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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시섭 교수] 4차 산업혁명시대속의 교회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세상과 동떨어져 ‘자연인’으로 살 수 없는 우리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 작은 휴대폰을 매만지며, 모든 삶의 순간들을 그것에 몰입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할 때 마다 우린 사회발전에 종속된 개인에 불과함을 느낀다. 얼마 전 만난 청년 한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한 고민은 그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공통된 고민이 아닐까 한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 이질적인 가치관의 압도 등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고통과 괴리감은 그저 우리가 감당해야할 고난이며 거쳐 가야 할 과정인가.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세상과의 단절과 소외의 산물인가. 이런 오랜 세계관적인 고민들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채 우린 ‘4차 산업혁명시대’(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를 맞았다.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처음 언급되었다는 이 표현은 불과 1년이 지난 지금 온 세상의 화두가 되어 있다.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시대를 연 3차 산업혁명(제1차 정보혁명)은 이제 ‘융합’과 ‘연결’이라는 키워드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해가고 있다. 이른바 제2차 정보혁명의 시작이고, ‘초연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초연결(hyper-connection, 超連結)은 자연스럽게 빅 데이터(Big Data)의 축적을 가능케 하고 이는 이른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초지능’(super-intelligence, 超知能)을 등장케 했다. 온 사회를 뒤덮고 있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메아리가 우리 성도들의 귀에 울려 퍼지고 있지만 교회는 각 산업혁명의 시기마다 그랬던 것처럼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아닌가. 초대교회의 외침이, 종교개혁의 명제들이 ‘원형 그대로만’ 반복되고, ‘너희는 저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론이 오늘 이 자리에서 구현되지 않는 한 우리 교회는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사회와 분리되고 자칫 퇴행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그건 아마도 시대정신과 사회변화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성경의 진리를 그 시대상황에 맞게 새롭게 재편하고 재해석하는 길일 것이다. 교회역사를 돌이켜보면, 플라톤 철학을 교부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스콜라철학으로, 인문주의를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성경에 감춰진 새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었던 과거의 선배들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 시대의 슬로건인 ‘초연결’이라는 개념은 교회내 순환형, 쌍방향의 성도간 교제(communion)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될 것이고, ‘초지능’은 영적지능(faith-inspired intelligence)의 향상을 통한 집단영성의 확대를 이루어줄 것이다. 카톡이나 밴드를 통한 성도간의 나눔, 전문가 평신도에게로 열려진 강단, 직분의 개념을 넘어서 은사중심의 자발적이고 폭 넓은 참여와 의사결정, 토론과 질문을 통한 사회적 이슈의 성경적 해석, 지역사회와 보다 밀착적인 활동의 발굴 등을 통해 지역민들이 들르고 싶은 장소, 이웃들이 머물고 싶은 공간, 사회인들이 공감하는 주제를 공유하는 거점으로 교회가 새롭게 거듭날 수 있게 되리라 생각된다. 진리는 불변이 아니라, 일관성에서 그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 새 포도주가 새 부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 부대가 새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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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28
  • [박철 목사] 예수의 현재성
    교회와 예수그리스도의 관계를 다시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교회는 예수의 무엇이며 또 예수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떤 것인가.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요 예수는 그 머리라 했다. 이 내용은 바울의 글에서 바울의 표현을 빌린 부분이다. 예수의 말씀으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제자의 요구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주는 암시를 기독교가 해석을 해야 하는데 기독교는 예수의 말씀에는 근접을 삼가고, 바울의 형편에도 가까이 가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으니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정면으로 해석하면 교회와 메시아 예수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대속 죄의 의미일 때 신자(교회)의 십자가는 대속 죄의 회답의 십자가이며 복음 선교의 십자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생애의 함축인 십자가로 예수와 신자의 관계를 세웠을 때 혼선이 없는, 아주 투명한 논리가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역사 위에서 고전을 하게 된 것은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씀의 의미(내면의 요구, 상징으로의 문학적 표현 등등)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대서 오는 결핍이 된다. ‘예수 이름으로’는 ‘예수의 예수로’ ‘예수의 자격으로’ ‘예수의 권위로’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예수 이름으로는 ‘예수 인격의 현재’가 동원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 다시 정리하면 ①교회는 예수의 몸 ②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보았다 ③예수 이름으로가 지니는 정상적인 가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마음에 간직하고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현재를 대변하고 대신해야 한다는 당위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현재로까지 교회가 발전(성장)해 주지 않는다면 교회는 역사의 무대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소멸되어 갈 수 있다. 