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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석문목사] 예수처럼
    원주의 예수라 불리는 무위당 장일순의 일화집인 ‘좁쌀 한 알’에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시골 아낙이 찾아와 딸 혼수 비용으로 모아 둔 돈을 소매치기 당했다며, 그 돈을 찾아 달라고 매달렸다. 선생은 아낙을 돌려보내고 원주역으로 갔다. 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 놓고 노점상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러기를 사나흘 하자 원주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소매치기들을 죄다 알 수 있었고, 마침내는 시골 아낙의 돈을 훔친 작자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 선생은 소매치기를 달래서 남아 있는 돈을 받아 냈다. 거기에 자기 돈을 합쳐서 아주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지은 뒤로도 선생은 가끔 원주역에 갔는데, 그것은 소매치기에게 밥과 술을 사 주려는 것이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이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잔 받으시고 용서하시라고.” 앞으로 소매치기 같은 짓 하지 말라든가, 나무라는 말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쩌면 선생에게는 그들 행동의 옳고 그름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더 컸던 것 같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사람들 앞에 끌려나와 부끄러움 가운데 내동댕이쳐졌던 한 여인이 생각난다. 그때 예수는 돌을 들고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여인을 향해 이해와 연민을 가진 한 분이셨다. 예수는 여인에게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묻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여인을 안심시키고,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는 죄짓지 마라”며 여인을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힐난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 역시 이 세상의 가치관과 다른 삶을 살고 가신 분이다. 지난 달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프랑스군 특수부대가 무장조직과의 교전 끝에 인질 4명을 구출해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구출해 놓고 보니 인질 네 명 중에 한 명이 한국인이었다. 안타깝게도 인질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특수부대원 2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로 인해 네 명의 인질은 세간의 비난을 피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이번에 그들이 여행한 지역은 한국 외교부에서 정한 2단계 여행자제국가여서 한국인 여성에게는 더더욱 비난이 쏟아졌다. 발표 직후 온라인상에서는 긴급구조상황인 이 여인의 항공료 등에 대한 정부지원여부에 대해 일대논란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는 가족들이 항공료를 보내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지만, 여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반응이야 응당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겠다. 가치판단으로 사람을 재단하기 이전에, 마음을 먼저 이해하고 심정을 헤아려 주는 여백이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수의 마음이 아닐까?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한잔 받고 용서하라고.” 예수의 마음이 아니면 절대로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한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섬세해질 수 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 세상은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한석문 목사 | 해운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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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0
  • [노상규 목사] 첫 날부터 일꾼이다
    ▲ 노상규 목사(상내백교회 담임) 흔히 교회에는 방해꾼, 구경꾼, 일꾼이 있다고 한다. 모든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방해꾼,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일꾼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고, 일꾼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많은 교회에서 “일꾼을 보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한다.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마9:37-38)고 하신 말씀을 염두 해 두고 하는 기도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교회에 일꾼을 보내 주신다. 그런데 정작 기도의 응답으로 온 일꾼을 알아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교회의 일꾼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새로운 가족이 오랜 기간 잘 훈련을 받고, 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분들이 많다. 일반적인 시간에서 보면 그 생각이 맞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필자는 새로운 가족이 교회에 출석을 한 첫 날부터 그는 그 교회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에 유익을 주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자가 오면 그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가장 힘을 얻는다. 그리고 새가족사역팀원들이 신이 난다. 