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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정호 목사] 제국인가? 천국인가? (빌레몬서)
    자신과 주인의 돈을 동시에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다. 그의 주인은 골로새지역에서 주님을 섬기는 빌레몬이었다. 이 노예가 로마감옥에 구금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은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노예는 당시 골로새 교회의 주된 지도자였던 빌레몬의 집에 재산을 축내는 도적질을 했던 사람이었다. 이 노예는 로마에 있는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 감옥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는 이유로 구금된 노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울이었다. 이 노인이 감옥에 붙들려와 함께 지내는 젊은 노예인 오네시모를 주목한다. 오네시모는 바울과 같이 지냈다. 그리고 그는 바울사도의 돌봄 가운데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평강가운데 빠져든다. 밤과 낮을 함께 지냈다. 마치 주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고동락하였다. 노예인 오네시모는 회심했다. 바울이 경험했고, 빌레몬과 그의 가족이 경험한 믿음과 사랑을 맛보았다. 오네시모는 노예였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를 맛보았고 바울의 창자같이 귀한 심복이 되었다. 무익한 사람에서 크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복음이 그렇게 사람을 바꿨다. 복음과 성령의 역사는 환경과 시간 공간을 초월한다. 바울은 골로새 지역교회를 섬기는 빌레몬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단 스물다섯구절로 구성된 엽서같은 편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나와 너에게 참으로 필요한 오네시모에게 자유의 표를 주길 바란다. 오네시모가 진 빚과 손해는 내가 배상하겠다". 바울의 삶은 복음전파라는 틀 속에서 체계적으로 섬세하게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너는 내게 진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과 사랑의 빚을 고려하여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유의 표를 주어라. 내게 주어진 권위로 이 일을 할 수 있으나 너의 허락 없이는 이일을 진행하지 않겠다. 너는 내가 권한 것 보다 더 이 일에 협조할 것을 믿는다. 당시 로마제국 전 지역에 노예제도는 탄탄한 사회체계로서 그 틀거리에 어느 누구도 균열을 낼 수 없었다. 제국의 기반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동일한 인간이 짐승취급을 당하는 현장을 보면서 아무도 그것이 잘못된 죄악임을 말하지 못했다. 디도서에서 나타나듯이 바울은 노예제도를 혁파하려는 기획을 한 일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안에서 노예에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신 그리스도의 종이 되도록 그의 전 인격, 전 존재를 바꾸었다. 노예인 오네시모를 자유인이며 해방자로 바꾼셈이다. 공동체의 리더였던 빌레몬은 큰 손해를 감수하고 바울 프로젝트에 자신의 뜻을 합했다. 빌레몬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각성된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 압비아와 아킵보는 골로새 교회의 사역자들이었다. 감옥안에서 교회된 오네시모는 보편교회인 골로새 교회의 도움속에서 자유인이 된다. 해방된 노예가 된 것이다. 로마제국의 기반이 되었던 노예제도는 감옥안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빌레몬서는 이 시대에도 큰 충격을 던진다. 예배당 밖 감옥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본질을 실천함으로서 보편교회가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실천한다. 바울의 복음사역은 충격적이다. 복음은 그렇게 세상에 큰 충격을 준다. 작금의 교회들은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람을 발생시키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탄탄한 세속적 틀거리에 균열을 내는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고 있는지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오히려 세상보다 더 세속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충격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 더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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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09
  • [김충만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다.