지금 교회가 지닌 도덕적 가치는 제1급에 해당하지 않는다. 인류가 쟁취한 휴머니즘의 요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의 도덕적 성취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선진형 NGO(비정부기구) 들의 Human Story 만큼의 설득을 따라잡지 못하는 수준으로 세상을 더 이상 감동시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골고다가 일회성 사건이 아니고 오늘의 역사의 교회 현장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일어나야 할 사건으로의 십자가는 교회가 보존해야 한다. 교회의 십자가라고 하니까 예배당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그것이거나 목걸이 팔찌용 장식품이거나 가끔씩 속죄한다면서 십자가 틀을 끌고 돌아다니면서 시각성 시위를 하는 그런 따위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희생이요 대속이며 용서이고 대신 살아줌이다. 내가 너를 대신하고, 또 네가 나를 대신한다는 생명의 일체(일치)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이기심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타종교나 세상의 가치들을 경멸해서도 안 된다. 그 이전에 교회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처럼 무덤도 남길 수 없는 존재까지임을 말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의 역사 현장에서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또 그만한 자신감을 가진 품위 있는 기독교(교회)가 가능한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예수와 만남에서 성취하는 것이 교회요 신자(求道者)이다. 세상 종교에서는 가는 곳까지 가는 것이 되지만 예수는 만나야 만나는 것이다. 기독교가 하루 빨리 하늘을 떠나 땅(人間)에 오시는 이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하루 빨리 예수 십자가의 그 현장이어야 하며, 십자가는 교회의 현재에서 영원한 진행형 사건임을 교회가 배워야 하는데, 이 땅의 교회들이 예수 하나 십자가에 메달아 놓고 그걸 쳐다보면서 "예수여! 아프죠, 고통스럽죠!" 해가면서 마치 문지방 위에 메달아 놓은 명태 대가리(미신, 민간 종교 사람들이 만들어 둔 부적과 같은 것) 같은 것이 기독교의 십자가라면 그것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예수의 현재가 바로 너와 나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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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07
  • [가정호 목사] 사랑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 존재자체가 사랑인 사람
    "사랑은 ~~~ 해야 한다" ~을 해야 하고, ~도 해야 하고(고전13장)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랑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나면 그 사랑에 균열이 생기고 심지어 권태가 성장하면 언약도 내팽개친다. 사랑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랑에 실패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의무가 되어 시달리다보면 사랑의 대상을 증오하기까지 한다는데 큰 의문이 있는 것이다. 왜 사랑에 실패할까? 고민을 많이 해보아야 한다. 그게 가정이든, 목양이든, 어떤 관계이든 사랑에 실패하면 그것으로 부터 오는 좌절감과 낙심이 크다. 그런데 '사랑은 ~~해야 한다'는 성경본문을 뒤집어서 보면 이렇다. 오래 참음, 그 자체가 사랑이다. 친절함, 그것이 사랑이다. 시기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자랑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교만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무례히 행치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쉽게 성내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한다면서 수시로 성내는 것은 자기 속임이며 실패하는 사랑 사랑이다. 원한을 품지 않음, 그게 사랑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관계 속에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이렇게 많다. 이런 것들 중 하나 하나 몸에 배어 나타나면 상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을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데...' 하는 강박을 버리고 위에 것들을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런데 그 순종과 실천이 자기 힘으로 절대로 안 된다. 되는 듯 하다가 내 팽개친다. 언제나 실패한다. 그래서 사랑은 오직 성령의 사역이다.1) 어느 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의 연합"이 성숙해지면 사랑의 요소들을 실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스스로 놀란다. '아! 내가 <사랑-사람> 이 되었구나'. <사랑-사람>은 자기의 이성이나 감정으로부터 오는 열정으로는 한계가 있다. 언제나 사랑이 바닥치고 사랑이 기근에 시달린다. 사랑이 집을 잃고 여기저기 헤매면서 노숙한다. 방황하는 사랑은 한없이 슬프다. 그러나 부활의 주를 의존하는 의존성이 원만해지면 비로써 자신이 <사랑-사람>되었음을 보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된다. 그것은 쾌락이다. 실패하지 않는 사랑의 지속성은 하늘이 주시는 쾌락이다. 이 쾌락에 맛을 경험하게 되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이 포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을 떠받들어 승리하게 한다. "사랑의 감정이 없어도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장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성령이 주시는 힘을 의존하여 사랑인 것들,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면 놀랍게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진다. 사랑하면 비로써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의 정서가 자라나는 것이다. -------------------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언약인 새언약의 일꾼에 합당한 자격을 주셨다. 그것은 문자는 죽음을 가져오는 반면,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고후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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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24
