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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복 교수] 크리스천 CEO 유형과 일본 복음화
    1549년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처음으로 일본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메이지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며 1872년 요코하마에 개신교 최초 일본기독성공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개신교 복음화율은 0.4%로 매우 낮다. 일본 특유의 종교인 신도와 천황제, 기타 집단성향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독교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해 코로나19 정국가운데도 4편의 논문 중 일본 관련으로 2편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90년부터 2017년까지 OECD가 제공한 28년간의 한일 거시경제 통계자료를 분석, 선교에 미치는 함의를 살펴보았다. 1990년 일본의 8.9%이었던 GDP가 2017년말 현재 31.4%로 변화하였다. 또 25.68%이던 1인당국민소득은 77.40%로 상승되고,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일본 1.16%, 한국 5.19%로 양국의 격차가 감소하였음을 제시하며, 선교 협력에 필요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두 번째는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일본의 크리스천 경영자 연구’로 10명의 CEO를 조사하였다. 즉 일본 크리스천 CEO 10명을 선정하여 유형별로 (1)신앙과 경영이 일치된 모델, (2)신앙과 경영이 분리된 모델, (3)경영을 선교의 도구로 보는 모델 3개로 나누어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파이오니아사의 마츠모토(松本望)는 사명을 복음전기제작소로 할 정도로 철저히 성경적 관점의 경영을 한 점에서 경영과 신앙이 하나된 (1)유형의 CEO로 분류하였다. 모리나가제과의 모리나가(森永太一郎)와 야마자키제빵의 이이지마(飯島延浩)는 (3)유형의 CEO로 분류하였다. 그들은 리어카에 제빵을 팔러 다니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간판을 만들어 복음을 전할 정도로 전도에 열정적이었다. (2)유형은 소니사의 이부카(井深大), 야마토운수의 오구라(小倉昌男), 시세이도의 이케다(池田守男), 모리빌딩의 모리(森泰吉郎), 라이온의 고바야시(小林富次郎), 일본정책투자은행의 하시모토(橋本徹), 무라사키 스포츠의 가나야마(金山良雄)를 들 수 있다. 복음환경이 척박한 일본 땅에도 이처럼 신실한 CEO들이 있었던가? 논문을 쓰며 많은 도전을 받았다. 기업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이윤추구 조직을 넘어, 선교의 장(BAM: Mission as Business)이란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 2021년 새해가 출발을 하였다. 오늘 우리는 각자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한번 더 자신에 물어볼 수 있음 좋겠다. 일본과 비교해 기독교 선진국이다, 자화자찬하며 우쭐해 하고 있지는 않은지? 무늬만 크리스천, 철저하게 신앙과 경영이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한해는 특별히 코로나19로 교회와 예배에 대해 논쟁이 많았으며, 기업들 또한 고생이 많았다. 영업이익이 급감하고, 특히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컸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모두가 희망찬 새해와 비전을 바라보며 달려갈 수 있음 좋겠다. 복음화율 0.4%의 환경가운데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기술개발을 하고 자신의 일터를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세운 크리스천 CEO들이 있다. 국경을 넘어, 귀한 CEO들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마음으로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2021년 새해 모두가 기업도, 가정도, 교회도, 또 국가도 독수리 날개 쳐 오름과 같이 비상(飛翔)하고 도약(跳躍)하는 한 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하며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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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7
  • [김영일 목사] 주님 오신 성탄에 철회되어야 할 일