또한 건강한 교회라면 온 성도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힘을 얻는다. 정작 새가족 자신은 모르지만 담임목사, 새가족사역팀, 온 성도들이 하나님이 그 교회공동체와 함께하시는 증거임을 보며 힘을 얻고 기뻐하는 것이다. 교회에 큰 유익과 힘을 주는 그가 일꾼이 아니라면 누가 일꾼인가? 새가족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가족에게도 그의 신앙생활이 교회에 얼마나 큰 유익과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의 선한 부담감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자신과 가정, 교회공동체와 민족공동체, 열방을 섬길 수 있는 진정한 일꾼으로 세워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꾼을 보내어 주옵소서!”라고 말할 때, 이사나 결혼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전입해오는 헌신된 일꾼을 보내어 달라는 소망도 담겨 있는 것이다. 기존성도는 절대로 받지 않는다는 일부 교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일꾼의 부족을 피부로 느끼며 훈련된 일꾼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꾼이 왔을 때 그 일꾼이 정착을 하고 일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는 배려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단에 대한 피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교회들은 새로운 일꾼이 오면 혹시 저 사람 이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고, 대하는 경우들이 있다. 그 새로 온 일꾼들도 그것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단에 대한 염려는 담임목회자와 당회에 맡기고, 보내어 준 일꾼을 환영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일꾼이 왔을 때 담임목회자와 당회는 빠른 시간 안에 심방과 심도 있는 상담을 통해 그의 달란트와 그동안의 섬김을 파악하여 교회의 가장 적절한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기존의 성도들도 새로운 일꾼이 일할 수 있도록 과감히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다른 영역에서 섬기는 배려도 필요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직분에 대한 집착을 가진 분들은 새로운 일꾼이 오면 자신의 경쟁자로 보고 은근히 밀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분위기를 만드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교회 안에까지 지방색, 정치색이 자리를 잡아서 자기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아는 즉시 부정적으로 대하거나 여론을 형성하여 밀어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하는 새가족이든,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전입을 온 훈련된 일꾼이든 그는 첫 날부터 주님이 보내주신 그 교회의 소중한 일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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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7
  • [최병학 목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86세대의 마지막 사명
    ▲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일찍이 독일의 시인 B. 브레히트는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싸운 자들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기고 사라진다는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비극은 86세대의 비극입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세대’인 86세대(30대였던 1990년대까지는 386세대라고 불렸고, 이후 40대로 접어들어서는 486세대라고도 했지만, 2018년 이후 언론에서는 그냥 86세대라 표현)는 밖으로는 파시즘과 싸우면서 안으로는 파시즘을 키웠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회자되는 ‘꼰대론’의 발생사적 근원입니다. 한때 정의를 외치며 자신을 희생했던 세대의 정치적 실패는 사회 전반에 더 큰 실망감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를 퍼뜨립니다. 그리고 중앙대 독문과 김누리 교수에 의하면 “지금 한국 사회를 휘감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의 뿌리는 바로 86세대의 실망과 좌절감, 냉소주의와 패배주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86세대가 꼰대 짓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틀을 잡을 때 새로운 세상이 가능합니다. 재벌개혁, 정치개혁, 교육개혁, 검찰개혁, 사법개혁을 감행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86세대는 폭압적인 군사독재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고, 민주적인 국가, 정의로운 사회,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꿨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사명감이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현재 민주개혁정부에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냉철해져 볼까요? 86세대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나요? 중·고등학생들은 살인적인 경쟁에서, 대학생들은 경제적인 압박에서, 청년들은 실업의 고통에서, 노동자들은 해고의 불안에서, 실업자들은 생존의 공포에서, 여성들은 성적 억압에서 해방 되었나요? 나아가 우리 사회는 더 평등해지고, 국가는 더 정의로워졌나요? 국민은 더 행복해졌습니까? 사실은 ‘헬조선’, 곧, 한국 사회는 시대착오적인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86세대의 실패는 무엇 때문인가요? 김누리 교수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줍니다. “첫째, 정치적 비전과 상상력이 빈곤했다. 둘째, 도덕적 우월감의 덫에 갇혔다. 