  • [김충만 목사] 다윗에게 길을 묻다
    다윗은 그의 70년 생애에서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약관 10대 후반에 예선(豫選)된 왕으로 처음(삼상 16:1-13), 이어 십 수 년이 지난 후 30세에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아 유다지파의 왕으로 7년 반을(삼하 2:1-11), 그리고 세 번째 기름부음을 받아 통일왕국의 왕으로 33년을(삼하 5:1-5), 이렇게 총 40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첫 번째 기름부음에서다: 하나님은 왜 10대 후반에 -오늘로 하면 대학 1학년쯤이다- 불과한 자를, 아무 것으로도 검증된 게 없고, 그 어떤 자격이나 조건도 없어 보이는 무명의 양치기 소년을 이스라엘 두 번째 왕으로 부르시는 것일까.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첫 번 기름부음을 받는 사무엘상 16장을 전후한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눈에 찾아진바 된, 그리하여 사울의 뒤를 잇는 통일왕국의 왕으로 세워지는 이유들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비록 십대 소년이었고 양치는 목동이었지만 골리앗 앞에 나아가기 이전, 이미 그는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나 반복되는 시골(베들레헴)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적당히 해치우는 식으로 일하지 않았다. 양들에게 생명을 걸만큼 충성했다는 뜻이다. 골리앗의 이마에 물매돌이 박히게 하는 실력을 생각해 보자(삼상 17:49). 그는 무수한 연습을 했을 것이다. 시간만 나면 그는 목표물을 정해 놓고 물매를 던졌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전혀 딴 방향으로 돌이 날아가서 떨어지곤 했지 싶다. 어느 때는 양의 머리에 돌이 날아가 양이 뇌진탕으로 쓰러져 그날 밤 양고기를 먹는 행운(?)도 있었을 것이고, 오늘 식으로 말하면 유리창도 깨뜨렸을 것이고, 아마 크고 작은 물맷돌 사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를 하루, 한 주, 한 달, 1년 …, 마침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기도 하고, 또한 그의 고백에서처럼 “사자와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 그것을 쳐죽였”을 것이다(삼상 17:34-37). 하지만, 그럼 그가 왕이 되려고 그랬는가? 결코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생각하면서 몰매를 연습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단지 성실하게 준비했던 것이 –첫 번 기름부음 받기 이전이다- 때가 되매 쓰이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준비’가 갖는 최고의 가치다. 수금을 연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첫 번 기름부음을 받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예배자로 깊은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삼상 16:23).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을 이새의 집에 보내실 때 아무도 다윗의 존재를 알지 못한, 바로 그러한 십대 후반의 소년의 때에도 그는 날마다의 일상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윗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으신다(삼상 16:13a). 이어 그는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된다(삼상 16:13b).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이것들을 준비하거나, 먼저 기름부음을 받아놓고서 후에 왕위수업을 받은 게 아니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양치기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물매를 던지는 실력을, 아버지의 양을 훔쳐가는 사자와 곰과 씨름할 능력을, 동시에 수금을 타며 연주 잘하는 수준을 넘어 귀신이 물러가는 영감 넘치는 예배자로서의 일상을 겸손과 열정과 성실과 마음을 다해 묵묵히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이 주목하셨다(시 78:70-72). 아버지 이새의 양무리를 이처럼 사랑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목장을 맡겨도 충분하리라 보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오늘을 그의 어제에서 자란 열매로 드러내신 것이다. 이 어찌 다윗만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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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0
  • [장시웅 교수] 전도의 거룩한 부담
    고전 9 :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바울은 전도의 거룩한 부담감을 가졌다.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핍박하던 사람이 가장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 고백했다. 또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전도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바울은 화가 있을까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전도하다 사소한 어려움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든 적이 있었다. 대학 신입생을 면담하면서 복음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 학생들의 관심과 종교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복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그런 소문을 듣고, 교수님, 종교편향 아니냐고 은근히 나를 압박했다. 나는 그 후로 조심스러워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생겼다. 그런데 지난 5월에 교회에서 행복축제(전도축제)를 진행하면서, 세 분의 목사님을 모시고 전도 동력화 집회를 했다. 한동안 전도가 조심스럽고, 전해도 잘되지 않아 움츠러들어 있었는데, 3600여명을 전도축제에 초청했던 목사님의 간증을 듣고 도전이 되었다. 그 목사님께서는 전도 작정 시간에 자기의 능력을 넘어선 인원을 작정하고 기도하라고 도전했다. 그래서 나도 50명을 행복축제에 초청하기로 작정하고 기도했다. 한동안 학생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워 교회에 대해, 복음에 대해 이야기를 못했는데, 전도 작정한 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이라 생각하니 더 큰 부담이 되었다. 