    코로나 전염병의 재확산으로 인하여 주님오신 성탄이 우울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해마다 이 맘 때면 거리마다 캐롤이 넘쳐 흘러나고, 가판대의 음향에도 독특한 음성과 멜로디의 음악들이 빙그레 미소를 짓게 하곤 했었다.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라는 생각을, 알면서도 한 번쯤은 하면서 거리를 지나치곤 한다. 아무리 상황이 우리를 허탈한 웃음을 짓게 해도, 여전히 성탄절은 우리 앞에 다가오고, 또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기쁨의 소식, 평화의 소식으로 이 세상에 임재하여 계심을 우리는 믿는다. 이번 성탄에도 주님의 은혜로운 소식이 모든 사람, 특별히 힘들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풍성한 힘을 주시리라 믿는다. 가끔 ‘성탄뒤집기’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필자는 종종 해 본다. 금년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금은 머쓱해진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생각에 필자의 이 개구짖은 논리를 동원하여, 이 일만은 꼭 이 성탄에 철회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해 듣고, 깜짝 놀란 마리아는 깊은 산속에 살고 있었던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된다. 그때 갓 잉태된 예수님에 대해, 어떤 표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소위 ‘내로라’ 는 인간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잉태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갓 잉태되신 예수님의 잉태사실을 알았던 것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육 개월 정도 된 아이, 세례요한이었다. 그는 당시 칠흑같은 영적 암흑기 시대, 온 세상을 밝히기 위해 아기 예수님으로 오실 메시야, 그 메시야를 가장 먼저 알아본 자는, 요즈음 ‘낙태법제정’ 의 중심에 있었던 바로 아기들이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칼 하지 않은가? 얼마나 감격적으로 반응을 하였던지, 산모였던 엘리사벳까지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감동이었지 않은가! 예수님의 잉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난 잉태소식, 그 소식에 대해 처녀로서 놀라서 멘토와 같았던 엘리세벳에게 찾아간 사실은, 아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요즈음 낙태법제정의 논의의 중심에 있는, 낙태허용기간을 ‘임신 14주 내외’ 로 할 것에 의하면,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잉태 즉시 생명체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었던 육 개월 정도내외로 추정되는 세례요한의 상황 역시, 모든 인지기능이 완전했던 것으로, 인간이 자기의 의도대로 처리해도 되는 그런 존재는 분명 아니다. 즉 그런 아이를 해치는 낙태죄는 결국 살인이며, 성탄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일에 정면적인 도전이 되는 것이 되고 마는 행위이다. 필자는 여기서 조금 더 특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예수님 당시 이런 법이 제정되었고, 실시되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인류의 참담한 불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까? 이 성탄을 즈음한 지금의 분위기에 이런 법안제정에 대한 논의들은 더욱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면에서만 이 일을 평가한다고 가정하고 또 다른 논의를 해 보자. 예수님 당시 낙태죄가 폐지되었다면, 가장 먼저 그 낙태죄 폐지의 피해자가 예수님이 되지는 않았을까를 생각해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분명히 동정녀이다. 그는 처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던 것과 요셉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낙태죄가 폐지된다면 예수님은 태중에서 제거되어야 할 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이 편할 수 있지 않았을 것인가? 필자의 생각이나 논조에 모두 동의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주님오신 성탄을 앞 둔 지금 시점에서 낙태죄의 폐지법안 제정의 논의는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수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고, 우리와 똑같은 생각, 말,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 어떤 항의조차도 박탈된 태아들의 죽음은 주님의 평화가 분명 아닐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순간, 예수님은 독립적인 존재였고, 메시야였었다. 그 사실을 태중에 잉태된 육 개월의 어린 아기 세례요한은 알았고, 기뻐하였고, 어머니까지 움직여서라도 찬양하게 하는 독립적인 존재였다. 주님 오신 성탄에 이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모든 이에게 주님의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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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2-22
  • [노상규 목사] 잘 주고, 잘 받자!
