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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원평 교수]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동성애 확산과 합법화를 막기 위한 사역을 하다보면 몇 가지 비판을 듣는다. 첫째, 정치적 편향성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번에 대법원장 후보자를 반대하는 운동을 할 때에도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우도 좌도 아니며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이번 대법원장 후보자도 동성애 관련 문제가 없었다면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동성애 반대자 중에는 우파와 좌파가 거의 반씩 있기에, 동성애 반대 활동을 할 때에 정치색을 띄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가인권위의 동성애 옹호 활동, 동성애 옹호 입법, 교육, 판결을 막으려면, 어쩔 수 없이 정부, 국회, 법원을 향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의견은 고려되지 않는다. 서구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를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법과 제도들이 막지 못하여 자녀들은 학교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정상이라는 교육을 받으며, 기독교 윤리관을 갖고 공공장소에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잃어버리고 고통을 당하고 있다. 서구를 바라보며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깨어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둘째, 차별은 하나님의 사랑에 어긋난다는 비판이다. 나도 동성애자를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차별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차별에는 나쁜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미도 있다. 도덕, 양심, 종교,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 비판은 정당한 차별이다. 동성애자는 물론 모든 사람에 대한 부당한 차별은 이미 현행 법률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을 만들면 정당한 차별을 포함한 모든 차별이 금지된다. 그런데 남녀, 장애 등에 관한 정당한 차별이란 있을 수 없기에 남녀, 장애 등은 차별금지사유가 될 수 있다. 반면에 동성애, 중독 등에 대한 정당한 차별은 존재하기에, 동성애, 중독 등은 차별금지사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만들면 정당한 차별이 금지됨으로써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 견해, 양심, 학문, 표현, 종교의 자유 등이 제한되고, 학교에서조차 동성애를 정상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을 금지하는 동성애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이다. 셋째, 반동성애 사역만 하고, 약자보호,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등한히 한다는 비판이다. 나도 약자보호, 공의 등이 중요한 기독교적 가치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까지 할 시간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약한 몸으로 교수로서 해야 할 일을 한 후에, 남은 모든 시간을 쏟아 반동성애 사역에 헌신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부디 뒷짐진 채 비판만 하지 말고 함께 동역해 주길 간곡히 호소한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일이 동등하게 귀한 것이기에 상대방을 존중하며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대부분 동성애 사역단체들은 5년 이내의 신생 단체로서 교회의 후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동성애 사역자들이 자신의 시간, 재능, 돈을 써가며 헌신하고 있는 실정을 잘 알기에, 그들의 헌신을 뒤에서 비판을 할 때에 마음이 아프다. 동성애 옹호자들은 동성애 사역자들이 편협한 마음을 갖고 동성애자에 대한 사랑과 긍휼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모두 근거가 없는 모함이다. 실제로는 대다수 동성애 사역자들이 건전한 신앙심을 갖고 약자를 향한 긍휼함을 갖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동성애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가 분열되어 하나가 되지 못하면 결코 이 싸움을 이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 옹호자들은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다양한 거짓을 퍼트리고 있다. 서구 교회는 분열이 되어 동성애 문제를 막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따르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어서 순결한 믿음을 갖고 거룩한 삶을 다음 세대에 보여 주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이 싸움을 반드시 이길 것을 확신한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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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10-17