마음이 급해지니 학생들에 대한 부담보다는 전도 작정에 대한 부담이 더 커졌다. 실습시간에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수시평가, 중간평가의 결과를 놓고 개별학생 한명 한명을 면담하며, 수강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행복축제에 초청하였다. 그 중 15∼20여명의 학생들이 교회에 오기로 약속하였다.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연락이 안 되는 학생도 있었고, 여러 가지 핑계로 못 온다고 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부담감을 가지고 기도하고 노력한 결과, 오기로 약속하지 않은 학생도 4~5명이 추가되었다. 또, 기독교수연합회에서 개최한 대학입시진로상담회에 대한 홍보방송을 듣고 나에게 전화를 했던 불신자인 부모님과 학생 3명을 초대했는데 참석했다. 50명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하루에 19명을 교회에 초대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들 중 2명이 새 가족 교육을 받고 교회에 출석 중이며, 여러 명이 교회에 와서 새 가족 교육을 받기로 약속하였다. 거룩한 부담감 덕분에 다시 한 번 전도의 문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감사했다. 어려움이 있고 부담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간절한 기도의 결과는 늘 풍성한 은혜로 채워진다. 이런 점에서 전도와 기도는 거룩한 부담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거룩한 부담감이 우리를 하나님의 풍성함 가운데 인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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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26
  • [김광영 장로] 개혁을 돕는 힘
    지금, 개혁의 시대인 것처럼 들린다. 온통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 같다. 정부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대학도 그렇다. 그리고 교회도 그렇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기관들이 개혁만 외친다. 마치 “개혁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인식아래 어디라도 예외가 없이 그 길로 간다. 물론 전에도 있은 말이건만 새롭게 맞이하는 것 같다. 기업은 신 기술개발과 융합을, 또는 합병이나 인수 통합을 전제하는 M&A와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조직에 변화를 주는 개혁을 시도하여 체중을 조절하기도 한다. 대학도 취업을 비롯한 진로선택의 폭을 넓히는 커리큘럼을 조정하고 유사학과 또는 경쟁력이 약한 학과의 통폐합을 하고 있다. 이것도 부족하면 담을 넘어 대학 간 합병을 통하여 답을 얻으려 한다. 정부도 새롭기를 희망하며 조직 재정비를 하는 내치뿐 아니라 국제간 서로의 이익을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개혁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적대국이라도 손을 잡는 시대를 벌써 만들었다. 과거의 묶인 명분보다 실리를 찾아 국가원수가 직접 나서서 교역의 문을 열고 상호 이익극대화를 위해 FTA교섭하는 실정이다. 따지고 보면 재화에 대한 욕망은 인간뿐 아니라 어디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이익의 극대화는 자본의 축적을 통한 거대주의를 추구하고 거기서 나오는 힘과 지위의 확보라는 유리한 변화를 목표하는 것이다. 이 개혁 또는 변화의 가치로 이러한 욕구충족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갖가지 미화된 이름으로 개혁을 시도하는 밑바탕에는 수량적인 인간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 바울은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하였다. 이런 때에 교회도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맞아 교회가 개혁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지도급인사들의 표현은 물론 관련세미나와 여러 형태의 프로그램이 이미 진행되고 또 강단의 외침도 많아졌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 개혁을 추구하는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른가? 물량으로 표시한다면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었는가? 성경 롬 12장의 말씀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입어라” 한 것같이 세상과 구별되게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가치관을 바로 가르쳤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교회를 세웠는가? 자문하여 보았지만 겉모습에만 머무른 것 같다. 일본의 지성 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는 “삶은 은총이다. 자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타력으로 풀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내 안으로 쏟아지는 어떤 힘 때문에 나의 됨됨이가 영글어지고 나의 됨됨이가 짜여 나온 것”이라고 갈파했다. 바로 성령의 힘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중심의 탐욕에 빠져 세상의 가치와 목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합리성과 이상이라는 것만 주장하는데 그 또한 얼마나 제한 적인가? 이런 까닭에 신학자를 비롯한 이 땅의 성직자들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이 없으면 때때로 자고하고 교만하고 투기도 하다 실패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 스스로는 완전할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곧 성령의 역사로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도 가끔 성화되었다며 완성된 사람처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하지만 완전의 단계에 이르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 경지는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성직자도 천하의 도덕선생도 사람을 구별하고, 또 차별하여 나누고, 만날 사람,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들을 그 심중에 정하게 마련이다. 결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사망의 골짝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백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날에도 그렇게 고백하며 회개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변화나 개혁은,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고백을 쉬지 않을 때만 가능하도록 창조하심 같다. 이러하거늘 누가 자신을 개혁자라라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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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12
