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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현 목사]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
    신모 변호사는 저랑 나이도 같고, 지적 욕구도 왕성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여 장애인 차별 금지 운동에 깊숙이 관여하는 분입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총체적 구원과 복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장애인들의 영혼과 정신, 육체, 그리고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웰빙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요. 그분 덕분에 저도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제하며 많이 배웁니다. 새로 옮긴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다고 판사가 아닌 집사로 불러달라고 할 만큼 순수하고 착한 분입니다. 그런 그분이 본인말로 “체질상 성령집회 같은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경험 삼아 한번쯤은 참석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참석을” 했답니다. 말씀을 마치고 목사님께 기도를 받는데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데 ‘픽픽 뒤로 넘어’ 지더랍니다. 손으로 머리를 미는 것인지, 하나님의 역사인지 호기심이 발동하여 앞으로 나아가 차례를 기다렸답니다. 이분을 위해 한참 기도하던 목사님 왈,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절로 뒤로 넘어지고 날아갈 듯 가뿐했다 합니다. 신집사님은 평상시에도 저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많습니다. 때로는 묵직하고 고전적인 것에서부터 어떤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특이한 질문을 해서 저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제 딴에도 제 스스로 질문이 많지만, 아무래도 목사인지라 정통이랄까 정해진 틀에 익숙해지기 십상인데, 이런 분들 때문에 ‘확’ 깨게 됩니다. 글감도 많이 제공해 주고, 아무튼 좋은 벗이자 주 안의 한 가족입니다. 그분의 글을 보면서 고전적이면서도 유치찬란한 주제인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생각해 봅니다. 신앙은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도 전도하는 분이 그러지요. 하나님의 은총은 마치 태양빛과 같다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다고 부인할 수 없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그러자 신애가 말하지요. ‘그것은 그냥 햇빛이에요.’ 과학 절대 만능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익숙한 생각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비단 우리 당대의 사람들만의 행태는 아닙니다. 모든 신들의 형상을 갖고 있던 로마 시대에 하나님을 그 어떤 모양으로 만들기를 거부했던 그리스도인들을 지금 들어보면 참 아이러니한 비판인데, ‘무신론자’라고 했습니다. 신이라 할지라도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만을 이야기하니 실로 희한한 무리였던 게지요. 신집사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법관답게, 지식인답게 눈에 보이는 것 밖의 세계에 머리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인 멜 테리의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을 소개받은 한 분이 그분에게도 권했던 모양입니다. 대충 내용을 들은 신 판사님 말이 “그럼 신문 기사로 나왔겠네요?” 하더라나요. 사회적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것만을 인정하려는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입니다. 신문에 나온다고 공인된 사실이 되는 것 아닌데도 말입니다. 사실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성이 제 아무리 발달해도, 이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판단할 깜냥이 아닙니다. 이성은 이성 자신에 대해서도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그걸 이성의 언어로 말하면 이성도 비이성적이고, 종교의 언어로 말하면 이성도 신앙적입니다. 하여 신앙도 이성적이고, 이성 또한 신앙적입니다. 그래서 칸트라는 철학자는 이성이 자기의 분수와 한계를 알아야 한다고 책을 썼는데, 「순수이성비판」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오래 된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면, 믿지 않고서는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믿어야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지식, 심지어 과학도 교사와 학교, 교과서의 권위에 의거해 먼저 믿고 이해합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서는 과학을 배울 수 없습니다.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도, 이성적으로만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에 어느 정도 이성적인 요소가 있고, 맹목적인 측면도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지식이나 앎도 믿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판단하지 말고 믿으세요’라는 말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입니다. 유한한 인간의 생각 틀 안에 무한한 하나님의 생각을 끼워 넣으려고 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하나님이 당신 크기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착각하지는 마세요. 베뢰아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받은 말씀을 조사했습니다. 예수 이야기가 구약에서 약속한 그 메시아인지를 연구했다는 것이고, 바울의 설교대로 살아보아서 말씀의 진실성 여부를 검증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영이라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지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요1 4:7). 그러니 믿지 않고 있다면 판단하려들지 말고 그냥 믿으세요. 그리고 한 마디 더하면, “신집사님, 믿었으니 판단해 보세요, 가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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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8-25
  • [최병학 목사] 예수님의 본캐와 부캐?