    인류와 세계의 역사를 BC(Before Christ, 주전/主前)와 AD(Anno Domini, 주후/主後)로 나눈 분은 누구인가. 주 예수 그리스도다. 그의 종교와 사상과 신념이 무엇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과 동서고금을 망라해서 온 인류는 지금 주후 2018년을 살고 있다. 무슨 말인가. 그가 비록 모슬렘이든, 공산주의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후 2018년째 되는 해를 온 세상과 열방은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강생(降生)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야)가 역사적 부활을 이루신 날, 바로 그 부활절을 맞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가 만들어낸 허구(신화, Myth)가 아니다. 역사와 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인류를 죄와 사망과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예수를 믿든지 믿지 않는지와 상관없이 어느 누구도 예수는 서구 기독교가 만들어낸 기독교의 아바타(Avatar)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는 기독교가 만들어낸 신화(허구)적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단군처럼 신화(허구)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BC와 AD를 가르시면서 역사 한복판에 사람으로 오신 분이시다. 이 역사적 사실과 진리를 성경을 중심으로 좀 더 살펴보자. 복음서와 고린도전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한 세대가 가기 전에 기록되어 당시 기독교 세계(팔레스타인, 유럽, 아시아)에 널리 필사되어 읽혀지던 문서였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만일 앞서 얘기한 성경들이 예수가 사신 후 수 백년 혹은 천년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다면 역사적 신빙성(Credibility)은 그만큼 신뢰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성경(복음서, 고린도전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지 불과 한 세대(30년)가 지난 바로 그 전후에 기록된다. 예를 들자면,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난지 불과 30년이 지난 게 지금 2018년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당시 서울올림픽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 살아있는 때라는 뜻이다. 그럼 거짓이나 과장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기록하거나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잖은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면 고린도전서 15장에 많게는 500여 형제가 지금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 아니고서야 어찌 밝은 대낮에 기독교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버젓이 기록하여 세상 앞에 이야기를 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라.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고 이스라엘 역시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바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기록(마 28:11-15, 눅23:52, 24:20-49)에서 로마와 로마 황제를 모독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록들이 공공연하게 복음서 안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사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이를 그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이는 사실이며 역사라는 얘기가 된다. 사람들이 자기가 믿지 않으면 사실인 것까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보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으니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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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3-26
  • [송시섭 교수] 아이덴티티(Identity)를 넘어 위덴티티(WEdentity)로
    미투(Me too)가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누군가는 오래되고 뿌리 깊은 남성우위 문화의 붕괴라고 하고, 혹자는 이를 모든 권력관계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한다. 오랫동안 억압된 여성들의 한이 터져 나오는 도도한 흐름의 끝에는 보다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기대하고 소망한다. 우리가 느끼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허탈감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궁금함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 뿌리는 타락한 우리의 죄성(罪性)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죄성으로 모두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걸 보면 거기에는 우리의 본성이외의 또 다른 요소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리라. 여러 원인중 하나라도 찾을 수 있다면, 어둠을 모두 지울 수는 없으나 그 원인을 캐내어 작은 빛을 밝힐 수는 있지 않을까. 현재의 거대한 탁류의 근원에는 ‘정체성’(Identity)에 대한 혼란이 자리 잡고 있다. 근대이후 진리탐구의 시야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타인을 상실하고 자기만을 집중하는 근대인들은 결국 사르트르의 말처럼 ‘타인이 지옥’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자기중심의 시대에서는 타인이 객체화되고, 대상화되며, 결국 도구화되고 만다. 그곳에 폭력의 상대방, 사회적 약자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예술대학의 한병철 교수가 「타자의 추방」(Die Austreibung des Anderen)에서 말하듯이 우린 세계화, 정보화를 통해 모두가 같아져버린 사회 속에서 ‘고립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공회전’을 하고 있다. 