  • [성인심 사무총장]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라'
    지난 2016년 6월 23일, 삶의 편리라는 명분아래 신고리5·6호기는 원자력안전위원회 9명 중 7명 위원의 찬성으로 건설허가를 받았다. 건설승인 절차는 비민주적이었다. 한 번씩의 공청회와 설명회가 끝이었다. 건설된 신고리5‧6호기 인근 주민은 물론이고 30km 반경에 거주 중인 부산, 울산, 경남 380만 명 주민과의 사회적 합의가 전혀 없었다 전세계가 강화하고 있는 원전 안전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 결정이었다. 지난 6월 19일, 고리1호기 영구정지 기념식에서 문재인대통령은 ‘신고리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도출하겠다.’라고 발표한 후 ‘신고리5·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현재 신고리5·6호기 건설에 대한 공론화가 진행 중에 있으며 건설 중단과 건설재개에 대한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신고리5‧6호기의 공정이 30% 정도 진행된 상태에서 건설을 중단할 경우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건설 기업의 경제적인 손해, 노동자의 일자리 문제, 지역 주민들의 손실, 그리고 전력 생산 감소와 전기료 상승에 따른 국민의 부담이 발생할 것에 대한 우려가 있음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게 될 경우 그 피해와 경제적인 손실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가장 안전하다고 했던 후쿠시마도 지진, 쓰나미라는 자연의 위력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진으로부터 안전하다던 우리나라도 2016년 한반도 지진 관측 사상 가장 강력한 5.8 규모의 강진이 경주에서 발생함으로써 결코 지진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직도 그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핵발전소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현재 핵발전소 지역 주민들이 겪고 있는 갖가지 피해와 주민간의 갈등으로 인한 지역의 위기 등의 현실도 깊이 헤아려야 한다. 지금 언론들은 신고리5·6호기 건설을 중단하면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기고 전기요금이 폭등하게 된다는 등의 거짓정보를 국민에게 보내고 있다. 최근 5년간 최대 전력 발생 시에도 공급 예비율은 최소 8% 이상을 유지하고 있고, 전력소비량도 늘지 않아 가동되지 않는 발전소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2017년 7월 폭염에도 전력설비 예비율은 34%나 여유가 있었다. 과도한 전력 수요 전망이 빗나가고, 전력소비증가율은 줄어들거나 정체된 추세에 있다. 전력공급은 충분하므로 신고리5·6호기는 지을 이유가 없다. 전기요금 폭등도 마찬가지다. 정부에서도 2022년까지 탈원전으로 인한 전기요금 인상은 없을 것이라 발표하였다. 신고리5·6호기를 건설하지 않고 LPG 발전으로 대체한다면 가구당 약 300원의 전기요금이 증가를 예상한다. 민간연구소인 현대경제연구원은 203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0%로 올리고, LPG 발전소 가동률을 60%까지 확대하면 2030년 기준으로 약 월 5천 원 정도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신고리5‧6호기 건설 중단과 탈원전으로 인한 비용부담은 우리의 우려와 다르게 미미하다. 또, 핵발전소를 가동하면 발생하는 핵폐기물에 대한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들어 내는 쓰레기와 달리 핵폐기물은 치명적인 방사능 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 폐기물의 방사능 성질이 없어지려면 10만년 이상 인간, 동물, 식물로부터 완전히 격리하여 보관해야 하며 영구적으로 특별관리가 필요한 위험한 쓰레기이며 전 세계적으로 고준위 핵폐기물에 대한 처리는 아직도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기존의 핵폐기물 저장공간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되어 더 이상 핵폐기물을 처분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신고리5·6호기 건설은 핵폐기물과 모든 위험을 미래세대에게 떠넘기는 무책임한 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창조세계의 가장 큰 위협요소가 핵발전소가 되고 있다.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만들어낸 핵발전소가 지금의 우리 그리고 미래세대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하나님의 처음 그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보존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주신 이땅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고리5‧6호기를 백지화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며 명확하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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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9-25
  • [강규철 장로] 성도님들은 행복하십니까?
