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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지일 교수] 3.1운동 100주년과 므두셀라증후군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과 행사가 국내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1919년 3.1운동은 우리 겨레와 민족을 위한 한국교회의 성격이 형성된 사건인 것은 분명하다. 첫째, 3.1운동 당시 교회는 가장 가시적인 전국적 조직이었다. 장로교회의 경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함께 독노회 설립되었고, 1912년 총회가 설립되었다. 동일한 시기에 비록 조선의 국권은 피탈되었고, 왕위는 찬탈되었으며, 군대마저 해산되었지만, 오히려 교회는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오랜 일제강점기를 인내로 지켜 나아갈 수 있는 든든한 기초를 내렸다. 둘째, 교회는 민족운동의 산실이었다. 교회에는 순수한 신앙적 동기를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았지만, 민족의 독립과 개화를 위한 목적으로 교회를 찾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에 눈에 비친 서구 강대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 수 있는 믿을만한 조력자로 보였을 것이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민족운동이 교회 안에서 꽃피웠다. 셋째, 기독교는 근대교육의 중심이었다. 곳곳에 설립된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에서는 신앙교육과 함께 근대 인문사회과학교육이 제공되었다. 학생들은 신앙의 기초위에 조선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근대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3.1운동을 촉발한 이들이 바로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기독학생들이었다. 넷째, 교회는 일제강점기하 가장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전국 도시들과 도서산간지역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없는 곳이 없었으며, 게다가 매일 새벽, 수요일과 주일 등 수시로 정기적으로 모여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모세가 히브리민족을 이끌고 출애굽하는 장면은 조선 기독교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아드려졌다. 일제강점기하의 비참한 조선반도의 현실이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당시 애창된 찬송의 가사처럼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이었다. 마지막으로, 1919년 교회는 저항과 순교의 중심이었다. 3.1운동 당시 기독교인 참여가 주축을 이루었으며, 다치거나, 갇히거나,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또한 파괴당한 교회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민족주의적인 열정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비타협적인 정결함을 지닌 용사들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야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 1919년 민족의 소망이었던 교회는, 일제강점기 후반 태평양전쟁을 전후해 좌절과 변절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수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났으며, 이로 인해 1920년대는 반기독교적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게다가 1938년에는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므두셀라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 있다. 과거의 나쁜 일은 잊어버리고, 좋았던 일들만 선별하여 기억하는 경향성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한국교회가 3.1운동 100주년의 영광을 기억하기에 앞서, 일제강점기하 한국교회의 고난과 변절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에 묻혀, 좋은 일만 취사선택하여 기억하고 기념한다면, 한국교회는 현재의 고립과 위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이 일회적인 이벤트성 행사가 되기보다, 민족을 위한 교회로 새로 거듭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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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26
  • [김광석 목사] 생명회복을 위한 절반의 눈물
    오늘 이야기는 사람 사는 세상의 한 쪽 이야기이다. 그 한쪽을 이렇게 풀어 본다. 하나, 오늘 나는 무엇이나 통계화 되는 세상에서 산다. 현대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숫자로 표시되는 통계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표시 방법이다. 신문을 비롯한 많은 언론 매체에는 수많은 통계들이 제시된다. 경제에 관한 것부터 정치 여론 조사 통계, 그리고 자살률 같은 사회 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그 뿐인가. 우리 자녀들의 성적도 온통 숫자를 중심으로 한 통계 일색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숫자의 마력에 빠져 살 정도이다. 경제지수가 좋게 나왔다고 발표되면 언론은 한차례 잔치를 벌이듯 알린다. 아이가 1등을 하면 그 집안은 흥분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실업률을 비롯한 수많은 사회지표들의 통계는 현대인들을 웃고 울리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 그 통계가 나에게 주는 체감온도는 어떤가? 때로 그 숫자로 표시된 통계라는 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원하지 않는 고통을 부담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둘, 오늘 나는 문명과 문화가 마치 이분화된 사회에서 산다. 개인적으로 나는 미국에서 원조로 온 곡식가루와 우유를 먹은 마지막 세대에 속한다. 그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그 풍성함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내 위의 세대에게는 지금의 풍요로움이 신비로울 정도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을 비롯한 많은 전자 기계들은 그 사용법을 몰라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로 다양하다. 