셋째, 파시즘의 역설 때문이다.” 그렇다면 86세대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김누리 교수는 독일의 68세대를 소개합니다. ‘반(反)권위주의’적인 운동으로 부조리한 세계, 억압적인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자 했던 68세대는 나치 전력을 가진 자가 수상이 되는 파렴치한 나라를 철저한 ‘과거청산의 나라’로 바꾸어놓았고, ‘라인강의 기적’ 속에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던 나라를 모범적인 복지국가로 변화시켰으며,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감행’함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켰고, 동서독의 오랜 적대를 허물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동방정책을 발전시켰습니다. ‘경쟁은 야만’이라는 철학 아래 경쟁을 금하고, 아이들에게 자유와 행복감을 만끽하게 하는 학교, 학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연구보수’라는 명목으로 생활비까지 주는 대학,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검소하고 유능한 의원들로 채워진 연방의회, 노동자들이 이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업, 100만 난민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시민사회. 이것이 68세대가 만들어낸 독일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86세대가 꼰대 짓을 버리고, 다른 세상의 기틀을 만들면 됩니다. 적폐청산과 개혁을 감행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촛불세대들에게 지금보다 못한 세상을 물려주지 않는 것, 헬조선인 ‘지옥’을 넘겨주지 않는 것, 이것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86세대에게 남겨진 마지막 시대적 사명입니다. 그 소명을 소리 없이 감당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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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3
  • [유의신목사] 골라먹는 재미
    몇 년 전 모 식품 업체의 카피라이팅이 떠오른다. ‘골라먹는 재미로....“ 그러고 보면 참 많이 변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던 시절이 아득하게 여겨 질 정도이다. 이제는 교회가 어린이들에게 과자나 사탕을 줘도 자기 취향이 아니면 받아먹지 않는다. 그만큼 3만 불 시대에 이르면서 호불호(好, 不好)가 노래 제목이 될 정도로 모든 것이 다양하고 풍부해 졌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물에 대하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대인관계에서도 좋고 싫은 것(好, 不好)으로 구분하고 선택하며 자기취향에 길들어져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증상은 일상에서 뿐 아니라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도 오랜 동안 서서히 잠복해 들어오면서 심한 중병에 걸려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언론에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하는 가운데 한 번씩 질문하는 것이 있다.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즐겨 암송하는 구절이나 평소 마음에 새겨둔 성구를 내어 놓는다. 이렇게 별 생각 없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곤 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앙생활이 호불호로 뇌새김이 되어서 그 심각성을 모르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앙에 균형 감각이 상실 된 상태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성도라면 내가 싫어하는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약은 쓰기도하고 달기도 하다. 구약신약의 말씀은 꿀같이 달기도 하지만 심령골수를 쪼개는 아픔도 주는 쓰디 쓴 말씀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증상을 가진 성도들은 설교를 경청 할 때도 호불호가 분명하여 좋은 설교 나쁜 설교로 기가 막히게 구분하며 편식을 함으로써 심한 편견을 가진 문제적 자아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편식을 오래하면 건강에 문제가 오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는 불호(不好)로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은 호(好)라고 해오는 데서 문제의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각성과 부흥은 골라 먹는 재미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잠자는 자아를 깨우는 우레 같은 소리도 들어야 한다. 죄책을 불러일으키는 직설(直說)에도 예민한 반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첫 메시지는 이 시대에 사는 우리에 절실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광야시험을 받으신 후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심한 편견에 사로잡힌 유대교 기득권층에게 이 메시지는 불호(不好)였던 것이다. 그 당시와 지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더 종교화가 심해져서 총제 적으로 골라먹는 문화에 길들어진 교회와 성도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항변도 있을 것이다. 편식은 서서히 건강을 해친다. 골라 먹는 재미로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잘살고 못살고 보다는, 크고 작은 교회를 떠나서, 유명과 무명을 가리자 멀고, 골라 먹는 재미에서 벗어나야 한다. 건강한 교회와 성도가 되려면 골라먹는 편식에서 벗어나서 온전함(wholeness)을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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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29
  • [전영헌 목사] 돈벌어 남주는 인생이 되라