팀 켈러 목사는 「답이 되는 기독교」(Making Sense of God)에서 우리에겐 카렌 블릭센(Karen Blixen)으로 알려진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의 저자 아이작 디네센(Isak Dinesen)의 정체성을 향한 세 가지 길을 인용하면서 현대인들은 ‘안을 보는 부류’에 해당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주적 질서를 믿지 않고, 자존감을 얻으려고 늘 경쟁하고 변화하는 유행에만 민감한 우리들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그 탈출구로서 ‘위를 보는 사람’을 제시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우리 말 ‘위’(上)와 같은 발음의 영어가 ‘위’(We)라는 사실이다. 이제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던 자존감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려야 한다. 자아의 압제를 벗어나 ‘우리’로의 여행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나만 보는 관점을 돌려 위를 바라보고, 내 옆의 이웃을 보게 되는 순간, 아이덴티티(Identity)로부터 위덴티티(WEdentity)로 한 걸음 나가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조어(造語)를 발견하곤 무릎을 내리쳤다. 깨달음의 눈을 떠 가장 가까운 아내와 남편을 바라보자.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오랜 정을 나눈 친구들, 그리고 매주 만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보자. 나를 벗어나 너를 발견하며, 나의 믿음이 아닌 우리의 고백을 다른 본문의 다양한 톤으로 읽어보자. 신경(信經, Creed)은 단조로운 음의 합성이 아니라 각자의 인생역정을 담은 화음이어야 한다. 이제 우리의 눈앞에서 포스트모던이 무너지고 있다. 모두를 연결해줄 것처럼 외치던 신탁(神託)들은 결국 모두를 끊어놓고 말았다. 이제 나(I)만 외치던 주문에서, 주님의 마지막 기도처럼 우리도, 우리(We)가 가득 찬 기도를 드릴 수 있을 때 우린 새로운 인식, 위덴티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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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12
  • [박철 목사]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
    요즘 신문을 잘 안 보게 된다. 답답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회면을 보아도, 정치면이나 경제면을 들여다보아도 그 어디에도 희망적인 소식은 없다. 그래도 이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기에, 수박겉핥기식이라도 읽지만 온통 우울한 소식뿐이다. 민심이 흉흉하다. 살풍경한 기사거리로 넘쳐난다. 지금 세상은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궤도이탈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세상은 힘이 세고 가진 것이 많아야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은 죄를 짓고서라도 자기만, 자기 가족만 편히 살기위한 목적으로 온갖 수단과 편법이 등장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다. 지금 이 시대는 어른이 없다. 권위의 부재현상이 더욱 노골화되어 가고 있다. 서로 자기가 잘 났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상대방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언성을 높이다. 그렇게 사회문제를 잘 진단하면서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원망과 탓이 지배하는 사회이다.예수께서는 “너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선언하셨다.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도 한 줄기 빛을 이기지 못한다. 소금 한 주먹이면 부패를 방지할 수 있다. 오늘의 교회가 제 구실을 다했으면 사회가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오늘의 한국교회는 소위 ‘교회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맘몬과 바벨이 혼재된 그릇된 신앙의 형태를 양산했다. 이 사회의 황금만능주의 사상이 교회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그것을 거부하지 못하고 적당하게 타협했다. 부의 축척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했다. 바벨이라고 하는 종교권력이 독버섯처럼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렸다.예수의 영성을 따르지 않았다. 예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아무런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 채 겉만 화려하게 장식하여 프로그램화했다. 회칠한 무덤과 다름없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섬김의 영성을 한국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또 한국교회는 나눔의 영성을 가르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그런 실천이 부족했다. 교회만큼 부자가 있는가? 이 민족의 전도된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할 교회가 과도한 탐욕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듯하다.2차 세계대전 본 훼퍼가 당시의 나치즘을 제동장치가 고장 난 자동차에 비유했다면, 오늘 이 사회의 총체적 위기에 대하여 적어도 ‘내 탓이요’하고 나서야 할 집단이 바로 기독교, 교회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교회는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하여 총체적인 접근과 열린 시야를 갖고 대해야 한다. ‘새 포도즙은 새 가죽부대에’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교회는 개혁적이어야 한다. 과거 분단체제에서 경험한 고루한 사상과 현실안보라는 잣대로 소경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이, 그런 근시안적인 자세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불의한 이 시대의 양심의 표상으로, 균형감각을 가진 건강한 대안세력으로 나서야 한다. 자신들의 집단적 도그마를 충족하고 과시하기 위한 실력 행사는 자제되어야 한다. 교회는 어떤 목적으로든 군중심리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루가12,15)라고 말씀하셨다. 한국교회가 물신의 마력에 힘입어 자신과 이웃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부정한 인간탐욕을 만들어 내는 ‘위험한 천국’의 허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교회는 겸손히 예수의 나눔과 사랑, 그리고 섬김의 정신을 본받아 소리 소문도 없이 흔적도 없이 이를 실천하면 한다. 광고할 필요가 없다. 그러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이 사회는 점진적 변화의 열매가 저절로 열리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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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02-26