뿐만 인가? 사람들이 보다 편리하게 살도록 도우는 기계의 발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복한가? 이상하게도 휴가가 되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 편리함을 뒤로 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산이나 계곡으로 가서 쉬고 싶어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편리함을 주제로 하는 문명의 발달이 사람의 정신세계를 움직이는 문화의 발달과 함께 가지 않으면 결국 그 편리함은 또 다른 불편함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날로그적 삶을 살기 위하여 나는 디지털을 배운다’고 말이다. 사람에게는 편리함이 모두가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편리함만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하고 있다. 조금의 수고로움이 때로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소도구임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셋, 오늘 나는 진단과 치료가 동행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산다. 각 언론 매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는 진단지가 달려 있는 것 같다. 주변의 수많은 사건들과 현상들을 보고 판단하여 진단하는 능력도 대단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 진단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진단 뒤에 따라 와야 할 치료제가 희귀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진단에 따른 처방전을 말한다. 그러나 그 처방전의 효과는 기대만큼 없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보다 진단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기보다 사건 그 자체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사건에 대한 판단자가 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왜 진단은 많은데 처방이 많지 않을까? 사건만을 보고 그 사건 속에 있는 사람은 잊어버린 결과는 아닐까? 넷, 오늘 나는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사회에서 산다. 내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셔서 징집을 당하시고 많은 공부를 하지 못한 분이다. 그러나 그 분에게 받은 너무나 소중한 유산이 있다. 그것은 바로 책임감이다. 특히 가족에 대한 부분은 나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이다. 비단 내 아버지뿐일까? 우리의 부모님들이 한결같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하며 진 십자가도 할 수만 있다면 벗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사회가 바르게 유지될 수 있는 중요한 힘은 바로 사회와 서로에 대한 책임감이다. 이 같이 살아가는데 그래도 사람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을 가지고 사는지 오늘도 나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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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2-12
  • [최윤 목사] 기독교 경제윤리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지금 이 시대는 돈이 최고인 물질만능주의와 물신숭배의 시대라는 사실에 모두 공감할 것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게 다 되는 세상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고, 비교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이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매일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돈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못 박아 말씀하셨다.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와 물신숭배 풍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독교 경제윤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성경 말씀과 기독교 경제윤리를 실천하면서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물신숭배의 시대, 지금 한국교회는 기독교 경제윤리가 가장 절실히 필요한 때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이지만, 우리가 살면서 겪어야 되는 경제생활에 관한 축복의 원리를 잘 말해주고 있다. 특히 신약성경에 보면 믿음에 관한 성구가 215개, 구원에 관한 성구가 218개나오는데 금전과 물질, 재정에 관한 성구는 2,086개나 된다. 열배가 넘는다. 또 예수님이 어리석은 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주신 비유가 38개인데 그중에 16개가 다 물질에 관한 비유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이 곧 신앙이며 대부분이 경제활동에 치중되어 있고 그것이 곧 신앙의 표출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기독교 경제윤리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면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경제문제가 영적인 기독교 신앙과 무슨 상관이냐며 반문한다. 교회 잘 다니고, 봉사 잘하고, 성경 잘 읽고, 기도 잘하면 됐지 무슨 경제얘기냐는 반응이다. 사람이 돈을 벌거나 쓰면서 사는 한 모든 사람은 경제를 떠나서 살 수 없다. 또한 현실의 경제문제에 있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인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경제이론과 경제 윤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자신만의 경제이론과 경제윤리가 성경적인지 아니면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경제윤리에 대해 알아야 한다. 교회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찾아서라도 배워야 한다. 