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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문목사] 나에게 연민을 느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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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저녁이 되면 목회자는 탈진을 경험합니다. 많은 시간 공들여 준비한 말씀을 한번에 쏟아 부은 후에 찾아오는 허탈한 감정인지도, 아니면 채 여물지 못한 말들을 주님의 이름을 빌어 쏟아낸 후에 찾아오는 정직한 가책인지도 모릅니다. 그 허탈과 가책의 시간이 이제는 제법 되어 무디어질 때도 되었건만, 오히려 그 석연치 않은 감정은 잿빛 만성으로 굳어져가는 느낌입니다. 새벽 예배를 마친 어느 날 동백섬을 따라 걷다가 문득 셈을 해보았습니다. “1년이 52주이니까, 주일 설교 52번, 찬양예배 52번, 수요예배 52번, 심야기도회 52번, 새벽기도회 350번 정도, 그러면 1년에 설교를 몇 번 하는 거지? 그리고 목회를 16년 했으니까 모두 합치면?” 소스라친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설교가 내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지만, 그렇다고 모세처럼 시내산 정상에 올라가 실시간으로 받아 적은 말씀이 아닌 바에야 그 설교에 목회자 개인의 신앙적 혹은 신학적 소견이 배제될 리 만무합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많은 설교를 쏟아냈을까?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설교를 해내야 할까?” 얕고 지저분한 우물과 그 바닥에 흙먼지 앙금처럼 가라앉은 참상이 흔들리는 필름처럼 지나갔습니다.
4세기의 에바그리우스(Evagrios)는 말했습니다. “수도자는 모든 것에서 떠난 사람이며 동시에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다.” 물론 세속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 있으며, 교우들과 부대껴 살아야 하는 목회자로서 수도자들에게나 있을법한 신비(神秘)를 기준 삼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잔인한 일인지 압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따로 수도자를 양산해내지 못하는 개신교(Protestant)의 안타까운 현실에서는 목회자에게서 수도자로서의 삶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에서 떠나 있지도 못하고, 그래서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내가" 그동안 그렇게 많은 설교를 쏟아놓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섬뜩한 일이며, 하나님께 미안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늘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살았던 헤지카스트(hesychast) 아르세니우스(Arsenius)는 자신의 책 「교부의 생애(Lives of the Father)에서 자신을 침묵의 세계로 들어가 은수자「隱修者(hermit)」가 되게 만들었던 콘스탄티노플 궁전에서의 하나님과 단 한 번의 대화를 소개합니다. “주여,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사람들 곁에서 떠나거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 성찰이 담겨있지 않은 잡다하고 분주한 만남들보다, 한적한 골방을 찾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정직한 시선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해 기운 교회당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보면, 지난하게 반복되어온 묵은 고민도 덩달아 깊어집니다. 모든 것에서 떠나 있지 못한 까닭에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고 있지도 못한, 즉 잡다하고 지루한 집착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게 하며 그런 가운데 주일이 다가오면 매번 조급해하고, 허겁지겁 성경을 넘기며, 어설프게 파악한 몇몇 구절을 조합해 건조한 설교를 만들어내는 삶에 이제는 스스로 연민(憐憫)을 느낍니다. 잠시라도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안에 독방을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했으니, 고독이 지배하는 곳, 그래서 하나님만이 바라보이는 곳을 찾아 깊은 침묵에 잠겨보려 합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 흘러나와 성령을 통하여 내 마음을 적시는 말씀으로서만 저와 교우들은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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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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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대연 목사] 한국교회는 이 민족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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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대연 목사(마산교회 담임)
우리는 6.25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 집단이 비열하고도 잔악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참혹한 파탄을 우리 민족에 안겨주었다. 국군과 민간인 56만 1천여명이 목숨을 잃는 등 전 국토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왜 이토록 많은 인명의 손실과 재산의 피해가 나기까지 사전에 막을 수 없었는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었더라면 이런 엄청난 결과는 없었을 것인데..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과연 당시 나라 지도자들은 누구를 위한 파수꾼이었나?
에스겔 3장의 배경을 보면 에스겔이 비슷한 후회스런 고백을 하고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생활한 지 12년째가 되던 해에 조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완전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지난날 자신이 민족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사실 에스겔이 괴로워해야할 이유가 무엇인가? 12년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침략당할 때 이스라엘의 경비라도 맡았단 말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씀으로 이끄는 선지자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책임이라며 마음 아파했다.