  • [김광영 장로] 종교개혁 500, 그리고 그 너머
    지난 한해, 한국기독교계가 펼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는 곳곳에 넘쳤다. 그 역사성이나 의미의 중요성이야 주지의 사실이지만 정말 대단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교회개혁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또 많은 세미나와 강좌의 내용이 교회를 넘어 사회와 세계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가? 앞장서서 주도한 종교개혁사와 교회사를 전공한 분들과 신학자들이 열심히 강좌를 주도한데 비하면 그 영향이 미흡하다. 그 결과는 ‘한국교회가 나아갈 길’이라 기대하였다. 사족을 달자면 강사 구성도 종교개혁 전공, 비전공 가리지 말고 사회 전반의 영역에서 종교개혁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역사는 교회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파장은 세상의 변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500년 전에는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하여 신학은 물론 문화와 예술, 인문, 출판, 정치, 법률, 과학, 기술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 변화를 주었고 르네상스를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작은 면죄부 판매가 도화선이 되었지만 실제는 성직자가 특권으로 누린 타락한 교권에 대하여 말씀에 굶주린 일반 신도들의 호응과 도전, 또는 교권의 권위에 대하여 말씀의 권위 즉, 성경의 권위가 우위라는 생각이 진리라고 믿었기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파문된 루터나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의 역할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목표를 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도들도 말씀이라는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들이었고, 진리를 외칠 수 있는 입을 가진 자들이며, 그 진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권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수도사와 사제들에게만 제한된 라틴어 성경을, 보지도 읽지도 못해 진리에 굶주린 영혼들에게 읽혀야하는 필요를 채워준 일을 우선 하였다는 점이다. 루터 등 개혁가들이 라틴어에 능통하였다는 점과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성경을 자신의 모국어로 번역하였다. 때를 맞추어 개발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합작하여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복음이 급속하게 전파 된 것도 한글 성경이 번역되어 보급되었듯 그 때도 빠르게 유럽을 점령한 것이다. 또한 개혁자들이 변화의 시대를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경으로 깨우치고 교회의 틀을 바꾸는 것이었다. 교권이라는 특권을, 그리고 제 행사를 일반화 시키는 패러다임을 바꾸는데 있었다. 로마교회와 달리 예배의 식도 바꾸고 모국어로 성경을 함께 읽고 설교하는 것이다. 이를 위시하여 신앙적 인쇄물이 쉽게 전달되어 세상의 변화를 보는 눈이 열리게 하는 시대를 이룬 것이다. 이렇듯 한국개신교회는 수용 130여 년 역사에서 얼마나 개혁을 이루었는가? 물론 많은 영향도 결과도 있었지만,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선도하지 못하고 또 선한봉사를 많이 함에도 지탄을 받는다. 너무도 안타깝다. 그런데 지난 한해의 강좌와 세미나에서 보고 들은 바로는 위클리프, 후스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이력서와 고난을 넘는 무용담을 듣게 된 것과 몇 권의 책을 소개받아 역사적인 사실을 아는 것에 치중한 것만 같았다. 한국교회, 무엇을 개혁하자는 것인지, 또 국가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핵심을 찾기 어려웠다. 교인으로서 예배참석과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강좌를 끝맺음한 것이 아니었는가 싶다. 우선 그 주제가 한국기독교의 교권은 건전한가? 또 미래 한국교회와 사회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키워드는 너무도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각 교단의 총회를 비롯한 교권에 대한 논의도 필요했다. 장로교의 경우 총회나 노회는 목사, 장로의 구성비가 50:50인데 완장은 거의 목사가 점령한다. 또 만인제사장을 설명하고도, 제사장은 목사에 국한한다. 그리고 제 행사를 주일에 집중하는 것이 개혁인가를 묻지도 않았다. 교단과 연합기관의 대표는 목회에 지장을 준다. 엄밀히 말하면 이중직이다. 또한 이단종파나 타종교가 밀려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대책 논의나 토론의 비중은 약했다. 그러나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났어도 계속 그 너머도 탐색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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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05
  • [장시웅 교수] 격려의 힘
