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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교수] 그래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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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부산이 고향인 어머니를 둔 한 소녀는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힘겨운 현지 적응과정을 거쳐 뉴욕 브롱스 과학고를 나와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조지타운 로스쿨을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병으로 변호사 일을 그만 둔 뒤 그녀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작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017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뿐 아니라, 2019년 오바마 전 미국대통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 작가의 최신작을 추천하면서 유명해진 그녀의 이름은 이민진(Lee, Min Jin), 그녀의 최근 작품의 제목은 ‘파친코’(PACHINKO)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4대를 걸쳐 살아온 한국인들(在日朝鮮人, ざいにち)의 이야기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20세기 초 부산 영도의 한 끝자락에서 지독한 가난 속에 살던 '양진'과 세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얻은 그녀의 딸 ‘선자’, 선자가 젊은 목사인 남편 ‘백이삭’과 결혼하여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낳은 아들 ‘노아’와 ‘모자수’(모세), 모자수가 낳은 아들 ‘솔로몬’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눈물, 고통과 환희를 그려낸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난 해 이 작품이 국내 유명배우를 캐스팅하여 애플TV에서 8부작 드라마로 제작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 새해 벽두부터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20세기 초반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 ‘이카이노’에서 벌이는 재일 조선인들의 힘겨운 삶이,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의 위협 속에서 힘겹게 살아나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책장을 넘기면서도 답답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예배가 중단되고, 모임이 폐해지는 지금 현 상황 속에서 그 시대 소설속 등장인물들이 지녔던 신앙의 자세와 믿음의 삶이 다가왔다. 그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앙인들은 신사참배에 죽음으로 맞서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성경의 가치를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의심하기도 한다. 작품 속 백이삭 목사의 입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릴 당혹케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우리는 그 분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죠, 때로는 그 분이 행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하고요. 그래서 좌절하기도 하죠.” 소설 곳곳에서 등장하는 성경구절에 대한 작가의 묵상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풍겨내는 세속적인 텁텁함 속에서 퍼지는 신선한 향기와 같았다. 이렇듯 교회는 그리고 신앙인들은 각 시대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믿음, 그리고 용기를 갖고 넘기 어려운 산, 건너기 힘든 강을 인도한 동반자였다.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도전 앞에서도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결코 질수 없는 그리하여 반드시 이길 시련을 극복하고 있다.
작가는 신문이나 방송 인터뷰, 그리고 강연을 통해, 두 가지를 늘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장로교 목사의 손녀라는 점, 그리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그녀의 당당한 모습 속에서 그리고 그녀의 글과 대화 속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의 자세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가 MIT에서 행한 강연 중에서 청중을 향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성구(聖句)를 이야기 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창 50:20) 아마도 그녀는 ‘인간은 역사 속에서 악(evil)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 속에서 선(good)을 보신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녀는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낙관주의이고, 크리스천은 본질적으로 지독한 낙천주의자들이라고 선언한다.
아직도 코로나의 긴 터널은 쉽게 그 끝을 보여주기 않고 있다. 책을 덮으며 소설의 첫 장을 다시 펼쳐보았다. 소설의 유명한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필자에겐 이 말이 이렇게 읽혔다. “코로나는 우리를 망쳐났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린 이겨낼 것이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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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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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학 목사] 브라질 민주주의 위기에서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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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브라질의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특징은 검찰과 사법부의 법 기술자들이 법적 수단과 장치를 동원하여, 보이지도 않고 의식할 수 없는 가운데 야금야금 민주적 제도와 규범을 침식하여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사법쿠데타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브라질의 사법쿠데타를 주도한 법 기술자는 세르지우 모루라는 브라질의 엘리트 연방판사였습니다. 브라질의 경우 우리 검찰이 가진 권한을 판사가 갖고 있죠? 아무튼 모루는 ‘라바 자투’ 곧 ‘세차작전(Operation Car Wash)’이라는 작전명으로 사법 쿠데타를 달성합니다. 과정을 볼까요?
