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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철 목사]오징어 게임에 비친 기독교
    우리나라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오징어 게임’의 열풍이 식기는커녕 더욱 거세지고 있다. 넷플릭스가 공급되는 전 세계 83개국 모두에서 1등을 했다. 이는 넷플릭스 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듣고 참 기뻤다. BTS와 블랙핑크, 그리고 기생충에 이어 한류의 바람을 전 세계에 알린 쾌거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코흘리개 동무와 함께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딱지치기’, ‘달고나’, ‘구슬치기’, ‘오징어 달구지’와 같은 게임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 전 세계 사람들이 환호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궁금함 반, 기대감 반으로 오징어 게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리즈를 보는 동안 왜 이 시리즈에 세계적인 열풍이 일어난 것인지 알게 되었다. 1편을 보기 시작하면 마지막 9편까지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드라마임이 분명했다. 물론 공중파 방송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선정적인 장면과 끊임없이 나오는 욕설이 너무 불편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가 더욱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드라마의 처음인 1편부터 마지막 9편까지 쉴 새 없이 나오는 반기독교적 장면 때문이었다. 비웃음거리가 된 십자가와 전도, 기도와 용서에 대한 왜곡된 시선, 희생하는 사람과 대비된 사기꾼화 된 기독교인의 모습이 끊임없이 나왔다. 시리즈 9편을 다 본 후 망연자실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징어 게임을 보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질까?” “혹시 드라마 속 기독교의 모습을 한국 기독교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불편함과 당혹감은 한국 교회의 기둥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가라는 공포심으로 변했다. 얼마 전 CGNTV에서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이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다. 제목이 충격적이었다. ‘안녕하세요, 하나님’이 아닌 ‘안녕히 계세요, 하나님’이라니! 아무튼 이 다큐멘터리는 교회를 다녔지만 이제는 교회를 떠나고, 더 이상 교회로 오지 않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교회와 기독교는 더 이상 찾아오기 싫은, 매력을 잃은 공동체였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의 비밀을 우리 성도, 특히 다음세대 자녀들에게 잘 전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이 조롱하는 십자가가 세상의 모든 것을 파하는 능력이 됨을 멋지게 전해야 한다. 우리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반기독교적인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런 후 세상에 비친 기독교의 모습이 어떤 지 반성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에 세상이 환호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 부정적이라는 것이 아닐까?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희생과 낮아지심, 약자의 친구가 되는 길이 아닌 화려함과 세상적 성공, 힘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모습으로 교회를 혐오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미지 대변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연합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 힘으로는 안 된다. 한 교회만으로는 이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모두가 함께 함으로만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람과 돈으로 세력화하여 힘을 자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조롱하지만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하나가 되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위기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말이다. 현재 문제의 위기감을 인식하고, 이것을 문제로 볼 수만 있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더 늦어지기 전 함께 기도하고, 머리를 맞대고, 손을 잡고 나가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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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11-05
  • [탁지일 교수]매켄지와 데이비스 선교사를 그리며
