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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복 교수] 거룩한 스승이란?
    “거룩한 스승”이란?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부산대학교에서 열린 제31회 전국교수선교대회 주제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육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주장한다. 또 교육부 스스로가 각종의 정부지원사업을 무기로 대학들이 구조조정을 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혁이란 무엇이고, 교육부가 추구하는 방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필자는 현직 교수의 한 사람으로 교수가 변하지 않고는 대학이 절대 변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즉 개혁의 주체는 교수이고, 또 교수가 변화되어 참된 스승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교육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 대학교육에 있어 지향해야 할 참된 교수의 상은 무엇일까? 필자는 기독교수의 한사람으로 그 가치를 성경과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찾고 싶다. 기독교수에게 있어 최고의 스승의 모델, 멘토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에 참 사랑을 가르쳐 주셨음은 물론, 제자들의 발을 씻겨 본을 보이시며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 하시며 교육의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3:15). 많은 대학이 심각한 위기 속에 있다. 높은 장벽의 취업 현실 속에 학생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전공 성적과 외국어 스펙 만들기에 집중, 교육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돌아 볼 틈이 없다. 경쟁구조는 날로 더 심해져 가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컨닝까지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3년전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통해 새롭게 교육을 회복할 기회가 있었지만, 스스로 무산시키고 말았다. 도망치는 선장의 모습을 보고 내 자신 속에도 그러한 부분이 없었는지, 또 무엇보다도 교육자의 한사람으로서 그 잘못이 교육에 있었음을 통감하고 회복의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결국 본질은 외면하고 정치적 책임공방에 관심이 집중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봐야만 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교육이 바로서야 한다. 또 그를 위해서는 모든 교육자가 먼저 학생들 앞에서 정직한 모습으로 바로서고, 가슴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구체적인 교육방법을 위해 구현해 갈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할 것이다. 전국교수선교대회가 3일 남았다. 지난 한학기도 동안도 열심히 달려 왔다. 그러나 돌아보면 부족한 점 투성이다. 또 누구를 위한 교육이었나? 혹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계수단을 위한 일상적인 교육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면 회개하고 반성할 점이 너무나 많다. 이번 선교대회는 신앙생활을 통해 받은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고, 또 우리 학생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전달하고 봉사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즉 기독교수로서의 성경적 가치와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스승 상을 회복, 모든 교육의 영역에서 복음의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임재를 실천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동시에 이번 부산대학교 대회는 그 동안의 대회가 기독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만큼, 복음이 지역거점 국립대학으로 확산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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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7-06
  • [안중덕 목사] 청소년을 위한 사회적 역할
    우리나라에서 청소년에 대한 인식은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꿈도 피워보지 못한 수많은 ‘꿈지기’들의 희생을 목격하면서 온 국민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고 안타까워 몸을 떨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원하는 일들을 하게 해 주어야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난 지금,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수영교습을 의무화하자는 목소리가 나올 뿐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최근에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에서 발표한 ‘2016 제8차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82점으로 조사 대상인 OECD 회원국 22개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주관적 행복지수란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정도를 OECD 평균(100점)과 비교해 점수화한 것이다. 