모루 판사는 이탈리아의 정치부패를 소탕한 ‘깨끗한 손(Mani Pulite)’을 참고하여 2014년 세차작전의 수석 판사가 되어 브라질 정치인들과 고위공직자들을 수사합니다. 돈세탁, 반부패 스캔들, 뇌물과 공금유용 등을 지휘하여 선출직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를 구속시키고 사법처리하였습니다. 국민들의 인기도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故 노무현 대통령 때 경험했지만, 모루는 예비구금제도를 이용하여 구속을 유도하고, 대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용의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언론플레이를 통해 정치인들과 고위공직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고려대 정외과 명예교수인 임혁백 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루는 세차작전을 통해 브라질 집권당인 노동당(PT)과 정부 인사들을 구속시켰고, 모루와 야당은 2016년 5월13일 룰라 대통령의 후임인 여성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를 ‘예산작성 규칙 위반’이라는 정책적 실수 혐의로 탄핵시켜, 노동당 정권을 붕괴시켰다. 모루는 사법쿠데타를 멈추지 않고, 차기 민선정부로 표적을 옮겼다. 사법쿠데타 세력인 호드리구 자노트 검찰총장은 호세프를 계승한 미셰우 테메르 대통령을 2017년 6월26일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하였으나, 테메르는 하원의장인 호드리구 마이아의 도움으로 탄핵 소추는 면할 뿐, 식물 대통령으로 남은 임기를 마치고 차기 대통령에 출마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모루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세계적 민주화 지도자이자 브라질을 경제 위기에서 구하고 발전시킨 룰라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루는 당시 지지율 80%의 룰라에 대한 사법 공격에 들어갔고, 2017년 돈세탁과 간접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시킴으로써, 룰라의 2018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루의 사법쿠데타로 2018년 과거 군부독재 시절 대령 출신인 우익 포퓰리스트 보우소나루(아마존 산불 방치로 유명하죠?)가 룰라가 지명한 후임자 페르난두 아다드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또한 모루는 사법쿠데타의 공으로 2018년 법무장관에 임명되었습니다.
지금 모루는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요? 자기가 대통령에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2020년 보우소나루가 연방경찰청장을 해임한 데 대해 항의하면서 법무장관직을 사임한 뒤,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부패한 우익 포퓰리스트라고 공격하면서, 2022년 보우소나루에 대항해서 대통령 선거에 나설지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혁백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브라질의 신흥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 권력과 법률지식을 동원한 검찰과 언론에 소리 없이 스텔스적인 방식(레이더에 의한 탐지를 어렵게 하는 기술)으로 전복되고 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보이는 거악’이 아니라, 법에 기초한 ‘평범한 악’의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노태우의 ‘거악(巨惡)은 물론이고, ‘이명박근혜’의 ‘쪼잔 한 악’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대신 사법 권력과 법률 지식을 동원한 검찰과 사법부, 그리고 언론의 교활한 악에 맞서야 합니다. 그들은 법과 상식을 표방하기에 더 무섭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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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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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복 교수] 크리스천 CEO 유형과 일본 복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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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년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가 처음으로 일본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메이지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며 1872년 요코하마에 개신교 최초 일본기독성공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개신교 복음화율은 0.4%로 매우 낮다. 일본 특유의 종교인 신도와 천황제, 기타 집단성향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독교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해 코로나19 정국가운데도 4편의 논문 중 일본 관련으로 2편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90년부터 2017년까지 OECD가 제공한 28년간의 한일 거시경제 통계자료를 분석, 선교에 미치는 함의를 살펴보았다. 1990년 일본의 8.9%이었던 GDP가 2017년말 현재 31.4%로 변화하였다. 또 25.68%이던 1인당국민소득은 77.40%로 상승되고,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일본 1.16%, 한국 5.19%로 양국의 격차가 감소하였음을 제시하며, 선교 협력에 필요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두 번째는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일본의 크리스천 경영자 연구’로 10명의 CEO를 조사하였다.