예수님을 비롯해 우리보다 앞서 간 수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가르쳐 왔듯이, 기독교 신앙은 물질적인 경제문제와 영적인 신앙의 문제를 분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분리된 이원론이 아닌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하나로 통합된 일원론에 가깝다. 즉 물질적인 문제는 바로 영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이원론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닌 고대 헬레니즘에서 온 이단적인 것이다. 초대교회도 바로 이 영지주의 이원론과 처절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유대 헤브라이즘과 기독교는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강조한다. 기독교는 물질세계와 육체, 노동을 천시하고 경멸하는 헬라 철학이나 영지주의 이원론의 창조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영지주의적인 이원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인간은 영(靈)과 혼(魂)과 육체(肉體)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통합된 존재이듯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이다. 육체 없이 영혼만 있는 인간은 없다. 반대로 영혼 없이 육체만 있는 인간도 없다. 인간은 물질적인 육체와 영적이고 정신적인 영혼이 통합된 존재이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열린책들)>에서 경제를 "생명을 낳고 기르고 보존하는 모든 일"이라고 정의한다. 우리의 물질적인 경제생활은 하나님과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과 이웃에 관계된 경제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경제문제에 대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자신을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특별히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는 경제문제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부터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기독교 경제윤리를 배우고 실천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나라에 가깝게 만들어 가야 한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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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27
  • [남송우 교수] 한국교회의 생태계 회복을 위하여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 선교역사에서 드문 경우로 평가된다. 짧은 기간 동안 교회와 교인수의 증가가 폭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모습은 이런 긍정적 평가와는 다른 선상에 놓여 있다.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개척교회를 세우는 일도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그 결과 교인의 규모가 큰 교회와 그렇지 못한 교회로 양분되면서, 교회 생태계의 파괴 또한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작은 교회 운동이 일고 있지만 크고 거대한 것에 매몰된, 근대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교회는 작은 교회가 설 자리를 앗아가고 있다. 소위 대형교회는 더 대형화되어가고 있고, 소규모의 교회는 점차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는 기존신자들의 교회 수평 이동도 한 몫을 하고 있다. 그저 교회 출석만으로 만족하는 대형교회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타성화된 교회생활의 편의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문제는 교회의 대형화가 한국 교회의 생태계를 엄청나게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은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몸은 각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소통하고, 유기체를 이룸으로써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다. 교회는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어 나가는 특별한 공동체이다. 하나의 교회는 이러한 유기체성을 언제나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손가락 한 부분에 상처가 나서 아프면, 몸 전체에 아픔이 전해져 온 몸에 아픔이 느껴지듯이 교회 공동체는 한 구성원의 아픔과 기쁨을 하나의 몸처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유기체성이 지닌 본질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한 사람의 아픔과 기쁨을 전적으로 감지하고 나눌 수 없는 수를 넘어선다면, 교회의 본질은 유지되기 힘들다. 초대교회가 가정 교회 중심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 원리는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가정교회로 출발한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거대한 몸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자, 핍박을 통해 디아스포라 상태로 흩어졌다. 이렇게 된 연유를 여러 가지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선교사적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거대한 조직으로 변하면, 교회의 본질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현대에 와서, 교회의 규모가 늘어나면서, 교회에는 경영의 원리가 도입되었다. 담임목사 외에 소위 부목사나 협동목사제도가 일반화되어, 한 교회에 여러 목회자들이 함께 교회를 섬기는 형태로 변했다. 많은 교인들을 관리하기 위한 일종의 교회경영이 시작된 것이다. 교회에 경영원리가 작동하면서, 교회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경영원리의 핵심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남기는 데 있다. 