하나님께서도 에스겔 선지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삼으셨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3:7)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볼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파수꾼이라 말하지 아니한 점이다. 정치가들, 군인들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이라 말하지 아니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겔3:7)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간케 하고, 모든 삶의 지혜가 있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파수꾼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받기 때문이다. 하늘의 지혜를 좇아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에스겔이 가진 아쉬움을 가슴깊이 영원히 간직하고 살아야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깨어 기도하며 소금과 빛으로 존절히 살았더라면 오늘같은 참담한 현실을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이렇게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심히 통곡하며 가슴 아파 해야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파수꾼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명을 다하지만 결국 자신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겔3:19)
단12:3의 말씀은 교훈한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 시대를 밝히 보고 파수꾼의 사명을 어느때보다 잘 감당하여 더 빛나고 더 영화롭게 되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하자.
우리가 무너지면 이 나라 이 민족도 끝장이다는 사실을 항시 기억하자. 우리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하다. 게으르거나 나태하면 무서운 책임이 뒤따를 것을 명심하자. 힘을 내자.
한국교회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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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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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호 목사]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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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몰입한 이데올로거의 입장을 탈피하면 보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이다. 당신의 머리에 파고든 사탄의 발톱을 뽑아라.1.하나님의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나, 성경적 옳음과 기독교적 바름을 실천하고 순종하는 사람, 즉 "교회 된 삶" 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지 세속 정부와 세상 정치세력에게는 정치적인 존재로 보인다.2.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로 정치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원리와 하나님나라의 통치 본질이 "불의에 대한 야단치기" 이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제국 로마의 정치세력에게 귀챦거나 두려운 세력이었다.3.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랬다. 예수께서 로마황제 가이사의 정치를 디테일하게 비판했거나 분봉왕 헤롯의 정치에 대해 분야별로 간섭하고 관여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보았고 동시에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4. 세속정부와 세상 정치는 교회와 교회된 그리스도인들과 긴장관계를 갖는다. 교회란 존재 자체로 세속정부에 대해서 디_스트레스로 또 어떤 경우에는 유_스트레스로 작동한다. 그게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떤 이데올로기든 마찬가지다.5. 오늘날 희한한 "기독교 종교인" 들이 보인다. 아니 그들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설쳐대는 역겨운 모습이 보인다. 그들은 강력하게 "기독교인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세력이라고 편을 갈라버린다.6. 이 말은 "자신이 계시의존적 복음주의자가 아니라 맘몬을 숭배하기 위한 자본주의자" 라고 스스로 증언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본주의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다른 이데올로기에 비해 우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그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부치기 때문에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간다.7. 이데올로기가 가진 문제점들에 대해 바른 말, 쓴소리를 하는 사람을 곧바로 자본주의자니 사회주의자니 공산주의자니 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거로 몰아 부친다면 이데올로기에 과 몰입한 편향주의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결과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기독을 말하는 유사종교인임을 고백하는 셈이다.8. 복음에 대한 단순한 생각, 복음에 대한 단순 무식한 생각과 과몰입한 이데올로거인 자신의 예민한 공격성과 결합되어 버린 나머지 참된 기독자들을 빨갱이 또는 종북좌파로 몰아 붙이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부인한다. 기독교를 자본주의 신봉종교로 끌어내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보거나 반성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9. 그들을 판별하여 정의하자면 "맘몬숭배를 위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성령과 교회를 소비하고 싶은 유사 기독교인" 이 되어 버렸을 뿐이다. 복음은 어떤 이데올로기든 그것이 가진 문제점이나 잘못에 대하여 심각한 긴장관계를 갖는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그렇다.10. 자본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공격한다고 공산주의자가 되거나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에게 협조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가진 문제점을 공격한다고 그가 자본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그가 땅에 발을 붙이고 하늘을 걷는 천상시민이면서 동시에 땅의 백성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11. 그가 계시의존적 복음에 사로잡힌 복음주의자이거나 개혁주의자라면, 이른바 예수와 부활과 성령과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든 비판적 또는 비평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복음을 복음되게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면 그길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그것들로 부터 성도를 구별되게 살도록 돕는 역할이 교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12. 당신의 머리에 장착한 사탄의 발톱을 뽑으라. 상대를 악마화 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거는 그가 충성하는 이데올로기 숭배자, 또는 맘몬숭배자, 자기 숭배자일 뿐, 예수를 따르는 제자이거나 복음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 할 수 있는 참된 기독자가 아니다. 당신이 만일 그렇다면 당신도 신천지같은 이단의 무리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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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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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규 목사] 농촌교회, 도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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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상규 목사(함양 상내백교회 담임)
농촌교회에 온 지 만1년이 지났다. 그동안 대전, 광주, 창원, 김해에서 목회를 하다가 농촌교회에서의 사역은 첫 경험인 것이다. 아직 농촌교회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느끼는 바들이 있다. 도시교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지역의 선후배 목사님들을 만나며 간접적으로 경험을 하고 있다. 농촌교회의 현주소를 살펴보고, 도시교회와 농촌교회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 서로 협력하여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할 때이다.