    연말이 되면 교회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선교후원, 미자립 개척,농어촌교회, 기관 후원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도시 중대형 교회는 매년 연말이 되면 많은 후원요청서가 답지한다. 미자립 농촌교회인 우리 교회에까지 선교후원요청서가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후원받는 농촌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은 후원하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라고 쓰고, 잘 보이기 위해?라 읽는다.) 선물을 준비하느라 바쁜 계절이다. 코로나19(COVID-19)로 많은 교회들이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그 결과 헌금이 줄어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올해에는 후원하는 교회들이 후원 결정을 하기가 더욱 어려운 해가 될 것 같다. 주는 교회나 받는 선교사, 교회, 기관이 함께 어려운 상황인 이런 때에 어떻게 잘 주고 잘 받을 것인가?를 생각해 봄이 좋을 듯하다. 어떻게 줄까? 첫째, 줄 대상을 잘 살피고 선정하자. 눈물의 편지를 보고 감동을 받아 결정하거나, 인간관계에 얽혀 대상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연말이 되면 눈물의 편지를 잘 쓰는 사모를 동원하여 전국의 교회에 후원 요청 편지를 뿌리고, 그래서 도시목회자 못지않게 사례를 받는다고 자랑하는 철이 없는 전도사를 본 일도 있다. 둘째, 한 번 정하면, 지속적으로 주자. 처음 선정을 잘하고, 정하였으면 어렵더라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계속하여 후원하기가 어려울 때는 정중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예의이다. 후원을 시작할 때 몇 년의 기간을 정하고, 기간이 끝날 때 점검을 하고 계속 후원을 하거나, 후원을 중단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셋째, 받는 자의 필요를 헤아리며 주자. 받는 자의 필요를 헤아리지 않고, 주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경우가 있다. 선교지에 맞지 않는 한국식 예배당(?)을 지어주고, 사진 찍고, 홍보했는데 몇 년 지나서 동네 창고로 전락한 경우들처럼... 몇 명의 선교사를 후원하고, 몇 개의 교회와 기관을 후원한다고 하며... 충분한 소통을 통해 제한된 자원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움으로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어떻게 받을까? 첫째, 감사함으로 받자.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받다가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는 더 많은 주는 데도 있는데...라고 하며 무시하기도, 불평하기도 한다. 옳지 않다. 적절한 감사를 표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주는 자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찾아 힘쓰자. 받는데 만 몰두 해서는 안된다. 주려고 하면 줄 수 있는 것이 보인다. 주는 자의 형편을 살피며 기도로 시작할 수 있다. 셋째, 주는 자가 되도록 힘쓰며 받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장 빠른시간 안에 받는 자에서 주는 자가 되도록 힘쓰자. 구조적으로 지속적인 후원이 필요한 곳이 있다. 교단 차원의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곳이 있다. 필자는 1996년 대전에서 선교지에서 교회를 시작하듯이 한다며 아내 혼자 앉혀 놓고 “주는교회 Giving church”를 개척하여 12년 6개월을 담임하였었다. 그때 주는 것에 대해 나름 많은 연구와 경험을 하였었다. 개척하는 달부터 선교후원을 시작했었다. 받으면서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 주는 것은 어려운 사역이다. 주고 나서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망하는 경우가 있다. 주고 나서 주는 자는 흥하고, 받는 자는 망하는 경우도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주고 나서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흥하는 경우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는 마지막 경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하신 주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한다. 조선 선교를 위해 거액의 후원금이 든 봉투를 건네주며 “주는 내 기쁨은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라고 했던 세브란스의 말이 깊이 울리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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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2
  • [안동철 목사] 소중한 가치에 목숨을 걸라!