즉 일본 크리스천 CEO 10명을 선정하여 유형별로 (1)신앙과 경영이 일치된 모델, (2)신앙과 경영이 분리된 모델, (3)경영을 선교의 도구로 보는 모델 3개로 나누어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파이오니아사의 마츠모토(松本望)는 사명을 복음전기제작소로 할 정도로 철저히 성경적 관점의 경영을 한 점에서 경영과 신앙이 하나된 (1)유형의 CEO로 분류하였다. 모리나가제과의 모리나가(森永太一郎)와 야마자키제빵의 이이지마(飯島延浩)는 (3)유형의 CEO로 분류하였다. 그들은 리어카에 제빵을 팔러 다니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란 간판을 만들어 복음을 전할 정도로 전도에 열정적이었다. (2)유형은 소니사의 이부카(井深大), 야마토운수의 오구라(小倉昌男), 시세이도의 이케다(池田守男), 모리빌딩의 모리(森泰吉郎), 라이온의 고바야시(小林富次郎), 일본정책투자은행의 하시모토(橋本徹), 무라사키 스포츠의 가나야마(金山良雄)를 들 수 있다.
복음환경이 척박한 일본 땅에도 이처럼 신실한 CEO들이 있었던가? 논문을 쓰며 많은 도전을 받았다. 기업이란 무엇인가? 단순한 이윤추구 조직을 넘어, 선교의 장(BAM: Mission as Business)이란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 2021년 새해가 출발을 하였다. 오늘 우리는 각자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한번 더 자신에 물어볼 수 있음 좋겠다. 일본과 비교해 기독교 선진국이다, 자화자찬하며 우쭐해 하고 있지는 않은지? 무늬만 크리스천, 철저하게 신앙과 경영이 분리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한해는 특별히 코로나19로 교회와 예배에 대해 논쟁이 많았으며, 기업들 또한 고생이 많았다. 영업이익이 급감하고, 특히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컸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모두가 희망찬 새해와 비전을 바라보며 달려갈 수 있음 좋겠다. 복음화율 0.4%의 환경가운데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기술개발을 하고 자신의 일터를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세운 크리스천 CEO들이 있다. 국경을 넘어, 귀한 CEO들임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마음으로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2021년 새해 모두가 기업도, 가정도, 교회도, 또 국가도 독수리 날개 쳐 오름과 같이 비상(飛翔)하고 도약(跳躍)하는 한 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하며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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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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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일 목사] 주님 오신 성탄에 철회되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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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전염병의 재확산으로 인하여 주님오신 성탄이 우울해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해마다 이 맘 때면 거리마다 캐롤이 넘쳐 흘러나고, 가판대의 음향에도 독특한 음성과 멜로디의 음악들이 빙그레 미소를 짓게 하곤 했었다.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라는 생각을, 알면서도 한 번쯤은 하면서 거리를 지나치곤 한다.
아무리 상황이 우리를 허탈한 웃음을 짓게 해도, 여전히 성탄절은 우리 앞에 다가오고, 또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기쁨의 소식, 평화의 소식으로 이 세상에 임재하여 계심을 우리는 믿는다. 이번 성탄에도 주님의 은혜로운 소식이 모든 사람, 특별히 힘들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풍성한 힘을 주시리라 믿는다.
가끔 ‘성탄뒤집기’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필자는 종종 해 본다. 금년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금은 머쓱해진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생각에 필자의 이 개구짖은 논리를 동원하여, 이 일만은 꼭 이 성탄에 철회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소식을 천사로부터 전해 듣고, 깜짝 놀란 마리아는 깊은 산속에 살고 있었던 엘리사벳을 방문하게 된다. 그때 갓 잉태된 예수님에 대해, 어떤 표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소위 ‘내로라’ 는 인간은 그 누구도 예수님의 잉태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갓 잉태되신 예수님의 잉태사실을 알았던 것은, 엘리사벳의 태중에 육 개월 정도 된 아이, 세례요한이었다.
그는 당시 칠흑같은 영적 암흑기 시대, 온 세상을 밝히기 위해 아기 예수님으로 오실 메시야, 그 메시야를 가장 먼저 알아본 자는, 요즈음 ‘낙태법제정’ 의 중심에 있었던 바로 아기들이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칼 하지 않은가? 얼마나 감격적으로 반응을 하였던지, 산모였던 엘리사벳까지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감동이었지 않은가!