교회는 결코 경영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체가 아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대화가 교회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훈련소가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에 경영의 원리가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사랑을 훈련할 수 있는 적정수를 넘어섰다는 증거이다. 한 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훈련하며, 이를 세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교회 공동체의 수가 한 교회의 적정수라는 말이다. 한 몸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교회 단위들이 모여, 우주적 차원의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주인인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한국교회의 개혁은 소위 대규모의 교회들이 스스로 작은 교회로 나누어지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속에 자리한 경영의 원리를 포기하고, 사랑의 원리를 쫒아 가는 첫걸음이다. 이것이야말로 작은 교회들이 다양하게 생존하면서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회복하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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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1-12
  • [박용성 목사] 다음세대 교육은 부모교육이다
    한국 교회 곳곳에서 다음세대를 살려야 된다고 외치고 있다. 다음세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방법과 대책에 있어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 교회 다음세대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접어들면서 정체기를 맞았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감소 현상을 겪고 있다. 가면 갈수록 교회 내에서 다음세대를 찾아보기가 힘이 든다. 이대로 가다가는 앞으로 다음세대가 없어지는 교회가 늘어갈 것이다. 그러면 다음세대가 잘 성장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목회자의 관심과 교회의 지원이 있으면 해결되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다음세대가 잘 성장하려면 좋은 부모가 있어야 한다. 모세는 장성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누가 모세를 가르쳤는가? 그가 배운 것은 애굽의 문화와 정치이다. 바로 왕궁에서 그는 애굽의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애굽의 지도자가 아닌 당시 애굽 사람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하지만 교육학적으로 볼 때 그가 받은 교육의 영향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받은 교육은 바로 왕의 궁중에서 유모의 신분으로 자신을 돌보았던 친모로부터 받은 교육이다. 나일강에 목욕하러 왔던 바로의 공주는 아이 하나가 바구니에 담겨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물에서 건져 올렸다. 공주는 그 아이를 자신의 양 아들로 삼고 그를 키우기 위해 유모를 구했는데 그가 바로 모세의 친모였다. 공주는 젖을 뗄 때 까지 모세를 맡겼다. 이 때가 모세의 교육 중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하나님은 모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바로 왕의 궁중에서 애굽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여자 그것도 모세의 친모의 손에 맡겨졌다. 모세는 젖 먹는 시기 동안 어머니의 품에서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너는 애굽인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자기 정체성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이다. 사람이 어떤 시기에 어떤 교육을 받는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누구에게 교육을 받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모세에게는 가장 훌륭한 교사가 있었다. 그 교사는 바로 모세의 모친이다. 가장 훌륭한 교사는 부모이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정체성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다음세대 교육의 승부는 부모교육에서부터 시작한다. 모세가 중요한 시기에 친모의 손에서 이스라엘의 영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던 것처럼 우리 다음세대의 교육을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교육을 제대로 받아서 부모가 되지 않았다. 영적인 교육보다는 세상의 교육과 가치관을 따라서 자녀를 양육한다. 신앙과 삶이 다른 부모의 모습을 보고 다음세대는 자란다.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다음세대에 대한 희망은 사라진다. 한국교회의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시급하다. 이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를 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교회는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해 부모교육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불투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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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29
  • [송시섭 교수] 같은 사건, 다른 시각