    예능인 유재석이 ‘배려남’과 ‘메뚜기’라는 ‘본캐(원래 캐릭터)’에서 MBC 예능 <놀면 뭐하니?>를 통해 드럼과 뽕짝, 그리고 혼성그룹 ‘싹쓰리(유재석, 이효리, 비)를 통해 ‘부캐(또 다른 캐릭터)’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유재석 유니버스(유재석의 세계관)’의 핵심은 ‘유연성’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가다머의 지평융합(fusion of horizons)이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격의(格義, Matching Concepts)’이고,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복음과 상황’입니다. 현대해석학의 거장인 가다머는 ‘선이해(preunderstanding)’와 ‘지평융합’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에 대한 이해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선이해란 일종의 선입견을 뜻하는데,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2』에서 선입견이란 개인적 차원에서 임의로 만들거나 제거할 수 있는 편협한 사고가 아니라, 문화나 철학, 역사와 같이 과거로부터 전승되어 온 전통에 의해 형성된 사고를 뜻하며 이러한 선입견은 이해의 기본 조건으로, 우리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이해를 기본 조건으로 하는 이해의 과정은 어떠한가요? 가다머는 ‘현재 지평’과 ‘역사적 지평’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현재 지평’이란 인식의 주체가 선이해를 바탕으로 형성한 이해를 뜻합니다. 이해 주체의 머릿속에 형성된 지식, 신념 등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지평’은 과거로부터 축적되어 온 이해의 산물로, 텍스트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지식들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해의 과정은 서로 다른 두 지평인 현재 지평과 역사적 지평이 만나서 새로운 지평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지평융합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이해의 과정으로서 지평 융합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주체가 가진 ‘현재 지평’은 ‘역사적 지평’과 지평융합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이 되고, 그리고 이 새로운 지평은 다음 이해의 선이해로 작용하며 또 다른 이해로 이어지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결국 이러한 해석학적 순환 과정(Hermeneutical Circle)을 고려해 보면, 이해는 결과가 아니라 언제나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격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에 전래되며 중국의 노장사상과 지평융합하여 새롭게 변합니다. 후한시대(75~220)에 전래된 불교는, 『삼국지』에 나오는 삼국시대(220~280)를 거쳐, 5호 16국(304~439) 시대와 남북조시대(420~589)까지 오랜 분열과 내전의 시기에 현실의 윤리를 강조하는 유학이 퇴조하자, 사람들이 내세 종교, 혹은 현실을 초월하는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폭넓게 수용됩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현세의 ‘열반’이라는 교리와 동시에 ‘내세에 대한 윤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현실에 지친 민중들에게 주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복음의 핵심이 유대교의 지평에서는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며 헬라지평에서는 ‘로고스’, 라틴 지평에서는 ‘만왕의 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땅, 대한민국의 현재 지평에서 예수는 어떤 지평으로 토착화되어야 하나요? 힌트를 줄까요? 유재석은 ‘배려남’의 ‘유연성’으로 본캐와 부캐를 함께 완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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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3
  • [최현범 목사] 코로나 펜데믹이 주는 교훈
    팬데믹이 전세계를 휩쓸면서 지난 몇 달간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일상 등 모든 분야가 위축되었고, 교회 역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요즘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코로나 이후의 시대 즉 포스트코로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체로의 공감된 의견은 이제 우리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산업분야, 문화 분야 그리고 시민들의 일상의 분야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을 예고한다. 교회 역시 이전과는 다른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 팬데믹은 인류가 달려왔던 길에 대한 깊은 반성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길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과거 역사 속에서, 변화된 시대조류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을 보는 안목을 새롭게 열어주었던 것처럼, 이번 팬데믹도 그러한 자극과 도전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교회는 목회환경의 변화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이 펜데믹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누구보다도 먼저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더불어 사는 삶으로의 전환이다. 본래 죄의 양상이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이지만, 근래에 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맘몬의 힘이 강해지면서 세상은 너무 여기에 함몰되어 버렸다. 나만 성공하면, 우리 집안만 잘 되면, 우리나라만 잘 살면 된다 라는 것이 암암리에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사회 모든 시스템은 지나치게 경쟁을 부추겼고, 우리 개개인 역시 극한 경쟁에 내몰렸다. 