    오늘날 입시 제도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많이 달라졌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당연히 공부가 필수이지만, 봉사 활동과 같은 이른바 ‘스펙’들도 필요하다. 그런데 학교에 있다 보니 아이들이 봉사 활동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이리 저리 방법을 알아보던 중 우연히 ‘밥퍼(밥퍼나눔운동)’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2010년부터 6년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밥퍼 봉사를 했었다. 밥퍼 봉사는 부산 시청 광장에서 노숙인들과 노인들에게 밥을 퍼 주는 사역이었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여기에 동참하여 설거지, 식판 나르기, 어르신들 안내하기 등의 봉사를 했다. 섬김의 정신을 배우면서, 아울러 봉사 시간도 덤으로 얻는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봉사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매주 참석했지만, 학교 업무가 많아지고 다른 봉사 단체와도 연결되면서 매주 참석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학생 중 S를 팀장으로 세워 그에게 밥퍼 봉사의 인솔을 맡기고, 나는 다른 봉사 활동을 진행했다. 그렇게 8개월 정도가 지났다. 나도 시간이 되어 밥퍼 봉사를 함께 나간 어느 날, 뜬금없이 S가 이렇게 물었다. “목사님, 여기 오신 어르신들 밥값이 얼마나 드나요?” 나 역시 모르는 사항이었기에 국장님께 물어보았다. “국장님, 이렇게 어르신들 식사 대접을 하면 하루에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음, 350만 원 정도 듭니다.” 국장님과 내가 대화하는 것을 듣더니 S가 끼어들었다. “목사님, 15년 안에 제가 한번 쏘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저분들께 밥을 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참 귀한 말이다. 그동안의 봉사 활동을 통해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았다. 물론 S의 말이 지켜질지는 15년 후가 되어 봐야 안다. 그가 어려운 노숙인들을 위해 밥을 쏠 수도 있고, 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의 목적과 돈을 버는 목적이 적어도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S는 앞으로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이들의 스펙을 쌓게 해 주기 위한 도구로 봉사 활동을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어느새 작은 섬김 속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고 있었다. 나는 S가 대견스러웠다. “짜식, 꼭 그렇게 해라.”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걸작이다. “네, 목사님. 오천 명을 먹이겠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이라는 가치가 아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삶의 모토가 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대학 입시에서 면접관들을 대할 때마다 오천 명을 먹이는 사람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단다. 이는 분명 일반적인 고등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면접관들이 면접 중에 칭찬하더라는 이야기를 자주 전해 듣는다. 이와 같이 교육은 반응이다. 반응이 올 때 가르치는 이는 춤추게 된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학교현장에서 이러한 반응들이 일어나길 바란다. 초점잃은 아이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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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9
  • [김충만 목사] 건강한 교회(敎會)가 답이다
    모죽(毛竹) 이야기 나무 중에 모죽(毛竹)이라는 대나무가 있다. 이 ‘모죽’은 씨를 뿌린 후에 무려 5년 동안이나 물을 주고 가꾸어도 어찌 된 게 싹조차 나지 않는다. 씨를 뿌린 땅 위 표면이 그렇다는 얘기다. 때문에 이쯤 되면 어디에 심었는지, 혹은 이를 과연 심었는지조차 기억에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뿌린 것으로 만족하거나,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라며 비싼 수업료 지불하고 말았다고 아쉬워하듯 마무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5년이 지나고, 모죽은 그 이듬 해 봄이 되면 놀랍게도 하루에 70-80cm씩 쑥쑥 자라기 시작 해 무려 30-40m까지 자란다. 이쯤 되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에 대해 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이렇다: 그 5년이란 시간은 모죽의 뿌리가 사방으로, 또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때이다. 그렇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을 묵묵히 땅 밑 사방으로 뿌리를 내리며 건강한 대나무로 준비하다가 5년 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더 놀라운 것은 다 자란 모죽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면서 그 후엔 모든 영양분을 뿌리에게 내어준다. 또 다른 너(모죽)를 위해서 기꺼이 나를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영혼도, 구원도, 천국도 없는 미물의 한 나무도 이처럼 산다. 또한 5년 후, 그렇게 한번 화려하게 꽃이 피는 것으로 끝이 아닌 계속되는 건강한 생명으로의 자라감을 이어가는 것까지를 내다보며 ‘모죽공동체’와의 아름다운 상생을 이루어간다. 건강한 교회(敎會) 교회를 얘기할 때 ‘건강하다’라는 그림이 자연스러운 답이다. 한국교회도 100년을 넘어 200년을 향해 좀 더 자라가는 과정에서 나름 여러 몸부림을 치다가 건강한 교회가 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알아가는 중이다. 이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는 이해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 먼저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경과 목회자를 주신 목적이 “성도를 온전하게”(딤후 3:17, 엡 4:12)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를 원함에서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성경만큼이나 목회자를 주셨다는 얘기다. 