    최근 ‘가짜뉴스’(fake news)에 대한 국무총리의 의법처리발언이후 국감에서도 인터넷상의 ‘허위조작정보’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여당에서는 타인의 명예와 권리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고, 야당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재갈물리기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제기했다. 언론 및 표현의 자유란 근대시민사회의 여론분출구로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와 관련되어 있는 기본권이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서는 그 행사의 범위가 확대되어 새로운 문제점들을 던져주고 있다. 모든 자유가 그렇듯 이들 자유도 공동체 내에서 타인과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헌법과 법질서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고, 그것이 형법이나 정보통신망법등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나 최근 한 일간신문이 제기한 ‘기독교 가짜뉴스’ 논란은 우리들의 고민을 깊게 한다. 한 선교단체를 가짜뉴스공장이라고 지목한 일간신문 기획기사의 핵심적인 근거는 그 단체가 정확한 ‘사실확인’(fact check)을 거치지 않은 기사를 배포하거나, 심지어 의도적으로 왜곡된 사실들을 짜깁기 하여 허위정보를 유포하는 ‘공장’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세력과의 연결을 통해 금전적인 거래까지 시도했다는 의혹제기였다. 이에 대하여 ‘가짜뉴스배포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단체를 결성하고 이는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며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혐오표현금지법·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활동 등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자신들을 일정한 프레임을 설정하여 재갈을 물리려는 움직임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가짜뉴스의 온상은 오히려 그 일간신문이며, 자신들은 그 어떠한 정치권과의 연계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사실, 똑 같은 상황을 두고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다 명확한 사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면서 현 상황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들을 기독교 내부자의 입장에서 몇 가지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기독교단체가 복음적인 시각으로 사회적 이슈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하지만 기독교를 표방한 그룹이나 단체가 특정한 정치이념과 연결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특정 정당과의 연결은 오히려 교회의 운신의 폭을 좁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조사 등을 통해 이 부분이 명확히 정리되길 바란다. 또한 사회의 여러 이슈들을 하나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것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염려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뜨거운 인권, 동성애, 난민 같은 이슈들은 그 유형이 유사해 보이지만 동일한 접근과 해결방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폭넓은 전문가들의 참여가 요구되는 지점이고, 기독교계내의 ‘공론화위원회’같은 것이 필요한 이유다. 더불어 우리 기독교인들도 가짜뉴스감별에 대한 기준이 필요하다. 먼저 기사를 만들어내는 사람과 단체의 배경도 살펴보고, 최소한 두 세 개 이상의 기사를 서로 비교하면서 너무 자극적이거나 선동적인 문구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우린 뉴스를 단지 ‘팩트체크’로만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건전한 신앙과 보편적인 신학의 바탕위에서 다른 사건들을 같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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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8-10-15
  • [강규철 장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믿음
    이 할머니는 올해 85세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이제 5년이 되었습니다, 철저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사상으로 양육되었는데 언니가 일찍 불교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는 영향으로 불교를 믿었습니다. 그는 자녀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시골에서 혼자 살던 중 위암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고 난 후 그는 부산으로 와서 예수를 믿는 집안에 시집 간 큰 딸네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온 식구가 교회를 가는데 그는 적적한 집안에 하루 종일 혼자 지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가족 간의 대화가 단절되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쇠약한 몸으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무런 낙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딸에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예수를 믿어야 겠다’고 말하고는 먼저 간 남편이 묻혀있는 선산으로 가서 술을 한잔 부어주며 ‘이제부터 내가 예수를 믿어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언니, 동생 등 친지에게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그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로 부터 세례기념으로 성경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는 귀한 책을 받았으니 읽어야 한다며 매일 성경을 읽었는데 그 해가 지나기 전에 완독을 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깨끗한 새 돈을 준비하여 헌금을 하였습니다. 언젠가 부터는 자녀들로부터 받는 용돈과 구청에서 하는 취로사업에서 일하며 받는 지원금에서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웠던 삶이 예수를 믿고 난 후 감사함이 넘치고 남을 돌아보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그는 식사 때마다 감사의 기도를 진심으로 합니다. 