예수님의 잉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난 잉태소식, 그 소식에 대해 처녀로서 놀라서 멘토와 같았던 엘리세벳에게 찾아간 사실은, 아주 여유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요즈음 낙태법제정의 논의의 중심에 있는, 낙태허용기간을 ‘임신 14주 내외’ 로 할 것에 의하면,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잉태 즉시 생명체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또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었던 육 개월 정도내외로 추정되는 세례요한의 상황 역시, 모든 인지기능이 완전했던 것으로, 인간이 자기의 의도대로 처리해도 되는 그런 존재는 분명 아니다. 즉 그런 아이를 해치는 낙태죄는 결국 살인이며, 성탄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일에 정면적인 도전이 되는 것이 되고 마는 행위이다.
필자는 여기서 조금 더 특별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예수님 당시 이런 법이 제정되었고, 실시되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인류의 참담한 불행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까? 이 성탄을 즈음한 지금의 분위기에 이런 법안제정에 대한 논의들은 더욱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지극히 인간적인 면에서만 이 일을 평가한다고 가정하고 또 다른 논의를 해 보자. 예수님 당시 낙태죄가 폐지되었다면, 가장 먼저 그 낙태죄 폐지의 피해자가 예수님이 되지는 않았을까를 생각해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분명히 동정녀이다. 그는 처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던 것과 요셉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낙태죄가 폐지된다면 예수님은 태중에서 제거되어야 할 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이 편할 수 있지 않았을 것인가?
필자의 생각이나 논조에 모두 동의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주님오신 성탄을 앞 둔 지금 시점에서 낙태죄의 폐지법안 제정의 논의는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다. 수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고, 우리와 똑같은 생각, 말,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 어떤 항의조차도 박탈된 태아들의 죽음은 주님의 평화가 분명 아닐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된 순간, 예수님은 독립적인 존재였고, 메시야였었다. 그 사실을 태중에 잉태된 육 개월의 어린 아기 세례요한은 알았고, 기뻐하였고, 어머니까지 움직여서라도 찬양하게 하는 독립적인 존재였다. 주님 오신 성탄에 이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모든 이에게 주님의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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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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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규 목사] 잘 주고, 잘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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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되면 교회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선교후원, 미자립 개척,농어촌교회, 기관 후원을 재설정하는 것이다. 도시 중대형 교회는 매년 연말이 되면 많은 후원요청서가 답지한다. 미자립 농촌교회인 우리 교회에까지 선교후원요청서가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후원받는 농촌미자립교회의 목회자들은 후원하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라고 쓰고, 잘 보이기 위해?라 읽는다.) 선물을 준비하느라 바쁜 계절이다.
코로나19(COVID-19)로 많은 교회들이 정상적인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그 결과 헌금이 줄어 재정적 압박을 받고 있다고 한다. 올해에는 후원하는 교회들이 후원 결정을 하기가 더욱 어려운 해가 될 것 같다. 주는 교회나 받는 선교사, 교회, 기관이 함께 어려운 상황인 이런 때에 어떻게 잘 주고 잘 받을 것인가?를 생각해 봄이 좋을 듯하다.
어떻게 줄까? 첫째, 줄 대상을 잘 살피고 선정하자. 눈물의 편지를 보고 감동을 받아 결정하거나, 인간관계에 얽혀 대상을 정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연말이 되면 눈물의 편지를 잘 쓰는 사모를 동원하여 전국의 교회에 후원 요청 편지를 뿌리고, 그래서 도시목회자 못지않게 사례를 받는다고 자랑하는 철이 없는 전도사를 본 일도 있다. 둘째, 한 번 정하면, 지속적으로 주자. 처음 선정을 잘하고, 정하였으면 어렵더라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계속하여 후원하기가 어려울 때는 정중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 예의이다. 후원을 시작할 때 몇 년의 기간을 정하고, 기간이 끝날 때 점검을 하고 계속 후원을 하거나, 후원을 중단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셋째, 받는 자의 필요를 헤아리며 주자. 받는 자의 필요를 헤아리지 않고, 주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경우가 있다. 선교지에 맞지 않는 한국식 예배당(?)을 지어주고, 사진 찍고, 홍보했는데 몇 년 지나서 동네 창고로 전락한 경우들처럼... 몇 명의 선교사를 후원하고, 몇 개의 교회와 기관을 후원한다고 하며... 충분한 소통을 통해 제한된 자원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움으로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어떻게 받을까? 첫째, 감사함으로 받자.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받다가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나중에는 더 많은 주는 데도 있는데...라고 하며 무시하기도, 불평하기도 한다. 옳지 않다. 적절한 감사를 표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주는 자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찾아 힘쓰자. 받는데 만 몰두 해서는 안된다. 주려고 하면 줄 수 있는 것이 보인다. 주는 자의 형편을 살피며 기도로 시작할 수 있다. 셋째, 주는 자가 되도록 힘쓰며 받자.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장 빠른시간 안에 받는 자에서 주는 자가 되도록 힘쓰자. 구조적으로 지속적인 후원이 필요한 곳이 있다. 교단 차원의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곳이 있다.