    1998년 토론토대학교에서 열린 캐나다장로교의 공식적인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했다. 한국 파송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함께 한 은혜로운 예배였다. 예배 말미에 모두 함께 일어나 부른 찬송이 인상적이었다.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이란 찬송이었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캐나다장로교회의 첫 순교 선교사 윌리엄 매켄지(William J. Mckenzie, 1861~1895)가 가장 좋아했던 찬송이었다는 사실을 후일 알게 되었다. 매켄지 선교사는 우리나라 첫 자생적 신앙공동체인 소래교회의 초대목사였으며, 조선에 온지 1년 반 만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매켄지의 순교는, 선교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1898년 캐나다장로교회는 5인의 첫 공식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해, 함경도 원산, 함흥, 성진 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한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조선에만 머물지 않고, 흩어지는 조선인들을 시베리아, 만주, 일본까지 따라가 헌신적인 선교사역을 펼쳤다.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 인근에 묻혔지만, 지금은 무덤의 흔적조차 알 수 없는 윌리엄 매켄지 선교사는 캐나다교회의 조선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었다. 2003년 부산장신대학교 설립 50주년을 준비하던 중, 「소명」이란 제하의 오래된 교지(校誌)에서 호주선교사 서두화(Alan Stuart, 1926생 95세)란 이름을 발견한 것이 호주교회의 부산경남지역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부산장신대학교 교장이었던 서두화 선교사님과의 만남은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후학들을 위한 책도 보내주시고, 학생들을 위한 따뜻한 격려도 아끼지 않으신다. 서 선교사님과 부산장신대의 이야기는 호주교회의 첫 순교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J. Henry Davies, 1856~1890)로부터 시작한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부산지역 선교를 위해 도보로 여행하던 중 얻은 질병으로 인해, 조선에 도착한지 6개월 만에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지만 데이비스의 순교는, 선교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891년 호주교회는 5인의 첫 공식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해, 경상남도 부산, 마산, 진주, 통영, 거창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를 감당해 나아갔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현재 부산 중구 동광동 복병산 중턱에 묻혔고, 6.25전쟁 등으로 인한 변화 속에서 무덤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는 호주교회의 부산경남지역 선교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캐나다와 호주 선교회는 선교정책과 사역 면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중심인 평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동북단 함경도와 동남단 경상남도 지역을 맡아 선교했다. 캐나다선교회는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자행되었던 함경도의 신앙인들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호주선교회는 일제 침략의 관문이 되어버린 불교의 땅 경상남도에서 복음, 의료, 교육 선교에 헌신했다. 미국 장감선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형편의 캐나다와 호주 선교회였지만, 선교사들의 순전함과 헌신은 신실한 신앙인의 표상으로 오늘날까지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한국교회사 관련 강의를 할 때마다, 매켄지와 데이비스의 이야기를 신학생들에게 들려준다. 특히 신학대학원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는, 매켄지와 데이비스 같은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를 부탁한다. 참된 스승보다 반면교사가 더 많다고 느껴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매켄지와 데이비스 선교사가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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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2
  • [송길원 목사]다시 벤허(Ben-Hur)를 보다
    서기 26년 로마 제국, 예루살렘의 명문가 귀족 ‘유다 벤허(찰턴 헤스턴)’는 한 순간에 노예로 전락한다. 어린 시절의 절친 ‘메살라(스티븐 보이드)’의 배신이었다. 무너진 지위와 가족을 되찾기 위한 목숨 건 대결이 시작된다. 중추절, 다시 ‘벤허’를 보았다. 해상 전투에 이은 전차경주의 장엄한 모습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스펙터클하다. 지축을 흔드는 요란한 말밥굽 소리, 거품을 뿜어내는 말의 거친 호흡,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들, 그리고는 끝내 월계관을 머리에 쓰는 역전의 장면들은 말 그대로 서스펜스다. 가슴이 뻥 뚫릴 만큼 시원하다. 나는 영화의 또 다른 장면을 주목했다. # 장면 하나. ‘둥 둥 둥 둥’ 유대 청년 벤허도 북소리에 맞추어 노를 저었다. 한 순간 사령관과 벤허의 눈길이 마주친다. 사령관이 묻는다. “여기에 온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글거리는 벤허의 눈, 답한다. “네 놈의 달력으론 2년 내 달력으론 20년이다” 바로 그 순간, 사령관이 말한다. “저놈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혼을 가진 놈이다. 놓아주라” 가슴 찡한 장면이다. # 장면 둘. 벤허는 갤리선에서 발이 묶인 채 노를 젓는다. 실제 노잡이는 노예가 아닌 자유민을 썼다. 노 젓기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다. 노예에게 강제로 맡길 일이 아니었다. 노가 엉켰다가는 큰 일이었다. 갤리선은 평소엔 바람으로 움직이는 범선이다. 하지만 전투가 닥치면 돛을 접는다. 