    요즘 일부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지나친 대립을 하다가 법정 싸움으로 까지 번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장로님들은 목사님이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나가라고 하고 목사님은 위임의 권한을 주장하여 버티면서 이전투구를 하는 동안 성도님들도 패거리로 나뉘어 상호 비방하다가 실망하게 되고 상처받은 마음으로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나 진리파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과 밥그릇 싸움이라는 것을 성도님들은 알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분에 넘치는 성전 건축으로 인해 주일 헌금의 상당액이 은행 이자로 지출됩니다. 정말 힘들게 일하며 번 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것이 교회 건물 유지와 이자로 상당액이 쓰여 진다면 성도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본 교회 성도님들이 행복하다고 생각 하십니까? 혹시 성도님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당회가 의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회의 분쟁과 갈등이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집안일보다 교회 일을 우선하시는 성도님께 가정으로 돌아가 자녀들을 돌보며 가정의 행복을 지키도록 권면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행사가 너무 많고 그에 동원되는 성도님들의 일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특히 주부들이 교회 행사로 인해 자녀 양육과 가정을 소홀히 하여 생기는 문제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목사님들께서는 성도님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그리고 빠듯한 생활비를 아껴서 내는 헌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교회 헌금봉투의 종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 보신적은 없습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것도 모자라 수많은 명목의 헌금 봉투를 받는 성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습니까? 혹시 당회가 어떤 사역을 결정할 때 성도님들의 입장과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성도님들은 주일날이 기다려지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위로받고 한 주간의 지친 영혼이 회복됨을 체험 하고 싶습니다. 성도님들은 본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평안함을 느끼고 싶어 합니다. 성도들 간의 포근한 사랑으로 피곤한 심신이 재충전되길 소원 합니다. 힘들고 좌절될 때 찾아온 목사님의 따뜻한 위로의 기도를 받고 싶어 합니다. 사회에서는 별 볼일 없이 천시 받고 있지만 그래도 교회에서는 따뜻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합니다. 왜냐면 성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이며 본향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교회가 성도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기도 하지만 부담과 압박감을 더 많이 주며 때로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성도님들은 그들의 가정이 신실한 믿음의 가정이 되길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들의 자녀가 주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어린자녀들에게는 부모의 사랑의 손길이 날마다 필요합니다. 주일은 온 가족이 함께 손잡고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함께 어울려 한 주간을 돌아보는 사랑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자녀들이 좋은 교회를 다니고 좋은 목사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 합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많이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도 바칩니다. 자기 양떼를 위해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자존심, 사소한 욕망,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고 사랑과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영적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성도들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아름다운 교회를 섬기면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제는 교회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건전한 신앙생활과 믿는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진지하게 의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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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9-11
  • [송시섭 교수] 4차 산업혁명시대속의 교회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세상과 동떨어져 ‘자연인’으로 살 수 없는 우리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 작은 휴대폰을 매만지며, 모든 삶의 순간들을 그것에 몰입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할 때 마다 우린 사회발전에 종속된 개인에 불과함을 느낀다. 얼마 전 만난 청년 한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한 고민은 그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공통된 고민이 아닐까 한다. 근본적인 세계관의 차이, 이질적인 가치관의 압도 등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고통과 괴리감은 그저 우리가 감당해야할 고난이며 거쳐 가야 할 과정인가.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교회와 성도들의 세상과의 단절과 소외의 산물인가. 