필자는 1996년 대전에서 선교지에서 교회를 시작하듯이 한다며 아내 혼자 앉혀 놓고 “주는교회 Giving church”를 개척하여 12년 6개월을 담임하였었다. 그때 주는 것에 대해 나름 많은 연구와 경험을 하였었다. 개척하는 달부터 선교후원을 시작했었다. 받으면서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 주는 것은 어려운 사역이다. 주고 나서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망하는 경우가 있다. 주고 나서 주는 자는 흥하고, 받는 자는 망하는 경우도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주고 나서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흥하는 경우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는 마지막 경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하신 주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원한다.
조선 선교를 위해 거액의 후원금이 든 봉투를 건네주며 “주는 내 기쁨은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라고 했던 세브란스의 말이 깊이 울리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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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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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철 목사] 소중한 가치에 목숨을 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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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선 씨라는 유명한 개그우먼이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죽었다. 어떤 문제로 모녀가 죽은 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전해준 사람의 숨겨진 곳에 큰 상처와 고통이 있었음이 마음 아프다.
그런데, 역대하 23장 10절부터 23장 15절까지를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을 보게 된다. 가족사로 생각해도 이런 비극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가족사에 얽힌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려는 사탄과 이에 대항한 하나님의 사람의 이야기이다.
여호람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는데, 왕이 된 지 1년 만에 예후에 의해 죽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여호람의 아내인 아달랴는 손자들을 다 죽이면서 자신이 왕이 되었다. 이때 한 사람 겨우 살게 되는데 바로 요아스였다.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사브앗이 1살 된 조카인 요아스를 아달랴의 손에서 구한 것이다. 그리고 요아스는 여호사브앗의 남편으로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보호를 받으며 성전에서 6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호사브앗의 이런 행동은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했다. 이 일이 발각된다면 아달랴에 의해 비참하게 죽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호사브앗은 요아스를 구했고, 7년째 되던 해 남편인 여호야다와 마음을 같이한 사람들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요아스를 남유다의 왕으로 옹립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여호사브앗은 왜 ‘어머니 아달랴’(아버지 여호람의 아내)의 명령을 거부하고 요아스를 살린 것일까?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뺏기 위해서였을까? 아닌 것 같다. 여호사브앗은 정치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그럼 아달랴가 정치를 잘못해서 백성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을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 왜 여호사브앗과 여호야다는 목숨을 건 혁명을 했을까? 그 이유가 역대하 23장 1-3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왕자가 즉위해야 할지니 이제 너희는 이와 같이 행하라”(대하23:3b-4a)고 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남유다의 왕은 다윗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때문이었다.
다윗의 가문을 멸하려고 한 것은 결국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없애고자 하는 시도였고, 이것은 사탄의 오랜 소원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아달랴와 여호사브앗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려는 사탄과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려는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다. 여호사브앗은 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다.