지중해의 변덕스러운 바람이 싸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노잡이들의 실력은 이때 드러난다. 숙련된 노잡이는 돛을 접을 때와 펼 때를 안다. # 장면 셋. 메살라와 로마에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여전히 괴로워한다. 갈등하는 벤허에게 던지는 에스더의 말을 추적해 보라. “개가 개를 낳고, 피는 피를 낳는다. 죽음은 죽음을 가져온다. 탐욕은 탐욕을 낳는다.” “당신이 마치 메살라가 된 것 같다.” 주인공 벤허는 메살라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 있는 괴물과의 싸움이었다. 타오르는 보복과 증오, 원망이 있다. 영화의 앵글을 바꾸어 보라. 보복과 용서의 처절한 싸움은 더 흥미진진하다. 끝내 벤허는 그리스도가 보여준 용서를 따른다. 고백한다. “(그 분이) 내 손에 칼을 빼앗아 갔다.” 그 분은 로마 황제가 아닌 그리스도였다. 영화는 남북전쟁의 영웅인 루 월리스 장군이 쓴 소설 ‘벤허: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내 속에도 자리 잡고 있는 ‘보복’이란 무서운 괴물이 있다. 나는 종종 복수에 몸을 떤다. 잠에서도 싸운다. 난 그런 내가 무섭다. 엔딩 자막이 흐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추석에 가족들과 만남에서 입은 상처가 있다면 벤허를 시청하며 ‘용서’를 구해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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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송시섭 교수]끌림과 쏠림
    한 지역 작가의 글 속에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고 싶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도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말 하고 싶은 일로 인생을 채우고 싶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말을 듣는 어르신들의 입장에서는 ‘인생을 내 맘대로 살 수 있나’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시겠지만, 자라나는 젊은 세대에겐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라’는 조언은 꼭 필요한 잠언(箴言)이다. 공식적인 직장생활이 10년밖에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된 무렵, 난 조용히 자신에게 다짐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참으로 써보고 싶은 글을 쓰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서인지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이, 그리고 사건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그간 읽었던 자료들이, 사 모아두었던 책들이 하나의 주제로 나를 몰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동안의 경험들이 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를 ‘이끄는’ 느낌, 아니 내가 ‘끌려가는’ 느낌을 갖게 되는 요즘이다. (이 주제를 옆에 있는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무튼 이 나이쯤 되어 아이들에게 아버지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라’는 주문이다. 전도서(Ecclesiastes)에도 큰 전제가 있긴 하지만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지 않은가. 어릴 때 이런 삶을 갖지 못한 젊은이는 늘 누군가의 지도와 인도가 없이는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설정된 방향마저도 제 힘으로 내딛지 못하고, 자신만의 걸음을 걷지 못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마음 가득한 기쁨을 안고, 마음에 원하는 길들을 행했던 이들은 참으로 행복한 자들이리라. 여기서 말하는 ‘기쁨’과 ‘원함’이 ‘방탕’과 ‘탐욕’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주업(主業)으로 하면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주된 관심은 ‘누가 공부를 잘 하는가’이다. 여기서 공부(工夫)란 단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일평생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민하고 이를 정리해보고자 하는 자세를 말한다. 달리 말하자면 인생 전체가 무언가에 ‘끌림’이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만나는 일은 즐겁고 행복하다. 그들과 나눈 대화에선 꼭 무언가는 배운다. 반면 참으로 안타까운 학생들도 있다. 끊임없이 무언가에 ‘쏠려’ 다니는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방법이 좋다고 하는 말에 혹해서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왔던 노력을 하루아침에 내팽개치고 이 사람의 조언, 저 사람의 방법론을 기웃거리며 살아간다. 이른바 ‘늘 대세를 따르는’ ‘쏠림’의 사람을 만나면 이내 대화가 끊어지고, 무미건조한 세상이야기만 잔뜩 하게 된다. 니체가 그랬다던가.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인공지능이 판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꼭 필요한 인재는 누구일까. 끊임없는 호기심을 갖고 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비록 큰돈을 벌지 못해도, 크게 성공한 기업을 일구지 못했다 하더라도 늘 미소와 땀으로 얼굴을 채우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에겐 금메달은 ‘끌려서’ 도달한 끝 지점에 놓여있는 작은 선물에 불과하지, 결코 그들의 삶의 목표이자, 전부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겐 대통령이란 자리도 이웃의 삶을 위한 헌신의 ‘즐거움’의 끝자락에 걸려있는 흰 줄이지,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위세와 세력이 아니다. 