이 연구팀이 지난 3~4월 전국 초등학교 4학년~고등학교 3학년 학생 7908명을 대상으로 학교생활 만족도, 행복감, 건강 상태 등 항목의 행복지수를 조사한 것인데, 우리나라는 2009년 첫 조사 이후 2014년까지 6년 연속 최하위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입시와 경쟁의 굴레 속에서 청년성(靑年性)을 상실한 채 여전히 박재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청년성’이란 과단성, 불온성, 도전성을 말한다. 과단성(果斷性)은 일을 딱 잘라 결정하는 의지로서 젊은이에게는 진리와 정의에 대한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 불온성(不穩性)은 기성의 권력이나 세력에 맞서고 대립하는 기질로서 젊은이는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과 맞설 수 있는 불온함(야성)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도전과 모험심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도전, 그리고 삶의 역경과 시련에 대한 담대한 용기와 모험심이 있어야 한다. 과연 우리의 청소년은 이런 청년성을 키워가고 있는가. 어떻게 우리의 청소년들이 박재되어 가는 틀을 깨고 나와 청년성을 회복하게 해 주어야 하는가. 청소년기는 급속한 신체적 성장과 함께 극심한 심리적 변화를 경험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변화를 잘 극복하고 적응해야 심리적으로 안정되며, 성인기로의 순조로운 이행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청소년기는 생애능력을 키우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일과 중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지적능력의 증대를 위해 사용하고 있고, 입시와 성적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미래 자신의 진로, 직업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생애핵심역량의 통합적 발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까지의 청소년 활동은 학교교육에 치중하고 있어 자발적 활동의 기회를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청소년 활동역량의 증진을 위해서는 청소년 스스로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개선하고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자기주도적인 청소년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통합적인 활동 프로그램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이러한 역할은 학부모나 청소년 자신의 자발적 의지도 중요하지만 전문적인 청소년활동기관과 지역사회의 다양한 기관이 참여하여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 교회의 청소년 사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교회의 청소년들이 사라지고 있다. 교회들은 오래 전부터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의미한 대안과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위기가 아닌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교회가 스스로 청소년들을 끌어안고 청년성을 키워주어 역사의 주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신실한 일꾼으로 키워가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그렇다면 교회가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적 역할을 할 방법은 있는가. 한 가지만 제안하고 싶다. 교회는 우리 사회의 시대적 상황을 새롭게 인식하고 청소년을 위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해야 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와 우리 사회에 미래가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개화기에서부터 기독청년운동을 주도해 온 YMCA, YWCA와 같은 기독교 청소년 전문기관들과 손을 잡는 것이다. 기독교청소년시민운동단체의 전문성과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이 만나면 충분히 지속가능한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지금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신뢰를 주는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할 때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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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6-16
  • [주광순 교수] 한국 교회와 이주민 사랑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자주 외국인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외국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도 있고 외국인 유학생도 있고 결혼해서 들어 온 여성도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자면 2014년에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외국인 수만 해도 180만 명 정도가 된다.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도 140만 정도다. 결혼해서 국적을 취득한 여성까지 치면 그 이상일 것이라고 본다. 그 자녀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될 것이다. 요즈음 추세로 보아서는 그 수가 계속 증가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나라도 더 이상 단일민족, 단일문화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문화 사회가 된 것이다. 오늘은 결혼 이주민 여성과 다문화 자녀 문제를 거론해 보고자 한다.구약성경에는 ‘이방인과 나그네를 선대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외국인 노동자나 유학생도 이방인이요 나그네지만 이주민이나 그 자녀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엄마들이 국적을 취득하면 한국 사람인 것은 맞지만 생김새나 피부색이 다른 관계로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다문화 자녀들은 더 미묘하다. 