여호사브앗은 이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6년의 세월을 엄혹한 아달랴의 감시 속에서도 요아스를 포기하지 않고 성전에 숨긴 것이다. 이런 여호사브앗과 그의 남편인 여호야다의 모습이 큰 도전이 된다. 그들은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용기를 발휘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그러나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어야만 했다. 분명 요아스가 6년의 세월 동안 아달랴의 손을 피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이 은혜를 이루기 위해 여호사브앗과 여호야다의 ‘용기’(대하 23:1)가 필요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변치 않는 공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목숨을 걸어야 할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 나라이다. 이러한 소중한 가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냥 되지 않는다. 여호사브앗과 여호야다와 같은 목숨을 건 헌신과 불의한 사탄의 왕국과 싸우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 우리 인생에 정말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가? 정말 소중한 것에 나의 소중한 것을 투자하라. 이곳저곳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의 편에 서라. 하나님은 이런 사람, 이런 가치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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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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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신 목사] 얼굴(안면顔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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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얼굴’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꽂힌다. 대면(對面)과 비대면(非對面)이라는 단어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화두가 되는 이유도 있지만 최근 돌아가는 정치판과 교계의 지도자들의 모습과 사회적 거리두기에 임하는 교인들의 모습이 교차 되면서 깊이 상고(詳考)하게 된다. 얼굴은 한 사람을 대표하는 그 사람의 정체를 쉽게 얼굴로 인식되고 있는 신체 부위이다. 물론 한 사람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지문(指紋)이나 음성(音聲), 안구(眼球), DNA(유전인자) 같은 것으로 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일상에서는 그 사람의 얼굴로 사람을 알아보고 인식하도록 학습하며 살아온 것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개’ 하면 그 사람이 얼굴이 먼저 떠오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첫인상으로 그 사람을 가름하기도 한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관상(觀相)을 중요시하면서 운명까지 읽으려 하는 문헌들이 전래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 관상 전문가들의 한가지 빼놓지 않는 것은 심상(心相)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링컨의 어록에는 40이 넘으면 그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얼굴로 진솔한 자기표현을 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왜냐면 순진하게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가 손해 보가 일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의 마음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하게 되어, 소위 말하는 포커페이스(poker face)로 감정을 감추면서 다른 사람의 패를 읽어가는 처세술(處世術)에 길들어지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얼굴과 관련하여 생기는 체면(體面) 문화이다.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빗을 내서라도 과도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치르는 관습, 체면 때문에 자식을 일류대학에 진학시키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모들이 즐비(櫛比)하다면 심한 표현일까? 게다가 체면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과하지 않는 뻔뻔함에 염치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사람을 철면피(鐵面皮)라고 부른다. 소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 것 같다는 말이다. 각종 불법을 저지르면서도 합법을 가장하여 버젓이 고개를 들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니고 있는 속물들이 이 시대의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이런 부류들을 속된 말로 안면(顔面) 몰수 하고 사는 파렴치(破廉恥)한 자들인 것이다.
여기에는 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각종 종교단체들과 지도자들의 비리와 부도덕한 일로 공동체가 싸움터가 되고 사회 법정에까지 가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투(me too)에 걸리고도 끝까지 반성이나 회개 없이 자신은 그런 일이 없다고 우기며 피해자에게 다시 고통을 주는 지도자들도 있음에 탄식이 나온다. 이런 철면피들이 득실거리는 시대가 되었다.
성경에서는 특히 예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외식(外飾)하는 자라고 부르셨다. 그 당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협하며 방해하는 신분의 사람들을 바리세인들과 서기관이라고 하셨다. 그 시대에 이들은 오히려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고 누구보다 성경에 능통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만 7번이나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여기 사용된 외식이라는 단어는 [영] hypocrite[히 uJpokrithv"]의 번역인데, 원래는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서 연출하는 배우를 가리킨 것으로서 신약에만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렇게 외식하며 철면피로 파렴치하게 살게 되는가? 우리 내면에 있는 죄, 아담 이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숨기는 기질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적극적으로 우리와 대면하시기를 원하셨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을 꺼리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온 절망적인 죄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로 죄인과 대면하여 만나 주신 것이다. 우리 같은 죄인은 감히 하나님을 대면할 수가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외면하시면서까지 그 십자가에서 우리와 대면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십자가로 가면을 벗고 연기를 멈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寶血)로 성형 수술을 받아서 진솔하게 하나님과 대면 할 수 있는 회개와 믿음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시편 27: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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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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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지일 교수] 6.25전쟁 70주년의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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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을 모두 군대에 보낸 후 방문했던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서 느꼈던 애잔함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2,300여 기에 이르는 10대 말과 20대 초반의 참전 군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을 걸으며, 군복무 중인 아들들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형제였던 (어린) 젊은이들 절대다수는 미국(39명)과 영연방 출신(캐나다 380명, 호주 281명, 뉴질랜드 32명) 기독청년들이었다. 이들 젊은 기독참전군들이 태평양 건너편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 부산에서 오늘 영면하고 있다.