    박지선 씨라는 유명한 개그우먼이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죽었다. 어떤 문제로 모녀가 죽은 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준 사람의 숨겨진 곳에 큰 상처와 고통이 있었음이 마음 아프다. 그런데, 역대하 23장 10절부터 23장 15절까지를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보게 된다. 가족사로 생각해도 이런 비극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가족사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려는 사탄과 이에 대항한 하나님의 사람의 이야기이다. 여호람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는데, 왕이 된 지 1년 만에 예후에 의해 죽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여호람의 아내인 아달랴는 손자들을 다 죽이면서 자신이 왕이 되었다. 이때 한 사람 겨우 살게 되는데 바로 요아스였다.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사브앗이 1살 된 조카인 요아스를 아달랴의 손에서 구한 것이다. 그리고 요아스는 여호사브앗의 남편으로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보호를 받으며 성전에서 6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호사브앗의 이런 행동은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했다. 이 일이 발각된다면 아달랴에 의해 비참하게 죽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호사브앗은 요아스를 구했고, 7년째 되던 해 남편인 여호야다와 마음을 같이한 사람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요아스를 남유다의 왕으로 옹립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여호사브앗은 왜 ‘어머니 아달랴’(아버지 여호람의 아내)의 명령을 거부하고 요아스를 살린 것일까?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뺏기 위해서였을까? 아닌 것 같다. 여호사브앗은 정치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그럼 아달랴가 정치를 잘못해서 백성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을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 왜 여호사브앗과 여호야다는 목숨을 건 혁명을 했을까? 그 이유가 역대하 23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왕자가 즉위해야 할지니 이제 너희는 이와 같이 행하라”(대하23:3b-4a)고 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남유다의 왕은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때문이었다. 다윗의 가문을 멸하려고 한 것은 결국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였고, 이것은 사탄의 오랜 소원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아달랴와 여호사브앗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려는 사탄과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려는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다. 여호사브앗은 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다. 여호사브앗은 이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6년의 세월을 엄혹한 아달랴의 감시 속에서도 요아스를 포기하지 않고 성전에 숨긴 것이다. 이런 여호사브앗과 그의 남편인 여호야다의 모습이 큰 도전이 된다. 그들은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용기를 발휘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그러나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했다. 분명 요아스가 6년의 세월 동안 아달랴의 손을 피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이 은혜를 이루기 위해 여호사브앗과 여호야다의 ‘용기’(대하 23:1)가 필요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변치 않는 공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목숨을 걸어야 할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이러한 소중한 가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냥 되지 않는다. 여호사브앗과 여호야다와 같은 목숨을 건 헌신과 불의한 사탄의 왕국과 싸우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 인생에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가? 정말 소중한 것에 나의 소중한 것을 투자하라. 이곳저곳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의 편에 서라. 하나님은 이런 사람, 이런 가치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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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1-20
  • [유의신 목사] 얼굴(안면顔面)
    새삼스럽게 ‘얼굴’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힌다. 대면(對面)과 비대면(非對面)이라는 단어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화두가 되는 이유도 있지만 최근 돌아가는 정치판과 교계의 지도자들의 모습과 사회적 거리두기에 임하는 교인들의 모습이 교차 되면서 깊이 상고(詳考)하게 된다. 얼굴은 한 사람을 대표하는 그 사람의 정체를 쉽게 얼굴로 인식되고 있는 신체 부위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지문(指紋)이나 음성(音聲), 안구(眼球), DNA(유전인자) 같은 것으로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일상에서는 그 사람의 얼굴로 사람을 알아보고 인식하도록 학습하며 살아온 것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개’ 하면 그 사람이 얼굴이 먼저 떠오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첫인상으로 그 사람을 가름하기도 한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상(觀相)을 중요시하면서 운명까지 읽으려 하는 문헌들이 전래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 관상 전문가들의 한가지 빼놓지 않는 것은 심상(心相)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링컨의 어록에는 40이 넘으면 그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얼굴로 진솔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왜냐면 순진하게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가 손해 보가 일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마음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하게 되어, 소위 말하는 포커페이스(poker face)로 감정을 감추면서 다른 사람의 패를 읽어가는 처세술(處世術)에 길들어지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얼굴과 관련하여 생기는 체면(體面) 문화이다.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빗을 내서라도 과도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치르는 관습, 체면 때문에 자식을 일류대학에 진학시키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이 즐비(櫛比)하다면 심한 표현일까? 게다가 체면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과하지 않는 뻔뻔함에 염치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을 철면피(鐵面皮)라고 부른다. 소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 것 같다는 말이다. 