  • [강규철 장로] 이런 삶도 있습니다
    남미의 조그만 나라인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에서 빈민가의 어린이와 외항선원들을 위해서 오늘도 하루 종일 일하고 있는 한국인 부부가 있습니다. 그는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개밥을 주는 것부터 농장의 잡일을 시작합니다. 9시에 아침을 먹습니다. 그리고 또 농장 일을 합니다. 1시에 점심을 먹고 잠깐 낮잠을 자고 다시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저녁 8시 경에 저녁을 먹고는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합니다. 그의 농장에는 사과, 옥수수, 오이, 고추, 부추, 상추, 깻잎 등 여러 가지 농작물을 수확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콩나물도 재배하여 이것들을 팔아 아이들에게 장학금도 주며 자급자족하며 교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16년 전에 잘나가던 해운회사의 이사직을 버리고 험난한 외항선원 선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왜나면 그곳에서 배가 정박하면 선원들이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 결과 현지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 아이들은 결국 버림받아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상황을 보고 이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헌신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는 사비를 털어 농장 부지 13,000평을 구입하여 선원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목욕탕, 찜질방, 축구장 등을 만들어 건전한 여가시간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세워 한국계 아이들과 빈민가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한 것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그를 떠나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했습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악착같이 일한 그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도 될 터인데 타지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난날 그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6~70년대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을 그대로 도입하여 시행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하게 하여 이 아이들이 철저히 성경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교육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교회에 오면 라면을 끓여주거나 초코파이를 주어 교회에 오는 것이 즐거워지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오는 길에 교회를 들렀다가 집으로 갑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교회가 좋다고 합니다. 한번은 교회 곁에 있는 빈민가에 살고 있는 꼬마 5형제가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악동들이 너무 까불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어서 이들이 교회로 오는 대신 선교사님이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성경구절을 외우면 과자나 사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아이들이 성경을 열심히 외우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성경말씀이 이들을 변화시켜 지금은 그 부모와 형제, 그리고 이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며 정상적인 직장을 가지게 되어 빈민가를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빈민가를 마음대로 들어 갈수 있는 한국인은 이 선교사외는 없습니다. 왜냐면 빈민가에는 마약굴과 창녀촌이 공존하는 우범지역이라 현지인조차도 꺼려하는 곳입니다. 한번은 다른 선교사님이 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고 돌아가다가 교통신호를 받고 잠깐 정차한 순간에 강도를 당해 소지품을 털려버린 적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도 초창기에는 수시로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주변에 3군데의 빈민가가 있는데 교회 봉고가 들어가면서 경적을 울리면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워줍니다. 선교사님은 당연히 그 부모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할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난 15년간 주일학교를 통해 양육받아 이제 교회의 청소년 리더가 되어 주일학교의 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청소년이 20명 가까이 됩니다. 놀라운 것은 이 교사들이 자기 수입의 십일조를 바쳐 70명이나 되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간식을 매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부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30여명의 청소년들을 위한 수련회를 2박3일간 진행하였는데 아주 진지하게 참여할 뿐 아니라 매일 밤 새벽 2시까지 뜨겁게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 땅의 미래를 위해 키우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이제 하나님이 두렵다고 합니다. 왜나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을 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70세가 된 지금도 그는 교회 2층을 직접 짓고 있습니다. 그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선원과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는 이명규 선교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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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 [김기현 목사] 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