수년 전 미국과 캐나다 교회 사료관들을 방문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유엔기념공원을 알게 된 후, 이들 참전 군인들의 이야기를 역사 속으로 소환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반공산주의와 전시전후 구호사업에 관한 자료들은 다수를 발견했지만, 이들 젊은이들과 가족들의 아픔과 위로의 흔적들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아직까지도 그들 조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기독교 역사 기술 속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사각지대에 남겨져 있다.
6.25전쟁을 70주년을 기념하는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6.25전쟁 70주년을 의미 있게 기념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왜냐하면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증언을 기록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6.25전쟁 80주년이 됐을 때, 과연 몇 분이 우리 곁에 남아 생생한 전쟁의 증언과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코로나19로 혼란스럽던 올해 초, 교회사를 전공하는 제자들과 함께 『6.25전쟁과 한국교회』라는 책을 만들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2020년, 피난지 부산에서 공존했던 지난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통해, 코로나19와의 또 다른 전쟁을 치루고 있는 오늘날 교회의 진로를 모색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책 작업을 마친 후 마침내 발견한 키워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전쟁의 공포와 소망이 공존하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피난지 부산에 모인 신앙인들에게 하루하루의 고달픈 삶은 은혜였다.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소망,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 헤어진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은 하나님 은혜의 선물이었다.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던 부산 도심에는 6.25전쟁의 흔적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피난민들의 지친 삶들이 머물렀던 산북도로, 피난민들의 만남과 소통의 장소였던 40계단, 피난의 일상들이 고스란히 전시된 40계단문화관이 있고, 전쟁 시기에 세워진 교회들에는 고향을 떠나 낯선 피난지에 정착한 피난민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가 오늘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부산은 기독교 인구가 가장 적은 한반도 동남단 땅 끝 불교의 땅으로 일컬어지지만, 6.25전쟁의 절박한 상황에서 복음이 소중히 보호되던 은혜의 땅이었다. 피난지 부산에게 6.25전쟁은 부산경남지역 교회 성장의 전환점이었다. 아픈 마음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기독 피난민들, 그리고 그 아픔을 품은 부산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던 피난 교회들이, 오늘 부산지역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바라본 한국교회의 모습은 ‘은혜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은혜 아니면’ 전쟁으로 무너지고 일그러진 세상을, 선한 능력으로 새롭게 만들 수 없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는 오늘, 코로나19로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은혜 아니면’ 설 수조차 없는 부족한 우리들이, ‘은혜 아니면’ 살아낼 수 없었던 70년 전 6.25전쟁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소망과 용기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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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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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연 목사]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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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처한 어려움이 보통이 아니다. 너무 답답해 눈물이 난다. 답답해 울고 두려워 울고 안타까워 운다. 생명을 거는 자세로 기도해야할 것이다. 이 나라의 문제를 끌어안고 의인의 간구를 드리는 사람, 모세와 엘리야처럼 사도 바울처럼 동족의 문제를 끌어안고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사람이 필요하다.
최근 희한한 일을 기억한다. 여장을 한 남자가 여탕에 침입했다. 경찰이 곧바로 출동을 해서 이 남성을 붙잡았는데, 이 사람이 하는 말이 걸작이다. 자신을 여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여탕에 들어온 것이라 한다. 엄연히 자신이 태어날 때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는 그 생물학적 성만 성인데 요즘 사회적 성을 주장한다. 기분에 따라서 아침에는 여자가 되고 저녁에는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젠더의 성, 사회적 개념의 성을 주장한다. 앞으로 머리긴 남성이 여자 목소리 내면서 에스트로겐 호르몬주사 맞고 여탕에 가면 성소수자로 트랜스젠더로 대우를 해야 한다.