각종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합법을 가장하여 버젓이 고개를 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니고 있는 속물들이 이 시대의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이런 부류들을 속된 말로 안면(顔面) 몰수 하고 사는 파렴치(破廉恥)한 자들인 것이다. 여기에는 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각종 종교단체들과 지도자들의 비리와 부도덕한 일로 공동체가 싸움터가 되고 사회 법정에까지 가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투(me too)에 걸리고도 끝까지 반성이나 회개 없이 자신은 그런 일이 없다고 우기며 피해자에게 다시 고통을 주는 지도자들도 있음에 탄식이 나온다. 이런 철면피들이 득실거리는 시대가 되었다. 성경에서는 특히 예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부르셨다. 그 당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협하며 방해하는 신분의 사람들을 바리세인들과 서기관이라고 하셨다. 그 시대에 이들은 오히려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고 누구보다 성경에 능통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만 7번이나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여기 사용된 외식이라는 단어는 [영] hypocrite[히 uJpokrithv"]의 번역인데, 원래는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서 연출하는 배우를 가리킨 것으로서 신약에만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렇게 외식하며 철면피로 파렴치하게 살게 되는가? 우리 내면에 있는 죄, 아담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숨기는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적극적으로 우리와 대면하시기를 원하셨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을 꺼리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온 절망적인 죄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로 죄인과 대면하여 만나 주신 것이다. 우리 같은 죄인은 감히 하나님을 대면할 수가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외면하시면서까지 그 십자가에서 우리와 대면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십자가로 가면을 벗고 연기를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寶血)로 성형 수술을 받아서 진솔하게 하나님과 대면 할 수 있는 회개와 믿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시편 27: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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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11-03
  • [탁지일 교수] 6.25전쟁 70주년의 아쉬움
    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낸 후 방문했던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서 느꼈던 애잔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2,300여 기에 이르는 10대 말과 20대 초반의 참전 군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걸으며, 군복무 중인 아들들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형제였던 (어린) 젊은이들 절대다수는 미국(39명)과 영연방 출신(캐나다 380명, 호주 281명, 뉴질랜드 32명) 기독청년들이었다. 이들 젊은 기독참전군들이 태평양 건너편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 부산에서 오늘 영면하고 있다. 수년 전 미국과 캐나다 교회 사료관들을 방문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유엔기념공원을 알게 된 후, 이들 참전 군인들의 이야기를 역사 속으로 소환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반공산주의와 전시전후 구호사업에 관한 자료들은 다수를 발견했지만, 이들 젊은이들과 가족들의 아픔과 위로의 흔적들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아직까지도 그들 조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기독교 역사 기술 속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사각지대에 남겨져 있다. 6.25전쟁을 70주년을 기념하는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6.25전쟁 70주년을 의미 있게 기념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왜냐하면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증언을 기록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80주년이 됐을 때, 과연 몇 분이 우리 곁에 남아 생생한 전쟁의 증언과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혼란스럽던 올해 초, 교회사를 전공하는 제자들과 함께 『6.25전쟁과 한국교회』라는 책을 만들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2020년, 피난지 부산에서 공존했던 지난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통해, 코로나19와의 또 다른 전쟁을 치루고 있는 오늘날 교회의 진로를 모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책 작업을 마친 후 마침내 발견한 키워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전쟁의 공포와 소망이 공존하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피난지 부산에 모인 신앙인들에게 하루하루의 고달픈 삶은 은혜였다.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소망,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 헤어진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은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었다.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던 부산 도심에는 6.25전쟁의 흔적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피난민들의 지친 삶들이 머물렀던 산북도로, 피난민들의 만남과 소통의 장소였던 40계단, 피난의 일상들이 고스란히 전시된 40계단문화관이 있고, 전쟁 시기에 세워진 교회들에는 고향을 떠나 낯선 피난지에 정착한 피난민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오늘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부산은 기독교 인구가 가장 적은 한반도 동남단 땅 끝 불교의 땅으로 일컬어지지만, 6.25전쟁의 절박한 상황에서 복음이 소중히 보호되던 은혜의 땅이었다. 피난지 부산에게 6.25전쟁은 부산경남지역 교회 성장의 전환점이었다. 아픈 마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기독 피난민들, 그리고 그 아픔을 품은 부산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던 피난 교회들이, 오늘 부산지역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바라본 한국교회의 모습은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은혜 아니면’ 전쟁으로 무너지고 일그러진 세상을, 선한 능력으로 새롭게 만들 수 없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오늘, 코로나19로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은혜 아니면’ 설 수조차 없는 부족한 우리들이, ‘은혜 아니면’ 살아낼 수 없었던 70년 전 6.25전쟁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소망과 용기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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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7