자신의 삶 근처를 환히 비추는 사람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과 지역을 어제보다 좀 더 아름답게 만들었던 사람들, 그들이 우리의 금메달리스트요, 우리의 대통령이다. 삼수(三修), 사수(四修)를 해서라도 대통령이 되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정치인들, 돈이 된다면 어떤 형태의 장사도 마다하지 않는 문어발식 기업가들을 만날 때, 난 그런 사람들에게 끌리지 않는다. 점점 더 나만의 끌림이 없고, 점점 더 그들의 쏠림만 있는 세상, 늘 이웃과 동고동락했던 친근한 동장님, 동네의 작은 사랑방이 되었던 빵가게가 사라져 버린 앞으로의 대한민국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끌림이 있을지 의문이다. 정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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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3
  • [강규철 장로]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뜻이다’ 일 것입니다. 교회의 현안 문제를 결정할 때 흔히 ‘기도 합시다’ 하고는 얼마 후 결정을 하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의를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그 결과가 잘못 되어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하였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한 목사님이 결정되었고 당회는 전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당회는 그 목사님을 강제 사임을 시켰습니다. 이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들이 언급했던 ‘하나님께서 보낸 종’을 쫓아 내보내면 두 가지 문제점이 생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큰 실수를 하신 것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문제 있는 목사를 그 교회에 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보낸 종을 마음대로 쫓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법 큰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 광고를 내었습니다. 이를 본 작은 교회 목사님이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빙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래 하였지만 이를 알게 된 그 교회 성도들은 당연히 반대를 하겠지요. 이럴 때 많이 하는 말이 기도를 해보고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하나님께서 그곳으로 가라고 하신다며 본 교회를 떠나 큰 교회로 부임합니다. 위의 두 가지 내용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애서 포장한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뜻이고 이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책임전가를 한 모양새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지킬려고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전심으로 기도하셨는지 피땀을 흘릴 정도로 하셨습니다. 그로인해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치와 고통을 겪으시고 종내에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지도자들은 너무나 쉽게 ‘기도해보겠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세운 것입니다. 교회의 결정, 특히 당회의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될 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마음’ ‘교회의 덕’ ‘성도의 마음’을 신중하게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뜻이 위의 것과 부합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몸소 낮은 곳에서 ‘섬김의 본과 순종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밤새워 기도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가다보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 하게 되겠지요. 오늘의 한국교회는 내외적으로 엄청난 위기의순간이라고 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교회와 성도들을 겸손히 섬기고 헌신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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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3
  • [최병학 목사]위치지정적 세계관
    현대 종교학계의 큰 별인 시카고 대학의 종교학자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 잡기: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서』(이학사, 2009)에서 ‘위치지정적 세계관(locative worldview)’이라는 말을 소개합니다. 