이런 오랜 세계관적인 고민들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채 우린 ‘4차 산업혁명시대’(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를 맞았다.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처음 언급되었다는 이 표현은 불과 1년이 지난 지금 온 세상의 화두가 되어 있다.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시대를 연 3차 산업혁명(제1차 정보혁명)은 이제 ‘융합’과 ‘연결’이라는 키워드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을 연결해가고 있다. 이른바 제2차 정보혁명의 시작이고, ‘초연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초연결(hyper-connection, 超連結)은 자연스럽게 빅 데이터(Big Data)의 축적을 가능케 하고 이는 이른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초지능’(super-intelligence, 超知能)을 등장케 했다. 온 사회를 뒤덮고 있는 4차 산업혁명시대의 메아리가 우리 성도들의 귀에 울려 퍼지고 있지만 교회는 각 산업혁명의 시기마다 그랬던 것처럼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아닌가. 초대교회의 외침이, 종교개혁의 명제들이 ‘원형 그대로만’ 반복되고, ‘너희는 저렇게 들었으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론이 오늘 이 자리에서 구현되지 않는 한 우리 교회는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사회와 분리되고 자칫 퇴행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그건 아마도 시대정신과 사회변화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성경의 진리를 그 시대상황에 맞게 새롭게 재편하고 재해석하는 길일 것이다. 교회역사를 돌이켜보면, 플라톤 철학을 교부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스콜라철학으로, 인문주의를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성경에 감춰진 새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었던 과거의 선배들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 시대의 슬로건인 ‘초연결’이라는 개념은 교회내 순환형, 쌍방향의 성도간 교제(communion)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될 것이고, ‘초지능’은 영적지능(faith-inspired intelligence)의 향상을 통한 집단영성의 확대를 이루어줄 것이다. 카톡이나 밴드를 통한 성도간의 나눔, 전문가 평신도에게로 열려진 강단, 직분의 개념을 넘어서 은사중심의 자발적이고 폭 넓은 참여와 의사결정, 토론과 질문을 통한 사회적 이슈의 성경적 해석, 지역사회와 보다 밀착적인 활동의 발굴 등을 통해 지역민들이 들르고 싶은 장소, 이웃들이 머물고 싶은 공간, 사회인들이 공감하는 주제를 공유하는 거점으로 교회가 새롭게 거듭날 수 있게 되리라 생각된다. 진리는 불변이 아니라, 일관성에서 그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 새 포도주가 새 부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 부대가 새 포도주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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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8-28
  • [박철 목사] 예수의 현재성
    교회와 예수그리스도의 관계를 다시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교회는 예수의 무엇이며 또 예수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떤 것인가.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요 예수는 그 머리라 했다. 이 내용은 바울의 글에서 바울의 표현을 빌린 부분이다. 예수의 말씀으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제자의 요구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이 주는 암시를 기독교가 해석을 해야 하는데 기독교는 예수의 말씀에는 근접을 삼가고, 바울의 형편에도 가까이 가는 것을 금기로 삼고 있으니 문제가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정면으로 해석하면 교회와 메시아 예수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대속 죄의 의미일 때 신자(교회)의 십자가는 대속 죄의 회답의 십자가이며 복음 선교의 십자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생애의 함축인 십자가로 예수와 신자의 관계를 세웠을 때 혼선이 없는, 아주 투명한 논리가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역사 위에서 고전을 하게 된 것은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씀의 의미(내면의 요구, 상징으로의 문학적 표현 등등)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대서 오는 결핍이 된다. ‘예수 이름으로’는 ‘예수의 예수로’ ‘예수의 자격으로’ ‘예수의 권위로’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예수 이름으로는 ‘예수 인격의 현재’가 동원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 다시 정리하면 ①교회는 예수의 몸 ②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보았다 ③예수 이름으로가 지니는 정상적인 가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를 마음에 간직하고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현재를 대변하고 대신해야 한다는 당위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현재로까지 교회가 발전(성장)해 주지 않는다면 교회는 역사의 무대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소멸되어 갈 수 있다. 지금 교회가 지닌 도덕적 가치는 제1급에 해당하지 않는다. 인류가 쟁취한 휴머니즘의 요구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독교의 도덕적 성취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선진형 NGO(비정부기구) 들의 Human Story 만큼의 설득을 따라잡지 못하는 수준으로 세상을 더 이상 감동시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골고다가 일회성 사건이 아니고 오늘의 역사의 교회 현장에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일어나야 할 사건으로의 십자가는 교회가 보존해야 한다. 