  • [원대연 목사]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나라가 처한 어려움이 보통이 아니다. 너무 답답해 눈물이 난다. 답답해 울고 두려워 울고 안타까워 운다. 생명을 거는 자세로 기도해야할 것이다. 이 나라의 문제를 끌어안고 의인의 간구를 드리는 사람,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도 바울처럼 동족의 문제를 끌어안고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사람이 필요하다. 최근 희한한 일을 기억한다. 여장을 한 남자가 여탕에 침입했다. 경찰이 곧바로 출동을 해서 이 남성을 붙잡았는데, 이 사람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자신을 여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여탕에 들어온 것이라 한다. 엄연히 자신이 태어날 때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는 그 생물학적 성만 성인데 요즘 사회적 성을 주장한다. 기분에 따라서 아침에는 여자가 되고 저녁에는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젠더의 성, 사회적 개념의 성을 주장한다. 앞으로 머리긴 남성이 여자 목소리 내면서 에스트로겐 호르몬주사 맞고 여탕에 가면 성소수자로 트랜스젠더로 대우를 해야 한다. 어느 정치인의 말은 가관이다. 설교 중에 ‘동성애가 죄’라고 하면 처벌을 받는가에 대한 질문에, ‘처벌 받겠죠’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큰 혼란이 예상된다. 아마 성경을 없애라고 하지 않을까. 어느 분은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해야한다고 했다. 군형법 92조 6항 폐지해야한고 한다. 나라가 큰일이다.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정말 걱정이 된다. 너무 혼란스럽다.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이 정치나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하나? 첫째는,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1-2) 나라와 통치자들을 위한 기도는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다.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이 말은 나라와 통치자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해야하는 사실을 가르친다. ‘첫째로’ 이것은 어떤 논리적 순서를 가르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우선순위로 신경을 써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 즉, 모든 기도의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2)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 중보의 책임을 수행하는 나라와 사회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본다. 물론 나라에 대해 불평하고 분노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의 책임을 다해야한다. 그리할 때 이 나라는 평안해진다. 하나님의 진노가 눈앞에 뻔히 내다보이는 요즘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 간절히 회개로 기도해야 할 때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3)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지도자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며 기뻐 받으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 때에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많이 돌아온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주 앞에 돌아오는 영혼이 많게 하소서!’ 우리는 보잘것없지만, 기도의 권세가 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이야말로 비상한 기도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한 사람을 그 가운데서 찾고 계신다.(겔22:30)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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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0-27
  • [전영헌 목사] 듣고 싶은 말
    몇해 전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간다고 하는 아이들과 학업에는 전혀 의욕이 없고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 23명을 선발하여 캠프를 열게 되었다. 캠프 계획을 설명하고 학생들을 선발하기 시작하자 담임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의 얼굴에 이런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저 인간들을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거지?”하는 염려들이 넘쳐났다. 그래도 방향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학교에서 늘 문제아로만 취급 당하다가 럭셔리한 펜션에, 비싼 소고기 바비큐에, 그리고 맘껏 놀 수 있는 게임팩을 가지고 놀다보니 녀석들 마음에 “이게 뭐지?”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젠 목사님이 뭔가 본색을 드러낼 때가 된 듯 한데 “씻고 자거라”하고 교장선생님과 같이 방으로 들어가버리니 녀석들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잠을 청하려 하는데 대표 녀석 한 명이 방문을 두드렸다. “목사님, 잠시 1층으로 내려와주세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1층으로 내려갔더니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서 “목사님, 아무거나 해주세요. 뭐든 해주세요. 이렇게하면 우리가 불안해서 못잡니다.”라고 날 재촉하는 것이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23명의 아이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서 아이들에게 돌발 질문을 했다. “이 자리에 너희들의 부모님이 계신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부모님이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신다면, 너희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냐?” 나는 아이들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그중에는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해라.”는 대답도 있었고, “미안하다.”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아이들이 마치 짠 것처럼 같은 대답을 했다. “목사님,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러면 너는 언제 잘했다는 말을 들어 봤냐?” 아이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을 걸요?”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아이들의 반응을 보며 순간 울컥했다. 캠프에 참석한 아이들을 쭉 둘러보니 평소에 ‘잘했다’라는 말을 들을 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꾸중을 듣기에 바쁜 아이들이었다. 집에서는 거의 포기한 자식으로, 학교에서는 그냥 꼴통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평소에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은 바로 “잘했다!”였던 것이다. 1박 2일의 캠프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캠프가 어떠했냐고 물어보았다. 