한국말도 잘하고 한국 학교에도 다니지만 특히 생김새나 피부색이 다른 경우에 완전한 한국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수 있고 우리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이다.필자는 독일에서 유학을 해서 몇 년 전에도 독일에 머문 적이 있었다. 거기 예전에 다니던 한인교회에서 한국인 2세들을 만나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한국 부모들이 교육열이 강해서 독일말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한다. 그런데 어떤 독일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독일말을 잘 하는가?’하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이 질문이 충격적인 것은 2세들이 비록 혈통적으로는 한국인이지만 내적 정체성은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에게 누가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한국말을 잘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것인가! 스스로는 독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독일 사람들은 그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성경에는 의외의 말씀이 있다.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의 비유도 그렇다. 영생과 영벌에 처하는 기준이 이웃을 도왔는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힘든 본문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35절에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영생을 제공하며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고 하신다. 이 말을 우리 현실에 적용해 보자면 다문화 자녀가 우리 사회에서 고통 받고 있는데 내가 무언가를 한다면 심판 날에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도왔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또한 우리가 이주민과 자녀들을 무언가 돕는다고 할 경우에 동정심으로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 자녀를 돕는 것은 곧 주님을 돕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움은 다문화 가정이 단지 연약한 존재로서 우리의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면서, 우리의 섬김을 받아야 할 주님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약자가 곧 하나님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등장하는 굶주리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나그네들을 단지 사회학적 개념으로 파악해 버리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도 분명하다. 이들 약자 속에는 무언가 우리 주위의 일상적인 약자를 넘어서는 것이 있다. 주님이 자신과 일치시키실 만큼 그 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스로 한번 자문해 보자. 우리는 주님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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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6-02
  • [송시섭 교수] 문학을 잃어버린 교회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이란 영화가 생각난다. 몬태나 주의 깊은 계곡에서 플라이 피슁(fly fishing)을 즐기는 맥클레인(Maclean) 목사와 두 아들의 뒷모습이 애잔한 가족사에 얽혀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준 영화였다. 그러나 그 영화의 또 다른 향기는 맥클레인 목사가 설교에 인용하는 아름다운 시(詩)들이었다. 설교의 깊이를 더 해주는 시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빈들에서의 예수님의 외침이 더욱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것을 경험했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는 시를 잃어버리고, 문학을 놓쳐버렸다. 경영학적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심리학적으로 상담하며, 공학적으로 교회를 리모델링하면서 원래 성경이 문학이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는 사실 히브리민족의 구술문학이었으며, 시편, 잠언은 그 절정에 놓여 있었다. 만약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이 문학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가 연대기를 넘어선 그 이상을 보게 되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비의(秘儀)를 담은 계시와 환상, 그리고 신비로운 묵시문학의 장르 속에서 선지자들의 외침은 메마른 구호가 아닌, 애끓는 감정의 토로로 변하였다. 예수님 역시 아름다운 문장을 읊으시던 음유시인이셨고, 손에 잡히는 비유를 그려내시는 화가셨다. 단테도, 셰익스피어도 성경에서 그 많은 영감을 길어내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린 딱딱한 구호를 교회 중앙에 붙이고 조직의 행동목표를 걸개로 내걸었다. 우리가 문학으로서의 성경을 뒤로하고 교본으로서의 성경만을 추구하는 동안 뜨겁게 흐르던 이야기들의 맥박은 희미해졌고, 미움과 사랑, 배신과 음모로 가득한 집안 분쟁은 구속사의 도식 뒤에 숨겨져 버렸다. 혼란을 일거에 해소하는 교리가 지배적인 성경해석이 되고 난 다음 우리가 얻은 것은 교회성장이었으나, 성경 자체를 돌고 돌아 부딪혀 오는 물보라를 놓치면서 우리들의 옷은 깔끔하고 두 발은 물에 젖지 않게 되었다. 현대인을 위해 쉽게 풀어 쓰인 성경은 운율을 잃고 설명문으로 변해버렸으며, 스토리와 내러티브가 빠져버린 설교는 주제와 소제목들로 구성된 프레젠테이션이 되어 버렸다. 