    어린아이는 태어나 첫 발걸음을 떼며 부모의 격려와 응원 속에서 걸음마를 배우게 된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격려의 말 한마디에 큰 힘을 얻게 된다. 돌이켜보면 필자도 어려서부터 학창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많은 분들의 지지와 격려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하는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응원해준 분이 있었는데 바로 나의 순장, 김00 목사님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1학년 때부터 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훈련받으며 전도를 열심히 했는데, 전도할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 때, 내 마음 속에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전도자의 삶을 사는 교수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순장님에게 말했더니, 참 좋은 생각이라고 좋아하며 격려해 주셨다. 나는 전도와 양육 훈련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전액장학금을 받았고, 순장님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내가 교수가 될 것임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리며 격려해 주었다. 내가 힘들어서 그 길을 포기하려할 때도 잘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격려해 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기에 마침내 교수가 될 수 있었다. 대학원 시절, 나를 아껴주시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바로 나의 지도 교수님이셨던 정00 교수님이시다. 나는 결혼하자마자 석사과정을 시작했고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기에 당시 마음이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오직 박사를 빨리 마치고 논문이나 빨리 써서 졸업해야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나의 생각을 눈치 채신 교수님은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셨고 나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교수님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일을 맡기셨고 맡기신 일에 대해 성실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니 무척이나 좋아하시면서 나를 격려해 주셨다. 박사과정 가운데 많은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거나 보고서를 쓰는 등의 일은 스트레스 받고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완성했을 때마다 “잘했어”, “수고했어” 하시며 격려해 주신 말씀 한마디는 나의 마음의 모든 짐을 눈 녹듯 사라지게 했다. 그런 지도교수의 칭찬과 격려는 3년 만에 박사과정을 졸업할 수 있게 했고, 졸업 후에는 바로 교수로 임용되어 교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교수로 임용된 후, 내게는 새로운 격려자가 생겼는데 바로 동료 교수님들이시다. 임용 후 몇몇 교수님들과 기독교수회를 재건했고, 많은 선배 기독 교수님들이 총무로서 열심히 섬기는 것을 보시고 사랑으로 격려해 주셨던 것이 내 삶의 큰 에너지가 되었다. 또한 교수로서 교육하고 연구하는 삶을 살면서 딜레마에 빠져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친구 교수의 도움과 격려를 통해 이겨낼 수 있었다. 좋은 논문이 없으니 연구를 수행할 연구비를 딸 수 없고, 연구비가 없으니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한 연구를 할 수 없었다.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우울증까지 겪으며 탈출구가 없던 차에 친구와 함께 공동연구 과제를 계획하는데 참여하게 되었고, 한나와 같이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한 결과, 규모가 큰 공동연구 과제를 수주할 수 있었다. 친구 장 교수는 항상 나를 높이 평가해주었는데, 별로 능력도 없고 조금 성실한 것뿐인 나를 학교일도 잘할 수 있다고 추천했다. 학장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던 내게 ICT공대 학장 선거에 나가도록 도전하며 격려해 줬고, 결과적으로 학장에 당선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돌이켜보니 지난 날 나의 삶을 격려해 주셨던 많은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것 같아 참 감사하다. 그러한 격려들은 내 삶의 큰 에너지가 되었고 원동력이 되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부족한 나에게 좋은 격려자들을 일마다 때마다 붙여 주셔서 지금까지 나의 삶을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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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2
  • [강규철 장로] 부목사도 주의 종입니다
    모든 교회가 들뜨고 신나는 연말에 유일하게 불안하고 가슴 졸이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부목사들입니다.교회 헌법상으로 부목사의 임기는 1년 이며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계속 시무할 수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부목사의 임기는 1년이며 그 후는 당회장의 의중에 따라 언제든지 해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연말이 되면 각 교회에서는 부목사들의 수평 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인은 좀 더 시무하고 싶고 또한 성도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워도 이런 저런 이유로 나가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필자가 어릴 때의 교회에는 부목사가 없었습니다.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주일학교를 인도 했던 교육조사, 그리고 신대원을 다니면서 교회 목회를 수련했던 전도사, 그 후 신대원을 졸업하면 강도사가 되고 다시 목사고시를 통과하면 정식으로 목사가 되어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교회의 양적인 급성장으로 인하여 담임목사 한분이 교회사역을 담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의 전도사와 강도사들이 맡았던 사역을 부목사들이 맡게 되었는데 한국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신학생들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매년 수 많은 목사 후보생들을 배출하게 되고 부목사의 자리는 한정적이라 경쟁이 치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목사도 대학과 신대원을 거쳐 정식 절차를 밟아 목사가 되었는데 마치 학교의 기간제 교사나 회사의 인턴 사원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더 큰 문제는 시무 기간도 매년마다 갱신하도록 교회 헌법에 명시되어 있어 근무연한을 보장받지 못하니 열악한 처우에도 아무런 항의조차 못하는 실정이고 또한 목회 사역이 부목사간의 경쟁적인 실적과 성장 우선주의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교회 헌법에 목사는 성경에 나타난 칭호인 목자, 그리스도의 종, 사역자, 장로, 교회의 사자. 