교회의 십자가라고 하니까 예배당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그것이거나 목걸이 팔찌용 장식품이거나 가끔씩 속죄한다면서 십자가 틀을 끌고 돌아다니면서 시각성 시위를 하는 그런 따위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희생이요 대속이며 용서이고 대신 살아줌이다. 내가 너를 대신하고, 또 네가 나를 대신한다는 생명의 일체(일치)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교회가 이기심을 발휘해서는 안 된다. 타종교나 세상의 가치들을 경멸해서도 안 된다. 그 이전에 교회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예수처럼 무덤도 남길 수 없는 존재까지임을 말해야 한다. 교회가 예수의 역사 현장에서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 또 그만한 자신감을 가진 품위 있는 기독교(교회)가 가능한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예수와 만남에서 성취하는 것이 교회요 신자(求道者)이다. 세상 종교에서는 가는 곳까지 가는 것이 되지만 예수는 만나야 만나는 것이다. 기독교가 하루 빨리 하늘을 떠나 땅(人間)에 오시는 이의 뜻을 알아야 하는데, 교회가 하루 빨리 예수 십자가의 그 현장이어야 하며, 십자가는 교회의 현재에서 영원한 진행형 사건임을 교회가 배워야 하는데, 이 땅의 교회들이 예수 하나 십자가에 메달아 놓고 그걸 쳐다보면서 "예수여! 아프죠, 고통스럽죠!" 해가면서 마치 문지방 위에 메달아 놓은 명태 대가리(미신, 민간 종교 사람들이 만들어 둔 부적과 같은 것) 같은 것이 기독교의 십자가라면 그것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예수의 현재가 바로 너와 나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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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8-07
  • [가정호 목사] 사랑하려고 몸부림치는 사람, 존재자체가 사랑인 사람
    "사랑은 ~~~ 해야 한다" ~을 해야 하고, ~도 해야 하고(고전13장)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사랑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나면 그 사랑에 균열이 생기고 심지어 권태가 성장하면 언약도 내팽개친다. 사랑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랑에 실패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의무가 되어 시달리다보면 사랑의 대상을 증오하기까지 한다는데 큰 의문이 있는 것이다. 왜 사랑에 실패할까? 고민을 많이 해보아야 한다. 그게 가정이든, 목양이든, 어떤 관계이든 사랑에 실패하면 그것으로 부터 오는 좌절감과 낙심이 크다. 그런데 '사랑은 ~~해야 한다'는 성경본문을 뒤집어서 보면 이렇다. 오래 참음, 그 자체가 사랑이다. 친절함, 그것이 사랑이다. 시기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자랑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교만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무례히 행치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자기유익을 구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쉽게 성내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한다면서 수시로 성내는 것은 자기 속임이며 실패하는 사랑 사랑이다. 원한을 품지 않음, 그게 사랑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음, 그것이 사랑이다. 관계 속에서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이렇게 많다. 이런 것들 중 하나 하나 몸에 배어 나타나면 상대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을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데...' 하는 강박을 버리고 위에 것들을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면 된다. 그런데 그 순종과 실천이 자기 힘으로 절대로 안 된다. 되는 듯 하다가 내 팽개친다. 언제나 실패한다. 그래서 사랑은 오직 성령의 사역이다.1) 어느 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의 연합"이 성숙해지면 사랑의 요소들을 실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 스스로 놀란다. '아! 내가 <사랑-사람> 이 되었구나'. <사랑-사람>은 자기의 이성이나 감정으로부터 오는 열정으로는 한계가 있다. 언제나 사랑이 바닥치고 사랑이 기근에 시달린다. 사랑이 집을 잃고 여기저기 헤매면서 노숙한다. 방황하는 사랑은 한없이 슬프다. 그러나 부활의 주를 의존하는 의존성이 원만해지면 비로써 자신이 <사랑-사람>되었음을 보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된다. 그것은 쾌락이다. 실패하지 않는 사랑의 지속성은 하늘이 주시는 쾌락이다. 이 쾌락에 맛을 경험하게 되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이 포기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하다. 믿음도, 소망도 사랑을 떠받들어 승리하게 한다. "사랑의 감정이 없어도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장은 이것을 말하고 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성령이 주시는 힘을 의존하여 사랑인 것들,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면 놀랍게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진다. 사랑하면 비로써 사랑스러워지는 것이다. 사랑하면 사랑의 정서가 자라나는 것이다. ------------------- 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언약인 새언약의 일꾼에 합당한 자격을 주셨다. 그것은 문자는 죽음을 가져오는 반면,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고후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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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7-24
  • [김충만 목사] 다윗에게 길을 묻다