    매주 수요일이면 저를 찾아오는 형제가 있습니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저랑 일대일로 잠시 만나 책을 소개해주고, 읽은 것에 대해 몇 가지 코멘트를 해 줍니다. 그 중간에 이런저런 신앙적 의문을 묻기도 하지요. 이번에는 “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라고 물어옵니다. 그리스도인이 거듭났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이 지탄하는 이들, 명백히 부정한 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고민이 된 게지요.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다음 몇 가지 이유로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구원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엡 2:8)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만의 고유한 결정입니다. 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다르며, 하늘의 시각과 땅의 관점이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멀며, 순간과 영원이 같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지성과 영성으로 성서를 근거로 미루어 짐작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 틀리지 않는다는 것도 맞습니다. 인간이 다 틀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을 비하하는 위험한 반대편 오류에 봉착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타인의 구원을 가늠할 위치에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셋째, 불건전한 질문입니다. 누군가 성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뭘 하고 계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지.” 실제로 지옥 간다는 악담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정신 차리라는 깨우침의 말입니다. 그런 물음은 백해무익입니다. 알 수도 없고,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하나 없고, 간절히 대답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넷째, 건강한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건강한 일이란,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 곧 우리 각자에게는 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남을 돕기 위해서 그가 어떤지를 물을 일입니다. 타인의 구원 운운에 몰두하는 것은 높아지고자 하는 심리로, 보이지 않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탓이라면 지나친 걸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 나를 두고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다른 이를 보면서, 저런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냐, 어떻게 저렇게 행하고, 살면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 라며 혀를 끌끌 찰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느 곳에서는 그런 나를 두고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런 사람도 구원받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분에게 가는 날, 혹은 그분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는 묻지도 않을 것이고, 알려줄 필요도 없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딴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나 같은 놈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도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예서 멈추면 안 되지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신 주 은혜 놀라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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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15
  • [남송우 교수] 고통의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시대를 명명하는 다양한 별칭들이 난무하고 있다. 위험사회, 개인주의 사회, 후기자본주의 사회, 신자유주의 시대, 지식정보사회, 인공지능의 시대, 다원주의 사회, 대중문화의 시대, 4차 산업시대 등 변화하는 사회 현상에 따라 다양한 명명들이 쉼 없이 출몰하고 있다. 사회 현상을 예리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규명해보려는 학자들의 노력은 일견 그 사회의 특징과 현상을 적확하게 규정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이 사회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좀 다른 차원의 시선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말세라고 명명한다. 이 말세에 대해 사도 바을은 다음과 같이 그 특징을 설명한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 ; 1-5) 2000년 전에 살았던 사도 바울 이 시대를 보는 눈은 참으로 놀랍다. 그는 개인주의 사회나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은 정확하게 마지막 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의 삶을 살아갈 것을 예언하고 있다. 지금의 개인주의는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결혼과 가정까지 부정하는 혼족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혼밥이 일상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자기애의 극단적인 한 형태이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 점점 더 심화․확대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사람들은 돈을 사랑할 것을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후기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한 지도 오래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공산사회까지 몰락함으로써 지금 지구촌은 온통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모든 국가나 개인은 오직 돈을 더 많이 벌고 모으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이다. 