다들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데 차 안에서는 말을 아끼던 녀석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자 폭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들을 모아 놓고 정신 교육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학교에 다녔던 11년 동안 학교에서 받은 것 중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학교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인간답게 살아보겠습니다.” 모든 교육이 공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학업 외에도 아이들이 학습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많다. 아이들은 큰 것을 통해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의외로 작은 것에 감동을 한다. 작은 것에도 반응을 하고 심지어 터닝 포인트가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따라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중요하다. 교육은 단순히 아이들을 탁월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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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15
  • [김기현 목사]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
    신모 변호사는 저랑 나이도 같고, 지적 욕구도 왕성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여 장애인 차별 금지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는 분입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총체적 구원과 복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장애인들의 영혼과 정신, 육체,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웰빙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요. 그분 덕분에 저도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제하며 많이 배웁니다. 새로 옮긴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다고 판사가 아닌 집사로 불러달라고 할 만큼 순수하고 착한 분입니다. 그런 그분이 본인말로 “체질상 성령집회 같은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경험 삼아 한번쯤은 참석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참석을” 했답니다. 말씀을 마치고 목사님께 기도를 받는데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데 ‘픽픽 뒤로 넘어’ 지더랍니다. 손으로 머리를 미는 것인지, 하나님의 역사인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앞으로 나아가 차례를 기다렸답니다. 이분을 위해 한참 기도하던 목사님 왈,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절로 뒤로 넘어지고 날아갈 듯 가뿐했다 합니다. 신집사님은 평상시에도 저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많습니다. 때로는 묵직하고 고전적인 것에서부터 어떤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특이한 질문을 해서 저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제 딴에도 제 스스로 질문이 많지만, 아무래도 목사인지라 정통이랄까 정해진 틀에 익숙해지기 십상인데, 이런 분들 때문에 ‘확’ 깨게 됩니다. 글감도 많이 제공해 주고, 아무튼 좋은 벗이자 주 안의 한 가족입니다. 그분의 글을 보면서 고전적이면서도 유치찬란한 주제인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신앙은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도 전도하는 분이 그러지요. 하나님의 은총은 마치 태양빛과 같다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다고 부인할 수 없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그러자 신애가 말하지요. ‘그것은 그냥 햇빛이에요.’ 과학 절대 만능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비단 우리 당대의 사람들만의 행태는 아닙니다. 모든 신들의 형상을 갖고 있던 로마 시대에 하나님을 그 어떤 모양으로 만들기를 거부했던 그리스도인들을 지금 들어보면 참 아이러니한 비판인데, ‘무신론자’라고 했습니다. 신이라 할지라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만을 이야기하니 실로 희한한 무리였던 게지요. 신집사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법관답게, 지식인답게 눈에 보이는 것 밖의 세계에 머리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인 멜 테리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을 소개받은 한 분이 그분에게도 권했던 모양입니다. 대충 내용을 들은 신 판사님 말이 “그럼 신문 기사로 나왔겠네요?” 하더라나요. 사회적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것만을 인정하려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신문에 나온다고 공인된 사실이 되는 것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실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성이 제 아무리 발달해도, 이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판단할 깜냥이 아닙니다. 이성은 이성 자신에 대해서도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그걸 이성의 언어로 말하면 이성도 비이성적이고, 종교의 언어로 말하면 이성도 신앙적입니다. 하여 신앙도 이성적이고, 이성 또한 신앙적입니다. 그래서 칸트라는 철학자는 이성이 자기의 분수와 한계를 알아야 한다고 책을 썼는데,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오래 된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믿지 않고서는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믿어야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지식, 심지어 과학도 교사와 학교, 교과서의 권위에 의거해 먼저 믿고 이해합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서는 과학을 배울 수 없습니다.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도, 이성적으로만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에 어느 정도 이성적인 요소가 있고, 맹목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지식이나 앎도 믿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라는 말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생각 틀 안에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을 끼워 넣으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하나님이 당신 크기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착각하지는 마세요.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받은 말씀을 조사했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구약에서 약속한 그 메시아인지를 연구했다는 것이고, 바울의 설교대로 살아보아서 말씀의 진실성 여부를 검증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영이라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요1 4:7). 그러니 믿지 않고 있다면 판단하려들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그리고 한 마디 더하면, “신집사님, 믿었으니 판단해 보세요, 가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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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5
  • [최병학 목사] 예수님의 본캐와 부캐?