곧,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경계를 넘거나, 권위에 도전하거나, 나아가 공동체에서 배제된 ‘이상한 존재’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공동체 내의 질서는 ‘신적인 권위’에 의해 정해진 성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이 질서가 무너져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나아가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무너지기 때문에 모든 것은 정해진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스미스는 자리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적인 의미는, 아주 중요한데 권력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이지만 내적으로는 권력에 의해 구성된 자리의 이미지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어서,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스미스가 잘 분석하였듯이, 성경 에스겔서에 나오는 제사장 에스겔의 환상에서 묘사되는 도시와 사원(예루살렘 성전)은, 그 당시 제사장들이 추구한 권력의 공간 배치를 형상화한 꿈의 사원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바빌로니아 사원 텍스트, 위네바고족(북아메리카 인디언)의 부족 세계관 등은 종전의 연구에서라면(엘리아데의 ‘성스러움’의 관점)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는 종교적이고 이상적인 세계관으로 언급되었겠지만, 스미스는 이들의 세계관이 보여주는 것은 통치자의 권력의 언어로 이루어진 것이지, 민중의 현실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책의 부제와 같이 ‘의례 내의 이론’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곧 ‘의례 내의 자리들 간에는 구조주의적인 관계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례 내에 존재하는 체계성’, ‘언어적인 구조’를 뜻합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리들 간에 맺어진 체계성은 옮겨질 수 있고,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스미스는 종교사에 대한 기발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지의 체계’라는 공간적 구조가 기독교로 옮겨오면서 ‘전례의 교회력’이라는 시간적인 구조로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현실적으로 예루살렘이라는 성스러운 공간에 접근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루살렘 내에 존재하던 체계성을 ‘옮겨 오는’ 의례적 해결책을 모색한 것입니다. 그 결과 유대교는 ‘미슈나(Mishnah)’라는 규범의 체계가, 기독교에서는 ‘교회력’이라는 시간적 체계가 발달했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변화된 시대에 기독교의 교회력은 어떻게 어디로 옮겨져야 할까요? 유대교처럼 규범적 체계로 번역되고 옮겨져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위드-코로나 시대’에 온-오프, All-라인 공간과 규범 체계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치지정적 세계관’에서 ‘위치지정’을 확장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늘/땅, 정상/비정상, 남/녀, 인간/동물, 어른/어린이, 나이든 세대/젊은 세대, 동/서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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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1-07-23
  • [이선복 교수]교회와 세금, 그리고 국가의 상(像)
    2021년 국회예산정책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지난 한해 조세수입은 373조원으로 전년대비 2조원이 증가하여 별 특이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내용을 조금 더 보면 법인세(-17조원)와 부가가치세(-6조원)가 감소하고, 소득세(+10조원)와 지방세(+6조원)가 이를 메꾸어 주는 바람직하지 못한 구조로 진행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기업의 이익이나 재화거래 등 생산성과 연관된 조세수입은 줄고, 국민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조세만 더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세금(tax)이란 국가나 지방공공단체가 필요한 재원 등을 충당하기 위해 국민의 재산과 소득, 소비로부터 특별한 보상 없이 조세를 강제적으로 징수하는 절차를 말한다. 필자는 1개월 전 현행 세법의 구조를 살펴보고, 교회 세금과의 관계를 정리해 학회에 발표한 적이 있다. 세법의 내용이 복잡하고 방대하여, 교회 목회자나 실무자가 충분히 숙지하기가 어렵다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금은 국세와 지방세로 분류된다. 교회의 경우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아니므로, 고유목적에 따라 활동을 하는 경우 헌금 등에 따른 소득세와 법인세가 면제된다. 그러나 반대로 수익을 창출하는 행위를 하거나, 소유하는 토지, 건물을 3년 이상 고유목적에 사용하지 않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매각하는 경우 취득세와 등록세를 소급해 납부해야 함은 물론 양도소득세까지 물어야 한다. 갑자기 세금 폭탄을 맞고, 교회가 법원에서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가 지역의 이웃들과 소통을 나누기 위해 시작한 카페나 스포츠 시설 또는 학사관 등이 선한 취지와 다르게 조세 문제에서 논쟁이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또 현행 세법은 사택에 대하여 담임목사 사택 1건만 면세를 허용하고, 부목사 사택 또는 관리인이 교회내 시설에 거주할 경우에도 고유목적 활동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해 조세를 부과하고 있다. 영어선교원, 공원묘지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부가가치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재화 구입시에 지불한 매입세액에서 매출세액을 차감해 납세액을 산출하나, 교회의 경우 매출세액이 대부분 없고 매입세액을 납부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교회 차량의 경우 취득세, 등록세, 부가가치세, 재산세 모두 납부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누가복음 20장에 예수님은 세금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셨다. 