또한 교회와 목사님과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선생님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으로 자신을 가르쳐주며 이끌어 주시니 존경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의 분란을 야기하는 교인들을 이해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욕하고 대적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제는 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매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는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여러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평생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눈을 뜨고 걸을 수 있으면 그는 교회에 가겠다고 합니다. 그가 예수를 믿으며 사는 삶은 초창기 한국교회의 순수했던 성도들의 삶과 거의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를 믿어도 정말 똑 부러지게 믿고 있습니다. 그는 남산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권순한 성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예수를 제대로 믿었으면 합니다.
    • 오피니언
    • 정론
    2018-09-21
  • [김충만 목사] 사울 주의보(注意報)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인 사울은 40세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어 왕정시대를 연다(삼상 9:1-2, 10:1, 13:1; 행 13:21). 이미 신명기에서 모세를 통해 예고된 왕의 제도(신 17:14-20)가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삼상 8:6a)는 이스라엘의 요구에 대해 결국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허락하시는 흐름으로 응답되는 셈이다(삼상 8:10-22). 한편 사울왕정 40년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그가 왕으로 부르심을 받는 시기부터 다윗이 첫 번 기름부음을 받기 전까지다(삼상 8-15장). 제2기는 다윗이 첫 번 기름부음을 받는 때부터 그가 블레셋과의 길보아전투에서 전사하는 때까지다(삼상 16-31장). 이쯤에서 사울왕정이 요동치는 사무엘상 16장이 사울 왕위 중 어느 시점이 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사무엘기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무엘상 16장에서 첫 번 기름부음을 받는 다윗의 나이를 추론해 보면 대략 사울왕정의 파국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이새의 8번째 아들이다. 그가 첫 번 기름부음을 받은 후 바로 이어지는 블레셋(골리앗)과의 전쟁에 형들 중 위 3명이 출전한다. 율법은 20세 이상을 전쟁에 참여한다고 보는 바 그렇다면 형제가 모두 연년생이라는 가정(假定)하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넷째 형은 20세에 몇 달 부족하고, 다섯째가 19세, 여섯째가 18세, 일곱째가 17세, 그럼 여덟째 다윗은 16세가 된다. 자, 다윗은 30세에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고 유다 지파의 왕으로 7년 반을 다스린다(삼하 2:4, 5:4-5). 그렇다면 소년 다윗이 16세에 사울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선되는 첫 번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가 사울의 나이 66세, 즉 사울왕위로는 26년이 되는 해다. 이로 보건데 사울왕정 제1기는 26년, 제2기는 14년이 되는 셈이다. 사울은 40세에 “스스로를 작게 여길 그 때에”(삼상 15:17)에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때 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함으로서 새사람과 새마음을 따라 왕으로서의 소명의 길에 들어섰다는 점이다(삼상 10:10, 11:6). 그런데 사실상 왕조가 바뀌고야마는 사무엘상 16장에서, 그러니까 그의 왕위 26년 어간에 마침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난다(삼상 16:14). 사울행전 40년의 역사 가운데 제1기인 26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어떻든 ‘여호와의 신’이 사울 위에 임하여 있었다. 그런데 그가 성령 안에서 한 일이 무엇인가. 전쟁(아말렉전투)에서의 ‘승리’(불순종)가 오히려 사울의 ‘실패’(폐위)를 앞당길 뿐이었다. 동시에 성령 안에 살았으나 성경의 평가는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삼상 15:23)라고 단언한다. 참담하다. 한편 이어지는 제2기는 ‘여호와의 신’(성령) 없이 왕놀이만으로 무려 14년 동안을 연명한다. 결국 40년 동안 ‘여호와의 신’ 안에서의 26년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리고 살았고, ‘여호와의 신’ 없는 14년은 오직 다윗 죽이기에 목숨을 걸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신이 임재 중일 때나, 성령이 부재 중일 때나 그의 40년은 맛 잃은 소금과 같았을 뿐 아닌가. 신약은 예수를 주(主)라 시인하면 다 성령 안에 있다 하신다(고전 12:3). 그런데 그러고도 고린도서가 전하는 고린도교회는 그 모양 그 꼴이었다. 사울왕위 40년과 고린도교회가 중첩되는 이유다. 그럼 나 자신이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교회는 어떤가. 사울 주의보(注意報) 앞에 무릎 꿇고 은혜 한 모금 갈망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나 역시 겉사람으로도 속사람으로도 사울왕처럼 신앙놀이 중인 건 아닐까. 내 안에 여호와의 신이 거하심에도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사울처럼 여호와의 신이 부재 중이라서 그러는 것인가: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참 두렵다. 성령 안에 있었으나 왕위 2년만에 버림 받은 왕으로(삼상 13:13-14), 더욱 그런 왕으로 38년을 성령을 넘나들며 왕놀이한 사울! 자꾸 사울과 겹쳐지는 게 좀 불안하다. 이 말세의 영적 주의보(靈的 注意報)의 답을 조금이나마 알기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아프고 시리다. 주 앞에 서는 날이 곧이다. 그날이 오고 있다. 오, 마라나타!(Maranatha, Our Lord has come; 고전 16:2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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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0
  • [문춘근 목사] 작은 교회가 아름답지 아니한가!