어느 정치인의 말은 가관이다. 설교 중에 ‘동성애가 죄’라고 하면 처벌을 받는가에 대한 질문에, ‘처벌 받겠죠’라고 대답했다. 앞으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큰 혼란이 예상된다. 아마 성경을 없애라고 하지 않을까. 어느 분은 군대내 동성애를 허용해야한다고 했다. 군형법 92조 6항 폐지해야한고 한다.
나라가 큰일이다. 이 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될는지 정말 걱정이 된다. 너무 혼란스럽다.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했다. 다시 말해, 성도들이 정치나 이 나라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하나?
첫째는,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며 책임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2:1-2)
나라와 통치자들을 위한 기도는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다.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이 말은 나라와 통치자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해야하는 사실을 가르친다. ‘첫째로’ 이것은 어떤 논리적 순서를 가르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우선순위로 신경을 써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지를 강조한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 즉, 모든 기도의 방법을 동원하여서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2:2)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 중보의 책임을 수행하는 나라와 사회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본다. 물론 나라에 대해 불평하고 분노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의 책임을 다해야한다. 그리할 때 이 나라는 평안해진다. 하나님의 진노가 눈앞에 뻔히 내다보이는 요즘이다. 지금이야말로 이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 간절히 회개로 기도해야 할 때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딤전2:3)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지도자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며 기뻐 받으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 때에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많이 돌아온다. ‘성령이여 도우소서! 주 앞에 돌아오는 영혼이 많게 하소서!’
우리는 보잘것없지만, 기도의 권세가 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지금이야말로 비상한 기도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한 사람을 그 가운데서 찾고 계신다.(겔22:30)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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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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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 목사] 듣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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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간다고 하는 아이들과 학업에는 전혀 의욕이 없고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 23명을 선발하여 캠프를 열게 되었다. 캠프 계획을 설명하고 학생들을 선발하기 시작하자 담임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의 얼굴에 이런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저 인간들을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거지?”하는 염려들이 넘쳐났다.
그래도 방향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학교에서 늘 문제아로만 취급 당하다가 럭셔리한 펜션에, 비싼 소고기 바비큐에, 그리고 맘껏 놀 수 있는 게임팩을 가지고 놀다보니 녀석들 마음에 “이게 뭐지?”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젠 목사님이 뭔가 본색을 드러낼 때가 된 듯 한데 “씻고 자거라”하고 교장선생님과 같이 방으로 들어가버리니 녀석들은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잠을 청하려 하는데 대표 녀석 한 명이 방문을 두드렸다. “목사님, 잠시 1층으로 내려와주세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1층으로 내려갔더니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서 “목사님, 아무거나 해주세요. 뭐든 해주세요. 이렇게하면 우리가 불안해서 못잡니다.”라고 날 재촉하는 것이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23명의 아이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서 아이들에게 돌발 질문을 했다.
“이 자리에 너희들의 부모님이 계신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부모님이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해 주신다면, 너희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냐?”
나는 아이들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준 뒤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그중에는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해라.”는 대답도 있었고, “미안하다.”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아이들이 마치 짠 것처럼 같은 대답을 했다. “목사님,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러면 너는 언제 잘했다는 말을 들어 봤냐?” 아이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을 걸요?” “저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아이들의 반응을 보며 순간 울컥했다. 캠프에 참석한 아이들을 쭉 둘러보니 평소에 ‘잘했다’라는 말을 들을 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꾸중을 듣기에 바쁜 아이들이었다. 집에서는 거의 포기한 자식으로, 학교에서는 그냥 꼴통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녀석들이 평소에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은 바로 “잘했다!”였던 것이다.
1박 2일의 캠프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이들에게 캠프가 어떠했냐고 물어보았다. 다들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데 차 안에서는 말을 아끼던 녀석들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자 폭탄을 날리기 시작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우리들을 모아 놓고 정신 교육을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 버렸습니다. 학교에 다녔던 11년 동안 학교에서 받은 것 중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학교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인간답게 살아보겠습니다.”
모든 교육이 공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학업 외에도 아이들이 학습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많다. 아이들은 큰 것을 통해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의외로 작은 것에 감동을 한다. 작은 것에도 반응을 하고 심지어 터닝 포인트가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따라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상이 중요하다. 교육은 단순히 아이들을 탁월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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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