그래서 돈이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시대인 듯 착각하고 모두들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인식할 정도로 돈이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 풍토로 자라나는 세대들 역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가 되어버린 지도 오래되었다. 말세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사랑과 돈 사랑에 빠짐에 따라 그 삶의 형태는 근본적으로 타자를 배려하거나 생각하는 삶을 지향할 수가 없다. 타자가 안중에 제대로 들어올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이 확보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이들의 삶의 형태는 자기 자랑, 교만 훼방, 거역, 무정, 원통, 참소, 무절제, 배반, 조급, 자고 등의 행각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행위들의 범람은 한 마디로 짐승의 차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도 바을은 이러한 상태를 ‘사나우며’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사실 한글 번역과는 달리 영어 번역은 'brutal'로 번역하여 잔인하고도 짐승같은 의미로 옮겨놓고 있다. 이런 결과로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돈을 사랑하여 돈을 많이 모으게 되면, 자기 사랑에 빠진 인간은 결국 자기를 위해 쾌락을 좇아갈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 사실이 훤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즐거움을 좇아가는 이 삶이 결코 즐거운 삶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세태의 삶을 ‘고통하는 때의 삶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이 같은 삶을 사는 자들로부터 돌아서라 라고 명령한다. 돌아서는 첫 걸음은 자기사랑과 돈의 사랑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나는 길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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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4-28
  • [이선복 교수] 부활 한국(復活韓國)
    “감옥에 가지 않는 총장이 되게 기도해 주십시오”. 취임을 며칠 앞둔 某국립대학 교수님이 1년전 기독모임에서 한 인사말이다. 또 3년전 某기독대학이 前총장을 횡령 혐의로 고발하는 일이 부산에서 발생하였다. 충격적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지도층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다. 심지어 이 나라의 시스템은 최근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을 탄핵, 구치소에 수감까지 하였다. 임기말 레임덕을 넘어, 대부분의 전직 대통령이 수난을 경험하는 불행의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 뇌물에 대한 법리 개념의 시시비비를 넘어 관련 사태로 기업 CEO가 구속되는 등 지금 대한민국은 너무나 큰 사회적 비용의 부담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다. 이 나라의 병(病)인가? 사순절(四旬節) 기간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셨듯이, 이 나라도 심한 열병을 앓고 있다. 진보와 보수, 촛불과 태극기의 갈등이 너무 심하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교회 안에 2개로 갈라진 성도, 목회자의 모습이 보인다.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조차 각기 다르다. 설교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심지어 심한 욕설과 공격적인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에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SNS 문화가 또 하나의 열병을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네 눈속에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마7:3-5)”. 온 국민이 한번 더 신중히 고민하며 행동에 옮기는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생산할 뿐이다.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발표한 우리나라 2016년 회계 적절성에 대한 국제 경쟁력 평가는 61개국 중 최하위인 61위를 기록했다. 2011년부터 IFRS(국제회계기준)을 도입, 회계 선진국 진입을 표방하던 대한민국이 아니었던가? 부끄럽고 창피하다. 나 스스로 분식회계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도망치던 세월호 선장의 모습이 내 안에 감추어 져 있지는 않은지 먼저 돌아보며, 공동체의 비전과 정직을 함께 도모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진정한 개혁은 그 어떤 큰 목소리의 주장보다도 내 자신에 대한 반성과 희생, 회개, 그리고 실천이 먼저 선행 될 때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아가서2:10-13)”. 곧 부활절이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장사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산 소망의 역사요, 능력의 역사이다. 온 국민이 부활 한국(復活韓國)을 향해 함께 달려갔으면 좋겠다. 분노와 지탄, 공격의 언어보다는 희망과 화합, 존중의 언어를 전달하는 메시지가 많이 선포 되었으면 좋겠다. 비선실세(秘線實勢)의 존재가 얼마나 큰 아픔을 주었는지 교훈으로 삼되, 국민의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달려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이며 신뢰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9가지 열매이다. 마르틴 루터와 칼뱅에 의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진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의 부족한 것을 한번 더 돌아보며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변화되어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고, 또 새로운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가 선출될 수 있도록 간구해 갔으면 한다.
    • 오피니언
    • 정론
    201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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