    다윗은 그의 70년 생애에서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약관 10대 후반에 예선(豫選)된 왕으로 처음(삼상 16:1-13), 이어 십 수 년이 지난 후 30세에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아 유다지파의 왕으로 7년 반을(삼하 2:1-11), 그리고 세 번째 기름부음을 받아 통일왕국의 왕으로 33년을(삼하 5:1-5), 이렇게 총 40년 동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린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첫 번째 기름부음에서다: 하나님은 왜 10대 후반에 -오늘로 하면 대학 1학년쯤이다- 불과한 자를, 아무 것으로도 검증된 게 없고, 그 어떤 자격이나 조건도 없어 보이는 무명의 양치기 소년을 이스라엘 두 번째 왕으로 부르시는 것일까.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첫 번 기름부음을 받는 사무엘상 16장을 전후한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눈에 찾아진바 된, 그리하여 사울의 뒤를 잇는 통일왕국의 왕으로 세워지는 이유들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비록 십대 소년이었고 양치는 목동이었지만 골리앗 앞에 나아가기 이전, 이미 그는 준비되어 있었다. 언제나 반복되는 시골(베들레헴)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적당히 해치우는 식으로 일하지 않았다. 양들에게 생명을 걸만큼 충성했다는 뜻이다. 골리앗의 이마에 물매돌이 박히게 하는 실력을 생각해 보자(삼상 17:49). 그는 무수한 연습을 했을 것이다. 시간만 나면 그는 목표물을 정해 놓고 물매를 던졌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전혀 딴 방향으로 돌이 날아가서 떨어지곤 했지 싶다. 어느 때는 양의 머리에 돌이 날아가 양이 뇌진탕으로 쓰러져 그날 밤 양고기를 먹는 행운(?)도 있었을 것이고, 오늘 식으로 말하면 유리창도 깨뜨렸을 것이고, 아마 크고 작은 물맷돌 사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를 하루, 한 주, 한 달, 1년 …, 마침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기도 하고, 또한 그의 고백에서처럼 “사자와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 그것을 쳐죽였”을 것이다(삼상 17:34-37). 하지만, 그럼 그가 왕이 되려고 그랬는가? 결코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생각하면서 몰매를 연습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단지 성실하게 준비했던 것이 –첫 번 기름부음 받기 이전이다- 때가 되매 쓰이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준비’가 갖는 최고의 가치다. 수금을 연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첫 번 기름부음을 받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예배자로 깊은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삼상 16:23).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을 이새의 집에 보내실 때 아무도 다윗의 존재를 알지 못한, 바로 그러한 십대 후반의 소년의 때에도 그는 날마다의 일상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다윗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으신다(삼상 16:13a). 이어 그는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된다(삼상 16:13b).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이것들을 준비하거나, 먼저 기름부음을 받아놓고서 후에 왕위수업을 받은 게 아니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양치기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물매를 던지는 실력을, 아버지의 양을 훔쳐가는 사자와 곰과 씨름할 능력을, 동시에 수금을 타며 연주 잘하는 수준을 넘어 귀신이 물러가는 영감 넘치는 예배자로서의 일상을 겸손과 열정과 성실과 마음을 다해 묵묵히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이 주목하셨다(시 78:70-72). 아버지 이새의 양무리를 이처럼 사랑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목장을 맡겨도 충분하리라 보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오늘을 그의 어제에서 자란 열매로 드러내신 것이다. 이 어찌 다윗만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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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7-10
  • [장시웅 교수] 전도의 거룩한 부담
    고전 9 :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바울은 전도의 거룩한 부담감을 가졌다.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핍박하던 사람이 가장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 고백했다. 또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전도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포기한다. 그러나 바울은 화가 있을까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나도 전도하다 사소한 어려움 때문에 마음이 오그라든 적이 있었다. 대학 신입생을 면담하면서 복음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 학생들의 관심과 종교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복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그런 소문을 듣고, 교수님, 종교편향 아니냐고 은근히 나를 압박했다. 나는 그 후로 조심스러워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생겼다. 그런데 지난 5월에 교회에서 행복축제(전도축제)를 진행하면서, 세 분의 목사님을 모시고 전도 동력화 집회를 했다. 한동안 전도가 조심스럽고, 전해도 잘되지 않아 움츠러들어 있었는데, 3600여명을 전도축제에 초청했던 목사님의 간증을 듣고 도전이 되었다. 그 목사님께서는 전도 작정 시간에 자기의 능력을 넘어선 인원을 작정하고 기도하라고 도전했다. 그래서 나도 50명을 행복축제에 초청하기로 작정하고 기도했다. 한동안 학생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워 교회에 대해, 복음에 대해 이야기를 못했는데, 전도 작정한 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이라 생각하니 더 큰 부담이 되었다. 마음이 급해지니 학생들에 대한 부담보다는 전도 작정에 대한 부담이 더 커졌다. 실습시간에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수시평가, 중간평가의 결과를 놓고 개별학생 한명 한명을 면담하며, 수강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을 행복축제에 초청하였다. 