농촌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1년을 지나도 애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농촌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최근 이곳 함양 서하초등학교가 뉴스의 초점이 되었었다. 예전에는 학생들도 많고 모범학교였는데, 현재 전교생 14명 중, 올 해 4명이 졸업예정이어서 폐교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학생유치에 나섰던 것이다. 학교에 입학이나 전학을 오면 부모의 일자리를 안내해 주고, 년 2백만 원의 사용료만 내면 주택을 제공해 주고, 학생들은 년1회 해외연수를 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한국고용정보원이 분석한 소멸위험도시 1위 지역이 경북 의성이다. 의성의 인구는 예전에 230,000명인 때도 있었는데, 작년 11월 기준 52,606명이다. 이 중 39.8%인 20,947명이 65세 이상의 노인이라는 것이다.
농촌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자연스럽게 농촌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특수한 곳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농촌교회의 교인수 감소와 고령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이렇게 교인수가 줄어들고, 고령화 되어 가는 농촌교회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감당할 일꾼이 없으니 교역자가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예배 인도, 설교, 기도회 인도, 심방, 운행, 마을행사 참가, 농번기 일손 돕기 등등을 한다. 그러다보니 목회자의 탈진이 오기도 한다. 사모도 나서서 일하지 않을 수 없고, 일하다 보니 갈등 상황과 탈진을 만나기도 한다. 재정적으로도 자립적으로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교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미자립 농촌교회는 도시 교회들에 손을 벌리며 후원을 받고 있다. 목회자의 인맥에 따라서 후원을 많이 받아 재정적으로 어려움 없이 사역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턱없이 부족하다.
각 교단에는 농어촌선교회와 같은 기구들이 있지만 농촌교회의 문제를 풀기에는 역부족이다. 도시의 교회들이 농촌교회를 품고 매월 후원금을 보내지만 그것도 편차가 심하고, 그나마 대부분의 농촌교회들에게는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농촌교회는 도시교회의 못자리교회이고, 부모가 있는 고향교회이기도 하다. 각 교단은 농촌교회의 목회자들이 생활비에 매여 살아가지 않도록 목회자 평균 생활비 지급 등의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도시교회는 농촌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성도들에게 고취시키고, 함께 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방법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매년 의료봉사, 농촌봉사활동 등을 꾸준히 하는 교회들이 있다. 봉사활동 자체에 의미를 두지 말고, 농촌교회의 필요를 세심히 살피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도록 머리를 맞대어야 할 것이다. 부산의 모 대형교회는 절기 때에 교인들을 나누어 도시나 농촌의 미자립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고 있다. 어느 교회는 직분자 임직식에서 임직자 가정을 적정 인원으로 나누어 미자립교회로 파송하였다는 기사를 접한 일도 있다. 가서 6개월을 섬기고, 돌아와도 되고, 그 교회를 섬겨 되도록 하였다는 것이었다. “거룩한 공교회와...믿습니다.”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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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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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헌목사] 목사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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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고등학교의 9월은 대학교 입학 수시 전형으로 인해 고3을 맡은 선생님들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까지 아주 분주한 기간입니다. 저도 고등학교에 근무하다보니 직간접적으로 학생들의 입시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서울 상위권 대학진학을 위해 준비하는 제자 A가 자기소개서를 적어서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자기소개서 지도를 요청해 온 것입니다. 이 일은 통상 늘 하던 일인지라 기꺼이 지도를 해주었습니다.