대표기도는 틀에 박혀버렸고, 회의는 지루해졌다. 주일학교에서 문학적 상상력이 자취를 감추자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세상의 춤과 오락프로그램의 흉내들뿐이었다. 고전은 다시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주는 책이다. 성경은 원래 그런 책이었다. 아니 고전을 넘어 경전이 되어 버린 성경은 비극과 희극을 통해 생명을 전달하는 문학의 결정판이다. 교회 뜰 안에 문학의 꽃을 다시 심자. 온 성도가 성경의 한 이야기를 리듬 있게 함께 읽는 멋진 저녁시간을 갖자. 기도를 멋진 미사여구로 꾸며 드리고, 설교를 그리스 비극처럼 관객에게 울부짖게 하자. 딱딱해져버린 마음의 밭을 먼저 문학의 쇠고랑으로 갈아엎자. 성령의 비가 흠뻑 내려 바닥까지 적실 수 있도록 시와 노래로 깊은 도랑을 만들자. 교회 안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와 마주 앉고, 파스칼을 불러오며, 톨스토이를 만나보자. 어른들을 위한 기독교문학캠프가 교회마당에 임하게 하자. 교회가 신령한 문예부흥의 근원지가 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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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5-20
  • [박철 목사] 올바른 삶, 올바른 정치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나 하나의 삶과 우리 모두의 삶을 겹쳐서 살아가야 한다. 정치는 그렇게 겹쳐 사는 삶을 다스리는 행위에 속한다. 그러한 행위가 바로 위정이다. 곧 정치를 하는 것이 위정인 셈이다. 정치를 하는 힘이란 무엇인가? 권력이다. 권력은 법령과 형벌을 앞세워 그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권력을 쥔 사람은 항상 자신이 칼자루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가 세상을 호령하면 나는 새도 떨어진다. 이 얼마나 무서운가. 법치란 힘으로 하는 정치를 보기 좋게 화장을 해주는 경우로 변질되기 쉽다. 법이란 거미줄이어서 새는 그 거미줄을 뚫고 날아가지만 벌레 따위는 걸리고 만다는 탄식이 백성들의 입에서 떠나 본 적이 없다. 법망을 비웃고 날아가는 새는 무엇인가? 권력의 힘이 있는 무리이고 법망에 걸려드는 벌레란 무엇인가? 힘없는 백성들이다. 이러한 꼴이 백성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백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맺혔으면 풀어주고 막혔으면 터주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인의의 정치이다. 이제는 인의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말마저 잊혀져 버린 상태이다. 완전히 힘으로 정치하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단서를 달고 치자들이 정치를 하지만 오늘날처럼 권력의 법이 사람에게 군림하면서 법은 인간의 족쇄 구실을 하고 있는 중이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다지만 법대로만 하다간 살아갈 수 없다는 백성의 말을 흘려버릴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법을 악용하는 무리들이 세상을 어지럽게 더럽히기 때문이다. 누가 법을 악용하는가? 백성이 하는가, 아니면 권력이 하는가? 법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꼴을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자주 본다. 권력을 앞세워 법을 악용하는 무리들은 정치를 등치는 짓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법치의 세상이라 하더라도 정치를 하는 사람의 됨됨이가 인의의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세상은 항상 무섭게 돌아가고 만다. 권력을 맡은 당사자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할 것이고, 올바른 행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위정(爲政)은 올바른 정치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릇된 정치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위정보다 위정(僞政)을 일삼는 치자가 있다면 그는 정치를 등치는 사람에 불과하며 백성을 속여먹는 사이비에 불과하다. 권력을 치부의 수단쯤으로 여기는 사람이나 권력을 특권으로 여기는 사람도 다 사이비 정치꾼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정치는 사랑함을 베풀 줄을 모른다. 법과 힘으로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갖은 술수를 부리고 엄포를 놓아 주눅이 들게 하여 세상을 억지로 맞추려고 한다. 그래서 변란이 일고 밀려나고 물러나고 빼앗고 빼앗기면 정권의 다툼이 요란하다. 치자들이 정권욕에 사로잡히면 잿밥에 눈이 팔려 염불은 못하는 땡중이나 다를 바가 없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입’이란 말이 있다. 잠시도 지껄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의 인간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4.13 총선 이후 노회한 몇 몇 정치인들이 말하는 걸 보면 ‘지껄인다’도 적절치 않다. ‘나불댄다’(바람개비 처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하다. 예로부터 구시입화문(口是入禍門)이요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라고 했다. 중국 송나라때 ‘태평어람’에 나오는 말인데 화는 입으로 들어오고 혀는 자기몸을 칼로 베는 것이니 입조심하라는 뜻이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항시 세치 혀 놀림을 조심해야 한다. 말을 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하라(三思一言)는 선각자들의 충고를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되는대로 지껄이다가는 입은 온갖 불행과 재앙을 몰고 오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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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5-04
  • [길원평 교수] 학생인권조례는 과연 필요한 것인가?