    예능인 유재석이 ‘배려남’과 ‘메뚜기’라는 ‘본캐(원래 캐릭터)’에서 MBC 예능 <놀면 뭐하니?>를 통해 드럼과 뽕짝, 그리고 혼성그룹 ‘싹쓰리(유재석, 이효리, 비)를 통해 ‘부캐(또 다른 캐릭터)’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유재석 유니버스(유재석의 세계관)’의 핵심은 ‘유연성’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가다머의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s)이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격의(格義, Matching Concepts)’이고,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복음과 상황’입니다. 현대해석학의 거장인 가다머는 ‘선이해(preunderstanding)’와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선이해란 일종의 선입견을 뜻하는데,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2』에서 선입견이란 개인적 차원에서 임의로 만들거나 제거할 수 있는 편협한 사고가 아니라, 문화나 철학, 역사와 같이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전통에 의해 형성된 사고를 뜻하며 이러한 선입견은 이해의 기본 조건으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이해를 기본 조건으로 하는 이해의 과정은 어떠한가요? 가다머는 ‘현재 지평’과 ‘역사적 지평’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현재 지평’이란 인식의 주체가 선이해를 바탕으로 형성한 이해를 뜻합니다. 이해 주체의 머릿속에 형성된 지식, 신념 등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지평’은 과거로부터 축적되어 온 이해의 산물로, 텍스트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지식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해의 과정은 서로 다른 두 지평인 현재 지평과 역사적 지평이 만나서 새로운 지평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지평융합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의 과정으로서 지평 융합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주체가 가진 ‘현재 지평’은 ‘역사적 지평’과 지평융합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이 되고, 그리고 이 새로운 지평은 다음 이해의 선이해로 작용하며 또 다른 이해로 이어지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결국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 과정(Hermeneutical Circle)을 고려해 보면, 이해는 결과가 아니라 언제나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격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에 전래되며 중국의 노장사상과 지평융합하여 새롭게 변합니다. 후한시대(75~220)에 전래된 불교는, 『삼국지』에 나오는 삼국시대(220~280)를 거쳐, 5호 16국(304~439) 시대와 남북조시대(420~589)까지 오랜 분열과 내전의 시기에 현실의 윤리를 강조하는 유학이 퇴조하자, 사람들이 내세 종교, 혹은 현실을 초월하는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폭넓게 수용됩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현세의 ‘열반’이라는 교리와 동시에 ‘내세에 대한 윤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현실에 지친 민중들에게 주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의 핵심이 유대교의 지평에서는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며 헬라지평에서는 ‘로고스’, 라틴 지평에서는 ‘만왕의 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땅, 대한민국의 현재 지평에서 예수는 어떤 지평으로 토착화되어야 하나요? 힌트를 줄까요? 유재석은 ‘배려남’의 ‘유연성’으로 본캐와 부캐를 함께 완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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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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