전국의 대다수 대학들의 자기소개서 질문은 비슷비슷 합니다. 보통 4가지 질문이 주어집니다. 고등학교 3년 과정동안 학생 스스로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역량에 관한 것, 고등학교 3년 과정 중 학교에서 의미가 있었던 활동에 관한 것, 봉사와 나눔 그리고 갈등해소를 위해 기울인 노력에 관한 사례, 마지막은 전공을 위해 기울인 노력과 진학 후 학업계획에 관한 질문들입니다.
A는 자기소개서를 거의 완벽하게 잘 적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항목에서 문제를 발견했습니다. 고등학교 3년동안 본인에게 의미가 있었던 학교 활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본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A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을 해놓았습니다. “나는 예배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대략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학교에 올 때에는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학생이었는데, 우리 학교에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배 때마다 앞에 나와서 찬양팀으로 섬겼고, 스스로 기독학생임을 드러내면서 누구보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기에 자신의 고등학교 과정 중 가장 의미가 있었던 활동은 종교수업 시간과 학교에서의 예배라고 적어놓은 것입니다.
저는 A에게 2번 질문에 대한 내용을 수정하라고 했습니다. A가 가려는 학교가 신학대학이나, 기독교대학이 아니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학 중 하나인데 이런 식으로 쓰는 것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A가 저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목사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제가 만약 대학을 떨어진다면 2번 항목을 잘 못 적어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 실력이 모자라서 떨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사람의 끈이 아니라 하나님 붙들라고 하셨잖요. 그러니 걱정마셔요. 자기소개서는 정직하게 쓰는 겁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더 이상 제가 이 부분을 손댈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자의 이 마음을 듣고 나니 더 기도가 간절히 되었습니다.
미션스쿨은 이런 곳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런 미션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학교에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주변 학교의 기독교사들에게 학원 복음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없는지, 도울 것은 없는지 주변을 돌아봐주셨으면 합니다.
학교는 다음세대를 위한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학교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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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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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만 목사] 하나님이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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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만 목사(양무리교회 담임)
복음화율 100%였던 태초의 에덴은 전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아담이나 노아의 가정 역시 전도나 선교가 요구되는 세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족, 민족)가 점점 주류가 되어갔고, 급기야 하나님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점차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아는 자는 역사(사회)에서 점차 소수로 전락했다. 우리 시대처럼 말이다.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이처럼 무너진 것이다. 그렇다면 절대 다수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시대를 다시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시대로 되돌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도 모른다.
교회생태계, 소수종교로의 시그널
구약교회(광야교회, 행7:38)로부터 현대까지 기독교 역사를 놓고 볼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점차 소수가 되어가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과연 우리는 아담과 노아의 후손들이 살아가던 시대가 그랬듯 점차 더 깊어져가는 불신(세속) 사회에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신앙을 지키고, 또한 그것을 다음세대에게 과연 전수할 수 있을까?
기독교 미래학자들은 대략 한 세대(30년)가 지나기 전에 한국 기독교가 500만명 이하가 될 것이라 진단한다. 이는 서구 기독교가 그러했듯이 이제 우리도 텅 빈 예배당과 교회(건물) 유지도 벅찬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거기다가 국가가 복지를 주도하는 복지국가(유럽식 사회주의)를 유지하고 확대해 간다면 사회적 교회로서의 역할은 안팎으로 점점 축소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진짜 고민은 과연 후기 기독교사회에서도 여전히 교회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살아있는 기독교 성태계일까.
한국교회, 다시 길을 묻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때,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원형경기장 안에 사자의 밥으로 끌려왔다. 그런데 며칠을 굶은 사자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서 잡아먹기를 포기한다. 이때 황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저들은 누구인가?”라고 묻고, 혼이 나간 신하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황제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이렇듯 세계를 정복한 로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 앞에서 그만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에 의해 하나님께로 정복되어 갔고, 십자가는 로마를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되었다.
하나님은 대한민국에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없을 때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꼭 많아야, 커야, 넘쳐야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신학에 길들여진 것이 아닐까.