교사 등등으로 칭하면서 ‘이는 계급을 가리켜 칭함이 아니요 다만 각양 책임을 가리켜 칭하는 것뿐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부목사란 직책은 성경이 아니라 사람이 편의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부목사의 사역이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것이 아닌 성경에 나타난 목사의 칭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게다가 임기를 1년으로 정하고 매년 갱신하는 것은 목사를 성직자가 아닌 직업인으로 스스로 비하하는 오류를 만들었습니다. 부목사가 부임한지 일 년 안에 당회나 성도들에게 자신의 신앙의 깊이와사역 능력과 인성 등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오늘의 교회가 대형화 되다보니 부목사들도 전문분야에 따라 사역이 세분화되고 있습니다. 주일 학교나 청소년 사역, 찬양, 상담, 선교, 다문화 사역, 교구,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에서의 목사들의 역할이 세분화되고 다면화됨에 따라 협동사역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대교회가 담임목사 한분의 지도 체계가 아니라 집단 사역 체계로 바뀌어 가야하는 당위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담임목사와 부목사들의 관계가 상하가 아니라 동역자로서의 관계로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제는 목사 사례금도 검토해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담임목사에게 과도하게 치중 된 사례금과 많은 수당으로 인하여 교회예산이 부족하다며 부목사에게는 정상적인 가정을 영위하기 힘든 박봉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에서는 교장과 교사간의 봉급은 호봉이 같으면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업무추진비와 직책수당이 교장에게 더 지불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례금 체계도 동등한 기본사례금과 직책에 따른 수당으로 구분하여 지급하는 것도 한 방편이라 생각합니다. 새해가 되면 교회도 바람직하고 건전한 방향으로 발전되었으면 합니다. 특히 부목사 문제는 교회의 어른들이 솔선하여 깊이 생각하여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지금이 한국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 부목사는 미래 한국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주의 종 입니다.교회는 부목사들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토양을 만들어 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8-01-02
  • [안동철 목사] 석고대죄(席藁待罪)
    ▲ 안동철 목사 텔레비전 사극(史劇)에서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거적 같은 것을 깔고 왕이 용서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장면을 볼 때가 있다. 사자성어로 석고대죄(席藁待罪)라고 한다. 때로는 왕이 잘못한 것인데도 신하들이 왕을 잘못 모셨다고 하여 석고대죄를 하는 장면도 본다.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2017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올해가 시작되기 전 한국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500년 전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이제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많은 행사와 다짐들이 잘 실천되었는지를 반성할 시간이다. 정말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을 때의 그 정신을 한국교회는 올해 잘 회복하고 실천했는가? 하나님 앞에서 죄송하게도 ‘예’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다. 개혁자들이 외쳤던 다섯 가지 ‘오직’이 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다. 특별히 이 다섯 가지 ‘오직’ 중 ‘오직 성경’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가 있다. 개혁자들의 종교개혁은 교황을 포함한 모든 인간과 전통의 가치를 상대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절대화 하였다. 말씀의 빛 아래 다른 모든 것은 비판받아야만 했다.올 한 해 우리의 모습은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제대로 구현했는가? 서울의 모 대형교회에서 있었던 담임목사 부자세습은 한국교계를 넘어 한국사회의 지탄을 지금도 받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력한 언론 중 하나라는 한 방송사는 이 교회의 세습 문제를 연일 다루고 있다. 그 결과 소위 ‘가나안 교회’ 교인은 또 얼마나 많이 늘어났는가? 한국교회의 미래인 청년들은 교회에 대해 얼마나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갔을까?이 외에도 목회자 세금납부 문제에 대한 대처는 정말 성경적이었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아니면 우리의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투쟁이었는가? 북한의 안보 위협속에서 한국교회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접근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접근했는가?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는 성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투명했는가? 인권을 빙자한 동성애와 낙태 등의 문제에 대해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해왔던가? 교회가 세상과 너무 비슷해 혹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것은 아닌가?이런 모습은 꼭 요나 시대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욥바 항구로 내려갔을 때 요나가 마주친 현실은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였다. 