그러나 목회자가 중요하다 할지라도 교회는 목회자만으로 세워지고 자라가고 열매 맺어가는 독주(solo)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몸에 많은 지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합하여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를 원하신다(고전 12:12-31). 따라서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와 함께 동역하는 성도들로 이루어질 때 건강한 열매를 맺게 된다. 이처럼 건강한 교회는 만인제사장(벧전 2:9)으로서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인가에 있다. 목사 혼자 뛰는 교회가 건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어떤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죽 이야기에서처럼 다음세대라는 모죽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변함없이 감당하고 있는가가 건강한 교회로 가는 중요한 시그널이다. 마치 한 가정에서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고 세워지고 있는가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되는 집은 자녀의 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건강한 교회는 주일학교를 보면 알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가 이미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그만큼 주일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 또한 유지하는 교회들도 통폐합하거나 건물만 있는, 그러니 교육의 질적(質的) 저하는 누가 봐도 예측가능하다. 한국교회의 씨앗이자 모판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일학교를 모죽 이야기처럼 회복해야만 한다. 우리가 가정과 자녀들을 늘 돌아보듯이 교회를 진단해 보고 건강한 교회로의 회복을 꿈꾸어야 할 때다. 건강한 교회는 멋진 구호와 계획으로 되지 않는다. 건강한 교회로 자라가는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기 위해 모죽은 이처럼 말을 걸어온다. 지금은 모죽에게서라도 배워야 할 때다. 그만큼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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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9-03-27
  • [강규철 장로]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보입니까?
    저는 유년주일학교 시절 참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은 오후 예배시간에 우리에게 ‘천로역정’ 등 재미나는 기독교 책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교리집인 ‘대소요리문답’을 가르쳐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 당시 폐결핵 말기 환자여서 항상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며 정말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예수님과 같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또 한 분은 엿장수였습니다. 맛있는 엿을 팔다가 우리가 보이면 공짜로 엿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늦은 오후가 되면 항상 예배당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셨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낭랑하고 청아하게 들렸습니다. 주로 시편을 큰소리로 낭독하셨는데 정말 듣기에 좋았습니다. 그가 온 성도들을 감동시킨 것은 어느 추수감사주일 때 였습니다. 그 날 아침 교회로 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 강대상에 커다란 엿 한판이 통째로 놓여 있었습니다. 가난한 그가 자신의 생활 전부인 엿 한판을 감사헌금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때 제가 받은 감동과 충격은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열정적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마음을 시원하게 울려주던 그 청아한 목소리가 저의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분들을 떠올리면 저의 입가에 미소가 생기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와 같은 참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선한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도 많이 계셨고 그 분들의 희생적인 가르침과 영향이 좋은 성도들을 많이 양육시켰으며 이로 인해 한국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높은 곳에 계시는 일부 영적 지도자들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존경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면서 만족감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서는 탐욕스런 사탄의 모습이 보이고 또 어떤 분에게서는 성적으로 타락한 음침한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도 예수님의 가르침인 ‘사랑과 용서’가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또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를 이룩하셨던 분들 중에는 은퇴 후에도 그동안 누렸던 것을 내려놓지 못해 그것이 너무 추한 모습으로 보여 안타깝기도 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교계나 세상 사람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며 비판하는 데 정작 본인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로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가리우는 결과가 