베드로는 거대한 예루살렘교회를 만들지 않았고, 하나님은 바울이 초대형 안디옥교회를 만들기를 기대하지 않으셨다. 이런 플랜은 하나님과 사도행전교회에 없다. 초대교회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인 가정교회였으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능력과 야성을 잃지 않았으며, 세상을 향해 생명을 건 전쟁을 치르는 날마다의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로 살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 사자의 밥이 되는 걸 영광스러운 하늘의 상급으로 생각했고,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는 그런 자로 사는 것을 결연히 거부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에 사로잡힌 그런 사람들로 세워져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바로 그 교회를 꿈꾸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종인가. 나는 잘 죽기 위해 오늘을 복음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인가. 나는 이 세상을 우리 주님의 눈과 마음과 울림을 가지고 읽어내고 또 대면하고 있는가. 나는 정말 소명자인가. 나는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나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언행(言行)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이 세우시고 말씀하신 바로 그 교회가 내 안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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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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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학 목사] 포스트 뽀로로, 펭귄 예수인 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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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포스트 뽀로로’를 꿈꾸며 남극에서 헤엄쳐 ‘BTS(방탄소년단)의 나라’ 한국까지 온 펭귄, ‘어른들의 뽀통령’인 펭수(Pengsoo, 10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뽀로로 선배를 이기기 위해 EBS에 온 겁니다.” 등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동요 대신 대중가요가 깔리고, 희로애락을 적극 표현하고, 인터넷 신조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펭수가 레트로(retro)현상을 가미한 B급 문화로 지금 대중문화를 유쾌하게 만듭니다.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1위는 1인 크리에이터지만, 펭수의 목표는 방탄소년단(BTS)처럼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펭수의 목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펭수의 인기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 직설화법입니다. 펭수는 어른들의 점잖은 척함, 근엄함, 가식, 꼰대질을 그 자리에서 막말급으로 지릅니다. ‘조국사태’에서 드러난(물론, 더 큰 문제는 검찰입니다만) 불공정, 그리고 최근 기성세대의 갑질(나 때는~)에 예민한 2030세대의 감성에 펭수는 속 시원함을 던져줍니다.
둘째, 상명하복에서 자유롭습니다. 탈권위주의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펭수는 선배인 뚝딱이가 충고를 하려고 하자, 이렇게 말합니다. “뚝딱이 선배, 잔소리 하지 마세요. 저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속인 EBS ‘김명중 사장’ 이름도 스스럼없이 부릅니다. 펭수는 이렇게 노래 부릅니다. “참치는 비싸, 비싸면 못 먹어, 못 먹을 땐 김명중!”
셋째, 유희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펭수의 인간적인 매력입니다.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주철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막 나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선량함을 지키는 매력적인 캐릭터다.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있던 2030에게 내 주변에 이런 친구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다.” 그렇습니다. 정시냐, 수시냐? ‘조국대전’ 이후 이제 전쟁터는 또 다시 입시로 바뀌었습니다. 그 병사들인 10대, 그리고 취업과 생존으로 절망하는 2030세대에게 펭수는 전쟁터의 위생병으로, 혹은 친구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넷째, 모험심입니다.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인 펭수의 인기 배경에 관한 주철환 교수는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은 옛말이다. 이젠 자유롭게 말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덕목인 시대, 단정한 모범생의 시대가 아니라, 단순한 모험생(연습생)의 시대이다.” 파격을 좋아하는 2030 세대의 감정을 저격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을 찾아서 자연스럽게 모험하는 펭수를 향하여 젊은 세대가 손을 들어 열광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살아있는 캐릭터이기에 확장 가능성이 있습니다. 키 큰 배우가 목소리와 더불어 연기하는 펭수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까요? 더욱이 무대본, 무연출의 예측 불가능한 전개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이러한 펭수가 기성세대를 꼬집고 기득권의 카르텔을 해체하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을까요? 다른 세상의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펭수의 의상이나 언행 등이 저급한 B급 문화 콘텐츠라고 볼 수 있지만, 가식을 들춰내는 통쾌함, ‘근데 뭐가 어때서’라는 여유로운 상쾌함, 그리고 권위에 대한 기발한 도전, 펭수가 지금 우리 시대 문화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펭수의 말에 다른 세상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펭수를 통해 펭귄식 예수님의 형상을 엿보게 됩니다.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른이고 어린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면 되는 거예요.” 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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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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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신목사] 서열(序列)의 허구(虛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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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육계에서는 서열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서열을 없앤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은 줄 세우기 서열문화에 길들어 있다. 