더구나 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국가의 공공성이 약화되면서 빈부격차가 커졌고, 국제사회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번 팬데믹은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게 해주었다. 한 사람의 무절제함이나 거짓말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한 나라 안에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사람들이 전염병의 희생자가 되고 또한 전염의 주범이 되었다. 유럽에서 코로나를 잘 통제한 독일도 최근에 퇴니스라는 육류가공공장을 중심으로 코로나가 확산되어 인근에 1,500명이 넘는 확진자가 나왔다. 공장 환경도 문제였지만, 여기 인부들이 주로 루마니아에서 온 저임금 노동자로 열악한 환경 속에 집단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를 비롯해서, 중동국가들 역시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그것이 사회전체로 퍼져나가 경제를 마비시켰다. 가장 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낸 미국에서는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가난한 흑인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이제 코로나는 의료체계가 훨씬 열악한 남반부 세계 즉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크게 확산되고 있고 이것은 이미 진정세를 보이는 나라들에게 커다란 위협이면서 여전히 경제를 침체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제 세계는 나 홀로가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국가의 권세를 허락하고, 세상의 참된 왕이 되신 주님의 뜻임을 우리는 안식년과 희년계명에서 볼 수 있다. 교회는 누구보다도 이 뜻을 가르치고 실천하여 우리 사회가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둘째는 친환경적인 삶으로의 전환이다. 코로나와 같은 인수공통전염병의 가장 큰 원인은 개발에 의해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파괴되는 것이다. 또한 코로나로 인해 교통과 공장이 주춤하면서 오염된 공기로 뒤덮였던 도시의 하늘이 청명하게 뚫린 것이 위성사진들로 소개되었다. 이를 보고 독일의 컬럼니스트 혼트쉭은 사람들은 매년 수백만 명이 공기오염으로 사망하는 것을 간과한다면서, 이 코로나가 지금까지 자기가 옳다는 방향으로 가속페달을 밟고 달려가던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 기후변화, 환경오염, 자원고갈은 전염병 못지않게 인류에게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누구보다 환경보존에 앞장서고 친환경적인 삶을 실천해야 한다. 코로나 펜데믹이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잃게 했지만, 이러한 교훈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변화를 갖는다면, 도리어 더 큰 유익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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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7-29
  • [이선복 교수] COVID-19 경제위기의 영향과 신앙적 교훈
    지난 4월, IMF(국제통화기금)가 2020년 세계 경제성장률이 -3.0% 하락할 것을 예측하는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나라도 -1.2%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로 인한 감염경보가 최고 위험등급에 해당하는 팬데믹(pandemic)이 상황이 발생하며 세계경제가 패닉상태에 빠진 것이다. 국민의 81%는 3월초 코로나 확산에 두려움을 느끼고 일상에 불편을 겪기 시작했다(부산연구원). 2월 제주도 외국인 여행객 85%가 감소하고, 도시철도 이용자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숙박업소와 관광 MICE 행사가 취소되고, 중국 자동차 부품소재 감산으로 자동차 수출에 비상이 걸렸다(기획재정부). 지역상권은 소비심리의 위축으로 도산하는 점포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COVID-19로 인한 경제위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신앙적 교훈은 무엇인가? 질병관리본부에 의하면 7월4일 현재 국내에서 총12,967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283명이 사망하였다. 세계 확진자 수는 1100만명을 돌파하고 52만명이 사망을 하였다. 코로나 감염이 U자 형태로 장기화되리라는 예측이 적중하여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면 좋을까?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코로나 기간 동안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중소기업중앙회, 무역협회, 상공회의소 등 많은 경제단체에서 피해 현황을 조사하고, 관계부처합동회의를 통해 재난 지원책을 모색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다음 3개의 재정정책이 진행되었다. 첫째는 전국민재난지원금으로 4인가구기준 100만원을 지원, 민생과 경기부양을 도모하였다. 둘째는 지방자치단체에 의한 지원으로 특히 4.15총선과 맞물려 경쟁적 형국으로 진행되었다. 셋째는 기업에 대한 지원으로 코로나의 피해가 큰 산업이나 중소기업, 수출입기업 등을 지원, 도산을 막는 방법이 강구되었다. 그리고 통화정책으로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1.25%에서 0.75%로 인하하고, 채권을 매입함으로 시장에서 유동성 자금을 확보하는 양적 완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지원방법에 관한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위기 시 정부가 해결에 나서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즉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되, 1930년 대공황 같은 위기 발생시는 케인즈 이론 등에 따라 과감히 재정을 투입, 혼란과 도산을 막는 확대 재정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COVID-19 경제위기의 2번째 교훈은 교회와 신앙의 자세이다. 코로나 정국으로 예배참석자가 줄며 교회마다 헌금수입이 감소하였다. 적정한 재무구조의 설계가 필요하다. 