되었음에도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행실을 보고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하여 교계가 분열되고 교회가 쪼개어 지는 아픔을 겪게 되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개독교’라 조롱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교계지도자들은 사회로 부터도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진정한 목회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의 언행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서 우리의 모습에서 예수님이 보이고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먼 훗날 우리를 생각하는 후배들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의 모습을 떠 울리고 미소를 짓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9-03-14
  • [송시섭교수] 3·1 운동과 기독교, 그리고 나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한국 기독교는 3·1운동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왔다. 민족대표 중 최대 다수가 기독교인이었고, 각 지역의 교회들이 전 민족적 거사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독립선언식의 식순이 기도로 시작되었고, 참여 학교들도 기독교 계열의 학교가 많았다. 그래서 3·1운동은 교회의 사회참여로서의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빠지지 않고 회자되어 왔다. 하지만 3·1운동이라는 격랑 앞에서 조선의 기독자들은 각자 나름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야 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먼저 민족대표 33인중 한 분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1907년 장대현 교회에서 있었던 부흥회에서 회개를 촉발시켜 평양대부흥을 일으킨 분으로 알려져 있지만 민족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여러 종교에 심취하였다가 1897년 예수를 믿은 후 독립협회 평양지부설립의 발기인이 될 정도로 복음전파와 사회참여에 균형을 갖춘 분이었다. 이승훈을 통해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날인했으나 ‘태화관 모임’에는 불참했고 그 후 자진 출두하여 1년 7개월의 미결구금상태에서 재판을 받다가 무죄로 풀려나는 바람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200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뒤늦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 박사는 길 목사와는 다른 길을 갔던 인물이었다. 1887년 그의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한 유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미국 유학 등을 통해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지도자로서, 또 외교가, 언론인, 교육가로 활동하면서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3년간 투옥되기 까지 하였으나, 3·1운동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졌었다. 당시 그도 다른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국민대표로 서명해 주길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이유는 순진한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일제 말기에 ‘독립무용론’과 ‘내선일체’(內鮮一體)에 동조하면서 귀족원 의원이 되어 결국 친일파의 거두라는 오명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길선주 목사는 무죄판결을 받은 이후 1928년 경북 안동에서의 종말론 설교가 대중을 선동한다 하여 20일간 투옥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삶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은 뚜렷이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독립정신을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만 아마도 3·1운동의 실패는 그로 하여금 종말론 신앙에 천착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북간도와 전국을 돌면서 전도에만 매진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윤치호 박사는 3·1운동 불참이후에도 끊임없이 자조(自助)의 입장에서 실력양성론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리고 장장 60년 동안 써내려갔던 그의「일기」속에서 식민지체제라는 한계 내에서 조선인의 권익신장을 이루려는 삶의 고뇌와 식민지의 지식인이자 기독인으로서의 ‘양비론’(兩非論)적인 내적갈등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린 종종 한 인물에 대한 판단, 한 사건에 대한 평가를 너무도 쉽게 내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좁은 식견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은 소문에 기한 속단은 오판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특히 혹독한 일제치하에서, 그리고 3·1운동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 각자가 내린 결단들을 우린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윤치호 박사가 그의 일기에서 자주 되뇌던 말이 그의 일기를 묶은 책의 제목이 되었다.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 이 말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굳이 ‘협력’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지만 ‘저항’을 지지하지도 않았을 나에게 지금 이 시대의 모든 난제 앞에서 너무 성급한 판단을 내려놓고 긴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쉽게 수긍하긴 어렵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잠언(箴言)과 같은 말씀으로 들려온다.