    부산시 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T/F팀을 구성하고 공청회를 하는 등 본격적으로 발의를 준비한다는 기사를 보면서, 과연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현재 전국 4개의 지자체가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었는데, 조례를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얼마나 유익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교육부에서 전국적으로 실시한 기초학력 미달 비율을 보면, 2013년에는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서울 1위(4.5%), 경기 2위(4.3%), 전북 3위(4.0%), 광주 7위(2.8%)를 차지하였고, 2014년에는 서울 1위(5.6%), 전북 2위(5.0%), 경기 4위(4.7%), 광주 7위(3.6%)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수치를 보면,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곳은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매우 높은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광주 지역은 사립학교 비율이 높아서 미달 비율이 낮다고 한다. 광주 지역의 학부모들은 자녀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낸다는 말도 들었다. 이러한 말을 들을 때에 교육감들이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려고 하기 보다는,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공부를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들의 인권만 지나치게 보호하여, 생활지도와 교실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으며, 교사들이 올바른 인성 교육을 실시하고 학생들을 통솔하고 지도할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리게 한다. 위에서 언급한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학생인권조례로 인하여 수업 분위기가 좋지 않게 되고, 학생지도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인권보다는 자신의 미래 꿈을 위한 교실에서의 좋은 수업 분위기가 아닐까? 교육부의 연도별 교권침해 현황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5년 1학기까지 26,411건의 교권침해가 생겼고,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 436건(1.7%), 교사 성희롱도 375건(1.4%)에 달했다. 지역별로는 학생인권조례를 본격 시행한 2011년을 기점으로 서울, 경기, 광주의 교권침해 건수가 급증하였다. 교권침해 건수가 서울은 2009년 430건, 2010년 685건, 2011년 1319건, 2012년 1780건으로 증가했고, 경기도는 2009년 131건, 2010년 130건, 2011년 665건, 2012년 1691건으로 가파르게 증가했고, 광주시는 2010년 19건, 2011년 209건, 2012년 487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광주시는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된 해인 2011년에 전년 대비 11배나 급증했다. 참고로 학생인권조례가 경기도는 2010년 10월에, 광주는 2011년 10월에, 서울시는 2012년 1월에, 전북은 2013년 7월에 제정되었다. 따라서 교권침해 건수가 자연발생적으로 증가한 것이 아니고 학생인권조례와 깊은 상관관계를 가짐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교사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학생인권조례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또한 집회의 자유와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에 의해 차별받지 아니한다는 조항으로 말미암아 학생들이 특정 정치 세력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과 학부모들은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서 특정 정치세력의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여러 가지로 미성숙하므로 교육을 통하여 절제력, 판단력 등을 증가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권이란 이름으로 학생들을 부추기고 절제력 등을 교육할 수 없도록 만든다. 학생들은 교사의 말을 쉽게 수용하고 선입견과 편견을 가질 가능성이 높으므로, 자칫하면 학교가 선동 장소로 변하고 학생들이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가질 수 있다. 학습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 미성년자인 학생들이 특정 정치 세력의 도구로 희생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학생인권 보호가 가능하기 때문에 학생인권조례는 불필요하다는 점이다. 학생은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초등, 중등 교육법 등의 법령에 의해서 탄탄한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문제점을 가진 학생인권조례를 부산시 교육청이 굳이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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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4-21
  • [하수룡 장로] 버려야 할 불신앙의 말
    선교사가 이 땅에 복음을 전한지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수백만의 성도가 대한민국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각계각층에 기독교인이 산재하여 있으면서도 제대로 역할을 못한다고 욕을 할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세상 사람들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뻐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 대를 25년으로 잡는다면 기독교가 이 땅에 자리 잡은 지 거의 5대가 되는데 이제는 기독교 문화가 정착되어 모든 면에서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이 순리라 생각한다. 고려가 불교로 500년, 조선이 유교로 500년 이상을 내려오는 동안 불교와 유교의 숭상으로 문화와 사상, 그리고 특히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가 겨우 100여 년으로 이런 상황을 극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잘 믿는 신자나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 다분히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 말을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 죄송한 일이다. 