수입지출은 물론 자산과 부채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 또 3~4개월 사역에 공백이 생기며 지출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므로 연초에 세운 예산조정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 또한 각자 자신의 재물관을 점검해 보았으면 한다.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자는 것이다. 또 그럴려면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재정관리가 필요하다. 요셉이 애굽 땅에 찾아올 기근에 대비해 곡식을 준비했던 것처럼 재난에 대비하여 재정의 일부를 비축하고,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사치와 쾌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 재난을 당함은 아무 준비없이 “마라나타”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난 것과 똑같은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다. 6월말 상반기 결산, 섬기는 교회의 경우 예산 대비 94.4%의 수입을 기록하였다.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COVID-19가 빨리 종식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또한 교회와 국가가 속히 신앙과 경제를 회복하고, 계속해서 사도행전적인 비전을 꿈꾸며 달려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기간 중 총10회에 걸쳐 화상 세미나(Zoom)에 진행, 유익한 시간을 제공한 부산성시화운동본부에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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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14
  • [송시섭 교수] 누가 누구를 오염시키는가
    의학전문저술가인 존 퀘이조(Jon Queijo)가 쓴「콜레라는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메디치미디어, 2012)를 읽다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등장한다. 200가지의 콜레라균은 대양성 박테리아(ocean-loving bacteria)의 큰 군집에 속하고 그 군집의 대부분은 무해한데, 단 두 종류의 독특한 유전자 결합이 사람의 장(腸)에 침범하여 나쁜 독소를 생산하고, 인간숙주가 죽을 때까지 세포가 기계적으로 다량의 수분을 배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종의 콜레라균은 주로 강어귀 해수에 사는데 비해, 인간에게 치명적인 2가지 콜레라균은 인간 거주지 근처 오염된 물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놀라운 사실에 대한 해답을 질문형태로 우리 자신에게 던지고 있다. “누가 누구를 오염시키는가?”라고. 현재 모든 세계를 단숨에 멈추게 하는 강력한 코로나 19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우리 인류가 생태계환경을 망치면서 진행해온 산업화,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끊임없는 세계화로 인해 발생한 기후변화가 불러온 문명의 저주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한편 코로나 위기의 원인을 ‘숲의 파괴’에서 찾는 입장도 있다. 인간이 숲을 없애자 거기에 서식하던 야생동물을 숙주로 삼았던 바이러스가 인간 세계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구온난화로 빙하에 갇혀있던 질병이 인간세상을 덮쳤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어디까지 과학적인 증거로 입증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콜레라의 유행에서 발견된 인간과 자연간의 묘한 악연(惡緣)이라는 우연의 일치가 코로나에서도 불길하게 겹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단기간에 증명되기 힘든 코로나의 원인에 대하여 인간이 자연을 침범한 결과가 아닐까 하고 바라보는 관점은, 현재 우리가 당한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다소 넓혀주는 것은 사실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은 단지 우리의 미래가 백신의 개발에만 있지 않음을 보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희소식이 백신의 개발뿐이라면 인류의 미래 생존 이야기는 의학이나 약학의 발전과 동일시될 것이다. 하지만 백신개발만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고 깨닫게 되면, 우린 백신개발이라는 해결을 넘어선 더 높은 차원의 접근법을 만나게 된다. 정말 ‘화학백신’ 개발이외에 우리가 취할 해결책은 존재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한국 현대사회의 석학으로 불리는 이들이 코로나이후의 새로운 세계를 살아갈 인류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 설파한「코로나 사피엔스」(최재천외 5인 공저, 인플루엔셜, 2020)에서,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은 새롭고도 선명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의 이정표에는, 시장근본주의의 극복, 포용적이고 효율적인 민주주의 구축,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방역, 욕망에 대한 질서부여, 인간서식지 무한 확대의 방지, 도시적 공간집약화 해소라는 것들이 제안되는데, 이는 최재천 교수가 ‘생태백신’이라 이름붙인 거시적인 해결방법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야의 제공은 마치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여성신학자 샐리 맥훼이그(Sallie MacFague)가 제창한 ‘전지구적 안녕’(planetary well-being)을 향한 생태적 공동체 구축을 위한 온 인류의 ‘우주적 회개’와 흡사하다. 다시 콜레라로 돌아가 보자. 19세기 중반 영국시민들을 끔찍한 죽음을 몰고 온 재앙을 겪어내며, 존 스노우(John Snow)라는 의사는 ‘근대 역학의 아버지’가 되었고, 애드윈 채드윅(Edwin Chadwick)이라는 변호사는 ‘근대 공중위생의 창안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인류는 ‘공중보건’이라는 혁명을 일궈냈다. 그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코로나라는 새로운 위기를 통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공의료’가 자리 잡고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교회들에서 ‘생태신학’이 꽃피며, 종교와 과학이 환경보전이라는 중간지대에서 함께 손잡는 거룩한 입맞춤이 이어진다면 오래지 않아 우리는 가까운 서점에서「코로나는 어떻게 인류를 구했나」라는 새로운 베스트셀러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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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6-24