    • 오피니언
    • 정론
    2019-02-20
  • [안동철 목사] 맘몬주의를 배격하라!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을 발표했다. 이 자료는 통계청이 전국적으로 실시한 인구, 주택 센서스 결과에 근거한 것으로 한국의 종교 인구를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2015년 11월 1일 기준 한국의 종교 인구수는 전체 인구수 4905만 명의 43.9%인 2155만 여 명으로 파악되었다. 이중 개신교 신자수가 967만 여 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오랫동안 신자수 1위를 유지했던 불교가 761만 여 명으로 급격히 감소했고, 천주교 신자수도 2005년 514만 여 명에서 2015년에는 389만 여 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통계를 접한 후 기독교계가 흥분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에 적대적인 세상 언론과 여러 집단들을 통해 교회에 대한 과도한 공격 속에서도 교회는 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통계 속에 잡힌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사람 중에는 신천지와 구원파와 같은 이단에 속한 사람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기독교가 성장하고, 불교와 가톨릭이 퇴보한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필자는 한국교회가 교회 내에 잠재되어 있는 강력한 시한폭탄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숫자적인 통계는 곧 신기루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별히 물질과 숫자를 숭배하는 ‘맘몬주의’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에서 유일하신 하나님과 동급으로 소개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재물이다.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재물에 대해 ‘섬긴다’고 하는 것은 재물의 영향력이 하나님과 비교될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최근 필자는 한국교회에서 크게 존경 받는 목사님 한 분과 깊게 교제하면서 한국교회 내에 자리 잡은 이 맘몬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교회 안에 밀려들어온 맘몬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혀를 차야만 했다. 교인수와 돈의 힘에 의해 정의가 무너지는 경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목사 안수식에서는 안수 대상자에게 그날 순서를 맡은 목사와 장로의 사례비는 물론이고 플랜카드, 순서지, 심지어 예식에 사용되는 코사지에 드는 모든 비용을 요구한다고 한다. 성직을 받는 현장에 돈을 주고받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를 ‘수혜자 부담원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오래전 한 공중파 방송에서 가톨릭 신부가 되는 과정을 방영한 적을 본 후 이런 우리의 관행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가톨릭의 신부가 되는 과정은 총 7년으로 졸업 자체가 매우 엄격했다. 방송에 소개된 것을 보면, 가톨릭 신학대학에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입학한 학생이 290명이었는데, 이들 중 189명만이 사제 서품을 받았고, 101명이 중도 탈락했다. 탈락율은 무려 35%였다. 이렇게 7년의 힘겨운 과정을 모두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는 날의 장면이 아직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신부로 서품을 받는 대상자들이 죽은 듯이 땅에 바짝 엎드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자기는 이제 죽었고, 가장 낮은 자세에서 자신을 봉헌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 순간 서품식에 참여한 사람이나 축하해주기 위해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흐느꼈다. 이 예식의 엄숙한 분위기로 볼 때 순서를 맡은 사람들에게 돈이 오고 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불교와 가톨릭 신자의 숫자가 줄고, 개신교 신자가 늘었다는 것에 기뻐할 때가 아니다. 교회 내에 깊숙이 침투한 이 더럽고 다양한 형태의 맘몬주의를 배격하지 않으면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세상은 교회를 인정사정 보지 않고 공격할 것이다. 이 시대에서 교회가 살길은 적어도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재물에 대해서는 세상이 결코 넘볼 수 없는 정직함과 투명함이 있어야 하겠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 오피니언
    • 정론
    2019-01-22
  • [가정호 목사]"질료의 저항" 이 차라리 은혜이다.