서기관들의 질문 의도를 넘어 세상 질서에 대해서도 존중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교회 지도자와 실무담당자는 세금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하고, 성실히 납세의무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국가는 국가대로 배려의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이 20.0%를 넘어 OECD 평균에 가까이 가려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따른 전국민재난 지원금을 포함, 기본소득이 정책으로 정해질 경우 놀라운 수치로 조세부담률이 상승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정책은 항상 시장의 상황을 분석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구약 아모스서는 나라가 부패한 가운데 얼마나 백성을 과도하게 착취하였는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약의 삭개오 또한 부패한 세리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국가는 국민의 상황을 배려하고 살필 수 있어야 한다. 또 교회의 경우에도 일정 부분 조세혜택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지나친 규제를 통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선한 사역들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7-09
  • [이성구 목사]한국교회, 이제 다시 거대담론을 이끌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도 바꾸지 못하는 함정이 되어버린 이념 코로나19 사태가 일 년을 훨씬 넘어서면서 한국사회와 교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상황을 극복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집권세력은 어떻게 하든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상황이라 자화자찬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라도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정부의 정책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사상과 이념의 문제로 귀결되면서 압도적인 지지를 자랑하던 정부와 집권당이 쩔쩔매고 있다. 우왕좌왕하면서도 정작 청와대는 자기 이념에 매몰된 모습이다. 코로나에 눌려버린 교회 이런 정치현장의 혼돈과 함께 코로나 감염 사태에 교회에서의 모임이 자주 관련되면서 한국교회 전체가 엄청난 압력을 받아왔고, 1년 이상 예배가 정상화되지 않으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교회학교의 문이 닫히면서 불신가정의 아이들은 씨가 말라버렸고, 교회도 새신자를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이 향후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예배의 위기는 신앙의 위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고, 결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를 흔드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출산율감소, 세속화의 가속 등으로 코로나 이전에 이미 시작된 주일학교의 위기는 코로나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위험요소가 될 전망이다. 다시 거대담론으로 강력한 도전을 시작해야 한다 이쯤에서 코로나로 흐트러진 한국 사회 속에서 오늘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코로나가 닥치기 전부터 문 대통령이 선포한 대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살게 되면서 세상이 제기하는 논제에 그냥 함몰되어 허우적거린 느낌이다. 둑이 터져버린 한국 사회와 교회의 혼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깊이 있게 분석하여 제대로 그 원인을 들추어내고 처방을 제시하는 소망의 소리가 되지 못하였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지향해 가야 할 방향을 거대담론으로 풀어내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다. 136년 전 복음이 처음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어둠의 땅을 진정한 소망과 빛의 세계로 탈바꿈하는 구원과 해방의 대역사를 이끌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교회가 3월 만세운동을 주도하면서 복음이 민족의 진정한 해방과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역사 앞에 몸으로 증명하였다. 건국에 이은 6.25 전쟁과 그 극복과정에서, 이승만 박사와 같은 발군의 실력을 가진 지도자들을 배출한 한국교회가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이라는 민족적 담론을 구체화는 데 앞장서 왔다. 이제 다시 한국교회는 심하게 멍들어있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줄 거대담론을 생산해 내야 한다. 여기서 1908년 개인적인 영적 각성을 계기로 사회변화를 추구한 스위스 출신 미국의 루터교회 목사인 프랭크 부크만(Frank Buchman)을 생각해 보자. 그의 영적 지도력은 1921년 ‘Oxford Group'이라는 변혁 운동 그룹을 탄생시켰고, 1930년대 중반에는 ’Moral Re-Armament(MRA) 도덕재무장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 후 군사재무장을 서두르는 서구세계를 향하여 ’도덕적 영적 재무장‘을 우선해야 한다는 운동을 세차게 펼쳐 많은 영향을 끼쳤고, 1960~70년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평화운동을 강력하게 펼치기도 하였다. 