  • [김영일 목사] '타산지석(他山之石)' 의 교훈
    최근 우리는 연일 매스컴을 통해 '정의연(정의기억연대)'에 대한 보도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장 큰 이슈는 '주객의 전도' 와 '도덕적 해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욕스런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치유하겠다는 목적에서 정신대와 위안부로 끌려가서 짓밟힌 어르신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겠다고 나선 모임이 바로 이 정의연이 아니던가! 그런데 거의 절규에 가까운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과 연일 보도되는 의혹들은 이 정의연의 원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들의 절규 속에는, 어느 코미디언의 '그것은 그들을 두 번 죽이는 거예요.'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본래 출발할 때 가졌던 그 마음들이 변해서는 안 되고, 주된 목적과 목표를 놓치고 엉뚱한 데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게다가 어린 아이들로부터 시작하여 어르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심지어 위안부 할머니의 피땀이 섞인 모금들, 국가의 세금으로 지원받은 것이 어떻게 정확하게 집행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애매한 기록들은 우리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물론 그들이 의도적으로 악한 모습을 행하였다는 것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미숙함과 소홀함은 도덕적인 해이까지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들을 보면서 그것을 비난하는데 이 글의 방향으로 삼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사회적인 이슈를 보면서,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고, 또 문제점이 있다면 뼈를 깎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 이 문제로 남을 탓하기 전에 필자의 마음과 삶을 돌아보고 고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을 마음에 새겨본다.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예배하고, 세상 속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교회를 목양하도록 세움받은 자로서, 오직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 목사로서, 이런저런 감투에 휘둘리는 모습은 주객이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주된 사역이 아닌 것들에 집중하다가, 정말 잘 감당해야 할 사명을 놓치는 부끄러운 목사로 사는 모습에 깊은 한숨과 통회가 이어진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를 위하여 살겠다고 고백하며 출발하였지만, 이런저런 물질의 노예처럼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어느 신실한 집사의 입에서 나온 자연스런 한 마디는 슬프게 한다. '목사님은 대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인데, 어떻게 대접을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이 말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만약 영원히 대접을 받아야 하는 분이 있다면 우리 주님이 아니던가? 이미 목사로서 필자는 받는 것에 익숙해져서, 섬기고 또 섬겼던 주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닌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7:3-4)'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서, 필자는 이미 '타산지석의 교훈' 이 아니라, 이미 그들보다 더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자신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왜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그런 목적은 아니었을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된 것이 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인이 어찌 의도적으로 악을 행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서 주와 동행하는 모습이 식어지면, 멀찍이 주를 따르던 베드로가 주를 모른다 저주맹세했듯이, 지금 우리도 주님을 멀찍이 따르는 연유로 우리의 삶도 변질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르신 소명, 그 진실한 소명에 대해 주객이 전도된 모습, 주의 은해에 대해 배은망덕의 도덕적 해이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깰 수 있을 때 완전히 깨고, 팔 수 있을 때 완전히 파서, 고칠 것을 고치고 새롭게 할 것은 새롭게 해서 바르게 세워야 할 것이다. 주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그 목적과 목표를 바로잡고, 입술과 심령에 감사로 채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도록 다시 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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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6-10