그렇다면 꼭 버려야 할 불신앙의 말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제일 먼저, ‘재수’라는 말을 자연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수 좋다.’ ‘재수 없다.’는 말을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른들이 일상생활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니까 성장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자연적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심지어 가르치는 주교 교사나 강단에서 설교하는 지도자도 무의식적으로 이런 용어를 사용하니까 가르침을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부감이 없이 그대로 따라서 사용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된다. ‘운 좋다’ ‘운수대통’이라는 말이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신자의 입에서 자연적으로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기독 신자는 운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을 하는 것이 더 어울 것으로 생각된다. 운과 같이 ‘천만 다행이다.’라는 말로 상대방을 위로하거나 자위를 받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이 뜻밖에 잘 풀린다는 뜻으로 잘 사용하는 ‘천만다행이다.’라는 말은 신자라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정말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팔자’에 관한 말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주 사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 ‘팔자가 좋다.’‘팔자 고쳤다.’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정말 성경 말씀과 정 배치되는 말이다. 신자는 오로지 ‘하나님의 크신 복이다.’라고 하는 것이 더 신앙적이다. ‘관상’에 관한 용어 사용이 신자들 사이에 오가며 ‘넌 관상이 좋아 부자로 살겠다.’는 말을 쉽게 할 때가 많다. 자녀들 입학시험이나 취직시험을 앞두고 점을 보거나 관상을 보는 기독신자들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 간음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천생연분’‘인연’이란 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하는 것이 문제다. 연분과 인연은 불교에서 나온 용어인데 대부분의 기독신자들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 말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로 성립된 것이지 결코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액땜했다.’는 말을 평상시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여 저 분이 기독 신자가 맞나 할 정도로 자주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액땜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다.’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믿음 있는 신자의 모습이 아닐까? ‘자식 낳은 죄로’란 말을 부모가 속이 많이 상할 때에 후회하듯 말하는 것을 기독교인에게서 들을 때가 있다. 친구나 지인들 사이에도 농담이나 장난삼아 말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고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차라리 ‘자식 받은 복’이 아니면 ‘자식 낳은 복’이란 긍정적인 말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옳다. 마지막으로 ‘하늘이 도왔다.’란 말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저건 아닌데.’라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도우셨다.’라고 말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이다. 지금까지 일상생활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말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런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사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분명히 바알을 섬기거나 아세라를 높이는 것이라 생각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 용어를 모르고 습관적으로 사용했다면 부지부식 중에 영적 간음 행위를 자행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제는 우리의 입에서 과감하게 불신앙의 말을 떼어 내어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우리 주님이 정말 기뻐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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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07
  • [안동철 목사] 사육(飼育)과 교육(敎育)
    ‘천당 밑의 분당’이라는 지역에서 사역할 때 일이다. 당시 필자는 어린이 부서를 맡았기에 토요일이면 초등학교 앞에 전도를 나갔다. 그런데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이 무거웠다.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토요일에 마음껏 놀 수 있는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부모가 짜놓은 학원 스케줄에 맞추어 보통 3-4개, 많은 아이들은 5개 이상의 학원을 다녀야만 했다.초기 사역 때의 이 경험은 사육과 교육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차이라고는 ‘사’(飼)와 ‘교’(敎)의 차이인데, 사육과 교육은 너무나 다르지 않은가? 사육은 동물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동물을 키우고, 적정한 시점에 도축을 통해 잡아먹는 것이 사육이다. 그러나 교육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특별히 기독교교육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독교적 가치로 훈련하여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정이 중요하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다. 전도가 되지 않고,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성도’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선교 130년 만에 이런 교회의 침체는 교회지도자들의 탈선과 교회가 세상을 잘 섬기지 못한 이유가 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교육적으로 볼 때 이것은 교회의 위기라기보다 가정의 위기이다. 