그 중 15∼20여명의 학생들이 교회에 오기로 약속하였다. 막상 날짜가 다가오니 연락이 안 되는 학생도 있었고, 여러 가지 핑계로 못 온다고 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부담감을 가지고 기도하고 노력한 결과, 오기로 약속하지 않은 학생도 4~5명이 추가되었다. 또, 기독교수연합회에서 개최한 대학입시진로상담회에 대한 홍보방송을 듣고 나에게 전화를 했던 불신자인 부모님과 학생 3명을 초대했는데 참석했다. 50명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하루에 19명을 교회에 초대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들 중 2명이 새 가족 교육을 받고 교회에 출석 중이며, 여러 명이 교회에 와서 새 가족 교육을 받기로 약속하였다. 거룩한 부담감 덕분에 다시 한 번 전도의 문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감사했다. 어려움이 있고 부담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간절한 기도의 결과는 늘 풍성한 은혜로 채워진다. 이런 점에서 전도와 기도는 거룩한 부담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거룩한 부담감이 우리를 하나님의 풍성함 가운데 인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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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6-26
  • [김광영 장로] 개혁을 돕는 힘
    지금, 개혁의 시대인 것처럼 들린다. 온통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 같다. 정부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고, 대학도 그렇다. 그리고 교회도 그렇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기관들이 개혁만 외친다. 마치 “개혁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인식아래 어디라도 예외가 없이 그 길로 간다. 물론 전에도 있은 말이건만 새롭게 맞이하는 것 같다. 기업은 신 기술개발과 융합을, 또는 합병이나 인수 통합을 전제하는 M&A와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조직에 변화를 주는 개혁을 시도하여 체중을 조절하기도 한다. 대학도 취업을 비롯한 진로선택의 폭을 넓히는 커리큘럼을 조정하고 유사학과 또는 경쟁력이 약한 학과의 통폐합을 하고 있다. 이것도 부족하면 담을 넘어 대학 간 합병을 통하여 답을 얻으려 한다. 정부도 새롭기를 희망하며 조직 재정비를 하는 내치뿐 아니라 국제간 서로의 이익을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개혁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적대국이라도 손을 잡는 시대를 벌써 만들었다. 과거의 묶인 명분보다 실리를 찾아 국가원수가 직접 나서서 교역의 문을 열고 상호 이익극대화를 위해 FTA교섭하는 실정이다. 따지고 보면 재화에 대한 욕망은 인간뿐 아니라 어디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 이익의 극대화는 자본의 축적을 통한 거대주의를 추구하고 거기서 나오는 힘과 지위의 확보라는 유리한 변화를 목표하는 것이다. 이 개혁 또는 변화의 가치로 이러한 욕구충족의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갖가지 미화된 이름으로 개혁을 시도하는 밑바탕에는 수량적인 인간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 바울은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성경에 기록하였다. 이런 때에 교회도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를 맞아 교회가 개혁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지도급인사들의 표현은 물론 관련세미나와 여러 형태의 프로그램이 이미 진행되고 또 강단의 외침도 많아졌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 개혁을 추구하는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른가? 물량으로 표시한다면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었는가? 성경 롬 12장의 말씀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입어라” 한 것같이 세상과 구별되게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가치관을 바로 가르쳤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교회를 세웠는가? 자문하여 보았지만 겉모습에만 머무른 것 같다. 일본의 지성 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는 “삶은 은총이다. 자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타력으로 풀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내 안으로 쏟아지는 어떤 힘 때문에 나의 됨됨이가 영글어지고 나의 됨됨이가 짜여 나온 것”이라고 갈파했다. 바로 성령의 힘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중심의 탐욕에 빠져 세상의 가치와 목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합리성과 이상이라는 것만 주장하는데 그 또한 얼마나 제한 적인가? 이런 까닭에 신학자를 비롯한 이 땅의 성직자들도 하나님이 역사하심이 없으면 때때로 자고하고 교만하고 투기도 하다 실패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 스스로는 완전할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곧 성령의 역사로만 근본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도 가끔 성화되었다며 완성된 사람처럼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하지만 완전의 단계에 이르기는 어렵다. 누구라도 그 경지는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성직자도 천하의 도덕선생도 사람을 구별하고, 또 차별하여 나누고, 만날 사람,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들을 그 심중에 정하게 마련이다. 결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사망의 골짝에서 나를 건져내랴” 고백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날에도 그렇게 고백하며 회개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변화나 개혁은,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고백을 쉬지 않을 때만 가능하도록 창조하심 같다. 이러하거늘 누가 자신을 개혁자라라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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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론