  • [유의신 목사]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라는 종교는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기독(그리스도)은 영원하다. 기독교에 속한 교회는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기독(그리스도)에 속한 교회는 음부의 권세도 무너지게 못한다. 이글은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 배경에는 최근 기독교와 교회가 사회에서 혹독하게 비판을 받고 심지어는 혐오스러워하는 경향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판을 받아드리고 우리 자신을 재정비하여 올바른 개념을 확립하고 원(原)기독(그리스도)을 최고의 가치로 다시 시작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원의도(原意圖)대로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명을 다 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글을 풀어내려고 한다. 먼저 가장 큰 오해는 기독교(基督敎christianity)와 기독(基督Christ)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신자나 불신자가 별다르지 않아 보인다. 기독교는 개신교(protestant)를 대표하는 종교중의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교주가 아님이 분명한데도 기독교라는 종교를 설립하신 분으로 오해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자칫 기독(그리스도)이 빠진 종교만 있게 되는 우를 범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고 처음과 나중 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아들이신 분이시기에 어떤 종교에도 매이시거나 간섭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신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골로세서1:15-16 다음의 오해는 교회(local Church)에 대한 것이다. 기독교회는 편협하고 독선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이 교회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일반인에게도 못 미치는 각종 불법을 저지르고 사회의 모든 부조리가 교회 안에서 자행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데로 교회가 철저히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해있음으로 해서 종교단체화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종교 중에 하나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 없는 교회이기를 자초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 지경 까지 갈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진정한 교회는 교단이나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값으로 사신바 된 거룩한(구별된) 교회라는 것을 일아야 한다.(마태복음16:16)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우신 교회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와 관계적 개념이지 시스템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라는 비유를 하신 것이다. 교회의 머리가 교단이나 목회자나 돈이 되어 버리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흥 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교회는 흥하고 망하고의 문제로 좌우 되지 않는다. 성도과 교회 가운데 그리스도가 있는 이상, 작고 크고에 관계없이 음부의 권세도 해할 수 없는 최강의 교회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마태복음16:18) 끝으로 기독단체(para Church)이다. 기독단체는 지역교회와 함께 서로의 파트너로 그리스도 대위임명을 실현해 나아가는 기관이다. 그러나 심히 우려스러운 것은 기독단체들이 기독이라는 단어를 단체 이름에 사용하면서도 기독(그리스도)과 무관하게 운영을 하는 곳이 많이 있다. 그런데다가 오히려 그리스도 이름을 해롭게 하고 있는 단체들까지 생겨 놀라게 한다. 그동안 기독교단체의 평판이 나빠지면서 단체 이름에서 기독이라는 단어를 빼고 일반 단체처럼 경영하는 곳도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모두 기독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기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반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반면에 여전히 기독(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단체명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기독(그리스도)과는 거리가 먼 가치를 추구하는 단체들도 있다. 그러려면 차라리 기독이라는 단어를 빼고 단체명을 새롭게 하여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어떤 기독 단체들은 설립 정신을 기독(교)정신이라고 하면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설립정신을 희석시키거나 아예 삭제하는 단체들도 보인다. 그러다가 경영난에 이르면 타 종교나 일반인에게 단체를 넘겨 버리기도 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비상사태에 임하고 있다.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와 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극히 제한받는 임계점에 와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을 새롭게 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언행으로 우리가 생산 배출 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내 지도록 살아 할 것이다. 빌립보서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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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5-27
  • [안동철 목사] 무례한 기독교 탈피하기