축소된 교회인 가정이 위기를 맞이하면서 큰 가정인 교회가 힘을 잃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는 영국교회가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영국교회는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인구 100명 중 80명이 교회에 출석하는 소위 기독교 국가였다. 영국의 중심 건물은 교회 건물이었다. 그뿐 아니라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를 통해 중국,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를 통해 인도,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을 통해 아프리카를 선교했고, 조선 땅에 와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 토마스 목사도 영국 출신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인구 100명 당 7.5명만이 교회에 출석할 뿐이다. 교회당 유지가 힘들어 창고나 식당, 술집으로 변화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 2015년 1월 3일)에 의하면 한때 1000명이 넘는 교회당이 스케이트보드 연습장으로 바뀌고, 브리스톨의 성 바울 교회는 서커스양성소로 바뀌었다고 보고한다. 학자들에 의하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말씀의 소중한 가치를 가르치기보다 세상의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실이 암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 답이 가정에 있다. 가정에서 자녀를 사육하지 않고 교육해야 한다. 좋은 음식을 주고, 좋은 학원에 보내고, 좋은 선생을 붙여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가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있는 불쌍한 민족이지만 바로 유대인들이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이들은 세계 인구의 0.2%밖에 되지 않는 민족이다. 그런데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을 자랑하는 하바드대학의 2만 명의 학생 중 유대인의 비율이 30%라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의 22%가 유대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유대인 어머니에게 있다. 유대인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쉐마본문으로 알려진 신명기 6장 4-9절을 늘 읽어준다고 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자녀의 침실을 지켜주고, 그 시간에 하루 중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한다. 그리고는 성경을 읽어준다. 금요일 저녁이면 가족 수만큼 등불을 켜서는 아이들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런 양육과 돌봄의 교육이 결국 자녀들을 지혜롭게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들에게는 없는 복음이 있지 않은가? 세상의 방식으로 사육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녀들을 교육한다면 다시 일어서는 희망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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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24
  • [탁지일 교수] 유감(遺憾)
    이단연구를 하면서 늘 궁금한 점이 하나있다.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안락하고 안전한 교회와 가정에 머무는 편이 이득일 것 같은데, 왜 굳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하고) 불편하고 불안전한 이단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확실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도 졸업하고, (부자가 되기는 어려워도) 직장도 계속 다니고, (그다지 만족스럽거나 행복하지는 않아도) 가정에 남아있으면,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학업과 직업과 가정을 단호하게 팽개치고 스스로 이단에 찾고, 그 안에서 고집스럽게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명분이 이런 불합리한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미혹의 기술’은 둘째치고라도, 혹시 우리 안에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들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하나, 교회지도자들의 비상식적이고 부정직한 모습이, 상식적이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에게로 내모는 것은 아닐까? 겉으로는 거룩한 목소리와 점잖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스스로를 노출하지만, 속으로는 명예와 이권에 연연하며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을 ‘연합’으로 미화하고 합리화하면서, 세속정치인 못지않은 눈속임과 술수에 능수능란한 교회정치세력들의 모습이 싫어, 차라리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이단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를 원하는 마음에 이단을 찾는 것이 아닐까? 둘, 아무리 노력해도 소위 흙수저밖에 잡을 수 없는 (불평등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하루하루 겪으면서) 주어진 운명을 천지개벽하듯 바꾸고 싶은 욕망이 이단에게 향하는 것은 아닐까? 청년실업문제가 고통스럽다고 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사회지도자들이 가득하고, 청년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재빠른 손익계산으로 자기 잇속만 차리는데 능숙한 정치인들이 판치는 세상을, 한 번에 뒤집어 바꿔버리고 싶은 열망이 청년들로 하여금 이단을 찾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셋, 밖으로는 평안하고 평온한 집으로 비춰지지만, 실제로는 통제와 차별과 폭력과 무료함이 곳곳에 숨어있는 집이라면, 그래서 하루하루 탈출을 모색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들이 있다면, 그러던 중 집에서 결코 느끼지 못하는 정과 돌봄을 이단단체 안에서 경험하고, 차갑고 괴로운 집을 떠나 따뜻하고 푸근한 이단의 품을 찾는 이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정통교회와 가정에서 불편하지만 안전하게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설령 이단이더라도 잠시잠깐이라도 행복과 따뜻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 나을까? (물론 평온한 가정을 파괴하는 이단들의 문제가 더 크다.) 