하루아침에 힘 있는 사람이 없애라고 한다고 없어질 것도 아니다. 그렇게 쉽게 서열문화가 바뀌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모든 공동체와 집단에는 뼛속까지 서열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줄을 세우는 문화가 일상이 되어 버린 우리 사회현상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첫 학교 입학을 하면 선생님께서 운동장에서 한 줄로 키대로 세웠다. 그리고 각자의 번호가 주어지고 책상 위치도 이 번호대로 앉혔다. 그러다 보니 조숙하거나 생일이 빠르거나 유전자적으로 덩치가 큰 녀석들이 뒷번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뒷줄 아이들이 교실을 장악하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성적순으로 힘이 나뉜다. 성적이 좋은 친구가 선생님이 배경이 되니 주먹도 맥을 못 추게 된다. 그러다가 머리가 커지고 어느덧 본격적으로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이 시작되면 주먹 순서나 성적순이 아닌 연공서열(年功序列)로 사회생활이 재편된다. 결국 이런 서열은 절친들과의 서열이 서서히 재산순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변화되는 서열은 나이가 들면 또 한 번 바뀐다. 건강서열이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어도 건강이 무너지면 서열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래서 온통 건강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건강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서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후의 서열이 기다리고 있다. 사후의 서열은 2진법으로 진행된다. O(천국)과 X(지옥)이다. 이 사후 서열은 생전에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눅13:30) 인간들이 만들 놓은 서열은 하나님 앞에서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장교후보생으로 훈련 받을 때에 일어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구대장이 40명 구대원을 얼차려 시키려고 완전군장으로 하고 연병장에 집합을 시켰었다. 우왕좌왕하는 훈련생들에게 ‘후방 전봇대 선착순’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5번째까지 열외’하고는 다시 선착순을 시킨다. 나의 한계에 다되었을 때였다. 세 번째도 5번째에 들지 못했었는데 짓궂은 구대장의 구령은 ‘뒤로 돌았!’ 하고는 ‘뒤로 번호’ 끝에서 5번째인 나까지 끊고 다시 선착순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구대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은혜로 열외가 되었었다. 그렇다 구대장이 ‘뒤로 돌았!’하면 서열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뒤로 돌았!’하는 날에는 이 세상에서의 서열은 의미가 없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다.
기독교(인)[그리스도교(인)]는 서열이 존재한다. 아니 종교라는 시스템 가운데 있으니 서열이 필연적으로 존재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서열문화가 자리 잡고 있어서 직무와 직분이 계급으로 여겨지는 타락한 군상들이 되고 만 것이다.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기독(인)[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관계로서의 유기적 관계를 회복하는 부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실된 기독인이라면 서열을 넘어 서는 십자가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는 무서열(無序列)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이 땅에서의 서열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깊이 깨달아서 탈 서열화로 교회에서 계급을 타파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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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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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섭 교수] 시간을 묻고, 장소로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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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중반부에는 재미있고도 유명한 대화가 소개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할지를 묻는다. 그런데 그 대답은 한 마디로 동문서답(東問西答)이다. 예수님은 시기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덧붙여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고 설명하시면서 그 신비한 답변으로 그들의 질문에 종지부를 찍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우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시간(when)에 대한 질문을 공간(here, there)으로 답하신 것에 주목한다. 바리새인들은 전통적인 시간의 축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을 초월해서 임하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하시는 듯하다. 본디 그 분의 나라는 시간에 구애됨이 없으셨다. 오히려 그 분은 ‘시간’보다는 ‘장소’와 ‘공간’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다. ‘때’는 언젠가 이를 것이다. 노아의 ‘때’처럼, 롯의 ‘때’처럼 인자의 ‘때’도 분명히 이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리고 그들에게는 ‘때’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주님의 관점은 시간을 넘어서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물리적인’ 공간에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더라도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하신다. 그리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결국은 사람간의 ‘관계’속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신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안에’라고 번역된 헬라어(ἐντὸς)는 장소적인 의미로 ‘안에’(within, inside)로 번역될 수 있으나 ‘손닿는 곳에’, ‘가까이에’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고, 나아가 ‘관계’적인 용어로서 ‘가운데’(midst)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내면적인 해탈의 상태가 아니라, 사람들 간의 실재적인 관계 속에서 역동적으로 구현되는 것임을 잘 암시해주고 있다. 혹시 우리가 저 너머 어딘 가만을 계속 응시한다면, 또한 여기저기로 향방 없이 목적지를 찾아 방황한다면 우린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린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경험해야 한다. 