    몇 주 전 한 지인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였다. 조용히 식사하는데, 갑자기 단체 손님이 들이 닥쳤다. 들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목사님, 권사님, 집사님...” 식당에는 이미 몇 명의 손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점령군들은(?) 다른 손님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 순간에 소수자가 되고 말았다. 그분들의 기세에 기가 죽고, 이들의 소리는 식당에 전세를 놓은 듯 더욱 커졌다. 이윽고 음식이 들어오고, 목사님이 일어서더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거센 경상도 사투리에 큰 목소리로 말이다. 각종 수식어를 붙인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성령충만’을 말하고,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을 대적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참 길게도 하셨다. 사람들은 목사님의 간구가 끝나기가 무섭게 ‘아멘’이라는 추임새를 계속해서 넣었다. 나도 목사이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불편해진다. 나는 대중음식점에서 기독교인이 단체로 들이닥쳐서는 예의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면 좌불안석이었다. 게다가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며 기도를 할 때면 그분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불교신자들이 식당에 승려들과 들이닥쳐서는 서로 합장을 하고,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하고, ‘반야심경’ 같은 불경을 외운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어떨까? 아주 불편할 것이다. 나는 공공장소에서의 기도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찰스 킴볼(Charles Kimball)은 그의 책 <종교가 사악해질 때>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신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그것이 이웃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 종교는 이미 타락해 개혁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확신해도 된다.” 얼마 전 식당에서 기독교인들이 식사기도를 하다 신천지로 오해되어 경찰이 출동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다른 경우는 기독교인들이 식당에 들어오니까 식당주인이 집안 일이 있어서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손님 받기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오해 받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대중식당에서 대표기도는 하지 말 것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조용히 묵상기도를 하고 식사할 것을 말이다. 정말 필요해서 기도를 해야 할 경우라면 옆의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작은 소리로, 짧게 기도할 것을 말이다. 박성철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는 <한국교회 내 기독교 파시즘에 대한 비판적 연구>라는 논문의 결론에서 로마서 12장 14-21절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타인까지도 품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다.” 코로나 19 이후 기독교가 이 사회 가운데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할지 정말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 같다. ‘생명의 도’라 불리는 기독교가 과거에 당연히 해왔던 ‘관성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린 유럽의 교회들처럼 화석화의 길로 들어설 것 같은 두려움이 크다. 어항 안의 물고기처럼 사회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이웃사랑’과 ‘섬김’(diakonia)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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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2
  • [노상규 목사] 딱 좋은 때
    코로나19(COVID-19)로 온 세상이 요란하다. 많은 분들이 죽어가고 있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확진자의 숫자를 대하며 세계가 혼돈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요양시설의 노인들과 시신을 버려두고 달아나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화도 나게 하지만, 그 상황을 마주한 사람들의 공포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생필품 사재기를 하는 뉴스를 접하며 성숙한 우리 국민들을 다시 돌아보기도 한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운동을 한창 펼치는 정부에서 국민들에게 하루 종일 마스크 생각을 하도록 만들고, 공적마스크 판매처인 약국 앞에 장사진을 치게 하는 이해 못할 장면을 대하기도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온 국민과 온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본격적으로 맞으며 많은 교회들이 선제적으로, 오프라인 예배를 잠정 중단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 기간이 자꾸 길어지며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정부시책을 준수하며 온.오프라인 예배를 겸하는 교회들도 있다. 한편 온라인예배를 드릴 수 없는 소규모교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오프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주일 오전예배 한 번만 드리기도 한다. 성도들의 친밀한 식탁 교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급기야 정부가 교회를 타켓으로 삼은 냥하며 오프라인 예배 자제를 권고하고, 예배시간에 공무원이 출동하여 점검하고, 확진자 발생 시 구상권 청구 운운하며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리 저리 어려운 상황들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금이 딱 좋은 때이다. 평소와 달리 교회봉사와 다양한 만남, 대외활동들을 자제해야 하는 시기이기에 개인적인 시간을 보다 많이 누릴 수 있다. 무엇을 하기에 딱 좋은 때일까? 첫째, 말씀을 가까이 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성경읽기, 묵상, 성경필사 등으로 말씀의 깊이 있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좋은 때이다. 필자는 근래에 한문성경붓글씨 필사에 집중하고 있다. 예전에 한글성경필사, 영어성경필사에 이어 하는데, 그 때마다 주시는 은혜가 다르다. 한자 한자 뜻을 새기며 화선지 위에 붓을 옮기며 성경을 필사하는데, 때로는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직접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하며 성경필사의 맛을 알기에 필자는 성도들과 지인들에게 성경필사를 자주 권하고 있다. 