    2017-06-12
  • [강규철 장로] 이런 삶도 있습니다
    남미의 조그만 나라인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에서 빈민가의 어린이와 외항선원들을 위해서 오늘도 하루 종일 일하고 있는 한국인 부부가 있습니다. 그는 아침 6시에 기상하여 개밥을 주는 것부터 농장의 잡일을 시작합니다. 9시에 아침을 먹습니다. 그리고 또 농장 일을 합니다. 1시에 점심을 먹고 잠깐 낮잠을 자고 다시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저녁 8시 경에 저녁을 먹고는 하루 일과를 마무리 합니다. 그의 농장에는 사과, 옥수수, 오이, 고추, 부추, 상추, 깻잎 등 여러 가지 농작물을 수확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콩나물도 재배하여 이것들을 팔아 아이들에게 장학금도 주며 자급자족하며 교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16년 전에 잘나가던 해운회사의 이사직을 버리고 험난한 외항선원 선교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왜나면 그곳에서 배가 정박하면 선원들이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고 그 결과 현지여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 아이들은 결국 버림받아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상황을 보고 이들을 위해 남은 인생을 헌신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는 사비를 털어 농장 부지 13,000평을 구입하여 선원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었습니다. 목욕탕, 찜질방, 축구장 등을 만들어 건전한 여가시간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세워 한국계 아이들과 빈민가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한 것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그를 떠나 고아 아닌 고아로 성장했습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악착같이 일한 그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도 될 터인데 타지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지난날 그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6~70년대 한국의 주일학교 교육을 그대로 도입하여 시행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하게 하여 이 아이들이 철저히 성경말씀 속에 살아가도록 교육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교회에 오면 라면을 끓여주거나 초코파이를 주어 교회에 오는 것이 즐거워지게 하였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오는 길에 교회를 들렀다가 집으로 갑니다.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교회가 좋다고 합니다. 한번은 교회 곁에 있는 빈민가에 살고 있는 꼬마 5형제가 교회로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악동들이 너무 까불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어서 이들이 교회로 오는 대신 선교사님이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성경을 가르치고 암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성경구절을 외우면 과자나 사탕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아이들이 성경을 열심히 외우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성경말씀이 이들을 변화시켜 지금은 그 부모와 형제, 그리고 이들 모두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으며 정상적인 직장을 가지게 되어 빈민가를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빈민가를 마음대로 들어 갈수 있는 한국인은 이 선교사외는 없습니다. 왜냐면 빈민가에는 마약굴과 창녀촌이 공존하는 우범지역이라 현지인조차도 꺼려하는 곳입니다. 한번은 다른 선교사님이 이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고 돌아가다가 교통신호를 받고 잠깐 정차한 순간에 강도를 당해 소지품을 털려버린 적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도 초창기에는 수시로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주변에 3군데의 빈민가가 있는데 교회 봉고가 들어가면서 경적을 울리면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워줍니다. 선교사님은 당연히 그 부모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할 만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난 15년간 주일학교를 통해 양육받아 이제 교회의 청소년 리더가 되어 주일학교의 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청소년이 20명 가까이 됩니다. 놀라운 것은 이 교사들이 자기 수입의 십일조를 바쳐 70명이나 되는 주일학교 학생들의 간식을 매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부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30여명의 청소년들을 위한 수련회를 2박3일간 진행하였는데 아주 진지하게 참여할 뿐 아니라 매일 밤 새벽 2시까지 뜨겁게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 땅의 미래를 위해 키우심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이제 하나님이 두렵다고 합니다. 왜나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을 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70세가 된 지금도 그는 교회 2층을 직접 짓고 있습니다. 그는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선원과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고 있는 이명규 선교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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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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