 해소할 방안을 제대로 모색해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는 이 점에서 분명한 입장과 실천적 방안을 내보여야 한다. 일본이 우리 나라에 미친 악영향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427년 전에는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국토와 국민을 유린했으며,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그것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 어떤 집단보다 선구자적 입장에서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다. 교회가 그만큼 민족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사회를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의 지도적 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강도가 약화되고, 교회의 사회적 역할은 갈수록 취약해졌다. 그래서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은 사회가 교회를 염려해야 하는 선까지 추락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일 간의 갈등을 해소해 나가는데 한국교회는 어떤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지금 한국은 일본에 대해 단순한 반일을 넘어 극일을 위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자력을 바탕으로 한 극일을 지향하고 있다. 산업에 사용되는 일본산 부품을 국산화 하려고 하는 노력은 이런 중요한 움직임이다.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경제력을 넘어서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명제는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지향점이다. 경제력이든 군사력이든 우위에 놓여 있을 때, 평화공존이 가능한 것이 엄정한 국제질서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적인 힘의 논리는 온전한 평화를 결코 실현할 수 없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 있어 우위의 관계는 종속의 논리가 작동하도록되어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종속화하려는 힘의 논리가 현실적인 국제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힘의 논리가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으면 평화공존은 현실화되기가 힘들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정의가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를 넘어 국가를 넘어 세계보편의 인류애에 바탕을 두지 않은 정의는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한국교회가 내세울 수 있는 중요한 한 몫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인간을 향한 인류애를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갈등을 푸는 열쇠이다. 그러나 이 열쇠를 만들고 작동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원한의 역사를 가진 일본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며 순전한 발상인가? 그러나 한일 간의 근본적 갈등을 푸는 길은 사랑에 바탕한 정의, 정의를 통한 평화 공존으로 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길은 너무나 힘든 길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길과 꼭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극일을 위해 우선은 자력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지만, 그 이유가 단순히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갚기 위한 것이 긍극적 목적이라면, 한일간의 역사의 갈등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가 이 지점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근원적으로 고민할 때이다. 이 고민이 현실적 실천력을 발휘할 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제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19-08-27
  • [탁지일교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하라?
    최근 이단들의 두드러진 특징들 중 하나는 친사회적인 봉사활동이다.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사회적 시각이 늘어날수록, 이단들은 양의 옷을 입고 동분서주한다. 마치 자신들이 기성교회의 대안인 것처럼 선전에도 열을 올린다. 이를 위해 ‘오론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한다. 의아한 점은 교회의 선행과 순기능에 지면을 할애하는데 인색한 언론들이 이단들의 봉사활동은 다수의 지면을 할애해 적극적이고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일이다. 주요 언론들뿐만 아니라 지방 언론과 인터넷 언론들에는 하나님의교회, 신천지, 구원파, 전능신교 등 최근 주목을 받는 이단 단체들에 대한 기획보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게재되고 있다. 광고인지 보도인지 모를 형식을 갖추고 노골적인 홍보매체로 전락해버린 언론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얼마 전 「미디어오늘」 보도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즉 거액의 대가를 받고 게재한 홍보성 기사라는 것이다. 적어도 공익을 추구하는 언론이라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이단단체들에 대한 홍보성 보도는 자제했어야 한다. 이단들은 이러한 보도 내용을 가지고, 포교와 홍보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조심스러운 점은, 사회적 논란이 되는 단체에 대한 주요 언론들의 홍보성 기사가 게재되면, 누군가는 경계심을 풀고 이단단체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단들은 이러한 기사들을 십분 홍보에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 면죄부처럼 사용할 수 있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하나님의교회와 동아일보 출판국 거래내역에 따르면 신동아를 만드는 동아일보 출판국이 올 1월부터 6월까지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이하 하나님의교회)로부터 발행금액으로 받은 돈은 약 12억원 이상”이며, “특히 신동아 6월호가 나올 즈음 7억8000여만원을 발행금액으로 받았다. 신동아 외에도 동아일보 출판국이 펴내는 여성동아 역시 지난 3월22일자 동아일보 LIVING&ISSUE 섹션에 하나님의교회 관련 기사를 발행했다. 이런 식으로 동아일보 출판국이 1월3일부터 6월14일까지 하나님의교회로부터 받은 액수는 총 12억여 원이다.”라고 보도했다. 이와 함께 중앙일보 및 유관 언론기관들, 그리고 경인일보 등의 지역 언론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보도가 이루어졌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지면에 그 정도 분량이 나가는 거면 기자와 데스크가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 독자가 이를 믿고 읽는 것인데, 거기에 돈이 개입하면 돈 때문에 사회적 가치를 과대 포장한 것”이고 “독자 입장에선 기사로 알고 광고를 읽은 셈으로, 독자를 속이는 행위이자 지면 낭비”라고 비판한 곽영신 세명대 저널리즘연구소 연구원의 분석을 덧붙였다. 만약 이러한 부적절한 거래가 사실이라면, 언론이 거래를 통해 자신의 공신력을 매매한 것이다. 성경은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태 6:3)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지만 이단들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반드시 왼손이 알게’ 한다. 즉 양의 옷을 입고 자원봉사를 하고, 이를 사진으로 담아 언론에 보도하도록 한 후, 이를 가지고 공신력 있는 기관들을 찾아 수상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받은 상들을 인터넷에 올려 자신들을 홍보하거나, 복사해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들이 친사회적인 평범한 종교단체라고 선전한다. 대법원은 지난 해 “원고 교회[하나님의교회]는 1988년, 1999년, 2012년경에 시한부 종말론을 제시하여 여러 기독교 단체로부터 이단 지정을 받은 바” 있으며, “원고 교회의 일부 신도들이 통상적인 정도를 넘어선 과도한 종교 활동과 헌금 등의 문제로 심한 가정불화가 발생하고, 이혼까지 이른 사례들도 있다”고 하나님의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언론의 자유는 침해당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언론도 국민의 올바른 알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 일부 언론들의 실리에 대한 집착이 이단 피해를 확산시키고 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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