    천재적인 예술가들 중 어떤 이들이 이데아를 작품으로 실현해내기 위해 빠져드는 것이 마약, 섹스, 술, 도박이었다. 마약, 섹스, 도박을 하고 나면 더 탁월한 예술적 심상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욕망이 피워낸 꽃을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이었다. 대부분의 천재 예술가들은 ‘질료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 지나고 보면 그 ‘질료의 저항’이 그의 욕망을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되었던 점이 오히려 돋보인다. 뉴욕, 푸동, 명동, 해운대, 남포동... 이런 곳들은 인간의 욕망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꽃핀 곳들이다. 계시록에는 두 여인이 나온다. 한 여인은 정결을 추구하는 여인으로, 한 여인은 화려함과 욕망을 꽃피워낸 여인으로 등장한다. 도시의 이야기들이 즐비한 공간이 계시록이다. 이미 인류가 맞이하게 될 종말의 모습이 어떻게 끝장나는지 잘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의 계시록이다. 국가와 시민들이 정치행위와 경제 확장에 있어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결코 그 이상을 이룰 수는 없다. 이미 고대 바벨론과 로마제국이 좋은 샘플이 되었었다. 요한이 쓴 계시록은 이 내용을 잘 보여준다. 사람의 영혼까지 팔고 사는 맘몬숭배는 세속국가의 필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교회된 목사나 성도들이 국가와 정부, 지도자들에게 이 짓을 잘하지 못한다고 서슴없이 몰아붙이는 모습을 본다. 어떤 정부가 들어섰을 때든 시민들은 그 정부를 향하여 욕찌거리 해댄다. 사실 그 욕찌거리의 핵심은 ‘맘몬; 돈’이다. 그 기저에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말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제 부모가 돈을 벌어주지 못한다고 패대기치는 패륜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말과 글, 토론에서 국가나 정치지도자들을 무한경쟁에 내모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역지사지 해 보면 좋을 것이다. 계시록은 예루살렘과 바벨론이 극단의 맘몬숭배에 빠져들어 심판을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사람을 종으로 만들고, 그 종을 사고팔 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사고팔며 거래하는 인신매매 행위까지 요구한다. (계18:13) 이는 원형적 아름다움, 본래 존재했던 이데아에 대한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인 파괴행위이다. 자발적 가난까지는 아니라도 자발적 절제는 절실하다. 국가도, 교회도, 가정도 모두 자발적 절제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먹고, 어느 정도 쓰고, 어느 정도껏 소비해야 한다. 무한 욕망 무한 편리추구는 공멸이다. 먹방이 꽃핀 방송을 보노라면 국가적 종말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미 미세 플라스틱이 어류나 동물에서 인체에 쌓이고 있다. 생물학적으로도 종말시계가 12시 3분전이다. 소득이 무한대가 되어 년 수십, 수백억씩 벌어들이는 이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짓이 무엇인지 살펴서 알아야 한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들이 늘어간다는 말은 극단의 양극화가 결말을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년들이 알바를 하는 것은 학교생활에 도움을 얻기 위함인데, 졸업을 하고도 알바를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은 비극 그 자체라는 말이다. 정부의 잘못이거나 정치의 잘못이 아니라 (이건 어떤 정부도 이겨낼 수 없다.) 인간의 탐욕에 잠금장치가 없도록 풀어놓은 것, 맘몬종교가 가져다준 비극이라는 말이다. 시장자유화라는 말이 아주 멋져 보이지만, 맘몬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시민을 학살한다. 이는 계시록 일곱천사 일곱 금대접 환상에 잘 나타난다. ‘자살 권하는 사회, 죽음 권하는 사회’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본다. ‘레밍_딜레마’에 빠져 버린 세속사회에 교회도, 성도들도 편승하여 허우적거린다. 성도들의 헌금을 이자로 거반 쏟아 부으면서도 과도하게 큰 건물을 올리고, 삐까뻔쩍 뽀대내기 바쁜 이 시대의 건물숭배자들을 바라보면 그 비극의 미래를 가늠해 본다. 이미 이자 갚다 종말을 고한 교회당 매물이 지천인 시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향하는 것을 합리화 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것이 자신이 만든 정의로움이 되어 사람들을 비난하고 따지고 신경질 낸다. 나는 그저 한마디 하고 싶을 뿐이다. “욕망이라는 전차는 브레이크가 없다.” 과도한 욕망탐지 기능, 적정한 욕망 제어장치, 욕망버블 센서를 장착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시대적 요구이다. 한마디 더 하고 싶다. ‘마이 헤무긋다 아이가, 이자 고마 해 무그라.’
    • 오피니언
    • 정론
    2019-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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