이단이 문제라면, 교회가 답이라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이단 피해가 문제라면, 가정 회복이 답이라는 믿음에도 변함은 없다. 2천년 교회역사에서, 이단은 예외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해왔지만,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단 한 차례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왔던 것도 분명히 기억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이단들에 대한 최후의 승리는 우리 주님의 것이라는 점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개혁(장로)교회를 바라보며, 그렇다고 ‘거짓의 장막’ 신천지에도 속할 수 없고, ‘종말을 팔아 장사하는’ 하나님의교회에도 속할 수 없고, ‘이율배반’의 구원파에도 속할 수 없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초상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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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1
  • [김양현 목사] 버니 신드롬(Bernie Syndrome)에 대한 단상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열풍이 심상치 않다. 그의 이름이 미국 정치의 핵으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연일 그의 이름을 외치고, feel the bern(버니를 느끼라)이라는 구호가 회자된다. 그는 누구이길래 이렇게 뜨거운가? 버니 샌더스는 현재 미국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강력한 상대자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Rodham Clinton)과 함께 경합을 벌이고 있다. 작년 미국 대선 후보로 등록할 즈음 그의 지지율은 겨우 4%였다. 현재 그는 51%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힐러리 클린턴과 경합세를 보이고 있다. 1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보기엔 기적에 가깝다. 그의 성공의 이유는 무엇일까? 버니는 1941년 브룩클린에서 유대계 폴란드 이민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브룩클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을 졸업했다. 시카고 대학 재학 당시 흑인 인권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는 1981년 버몬트 주 벌링턴 시장이 될 때까지 4차례의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그의 지지율은 고작 2% 안팎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기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무소속으로 1981년 작은 도시 벌링턴의 시장이 되었고 시민들은 그를 4선의 시장으로 지지했다. 이후 버몬트 주 하원의원으로 8선, 유일한 무소속 상원의원으로 두 번째 회기를 보내고 있다. 무소속 상원의원으로 무명에 가까웠던 버니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 것은 2010년 상원에서 진행한 8시간 35분의 연설이었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퇴장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연설을 감행했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버니가 8시간이 넘는 연설을 하면서 외친 주요 내용은 미국의 현실에 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미국 월가의 부도덕과 탐욕을 지적했다. 미국 인구의 1%가 1억3천만 명의 재산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명백한 부도덕이며, 부자들에 대한 감세는 옳지 않다는 것을 외치고 있다. 월가의 수익에 대하여 정당한 세금만 매겨도, 고질적인 문제인 전 국민 의료보험 확대, 대학생들의 수업료 해결, 가난한 이주민들의 주거 문제 해결, 최저생계비 해결이 가능하다고 외치고 있다. 물론 정확한 데이터와 논리로 주장하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고 있다. 버니 신드롬을 보면서 몇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우선 일관성이다. 버니는 어느 날 혜성같이 나타난 사람이 아니다. 정치에 처음 발을 내딛은 40여 년 전부터 현재까지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30여 년 간의 정치적 발언을 담은 영상을 보면 그가 동일한 메시지를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기 소신에 따른 발언을 해 왔다. 40여 년 간의 광야 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람이고 그 광야의 시련이 그를 연단시켰다. 모세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또 하나는 그의 정치적 스탠스다. 그는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섰다. 가난한 자, 이주민, 유색인,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정치를 해 왔다. 그는 정치가 무엇이며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의 의정활동은 지역구를 돌아보며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그 진심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선지자들이 외쳤던 정의와 공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누구보다 헌신적이다. 사람들이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버니 신드롬을 통해 나는 교회를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는 버니와 같은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교회가 부흥하던 시절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던 때다. 복음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전해졌다. 세례 요한의 가르침대로, 빵을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옷이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나눠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그들의 편에 설 때 사람들은 교회로 다가왔다.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살아내셨던 삶에 다름 아니다. 오늘 교회가 버니 신드롬을 읽어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람들이 왜 그에게 열광하는지 깨닫는 지점에 교회가 할 일의 힌트가 있지 않을까? 아무쪼록 詩를 읽고 또한 時를 읽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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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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