지금은 그 영향력이 미미해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곳곳에서 ’Initiatives of Change(IofC) 변화 주도‘라는 이름으로 움직이고 있다. “hate-free, fear-free, greed-free world'” 미움, 두려움, 탐욕에서 자유로운 세상과 같은 거대담론으로 한 시대 변화를 추구한 MRA 운동이 명칭을 바꾸어 가며 사회변혁을 위한 거대담론을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미움 다툼 두려움 탐욕으로 가득 찬 오늘의 한국사회를 바꾸어내야 한다. 전체주의, 무조건 평등주의, 개인에게 주어진 은사의 개발이 아니라 청년시절부터 퍼주기 복지에 익숙하게 만드는 세상은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나라 모습이 아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세계. 서로를 한없이 신뢰하고, 갈등과 탐욕의 세상을 훌쩍 뛰어넘는 소망의 나라를 이루며,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에덴동산. 그런 나라를 향한 꿈을 보여주고 실천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 그런 교회를 세우는 거대 담론으로 강력한 도전을 감행하기를 소원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6-25
  • [안동철 목사]성도의 품격
    2012년 한 방송사를 통해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래서일까? 드라마가 방송된 이후 많은 패러디가 나왔다. 아빠의 품격, 엄마의 품격, 숙녀의 품격, 시험의 품격, 교사의 품격, 학생의 품격 등. ‘품격’은 어디에 붙여도 좋은 말을 만들 수 있다. 그럼 이런 말은 어떤가? ‘성도의 품격’. 성도는 당연히 품격을 갖추어야 하기에 아주 멋진 말이다. 이때 성도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품격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말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2-24). 최근 한 교계 지도자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지역 교회 지도자 그룹 단체 대화방에서 코로나 19 백신을 맞아서는 안 된다는 글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백신의 안전성 문제 때문에 이런 글을 올렸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백신을 거부하는 이유를 백신 속에 사람을 제어하는 성분이 들어있고, 그래서 이것을 맞게 되면 백신을 주입한 집단에 의해 통제된다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글에 많은 분이 맞장구를 치며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단체 단톡방에서 주고받는 대화의 문제의 심각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금만 확인해 보면 거짓인 정보를 사람들이 퍼 나른다. 언젠가는 중동 지역에서 이슬람 과격분자가 기독교인들을 처형한다고 급히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문자가 날라왔다. 너무 안타까운 소식에 많은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기도를 요청했는데 뒤에 확인해 보니 몇 년 전 내용이었고, 그것도 각색하여 보낸 거짓 글이었다. 기도와 거짓이 콜라보 되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별히 성도들의 단체 대화방에 자신의 정치적인 주장을 올리는 것은 성도의 품격을 무너뜨리는 행동이다. 자신은 그것이 옳다는 신념으로 올리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반대편에 선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이다. 어차피 우리 사회는 51:49의 생각으로 나눠진 사회이지 않은가? 한쪽 편에 선 정치적인 생각을 주장하게 되면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불쾌하게 되고, 결국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성도가 불화할 때 누가 가장 좋아할 것인가? 우리의 원수 마귀이지 않은가? 성도의 품격을 상실한 또 다른 현장들도 있다. 어떤 교계 모임에 초대되어 간 적이 있다. 그날 설교한 분은 성경 한 구절 읽고는 본문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극단적 한쪽 편 입장의 정치 이야기를 거짓된 정보를 섞어가며 설교 시간 내내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향해서는 막말과 욕설을 섞어가면서 말이다. 몇 분이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그 자리를 이탈했다. 도저히 성도의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성도다운 품격을 지켜야 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신 성도의 입에서 거짓이라니! 마귀의 별명이 거짓의 아비이지 않은가? (요 8:44) 이솝 우화에서 늑대가 나타났다고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다가 실제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 당하게 되는 결과를 알지 않는가? 특별히 교회 지도자의 입을 통해 나온 거짓된 말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만다. 교회의 지도력을 상실하게 만들고, 결국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만다. 성도와 교회는 죽음의 말을 거부하고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 성도의 품격은 진리와 생명으로 나타나야 한다. 죽음의 말을 거부하고 진리에 기반한 생명을 노래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한 말을 유념하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 오피니언
    • 정론
    2021-06-11
  • [김영일 목사]적어도 거짓은 ‘정도(正道)’ 는 아니다!