    한국 교회가 참으로 걱정스럽다는 얘기는 단지 우리의 내부적 우려가 아니다. 공적인 미디어에서조차 우려하는 뉴스를 쏟아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으로 난감하다. 특히 메가처치, 초대형교회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담고 있는 일반 교회까지 함께 의심과 비판과 멸시의 대상으로 치부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책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참된 교회되기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참된 교회니 좋은 교회에 대해 논하는 것에 너무 지쳐서 10년 전에 아무런 계획이나 재정준비도 없이 교회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교회를 개혁(reform)하려고 20대부터 40대 중반까지 지역교회 몇 군데를 거치면서 몸부림 쳐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떤 계기로 그냥 교회를 형성(form)하기로 한 것이다. MH 공법, 즉 맨 땅에 헤딩하듯우리 부부까지 합해서 단 6명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망하지 않고 버티게 해주신 주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지. 앞으로 아 자리를 빌어 작은 교회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번 글에서는 개척초기부터 오늘까지 함께 한 고2 여성도가 지난 10주년 기념주일에 나눈 소감 편지글로 대신하려 한다. 작은 교회의 아름다움에 대한 발칙한 상상력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사귐의 교회 10주년을 맞아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8살 꼬마였던 제가 이 교회에서 10년을 보내 어느덧 고2, 18살이 된 것이 제가 다 신기하네요. 사실 어렸을 적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회를 옮기게 되었지만. 지금은 어머니, 아버지께 ‘그때 선택 잘 하셨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초등학교 1학년이던 저는 이쁨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다른 큰 교회에선 제가 누군지, 제 이름이 뭔지 다들 몰랐지만 우리교회에서 만큼은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자랐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저는 교회 모임이 항상 기다려졌고 설레었습니다. (중간 생략) 마치 저를 한 완성된 인격체로 대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린아이라고 무시하기 일쑤인 우리 세상에서 내 존재가 인정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유년시절은 행복하고 사랑받던 기억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머리가 커지면서 저는 교회에서 자존감을 키웠습니다. 교회 행사가 있을 때면 피아노 발표, 노래 부르기 심지어는 5분기도회 인도까지 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다 사귐의 교회 어린 ‘권사’라는 호칭도 하사받았습니다. 저는 기뻤습니다. ‘나는 이렇게 인정받는 존재이구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나보다’하며 어른들과 함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시련은 있습니다. 저에게 제일 큰 시련은 한동안 또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른들을 어려워하지 않는 저였지만 또래가 없다는 것은 좀 힘든 일이더군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먼저 말거는 청소년을 어른들이 귀찮아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3배로 부흥하여 청소년부가 세 명이나 되니 참 감사한 일이죠. 누가 저에게 ‘교회 어디 다니냐’고 묻는다면 저는 우리 교회 자랑을 한참 늘어놓을 것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참 서로 친하다고. 소외된 이가 많은 세상에서 페리코레시스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10년의 세월이 저에게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사귐의 교회에서 자랐고, 성장했습니다. 10주년은 교회에게도 저에게도 의미 있는 날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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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7
  • [안동철 목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가 그립다
    현재 서구 교회의 모습이 ‘후기 기독교 시대’(Post Christianity Times)와 같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이런 용어를 사용한 사람은 우리 시대의 사상과 문화 등을 관통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서구의 문명은 기독교를 배제하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말하고, 성경과 신앙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하나님을 하나의 장식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고는 있으나 전혀 복음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과 같이 말이다. 그 결과 더 이상 교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거룩함이 가득해야 할 교계와 교회의 중직자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2018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회 발표회에서 손봉호 교수는 김진홍 목사의 지적을 언급하며 그의 말이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진홍 목사는 “한국교회 목회자의 약 10%는 절도요 강도와 같은 자들이고, 50-60%는 삯꾼들이며, 다만 30-40%만이 선한 목자이다”고 했다. 필자는 이 말을 계속해서 되씹으면서 최근 교계와 교회 지도자의 모습을 보며 나 자신이 혹시 강도와 절도, 삯꾼은 아닌지 돌아보고 있다. 이런 중 출애굽기 1장에 등장하는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보면서 큰 도전과 함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와 성도가 살길을 찾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접근법이어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멀리 있지 않고 쉬운 곳에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누군가? 학자들에 의하면 이들은 애굽의 바로 왕에 의해 고용된 이방인으로 히브리 여인의 출산을 도운 사람으로 본다. 처음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을 억제할 목적으로 고용된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친지는 확실치 않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집트의 왕인 바로가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출 1:16)는 명령을 거부했다. “지금으로부터 3500여 년 전, 왕의 명령을 거부한다?” 사실 그것은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 왕을 두려워하기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다(출 1:17, 21). 이런 그들의 용감한 선택은 결국 출애굽의 영웅인 모세를 이 땅에 태어날 수 있게 했으며, 또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계략을 박살나게 했다. 이 일에 십브라와 부아가 아름답게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은 3,50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이런 사람을 찾고 있다고 믿는다. 종교인이 아닌 뼛속 깊은 곳까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목숨 거는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필요하다. 만약 교회가 이런 다음세대를 길러낼 수만 있다면 한국 교회는 소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필자는 35도를 웃도는 폭염이 계속되는 이 때 시원한 얼음냉수와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 한 사람이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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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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