둘째, 기도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기도의 제목들이 뉴스로 수 없이 쏟아지고 있다. 코로나19사태 종식을 위해 힘쓰는 정부, 의료진, 확진자와 가족들, 선교지의 선교사들과 영혼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교회와 리더십들... 같은 시간대에 함께 모여 기도할 형편이 안 되는 교회의 성도들은 시간 나는 대로 교회를 찾아 코로나 대응수칙을 지키며 조용히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 기도를 하기에, 개인 기도훈련을 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넷째, 가족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성도들은 주일 예배시간에도 가족이 모니터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린다. 평소와 달리 가족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며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이 때 평소 바쁨을 핑계로 실천하지 못한 가족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마지막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에 딱 좋은 때이다. 기독교인의 힘은 어려움의 때에 나타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지금도 조용히 어려운 이웃들의 먹거리와 생필품을 나누고, 필요를 채우는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음을 안다. 어려울 때 함께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배가되어 나타난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는 이 때가 우리에게는 딱 좋은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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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20-04-10
  • [탁지일교수] 이만희의 목소리
    지난 3월 2일 이만희의 기자회견이 있던 날, ‘이만희의 목소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목소리’에 더 집중해야 했다. 이만희가 뭐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을 보며, 뭔가 잘 못됐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평소에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애썼는데, 이날은 이만희의 어눌한 목소리를 막는 한 피해자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메가폰 목소리가 거슬렸다. 이만희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집중했어야 했던 것은, 이만희의 목소리가 아니라 딸을 신천지에 빼앗기고 애통하게 울부짖던 피해자 ‘어머니의 외침’이었다. 우리가 이단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교회와 가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이단대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단에 빠진 이들을 모두 구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만희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애타게 딸을 찾던 어머니의 모습은, 신천지의 사기행위에 속아 집을 나간 딸을 찾기 위한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코로나 전염병이 신천지 신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신천지에 속한 딸의 안전과 행방을 알려달라고 외치던 피해자 어머니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단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보게 된다. 이단문제는, 피해자의 눈을 통해 보고 귀를 통해 들었을 때, 그 본질과 위험성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이단문제는 고상한 교리적인 논쟁이 아니고, 이단문제는 교권 장악을 위한정치도 아니며, 정적 제거를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이단문제는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거룩한 싸움이다. 한편 신천지에 빠진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되찾아오려는 가족들의 노력을 신천지는 소위 ‘강제개종’이라고 부른다. 적반하장이다.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정체를 숨기고 다가와 속이고 데려간 신천지가 ‘강제개종’의 주범이다. 얼마 전 법원은 이러한 신천지의 “사기행위의 기망이나 협박행위와도 유사”하다고 그 위법성을 판단했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신천지=거짓말=위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이미 교회가 알고 있었던 신천지의 정체를 이제 사회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게 되었다는 점은 일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외신들마저도, 신천지의 거짓말과 위장이 사태를 키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거짓말’과 ‘위장’을 교리적으로 합리화한 종교단체는 없다. 신천지의 2인자였다가 최근 신천지의 정체를 폭로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김남희의 표현처럼, 이만희의 신천지는 “종교사기 집단‘일뿐이다. 희망과 공포가 공존하는 어수선하고 불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건강’과 ‘안전’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신천지는 조직을 보호하고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도 신천지 신도들이 거짓과 위장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다. 만약 신천지 신도들도 국민이라면, 120억 원 기부가 답이 아니다.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한 진정성 있는 협조가 없을 경우, 신천지의 몰락을 위해 교회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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