그러기에 천국(天國)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나라(神國)로 다시 되새김되어져야 하고, 우리의 시선은 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져야 할 것이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그 도래지가 ‘너희’라는 것이다. 너희가 누군가? 바로 질문을 던진 사람들, 대답의 수신자들인 ‘바리새인’이 아닌가.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바로 그들의 코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하다니. 이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주고 있다. 이는 우리의 관점이 ‘우리’로부터 ‘그들’에게로 돌려져야 하고, 우리가 ‘그들’ 가운데, ‘그들’ 속으로 더 많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우린 현재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그들의 사태에 더욱 깊이 그리고 광범위하게 관계해야 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은 결코 잘 난체, 아는 체 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섬기고 나누고 목숨을 바치는 관계의 방식이어야 하며, 향기를 풍기며 빛을 발하는 존재로서의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대화와 설명의 끝을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살리리라’는 엄청난 부담으로 마무리하신다. 그 표현이 자신의 목숨만 보존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생명, 나아가 공동체를 구원하는 우리 각자의 거룩한 사역까지 포함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들이 물었고, 주님이 답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시간을 초월하고, 장소를 뛰어넘어 우리와 그들의 관계 속에서 임하게 될 것을, 아니 이미 임했음을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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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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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철목사] 생명을 살리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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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필자가 사역하는 교회 새벽기도 때 소란한 일이 있었다. 한 낯선 남성이 새벽기도회가 끝날 때까지 들어오는 문 앞 끝자리에 앉아서는 등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불이 꺼지고 개인기도를 시작하자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거친 말과 심한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기도를 중단하고 나가 보니 교회에 가끔 오는 50대의 알코올중독자 형제였다. 이 형제와 새가족실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님이 제게 “그 형제의 집으로 가서 기도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셨다. 솔직히 무슨 일이 닥칠지 몰라 피하려고 했지만 주님의 마음이 너무 분명해 그 형제를 따라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형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때로는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잡혀가기도 했다고 했다. 이런 세상과 사람이 싫어 다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다고도 했다. 솔직히 두려웠다.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형제의 방은 알코올이 주인 된 비참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한 사람 겨우 누울 수 있는 방에는 온갖 쓰레기와 술병이 널려져 있었고, 코를 뜰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가득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는 빨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필자에게 월드비전의 세계시민학교장인 한비야 자매가 쓴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의 내용을 생각나게 했다.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 주었다.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했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이것이 내 마음이다.”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쓰레기와 같은 인생’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눈으로 본다면 그 형제도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귀한 인생’임을 주님이 보여주셨다. 그리고 필자는 그 악취 나는 방에서 형제의 몸에 안수하며 그 형제를 위해 기도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저와 그 분에게 큰 은혜를 주셨다. 형제가 갑자기 흐느끼며 “목사님, 저 같은 인간도 희망이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아무 말 않고 악취가 진동하는 그 형제를 안아주었다.그리고는 “제가 형제님의 친구가 되어 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집을 나와 교회로 돌아가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사는 그 형제를 돕고,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 솔직히 내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과 관계없이 분명한 사실은 이런 잃어버린 한 사람을 위해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은 이런 사람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주변을 둘러본다. 절망적 상황이 우리를 덮고 있다. 주님이 피값을 주고 산 존귀한 형제자매들을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정죄한다. 내가 조금 아는 지식과 정보로 모든 것을 아는 양 함부로 판단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입에서 생명을 살리는 말과 복음과 하나님 나라 이야기보다 세상의 이야기들과 죽음의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교회의 모판과 같은 다음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가나안 교인’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그러나 하나님 나라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예수쟁이는 달라야 한다. 주님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을 안아주고, 살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죽음을 노래하지 말고 생명을 노래해야 한다. 갈등의 증폭자가 되기보다 갈등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이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 성도가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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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