    ‘우리 사회에 과연 정도(正道)란 것이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 필자는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정도는 있다. 그런데 그 정도를 가는 사람과 상황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임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회가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렇게 보인다. 신앙의 길에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미 그 정도는 찾아보기 쉽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오히려 절대로 가지 말아야 할 길로서의 ‘금도(禁道)’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것이, 지혜인 양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답답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정하신 원리가 있다. 그런 원리들은 신앙과 불신앙에 상관없이 인간세상의 근본원리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 가령 창조의 질서는 인간이 그것을 순리로 받아들여 끝까지 지킬 때, 그것이 인간 스스로에게 가장 바른 길이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어길 때 인간의 세상에 스스로 재앙을 초래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 원리, 인간이 반드시 걸어야 할 그 길, 그 정도(正道)를 걸어가야 참 복을 누릴 수 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들어 소위 지도자들이라는 입법부에 속한 자들 중에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거스르는 악법들을 제정하려는 시도들을, 여러 차례 거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힘있는 자들에 의해 제정될 가능성을 많이 갖고 있다. 사회학적으로, 의학적으로도 분명한 문제를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소수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이를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역시 정도를 거스르는 주장이다. ‘정도’ 의 피해자들이라면, 그 피해를 인정해주면서 그들이 그 정도를 걷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은 방편인데, 정도가 아닌 자들의 인권을 주장하면 금도를 정도로 받아들이는 주장은 틀린 주장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속해 있는 그 어떤 영역에서든지 바람직한 방향으로서의 정도는 있다. 교회정치에도 정도는 있다. 그 정도와 온전히 일치하는 삶을 살기는 쉬지 않겠지만, 그 정도를 가려고 노력하는 시도는 우리들에게 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종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정도라고 하더라도 그 길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늘 하고 있다. 필자는 그 여러 가지 중에 딱 한 가지만을 지적한다면, ‘거짓말’, ‘음해’ 로 타인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성경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면 그것은 아주 분명해야 한다. 특히 그 직위가 목사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기득권에 침해를 받게 되면, 그 새로운 고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와중에 기득권의 피해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자들은, 사자처럼 자신의 발톱은 숨기고, 제 삼자를 동원하여 거짓말과 이상한 음해성 발언을 퍼뜨리므로, 한 사람, 또는 한 단체를 완전히 훼파하려는 그런 일들을 신앙인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조금만 내려놓는다면, 그 새로움의 시기가 지금이어야 하고, 그 새로움의 시기가 나로부터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기회는 상관없이 자신만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갖게 되고, 그 기득권 사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도(正道)’ 는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반드시 살아내어야 할 당위성을 지니는 것이다. 적어도 없는 말을 만들어, 잘 짜여진 소설 한 편으로, 사람을 감동시켜 매도하는 그런 악한 일들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없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아주 한 부분의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자는 목사로서 이런저런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교계관련의 여러 가지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 일의 가치유무를 떠나서, 아주 잘 지어진 그럴듯한 스토리들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비정상적인 일들을 보면서, 적어도 이 일은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도와 금도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이익의 개입이 아주 큰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당하고, 또 기득권을 내려놓을 마음을 당당하게 가질 때 교회의 정도, 하나님 나라의 정도는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나타나리라 믿는다. 이런 사회, 이런 교회가 우리 가운데 가득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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