그리고 요나는 배의 가장 밑층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큰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선장이 요나에게 뭐라고 했는가?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욘 1:6). 하나님의 선지자 요나를 책망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선지자였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불신 선장이었다! 마치 하나님의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니 불신 세상이 교회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쏟아붓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큰 폭풍은 어떻게 할 때 사라졌는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12).비록 요나서 후반부의 말씀을 보면 요나가 이 순간 하나님 앞에 완전히 회개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 위기의 순간, 요나는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席藁待罪)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 이런 석고대죄는 더욱 깊어졌다. 비록 불순종한 선지자였지만, 그는 자신이 바로 문제의 근원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한국교회, 아니 좀 더 좁혀 작은 교회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그리할 때 세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 앞에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1:16). 지금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 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17-12-18
  • [주광순 목사] 종교개혁 500주년을 회고하며
    지난 10월로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지 500년이 지났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피 위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한 한국교회가 안타깝게도 이제는 루터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당대의 교회 못지않게 타락해 버리는 것 같아 아쉽다. 비판하고 나온 그 자리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물론 당대의 교회와는 다른 악습이 현재 생겨났다. 이를테면 대교회세습, 개교회주의, 성장주의, 성직주의 등은 현재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악습이다. 또한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는 행위의 포기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전통과 교리로 변절되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행위와 이항대립적인 것으로 여겨지기에 행위와 믿음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터는 믿음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선한 행위들(die guten Werke)에 관하여” 라는 저술을 통해서 행위 문제를 심도있게 고민하였으나, 이러한 고민은 한국 교회에 잊혀져 있다. ‘믿음(?)’을 가지면 어떻게 살던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성경 대신에 물려받은 교리나 교회적 전통이 더 중요해졌다. 교회 기구들의 의결이나 전통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루터의 고민은 약화되고 말았다. 미국의 지난 대선을 되 돌이켜 보자면 텍사스 주 등 성경적 가치를 중시하는 중부지역인 ‘바이블 벨트’는 똘똘 뭉쳐 도널드 트럼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동성애, 낙태, 이슬람’ 등에 관해서 보수적 기독교의 표를 얻을만한 정책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우려스럽다. 이것은 과연 성경적 가르침인가 아니면 미국 보수교회의 전통인가? 물론 동성애와 낙태가 하나님 뜻에 어긋나며 이슬람에 대항해서 기독교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몰표를 줄만큼 트럼프 후보가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가? 마치 우리나라 대선에서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몰표를 던진 한국 보수교회 생각이 난다. 왜냐하면 트럼프 후보는 성적인 문제나 소수 인종에 대해서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동성애 등을 반대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무조건 대통령으로 뽑는다는 것이 성경적인가? 필자가 보기에 두 후보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몰표가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몰표가 나온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개인 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으로도 어떠한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나왔다기 보다는 교회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동성애 반대 같은 것은 어떠한 결함이라도 묵인할 수 있는 면죄부가 될 수 있는가? 다양한 차원에서 성경을 검토하기 보다는 단지 교회적인 시각에 갇힌 것은 아닌가?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동성애나 이슬람 이슈가 보수교인을 맹목적으로 만들고 일방적 지지를 하게 만들지 않을까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나 무슬림혐오가 한국 교회를 지배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어그리는 사람조차도 혐오가 아니라 사랑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 같다. 주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한 돌팔매질을 멈추셨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이라고 믿는다. 동성애와 이슬람을 반대하는 것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무슬림을 혐오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또한 동성애 반대자, 이슬람 반대자에게 몰표를 주는 것과도 다를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교인 수가 줄어 가고 특히 청년층의 이반은 더욱 심하다. 필자가 대학에 있기에 여기에 주목해 보자면 이제 한국 대학은 선교사 양성소가 아니라, 선교지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인 대학생 수가 점점 감소할 뿐 아니라, 기독학생도 자기가 기독교인임을 감춘다. 이것은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 때문이겠지만, 믿음이 행위를 이끌지 못하고 전통이 다시 성경을 밀어내는 것도 주요한 원인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이제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축하만할 것이 아니라, 루터처럼 교회 개혁을 힘써야 할 것이다. 피를 흘리는 마음으로, 루터의 말처럼, ‘근원으로(ad fontes)’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성경적 통찰력으로 이 시대와 한국 교회를 다시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이다. 새 시대는 복음을 담을 새로운 형식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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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12-04
  • [전영헌 목사] 수능, 그 이후
    수능을 마치고 나면 유통업계는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뜨거운 판촉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자 상가에서는 특별판매를 시작하고, 백화점에서는 수험표를 가져온 고객에게 옷을 할인판매하고, 휴대폰 대리점에서는 수험생 특판을 시작한다. 프로농구 경기장에서는 수험생들을 무료로 입장시켜주고, 놀이 공원에서도 수험생들을 위한 할인서비스를 실시하는 등 다양한 판촉전을 벌이곤 한다. 수년간 입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중압감에 시달려온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이런 행사들을 마련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사들 속에는 정말로 청소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업 확장과 이익을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세상이라는 울타리가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삼키기 위해서 이리 몸부림을 치는데 과연 신앙의 틀을 제공해야 하는 우리 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능 이전에는 여러 기도회로 기복적인 부분들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수능이후에는 음란과 자극적인 세상 속에서 살아갈 고3들에게 어떤 안전장치를 해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이를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기 위해 교회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독가정 속에서도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수능이후 고3 학생들의 뒷마무리 즉 신앙 교육의 성장과 의미를 찾기 위한 과정을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학부모와 함께 하는 찬양 축제 교회들마다 여건과 상황만 된다면 수능 이후 저녁, 아니면 그 다음날 저녁이라도 수험생과 학부모가 함께 하는 찬양집회를 열어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 축제를 통해 학생 본인은 물론그동안 뒷바라지로 고생해온 학부모들까지도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시간이 될 것이고 가정에 큰 힘이 됨과 동시에 교회가 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일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가정과 연계하여 학생들의 신앙지도를 원활히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될 것이다. 2. 위로여행으로 압박감 풀어주기 본인이 사역했던 이삭교회 고등부에서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수능을 마친 주간 금-토요일 1박 2일간 위로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2년 동안에는 고3학생들만 가는 위로여행이었으나 2010년부터는 대학청년부 선배들이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이를 통해 과중한 학업과 입시의 압박감에 시달렸던 후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앞으로 진급하게 될 청년부와의 친밀성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선배들이 멘토가 되어줌으로 대학생이 되기까지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3. 신앙의 본질 회복하기 한국의 상황에서 수험생은 거의 왕의대접을 받는다. 모든 것에서 면제된다. 나아가서는 예배까지도 면제되는 비극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수능을 마친 이후 신앙의 기초 교육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상황에서 대학 청년부로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수능 이후의 시간을 잘 활용하여 특별새벽기도, 신앙기초강좌, 교리학교, 기독교 세계관학교, 예배자 학교, 큐티학교 등을 통해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함과 동시에 앞으로 세상이라고 하는 캠퍼스에 노출되어 살아갈 예비 대학생들에게 균형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오리엔테이션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교육은 그리스도의 닮음을 이루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교회교육의 사명 역시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닮음을 이루는 균형 잡힌 새벽이슬 같은 청소년으로의 양육은 한국 교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부분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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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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